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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아리랑
서울근처에 아리랑고개하는 언덕이 있다 李王朝(이왕조)가 虐政(학정)을 펼치고 있던무렵 이언덕 꼭대기에 커다란 소나무한그루가 서있었는데 이곳은 數百年歲月(수백년세월)
處刑場(처형장)이었습니다
몇만명의 死刑囚(사형수)가 이老松(노송)가지에 목이 매달렸고 屍體(시체)는 그곁의 벼랑에 버려졌습니다
罪囚(죄수)중에는 山賊(산적)도있었고 政府(정부)와 의견이 맞지않은 學者(학자) 있었고 李 王朝(이왕조) 一族(일족)의 政敵(정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大多數(대다수)는 虐政(학정)에 抵抗(저항)한 貧民(빈민)이나 惡政(악정)과 不正(부정)에 對抗(대항)한 反逆靑年(반역청년)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한 靑年中(청년중)의 한명이 獄中(옥중)에서 노래하나를 만들어 자기가 아리랑고개로 발걸음도 무겁게 올라갈때 불렀다고 합니다
이노래가 民衆(민중)들에게 알려졌고 그이후로 死刑宣告(사형선고)를 받은자는 이노래를 부르며 자신의기쁨이나 슬픔에 離別(이별)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朝鮮全國(조선전국)의 어느 監獄(감옥)에서나 그슬픈가락이 들리게되었고 이윽고 이노래를 마지막 權利(권리)를 감히 不定(부정)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 아리랑의 序頭(서두)에는 “流刑(유형)과 投獄(투옥)과 民族的屈辱(민족적굴욕)의 오랜 朝鮮民謠(조선민요)----로서
아리랑 아리링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릴고개는 열두굽이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에는 뱔도많고 우리네 가슴엔 愁心(수심)도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을 넘어간다
아리랑고개는 歎息(탄식)의고개 한번가면 다시못오는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二千萬(이천만) 同抱(동포)야 어데있느냐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
에 살아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鴨綠江(압록강) 건너는 流浪客(유랑객)이요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도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歌詞(가사)가 紹介(소개)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노래는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힘들어 北間島(북간도), 러시아 땅으로 떠났던 流浪民(유랑민)들이 넘어야했던 恨(한)맺힌 고개를 恨歎(한탄)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아라랑고개는 實際存在(실제존재)랬던 고개라기 보다는 나라잃고 異國(이국)땅으로 移住(이주)해야했던 유이민들이 넘어야하는 苦難(고난)과 苦痛(고통)의 언덕을 象徵(상징)한다고
볼수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님웨일즈의 “아리랑”의아리랑은 일제강점기 民族恨(민족한)이서린 一種(일종)의 nomad song –노마드송- 인것입니다
“아리랑”이 지니는 抵抗的(저항적)인 側面(측면)은 특히 日帝植民統治(일제식민통치)하에서 갖가지로 表現(표현)되었습니다
살기위해 故鄕(고향)을등진 사람들이, 혹은 祖國(조국)의 光復(광복), 獨立(독립)이라는 큰뜻을 품은 愛國靑年(애국청년)들이 異國(이국)땅으로 떠날 때 民族受難(민족수난)을 代辯(대변)하는
노래로서 불렀던 것입니다
歌詞(가사)도 차례로 새로운 것이 붙여졌고 民族(민족)의 노래로서 널리퍼져 나갔습니다
그러한 아리랑 歌詞(가사)도 백가지가 넘게 存在(존재)합니다
그중에서는 사랑의 하소연이나 猥褻(외설)的(적)인내용도 없지않지만 生活(생활)의 괴로움을 노래하거나 抵抗精神(저항정신)을 담은게 많습니다
우리 民族(민족)을 흔히들 “白衣民族(백의민족)”이자 “恨-한-의民族(민족)” 일컫습니다
이는 우리민족이 유난히도 흰옷을 좋아하고 한맺힌노래를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흰색의 色彩心象(색채심상)은 純粹(순수)와 純潔(순결)이자 神聖(신성)함 高貴(고귀)함의 表象(표상)입니다
하지만 地政學上(지적학상)으로 中國大陸(중국대륙)에 붙어있는 半島(반도)땅이어서 外勢(외세)의 侵略(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世上(세상)의 開化(개화)에 눈감은 封建君主制(봉건군주제)의 弊害(폐해)와 斑常制度(반상제도)에 의한 階層不平等(계층불평등) 支配階層(지배계층)의 四色黨派(사색당파)와 紛亂(분란)에
휩쓸려 混亂(혼란)과 窮乏(궁핍)을 피할길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韓國史(한국사)는 內憂外患(내우외환)의 역사였습니다
1102-아리랑-d
무엇보다도 下層民(하층민)들의 生活難(생활난)은 極甚(극심)했고 이에따른 不滿(불만)과 疏外感(소외감)이 恨(한)으로 噴出(분출)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한민족을 대표하는 民族情緖(민족정서), 民族感情(민족감정)은 恨(한)으로 凝結(응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恨(한)을 풀어내는 방법이 노래였습니다
“愁心歌(수심가)”,”시집살이 謠(요)”등 各種民謠(각종민요)가락, 閨秀(규수)들의 內房歌辭(내방가사), 雜歌(잡가)에 이르기까지 한은 우리노래의 普遍的(보편적)인 情緖(정서)로 자리잡게 된것입니다
그러한 恨(한)맺힌 노래를 代表(대표)하는 가요가 바로”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은 單純(단순)한 민요가락이 아니라 韓民族(한민족)을 代表(대표)하는 民族(민족)의노래로 자리잡고 있읍니다
國歌(국가)인 愛國歌(애국가)보다 아리랑이 外國人(외국인)들에게 韓國(한국)의 國歌(국가)로 認識(인식)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各種(각종)國內外行事(국내외행사)나 祝祭(축제)때 불리는곡이 바로 아리랑 인것입니다
심지어 2019년에 발생한 헝가리 다뉴브강 慘事(참사)에도 아리랑이 哀悼歌(애도가)로 불려졌습니다
잘이시다시피 이 <다뉴브강> 에”잔물결” 이란 waltz ㅡmelody-왈츠 멜로디-에 윤심덕의 <死(사) 의讚美(찬미)>가얹혀 불렀지 않습니까??
이러한 “아리랑”은 오랜歲月(세월)을 거치면서 多樣(다양)한 內容(내용)과 곡을지닌 민요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아리랑이 恨(한)의노래답게 民族(민족)의 哀歡(애환)과 庶民(서민)들의 悲哀(비애)를 代辯(대변)한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아리랑”은 恨(한) 의 民族(민족)으로서의 民族正體性(민족정체성)을 보여주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아리랑은 地域(지역)마다 時代別(시대별)로 多樣(다양)한 形態(형태)로 分化(분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리랑은 10여종 3600여곡이되는 多樣(다양)한 變形(변형)을 갖고있습니다
그중에서 “旌善(정선)아리랑” “珍島(진도)아리랑” “密陽(밀양)아리랑”을 3대아리랑으로 손꼽습니다
그밖에도 지역에따라서 “京畿(경기)아리랑” ‘서울아리랑” “海州(해주)아리랑”, “春川(춘천)아리랑” “沿邊(연변)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 등 海外(해외)아리랑도 많읍니다
그만큼 우리 “아리랑”은 우리 民族(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反證(반증)합니다
우리민족이 사는곳이면 어디서나 “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처음에는 아리랑이 民族共同體(민족공동체)를 基盤(기반)으로한 勞動謠(노동요)로 불려지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離別謠(이별요), 그리고 獨立鬪爭(독립투쟁)을 위한 抗日 謠(항일요) 로
擴散(확산)됩니다
그리고 大衆性(대중성), 商業性(상업성)이 덧입혀지면서 大衆歌謠(대중가요)로 變身(변신)합니다
심지어는 天然痘(천연두) 豫防接種(예방접종)을 위한<종두 아리랑>, 文盲退治(문맹퇴치)運動(운동)을 위한<한글아리랑>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아리랑의 多樣性(다양성)을 알수있습니다
이처럼 아리랑은 시대, 지역 文化的背景(문화적배경)에따라 多樣(다양)한 變身(변신)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基本的(기본적)인 性格(성격)과 特性(특성)은 한민족을 代表(대표)하는 韓民族(한민족)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리랑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抗日歌謠(항일가요)로 많이 불려졌는데 이는 아리랑이 우리민족의 正體性(정체성)을 象徵(상징)하는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義兵(의병)들의<春川義兵(춘천의병) 아리랑> 獨立軍(독립군)의 아리랑인<光復軍(광복군) 아리랑><獨立軍(독립군)아리랑>이 代表的(대표적)인 抗日謠(항일요) 입니다
海外(해외)에서도 抗日(항일)의 아리랑이 많이 불려졌는데 滿洲地域(만주지역)의<滿洲(만주) 아리랑> 러시아 韓人(한인)들들의 노래인<치르치크 아리랑>이 代表的(대표적)입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사는 시인 김세일이쓴 시<치르치크의 아리랑>에 곡을붙여 국악인 남은혜가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言及(언급)한 아리랑의 由來(유래)에 <我耳聾(아이롱)>에서 派生(파생)했다는 說(설)도 있습니다
이는 景福宮重建當時(경복궁 중건당시당시) 억지로 勞動(노동)을 强要(강요)하는 소리가 듣기싫어 차라리 “내귀가 멀었으면좋겠다”는 뜻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리랑은 이처럼 대원군의 경복궁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황현의<매천야록>에 고종이 宮中(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볼 때 대원군 고종시에 이미 “아리랑”이 普遍化(보편화) 되었읍을 알수있습니다
1103—아리랑-e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오소 北間島(북간도) 벌판이 좋다더라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白頭山(백두산)고개로 넘어간다
감발을하고 白頭山(백두산)넘어 北間島(북간도)벌판을 헤매인다
滿洲(만주) 流移民(유이민)들이 부르던 신아리랑 일부입니다
이노래에서 유이민들의 慘狀(참상)이 生生(생생)하게 描寫(묘사)되고 있습니다
北間島(북간도)가 좋다고 쓰라린 가슴 부여안고 白頭山(백두산)고개를 넘었건만 기다리는건 가난과 굶주림뿐이었습니다
노래에서는 北間島(북간도)벌판을 헤매도는 流浪民(유랑민)들의 貌襲(모습)을 生生(생생)하게보여줍니다
가난을 벗어나기위해 아리랑고개 白頭山(백두산)고개를 넘었으나 苦痛(고통)스런 삶의질곡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것입니다
이노래의 아리랑고개는 日帝(일제)强占(강점)期(기) 朝鮮(조선)땅을 등지고 넘어야했던 流移民(유이민)들의 流浪(유랑)고개를 象徵(상징)합니다
이처럼 아리랑고개는 庶民(서민)들이 넘어야하는 고단한 삶의고개, 나라의 부역길을 떠나는 苦痛(고통)의 고개, 나라잃은 설움을 딛고넘어야했던 流浪(유랑)의고개등 多樣(다양)한 意味(의미)를
內包(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리랑고개”는 우리 民族(민족)과 百姓(백성)들이 걸어야했던 苦難(고난)과 역경의 고갯길을 表象(표상)하는 길이라 할수있습니다
開化期(개화기)에 널리불려진 民謠(민요) 아리랑의 足跡(족적)을 따라가 볼까요
周知(주지)하다시피 韓國 近代史(한국근대사)는 外勢侵奪(외세침탈)에 의한 國權喪失(국권상실)의 歷史(역사)였습니다
그 中心(중심)에 大院君(대원군)과 閔妃(민비)가 있습니다
민비와 대원군의 葛藤(갈등)으로 國難(국난)의 危機狀況(위기상황)이 더욱 深化(심화)되고 끝내 國權喪失(국권상실)의 危機(위기)를 招來(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狀況(상황)을 銳利(예리)하게 노래한 것이 <아리랑 打令(타령)>입니다
李氏(이씨)의 四寸(사촌)이 되지말고 八寸(팔촌)이 되려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놀다가세-後斂(후렴)
南山(남산)밑에 奬忠壇(장충단)짓고 軍樂隊(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한다
門前(문전)의 沃土(옥토)는 어찌되고 쪽박의 身世(신세)가 왠말인가
밭은 헐어서 新作路(신작로)되고 집은 헐어서 停車場(정거장)되네
말깨나 하는놈 裁判所(재판소)가고 일깨나 하는놈 공동산 가네
아깨나 낳을년 갈보질하고 모도깨나 메는놈 을 附逆(부역)을간다
먼동이트네 먼동이트네 미친놈 꿈에서 꺠어났네
이노래는 大院君(대원군)때부터 開化期(개화기)에 이르는 激動(격동)의 歷史(역사)를 集中的(집중적)으로 照明(조명)하고 있습니다
李氏(이씨)는 大院君(대원군)의 本名(본명)인 李昰應(이하응)을 閔氏(민씨)는 閔妃(민비)를 意味(의미)하고 있읍니다
大院君(대원군)과 여흥 閔氏(민씨)사이의 世途政權(세도정권)의 葛藤(갈등)과 對立(대립)을 諷刺(풍자)하고 있는것입니다
危機狀況(위기상황)에도서 모든정파가 힘을합쳐도 부족한 상황인데 하물며 이렇게 極甚(극심)한 政派(정파)싸움을 일삼고있으니 國難克復(국난극복)은 遙遠(요원)한 일이었습니다
1104-아리랑-f
마침내 문전의 옥토를 빼앗겨 쪽박의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이 택할수있는 最後(최후)의 選擇(선택)은 갈보질에 나서거나 목도꾼으로 生計(생계)를 유지하는 길이었습니다
이민요는 外勢(외세)에 依存(의존)하여 政權(정권)을 유지하려했던 執權層(집권층)의 政治的墮落(정치적타락)도 告發(고발)하고 있습니다
고종은 1881년 別技軍(별기군)을 조직하여 日本敎官(일본교관)을 두고 新式武藝(신식무예)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이는 朝鮮(조선)의 軍事力(군사력)을 일본의 影響下(영양하)에 두려는 일본의 意圖(의도)가 作用(작용)한 것 입니다
1907년, 8월 韓國軍(한국군)이 解散(해산)되지만 軍備强化策(군비강화책)은 거의 束手無策(속수무책) 이었습니다
두번째 聯(연)은 이런 朝鮮(조선)의 軍事狀況(군사상황)을 諷刺(풍자)한 것 입니다
軍樂隊(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 하는 外勢志向的(외세지향적)인 屈辱的(굴욕적)인 樣態(양태)를 諷刺(풍자)하고 있는것입니다
또 이노래에서 일본의 土地收奪(토지수탈)에 대한 怨恨(원한)도 나타나 있습니다
일본은 1906년 토지가옥 증명규칙과 토지가옥 저당집규칙을 새로 제정하여 일본인의 토지매점을 보장해줍니다
일본인이 高利貸投資(고리대투자)로 저당잡은 한국인의 토지를 强奪(강탈)할수있게 한것입니다
그리하여 1907년 일본인의 토지소유자는 무려 7745명 면적은 2억3천여평에 이르렀습니다
鐵道附設(철도부설)도 大陸侵略(대륙침략)이라는 隱密(은밀)한 計劃(계획)아래 推進(추진)된 事業(사업)이었습니다
後日(후일) 일본이 韓國(한국)을 近代化(근대화)시키기 위하여 附設(부설)했다고 변명하는 말도안되는---그理由(이유)가 여기있습니다
이노래는 이러한 侵略(침략)과 收奪(수탈)로 進行(진행)된 沃土(옥토)喪失(옥토상실)에 대한 怨恨(원한)과 愛着心(애착심)을 切切(절절)하게 表出(표출)하고 있습니다
문점옥토가 蹂躪(유린)되어 新作路(신작로)나 기찻길로 轉落(전락)되어가는 植民地(식민지)의 現實狀況(현실상황)을 銳利(예리)하게 捕捉(포착)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상황속에서 同伴(동반)되는 人權蹂躪(인권유린)과 窮乏化現象 (궁핍화현상) 同時(동시)에 告發(고발)하고 있습니다
“말깨나 하는놈 裁判所(재판소)가고 아깨나 낳을년 갈보질하는”는 悽慘(처참)한 現實狀況(현실상황)이 이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希望(희망)도 없는건 아닙니다
이노래에서 “먼동”은 祖國解放(조국해방)을 象徵(상징)한다고 할수있습니다
우리민족이 “미친놈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歷史(역사)의 먼동이 틀것임을 確信(확신)하고 있습니다
現實認識(현실인식)의 토대위에서 未來展望(미래전망)의 肯定的視角(긍정적시각)을 보여주고 있는것입니다
例示(예시)한 “아리랑 타령”은 창원, 예산, 남해등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가사가 添削(첨삭), 變形(변형)되는 樣相(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景福宮(경복궁) 增修工事(증수공사) 때부터 불리기 시작한 아리랑은 時代(시대)의 흐름에따라 民衆(민중)들의 哀歡(애환)의노래로 擴大(확대)再生産(재생산)되는 樣相(양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開化期(개화기)에서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解放(해방)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 심지어 現在(현재)까지 民衆(민중)에 膾炙(회자)되고 있는것입니다
아리랑은 명실공히 한민족을 상징하는 민족의노래로서 민족의 自我(자아)를 確認(확인)하는노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通時的(통시적) 連續性(연속성)은 近代生活(근대생활)의 萬華鏡(만화경)으로 규정할수 잇습니다
아리랑은 각時代(시대)를 貫流(관류)하는 민중들의 삶의 생생한 證言(증언)이고 反映(반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발 더나아가 아리랑은 單純(단순)한 民謠(민요)가 아니라 소설, 희곡, 영화등 다양한 예술장르로 擴大(확대) 再生産(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藝術(예술)의 多用化現象(multi-use-다용화현상)을 보여줍니다
이로볼 때 ‘아리랑”은 韓國藝術(한국예술)의 原型(원형)이자 基本動力(기본동력)이 되고 있는것입니다
1105-아리랑-g
“이리랑”은 大衆歌謠(대중가요)로도 많이 불려졌습니다
“大衆歌謠(대중가요)로서 아리랑은 이미 1920년대부터 登場(등장)하는데 그 契機(계기)가 된 것은 韓國映畵(한국영화) 開拓者(개척자) 羅雲奎(나운규)의 映畵(영화) <아리랑>입니다
民族映畵(민족영화)로 알려진 이영화의 主題歌(주제가)로 쓰인 “本調(본조) 아리랑”이 사랑을 받으면서 大衆歌謠(대중가요)의 아리랑으로 擴散(확산)되었습니다
1930년에나온 채규엽의 “아리랑”은 아예 流行歌(유행가)라는 label-라벨-을 달고 出市(출시)되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에서 아리랑을 차용한 곡이 海防(해방)前(전)
山川草木(산천초목)은 젊어가고 人間(인간)의 靑春(청춘)은 늙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에 별도나 많고 우리내 살림살이 말도많다
채규엽의 아리랑은 거의 아리랑의 歌詞(가사)를 그대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이에대한 說明(설명)은 이미 <종횡무진가요사 991>에서 설명한바 있습니다
이렇게 노래題目(제목)을 “아리랑”으로붙인 “歌謠(가요)아리랑”이 상당수에 이릅니다
거기에다 20곡 가까이가 流行歌(유행가) 라는 名稱(명칭)을 붙혀 流行歌(유행가)로서의 “아리랑”에대한 認識(인식)이 擴散(확산)되었습니다
주로 新民謠(신민요)인 境遇(경우)가
亦是(역시) 아리랑이 우리 傳統民謠(전통민요)에서 나왔음을 暗示(암시)하고있는 대목입니다
그밖에 이화자의<금송아지 打令(타령)> 강홍식의<處女總角(처녀총각)>처럼 노래 句節(구절)에 아리랑을 揷入(삽입)하거나 석금성의<방아찧는 색시의노래> 이화자의<朝鮮(조선)의 處女(처녀)>
선우일선의<新 二八靑春(신 이팔청춘)처럼 後斂句(후렴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借用(차용)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題目(제목)을 “아리랑”으로 하거나 句節(구절)과 後斂(후렴)에서 “아리랑”을 借用(차용)한 곡이 解放前(해방전)까지 50여곡에 이릅니다
이로볼 때 大衆歌謠(대중가요)로서 아리랑이 歌謠史(가요사) 의 큰줄기를 形成(형성)했음을 알수있습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의 大衆歌謠(대중가요)로서의 아리랑은 주로 新民謠形態(신민요형태)로 불렸습니다
채규엽의<아리랑><아리랑의노래> 김연실의<아리랑고개를 넘지마라> 이경설의<아리랑 한숨고개>---등등 대표적입니다
심지어는 滿洲讚歌(만주찬가)로 쓰인 親日歌謠(친일가요) 백년설의<아리랑 滿洲(만주)>가 나올정도 였습니다
親日歌謠(친일가요)에서 조차 뻔뻔스럽게도 아리랑을 活用(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melody-멜로디-는 아리랑 이지만 內容(내용)은 親日(친일)을 담고있습니다
일본출신가수 다카사카 사치코가 부른 <아리랑 타령>이 있을정도로 아리랑은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글이 보이나 뒷맛은 별로입니다
이러한 樣相(양상)으로 볼 때 大衆歌謠(대중가요)로서 아리랑의 位相(위상)을 짐작할수있고 결국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이긴하나 代表的(대표적)인 流行歌(유행가)의 한 樣式(양식)으로 굳게
자리 잡고있었다 할수있습니다
눈물도 이리다오 한숨도 이리다오 조각달 내身世(신세)를 他官(타관)에두고
盞(잔)속에 꿈을실어 부르자 부르자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는
몇고개냐 ------------------------------------화산월사 문호월곡 김봉명<아리랑 술집>
1940년 발표된 이곡 亦是(역시) 아리랑의 基本情緖(기본정서)와 마찬가지로 눈물과 한숨으로 一貫(일관)하고 있습니다
他官(타관)살이를를 하면서 조각달 身世(신세)로 轉落(전락)한 自身(자신)의 貌襲(모습)을 恨歎(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를 慰勞(위로)할수있는 것은 술한잔과 “아리랑 打令(타령)” 뿐 입니다
“내가 넘어야할 아리랑고개는 몇고개냐”하고 自歎(자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리랑”民謠(민요)銀(은) 大衆歌謠(대중가요)로 變身(변신)뒤에도 恨(한) 의노래하는 本質(본질)은 변함이 없읍니다
日帝末期(일제말기) 숨막히는 社會狀況(사회상황)속 에서 民衆(민중)은 풀길없는 恨(한)을 술로 달랬습니다
이를 背景(배경)으로 創作(창작)된 이노레는 널리 大衆(대중)에게 普及(보급)되었습니다
<신아리랑><꼴망태아리랑>를 불러서 아리랑에 關心(관심)을 갖고있던 歌謠界(가요계) 代父(대부) 김용환은 나운규의 영화<아리랑>을 이부풍 脚色(각색)으로 樂劇化(악극화) 해서 공연했고
劇中(극중)불린 여러곡을 直接 創作(직접창작)했습니다
1106-아리랑-h
1930년을 前後(전후)하여 record 會社(레코드 회사)들은 조선에 支社(지사), 營業所(영업소) 또는 代理店(대리점)을 두고 日本語 record-일본어 레코드-와 함께 판소리, 民謠(민요)등
傳統音樂record-전통음악 레코드-를 팔고있었습니다
그속에<아리랑>이 包含(포함)되어 있었습니다
初期(초기)레코드 목록을 보면 처음에는 民謠(민요)로서보다는 映畵(영화)說明(영화설명)이라든가 극의 이야기 줄거리로 나와있습니다
오늘날 一般的(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있는<아리랑> melody-멜로디-는 西洋音樂(서양음악)이 流入(유입)됨에 따라 1930년대 중반에 부르기 쉽도록 고쳐진것이라고 생가됩니다
1920년대 後半(후반)부터 民衆(민중)이 愛唱(애창)한<아리랑>은 時代相(시대상)을 나타내는 大衆歌謠(대중가요)로 다루어졌습니다
그중 解放前(해방전)것으로 1937년<江南(강남)아리랑>과 1940년대의 <아리랑술집><아리랑 娘娘(낭낭)>이 있습니다
江南(강남)은 멀어서 二千(이천) 七百里(칠백리)
한달하고 열흘을 찾아가면은
꽃피고 새우는 別有天地(별유천지)라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江南(강남)을 언제가나
江南(강남)은 사시나 꽃피는 나라
밤낮으로 헤매어 찾아가면은
별들은 반가이 맞아준다네
아라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랑 江南(강남)을 언제가나----------------------------------------------------<江南(강남)아리랑> 고마부사 형석기곡 河仁植(하인식)노래
江南(강남)이란 원래 中國(중국)의 양쯔강아래의 地方(지방)을 말하지만 조선인에게는 地域(지역)이라기 보다는 四季節(사계절)이 따뜻하며 꽃이 흐드러지게피는 理想鄕(이상향)으로 여갸지기도 합니다
대중가요에서는 일찍이 <江南(강남)달><江南(강남)제비>등이 인기를 얻었고 <江南(강남)아리랑>도 그영향을 3박자의 民謠調(민요조)입니다
<아리랑술집>은 화산월사 문호월작곡 김봉명노래이고 이미 앞서 설명이 있었기에 생략합니다
봄이오는 아리랑고개 제비오는 아리랑고개
가는님은 밉쌍이요 오는님은 곱쌍이라네
아리아리랑 아리랑고개는 님오는고개
넘어도 넘어도 우리님만은 안넘어요
달이뜨는 아리랑고개 꽃도뜯는 아라랑고개
우리님은 건달이요 웃는님은 도련님이지
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는 도련님고개
울어울어도 우리님만은 안울어요
경사났소 아리랑고개 立春大吉(입춘대길) 아라랑고개
쪽도리에 나삼소매 시집가는 아리랑고개
아리아리아리랑 아리랑고개는 쪽도리고개
어찌 어찌도 좋았던지요 조금 웃었소-----------------------------------------------<아리랑 娘(낭)娘(낭)> 처녀림사, 김교성곡 백난아 노래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의 戰雲(전운)이 감돌던무렵의 노래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않을정도로 天眞爛漫(천진난만)함이 느껴지는 노래입니다
이처럼 밝고 輕快(경쾌)한 TAMPO-템포-의 歌詞(가사)와 曲(곡)은 日帝(일제)의 敗戰(패전), 朝鮮民族(조선민족)의 解放(해방)을 豫期(예기))하고 있지않았나 여겨질 정도입니다
1107—民謠(민요)-a
民謠(민요)는 우리나라 詩歌(시가)중 가장 오래된 노래로서 開化期(개화기)에 들어와서도 不斷(부단)히) 民衆(민중)의 입에 膾炙(회자)되었습니다
민요는 民族(민족)이라고하는 일단의 思想(사상), 感情(감정)을 같이하고있는 사람들사이에 發效(발효)된 純粹(순수)한 情緖(정서)의 表現(표현)으로서 그時代(시대)에 適合(적합)한 言語(언어)와
風俗(풍속)에 맞는 律動(율동)과 旋律(선율)로서 形成(형성)됩니다
언제나 그時代民衆(시대민중)의 共鳴(공명)을받아 그들의 情緖(정서)에 痛切(통절)히 부딪히며 그들의 文學(문학),그들의 音樂(음악)이 되는것입니다
따라서 民謠(민요)는 그民族(민족)의 紀錄(기록)이며 民族(민족)과 民衆(민중)의 榮光(영광)과 喜怒哀樂(희로애락)를 송두리째 그리는 內的生活(내적생활)의 映像(영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민요의 特質(특질)은 開化期(개화기)에 들어서도 그대로 살아나고 있습니다
開化期(개화기)라는 歷史狀況(역사상황) 에 任(임)하여 積極的(적극적)인 參與(참여)의 노래로 昇華(승화)되어 민중의 潑剌性(발랄성)이 그대로 形象化(형상화) 되고있습니다
民衆全體(민중전체), 民族全體(민족전체)가 當然(당연)한 歷史狀況(역사상황)을 좀더 積極的(적극적)인 姿勢(자세)로 反映(반영), 批判(비판)한 점에 開化期(개화기)民謠(민요)의 特性(특성)이 있습니다
“아리랑”의 傳說(전설)을 낳은 大院君(대원군)의 景福宮(경복궁) 復元事業(복원사업)은 많은 百姓(백성)들의 怨恨(원한)을 샀던바 그에따른 여러民謠(민요)들도 多數(다수) 登場(등장)했습니다
大院君(대원군)은 執權後(집권후) 王室(왕실)의 威嚴(위엄)을 誇示(과시)하기위하여 景福宮(경복궁)의 重建(중건)을 强行(강행)했습니다
많은 論難(논란)끝에 경복궁중건은 고종2년에 착수하여 고종4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工事(공사)가 朝鮮朝末-조선조말-의 財政的(재정적)인 不安(불안)속에 진행되었고 오랜時日(시일)을 두고 많은 경비와 인원을 동원하여 감행됨으로써 백성들의 怨聲(원성)을 샀습니다
이러한 百姓(백성)들의 怨聲(원성)이 다음민요에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朝鮮(조선) 여덟도 좋다는 나무는 景福宮(경복궁) 짓느라고 다 들어간다
石手(석수)장이 擧動(거동)좀보소 방망치를 각다잡고 눈만 껌뻑거린다
景福宮建築工事(경복궁건축공사)의 經費(경비)를위하여 대원군은 結頭稅(결두세) 통행세, 願納稅(원납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였고 當百錢(당백전) 이라는 惡貨(악화)를 주조하여
物價仰騰(물가앙등)을 招來(초래)했습니다
또한 국내의 큰나무는 재목위해몽땅 採伐(채벌)되었고 工事勞役(공사노역)에는 京畿道(경기도)내의 백성이 懲罰(징벌)되어 强制勞動(강제노동)이 施行(시행)되었습니다
國權(국권)이 日本(일본)에 넘어간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아니고 이러한 大院君(대원군)의 暴政(폭정)은 老妄(노망)난 늙은이나 할짓거리입니다
왕실의 威嚴(위엄)은 그時節(시절)이 身分社會(신분사회)임에 백성들에게 정치를잘해 스스로 우러나게 해야지 분에넘치는 豪華(호화)스런 建物(건물)이나
重建(중건)한다고 위엄이 찾아지는건 아님을 왜몰랐을까요??
이와 같은 無理(무리)한 政策修行(정책수행)에서 빚어진 국민들의 苦痛(고통)과 怨望(원망)이 그時節(시절) 불려진 노래에 그대로 表出(표출)되있습니다
“눈만 껌뻑거린다”는 石手(석수)장이의 戲畵化(희화화)된 諷刺(풍자)에서 국민들의 怨恨(원한)이 切切(절절)하게 描寫(묘사)되어 있습니다
돌일을 제대로 해내지못하는 未熟練工(미숙련공)까지 마구 動員(동원)하여 공사를 敢行(감행)했음을 暗示(암시)하고 있는것입니다
人力動員(인력동원)에 犧牲(희생)된 백성들의 원한이 生生(생생)하게 녹아있습니다
데원군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의 승리를 통해 斥邪(척사)의 의지를 더욱굳혀 鎖國政策(쇄국정책)을 강행했습니다
大院君(대원군)이 鎖國政策(쇄국정책)을 더욱굳게 하게된 契機(계기)가되었던 丙寅洋擾(병인양요)에대한 民謠(민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람이분다 바람이분다 延坪島(연평도)바다에 갈바람이 분다
얼화에야 에헤야 나이리 이어리 매화로다
1959년 사라호태풍을 소재로한 <눈물의 延坪島(연평도)>가 발표되기 한참전 이러한 延坪島(연평도)가 거론되는 노래가 불려졌습니다
上記曲(상기곡)에서 갈바람 곧 西南風(서남풍)이 분다는 것은 戰亂(전란)의 徵兆(징조)를 暗示(암시)합니다
“바람이분다 바람이분다”의 反復(반복)은 그러한 戰亂(전란)의 徵兆(징조)가 成熟(성숙)되어가고 있음을 時事(시사)하고 있습니다
延坪島(연평도)바다에 부는 갈바람은 곧 西勢東漸(서세동점)의 外勢(외세)와 列强(열강)을 總稱(총칭)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등 西歐勢力(서구세력)이 虎視眈眈(호시탐탐) 朝鮮侵奪(조선침탈)을 꿈꾸고 있었던것입니다
다음노래는 이러한 大院君(대원군)의 鎖國政策(쇄국정책)을 諷刺(풍자)하고 있습니다
四大門(사대문)걸고 나비잠만 잔다 改革(개혁)運動(운동)
고종때 西北地域(서북지역)에서 불리던 讖謠(참요)입니다
여기서 <讖謠(참요)>란 時代(시대)의 變化(변화)나 政治的徵候(청치적징후)를 豫言(예언)하거나 暗示(암시)하는 노래를 말합니다
暴風(폭풍)처럼 휘몰아 치고있는 國際政勢국제(정세)를 外面(외면)한채 閉鎖的(폐쇄적)狀況(상황)에 安住(안주)하고있는 태도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斥邪(척사)의 名分(명분)아래 徹底(철저)히 조선을 孤立(고립)시키고 “나비잠”의 平穩(평온)속에 빠져있는 鎖國政策(쇄국정책)을 諷刺(풍자) 하고있습니다
노래에서”四大門(사대문)걸고”는 곧 鎖國(쇄국)을 意味(의미)하며 “나비잠만잔다”는 安逸(안일)한 沈潛(침잠)을 말합니다
1108-民謠(민요)-b
韓國近代史(한국근대사)에서 宗敎動員(종교동원)<religious movement>의 性格(성격)으로 規定(규정)되는 東學革命(동학혁명)은 실로 民衆(민중)의 大規模(대규모) 改革運動(개혁운동) 이었습니다
비록 東學(동학)이라는 宗敎團體(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多數(다수)의 皮壓迫(피압박) 민중들의 大規模(대규모)參與(참여)로 진행되었기에 ‘아래로부터의 革命(혁명)” 이라 부릅니다
그점에서 小數(소수)elite集團(엘리트집단)에 의해서 진행된 “위로부터 革命(혁명)”인 甲申政變(갑신정변)과 克明(극명)한 對照(대조)를 이룹니다
1894년 大院君(대원군)失脚後(실각후) 등장한 閔氏政權(민씨정권)의 政治的腐敗(정치적부패) 地方官吏(지방관리)의 苛斂誅求(가렴주구), 外國商人(외국상인)의 浸透(침투)등에서 觸發(촉발)된
東學亂(동학란)은 反封建(반봉건), 反帝國(반제국)의 性格(성격)을 띤 民衆(민중) 民族意識(민족의식)의 暴發(폭발)이었습니다
1894년 2월1일 1차 고부蜂起(봉기)는 反封建鬪爭(반봉건투쟁)이었고 그해 10월의 3차봉기는 抗日鬪爭(항일투쟁)이었습니다
결국 官軍(관군)과 日本軍(일본군)에 의하여 失敗(실패)로 끝났지만 國內外的狀況(국내외적상황)에 대한 改革運動(개혁운동) 이라는점에서 東學革命(동학혁명)은 커다란 足炙(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東學革命(동학혁명)을 素材(소재)로 東學民謠(동학민요)가 開化期(개화기)에 많이 불렸습니다
가보세-甲午(갑오)- 가보세 어서 가보세 乙未(을미)적 을미적 하다가 丙申(병신)되면 못가보리
東學亂(동학란)은 고종31년 甲午(갑오)년에 始作(시작)하여 다음해 乙未(을미)년을 거쳐 丙申(병신)년에 이르러 끝났습니다
上記民謠(상기민요)에서 “가보세”는 갑오년을 “을미적”은 을미년을 “병신”은 병신년을 意味(의미)합니다
民擾(민요)는 高度(고도)의 metaphor-메타포-를 內包(내포)하고있어서 이시의 詩的自我(시적자아)<大多數(대다수) 民衆(민중)들>가 어떤모임<동학혁명 대열>에 參席(참석)하고 싶은데<가보세 가보세>
미적미적<을미적 을미적> 거리다가는 끝내는 병신이되어 못가고 말것이라는 意味(의미)를 暗示(암시)하고 있습니다
미적 거리지말고 時代(시대)의 落伍者(낙오자)가 되지말고 積極的(적극적)으로 東學革命(동학혁명)의 鬪爭隊列(투쟁대열)에 參與(참여)하자는 强力(강력)한 메시지를 담고있는 것입니다
이민요에대해 동학란이 병신년에 끝닐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解釋(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랫녁 새야 웃녁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두류박 딱딱우여
이노래에서 “녹두”는 의병장 전봉준을 의미하고 “새”는 民衆(민중)을 意味(의미)합니다
전병준은 어렸을 때 녹두처럼 키가작아 “녹두” 라 불렀고 후에 “綠豆將軍(녹두장군)” 이라 불렀습니다
民衆(민중)의 指導者(지도자)인 전병준과 生死(생사)를 같이해야한다는 悲壯(비장)한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一般(일반)에 널리 알려진 東學民謠(동학민요) 파랑새 民謠(민요)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綠豆(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
“파랑새요”는 東學(동학)에대한 民衆(민중)들의 歷史感覺(역사감각)을 잘 表現(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노래에서 파랑새는 日本(일본) 및 靑軍(청군) 같은 外勢(외세)를 의미하고 녹두는 전봉준을 의미합니다
특히 日本軍(일본군)이 當時(당시)에 파란軍服(군복)을 입었기에 그런比喩(비유)가 나온것입니다
청포장수는 청포로 生計(생계)를 이어가는 一般百姓(일반백성)을 가리킵니다
이노래는 日本軍(일본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전봉준의 輓歌(만가)로 알려져있습니다
전봉준의 改革運動(개혁운동)은 民衆(민중)들과 和合(화합)에 의해 더욱빛을 발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失敗(실패)로 끝났을지 언정 ”아래로부터의 革命(혁명)”은 실로 韓國史(한국사)에빛나는 民衆改革運動(민중개혁운동)이었던 것입니다
開化期(개화기)民謠(민요)에는 一定(일정)한 숫자에맞춰 부르는 數謠(수요)가 流行(유행)했습니다
이미 古典詩歌(고전시가)에서 이런양식은 普遍的(보편적)이었습니다
가령 1년 열두달을 소재로한 <달거리 打令(타령)>이나 春香歌(춘향가)에서 나오는 十杖歌(십장가)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漢詩(한시)에서도 數詩(수시)라는 樣式(양식)이있어서 民謠(민요)의 <숫자타령> 과 짝을 이루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民謠(민요)는 이러한 數謠樣式(수요양식)을 취하여 抗日意識(항일의식)을 鼓吹(고취)하고 있습니다
1109- 民謠(민요)-c
일, 日本(일본)놈의 이, 이등박문이가 삼,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에
사, 四柱(사주)가 나빠서 오, 五臺山(오대산)을 넘다가 육, 六穴砲(육혈포)를 맞고
칠, 칠십먹은 늙은이가 팔, 八字(팔자)가 사나워 구, 구둣발로 채여
십, 십조가<十字 街> 리가 났네
例示(예시)한 민요는 1~10까지 수자를 반복하여 侵略(침략)의 元兇(원흉)인 이등박문의 被殺狀況(피살상황)을노래하고 있습니다
朝鮮統監(조선통감)이던 이등박문이 1909년 중국할빈역에서 安重根義士(안중근의사)에 의해 被殺(피살)되었습니다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을 蹂躪(유린)하던 이등박문이 五臺山(오대산)을넘다가 六穴砲(육혈포)를맞았다고 노래하며70노인네가 구둣발로 채여 “십조가리가 났네”라고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등박문이야말로 民族(민족)의 鐵天之怨讐(철천지원수)였기에 구둣발로차서 찢어죽이고싶었을것입니다
이러한 朝鮮百姓(조선백성)들의 한맺힘을 數謠型式(수요형식)의 “諷刺歌(풍자가)” 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음노래는 義兵(의병)들의 鬪爭意志(투쟁의지)를 强硬(강경)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집이없어 서러워라 나라없어 서러워라
임금섬겨 나라찾고 왜놈잡아 임금앞에 꿇어앉혀 우리임금 분을 풀어주세----------------------------------------<義兵軍歌(의병군가)>
義兵軍歌(의병군가)는 이처럼 나라잃고 내집없이 떠도는 義兵(의병)들의 身世(신세)를 自歎(자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苦難(고난)과 逆境(역경)이 있어도 반드시 倭(왜)놈을 쳐부수어 나라를 찾고 君主(군주)의 한을 풀어줄것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임금의 憤(분)은 곧 百姓(백성)의 분이고 苦痛(고통)일것입니다
逆境(역경)속에서도 꿋꿋이 鬪爭戰線(투쟁전선)에 나섰던 義兵(의병)들의 氣槪(기개)와 鬪志(투지)를 엿볼수 있습니다
開化期民謠(개화기민요)에는 開化期(개화기) 社會風俗(사회풍속)을 主題(주제)로한 것이 많았습니다
開化期(개화기) 社會風俗(사회풍속)을 主題(주제)로한 民謠(민요)는 代體(대체)로 세가지로 分類(분류)할수있습니다
開化志向(개화지향)을 보인 것, 開化(개화)에대한 社會風俗(사회풍속)이 反映(반영)된 것, 開化(개화)에 內在(내재)된 矛盾(모순)을 批判(비판)한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全體的(전체적)으로볼 때 세번째유형-개화에 내재된 모순을 비판한 것-이 主朝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開化志向(개화지향)의 민요는 많지만 創造的(창조적)인 개조가 아니라 文明(문명)에대한 好奇心(호기심)의 表白(표백)으로 말하자면 皮相的開化(피상적개화)로 끝난 것이 많습니다
이를 테면”나는좋테, 나는 좋테 구두신고 칼찬 낭군 나는좋테”<창원지방 민요>와 같이 하나의 流行(유행)처럼 大衆心理(대중심리)에 便乘(편승)한 皮相的(피상적)인 開化意識(개화의식)이
드러나고 있읍니다
大體(대체)로 이러한 類型(유형)義(의)민요들은 개화기의 大衆的素材(대중적소재) 즉, high collar-하이칼라-, 自轉車(자전거), 공굴<콘크리트다리> 야궐연<양담배>등 開化期風物(개화기풍물)을
主要素材(재) (주요소재)로 삼고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皮相的(피상적) 流行心理(유행심리)에 便乘(편승)한 開化(개화)노래는 枝葉的(지엽적)인 것이고 大體(대체)로 開化素材(개화소재)의 민요들은 現實認識(현실인식) 과
歷史意識(역사의식)에 立脚(입각)한 抗日意志(항일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周知(주지) 하다시피 日本(일본)은 近代化(근대화)란 美名(미명)하에 開化(개화)를 내세워 한국을 侵奪(침탈)해 갔던것입니다
즉 “開化(개화)”라는 名分(명분)속에는 近代化(근대화)라는 肯定的(긍정적)價値(가치)와 植民地化(식민지화)라는 否定的(부정적)價値(가치)가 婚材(혼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近代化(근대화)라는 肯定的(긍정적)價値(가치)도 侵略(침략)의 手段(수단)이되면서 否定的(부정적)價値(가치)로 轉落(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正確(정확)히 얘기해서 처음부터 近代化(근대화)라는 肯定的價値(긍정적가치)는 存在(존재)하지 않았습니다
日本(일본)이란 國家(국가)가 朝鮮(조선)을 純粹(순수)한 마음으로 近代化(근대화)시켜줄 만큼 좋은 이웃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1110—民謠(민요)-d
開化期(개화기)民謠(민요)는 이러한 開化(개화)가갖는 二律背反性(이율배반성), janus 的-야누스적-矛盾性(모순성)을 銳利(예리)하게 看破(간파)하고 있습니다
즉 近代化(근대화)속에 內在(내재)한 일제의 식민지야욕을 認識(인식)하고 있는것입니다
濟州島(제주도)民謠(민요) <敵旗歌(적기가)>처럼 露骨的(노골적)으로 抗日(항일)의 內容(내용)을 담은것도 있고<담다귀 打令(타령)>처럼 婉曲(완곡)하게 日本侵略(일본침략)을
批判(비판)한 作品(작품)도 보입니다
특히 大陸侵略(대륙침략)의 目的(목적)으로 進行(진행)된 京釜線(경부선) 京義線(경의선)의 鐵道附設(철도부설)을 批判(비판)하고있는 作品(작품)이 많이 보입니다
露日戰爭(노일전쟁)을 遂行(수행))하기 위하여 急作(급작)스럽게 推進(추진)된 鐵道附設(철도부설)로) 인하여 惹起(야기)된 漫行(만행)들이 告發(고발)되고 있습니다
不當(부당)하게 田畓(전답)이 沒收(몰수)됐음은 물론입니다
가 洛東江(낙동강) 七百里(칠백리) 공굴놓고
하이칼라 잡놈이 往來(왕래)한다
나 삼학산 밑에다 新作路(신작로)로내고
自動車(자동차) 바람에 다 놀아난다--------<春川(춘천) 아리랑>
가 에서는 洛東江(낙동강)에 콩크리트 鐵橋(철교)가 놓여지고 그위로 다니는 京釜線列車(경부선열차)에 소위 high collar-하이칼라-로 불려지는 開化族(개화족)들이 頻煩(빈번)하게 往來(왕래)
하고있음을 批判(비판)하고 있습니다
“High collar-하이칼라-잡놈”이라는 原色的表現(원색적표현)에서 그들에대한 警戒心(경계심)과 敵愾心(적개심)을 읽을수 있습니다
나 에서도 새로 新作路(신작로)를 내고 그위로 疾走(질주)하는 開化(개화)의 新文物(신문물)인 自動車(자동차)를 描寫(묘사)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바람” 즉, 開化(개화)바람에 모든 것이 휩쓸리고 마는 價値觀(가치관)의 混淆現象(혼효현상), 秩序(질서)와 倫理(윤리)의 anomie-아노미-現象(현상)을 慨歎(개탄)하고 있는것입니다
“다 놀아난다”는 다소 冷笑的(냉소적)이고 諧謔的(해학적)인 表現(표현)이 이러한 時代狀況(시대상황)을 適切(적절)히 表出(표출)하고 있습니다
Hihh collar-하이칼라-는 開化風俗(개화풍속)의 代表的(대표적)表象(표상)으로 자리잡고있는데 開化期民謠(개화기민요)에서도 中心素材(중심소재)로 등장합니다
“산골짝 큰애기 베짜는소리 洋服(양복)장이 하이칼라 발맞춰간다”는 노래도 그한 예입니다
蝎甫(갈보)및 妓生(기생)도 開化風俗(개화풍속)의 否定的(부정적) 象徵物(상징물)로 登場(등장)합니다
蝎甫(갈보)질 갈라고 빗은머리 東南風(동남풍)불어 난머리져
물여다 놓고 거렁지 보니 촌갈보 되기는 寃痛(원통) 하구나
김 잘매고 베잘짜는 맏며느리는 앙갈보 바람에 도망을한다
솔보둑이 쓸만한 거는 전봇대로 나가고 기집아새끼 씀직한거는
妓房(기방)으로 나간다--------------------------------------------<旌善(정선) 아라리>
開化期(개화기)에서 女性界(여성계)層(여성계층)의 墮落(타락)이 큰社會問題(사회문제)로 擡頭(대두))되었던바 多數(다수)의 민요가 여성의 타락을 주제로 하고있습니다
이민요는 표면적으로 개화풍조에 휩쓸려린 女性(여성)의 倫理的(윤리적)墮落(타락)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갈보질갈려고 머리를곱게 빚는行爲(행위)라든가 촌갈보 보다 도시갈보가 되고싶은 慾望(욕망)과 虛榮心(허영심)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內面的(내면적)으로 살펴보면 “갈보질” 이라는 極端(극단)의 選擇(선택)이 生計(생계)의 最後手段(최후수단)이 돼야했던 當時(당시)의 時代狀況(시대상황)을 읽을수 있습니다
土地調査事業(토지조사사업) 등에의한 農土收奪(농토수탈)과 高利貸金(고리대금)에 의한 農村經濟(농촌경제)의 衰退(쇠퇴)가 “어린애 밥달라고 발버둥치는” 極限狀況(극한상황)을 惹起(야기)시켰고
“기집애 고운 것은 蝎甫(갈보)로 다 나가야”하는 社會現象(사회현상)을 招來(초래)했습니다
이러한 蝎甫(갈보) 및 high collar-하이칼라- 群像(군상)의 的確(적확)한 現實認識(현실인식)을 통하여 民衆(민중)은 스스로 正體性(정체성)과 自我(자아)를 確立(확립)해 갈수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민요는 開化(개화)의 皮相的開化(피상적개화)의 斷面(단면)들을 告發(고발)하고 있습니다
洋服服裝(양복복장) 外國(외국)모자 開化杖(개화장)짚고 村蝎甫(촌갈보) 호리가 망 맞었네
발 아파서 못신던 미투리신 고무신 바람에 도망을 친다
이민요는 개화의 풍조를타고 우리의 傳統文物(전통문물)이 사라지는 文化現象(문화현상)을 銳利(예리)하게 捕捉(포착)하고 있습니다
“미투리신”이 “고무신”에 밀려나고 “놋그릇 대통”이 “양궐련” 바람에 사라지고 우리의 “입쌀”이 西洋(서양)의 “호밀”에 떠밀리는 文物(문물)의 交替現象(교체현상) 을 看破(간파)하고 있습니다
“도망친다”는 表現(표현)은 傳統文物(전통문물)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을 表出(표출)하고 있습니다
모두 새것 cpmplex-컴플랙스-에 걸려 우리의 歷史(역사)와 文化(문화) 傳統(전통)을 喪失(상실)해가는 開化期(개화기)의 時代狀況(시대상황)을 告發(고발)하고 있습니다
1111--民謠(민요)-e
1899년 朝鮮(조선)에서 처음으로 濟物浦(제물포)와 서울 鷺梁津(노량진)을 잇는 鐵道(철도)京仁線(경인선)이 開通(개통)되었습니다
그후 서울과 釜山(부산)을 잇는 京釜線(경부선), 서울과 新義州(신의주)를 잇는 京義線(경의선), 서울과 元山(원산)을 잇는 京元線(경원선), 大田(대전)과 木浦(목포)를 잇는 湖南線(호남선)등의 幹線(간선)
이 차례로 開通(개통)되었습니다
이 鐵路(철로)를 달리는 鐵馬(철마)는 이본의 상품을 大量(대량)으로 急速(급속)히싣고 들어 왔습니다
鐵道沿邊(철도연변) 住民(주민)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鐵馬(철마)에 驚異(경이)의 눈길을 보냈고 生活環境(생활환경)이 갑작스래 변해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感情(감정)을 一名(일명) 어랑打令(타령)이라고 하는 民謠(민요)로 나타냈는데 이것이 <新 高山(신고산) 打令(타령)>입니다
新高山(신고산)이 우르르 汽動車(기동차)가는소리에
舊高山(구고산) 큰애기 반의 반봇짐만 싸누나
長津江(장진강) 물은 水力電氣(수력전기)만 되고
네물과 내물은 玉童子(옥동자)만 되누나------------------------------<新高山(신고산) 打令(타령)>
신고산은 咸鏡南道(함경남도) 남단 삼방을지나 元山(원산)바로전 30여 킬로미터 지점에있는 마을입니다
그 近處(근처)에는 高山(고산)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는데 鐵道(철도)가 부설되어 停車場(정거장)이 생김과 同時(동시)에 정거장을 중심으로하여 새로 생겨난 마을을 新高山(신고산),
지금까지 마을을 舊高山(구고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또 1920년대들어서 水力發電所(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함경남도 장진강을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자본이 이번에는 조선의 값싼 勞動力(노동력)을 표적으로하여 물밀 듯 밀려온다는 前兆(전조)이기도 했습니다
서민들은 변화하 생활환경을 이노래와같이 實感(실감)했으리라 믿어집니다
많은 민요가 그러하듯이 신고산타령도 여러가지 다른가사를붙여 불리고 있습니다
그중 몇가지를 소개합니다
신고산 우루루루 咸興(함흥)군 가는소리
舊高山(구고산) 큰애기 반봇짐만 싼다
後斂(후렴) 어랑 어랑 어허야 어러럼마 띄어라
연사 연이로구나
노량대가리 무렛줄 상투
언제 깎아서 벙거지를 씌우나
어린 아해 밥달라고 발버둥질 치는데
令監(영감)님은 술만먹고 陽山道(양산도)만 하누나
十五夜(십오야)밝은달은 雲霧中(운무중)에서 놀고
우리 같은 無産者(무산자)는 조방중에서 논다
정든님을 데리고 산나물을 갈까
우리오빠 따라서 봉천차 탈까
청류벽 변하여 수병풍이되고
綾羅島(능라도)변하여 꽃방석이 되누나
雨水(우수) 驚蟄(경칩)에 大同江(대동강)이 풀리고
당신의 말씀에 나의가슴이 풀린다
장기를 두려면 맥부치 장기만두고
사람을 치려면 밥통만 땅땅친다
바림많은 世波(세파)애 부대끼는 이내몸
언제 언제나 걱정 구름을 면할까
상개굴 큰애기 님오기만 기다리고
푸릇푸릇 봄배추는 봄비만 오기 기다린다
富寧(부령) 淸進(청진) 가신님 돈벌면 오고
共同墓地(공동묘지) 가신님 언제나 오나
밑으로 계속됩니다!!!
1112--民謠(민요)-f
淸津(청진)은 咸鏡北道(함경북도)의 道廳所在地(도청소재지)이며 동북지방 제1의 貿易港(무역항) 이었으나 그 以前(이전)에는 쓸쓸한 작은漁村(어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08년 개항이이래 급속히 발전하엿고 1929년 咸鏡線(함경선) 1933년 圖們線(도문선)등 鐵道開通(철도개통)으로 물자의 集散地(집산지)가 되었을뿐 아니라 일제의 滿洲侵略(만주침략)과 함께
北滿鐵道(북만철도)의 關門(관문)으로서 交通(교통)의 要地(요지)가 되었습니다
富寧(부령)은 청진시내 중앙을 흐르는 유성천상류에 있으며 본래는 세종때 병영인 六鎭(육진)의 하나인 영북진 이었습니다
읍서쪽에는 水力發電所(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부근에서 생산되는 地下資源(지하자원)을 이용하여 야금공업, 시멘트공업이 융성했으며 군내 연해지방에는 수산업이 활발했습니다
공업이 활발해짐과 동시에 犧牲者(희생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共同墓地(공동묘지)에 묻힌채 가족품으로 돌아오지 못한사람이 많았습니다
일제시대 민요에는 農村(농촌)의 情景(정경)이잘 묘사되어있는데 農民(농민)의 괴로움이 가장 象徵的(상징적)으로 表現(표현)되어있는 것은<石炭(歌(석탄가)>입니다
石炭(석탄)白炭(백탄)타는데 煙氣(연기)만 푸불속 나구요
요내가슴 타는데 煙氣(연기)도 김도 안나네----------------------------------------<石炭歌(석탄가)>
이러한 괴로움속에서도 民衆(민중)의 抵抗精神(저항정신)은 强忍(강인)했습니다
日本人(일본인)의 橫暴(횡포)를 揶揄(야유)하며 다음과 같은 숫자노래를 불렀습니다
일, 日本(일본)놈의
이, 伊藤博文(이등박문)이가
삼,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 -삼천리강산을 먹자고
사, 四柱(사주)가 나빠서 -사방을 둘러보며
오, 五臺山(오대산)을 넘다가
육, 六穴砲(육혈포)를 맞고
칠, 칠십먹은 늙은이가
팔, 八字(팔자)가 사나워
구, 구둣발로 채여
십, 십자가리가 났네
歷史的事實(역사적사실)과는 다를지라도 그런 것을 따질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에대한 반감과 이토히로부미의 末路(말로)에대한 朝鮮民衆(조선민중)의 感情表現(감정표현)에 主意(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平安道(평안도) 안악지방에는 이런민요가 불렸다고 합니다
巡査(순사)나리 개나리
나리중의 개나리 봄동산애 피었는데
순사나리 궁둥이엔
개왕가왕 짖누나
일제의 식민통치에대한 民衆(민중)의 憤怒(분노)는 삼일운동으로 일제히불타올랐으나 일제의 無慈悲(무자비)한 彈壓(탄압)앞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민중의 가슴에는 쓰디쓴 敗北感(패배감)이 감돌고 殺伐(살벌)한 世態(세태)속에서 이런노래가 불렸습니다
나는싫어 나는 싫어
愛國者(애국자)가 나는 싫어
峴底洞(현저동) 101번지
밥나르기 나는싫어
峴底洞(현저동)에는 숱한 獨立鬪士(독립투사)가 拷問(고문)을받고 絞首刑(교수형)에처해진 日帝植民支配 (일제식민지배)의) 象徵(상징)인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가 있습니다
가날픈 두어깨로 生活(생활)을 支撑(지탱)하면서 일제에 逮捕(체포)되어 監獄生活(감옥생활)을 하는 남편에게 私食(사식)을 보내야하는 婦女子(부녀자)의 고달픔과 슬픔을 상징하는 노래입니다
1113--民謠(민요)-g
面事務所(면사무소)에 勤務(근무)한 朝鮮(조선)人(조선인)이 日本人(일본인) 官吏(관리)에게 돈을 뜯기는 것을 恨歎(한탄)한 노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아들 面書記(면서기)라 月給(월급)받아 일백쉰냥
쉰냥일랑 쌀값주고 스물댓냥 面長(면장)주고
駐在所(주재소)의 巡査部長(순사부장) 술먹자고 찾아오고
郡廳(군청)에서 郡主事(군주사) 洋服(양복)입고 出場(출장)오며
앞집술집 갈보집에 돈쓰라고 끌고가네
面書記(면서기)질 삼년만에 칠백쉰냥 빚을졌네
논밭사긴 고사하고 官吏待接(관리대접)에 집팔았네
土地調査事業(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빼앗기고 小作農(소작농)으로 轉落(전락)한 朝鮮農民(조선농민)들의 生活(생활)은 悲慘(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단지 土地(토지)만 빼앗긴게 아니라 日本人(일본인)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의 惡德商術(악덕상술)에 收入(수입)의 몇배나되는 빚을지고 끼니도 거르게되었습니다
<아리랑 打令(타령)>에는 當時(당시)朝鮮農民(조선농민)의 生活(생활)이 如實(여실)히 그러져 있습니다
李氏(이씨)의 四寸(사촌)이되지말고
閔氏(민씨)의 八寸(팔촌)이 되려무나
後斂(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랑 띄어라 노다 가세
南山(남산)밑에다 奬忠壇(장충단)을 짓고
軍樂隊(군악대)長短(장단)에 받들어 銃(총)만하네
---------------------중략-----------------------
말깨나하는놈 裁判所(재판소)로가고
일꺄나 하는놈 公同山(공동산) 간다------------------------------------------------------<이리랑 打令(타령)>이외가사는 앞선란 참조
“이씨의 사촌이 되지말고 민씨의 팔촌이되려무나”란 朝鮮王朝末期(조선왕조말기)의 權力構造(권력구조)를 諷刺(풍자)한 것입니다
奬忠壇(장충단)은 1900년에 고종의 명령으로 軍人(군인)들의 英靈(영령)을 기리기위하여 建立(건립)되었습니다
3절이하는 日帝植民支配(일제식민지배) 를 庶民(서민)들의 狀況(상황)을 이야기 하고있습니다
“말깨나 하는놈은일본인에 맞서 自己權利(자기권리)를 主張(주장)하는 朝鮮人(조선인)을 말하며”공동산”은 앞에서도 나왔던 共同墓地(공동묘지)를 뜻합니다
“서울아리랑” 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리랑 打令(타령)”의 4절가사는 初期(초기)朝鮮映畵(조선영화) <아리랑>의 主題歌(주제가)와 거의같습니다
또 영화<아리랑>主題歌歌詞(주제가가사)는 本來(본래) 進就的 劇團(진취적 극단) 土月會舞臺(토월회무대)幕間(막간)에서 불린<아리랑 고개>의 1절이라고 전해집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시내강변에 자갈도많고 요내 살림살이 말도많다
門前沃土(문전옥토)는 다팔아먹고 鐵窓生活(철창생활)이 왠말인가
간다고 간다고 가시던님은 단 十里(십리)도 못가서 발병났네
부잣집 곳간에 쌀도많고 거리 거리에 거지도 많다---------------------------<아리랑 고개>
1114--民謠(민요)-h
<아리랑 打令(타령)>과 달리 新(신)아리랑>이라고하는 新民謠(신민요)가있습니다
이것은 曲(곡)은같지만 歌詞(가사)의 內容(내용)으로보아 時代(시대)가 약간뒤라고 여겨집니다
山川草木(산천초목)은 젊어가고 人間(인간)의 靑春(청춘)은 늙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後斂(후렴)
城隍堂(성황당)까마귀 깍깍짓고 정든님 炳患(병환)은 날로깊어
無産者(무산자)누구냐 歎息(탄식)마라 富貴(부귀)와 貧賤(빈천)은 돌고돈다
감발을 하고서 주먹을쥐고 勇敢(용감)하게도 넘어간다
밭잃고 집잃은 동무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보냐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라랑고개로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오소 北間島(북간도)벌판이 좋다더라
쓰라린 가슨을움켜쥐고 白頭山(백두산)고개를 넘어간다
감발을 하고서 白頭山(백두산)넘어 北間島(북간도)벌판을 헤매인다
怨讐(원수)로다 怨讐(원수)로다 銃(총)가진 捕手(포수)가 怨讐(원수)로다----------------------------------<新(신)아리랑>
이노래에는 또
單間(단간)오막살이 우리父母(부모) 生角(생각)할수록 눈물이로다
아리랑 고개는 얼마나 멀게 한번 넘어가면 영영 못오나
우리의앞길의 獨立軍(독립군)아 뜻과같이 成功(성공)하게------
와 같은 歌詞(가사)가 들어가있는 곡도 있습니다
後斂(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滿洲(만주)罰(벌) 묵밭에 무엇보고 우리 沃土(옥토)를 떠났거나
언제 언제나 돌아가리 내나라 내 故鄕(고향) 언제가리
鴨綠江(압록강)건너올 때 지은눈물 아지도 그칠줄모르노라
밤마다 그리운 코고무신은 白頭山(백두산) 마루를 넘나드네-----------------------<아리랑>
滿洲(만주)의 거친들판과 白頭山一帶(백두산일대)에서 벌어진 항일독립투쟁은 차츰 국내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그영향이 민요에도 반영이됩니다
<아리랑>에서도 그점을 엿볼수 있습니다
西山(서산)에지는해 지고싶어지며 나를버리고 가신님은 가고싶어가나
사우다 싸우다 아니되면은 이 世上天地(세상천지)에다 불을 지르자---------------------<아리랑>
上記(상기)”아리랑”歌詞(가사)는 1931년 발행된<정선조선가요집>에 수록된것이며”싸우다 싸우다 아니 되면은 이 世上天地(세상천지)에다 불을 지르자”라는 部分(부분)은 먹으로 시커멓게
지워져있는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노래는 劇團舞臺(극단무대)의 幕間歌手(막간가수)에 의하여 全國的(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115--民謠(민요)-i
曠野(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 오늘은 北間島(북간도) 來日(내일)은 蒙古(몽고)땅
흐르고 또 흘러 浮萍草(부평초)같은 몸 故鄕(고향)땅 떠난지 그몇해련가 夕陽(석양)하늘
등에지고 달려가는 獨立軍(독립군)아 男兒一生(남아일생) 가는길은 未練(미련)이 없으라------------------------------------<曠野(광야)를 달리는 獨立軍(독립군)>
1920년대 이청천이 新興武官學校(신흥무관학교) 生徒(생도) 300여명을 이끌고 移動(이동)할 때 부른노래<曠野(광야)를 달리는 獨立軍(독립군)>은 독립군의 노래치고는 異色的(이색적)인 곡입니다
Melody-멜로디-를 당시 유행하던 윤심덕의<死(사)의 讚美(찬미)>에서 다왔는데 原曲(원곡)의 歌詞(가사)가 죽음을 決心(결심)한 이의 悲感(비감)을 表現(표현)한 것인만큼 새로지은 歌詞(가사)에도
그影響(영향)때문인지 勇敢性(용감성)보다는 悲壯感(비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민요라 잘라말하기 어렵지만 抗日獨立鬪爭(항일독립투쟁)속 에서 생겨난 곡이 몇가지 있습니다
이내몸이 鴨綠江(압록강)을 건너올때에 가슨에 뭉친 뜻 굳고 또굳어
滿洲(만주)들에 北風寒雪(북풍한설)몰아 붙여도 타오르는 憤(분)한마음 꺼질바 없고
오로라의 얼음산의 등에 묻혀도 우리 反抗(반항) 우리싸움 막지를 못하리
피에주린 倭(왜)놈들은 뒤를 따르고 괘씸할사 馬賊(마적)떼는 앞길 막누나
曠野(광야)에는 해가지고 날이 저문데 아픈다리 주린창자 쉴곳을 찾고
저녁이슬 흩어져 앞길적시니 쫓기는 우리 身世(신세)凄凉(처량)하다-----------------------------------------------------<苦難(고난)의 노래>
新(신) 大韓國(대한국) 獨立軍(독립군)의 百萬勇士(백만용사)야
祖國(조국)의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三千里(삼천리) 三千萬(삼천만)의 우리 同抱(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後斂(후렴) 나가 나가 싸우려가자
나가 나가 싸우려가자
獨立門(독립문)의 自由鐘(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려 나가자
怨讐(원수)들이 강하다 겁을 낼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落心(낙심)할건가
定義(정의)의날쌘 칼이 비끼는곳에
이길이 너와나로다
너 살거든 獨立軍(독립군)의 勇士(용사)가되고
나죽으면 獨立軍(독립군)의 魂靈(혼령)이됨이
동지야 너와나의 所願(소원)이 아니냐
빛낼이 너와나로다
鴨綠江(압록강)과 豆滿江(두만강)을 뛰어건너라
惡毒(악독)한 怨讐(원수)무리 쓸어 모아라
잃었던 祖國(조국) 江山回復(강산회복)하는날
萬歲(만세)를 불러보세-----------------------------------------------------------------------<獨立軍歌(독립군가)>
이러한 獨立軍歌(독립군가) 중에서 稀貴(희귀)하게도 作者(작자)가 判明(판명)된 곡이 鴨綠江行進曲(압록강행진곡) 입니다
이노래도 獨立軍(독립군)이 즐겨불렀다 합니다
1116—民謠(민요)-J
우리는 韓國獨立軍(한국독립군) 祖國(조국)을 찾는 勇士(용사)로다
나가! 나가! 鴨綠江(압록강)건너 白頭山(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韓國光復軍(한국 광복군) 惡魔(악마)의 怨讐(원수) 쳐물리자
나가! 나가! 鴨綠江(압록강)건너 白頭山(백두산) 넘어가자
眞珠(진주) 우리나라 地獄(지옥)이되어
모두 塗炭(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同抱(동포)는 기다린다 어서가자 故鄕(고향)에
등잔밑에 우는 兄弟(형제)가 있다
怨讐(원수)한테 밟힌 꽃포가 있다
同抱(동포)는 기다린다 어서가자 祖國(조국)에
우리는 韓國光復軍(한국광복군) 祖國(조국)을 찾는 勇士(용사)다
나가! 나가! 鴨綠江(압록강) 건너 白頭山(백두산) 넘어가자----------------------------------------------------<鴨綠江行進曲(압록강 행진곡) 박영민 작사 한유한 작곡
上記軍歌(상기군가)를 작곡한 한유한은 아버지 한흥교와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갔다 거기서 大學(대학)을 졸업한후 1931년 滿洲事變(만주사변)후 靑年學徒軍(청년 학도군) 에 參加(참가)했습니다
그는山東(산동)에서 抗日運動(항일운동)을 펼친뒤 西安(서안)으로 옮겨 중국군 정훈선무대에서 활약 1941년에는 아리랑악단을 조직하여 광복군의 사기를 드높였습니다
上記曲(상기곡)은 이과정에서 創作(창작)되었습니다
이곡은 1982년 4월13일 새종문화회관에서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63주년 기념식에서 한유진의 지휘로 국내초연을 했습니다
그밖에 만주에서 싸우는 光復軍兵士(광복군병사)들이 애창한 노래중에 기억할만한 것으로 光復軍石炭歌(광복군 석탄가) 가 있습니다
石炭白炭(석탄백탄)타는데 煙氣(연기)도 김도 안나고
가슴이 타는데 鬪爭(투쟁)의 불길이 오른다
後斂(후렴)에헤야 데헤야 에헤야 鬪爭(투쟁)의 불길이 오른다
서울長安(장안)타는데 漢江水(한강수)로나 끄련만
三千萬(삼천만)가슴타는데 무엇으로 끄려나
사쿠라가 떨어저 太平洋(태평양)속으로 묻히고
無窮花(무궁화)가 피어서 宇宙(우주)에 香氣(향기)를 피운다
倭(왜)놈의 志願兵(지원병) 죽으면 개떼죽음되고
光復軍(광복군)죽으면 獨立(독립)의 烈士(열사) 되누나
타는 말은가자고 발굽질 하는데 정든님 붙잡고
事情(사정) 事情(사정)하누나----------------------------------------------<光復軍(광복군) 石炭歌(석탄가)>
가엾을정도로 生活苦(생활고)를 노래하던 민요도 軍人(군인)이 바꾸어 부르면 그런대로 勇猛(용맹)한 노래가 됩니다
日帝支配(일제지배)도 末期(말기)에 이른 1940년을 前後(전후)하여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이러한 노래는 朝鮮(조선)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러한 抗日鬪爭歌(항일투쟁가)와는 달리 날로 격해지는 일제의 抑壓政策(억압정책), 發惡政策(발악정책)에 시달리는 생활을 恨歎(한탄)하는 노래가 민요투를 빌려불렸습니다
이무렵 戰勢(전세가) 그들의 豫想(예상)을 벗어나 점차 不利(불리)해지자 平靜心(평정심)을 잃은 일제의--- 終末(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發惡(발악)이 있었습니다
앞서소개한 光復軍兵士(광복군병사)들이 愛唱(애창)한 <光復軍石炭歌(광복군 석탄가)>에이어서 光復軍兵士(광복군병사)들이 訓練途中(훈련도중) 쉴 때 불렀다는<光復軍(광복군) 아리랑>이 있습니다
우리집 父母(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光復軍(광복군)恚(에)갔다고 말 전해주시오
後斂(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光復軍(광복군)아리랑 불러나 보세
狂風(광풍)이 분다네 狂風(광풍)이 분다네 三千萬(삼천만) 가슴에 狂風(광풍)이 불어요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배는 光復軍(광복군) 싣고서 오사는 배래요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漢陽城(한양성) 복판에 태극기펄펄 날리네-------------------------------------<光復軍(광복군) 아리랑>
이곡은 <密陽(밀양)아리랑> MELODY-멜로디-를 붙여서 불렀습니다
충청남도 아산지방 에 널리 電波(전파) 되었다합니다
1117--民謠(민요)-k
新高山(신고산)이 우루루 貨物車(화물차) 가는소리에
志願兵(지원병)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요
어랑 어랑 어허야
糧穀配給(양곡배급) 적어서 콩깻묵 먹고서 사누나
新高山(신고산)이 우루루 貨物車(화물차)가는 소리에
挺身隊(정신대)보낸 아버지 딸 가없어 울고요
어랑 어랑 어허야
풀만씹는 어미소 배가 고파서 우누나
新高山(신고산) 우루루 貨物車(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긁어갔구요
어랑 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族譜(족보)만 들고서 우누나------------------------------------------<화물차 떠나는소리>
이곡은 1930년대말부터 1940년대에 걸처서 日帝(일제)의 大陸侵略(대륙침략)이 進行(진행)되고 朝鮮(조선)에서 皇國臣民化(황국신민화) 政策(정책)이 强行(강행)되던 무렵의 노래입니다
지원병제, 여자정신근로대령, 그리고 戰線(전선)에서 不足(부족)한 彈皮(탄피)를 製造(제조) 하기 위한 原料(원료)로 金屬類一體(금속류일체)가 供出(공출)로 빼앗긴상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創氏改名(창씨개명)으로 이름을 빼앗기고 日本式(일본식)이름을 强要(강요)당하고 祖上代代(조상대대)로 내려온 족보를 들고우는 民族(민족)-----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民族的(민족적) 설움을---民族(민족)의 貌襲(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朝鮮(조선) 大衆歌謠(대중가요)의 始祖(시조)”라고 일컬어지는 것 가운데<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있읍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綠豆(녹두)밭에 앉지마라
녿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東學農民軍(동학농민군)에 대한 鎭魂曲(진혼곡)이라 할만한 口傳民謠(구전민요)입니다
쵀재우가 창시한 東學(동학)을 背景(배경)으魯(로)1894년에 일어난 大規模(대규모) 農民蜂起 (농민봉기)가음흉한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간뒤 지도자 전봉준이 처형되자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민중들이 이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전봉준은 어린時節(시절) 키가작아서”녹두”라는 別名(별명)을 얻었는데 東學(동학)農民軍(농민군)의 指導者(지도자)가 되자 “綠豆將軍(녹두장군)”이라는 愛稱(애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一般的(일반적)으로 노래에 나오는 “녹두밭”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가리키고 ‘파랑새”는 농민들을 끊임없이 탄압하는 外國軍(외국군), “청포장수”는 朝鮮(조선)의 民衆(민중)을 가리킵니다
상기곡은 전봉준을 總大將(총대장)으로 하는 농민군에대한 민중의 뜨거운 열의가 담겨있으며 그것은 또한 패주한 농민군의 未亡人(미망인)들이 戰死(전사)남편의 넋을 달래는
輓歌(만가)이기도 했읍니다
이노래는 그후 호남지방에서 자장가로 오랫동안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東學農民軍(동학농민군)에 얽힌노래들을 몇곡더 들어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뭣하려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룻푸룻
하절인줄 알았더니
白雪(백설)이 펄펄
嚴冬雪寒(엄동설한)이 되었구나
1118-唱歌(창가)-a
英語(영어)로 song, 獨逸(독일)의 lird 를 뜻하는 飜案(번안)이 唱歌(창가)라 할수있습니다
唱歌(창가)의 語源(어원)은 多分(다분)히 在來的(재래적)인 傳統音樂(전통음악)이나 民謠(민요)와 相反(상반)되는 뜻으로 西洋音樂(서양음악) 導入課程(도입과정)에서 外來的(외래적)인 노래를 뜻합니다
한국과 漢文(한문)을 竝行(병행)해서 쓰고있는 日本(일본)은 1000年前(년전) 平安時代(평안시대)부터 樂器(악기)의 가락을 口傳(구전)으로 傳受(전수)하는 것을 唱歌(창가)라고도 했습니다
14세기경 室町時代(실정시대)부터 짧은 가곡의 歌詞(가사)를 唱歌(창가) 라고도 했습니다
三百年前(300년전) 德用0時代(덕용0시대) 전부터는 수필 같은 글에서 小曲(소곡)의 가사를 쇼오카<唱歌(창가)>라고 쓴 것을 볼수있습니다
中國亦是(중국역시) “노래 부른다”는 뜻으로 歌唱(가창)이라는 말이있습니다
1881년 最初(최초)로 日本(일본)을 訪問(방문)했던 開化派(개화파)에 속하는 신사유람단 一行(일행)이 일본의 신문화, 즉 開化(개화)물결을 見聞(견문)하고 돌아올 때 하나의 새로운
外來文化的(외래문화적) 傾向(경향)에서 묻어 들어온 것이 아니었나 하고 풀이하는 學者(학자)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開化期(개화기)때 “唱歌(창가)”라는 槪念(개념)는 外來音樂(외래음악) 즉 西洋音樂(서양음악)을 指稱(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開化期(개화기)의 特徵(특징)의 하나가 新文化導入(신문화도입) 중에서 新制(신제) 敎育熱(교육열)이 날로 높아갔습니다
1895 2월에 발표한 이른바 敎育詔書(교육조서)속에”敎育(교육)은 智(지) 德(덕) 그바탕이라”고 되있고 특히 注目(주목) 臣民(신민)은 忠君(충군)하고 愛國(애국)하는 마음을 强調(강조)하였습니다
그후 開化思想(개화사상)중 愛國歌詞(애국가사)에 나타난 現象(현상)은 愛國(애국)하고 忠君(충군)하고 敎育(교육)하자는 歌詞(가사)가 제일 많이 만들어 졌습니다
1895년 4월16일 한성사범학교 관제, 5월10일 외국어학교 관제 7월19일 소학교령, 7월23일 한성사번학교 규칙등이 발표되었습니다
1908년 認可(인가)를 强要(강요)하는 사립학교 설립인준을 받은 학교는 전국에서 2250개 학교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드라고 당시 새로운 文明(문명)에 대해 교육을 통한 向學熱(향학열)이 불타고 있었음을 알수있습니다
皇城新聞(황성신문) 1900년 5월4일자에 “京城學堂(경성학당) 卒業式(졸업식)전)에서 齊聲唱歌(제성창가)”라는 記事(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리고 1905년 各級學校(각급학교) 入學生(입학생) 募集廣告(모집광고)에는”唱歌(창가)”라는 科目(과목)이 처음 登場(등장)합니다
그중에서 “唱歌(창가)는 軍歌(군가)音調(음조)로 新體敎育(신체교육)함”이라는 文句(문구)도 실려있습니다
原來(원래) 우리나라 傳統音樂(전통음악)이나 俗樂(속악)에 있어서는 3박자로 된 rhythm-장단-에 根本(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헌데 軍歌(군가)는 行進曲調(행진곡조)로 중심이되어 있기 때문에 2박자또는 4박자로 구성되는 새로운 音樂形態(음악형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분히 異質的(이질적)인 音樂(음악) 눈을뜨고 귀를 기울이는 動機(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8분의 6박자를 둘로묶어 2박자에 접근하는 方式(방식)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基督敎文化(기독교문화) 즉 宣敎師(선교사)들에 의한 西洋(서양)노래인 讚頌歌(찬송가)와 더불어 미국의 世俗的(세속적)인 노래 民謠(민요)를 배우면서 2박자음악에도 익숙해가기 시작했습니다
規則的(규칙적)인 强弱(강약) 直線的(직선적)인 力感(역감)을 지닌 2 拍子系統(박자계통) 의 노래는 씩씩한 行進(행진)의 이미지를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無氣力(무기력)한 舊世代(구세대)에 反撥(반발)을 느낀 젊은이들은 在來(재래)의 노랫가락에서는 볼수없던 躍動感(약동감)과 新鮮(신선)함을 充足(충족)시킬수 있었습니다
敎育(교육)을 통해 國家(국가)의 干城(간성)을 培養(배양)하려는 敎育指導者(교육지도자)들은 2박자 音樂(음악)의 必要性(필요성) 看破(간파)했던 것입니다
2박자계통의 노래는 體育(체육)과 結付(결부) 되었습니다
體育訓練(체육훈련)에 中點(중점)을 두어 武器(무기)없는 軍事訓鍊(군사훈련)과 같은 體育時間(체육시간)에 2박자의 노래는 必修敎材(필수교재)였습니다
體育訓練(체육훈련)도 救國(구국)을위한 目的意識(목적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노래의 音樂的(음악적)인의 配慮(배려)보다는 歌詞(가사)에 중점을 두어 이미 市中(시중)에서 流行(유행)되는
曲調(곡조)면 足(족)했습니다
즉 西洋(서양) 讚頌歌(찬송가) melody-멜로디-또는 歐美(구미)의 民謠(민요)가락에 歌詞(가사)를 실어서 노래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日本軍歌(일본군가) 가락이나 日本曲 唱歌(일본곡창가) melody-멜로디-가 제일많이 利用(이용) 되었습니다
이점은 아무리 그時期(시기) 作曲者不在(작곡자부재) 狀態(상태) 였다해도 日本(일본)에 國權(국권)을 侵奪(침탈)당해 죽이고 싶도록 싫어하면서 일본노래는 괜찮다는 것이어서 뒷맛이 씁쓸합니다
1905년 제2차 한일조약으로 伊藤博文(이등박문)이 초대총감에 취임하면서 한국의 외교권, 군사권을 손아귀에쥐고 본격적인 한국지배에 나서게 되는데 이렇게되기까지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의 의사를 물어보는 節次(절차)도 한번없었고 졸지에 이러한 權利(권리)를 빼앗기는데 속시원하게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의 內政干涉(내정간섭)중의 하나가 한국의 學制(학제)를 改編(개편)하고 敎科用(교과용) 도서의 검정을 설치하면서 政府發行(정부발행)의 敎科書(교과서) 編纂事業(편찬사업)도
進行(진행)시켰습니다
1909년 修身(수신) 국어 理科(이과) 산수등의 初等敎科書(초등교과서) 에이어 唱歌敎科書(창가교과서)도 發行(발행)했습니다
1881년 일본 문부성발행으로 펴낸<소학창가 독본>에서 비롯된 公用語-공용어-가 唱歌(창가)였습니다
일본의 깊숙한 干涉(간섭)밑에서 1910년 5월20일 발행된 學部編纂(학부편찬) 唱歌集(창가집)이 나왔습니다 이름하여 <보통교육창가집> 제1집인것입니다
親日內閣(친일내각) 一邊倒(일변도)가 되어버린 政府(정부)에서 엮어내는 敎科書 內容(교과서내용)은 排日(배일)과 獨立思想(독립사상))을 去勢(거세)시키는 방법의하나로
日本(일본)측이 判斷(판단)하여 不溫(불온)한 내용의 敎材(교재)는 이미 발행된것이라도 가차없이 發賣禁止(발매금지) 押收處分(압수처분)했습니다
1119--唱歌(창가)-b
1910년 1월9일 皇城新聞(황성신문)에 실린 ‘普通歌 編述(보통가 편술)” 제목의 내용을 보면 ”地方(지방)의 각 私立學校(사립학교)에 編述(편술)한 不良(불량) 唱歌集(창가집)을 중지시킨것에 대해
서는 이미 報道(보도)한바 있거니와 目下(목하) 普通唱歌(보통창가)를 학부-文敎部(문교부)-에서 編述中(편술중) 아라고 한다” 고 실려있습니다
여기서 不良唱歌(불량창가)로 指稱(지칭)한 것은 民族性鼓吹(민족성고취)와 獨立精神(독립정신)등을 昻揚(앙양)시키는 창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단정치를 실시하던 데라우치 총독이 1911년 제2회 도장관회의석상에서”私立學校(사립학교)에서 唱歌(창가)와 기타 다른방법으로 일본에 반항하는 내용의 글들을 쓰는자가 있는가를
主意(주의)깊게 살피라”고 强調(강조)하고 있습니다
1912년 3월27일자 每日申報(매일신보)에는 金仁湜(김인식) 선생저 敎科書用(교과서용) 보통창가집 금 한冊(책) 85매 15전 보급서관 발행 이라는 광고문이 있습니다
1914년 11월12일자에는 李常俊編纂(이상준 편찬)作譜(작보)<朝鮮俗曲集(조선속곡집)> 상권 곡보부 정가 35전 조선복음 인쇄소 발행이라는 廣告(광고)도 보입니다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의 韓英書院(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은 제1차 40부, 제2차 99부를 발행했었는데 얼마안가서 경기도 경무국에 摘發(적발)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94년, 7월 淸日戰爭(청일전쟁)이 韓半島(한반도)에서 발발했읍니다
이무렵 軍歌集(군가집) 15종이 刊行(간행)되었고 日本陸軍(일본육군)의 노래가 國權(국권)을 뺴앗긴 時期(시기)도 아닌데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1897년 일본의 軍艦行進曲(군함행진곡)이 크게 流行(유행)했다는 紀錄(기록)도 있습니다
일제말기 演藝人活動(연예인활동)을 하려면 技藝證(기예증)을 소지해야만 했고 이자격증을 받으려면 소정의 資格試驗(자격시험)을 치러야했고 논문시험, 실기시험을 치렀는데 어떤
國樂演奏人(국악연주인) 은 國樂器(국악기) 해금연주로 上記言及(상기언급) “軍艦行進曲(군행진곡)”을 煙酒(연주)해보라고 强要(강요)하는 沒常識(몰상식)한 侮辱(모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896년, 7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高宗(고종)皇帝誕辰祝歌(황제탄신축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祝歌(축가)의 曲調(곡조)가 英國國歌-영국국가-god save the king-였다고 합니다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궁휼이 보소서
이나라 이땅을 지켜 주옵소서 오 주여 이나라
보호하소서
史學家(사학가)들은 이런범주의 노래를 開化期唱歌(개화기창가)라는 category-카테고리-에 包含(포함)시키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기 各級學校(각급학교) 入學生(입학생)募集廣告(모집광고)에 ‘唱歌(창가)”라는 과목이 처음등장했고 그중에서도 “唱歌(창가)는 軍歌音調(군가음조)로 新體敎育(신체교육)함”
이라는 文句(문구)로 表現(표현)하고 있습니다
軍歌(군가)라함은 다분히 西洋音樂化(서양음악화)된 日本(일본)의軍歌調(군가조) 가 크게 影響(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1900년 2월 아직 國權侵奪(국권침탈)이 이루어지기도전 日本人(일본인) 設立(설립)한 일어학교가 전국에 11개가 개설되어 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文藝年鑑(문예연감)에 기록된 唱歌運動(창가운동)의 起源(기원)및 動機(동기)를 설명하는 文獻(문헌)을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우리민족의 挫折(좌절)의 역사속에서
民族的覺醒(민족적각성) 즉, 國權(국권)을 回復(회복)해야겠다는 獨立精神(독립정신)에 하에 향 基督敎(기독교)的(적) 풍조가 움트게되었고 마음에 깊히 파묻힌 감정을 발로시킨 것이
바로 讚頌歌(찬송가)에서 唱歌(창가)로 나타나게 되었다---중략---
1896년 4월7잉 韓國最初(한국최초) 한글전용신문이 創刊(창간)될 무렵부터 新聞(신문)에 많은 唱歌(창가)의 歌詞(가사)들이 실린 것을 볼수있습니다
大槪(대개) 4.4조로 되어있는 것이 特徵(특징)입니다
뿐만아니라 愛國歌(애국가)라는 가사가 계속실리고게 되었고 新聞社(신문사)는 때때로 講演會(강연회)를 열어서 啓蒙運動(계몽운동)을 할 때 一同(일동)은 愛國歌(애국가) 또는
皇帝誕辰 祝歌(황제탄신축가) 같은 노래를 크게불렀다는 記事(기사)를 실어서 讀者(독자)들의 心情(심정)을 磁極(자극)시켰다라고 記述(기술)하고 있습니다
1928년 11월 30일 발행된 경성청문당서점<보통학생창가집>을 살펴보면 唯一(유일)하게 윤국영작품”반달”이 실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창가집역시 일본창가 “미나도 港(항) 가락”에 <우리學校(학교)>라는 제목의 노래가 실려있습니다
또한곡조 <갈매기>라는 노래가 실려있는데 이노래역시 일본노래 <하마지도로> 라는 창가입니다
1923년경부터 민중속에서 일어난 民族運動(민족운동)의 하나로 “조선물산 장려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兒童文學家(아동문학가) 윤석중이 야관 15살 때 당선된노래<物産 奬勵歌(물산장려가)
를 일본 軍艦行進曲(군함행진곡) 가락에 맞추어 불려졌습니다
정말로 啓蒙(계몽)을하고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는데 불리고 하는 노래가 歌詞(가사)만 좋으면 되지 멜로디는 國權(국권)을 侵奪(침탈)한 일본가락 이어도 되는걸까요??
開化期以後(개화기이후) 學校敎育(학교교육)에서 20년대부터는 幼稚園(유치원) 小學校(소학교) 中學校(중학교) 등에서 唱歌(敎材(창가교재)로 쓰여진 日本音階(일본음계)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日本音律(일본음율)에 同質化(동질화)되어가며 成長(성장) 1920년대말부터
1930년대까지 産業化(산업화)된 레코드문화에서 일본노래 엔카가 抵抗(저항)없이 世俗的(세속적)인 流行音樂(유행음악)에) 亡國(망국)의 서러움을 달래보는 精神的(정신적)인 敗北者(패배자)를
자처하게 되어갔다는 안타까운 歷史(역사)를 남깁니다
1120--唱歌(창가)-c
甲午年(갑오년) 난리를 전후해서 巷間(항간)에 이런노래가 널리번져 나갔습니다
가보세<甲午(갑오)> 가보세 어서 가보세 을미적<乙未(을미)>
을미적 하다가 병신<丙申(병신)>되나니
가보세 가보세 어서 가보세
甲午年(갑오년) 正月(정월) 全羅北道(전라북도) 고부에서 東學接主(동학접주) 全琫準(전봉준)이 영도하는 農民蜂起(농민봉기)를 바로 甲午年(갑오년) 亂離(난리)라고 합니다
다음해 2월 중국상해에서 甲申政變(갑신정변)을 일으킨 金玉均(김옥균)이 刺客(자객) 홍종우의 손에 被殺(피살)되었습니다
을미년 8월 日本(일본)의 浪人(낭인)과 軍人(군인)들이 景福宮(경복궁)에 侵入(침입) 國母(국모) 민비를 弑害(시해)했습니다
병신년 2월 高宗(고종)이 王世子(왕세자)와함께 貞洞(정동)에있는 러시아 公事官(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
소위 俄館播遷(아관파천)이 그것입니다
같은해 2월 總理大臣(총리대신) 金弘集(김홍집)이 宮中(궁중)에서 被殺(피살)되었습니다
김옥균, 민비, 김홍집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뒤숭숭한 것이 당시 社會相(사회상)이었습니다
俗談(속담)에 “民心(민심)은 天心(천심)이라”고들 합니다
“民心(민심)의 共同體(공동체)”같은 自然發生的(자연발생적)인 노래----庶民社會(서민사회)에서 自生(자생)하는노래 가 바로 天心(천심)입니다
壬辰倭亂(임진왜란)때 서울長安(장안)이 쑥밭이 되었던 것을 想起(상기) 난리가나면 곧 서울을 떠나야 산다는 다분이 煽動的(선동적)인 노래이기도 합니다
오라 오라 우리 軍人(군인)들아 총대메고 바랑지고
고개고개 넘어갈대 父母(부모) 妻子(처자) 生角(생각)말고
어서 어서 나아가세-------------------------------------------兵丁打令(병정타령)
짚신에 감발하고 洋服(양복)저고리에 핫바지 머리는 상투에다 작은북을 걸머메고 뚱땅뚱땅 북을치며 단조로운 노랫가락을 打令調(타령조)로 불러대는 이노래는 일종의 募兵歌(모병가)
였다고 할수있습니다
이런노래들의 가락형태는 俗謠(속요)의 象徵(상징)으로 傳來(전래)되어왔던 雜歌形態(잡가형태)로 모습이 바뀌면서 새로운 歌詞(가사)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兵丁打令(병정타령)> <妓生打令(기생타령)> 등이 좋은예가 됩니다
이런 雜歌(잡가)를 통하여 當時(당시) 社會相(사회상)을 알수있습니다
이러한 노래속에 처음으로 “軍歌(군가)”라는 낱말이 登場(등장)합니다
1900년대초 新入生(신입생)募集(모집)에 唱歌(창가)라는 科目(과목)이 登場(등장)하고 “唱歌(창가)는 軍歌(군가)音調(음조)로 新體敎育(신체교육)함”라는 文句(문구)로 表現(표현)하고있다는
上記言及(상기언급)이 있기도 합니다
기록에보면 불란서식 曲號隊(곡호대)는 갑오년 창설되었는데 곡호대에 부속된 曲號手(곡호수)들이 1901년 독일인 음악가 엑켈트를 초빙했습니다
定式(정식)으로 西洋音樂(서양음악) 技法(기법)을 基礎(기초)로한 軍樂隊(군악대) 創設以前(창설이전)의 軍歌(군가)라는 形態(형태)를 想像(상상)할수 있습니다
앞선 <창가-a>에서 언급한 1910년 학부보통창가집 27곡이 5선악보를 붙여 發刊(발간)되었을 때 朝鮮(조선)의 事情(사정)은 이미 親日(친일)內閣(친일내각) 一邊倒(일변도)로 바뀐후였습니다
이창가집은 1892년 이미 발행되었던 일본의 小學校用(소학교용) 唱歌集(창가집)을 그대로 飜案(번안)한것에 불과했습니다
이창가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大部分(대부분)이 西洋(서양)의 民謠風(민요풍)의 飜案曲(번안곡) 과 太半(태반)이 日本人作曲家(일본인 작곡가)의 作品(작품)인데 우리의 傳統的(전통적)인
5음계와 또다른 日本(일본)의 5음계 旋法(선법)으로 構成(구성)되어있는 日本式(일본식) 唱歌(창가)였읍니다
1920년대에서 向後(향후) 10년경까지 韓國唱歌(한국창가)의 특징은 當時(당시)의 時代相(시대상)의 한 斷面(단면)을 表出(표출)하고 있습니다
노래의 形態(형태)는 外國曲調(외국곡조)에다 우리말 歌詞(가사)를 붙여불렀던 노래가 많았습니다
1121—唱歌(창가)-d
일본책은 29곡인대 한국책은 27곡으로 2곡이 빠진 것은 日本(일본)의 國慶日(국경일) 慶祝(경축)노래가 削除(삭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영국 스코틀랜드 민요<auld lang syne-올드랭사인->가락은 이미 우리 舊愛國歌(구애국가) melody-멜로디-로 借用(차용)되었는데 日本敎科書(일본교과서)에는
“卒業歌(졸업가)”로 되있습니다
그時期(시기)일본이 비록 朝鮮(조선)을 植民地(식민지)로 轉落(전락)시켰지만 音樂(음악)에서는 그들도 西洋音樂(서양음악)을 借用(차용)해 使用(사용)하고 있는점은 우리와 다를바 없었습니다
일찍 平壤(평양)에서 開校(개교)되었던 숭실학교등 基督敎系統(기독교계통)의 학교에서 西洋人敎師(서양인교사) 들에게 西洋音樂(서양음악)을 指導(지도)받았던 洋樂(양악)의 先驅者(선구자)
李聖植(이성식), 金仁湜(김인식)등의 다분히 西洋 讚頌歌調(서양 찬송가조)에서 進一步(진일보)한 創作品(창작품)들인 이성식의 中等唱歌集(중등창가집)등이 發表(발표)되기도 했습니다
皇室洋樂隊(황실양악대) 出身(출신)이요 안기영의 <내고향을 이별하고> 선우일선의 <태평연>作曲家(작곡가) 이기도 한 鄭士人(정사인), 後日(후일) 朝鮮正樂傳習所(조선정악전습소)로
바뀌는潮陽俱樂部(조양구락부) 李尙俊(이상준) 등의 愛國的-애국적-인唱歌(창가)도 만들어졌으나 1910년 일제가 總督政治(총독정치)를 하면서 탄압을 하자 대개가 地下(지하)로 숨어버렸습니다
이 當時(당시) 唱歌(창가)가 melody-멜로디-를 日本軍歌(일본군가)등을 借用(차용)한것등은 痛歎(통탄)할일이나 歌詞(가사)의 特徵(특징)은 時期(시기)가 時期(시기)인만큼 外國文物 (외국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때 開化思想(개화사상)을 鼓吹(고취)시키는 <勉學歌(면학가) <學徒歌(학도가)> 또는 民族性(민족성)을 强調(강조)하는 愛國的(애국적)歌詞(가사)들이었습니다
또하나의 특징은 西歐(서구)의 通俗的(통속적) melody-멜로디-를 이용한 노래도 있었지만 日本曲調(일본곡조)에 우리말가사를 붙여부른 노래가 많았습니다
아무리 時期(시기)가 韓國傳統歌謠式(한국전통가요식) 歌謠(가요)를 創作(창작)할 人才不在(인재부재)였다고 하나 强制(강제)로 植民地(식민지)로 轉落(전락)시켜 그렇게 恥辱的(치욕적)인 삶을 살게한
張本人(장본인)들인 徹天之怨讐(철천지원수) 인 日本人(일본인)들의 가요를 使用(사용)한점은 두고두고 反省(반성)하고 痛歎(통탄)해야할 문제입니다
“노래가사만 啓蒙的(계몽적) 愛國的(애국적)이면 되었지 멜로디는 일본노래라도 괜찮다” 는 그시기 사람들의 安日(안일)한 認識(인식)은 결코 歡迎(환영)할 수 있는 생각은 못됩니다!!
학교창가독본이 日本唱歌集義(일본창가집) 의 飜案(번안)이었고 高學年(고학년)에서는 日本語歌詞(일본어가사)로 敎育(교육)받아 日本特有(일본특유)의 음계로 노래함으로써 점차
가락에 異質感(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갔습니다
해서 지금도 日本植民地 經驗(일본 식민지경험)이있는 실버세대에서는 일본엔카를 아무가책없이 애창하는 부류가있습니다
특히 音感的(음감적)으로 專門性(전문성) 이없는 一般大衆(일반대중)은 신식노래 新式唱歌(신식창가)라는 새로운 노래형태에 매력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상기 창가독본 <보통교육창가집>에 실린 27곡을 살펴보면---
첫번째노래 ‘기러기 雁(안)”은 1892년 발행 일본소학창가집 에 있는곡으로 日本傳來童謠(일본 전래동요)를 官立(관립) 동경음악학교 초대교장이던 이자와가가 改作(개작)한 곡조였습니다
우리말가사로 가럭아~ 날아라 큰기러기는 앞으로 작은 기럭이는 뒤로 사이좋게 날아라”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였습니다
7번째 “나비 蝶(접)”은 스페인 民謠(민요)였고 일본도역시 外國歌謠(외국가요)를 借用(차용)하는건 우리나라와 다를바 없었습니다
14번 갈지라도 21번 春潮(춘조)는 讚頌歌(찬송가)에서 빌려온 外國曲調(외국곡조) 였습니다
18번 學徒歌(학도가)는 일본의 “鐵道唱歌(철도창가)” 멜로디에 얹어부른 痛歎(통탄)할 痕跡(흔적)입니다
11번 學問家(학문가) 도 일본노래 “金剛石(금강석)”인데---- 일본이 소헌태후 御歌(어가)를 直譯(직역)한 노래입니다
27번 卒業歌(졸업가)는 앞서 언급한 스코틀랜드 민요 alud lang syne-올드랭사인- 입니다
1900년대부터 西洋音樂(서양음악)을 代辯(대변)하는 것이 곧 唱歌(창가)였습니다
開化烈風(개화열풍)속에서 唱歌時代(창가시대)가 開幕(개막) 1930년대초 record 文化(레코드 문화)가 本格的(본격적)으로 등장하기까지 창가는 音樂的(음악적)인 情緖面(정서면)에서
絶對的(절대적)인 影響力(영향력)을 誇示(과시)했읍니다
唱歌(창가)라는 것이 大衆(대중)의 生活文化(생활문화)로 손쉽게 受容(수용)될수 있었던 것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122—唱歌(창가)-e
첫째 大衆(대중)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부를수 있다 學校(학교) 軍隊(군대) 禮拜堂(예배당) 기타 啓蒙的(계몽적)인 모임에서 必修條件(필수조건)의 하나였습니다
둘째 音域(음역)이 넓지않고 rhythm-리듬-이 單調(단조)로워 一體感(일체감)을 造成(조성)하는데 安城(안성)맞춤입니다
셋째노래의 가락보다 주로 歌詞(가사)에 중심을 두어 伴奏(반주)에 置重(치중)하지 않아도 됐다
넷째曲調(곡조)의 길이가 普遍的(보편적)으로 짧아서 歌詞(가사)의 反復(반복)에 따라 가락이 반복되므로 익히기 쉬었다
다섯째노래의 技巧(기교)나 表現(표현)이 間斷(간단)하므로 普及(보급)이 容易(용이)했다
여섯째 音階(음계)는 서양음계가 主宗(주종)이지만 대개 5음계로 만들어진 노래이므로 西洋音樂(서양음악)이라는 異質感(이질감) 이 減少(감소)되었습니다
일찍이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外國人(외국인)인 美國宣敎師(미국 선교사)로부터 西洋音樂(서양음악)의 基礎理論(기초이론)을 習得(습득)한 洋樂界(양악계) 의先驅者(선구자)요
韓國最初(한국최초) 作曲家(작곡가)로 평가받는 金仁湜(김인식)씨가 편찬한 “普通唱歌集(보통창가집)”이 있습니다
1912년 3월18일자로 발행된 이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小川(소천)>, <까마귀>.<明月(명월)>,<나비>,<입은 하나요>,<父母(부모)의 恩德(은덕)1>,<父母(부모) 恩德(은덕)2>,<師(사) 의 思(사)>,<掃除(소제)>,<星(성)>,<歸雁(귀안)><시계>,
<태평양행>,<卒業歌(졸업가)>,<日曜日(일요일)>,<惜別(석별)>,<告別(고별)>--------
이책은 韓日合邦(한일합방)後(후) 個人(개인)이 엮은 最初(최초)의 曲調(곡조) 唱歌集(창가집)입니다
내용곡목에서 보듯이 학부발행 창가집곡목과 大同小異(대동소이) 하며 讚頌歌(찬송가)式(식) 唱歌數曲(창가수곡)을 添加(첨가)하였을 뿐입니다
김인식과 同時代(동시대)의 人物(인물) 이상준역시 唱歌時代(창가시대)의 先驅者(선구자)입니다
그는 1886년 黃海道(황해도)에서 태어나 열두살에 홀로 서울에와서 피어선 聖經學校(성경학교)에 들어가 宣敎師(선교사)로부터 西洋音樂(서양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는 김인식에 뒤지지않는 音樂的(음악적) 才能(재능)을 發揮(발휘)했습니다
그의나이 15살에 평양에가서 안창호선생이 설립한 大成學校(대성학교)에서 창가를 가르쳤습니다
그이후 그의 활동은 우리의 傳來音樂(전래음악)을 5선악보에 채보하여 우리의 전통가락을 西洋式樂譜(서양식 악보)로 정리했습니다
그가 1918년, 2월20일자로 編輯發行(편집발행)했던<最新唱歌集(최신창가집)>을 살표보면----
日本儀式歌(일본의식가) 5곡과 더불어 <직업>,<춘풍>,<蝶(접)>,<시계>,<雨(우)>,<行船(행선)>,<孝順(효순)>,<師(사) 의 思(사).<갈지라도>,<春末(춘말)>,<夏(하)>,<앞으로>,<夏期休業(하기휴업)>
<學徒歌(학도가)>,<野球歌(야구가)>,<勸學歌(권학가)1>,<勸學歌(권학가)2>,<關東八景(관동팔경)>----
1910년 학부발행 창가집이나 김인식창가집등에서 重複(중복)되는 曲調(곡조)가 많습니다
단지 우리 傳來民謠風(전래민요풍) 노래를 정리한것과 外國民謠(외국민요)를 借用(차용)한 노래들이 몇곡 特色(특색)있는 唱歌集(창가집)입니다
日本(일본)의 儀式(의식)노래등을 揷入(삽입)한 것도 當時(당시)의 總督府檢閱(총독부검열)을 通過(통과)하기위한 便法(편법)으로 利用(이용)했으리라 믿고싶습니다
또하나의 이 唱歌集義(창가집)의 特色(특색)은 이상준씨의 作品(작품)이 실려있다는데 큰뜻이 있습니다
西洋音樂(서양음악)의 先驅者(선구자)이던 홍난파씨는 日本曲調(일본곡조)에 韓國語歌詞(한국어가사)를 붙여서 노래부른 것을 못마땅하게 生角(생각)했던지 그가 1915년에 엮어낸
그의 <通俗唱歌集(통속창가집)>에는 요즈음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 外國(외국)노래가 많이있습니다
英國民謠(영국민요) <한떨기 薔薇花(장미화)가 “사우가”로 美國民謠(미국민요)<기러기>가”첫서리”로<나아가자 동무들아>가 “월야” 스코틀랜드 민요<離別(이별)의노래>가”어머님 뵙겠내”
<보리밭>이”산보가”로 각각 曲名(곡명)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부사산> <천연의미> <화녀> 등은 1900년대에 크게 流行(유행)했던 일본노래 인것입니다
總督府政策(총독부정책)이 반드시 日本曲(일본곡)을 섞어서 出版(출판)해야 한다는 强壓政策(강압정책)을 證明(증명)하고 있읍니다
1910년 以前(이전)의 唱歌(창가)에서 韓國(한국)의 情緖(정서)가 깃든 西洋樂譜(서양악보)에 의한 노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만 1905년경 평양에서 김인식이 작곡하였을것으로 추정되는 學徒歌(학도가)가 불리어진 痕跡(흔적)이 있습니다< 1939년 4월20일 朝鮮日報(조선일보) 記事(기사)>
<勸學歌(권학가)>의”소년은 이노하고 學(학)난성하니------하는노래의 melody-멜로디-는 淸日戰爭(청일전쟁)시 當時(당시) 황해해전때 크게 流行(유행)했던 日本軍歌(일본군가)
”勇敢(용감)한水兵(수병)” 가락 그대로입니다
1910년 每日申報(매일신보)에 平壤(평양)에서 이성식이 發刊(발간)한 中等唱歌集(중등창가집)은 내부에서 發賣禁止(발매금지), 押收(압수)했다는 記事(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이 記事(기사)로 보아 이창가집은 학부발행”창가집”에 對稱的(대칭적)인 唱歌集(창가집)이기때문 인것으로 추정됩니다
앞서 <종횡무진 가요사 1113>언급했듯이 이창가집은 西洋讚頌歌調 (서양찬송가조)에서 進一步(진일보)한 이성식의 창작집이었습니다
1123—唱歌(창가)-f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의 出發(출발)을 흔히들 1910년대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大勢(대세)입니다
時期(시기)는 우리 歷史(역사)에서 가장 恥辱的(치욕적)인 時期(시기)인 韓日合邦(한일합방)이 발생했고 國權(국권)을 喪失(상실)한후 獨立(독립)과 救國(구국)을 노래하던 啓蒙唱歌(계몽창가)및
義兵歌(의병가)가가 사라지고 代身(대신) 學校唱歌(학교창가)나 日本唱歌(일본창가)의 影向(영향)을받은 流行唱歌(유행창가)들이 風味(풍미)했습니다
이때 불려진 <流行唱歌(유행창가)>가 韓國大衆歌謠(한국대중가요) 의 出發(출발)이 됩니다
결국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는 日本(일본)의 唱歌(창가), 歌謠影響(가요영향)속에서 萌芽(맹아)를 터뜨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日本(일본)의 影響(영향)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내내 持續(지속)될수밖에 없었습니다
唱歌(창가)는 開化期(개화기)때 流行(유행)한 노래였습니다
形式的(형식적) 特徵(특징)은 歌唱(가창)을위한 노래였기에 부르기위해 分節(분절) 後斂久(후렴구) 合歌(합가)등의 型式(형식)이 隨伴(수반)됩니다
唱曲(창곡)은 초기엔 데체로 西洋曲(서양곡)이었고 후엔 創作曲(창작곡)많이 불려졌습니다
셋째 rhythm-리듬-은 7.5조가 중심이나 4.4조 그밖의 自由(자유)로운 리듬으로 되있습니다
물론 7.5조가 唱歌(창가)의 基本rhythm-기본리듬-입니다
이렇게보면 창가는 7,5조의 律調(율조)가 기본이되고 그밖의 4.4조 및 自由律(자유율)의 唱歌(창가)들이 周邊的(주변적)것으로 구분됩니다
여기에 후렴구, 분절, 합가, 附曲(부곡)등의 形態上(형태상)의 特徵(특징)을 갖고있습니다
말하자면 노래부르기에 알맞은 型式(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唱歌(창가)는 무엇보다도 時代狀況上(시대상황상) 日本唱歌(일본창가)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에 啓蒙唱歌(계몽창가)도 獨立唱歌(독립창가)도 없었다고 平價切下(평가절하)는건 辭讓(사양) 하겠습니다
日本唱歌(일본창가)가 크게 流行(유행)하면서 自然(자연)스럽게 朝鮮(조선)에 流入(유입)되어 朝鮮唱歌(조선창가)로 變容(변용)되었습니다
“唱歌(창가)라는 名稱自體(명칭자체)가 일본것이고 7.5조 rhythm-리듬-도 日本唱歌(일본창가)의 리듬이다”라는 글이 보입니다
물론 敎會(교회)에서 불리던 讚頌歌(찬송가)도 唱歌(창가)에 影響(영향)을 주었습니다
敎會(교회)는 이미 1890년대 일찍이 朝鮮(조선)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 以前(이전)에 catholic-카톨릭-이 들어와 많은 信徒(신도)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敎會(교회)나 聖堂(성당)에서 讚頌歌(찬송가)를 많이 부르고 그 讚頌歌rhythm-찬송가 리듬-이 唱歌(창가)에 影響(영향)을 준것입니다
7.5조가 아닌 4.4조거나 自由(자유)로운 律格(율격)의 唱歌(창가)는 讚頌歌(찬송가)에서 따온 律格(율격)이었습니다
讚頌歌(찬송가)는 代替(대체)로 自由(자유)로운 rhythm-리듬-의 노래였기에 이를 改詞(개사)한 唱歌亦是(창가역시) 自由(자유)로운 律格(율격)을 갖게된것입니다
1896년 에 發刊(발간)된 獨立新聞(독립신문)에는 愛國歌(애국가), 獨立歌(독립가) 등 憂國唱歌(우국창가)가 실려있어 初期唱歌(초기창가)의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높으신 賞主(상주)님 慈悲(자비)론 賞主(상주)님 矜恤(긍휼)히 보소서
이나라 이땅을 지켜주옵소서 오 主(주)여 이나라 保護(보호)하소서
우리의 大君主(대군주) 陛下萬歲(폐하만세) 萬萬歲(만만세)로다
福(복)되신 오늘날은 恩惠(은혜)를 내리사 萬壽無疆(만수무강)케
하여 주소서------------------------------------------------------------<皇帝(황제) 誕辰歌(탄신가)>
獨立新聞(독립신문) 1896년 9월3일에 보도에 의한 ---1896년 7월 25일 高宗(고종)誕辰日(탄신일)을 맞아서 새문안교회에서 불려진 皇帝誕辰歌(황제탄신가)입니다
이노래의 melody-멜로디-는 英國國歌(영국국가)”god save the king” 였습니다
1905년에 發刊(발간)된 <合同讚頌歌(합동찬송가)>제486 장의 곡이기도 합니다
이 曲調(곡조) 에 우리말 歌詞(가사)를 붙여 노래를 만든것입니다
外國曲(외국곡)에 우리말로 縣詞(현사)하는 典型的(전형적)인 先曲後詞(선곡후사)의 노래입니다
곧 곡이 먼저있고 뒤에 歌詞(가사)를붙이는 型式(형식)을 갖고있습니다
選曲後詞(선곡후사)는 唱歌初期(창가초기)에 普遍的(보편적)인 作詞樣式(작사양식) 이였습니다
歌詞(가사)를보면 높으신 “우리의 대군주폐하” 와 “이나라 이땅을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비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오 主(주)여 이나라 保護(보호)하소서”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광이 이땅에 내릴것을 하는 基督敎(기독교) 讚美歌(찬미가)인 것입니다
1124-唱歌(창가)-g
聖祖神孫(성조신손) 五百年(오백년)은 우리 皇室(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無窮花(무궁화) 華麗江山(화려강산) 朝鮮(조선)사람 朝鮮(조선)으로 길이 保全(보전)하세
--------------------------------------------------------- --------------------------------------------<無窮花歌(무궁화가)>
1896년 11월21일 獨立門(독립문) 定礎式(정초식)에서 培材學堂(배재학당) 學生(학생)들이 부른<無窮花歌(무궁화가)>입니다
曲(곡)은 스코틀랜드 民謠(민요) <alud lang syne 올드랭 사인->입니다
성조신손,곧 성스러운 조상과 신의 후손인 우리민족이니 그 燦爛(찬란)한 歷史(역사)를 길이 保全(보전)해야한다는 愛國心(애국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無窮花(무궁화) 華麗江山(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後斂久(후렴구)는 朝鮮(조선)을 大韓(대한)으로 바꾸면 지금 愛國歌(애국가) 歌詞(가사)와 똑 같은 가사임을 알수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이노래는 愛國歌(애국가)의 原形(원형)일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歌詞(가사)를 먼저짓고 後(후)에 曲(곡)을 부치는 詞主曲從(사주곡종)형식의 노래도 登場(등장)했습니다
다음노래가 그 例(예) 입니다
상제난 우리황제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사 海屋籌(해옥주) 를
산같이 쌓으소서
威權(위권)이 환영에 떨치샤 於天萬歲(어천만세)에 福祿(복록)이
무궁케 하소서
상제난 우리황제 도우소서-----------------------------------------------------<大韓帝國(대한제국) 愛國歌(애국가)>
이노래는 먼저 歌詞(가사)를짓고 뒤에 曲(곡)을 붙였다는 記事(기사)가 함께 登場(등장)합니다
歌詞(가사)는 민영환이 지었고 곡은 西洋音樂家(서양음악가) Eckert-엑켈트-가 만들었다 합니다
皇帝(황제)가 上帝(상제)의 도움을 받아 성수무강하여 해옥주를 쌓고 복록이 무궁하길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있습니다
皇帝誕辰(황제탄신)의 意義(의의) 와 愛國心鼓吹(애국심고취) 士農工商(사농공상)의 平等(평등)한 發展(발전)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노래<皇帝誕辰歌(황제탄신가)><無窮花歌(무궁화가)>와 비슷한 내용보여줍니다
여기서 上帝(상제)는 “하느님” 곧 어떤 神的(신적)인 存在(존재)를 呼稱(호칭)합니다
그만큼 基督敎(기독교) 世界觀(세계관)이 當時(당시) 노래에 影響(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讚頌歌(찬송가)의 影響(영향)이 컸던것입니다
이처럼 敎會(교회)나 mission- 界(미션계) 學校(학교)에서 불려지던 讚頌歌(찬송가)는 大衆歌謠(대중가요)의 motive-모티브-를 內包(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敎會(교회), 學校(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많은사람들이 함께부르는 창가로 變貌(변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內容(내용)도 宗敎敎理(종교교리)를 떠나 政治社會(정치사회)全般(전반)에 걸친 問題(문제)로 領域(영역)을 넓혀갔습니다
唱歌(창가)의 普及(보급)과 發展(발전)을위해서 讚頌歌(찬송가) 못지않게 西洋音樂(서양음악)도 影響(영향)이 컸습니다
開化期時節(개화기시절)에 西洋音樂(서양음악)의 普及(보급)에 先鋒(선봉)에선 사람이 獨逸人(독일인) 에켈트였습니다
앞에나온 “大韓帝國(대한제국)愛國歌(애국가)”를 作曲(작곡)한사람입니다
1125—唱歌(창가)-h
朝鮮(조선)은 1900年代(년대) 軍樂隊設置(군악대설치)를 勅令(칙령)으로 발표하고 그를 管掌(관장) 할 사람을 物色(물색)했습니다
거기에 拔擢(발탁)된 사람이 바로 Eckert-엑켈트-였습니다
1901년 軍樂隊長(군악대장)으로 뽑힌 그는 많은 樂器(악기)와 制服(제복)을 들여와 본격적인 樂隊(악대)를 構成(구성)하였습니다
50여명으로 구성된 洋樂隊(양악대) 가 처음으로 조선땅에 創設(창설)된것입니다
1902년, 6월 마침내 낙원동에서 軍樂隊(군악대)가 들어섰습니다
그러한 緣由(연유)로 지금도 樂園市場(낙원시장)이 樂器市場(악기시장)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엑켈트의 군악대는 4년간의 짧은기간에 운영되었지만 韓國音樂史(한국음악사)에 큰軌跡(궤적)을 남겼고 韓國音樂(한국음악)이 西洋音樂(서양음악)에 눈뜨는 契機(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비록 군악대라는 한계가있지만 八角亭(팔각정)에서의 定期的(정기적) 一般公演(일반공연)은 한국인이 西洋音樂(서양음악)에 접하는 좋은 機會(기회)였습니다
또한 樂團(악단)이 强制解散(강제해산)된 후에도 악단에 몸담았던 隊員(대원)들이 作曲家(작곡가), 演奏家(연주가), 音樂(음악)敎師(교사), 樂劇團(악극단)및 活動寫眞(활동사진) 樂士(악사)등
多樣(다양)한 방면으로 進出(진출)하여 활동함으로써 韓國(한국)大衆音樂(대중음악) 發展(발전)에 礎石(초석)이 되었음을 記憶(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이 서양음악에 처음 눈뜨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軍樂隊(군악대)의 커다란 功績(공적)입니다
김사인, 김광, 김종헌 김순제씨등 草創期(초창기)音樂人(음악인)의 輩出(배출)도 注目(주목)해야 합니다
흔히들 <唱歌(창가)>의 起源(기원)으로1881년 일본문부성에서 발간한 소학교음악교과서<小學唱歌集(소학창가집)>을 말합니다
이 冊(책)은 앞서 說明(설명)했듯이 1910년 親日內閣(친일내각) 一邊倒(일변도)가 되어버린 학부-문교부-에서 發刊(발간)한<보통창가집>으로 飜案(번안)되어 强制(강제)로 초등학교 교과서로 사용됩니다
일본의 깊숙한 內政干涉下(내정간섭하)에서 自行(자행)된 일입니다
1910년 한일합방전 1905년 韓國學制改編(학제개편) 敎科書檢定(교과서검정)등 이미 內政干涉(내정간섭)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보통학교령이 실시되어 學敎科課程(교과과정)에 창가가 들어가면서 普遍化(보편화)되었습니다
問題(문제)는!!! 普遍化(보편화)된 唱歌(창가)가 우리것이아닌 일본소학교 창가집을 우리말로 飜案(번안)한 <日本(일본)것>이라는데 問題(문제)가있음을 알야야합니다
곧 唱歌(창가)의 由來(유래)는 學校唱歌(학교창가)가 中心(중심)이 된것입니다
開化期(개화기)에는 宣敎師(선교사)들이 宣敎(선교)를 목적으로 한미션계학교 설립과 救國運動(구국운동)으로 전개된 民族史學(민족사학)의 擡頭(대두) 로 많은 학교가 세어졌습니다
前者(전자)로는 배재, 이화학당이 대표적이고 후자로는중앙,휘문,,보성,양정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근대식학교의 개설과과 동시에 창가는 주요 교과목으로 採擇(채택)되어 全國坊坊曲曲(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學校唱歌(학교창가)는 草創期(초창기) 敎育理念(교육이념)인 民族正氣培養(민족정기배양)과 新文化攝取(신문화섭취)를 그대로 反映(반영)하고 있습니다
學校唱歌(학교창가)는 크게 新文明 志向(신문명지향)의 노래와 民族的鬱憤(민족적울분)과 民族意識 鼓吹(민주의식고취)를 主題(주제)로한노래 씩씩하고 進就的(진취적)인 氣像(기상)을
노래한것으로 나뉘워 집니다
民族史學(민족사학) 일수록 民族意識(민족의식)鼓吹(고취)를 담은 唱歌(창가)들이 많았습니다창가의 作曲(작곡)作詞者(작사자)는 當然(당연)한 일이지만 大部分(대부분) 開化期(개화기)의
先覺者(선각자) 및 指導層(지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4.4조가사의 傳統rhythm-전통리듬-을 止揚(지양)하고 變化(변화)있고 輕快(경쾌)한 이본 7.5조 창가에 관심을 갖게된것입니다
이점은 결코 좋게 平價(평가)할 수 없는 아주 잘못된 部分(부분)입니다
그렇게 屈辱的(굴욕적)인 삶을 살게하고있는 元兇(원흉)들의 창가를 아무리 변화있고 경쾌해 唱歌敎育(창가교육)에 적합하더해도 觀心(관심)을갖은 것 자체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는 증거이고
先覺者(선각자)들이 그 따위 精神狀態(정신상태)면 나라앞날은 불을보듯 뻔하다!!!
그時期(시기) 老來(노래)歌詞(가사)만 啓蒙(계몽)的(적)이고 愛國的(애국적)이면 족하지 melody-멜로디는 相關(상관)없다는 아주잘못된 意識(의식)이 澎湃(팽배) 했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군함행진곡” 따위를 <物産奬勵運動歌(물산장려운동가)> 에 借用(차용)해 불렀겠지요!!!
관심을 갖게된 대표적인물이 문학사에 많은 업적에비해 삶의 哲學(철학)과 精神世界(정신세계)에 많은 문제가있는 최남선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인식하에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같은7.5조의 창가를 많이 작사했는데 결국 7.5조 日本式唱歌(일본식창가)는 최남선으로 인하여 普遍化(보편화)됩니다
그에게는 “變化(변화)있고 輕快(경쾌)하기만 하면 우리의 傳統전통rhythm-전통리듬-을 止揚(지양)할수만 있으면 日本唱歌(일본창가)도 문제가 아니다”는 매국노다운 철학을 지녔습니다
1126-唱歌(창가)-i
최남선이 主管(주관)한 雜誌(잡지) <少年(소년)>,<靑春(청춘)>을 통해서 7,5 조 일본식창가를 널리 보급했습니다
창가가 비록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으나 우리창가는 학교교육을 통해서자리잡아 가면서 大衆(대중)을 啓蒙(계몽)하고 國權喪失(국권상실) 危機(국권상실 위기)에대한 警覺心(경각심)을
鼓吹(고취)하는데 活用(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敎授要目(교수요목)의 趣旨(취지)보다 批判的內容(비판적내용)의 歌詞(가사)가 많이 만들어 질수밖에 없었습니다
下記(하기)노래는 우리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綿綿(면면)히 이어지는 民族(민족)의 血統(혈통)과 民族正體性(민족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장하고도 아름답다 無窮花(무궁화) 복판 錦繡江山(금수강산) 三千里(삼천리)는 우리집이요
성자신손 이천만은 우리겨레며 半萬年(반만년) 긴歷史(역사)는 우리빛일세---------------------<朝鮮(조선)의사랑>
이처럼 이노래는 半萬年(반만년)의 悠久(유구)한 歷史(역사)를 지켜온 성자성손 이천만의 유구함을 讚揚(찬양)하고 있습니다
錦繡江山(금수강산) 三千里(삼천리)가 우리집인 것을 强調(강조)함으로써 日帝侵略(일제침략)의 不當性(부당성)을 批判(비판)하고있습니다
비록 日本植民地(일본식민지)가 되었다 한들 우리 疆土(강토) 우리 民族性(민족성)은 永遠(영원)할것임을 强調(강조)하고있는 것입니다
물론 開化(개화)를 讚揚(찬양)하고 新文物(신문물)을 志向(지향)하는 開化志向的(개향지향적)인 노래도 많았습니다
1908년 경부철도부설을 찬양하는 京釜(경부)鐵道(철도)歌(가)는 서울에서 釜山(부산)까지 따라가며 各地域(각지역)의 特色(특색)과 새로운 文物(문물)을 紹介(소개)하는 開化(개화)노래 였습니다
우렁차게 토하는 汽笛(기적)소리에 南大門(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부는바람의 形勢(형세)같으니 날개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京釜鐵道歌(경부철도가)>
이처럼 경부철도가는 서울에서 부산역에 이르기까지 京釜線(경부선)이 通過(통과)하는 驛(역)을 中心(중심)으로 각지역의 特色(특색)과 文物(문물)을 紹介(소개)하는 長篇唱歌(장편창가)입니다
많은 驛(역)을 通過(통과)하기에 7.5조 長篇(장편)으로 꾸며져있습니다
<京釜鐵道歌(경부철도가)>는 이처럼 汽車(기차)라는 새로운 文物(문물)을 통하여 開化(개화)되어는 세상을 讚揚(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노래의 곡조는 <올드랭사인>에 이어서 스코틀랜드민요인 <coming through the rye-호밀밭에서->를 차용했습니다
이노래는 후에 따로 란을마련 좀더 상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창가는 1920년대들어 一般人(일반인)에게 大衆化(대중화)되어 대중가요로 變身(변신)합니다
初期唱歌(초기창가)의 特色(특색)이던 ‘開化思想(개화사상)의 反映(반영)” 이나 “勤勉歌(근면가)”의 性格(성격)을 벗어나 popular song-대중들의 노래-로 脫(탈)바꿈한것입니다
1920년대 唱歌(창가)는 popular song-流行歌(유행가)의 母胎(모태)가 됩니다
“學校唱歌(학교창가)” 처럼 唱歌(창가)의 基本樣式(기본양식)은 繼續維持(계속유지)되었은 물론입니다
개화기에 發刊(발간)된 여러 新聞(신문) 雜誌(잡지)에 많은 唱歌(창가)가 실려있습니다
21수의 창가를 게재한<少年(소년)>>이 창가제작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는 이잡지를 주재한 최남선의 의지가 반영된것이라는 설명이보입니다
당시 新聞雜誌中心(신문 잡지중심)의 唱歌(창가)의 主題(주제)는 大部分(대부분) 自主獨立(자주독립), 富國强兵(부국강병), 敎育區(교육 救國(구국) 實業思想(실업사상) 의 鼓吹(고취) 가
大部分(대부분)이었습니다
士農工商(사농공상) 우리사람 되어서는
일도많고 놀지맙시다
힘들 씁시다 힘을 씁시다
工夫(공부)위하여 힘들 씁시다
나라 위하여 힘들씁시다----------<勸學歌권학가)> 1907년, 6월29일 帝國新聞(제국신문)
1127—唱歌(창가)-j
상기곡<勸學歌(권학가)> 序頭(서두)에는 “김유탁씨 지은 것, 찬송시 18장 曲調(곡조)로 지은 것”이라는 附記(부기)가 있습니다
곧 曲(곡)은 찬송가인<찬송시>에서에서 따오고 김유탁의 歌詞(가사)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창가는 開化期(개화기)노래의 典型的(전형적)인 樣式(양식)인 先曲後詞(선곡후사)의 方法(방법)을 澤(택)하고있습니다
專門作曲家(전문작곡가)가 흔치않은 時節(시절)이라 이처럼 讚頌歌(찬송가)나 西洋(서양)노래의 音(음)을 借用(차용)하고 거기에 새로운 歌詞(가사)를 덧입히는 方式(방식)이 流行(유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讚頌歌(찬송가)에 歌詞(가사)를 붙인 “勸學歌(권학가)”를 보면 初期唱歌(초기창가)가 讚頌歌(찬송가)의 影響(영향)이 컸음을 알수있습니다
노래의 內容(내용)은 生存競爭(생존경쟁)으로 變貌(변모)한 時代狀況 (시대상황)의 認識(인식)과 農工商(농공상) 등 實業(실업)의 强調(강조), 勤勉精神(근면정신)을 담고있습니다
農業(농업)工業(공업) 實業(실업)이 敎育救國(교육구국)의 實踐的方法(실천적방법)임을 强調(강조)하고 있습니다
敎育救國(교육구국) 思想(사상)은 도산 안창호선생의 務實力行(무실역행)의 實踐方案(실천방안) 이었습니다
곧 무너진 나라 敎育(교육)을 바로잡아 야한다는 理念(이념)이었습니다
노래 後斂久(후렴구)에 반복되는”힘들씁시다”는 務實力行 思想(무실역행사상) 의 斷面(단면)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후렴구의 反復(반복)으로 主題意識(주제의식)을 强調(강조)하고 傳達(전달)하는 效果(효과)를 내고 있는것입니다
新聞中(신문중)에는<獨立新聞(독립신문)><皇城新聞(황성신문)>이 창가를 많이 揭載(게재)하고있습니다
그런데 獨立新聞(독립신문)의 唱歌(창가)는 改革 思想(개혁사상), 皇城新聞(황성신문)의 唱歌(창가)는 國權(국권)및 民族意識 宣揚(민족의식 선양)의 노래가 많습니다
皇城新聞(황성신문) 의 唱歌(창가)는 敎育家(교육가) 建築家(건축가) 運動家(운동가) 開校歌(개교가) 開會式歌(개회식가) 등 學校(학교)와 관련된 창가들이 主流(주류)를 이룹니다
敎育(교육)과 知識(지식)의 涵養(함양)이 獨立(독립)과 救國(구국)의 實踐方案(실천방안)임을 强調(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學校唱歌(학교창가)의 흐름을 살펴볼까요
學校唱歌(학교창가)로는 “學徒歌(학도가)”가 代表的(대표적)입니다
이노래는 이미 <종행무진가요사754>에 說明(설명)되있으니 參考(참고)바랍니다
<학도가>가가 앞서 설명한 찬송가에서 따온 <권학가>멜로디란 설명이보이는데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학도가”는 일본 鐵道唱歌(일본창가) MELODY-멜로디-에 육당 崔南善(최남선)의 歌詞(가사)로 불려졌습니다
이노래는 ---“후일 流行(唱歌(유행창가)의 代名詞(대명사)로 불리며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동안 오랜 歲月(세월)에걸쳐 大衆歌謠(대중가요)로 불리어졌다
처음에는 學校敎室(학교교실)에서 불렸지만 저잣거리의 流行歌(유행가)로 자리잡았다---“며 철모르는 설명이보입니다
허나 이곡은 일제가 김인식작곡<학도가>등이 朝鮮人(조선인)들사이에서 유행하자 民族意識(민족의식)을 刺戟(자극)할수있다 판단 이를 잠재우기위하여 육당 최남선을 협박, 회유해서
그들 입맛에맞는 새로운가사를 짓게하고 그들작곡가 임매웅이 만든 <철도창가> 멜로디에 얹어서 부르게했습니다
學校敎室(학교교실)에서 불린건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朝鮮學生(조선학생)들에게 이를 부르게해 流行(유행)시켜 김인식저 學徒歌(학도가)등을 잠재우기 위함임을 알아야합니다
“저잣거리의 流行歌(유행가)로 자리잡았다”는 일제의 이러한 음흉한 계락에의하여 이런사정을 모르는 조선인들이 그노래가 우리노래라고 속아서 그렇게 된것도 알아야합니다
청산속에 묻힌옥도 닦아야만 광채나고 낙락장송 큰나무도 깍아야만 동량되네—하는 가사의 학도가 잘 아시지요??
지금의 <學徒歌(학도가)> 는 흔히 명국환의 音源(음원)으로 들리는데 이를 蔡奎燁(채규엽) 이라 우기는 실버들 많습니다
마침내 1910년 韓日合邦(한일합방)으로 힘한번쓰보지못하고 나라를 잃게되자 온국민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民族(민족)의 指導者(지도자) 島山(도산) 安昌浩(안창호)先生(선생)도 뒷날을 期約(기약)하며 故國(고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의 主張(주장)대로 準備論(준비론)을 實踐(실천)하기 위하여 미래에 希望(희망)을 걸수밖에 없었던것입니다
그때 祖國(조국)을 떠나는 斷腸(단장)의 슬픔을 去國歌(거국가)에 실었습니다
1128-唱歌(창가)-k
간다 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저 時運(시운)을 對敵(대적)다가 熱血淚(열혈루)를 뿌리고서
내품속에 누워자는 兄弟(형제)를 다깨워서
한번기껏 해봤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만
將來(장래)일을 생각하여 憤(분)을참고 떠나가니
내가가면 영갈소냐 나의사랑 韓半島(한반도)야---------------------------------------島山(도산) 安昌浩(안창호) <去國歌(거국가)> 2절
島山(도산) 安昌浩先生(안창호선생)은 日帝强占(일제강점)으로 인한 國權喪失(국권상실)을 克復(극복)하기위한 方案(방안)으로 準備論(준비론)을 主張(주장)했습니다
지금은 힘이없어 일제에 맞설수없으니 힘을길러 後日(후일)에 對備(대비) 하자는 것입니다
그 實踐方法(실천방법)이 務實力行(무실역행)에 基礎(기초)한 敎育論(교육론) 입니다
기댈수있는 것은 次世代(차세대)들이고 그들을 敎育(교육)시켜 剛健(강건)한 鬪爭力(투쟁력)을 갖출수있다고 判斷(판단) 한것입니다
去國歌(거국가)에서 안창호선생은’兄弟(형제)를 다깨워 한번 기껏해봣으면 시원하겠다만” ‘將來(장래)일을 생각하여 憤(분)을참고 떠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現在(현재)는 不可(불가)하니 未來(미래)에 希望(희망)을 걸겠다 는 것입니다
바로 그의 獨立思想(독립사상)인 준비론의 核心(핵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언젠가 힘을길러 반드시 돌아올것을 祖國(조국)과 國民(국민)들에게 다짐하고있는 것입니다
上記(상기) 學徒歌(학도가)>는 <종횡무진가요사 754>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1876년 日本(일본)과 江華島條約(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鎖國政策(쇄국정책)을 풀게된 朝鮮(조선)은 1882년 朝美修好通商條約(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基督敎宣敎(기독교선교)
의 自由(자유)를 認定(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美國(미국) 基督敎界–기독교계-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派遣(파견)해 本格的(본격적)으로) 基督敎布敎(기독교포교)에 나섭니다
그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布敎活動(포교활동)을 펴는 한편 培材學堂(배재학당)과 梨花學堂(이화학당)을 비롯한 MISSION SCHOOL-미션스쿨-을 차례로 設立(설립)해 敎育事業(교육사업)에
着手(착수)했습니다
이들 학교에서는 讚頌歌(찬송가)를 가르침과 동시에 音樂敎育(음악교육)을 펴나갔습니다
이런가운데 最初(최초)로 愛國歌性格(애국가성격)을 지닌노래가 基督敎敎會(기독교교회)에서 불렸습니다
皇帝誕辰(祝歌(황제탄신축가), 無窮花歌(무궁화가)등이 그것이고 새문안교회, 독립문기공식 에서 처음 불렸읍니다 이곡들은 앞서 說明(설명)이 있었습니다
이러한“愛國歌(애국가”는 이에그치지 않고 독립신문등의 지면을 통해서 각계각층의 작자에의해서 수없이 발표됩니다
1981년 발견된 愛國忠誠歌(애국충성가)는 1903년이전 만들어졌다고 하며 지금의 愛國歌(애국가)와 흡사합니다
愛國歌(애국가)가 하느님의 가호를 노래하고 있다면 愛國(애국)忠誠(충성)歌(가)는 封建的(봉건적) 君臣關係(군신관계)를 强調(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나라를 지키자는 氣槪(기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東海水(동해수)와 白頭山(백두산)에해돋고 달뜨니
臣民(신민)이 保互(보호)하사 우리나라 萬歲(만세)
後斂(후렴) 無窮花(무궁화) 三千里(삼천리) 華麗江山(화려강산)
大韓(대한)사람 大韓(대한)에서 길이 忠誠(충성)하세
南山壽(남산수)와 靑松竹(청송죽)은 切開(절개)도 높으니
風雨霜露(풍우상로) 不變(불변)함은 우리 氣像(기상)일세
春夏秋冬(춘하추동) 사계절은 분명코 밝으니
一片丹心(일편단심) 忠國誠(충국성)은 우리 가슴일세
天地臣民(천지신민) 忠誠心(충성심)은다할길 넓으네
자나깨나 愛國心(애국심)은 우리 皇帝(황제)일세--------------------------------------------------------------------<愛國忠誠歌(애국충성가)
1129--唱歌(창가)-L
앞선란의 愛國歌(애국가)들은 國歌(국가)나 君主(군주)에게 忠誠(충성)을 바친다는 內容(내용)이지만 한편으로 국가의 危機(위기)를 당하여 일어날것을 呼訴(호소)하는 노래도많았습니다
1896년에 유흥석의 아내 윤희순이 만든<안사람 義兵歌(의병가)>, <義兵軍歌(의병군가)> 또는 <兵丁(병정)의노래>등도 그한예입니다
<안사람 의병가>와<의병군가>는 1895년 景福宮(경복궁)이 襲擊(습격)을 당하고 閔妃(민비)가 弑害(시해)당한 사건인 乙未事變(을미사변)을 당하여 各地(각지)에서 뭐 정부가 잘한일 있다고
義兵(의병)이 鳳旗(봉기)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우리나라 義兵(의병)들은
나라찾기에 힘쓰는데
우리는 무얼 할거냐
義兵(의병)들을 도와주세-------------------------<안사람 義兵歌(의병가)
내집없어 서러워라
나라없어 서러워라
임금섬겨 나라찾고
倭(왜)놈잡아 임금앞에 꿇어앉혀
우리임금 憤(분)을 풀어주세----------------------------------<義兵(의병)軍歌(군가)>
이노래들은 傳統的(전통적)인4.4조 형식을 채택하면서도 한글로 쓰였다는점이 특징입니다
을미사변으로 국민들의 對日(대일)感情(대일감정)이 극도로 惡化(악화)되어 전국이 소란해지자 1896년 俄館播遷(아관파천)을 계기로 잠시 주춤했던 러시아가 밀고들어왔습니다
일본에이어 러시아까지 등장해 內政干涉(내정간섭)을하자 政府(정부)의 無能(무능)을 非難(비난)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894년 甲申政變(갑신정변)의 失敗(실패)로 亡命(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이상재, 윤치호등 開化(개화) 知識層(지식층)과 함께 1896년 獨立協會(독립협회)를 조직하여
外國依存(외국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積極的(적극적)인 행동을 펼칩니다
獨立協會(독립협회)에서는 國歌(국가)의 獨立(독립) 民族(민족)의 自立(자립)을 死守(사수)하기위한 社會的(사회적) 政治的(정치적) 運動(운동)을 展開(전개)하고<獨立新聞(독립신문)>발간과
獨立門建立(독립문건립)등의 업적을 남겼는데 1896년 5월9일자 獨立新聞(독립신문)에는 학주사 이필균이지은<大朝鮮(대조선) 自主獨立(자주독립)愛國(애국)하는 노래>
6절이 게재 되었습니다
아세아에 대조선이
자주독립 분명하다
합가
아아에야 애국하세
나라위해 죽어보세----------------------------------------------------------------------<大朝鮮(대조선) 自主獨立(자주독립) 愛國(애국)하는 노래> 제1절
獨立協和運動(독립협회운동)이 絶頂(절정)에 달한 1898년에 수많은 민중이 參與(참여)한 政治集會(정치집회)인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政治的威脅(정치적위협)을 느낀
政府(정부)는독립협회를 彈壓(탄압)하더니 결국 解散(해산)시키고 맙니다
그러나 政治的(정치적)으로 覺性(각성)한 當時(당시)民衆(민중)의 義氣(의기)는 하늘을 찌를듯했고 그러한 상황은 노래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이무렵부터 4.4조에서 조금식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노래도 만들어졌습니다
시대는 약간 내려가지만<만나생각 相逢有思 (상봉유사)>이라는 작품도 그러한 例(예) 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 오늘날에 서로만나니
반가운 뜻이 은근한중 나라생각 더욱 깊혔네
언제나 언제나 獨立宴(독립연)에 다시만날까---후략----
<만나생각>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13일
1130—唱歌(창가)-M
1904년 朝鮮(조선)과 滿洲(만주)에대한 支配(지배)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對立(대립)해온 일본이 <旅順(려순)>에 駐屯(주둔)하고있는 러시아군을 공격함으로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결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에대한 支配權(지배권)을 확립했고 이어 미국이나 영국으로부터는 外交的(외교적)交涉(교섭)을 통해 朝鮮支配-조선지배-를 인정받았으므로
1905년, 11월 朝鮮(조선)에 乙巳條約(을사조약)을 强要(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약에따라 朝鮮政府(조선정부)의 외교에관한 모든업무를 이본 외무상이 관장하고 그관리를 위하여 황제밑에 統監(통감)한명을 두었습니다
日帝强占(일제강점) 36년의 시작인 韓日合邦(한일합방) 以前(이전) 實際(실제)로 이 時期(시기)에 國權(국권)을 빼앗겨 버린것입니다
통감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殺害(살해)되는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는데 그는外政(외정)뿐만 아니라 內政(내정)도 간섭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능하기 짝이없는 朝鮮政府(조선정부)의 乙巳條約(을사조약) 체결은 當然(당연)히 국민들의 抵抗(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皇城新聞(황성신문) 主筆(주필) 장지연은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論說(논설)을 써서 일본의 侵略(침략)行動(행동)과 政府(정부)의 無能(무능)을 指彈(지탄) 했습니다
皇帝(황제)에대한 上疏文(상소문) 大衆演說(대중연설)이 끊이지 않았고 데모와 罷業(파업)도 일어났으며 地方(지방)에서는 武力(무력)으로 國權(국권)을 奪還(탈환)하려는 義兵(의병)이
各地(각지)에서 鳳旗(봉기)했습니다
국민들은 을사조약에 조인한 이완용등 다섯사람을 “乙巳五賊(을사오적)”이라고 부르며 糾彈(규탄)했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乳名(유명)한 譚詩(담시) 五賊(오적)의 제목도 여기에서 由來(유래)합니다
그리고 민중은 일본에의한 직접적인 간섭에대해 그 불쾌감을 狗尾三年(구미삼년) 이라는 詩歌(시가)로 諷刺(풍자)했습니다
日本人(일본인) 行爲(행위)보소 三三五五(삼삼오오) 作黨(작당)하여
京鄕各地(경향각지)出沒(출몰)하며 行賊 (행적) 키에분주하니
開明(개명)했다 自稱(자칭)하나 各種敎育(각종교육) 있는중에
盜賊學校(도적학교)없으려면 무슨學文(학문) 못배와서
此(차)等(등)졸업허였던고 동양 일0孤島(고도)중에
0구지행 저러하니 암만해도야만일세-------------------------------------------------------------------<구미3년>
조선에 財政(재정)고문을 파견하고 國家財政(국가재정)을 掌握(장악) 한 일본은 金融機關(금융기관)을 조선에 진출시켜 貨幣定理(화폐정리)에 나섰습니다
그결과 日本人 商人(일본인상인)은 莫大(막대)한 利益(이익)을 얻었습니다
통감부는 또日本人官吏(일본인관리)를 雇用(고용)하는등 朝鮮支配(조선지배)를위한 사업을 進陟(진척)시키면서 그費用(비용)을 朝鮮政府(조선정부)에 負擔(부담)시켰습니다
더구나 그財源(재원)은 日本政府(일본정부)와 日本銀行(일본은행)에서 빌린빚으로 充當(충당)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누적된 일본에대한 債務(채무)는 1907년에1300엔에 달했다 합니다
이사실을 알게된 국민들은 스스로힘으로 國債(국채)를갚고 國權(국권)을 回復(회복)하겠다는 運動(운동)을 벌였습니다
1907년대구의 서상돈, 김광재등이 시작한 이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言論機關(언론기관)도 義捐金募金 (의연금모금)에 積極的(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어 남성은 금연운동으로 여성은 비녀, 반지를팔아 募金運動(모금운동)에 呼應(호응)했습니다
그해 1907년, 4월14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國債報償歌(국채보상가)라는 題目(제목)의 노래가 게제되어있습니다
作者(작자)는 함경남도 단천군 남문의 국채보상소 발기인 이병덕, 김인화등의 연명으로 되어있으며 歌詞(가사)는 4.4조에 한글섞인 詩句(시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愛國心(애국심)헤 愛國心(애국심)헤
大邱(대구) 徐公(서공) 相敦(상돈) 일세
一千三百萬圓 國債(일천삼백만원 국채)
設立同盟(설립동맹)斷烟會(단연회)라
勉(면) 實(실) 知心(지심) 發揚(발양)하니
大韓民國(대한민국) 分明(분명)토다
今(금)我(아)國家(국가)------후략----
--------------------------------------------------------------------------------------------<國債報償歌(국채보상가)>
1131--唱歌(창가)-n
날로 擴散(확산)되는 國民運動(국민운동)에 “朝鮮(조선)의 經濟奴隸化(경제 노예화)”를 劃策(획책)하던 統監府(통감부)는 內心當惑(내심당혹) 對策(대책)에 腐心(부심)하다 陰凶(음흉)한 計策(계책)을마련
하는바 국채보상기성회 간사 양기탁에게 報償金橫領(보상금횡령)罪(죄)를씌어 拘束(구속)하고 運動(운동)을 抹殺(말살)시켜버립니다
민중속에서 自主獨立(자주독립)의 必死的(필사적)인 努力(노력)이 進行(진행)되는 동안에 한편에서는 日帝(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侵略(침략)行爲(침략행위)에 加擔(가담)하는 勢力(세력)이 나타납니다
保護條約(보호조약)을 提唱(제창)하고 韓日合邦(한일합방)을 主張(주장)한 一進會(일진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문에 一進會(일진회)의 幹部(간부) 송병준, 이용구는 乙巳五賊(을사오적)과 합쳐 七賊(칠적)이라고 불렸습니다
송병준에대한 民衆(민중)의 憤怒(분노)는 激烈(격렬)하여 병준아 라는 時(시)까지 만들어졌습니다
宋秉畯(송병준) 아 말들어라
無賴輩(무뢰배)를 하야
일진회를 組織(조직)할제
狂言妄說(광언망설) 출하고
許多(허다)良民(양민) 몰아다가
----중략------
너의 罪(죄)가 한가지요-----------------------------------------------<秉畯(병준)아>
獨立(독립)을위해 싸우는 民衆(민중)의소리는 “獨立新聞(독립신문)”을 비롯하여 皇城新聞(황성신문), 帝國新聞(제국신문),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萬歲報(만세보)등의 新聞(신문)을 통해
反映(반영)되었습니다
言論-언론-이 國民(국민)의 政治(정치), 社會(사회)意識(의식)을 높여가는 가운데 言論人(언론인)으로 氣槪(기개)를 담은<新聞歌(신문가)>라는 노래도 불렸다
帝國主義(제국주의) 列强(열강)의 進出(진출)과 西洋文化(서양문화)의 流入(유입)으로 오랜歲月(세월) 維持(유지)되어온 그야말로 營養價(영양가) 없던 朝鮮王朝(조선왕조)의 封建體制(봉건체제)는
어쩔수없이 急速(급속)히 崩壞(붕괴)되었습니다
同時(동시)에 國家危急(국가위급)의 狀況(상황)을 당하여 국민들사이에는 敎育(교육)을통한 西洋(서양)의 先進文化(선진문화)를 攝取(섭취)하고 子弟(자제)들에게 自主獨立(자주독립)의 精神(정신)을
鼓吹(고취)시키려는 氣運(기운)이 民間團體(민간단체)나 私立學校(사립학교)를 中心(중심)으로 急速(급속)히 일어나기 시작했읍니다
私立學校(사립학교)에서는 주로 西洋-서양-의 學文(학문)이나 思想(사상)을 가르쳤으나 單純(단순)히 知識(지식)을 전달하는 役割(역할)에 그치지않고 民族運動(민족운동)의 커다란 據點 (거점)으로
커나갔습니다
討論會(토론회)나 雄辯大會(웅변대회)가 자주열렸을고 運動會(운동회)에서도 그氣運(기운)이 發揮(발휘)되었습니다
또 敎育救國(교육구국)의 理念(이념)을 鼓吹(고취)하기 위하여 學校唱歌(학교창가)라할 수 있는 校歌(교가)가 만들어져 청년들의 義氣(의기)를 드높였습니다
그러한 校歌(교가)의 典型的(전형적)인 것이 運動家(운동가) 입니다
어화 우리 學徒(학도)들아
運動歌(운동가)를 불러보자
--생략----
大韓光武十年(대한광무십년)이요
丙午四月句八(병오사월구팔)이라
世界列强(세계열강)둘러보니
敎育人才(교육인재)第一(제일)일네
어화 우리 學徒(학도)들은
00運動(운동)하여보세
후략-------------------------------------------------------<運動歌(운동가)>대한매일신보 1906년 6월2일
1132--唱歌(창가)-o
1909년 7월23일 皇城新聞(황성신문)에는 <野球團(야구단) 運動歌(운동가)>라는 노래 紹介(소개)되어 있습니다
무쇠골격 돌 0肉(절육) 少年男子(소년남자)야
愛國(애국)의 精神(정신)을 0發(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少年(소년)의 活動時代(활동시대) 다다랐네
萬人對敵(만인대적) 練習(연습)하야 後日戰功(후일전공) 세우세
絶世英雄(절세영웅) 大業(대업)이 우리 目的(목적) 아닌가
肉體(육체)를 發育(발육) 同時(동시)에
競爭心力(경쟁심력) 注意養成(주의양성)하려고
空氣(공기)좋고 區域(구역)넓은 演技場(연기장)으로
活潑活潑(활발활발) 나는듯이 나아가네-------후략-----------------------------------------------<野球團(야구단)運動歌(운동가)>
이화학당이나 배재학당등에서 이미 讚頌歌風(찬송가풍)에서 脫皮(탈피)한 校歌(교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校歌(교가)”들은 音樂的考慮(음악적 고려)보다도 歌詞(가사)에 中點(중점)을 두었기에 melody-멜로디-는 모두전부터 알려져있던 그대로 차용해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시기 교가가사에 맞추어부를 melody-멜로디-를 創作(창작)할만한 人才不足(인재부족)이 이유였지만 노래를 보급하는데 이미 알려진곡조가 더수월했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歌詞(가사)만 啓蒙的(계몽적)이고 目的(목적)에 맞으면 되었지 멜로디는 神境(신경)쓸 必要(필요)없다”는 認識(인식) 때문에 日本軍歌(일본군가) 멜로디등 日本歌謠(일본가요)를
無批判(무비판)으로 借用(차용)한 것은 매우잘못된 認識(인식)입니다
이점역시 親日行爲(친일행위)일수밖에 없습니다
目的(목적)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목적을 達成(달성)하는데 常識(상식)을벗어나는 手段(수단)을 동원한다면 그目的達成(목적달성)도 正當性(정당성)을 認定(인정)받기 힘듭니다
이무렵 民間(민간)에 몇가지 창가집이 만들어지고 이었으나 일제의 극심하고 악랄한 탄압으로 압수되었기에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多幸(다행)이 그중에 “愛國歌(애국가)”라는 창가집이 現存(현존) 하는데 民族魂(민족혼)과 獨立思想(독립사상)을 鼓吹(고취)하는 내용의 노래가 受祿(수록)되어있습니다
華麗(화려)한 江山(강산) 우리大韓(대한)은
三千里(삼천리) 範圓(범원) 적지 않도다
白頭山(백두산)으로 漢拏山(한라산)까지
自然(자연)한 景槪(경개) 그려냈도다
後斂(후렴) 先祖(선조)님이 여기 묻혔고
우리도 大韓魂(대한혼) 되리니
四千年祖國(4천년조국) 大韓疆土(대한강토)를
내집을 내가 保護(보호)하겠네-------------------------------------------------------<大韓魂(대한혼)>
二千萬 同抱(이천만동포) 中(중) 우리 兄弟(형제)야
國家(국가)의 羞恥(수치)를 네가 아느냐
天分(천분)한 自由權(자유권)은 차가 없건만
우리 民族(민족) 무슨 罪(죄)로 辱(욕)을 받는가---------------------------------------<少年冒險猛進歌(소년모험맹진가)>
1133-唱歌(창가)-p
우리 大將(대장) 예수님은 全能(전능)하시니
怨讐(원수) 0혼도 무서워말고 接戰(접전)해보세
큰 勝戰(승전) 할떄까지 앞에나가서
魔鬼權勢(마귀권세)를 滅(멸) 하세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서
魔鬼(마귀)權勢(권세)를 滅(멸) 하세--------------------------------------------------<kristos-그리스도- 軍兵(군병)歌
Kristos 軍兵(군병)歌(그리스도 군병가)는에는 信仰心(신앙심)을 背景(배경)으로한 抵抗(저항)이 그대로 民族(민족)의 抵抗(저항)으로 具現(구현)되고 있다고 하는 글이 보입니다
여러 宗敎(종교)중에서도 특히 改新敎(개신교)는 近代朝鮮(근대조선) 知識層(지식층)의 政治運動(정치운동)이나 新敎育運動(신교육운동)에 커다란 影響(영향)을 끼쳤습니다
基督敎(기독교)뿐만 아니라 東學(동학),儒敎(유교)등의 움직임도 活潑(활발)했으나 宗敎界(종교계)의 啓蒙活動(계몽활동)과 함께 이시대에 큰몫을한것으로 國語(국어)와 國史硏究(국사연구)
를 干戈(간과)할수없읍니다
國語硏究(국어연구)에서는 주시경이 先驅者(선구자)로 커다란 業績(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朝鮮文同式會(조선문동식회)를 조직하여 한글 맞춤법 統一(통일)에 全力(전력)했고 많은 弟子(제자)를 養成(양성)하여 후날 朝鮮語學會(조선어학회)가 결성되는 礎石(초석)을 닦았습니다
1909년 10월2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舊韓末(구한말) 慘狀(참상)에 悲憤慷慨(비분강개)한 心情(심정)을 한글글자풀이투로부른<國文歌(국문가)>라는 노래로 실려있습니다
ㄱ子(자) 하나 쓰고보니
記憶(기억)하세 記憶(기억)하세 國家羞恥(국가수치) 記憶(기억)하세
우리 大韓(대한) 獨立(독립)하면 永遠萬歲(영원만세) 無窮(무궁)토록
康(강)0 煙月(연월) 太平歌(태평가)에 自由福榮(자유복영) 누리련만
今日羞恥(금일수치) 生角(생각)하면 죽기전에 못있겠네------후략-------------------------------------------------<國文歌(국문가)> 鼓吹生(고취생)
國史硏究(국사연구)에서는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등이 민족의 氣槪(기개)와 自尊心(자존심)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그들은 <을지문덕 전><이순신전>등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勝利(승리)한 인물의 傳記(전기)와 <美國獨立史(미국독립사)><越南(월남) 亡國史(망국사)>등을 著述(저술)했습니다
이著作(저작)들은 大部分(대부분) 훗날 日帝(일제)에 의하여 禁書(금서)로 묶입니다
1908년 崔昌善(최창선)은 私立學校(사립학교)나 종교, 학술분야의 活動(활동)을 통하여 愛國獨立(애국독립)의 뜻에 共感(공감)하여 朝鮮最初(조선최초)의 靑少年(청소년) 雜誌<少年>(잡지소년)을
發刊(발간)합니다
“崔昌善(최창선)”은 바로 六堂(육당) 崔南善(최남선)의 親兄(친형)으로 발간에 관한일은 事實上(사실상) 최남선이 主管(주관)했습니다
최남선은 “少年(소년)”을 통하여<新朝鮮 少年(신조선 소년)>등의 啓蒙的詩歌(계몽적시가)를 發表(발표)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것없소
칼이나 六穴砲(육혈포)나
그러나 무서움 없네
철창같은 形勢(형세)라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옳은것 짐을지고
큰길을 걸어가는 자0 일세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소
匕首(비수)나 火藥(화약)이나
그러나 두려움없네
冕旒冠(면류관)의 힘이라도
우리는 웃지 못하네
우리는 옳은것 廣耳(광이)삼아
큰길을 다스리는 者(자) 0일세
-----후략------------------------------------------------------------------------------<新朝鮮少年(신조선 소년)>최남선
1134--唱歌(창가)-q
雜誌(잡지)”少年(소년)”을 통해서는 그밖에도 수많은 愛國唱歌(애국창가)가 紹介(소개)되었습니다
同時-동시-에 “少年(소년)”은 新文學發表(신문학발표)를 위한 重要(중요)한 舞臺(무대) 가 되었고 시조나 漢詩(한시)와 다른 “新體詩(신체시)”라는 이름의 새로운시를 실어 朝鮮文學(조선문학)
近代化(근대화)에서 開拓者 役割(개척자 역할)을 했습니다
초남선은 이보다앞서 서울과 부산을 잇는 京釜鐵道開通(경부철도개통) 1905년으 즈음하여 무려 32연으로된 “京釜鐵道歌(경부철도가)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朝鮮最初(조선최초) 7.5조 日本式(일본식) 노래이며 영국 스코틀랜드 民謠(민요) “coming througr the rye-호밀밭에서”melody-멜로디에 歌詞(가사)를 얹었었습니다
우렁타게 토하난 汽笛(기적)소리에
南大門(남대문)을 등지고떠나 나가서
발니부는 바람의 形勢(형세)가 같으니
날개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후략-----------------------------------------------------------최남선시<京釜鐵道歌(경부철가)>
이러한 가운데 乙巳條約(을사조약)으로 國權(국권)을잃은 無能(무능)하기 짝이없는 高宗(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萬國平和會議(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을 사신으로
密派(밀파)하여 國權回復(국권회복)을 列强(열강)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失敗(실패)로 끝나고 이준은 그곳에서 憤死(분사)했으며 고종은 그책임을지고 退位(퇴위)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은 고종을 强制退位-강제퇴위- 시킨한것도 모자라 韓日新條約(한일 신조약)을 强要(강요)하고 각부의 次官(차관)이하 자리에 日本人(일본인)을 大擧任命(대거임명)하여 이른바
次官政治(차관정치)를 實施(실시)합니다
일본의 彈壓(탄압)에 反對(반대)하는 朝鮮民衆(조선민중)은 데모등 抗日鬪爭(항일투쟁)을 展開(전개)했으나 無慈悲(무자비)한 鎭壓(진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해8월1일에는 얼마남지도 않았던 韓國軍(한국군)이 强制解散(강제해산) 당하고 맙니다
軍隊解散(군대해산)이 決定(결정)되자 시위 제1대대장 박성환은 憤死(분사)하여 이에 抗議(항의)했습니다
그죽음에 분기한 제1대대와 제2대대장병들은 日本軍(일본군)과 市街戰(시가전)을 전개했으나 얼마후 彈藥(탄약)이 떨어져 地方(지방)으로 敗走(패주)하고맙니다
敗走(패주)한 將兵(장병)들은 大部分(대부분) 각지의 義兵(의병)과 합류하여 日本軍(일본군)에 대한 武裝鬪爭(무장투쟁)을 계속합니다
義兵鬪爭(의병투쟁)은 韓日合邦後(한일합방후)에도 數年(수년)에걸쳐 전개되었습니다
義兵鬪爭外(의병투쟁외)의 抗日鬪爭(항일투쟁)에는 terror-테러- 가 있습니다
일본에의해 朝鮮外交顧問(조선외교고문) 으로 推薦(추천)되어 朝鮮支配(조선지배)에 協力(협력)한 美國人(미국인) 더럼 황트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在美朝鮮(人(재미조선인)
전명운, 장인환 에 殺奚(살해)당했고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射殺(사살)당합니다
오늘날까지도 民族英雄(민족영웅)으로 崇仰(숭앙)받고있는 안중근은 1910년 3월26일 뤼순 刑務所(형무소)에서 처형당하여 31살로 凄絶 (처절)했던 生涯(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야말로 亡國前夜(망국전야)라고 할 수 있는 이시기에 민중은 臥薪嘗膽(와신상담)하면서 앞서 紹介(소개)한 <學徒歌(학도가)>불렀습니다
學徒(학도)야 學徒(학도)野(야) 靑年學徒(청년학도)야
壁上(벽상)의 掛鐘(괘종)을 들어 보시오
한소리 두소리 가고 못오니
人生(인생)의 百年(백년)가기 走馬(주마) 같도다
東原春山(동원춘산)의 芳草綠陰(방초녹음)도
西風秋天(서풍추천)에 黃葉(황엽)같구나
諸君(제군)은 靑春少年(청춘소년) 자랑 마시오
어언에 明鏡白髮(명경백발) 可惜(가석) 하리라-------------------후략-----------------------------------------------<學徒歌(학도가)> 作者未詳(작자미상)
<학도가>는 東京留學生(동경유학생)들이 긴 放學(방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南大門(남대문)驛(역)에서 合唱(합창)한 것이 始初(시초)라고 알려져있으나 그시기가 정확치 못합니다
曲調(곡조)는 일본 <鐵道(唱歌(철도창가)> 를 빌려쓰고 있다고 說明(설명)하는 책이보이나 이는 잘못된 說明(설명)입니다
위說明(설명)에 該當(해당)하는 “學徒歌(학도가)”는 六堂(육당) 崔南善(최남선)이 日本(일본)의 脅迫(협박), 懷柔(회유) 에 못이겨 歌詞(가사)를 쓴 “청산속에 묻힌옥도 갈아야만 광채나네---“로
시작하는 歌詞(가사)에
日本作曲家(일본작곡가) 다매웅이 창작한 melody-멜로디-를 붙인 노래입니다
1135-唱歌(창가)-r
靑山(청산)속에 묻힌玉(옥)도
갈아야만 光彩(광체)나네
落落長松(낙락장송) 큰나무도
깍아야만 棟樑 (동량)되네
工夫(공부)한 靑年(청년)들아
너의 職分(직분)잊지마라
새벽달은 너머가고
東天朝日(동천조일) 비쳐온다--------------------------------------------<學徒歌(학도가)> 최남선사 임매웅작곡 日本(일본) <鐵道唱歌(철도창가)> melody-멜로디-
民族精神(민족정신)을 鼓舞(고무)시키는 唱歌(창가)가 많아지면서 일본 統監府(통감부)는 極甚(극심)한 彈壓(탄압)을과 統制(통제)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愛國的唱歌(애국적창가) 부른 朝鮮(조선)사람은 發見(발견)되는대로 卽時(즉시) 連行(연행)되고 投獄(투옥)당했습니다
統監府(통감부) 이러힌 愛國的(애국적) 唱歌(애국적창가) 熱風(열풍)에 對應(대응)하기위해 이미 親日一邊倒(친일 일변도)로 되버린 朝鮮政府(조선정부)에게 官制唱歌集(관제창가집)을
編纂(편찬)토록 强要(강요)합니다
1910년 1월9일자 皇城新聞(황성신문)에서는”普通歌 編述(보통가 편술) ”이라는 제목으로”지방 각 私立學校(사립학교)에서 編述(편술)하는 不良(唱歌集(불량창가집)을 中指(중지)시키는데
관해서는 이미 알린 그대로지만 目下(목하) 普通唱歌(보통창가)를 學府(학부)에서 편술중이라고한다” 라고 報道(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불량창가”라고 하는 것은 當然(당연)히 각종 “愛國歌(애국가)”나 “學徒歌(학도가)”를 비롯한 愛國的唱歌(애국적창가)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수있습니다
이리하여 이름뿐인 大韓帝國 學府(대한제국 학부)가 발행한<普通敎育唱歌(集(보통교육집) 제1집>에는 日本(일본)의 唱歌(창가)와 外國民謠(외국민요)를 飜譯(번역)한 것이 27곡 수록되 있었습니다
그떄까지 국민들사이에 실제로 불리고있던 창가나 찬송가중 애국의 기개를 노래한 것은 한곡도 수록되있지 않음은 놀랄일도 아닙니다
단한곡 수록된곡으로 學徒歌(학도가)가 있었는데 이는 日本(일본)의 陰凶(음흉)한 目的(목적)이 드러나는 곡입니다
6연으로된 이곡은 그동안 朝鮮(조선)의 民衆(민중)들사이 流行(유행)한 學徒歌(학도가)와는 歌詞(가사)가 전혀다른 곡입니다
이는 이 唱歌集(창가집)을 강제로 학생들에게 學校(학교)서 敎育(교육)시켜 流行(유행)하게해 朝鮮民衆(조선민중)들 사이 불라던 學徒歌熱風(학도가 열풍)을 잠재우기위한 陰凶(음흉)한
目的(목적)의 歌謠(가요)입니다
학부발행 보통교육창가집에 수록된 上記(상기) “는 앞란서 설명했듯이 최남선이 지은 것입니다
어쩃던 민중들은 일제의 압박을 받어서 만들어진 관제<學徒歌(학도가)는 일본의 의도대로 불려질리 만무하고”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로 가사로된 노래를 계속불렀습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射殺(사살)하자 後任(후임)으魯(로)육군대신 데라우치를 임명하고 단숨에 조선합병에 나섰읍니다
고종이 强制退位(강제퇴위) 당한후 허수아비 皇帝(황제)가된 순종은 일본관리와 이완용등 친일내각의 監視(감시)속에 저항해볼 겨를도없이 1910년 8월22일 합병안에 조인하고 맙니다
그리고 일주일뒤 8월29일에 護國(호국)의 勅書(칙서)가 발표되면서 조선은일본의 植民地(식민지)로 轉落(전락)해버립니다
일제는 통감부를대신하여 총독부를 설치하고 입법,행정, 사법 및 軍統帥權(군통수권)을 한손ㅇ 거머쥔 총독으로 테라우치 통감을 선임합니다
그는 統治方針(통치방침)의 基幹(기간)으로 질서유지를 들고 憲兵警察制度(헌병경찰제도)를 강화했습니다
이를 武斷統治(무단통치)라 부르는 暴惡(포악)한 植民支配(식민배의) 始作(시작)이었습니다
朝鮮(조선)이 바야흐로 日本(일본)에게 倂合(병합)되려고 하던 1910년, 4월 祖國敗亡(조국패망)을 내다보고 있던 우리의 永遠(영원)한 指導者(지도자) 島山(도산) 安昌浩(안창호)선생은 중국배를 타고
亡命(망명)의길을 떠났습니다
1135—唱歌(창가)-s
간다 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잠시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時運(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해를 너를보지 못할지니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위해 일핳지니
나간다고 슬퍼마라 나의사랑 韓半島(한반도)야
2절은 앞선란에-------
간다 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내가너를 作別(작별)한후 太平洋(태평양)과 大西洋(대서양)을
건널때도 있을지며 시베리아 滿洲(만주)들에
다닐때도 있을지라 비록몸은 浮萍(부평)같이
어느곳에 가있던지 너를 生角(생각) 할 터이니
너도나를 生角(생각)하라 나의사랑 韓半島(한반도)야
간다 간다 나는간다 너를두고 나는간다
지금 離別(이별)할때에는 빈주먹만 들고가나
以後(이후) 相逢(상봉)할때에는 기를들고 올터이다
눈물흘린 離別(이별)이 기쁜맞이 되리로다
요 暴風雨(폭풍우) 심한 이때부터 부디부디 잘있거라
훗날 다시만나보자 나의사랑 韓半島(한반도)야--------------------------------------- --------------------안창호작사 이상준 작곡<去國歌(거국가)>
이상준이 작곡한 이노래는 일명 韓半島惜別歌(한반도석별가)로 알려졌고 三一運動(삼일운동) 直後(직후)부터 널리 애창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곡역시 總督府(총독부)가 그냥두지 않았읍니다
1900년대 들어와 군내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의병부대대부분은 차츰 만주로 이동해 武裝獨立運動(무장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난날 고구려, 발해의 領土(영토)였던 만주는 鴨綠江(압록강), 豆滿江流域住民(두만강유역주민)들이 往來(왕래)하기는 햬으나 오랫동안 조선의 판도로서는 잊혀진 존재였읍니다
朝鮮王朝(조선왕조) 말기부터 이지역으로 많은 愛國者(애국자)들이 亡命(망명)했고 또 韓日合邦(한일합방)과 함께 수많은 亡國百姓(망국백성)들이 흘러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大陸侵略(대륙침략)을 劃策(획책)하는 日本(일본)軍(일본군)에 對抗(대항) 해 抗日獨立運動(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그들은 단지 戰鬪(전투)뿐만아니라 獨立軍育成(독립군육성)을 비롯하여 산업, 교육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 급격히 팽창하는 滿洲朝鮮人(만주조선인) 社會(사회)의 先覺者(선각자)로서
큰 役割(역할)을 했습니다
1910년 南滿洲(남만주)에 新興(신흥)學校(학교)가 設立(설립)되어 軍事訓鍊(군사훈련)이 實施(실시)되었고 “新興學校歌(신흥학교가)” 가 만들어졌습니다
서북으로 흑룡 태원남의 영절에
여러만만 헌원 자손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준 이가 뉘뇨
우리 우리 配達(배달)나라의
우리우리 祖上(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長白山(장백산)밑 비단 같은 萬里樂園(만리낙원)은
半萬年(반만년)來(래) 피로지킨 옛집이어늘
남의子息(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설움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配達(배달)의나라의
우리 우리 子孫(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뿌려 痛哭(통곡)하여라
地獄(지옥)의 쇳문이 온다------------------후략—-------------------------------------------------------------<新興(신흥) 學校歌(학교가)>
1136-唱歌(창가)-t
新興學校(신흥학교)에서는 “新興學校歌(신흥학교가)”뿐 아니라 雄壯(웅장)한 獨立軍歌(독립군가)도 불렀습니다
이노래의 곡조는 舊韓末(구한말) 前進歌(전진가)의 melody-멜로디-를 그대로 옮겨 붙였다 합니다
歌詞(가사)는 “勇進歌(용진가)”에 加筆(가필)된것으로 보입니다
搖動(요동)滿洲(만주) 넓은들을쳐서 피하고
靑天江(청천강)에 水兵(수병)百萬(백만) 沒殺(몰살)하옵던
東明王(동명왕)과 乙支文德(을지문덕) 용감법대로
우리들은 그와같이 怨讐(원수) 쳐보세
後斂(후렴) 나가세 戰爭(전쟁)場(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劍水刀山(검수도산)을 무릎쓰고 나아갈 때
獨立軍(독립군)이 勇敢力(용감력)을 더욱 奮發(분발)해
億千萬年(억천만년) 죽더래도 怨讐(원수)쳐보세
閑山島(한산도)에 倭敵(왜적)을쳐서 피하고
女眞國(여진국)을 討伐(토벌)하여 凱旋(개선)하옵던
忠武公(충무공)과 姜邯瓚(강감찬)의 용감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怨讐(원수) 쳐보세
배를갈라 만국화에 피를뿌리고
六穴砲(육혈포)로 伊藤博文(이등박문) 銃殺(총살)하옵던
이준씨와 안중근으 義俠心(의협심)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怨讐(원수)쳐보세---------------후략---------------------------------------------------<獨立軍歌(독립군가)>
朝鮮王朝末期(조선왕조말기)의 <前進歌(전진가)>와 같은 melody-멜로디-에 行進曲風(행진곡풍)으로 불렀습니다고 하는<獨立軍歌(독립군가)<는 三一運動(삼일운동)을거쳐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滿洲(만주)벌판에 울려퍼졌습니다
또<독립군가>와함께 이범석장군이 작사한<祈戰死歌(기전사가)>도 靑山里 戰鬪(청산리 전투)등 獨立軍(독립군)이 出戰(출전)할 때 戰意(전의)를 昻揚(앙양)하기위해 불렀습니다
이와 같은 軍歌(군가)는 獨立軍(독립군)뿐만 아니라 그地域(지역)의 朝鮮人農民(조선인농민)들도 함께부르며 民族意識(민족의식)을 드높였습니다
일본의 大陸(대륙)侵略(침략)이 滿洲事變(만주사변)을 거쳐 露骨化(노골화)되자 地下(지하)로 숨어들어 口傳民謠(구전민요)가 되었으나 그대로 本國(본국)에 전해지는 일은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惡毒(악독)한 總督府治下(총독부 치하) 조선에서는 日本統治(일본통치)에 반항하는 조선인에게 ‘不逞鮮人(불령선인)”이라는 딱지붙여 正當(정당)한 裁判節次(재판절차)를 거치지도않고
笞刑(태형), 科料(과료) 등 卽決處分(즉결처분)을 했습니다
總督府(총독부)는集會取締令(집회취체령)을 비롯한 수많은 思想關聯(사상관련) 法令(법령)을 제정하는 한편 民族的(민족적)인 主將(주장)을 내세우는 言論機關(언론기관)을 抹殺(말살)하고
管理(관리)나 敎員(교원)까지도 制服(제복)과 칼을 着用(착용)시켰습니다
經濟的(경제적)으로 申告制(신고제) 에 의한 土地調査事業(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어 一般人所有地(일반인소유지)뿐만 아니라 公有地(공유지)까지도 申告(신고)가 없다는 이유로 總督府(총독부)에
沒收(몰수)당했습니다
또한 森林法(삼림법)에 의해 森林(삼림)이모두 總督府(총독부)의 所有(소유)가 되고말았습니다
總督府(총독부)에의하여 沒收(몰수)된 토지일부는 東洋拓植會社(동양척식회사)와 같은 國策會社(국책회사)나 日本人(일본인)이 경영하는 民間企業(민간기업)에 헐값으로 팔려나갔습니다
祖上(조상) 代代(대대)로 내려오던 土地(토지)를 빼앗기 農民(농민)들은 零細(영세)한 小作農(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매년 늘어만가는 빚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137—唱歌(창가)-u
총독부는 더나아가 會社(회사)令(령)을 制定(제정)해 會社設立(회사설립)을 許可制(허가제)로 만들었고 朝鮮(조선)資本(자본)의 會社(회사)設立(설립)을 抑制(억제)함으로써 日本資本(일본자본)을
保護(보호)까지 했습니다
어업이나 광업등에서도 資本(자본)과 經營權(경영권)이 차례로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朝鮮資本(조선자본)은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막혀 零細企業(영세기업)에 머물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당장먹고살길이 막연해져 만주, 시베리아, 일본등지로 流浪(유랑)의길을 떠나 他鄕(타향)에서 헤매는신게가 되고말았습니다
이러한 民族(민족)의 受難(수난)을 憤怒(분노)에찬 노래로 만든 것이<復讐歌(복수가)>입니다
檀君子孫(단군자손) 우리少年(소년) 國恥民辱(국치민욕) 네아느냐
父母(부모) 장사할곳업소 子孫(자손)까지 從(종)되었네
天地(천지)넓고 넓건만 依支(의지)할곳 어데냐
간데마다 賤待(천대)받고 까닭없이 驅逐(구축)되어
잊었느냐 잊었느냐 우리怨讐(원수) 合倂羞恥(합병수치)를 네가 잊었느냐
自由(자유)와 獨立(독립)을 다시찾기로 우리獻身(헌신)에 전혀있도다
나라가 없는 우리同抱(동포) 살아있기 부끄럽다
땀을 흘리고피를 흘려서 나라羞恥(수치) 씻어놓고
뼈와살은 거름되어 논과밭에 有益(유익)되네
우리 目的(목적) 이것이니 잊지말고 나아가세
父母親戚(부모친척) 다버리고 外國(외국)나온 少年(소년)들아
우리 怨讐(원수)누구더냐 이를갈고 奮發(분발)하여
白頭山(백두산)에 칼을갈고 豆滿江(두만강)에 말을먹여
“앞으로갓” 하는소리에 勝戰鼓(승전고)을 울려
둥둥 萬歲(만세) 萬歲(만세)~~~~~~~~~~~--------------------------------------------------------<復讐歌(복수가)>
일제의 武斷統治(무단정치)하에 抑壓(억압)받고 收奪(수탈)당하던 朝鮮民衆(조선민중)은 愛國唱歌(애국창가)를 부르는것으로 日常生活(일상생활)의 鬱憤(울분)을 달랠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高等警察(고등경찰)에 發覺(발각)되어서 많은사람들이 檢擧(검거)되고 唱歌集(창가집)이 押收(압수)당했습니다
이 狀況(상황)은 合倂(합병)이듬해인 1911년에 열린 제2회도장관회의 席上(석상)에서 데라우치 總督(총독)이”사립학교등에 창가나 그밖에 독립을 고취하고 일본에 반항하는 내용에 관한글
을 쓰는자가있는지 與否(여부)에 特(특)히 主意(주의)하라”고 강조하고 있는것으로도 알수있습니다
總督府(총독부)의 無慈悲(무자비)한 彈壓(탄압)으로 抗日唱歌(항일창가)는 表面積(표면적)으로 사라졌지만 뜻있는 사람들의 손에의해서 몰래책으로 만들어져 戒屬(계속)불렸습니다
가령 1915년에 윤치호가 경영한 개성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唱歌集(창가집)은 1차로 40부 2차로 90부가 發行(발행)되었는데 얼마후 경기도 경무부에 摘發(적발)되고 말았습니다
이책의 序文(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었습니다
國家(국가)의 興亡盛衰(흥망성쇠)는 國民(국민)의 精神(정신)에 달려있습니다구민의 정신을 感發(감발)시키는 것은 歌曲(가곡)이 으뜸입니다
그런고로 歐米諸國(구미제국)에 있어서는 巨(거)0의 詩人(시인) 音樂家(음악가)의 微妙(미묘)한시조 및 가곡으 국민의 精神(정신)을 涵養(함양)시켰읍니다
우리 海東(해동)의 祖國(조국)은 古來(고래) 가곡이 없지 않았으나 그뜻이대개 0000하지않음이 없었으니-------중략-----------
이에있어서 동지서로 參0하여 현재 諸大家(제대가)의 가곡 有餘鐘(유여종)을 收集編纂(수집편찬)하고 이름지어 창가집이라 한다---
<경기도 경무보고 불온자발견처분 1건 경고기발 제527호>
1915년, 11월13일
1138--唱歌(창가)-v
앞란의 윤치호편찬 창가집은 아직 發見(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중에서 129번째<歐洲動亂(구주동란)>이라느 노래의 一部(일부)가 위경무부 보고서에 실려있습니다
一千(천) (일천)九百(구백) 14年(년) 夏節(하절)인 7月(월)
0한 腥風(성풍)은 西(서)쪽으로 불어와
極東(극동)半島(반도) 靑年(청년)의 00을깨고
神經(신경)을 刺戟(자극)시켜 迷夢(미몽)을캔다----후략-------------------------------------------------<구주동란>. 일부
또하나 46번쨰<英雄(영웅)릐 模範(모범)>이라는 노래는 日本人(일본인)의 感情(감정) 매우 傷(상) 하게만든것으로 說明(설명)되 이습니다
雜林(잡림)의 깨집이 될지라도
일본에 0신은 못하겠노라
一死(일사)를 決心(결심)한 朴堤上(박제상)의 충성
우리들은 模範(모범)으로 해야되겠다
일본의 황제를 床奴(상노)로삼고
日本(일본) 皇妃(황비) 계집종삼아
부리고 만다면 0于老(0우노)의 盟誓(맹세)
우리들은 模範(모범)으로 해야겠네--------------------------후략--------------------------<英雄(영웅)의 模範(모범)>
이 事件(사건)과 관련 한영서원의 많은 敎師(교사)가 檢擧(검거)되어 出版法違反(출판법위반) 保安法違反(보안법 위반)및 不敬罪(불경죄)에걸려 경성지방법원에 送致(송치)되었습니다
총독부는 병합2년째인 1912년에 이미 식민지경영을위한문화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민요에 관해서는 1912년, 1933년, 1935년 세번에걸쳐 1347수를 모았고 그밖에 俗謠(속요), 수수께기
등도 蒐集(수집)했습니다
그중에서”심어라 심어라 뽕나무를 심어라 우리 天皇陛下(천황폐하)겝셔 權民農桑(권민농상) 하신다” 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천황폐하가 아니고 “皇帝陛下(황제폐하) 였을터인데 이시점에서 총독부관리가 조선인의 日帝(일제)에대한 同化度(동화도)를 민요를 통해 나타내려 한짓이라 해석됩니다
唱歌(창가)에대한 總督府(총독부)의 監視(감시)가 차츰 심해짐에 따라 學校音樂時間(학교음악시간)에 배우는 창가에서도 民族的(민족적)인 要所(요소)는 모습을 감추고맙니다
그 때문에 愛國的唱歌(애국적창가)는 官憲(관헌)의 눈을피해 남몰래불리게 될수벆에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널리불린 것은<亡國歌(망국가)>와 <去國家(거국가)>였습니다
슬프도다 우리 民族(민족)이
四千年(4천년) 歷史國(역사국)으로
子子孫孫(자자손손) 福樂(복락)하더니
오늘날 地境(지경)이 왠일인가
後斂(후렴)
鐵絲(철사) 紬絲(주사) 結縛(결박)한 줄은
우리 손으로 끊어버리고
獨立萬歲(독립만세) 우뢰소리에바다이 끓고 산이 동켔네
一間斗屋(일간두옥)도 내것아니요
수묘전토도 내것 못되네
무리한 수욕도 대답못하고
空然(공연)한毆打(구타)도 그저받누나
후략--------------------------------------------------------------------------------------------------------<亡國歌(망국가)>
1139--唱歌(창가)-w
1919년 3월1일 일제의 억압에 朝鮮民族(조선민족)의 憤怒(분노)는 드디어 일대 民衆蜂起(민중봉기) 가 되어 暴發(폭발)했습니다
그에앞서 2월8일 도코간다 니시오가와초 에있는 조선 ywca 회관에서 미국대통려윌슨의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조선인유학생 600여명이모여 留學生大會(유학생대회)를 개최하고
朝鮮獨立靑年團(조선독립청년단) 명의로 獨立宣言文(독립선언문)을 採擇(채택)합니다
이 2.8 獨立宣言文(독립선언문)은 서울에 전해져 本國(본국)의 獨立運動(독립운동)전개에 決定的(결정적)인 影響(영향)을 끼칩니다
그무렵 朝鮮本國(조선본국) 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등 종교관계자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마침 오랫동안 德壽宮(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고종이 그해 1월 갑자기 死亡(사망)하자 毒殺(독살)된 것이 아닌가하는 疑惑(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3월1일의 宣言發表式(선언발표식)은 施行直前(시행직전) 애초 예정되었던 파고다공원서 太和館(태화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날 파고다공원에는 아침부터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모여 鍾路(종로)거리는 수만의 群衆(군중)으로 가득찼고 學生(학생)들이 指導(지도)하는 가운데 獨立宣言文(독립선언문)이 朗讀(낭독)되었습니다
感激(감격)科(과)興奮(흥분)의 도가니로 로 바뀐 파고다공원 여기저기에”獨立萬歲(독립만세)”소리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앞장서 이끄는 敎員(교원), 學生(학생)등을 따라서 많은사람들이 “光復歌(광복가)”, “獨立歌(독립가)”를 노래하면서 示威行進(시위행진)을 했습니다
二千萬(이천만)同抱(동포)들아 알어나거라
일어나서 銃(총)을 메고 칼을 잡아서
잃었던 내祖國(조국)과 너의 自由(자유)를
怨讐(원수)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한산의 우로받은 松柏(송백)까지도
무덤속 누워있는 魂靈(혼령)까지도
老少(노소)를 막론하고 南(남)이나 女(여)나
어린아이 까지도 일어 나거라
끓는 피로 靑山(청산)을 고루 적시고
흘린피로 江水(강수)를 붉게하여라
섬나라 怨讐(원수)들은 쓸어 버리거고
平和(평화)의종소리가 울릴떄까지----------------------------------------------------------------------------------<光復歌(광복가) >一名(일명) “蜂起歌(봉기가)”
3.1운동의 獨立蜂起(독립봉기)는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진남포, 안주, 원주, 의주, 선천, 원산등의 地域(지역)에서도 同時(동시)에 일어나 瞬息間(순식간)에 全國(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외도 외국의 조선사람들이 거주하는곳이면 파급되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독립운동은 특히 3월부터 5월까지 가정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허나 그것이 한계였습니다
武力(무력)으로 武裝(무장)한 日本軍(일본군)을 對抗(대항)할만한 訓練(훈련)된 사람도없었고 이 示威勢力(시위세력)을 糾合(규합)해 獨立(독립)으로 이끌 指導者(지도자)도 不在(부재)했습니다
平和(평화)로운 行進(행진)을하는 示威(시위)勢力(시위세력)을 日本軍警(일본군경)은 殘虐(잔학)하게 彈壓(탄압)했습니다
총독부의 발표에 의하드라도 살해된 조선사람의 숫자는 7500명 부상자도 2만여명 피검거자는 5만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平和(평화)로운 示威(시위)에 無慈悲(무자비)한 暴力(폭력)으로 朝鮮民衆(조선민중)들을 制壓(제압)하려하자 이운동은 차츰 激烈(격렬)해지기 시작 곤봉, 낫, 쇠스랑, 죽창을 들고
完全武裝(완전무장)한 日本軍警(일본군경)에 對抗(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일운동의 第一線(제일선)에서 싸운 鬪士(투사)들은 그鬪爭(투쟁)속에서<3,1萬歲歌(만세가)><獨立運動(독립운동)歌(가)><3월1일가>등 많은 鬪爭歌(투쟁가)를 만들어 口傳(구전)筆傳 (필전)으로
전파시켰습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朝鮮獨立戰(조선독립전)
십년을 참고참아 인재 터졌네
뼈도조선 피도조선 이피 이뼈는
살아 朝鮮(조선) 죽어 朝鮮(조선) 朝鮮(조선)것일세---------------------------------------------------------------------<3.1萬歲歌(만세가)
동무들아 나아가자 勇敢(용감)하게
赤手空拳(적수공권)일지라도 두려울소냐
正義(정의)와 人道(인도)의 光明(광명)비치는곳에
怨讐(원수)들의 千軍萬馬(천군만마)도 打勝(타승)하리라---------후략-----------------------------------------<獨立運動(독립운동)歌(가)>
1140--唱歌(창가)-x
3.1運動(운동) 以後(이후)에 발표된 곡이긴 하지만 “柳寬順(유관순)”이라는 童謠調(동요조)노래도 記憶(기억)해야 합니다
이노래는 3.1운동에 앞장섰다가 1920년 일본의 殘酷(잔혹)한 拷問(고문)으로 獄死(옥사)한”朝鮮(조선)의 Jeanne d’arc-잔다르크-”로 推仰(추앙)받는 柳寬順(유관순)烈士(유관순열사)를
기려 오랫동안 사랑받은 곡입니다
三月(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柳寬順(유관순)누나를 生角(생각)합니다
獄(옥)속에갇혔어도 萬歲(만세)부르다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졌대요
三月(삼월)하늘가만히 우러러보며
柳寬順(유관순)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목소리 들릿듯하여
푸른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柳寬順(유관순)>강소천사, 나운영곡
온 民族(민족)이 獨立(독립)을 要求(요구)하며 맨손을 싸운 3,1獨立運動(독립운동)은 일본의 武力彈壓(무력탄압)으로 鎭壓(진압)당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의 餘波(여파)는 중국의5.4운동등 帝國主義列强(제국주의 열강)의 侵略(침략)과 植民統治下(식민통치하)에 呻吟(신음)하는 아시아 여러나라의 民族運動(민족운동)에 커다란
影響(영향)을 끼쳤습니다
1929년 印度(인도)의 獨立運動(독립운동) 指導者(지도자)이며 世界的(세계적)인 詩聖(시성) 타고르는 도쿄를 訪問(방문)했을 때 留學中(유학중)인 朝鮮人學生(조선인학생)들의 豫防(예방)을받고
3.1運動(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學生(학생)들의 要請(요청)으로 卽興詩(즉흥시)를 읊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黃金時代(황금시대)에
의 하나였던 korea-코리아-
그등불 지금 다시한번 켜지는날에
너는 東方(동방)의 밝은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곳
智識(지식)은 自由(자유)롭고
世界(세계)가 좁은 담벽으로 조각나지 않는곳
知性(지성)의맑은 흐름이
굳어진 習慣(습관)의 모래펄판에 길잃지않는곳
無限(무한)이 퍼져나가는 生角(생각)과 行動(행동)으로 우리의마음이 引導(인도)되는곳
그러한 自由(자유)의 天堂(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祖國(조국) koea-코리아-여
깨어나소서-----------------------------------------------------------------------------------------------------------------<東方(동방)의 등불> tagore-타고르-
1141-唱歌(창가)-y
三一運動(삼일운동)은 그들의 陰凶(음흉)한 속샘이야 뻔하지만 日帝(일제)는 武斷政治(무단정치)를 허울좋은 文化政治(문화정치)로 바꾸고 一定限度內(일정한도내)에서 언론, 출판, 집회등의
自由(자유)를 認定(인정)하는듯 懷柔政策(회유정책)을 劃策(획책)했습니다
하지만 文化政治(문화정치)라고는 해도 植民地配(식민지배) 要綱(요강)을 바꾼것이 전혀아니고 日常的(일상적)인 監視體系(감시체계)를 憲兵警察隊(헌병경찰대)신 普通警察(보통경찰)로
바꾼 것 뿐이었읍니다
문화정치 일환으로 言論(언론)에대한 規制(규제)가 완화되어 日刊紙(일간지)로는 1920년 3월1일에 작금 極右新聞(극우신문)이 되버린 朝鮮日報(조선일보)가 4월1일에 조선일보 못지않게
極右(극우)新聞(극신문) 東亞日報(동아일보) 시사신문의 創刊(창간)을 默認(묵인)합니다
또 1919년 서울, 서광이 창간된 것을 비롯하여 開闢(개벽), 朝鮮之光(조선지광), 新東亞(신동아), 朝光(조광) 등 雜誌(잡지)가 속속 등장했고 文學同人誌(문학동인지)인 廢墟(폐허) 薔薇村(장미촌)
白鳥(백조)등도 잇달아 발간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19세기 文藝思潮(문예사조)가 理論(이론)이나 作品(작품)으로 導入(도입) 紹介(소개)되었습니다
이러한 雜誌(잡지)를 통해서 김동인, 전영택,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등의 小說家(소설가)와 주요한, 김억, 김소월, 황석우 같은 詩人(시인)이 登場(등장)하여 朝鮮(조선)近代文學(근대문학)의
先驅者(선구자) 役割(역할)을 합니다
文化政治(문화정치)에의해 文化全般(문화전반) 에 걸쳐 歐美(구미)의 新思潮(신사조)가 도입되고 文化界(문화계)全體(전체)는 活氣(활기)를 띠게되었다는 글이 보입니다
그러나 一般民衆(일반민중)의 生活(생활)속에는 三一運動(삼일운동)의 失敗(실패)등으로 인한 挫折感(좌절감)이 漫然(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속에서 “蕩子自歎歌(탕자자탄가)” “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라는 창가가 全國(전국)을 風味(풍미)했습니다
요즈음 젊은세대들이 무심코 希望歌(희망가) 라는 노래의뿌리는 알지못하고 浪漫的(낭만적)인 歌謠(가요)로만 잘못알고 부르는 경우를 자주 보게되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 風塵世上(풍진세상)을 마났으니 너의 希望(희망)이 무엇이냐
富貴(부귀)와 榮華(영화)를 누렸으면 希望(희망)이 足(족)할까
푸른하늘 밝은달 아래 곰곰이 生角(생각)하니
世上萬事(세상만사)가 春夢(춘몽)중에 또다시 꿈같도다----후략-----------------------------------------<蕩子(탕자)自歎歌(자탄가)>
<蕩子自歎歌(탕자자탄가)> 혹은 <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는 19세기에 美國人(미국인) 제러마이어 잉갈스가 作曲(작곡)한 讚頌歌(찬송가) when arrive at home-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Melody-멜로디-를 借用(차용)해서 輕快(경쾌)한 tamp-템포-로 불렸습니다
Tampo-템포-는 輕快(경쾌)하나 曲調(곡조)가 지닌 哀調(애조)에 더하여 三一運動失敗(삼일운동실패) 등의의 時代狀況(시대상황)으로 現實逃避(현실도피) 頹廢的(퇴폐적) 氣風(기풍)을 叱責(질책)하는
說敎調(설교조)의 歌詞(가사)때문에 노래題目(제목)처럼 民衆(민중)의 意氣(의기)를 높이기는커녕 희망이 사라진뒤의 絶望感(절망감)과도 같은 危機意識(위기의식)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민중은 이노래를 오히려<失望歌(실망가)>라고 불렀습니다
1920년대에는 망토에 모자를 쓴모습으로 바이올린을 켜면서 唱歌集(창가집)을 파는 樂士(악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 창가집중에 <梧桐(오동)나무 唱歌集(창가집)>에는 “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 라는 題目(제목)으로 실려있음을 앞선 <종횡무진가요사>에 설명되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現實(현실)과는 동떨어져서 立身出世(입신출세)에만 汨沒(골몰)하고있는 경향에대한 警戒(경계)의 노래이고 三一運動(삼일운동) 失敗(실패)로 學生(학생)들이나 親日分子(친일분자) 子息(자식)들이
本分(본분)을 팽개친체 妓生(기생)집이나 드나들면서 虛浪放蕩(허랑방탕)하게 生活(생활)하는것에 대한 警告(경고)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노래는 이윽고 演劇幕間(연극막간)에서 불리게되었고 朝鮮流行歌(조선유행가) 출발점으로 널리 민중속으로 퍼져나갔습니다
祖國(조국)의 自主獨立(자주독립)에 대한 悲壯(비장)한 決意(결의)를 풍기다 이윽고 亡國(망국)의恨(한) 과 失意(실의) , 悲嘆(비탄)속에 갈아앉아버린 唱歌(창가)는 1920년대에 들어와 人生(인생)의
悲哀(비애)를 詛呪(저주)하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音樂的(음악적)으로 昇華(승화)된 藝術歌曲(예술가곡)으로 변하거나 혹은 商業資本家(상업자본가)에 의하여 레코드로 만들어지면서 創作(창작)新民謠(신민요) 流行歌(유행가)로
변해갔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日帝時代(일제시대) 新民謠(신민요)와 流行歌(유행가)가 總督府(총독부)에 의한 朝鮮支配(조선지배)의 一環(일환)으로 意識的(의식적)으로 退廢悲歎調(퇴폐 비탄조)의
內容(내용)을 漫然(만연)시켰다고 보는 見解(견해)도있습니다
그러한 노래는 특히 1980년대에 民衆文化(민중문화)의 觀点(관점)에서 不定(부정)되고 不息(불식)되어야할 것으로 嚴格(엄격)하게 批判(비판)을 받았습니다
1142—新派歌謠-신파가요-a
韓國大衆歌謠(한국대중가요)의 그出發(출발)은 보는 視點(시점)에 따라 그說(설)이 多樣(다양)합니다
헌데 “最初(최초)의 音盤歌謠(음반가요)가 1925년 나온<이 風塵世上(풍진세상)을>로 박채선 이류색이 함께 불러 人氣(인기)를 모았다” 主張(주장)하는 글이 보입니다
이곡은 1925년 東亞日報 廣告(동아일보 광고)에 닙보노홍<일본축음기회사 label-라벨->의 title-타이틀-로 실렸습니다
이어서 1926년<死義(사)의讚美(찬미)>가 音盤(음반)으로 出市(출시)되어 大衆生産(대중생산), 大衆傳播(대중전파)의 길을 열었고 1929년에는 韓國人(한국인)에 의한 最初(최초)의 創作歌謠(창작가요)
<落花流水(낙화유수)一名(일명) 강남달> 出市(출시)되어 絶頂(절정)을 이룹니다
그時期(시기) “流行歌(유행가)”로 불리던 大衆歌謠(대중가요)는 1925년 도월색, 김산월의<長恨夢歌(장한몽가)>와<이풍진 세상을><시들은 芳草(방초)>등이 나왔는데 이는 순수한 한국인에한 창작가요
가아닌 각각<금색야차><후지산의 봉우리><뱃사공의노래>등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의 飜案曲(번안곡)에 불과했습니다
또 이무렵 미국에서 聲樂(성악)을 專攻(전공)한 테너 안기영의<내 故鄕(고향)을 ><제비들은 江南(강남)에>가 출시되기도 했고 특히 말도많고 탈도많은 윤심덕의<死(사)의 讚美(찬미)>가
10만장 販賣(판매)라는 거짓말 같은 販賣高(판매고)를 紀錄(기록)했는데 당시 奢侈品取扱(사치품취급)받던 留聲機(유성기)가 一般(일반)에게 널리 普及(보급)되는 決定的(결정적) 契機(계기)가 되었다는
肯定的(긍정적) 評價(평가)를하는 글이 자주보이나 그 留聲機(유성기)를 販賣(판매)한 주체가 일본의 레코드회사이고 결국 그들의 배만 불려주었다는 事實(사실)을 看過(간과)하고 있습니다
10만장이나 팔린 經濟的效果(경제적효과), 利益(이익) 중 朝鮮人(조선인)에게 돌아온건 뭐가있었나요??
괜히 朝鮮人(조선인)들의 好奇心(호기심)만 자극하여 그노래를 들어보싶어서 집팔고 논팔고 빚내어 留聲機(유성기)를 사려고 熱狂(열광)해 빚만잔뜩지게 했습니다
三一運動後(삼일운동후) 일제는 일종의 懷柔策(회유책)으로 文化政策(문화정책)을 標榜(표방)함으로써 藝術活動(예술활동)이 活性化(활성화)되는 樣相(양상)을 보이긴 했습니다
“1910년대 憲兵統治下(헌병통치하)의 嚴格(엄격)한 쇠사슬에서 벗어날수있었던 것이다”라는 글이 보이는바 과연 그랬을까요??
日帝(일제)가 標榜(표방)한 文化政策(문화정책)은 단지 規制(규제)와 團束(단속)을 容易(용이)하게 하기위한 그들의 陰凶(음흉)하기 짝없는 便法(편법)에 불과했습니다
日本軍(일본군)몰래 음지에서 활동하던 反對勢力(반대세력)을 속이흔히 들여다 보이는文化政策(문화정책)이라는懷柔策(회유책)으로 誘引(유인)하여 正體(정체)를 드러내게해서 한데모아서
彈壓(탄압)하려고-----
아무튼 이러한 時代的雰圍氣(시대적분위기)를 틈타 大衆歌謠(대중가요)도 조금은 기지개를 폅니다
1920년대는 실로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의 반쪽짜리 開化期(개화기)였습니다
多樣(다양)한 樣式(양식)의 노래들이 多樣(다양)한 소리꾼들에 의하여 불려졌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record 資本-레코드자본-에 의하여 우리소리꾼들의 自發的(자발적)인 노력에 의하여 불려졌다면 더우더 差員(차원)높고 華麗(화려)한 大衆歌謠(대중가요)가 創出(창출)되었겠지만
不幸(불행)하게도 우리민족을 强壓的(강압적)으로 支配(지배)하던 日本音盤會社(일본음반회사)들에 의하여 雇傭(고용)된 우리 作家(작가)들에 의해서 他意的(타의적)으로 먹고살기위해
할수없이 행해진 創作行爲(창작행위)였다는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이 時期(시기) 에는 日本流行唱歌(일본유행창가), 傳統民謠(전통민요) 판소리 西洋(서양)노래, 歌曲(가곡), 심지어 우스갯소리로로 社會(사회)를 諷刺(풍자)하는 漫謠(만요)까지 등장합니다
이러한 1920년대 노래들은 1922년 이상준편으로<新流行唱歌集(신유행창가집)>으로 묶여졌다가 1929년 여러곡을 追加(추가)하여 增補版(증보판)으로 나왔는데 이 文獻(문헌) 韓國歌謠(한국가요)의
흐름을 엿볼수있은 貴翰資料(귀한자료)가 아닐수 없습니다
1920년대 노래에서 눈에띄는 樣式(양식)이 時期(시기)가 時期(시기)인만큼 存在(존재)할수밖에없는 飜案曲(번안곡)입니다
飜案曲(번안곡)은 日本(일본)이나 西洋曲(서양곡)에 우리歌詞(가사)를 덧입힌 노래를 意味(의미)합니다
곧 曲(곡)은 外國曲(외국곡)이나 歌詞(가사)는 우리것으로 改詞(개사)한 것입니다
小說(소설)도 어차피 大衆歌謠(대중가요)와 마찬가지로 이러힌 樣式(양식)이 流行(유행)하여 “長恨夢(장한몽)”같은 飜案小說(번안소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앞서 言及(언급)한 飜案歌謠(번안가요)는<이풍진세상을><장한몽가> <카츄사>가 代表的(대표적)입니다
1143--新派歌謠(신파가요)-b
<이풍진세상을>은 처음<탕자자탄가> <탕자경계가> <청년경계가>로 唱歌集(창가집) 에서 불리다가 音盤化(음반화)되며 노래 歌詞(가사) ”이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서 제목으
借用(차용)하였고 후에 생뚱맞게도 <希望歌(희망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곡도 그時期(시기) 形便(형편)처럼 어차피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를 번안한것으로 一般(일반)에 流行(유행)하다가 1925년경 박채선, 이류색이 닙보노홍 label-라벨-로 recording-레코딩-합니다
韓國流行歌(한국유행가)의 最初(최초)의 音盤(음반)으로 발매된곡이다는---主張(주장)이있습니다
같은해 11월 歌詞(가사)를 조금바꾸고 4절을 3절로줄여서 김산월, 도월색이 취입한 이곡이 다시 발매됩니다
題目(제목)은<이풍진 歲月(세월)>로 改題(개제)되 있습니다 후에또 도월색 솔로로 또 발매됩니다
3번이나 이곡이 吹入(취입)發賣(발매)된것으로 보아 많은呼應(호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노래는 音盤化(음반화)되기전 市中(시중)에서 流行(유행)되고 이상준 편저 <신유행창가집>에 살리기도 했습니다
서양곡인 토마스가든의<꿈>을 일본에서 번안하여<흰후지산봉우리>로 불리던것을이 한국으로 들어와<이풍진세상>이 된 것---는 주장이 있으나
원래 1882년 미국에서 간행된 찬송가집<franklin square song collection> 에 수록된 jeremiah ingalls –잉갈스작곡의 when we arrive at home 라는 노래였던 것이 일본으로 전해져
1890년 간행된”명치창가 제5집”에 가사가 바뀌어<夢의外(몽의외)> 라는 題目(제목)으로 수록되었고 1910년에 배 顚覆事故(전복사고)로 죽은 女學生(여학생)들의 哀悼歌(애도가) 로 사용되 여학생들의 音樂敎師(음악교사)의 또다른 가사가 붙여져<진백---->로 불리던 것이 1916년경 日本(일본) 엔카시-<演歌士(연가사)>들에 의하여 널리 유포되면서 대대적으로 유행해 음반화됩니다
<진백-->이 朝鮮(조선)에 傳播(전파)되어 새로운 韓國語歌詞(한국어가사)와 題目(제목)이 붙어<蕩子自歎歌(탕자자탄가)> 로불린 時点(시점)은 正確(정확)히 알려져있지 못하나 大略(대략)
1919년 3.1運動直後(운동직후)인 1920년경쯤으로 推定(추정)됩니다
어쨌던 이곡은 二重飜案(이중번안)이 된것이며 1930년대 채규엽이 希望歌(희망가) 로 改題(개제)불렀고 愛唱歌謠(애창가요)가 되었다하나 그의 音源(음원)은 發掘(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이 風塵世上(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希望(희망)이 무엇이냐
富貴(부귀)와 榮華(영화) 누렸으면 希望(희망)이 족할까
푸른하늘 밝은달아래 곰곰이 生角(생각)하니
世上萬事(세상만사)가 春夢(춘몽)중에 또다시 꿈같도다------------------------------------------------------<蕩子自歎歌(탕자자탄가)>
富貴榮華(부귀영화)를 꿈꾸고 에 몰두하는 人情世態(인정세태)를 諷刺(풍자)하는 다소 頹廢的(퇴폐적)인 內容(내용)을 담은 노래일수밖에 없습니다
全國民的(전국민적)으로 일어났던 三一運動(삼일운동)이 時期狀況上(시기상황상) 失敗(실패)로 끝나버린 후였으니----
妓生歌手(기생가수)였을것으로 推定(추정)되는 박채선, 이류색이 吹入發表(취입발표)해 長安(장안)의 화재를 모았다 는 글이보입니다
이런노래가 流行(유행)했다는 “流行歌(유행가)는 世態(세태)를 비추는거울”이라는 말을 引用(인용)치 않더라도 것은 이미 1920년대 自暴自棄(자포자기)한 젊은階層(계층)과 物質萬能(물질만능)의
世態(세태)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노래副題(부제)도 아예 <靑年警戒歌(청년경계가)> 입니다
청년들의 頹廢的(퇴폐적)인 世態(세태)를 警戒(경계)하기위한 노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內容(내용)으로 볼 때 希望歌(희망가)는 다소 逆說的(역설적)인 題目(제목)으로 보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時代狀況(시대상황)을 깊히 알지못하고 알고싶어 히지도 않는 無智(무지)의 모습이다 할수있습니다
飜案歌謠(번안가요)의 代表曲(대표곡)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長恨夢歌(장한몽가)> 입니다
흔히들 조중환이 發表(발표)한 新小說(신소설)로 잘못알고있는------
1913년 조중환이 新聞(신문)에 連載(연재)한 新小說(신소설)이나 그의 오리지널 創作小說(창작소설)이 아니고--------
1144-新派歌謠(신파가요)-c
日本(일본)의 新派小說(신파소설)<金色夜叉(금색야차)>에서 主人公(주인공)과 小說(소설)속 舞臺(무대)를 韓國(한국)으로 옮긴 飜案小說(번안소설)입니다
原作(원작)”곤지카 야사 金色夜叉(금색야차)”는 當代(당대) 日本(일본)의 國民作家(국민작가)로 推仰(추앙)받던 浪漫主義(낭만주의) 小說家(소설가) 오자키 고요 가 1897년,1월부터
1899년, 1월까지 요미우리 新聞(신문)에 게재한 日本最初(일본최초) 連載小說(연재소설)입니다
메이지유신이후 資本主義(자본주의) 時代(시대)로 접어든 일본이 物質萬能(물질만능)의 賤民資本主義(천민자본주의)의 世態(세태)가 드러나던 시기의 社會現象(사회현상)을 銳利(예리)하게 파헤칮
작품으로 메이지시대 最高(최고)의 人氣小說(인기소설)이었습니다
제목의<金色夜叉(금색야차)>라는 뜻은 “돈의 저승使者(사자)”라는 뜻인데 世上(세상)을 支配(지배)하는 것이 돈이라는 黃金萬能主義(황금만능주의)를 意味(의미)합니다
돈을 素材(소재)로하여 大衆(대중)의 人氣(인기)와 關心(관심)을 끌었던것입니다
“돈이냐 사랑이냐”는 現實的(현실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世俗的主題(세속적주제) 가 大衆(대중)들에게 크게 appeal-어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小說(소설)의人氣(인기)의 餘勢(여세)를 몰아 1898년 新派劇(신파극)으로 舞臺(무대)에 올려 더욱 人氣(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도 그인기는 계속되어 1898년 作品(작품)의 背景(배경)이된 아타미시에 작품의 두주인공 간니치와 오미야 銅像(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장한몽>은 持續的(지속적)인 人氣(인기)를 모아 1930년 박문서관에서 再發刊(재발간)되고 증판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金色夜叉(금색야차)>亦是(역시) 오자카의 創作(창작)이 아니라 영국여류작가 살롯 브레임의<weaker than a woman-여자보다 약한자>의 飜案作(번안작) 일뿐입니다
결국 일본 메이지시대 최고인기소설도 번안소설 일뿐이고 <장한몽>은 二重飜案小說(이중번안소설) 이었던 것입니다
장한몽은 잘알려진대로 女主人公(여주인공) 심순애가가 김중배의 돈의 誘惑(유혹)에 넘어가 約婚男(약혼남) 이수일을 排反(배반)하고 結婚(결혼)했으나 그녀역시도 김중배에게 背信(배신)당하는
課程(과정)을 그린 作品(작품)입니다
大同江(대동강)에 投身自殺(투신자살)까지 試圖(시도)하다가 救出(구출)되어 高利貸金業(고리대금업)으로 甲富(갑부)가된 이수일과 다시 結合(결합)한다는 新派調(신파조)내용을 담고있습니다
오직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背信(배신)하고 背信(배신)당하는 “돈이냐 사랑이냐”라는 世俗的(세속적)인 葛藤(갈등)을 主題(주제)로 하고있습니다
이러한 世俗的(세속적)인 主題(주제)가 결국 人氣(인기)와 興行(흥행)의 原因(원인)이 된것입니다
한국측 번안가 조중환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舞臺(무대)를 오자키의 야타미 海邊(해변)에서 大同江(대동강) 浮碧樓(부벽루)로 옮기고 한국인의 情緖(정서)에맞게 臺詞(대사)와 세부줄거리를
新派(調(신파조) 로 調節- 조절-하여 飜案(번안)小說(소설)의 效果(효과)를 極大化(극대화) 하는데 成功(성공)합니다
특히 大同江 浮碧樓(대동강 부벽루)의 離別場面(이별장면)은 shakespeare-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쥬리엣>의 balcony-발코니-에서 두 主人公(주인공)이 만나는 場面(장면)을 聯想(연상)시킬정도로
壓卷(압권)이었다는 主張(주장)도 보입니다
浮碧樓(부벽루)에서 마지막 離別場面(이별장면)”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았단말이냐”라고 絶叫(절규)하자 이수일이의 바지자락을 부여잡고 흐느끼던 심순애의 눈물어린 呼訴(호소)는
이 新派劇(신파극)의 絶頂(절정)을 아룹니다
어찌보면 幼稚(유치) 해 보이기까지한 “이러한 名臺詞(명대사??) 한줄은 新派劇(신파극)의 代名詞(대명사)로 불리며 인구에널리 膾炙(회자) 되었습니다” 라는 글이 보입니다
長恨夢(장한몽) 이야말로 大衆(대중)의 心琴(심금) 파고들어 눈물을 쏟아내게하는 催淚劇(최루극)의 壓卷(압권)이다 라고 주장도 보입니다
지금처럼 배고픔을 잃어버린 世代(세대)들도 이에 首肯(수긍)할까요?? 아님 “幼稚(유치)한 催淚强要劇(최루강요극)”이라 할까요??
新派劇(신파극)은 원래 西洋演劇樣式(서양연극양식)에 맞춰 만들어진극을 뜻하는데 西洋式演劇(서양식연극) 그 自體(자체), 서양연극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연극극을 新派劇(신파극)이라
칭했든게 原來(원래)의 意味(의미)였습니다
해서 日本(일본)에서는 새롭게 들여온 西洋演劇文化(서양연극문화)와 구분키위하여 旣存演劇文化(기존연극문화) “기부키”를 舊劇(구극) 라 불렀습니다
신파극은 1888년경부터 19세기말을 거처 20세기초까지 유행했습니다
新派劇(신파극)란 用語(용어)는 草創期(초창기) 壯士芝屋(장사지옥)-<소시시바이>, 書生芝屋(서생지옥)- <소세이시바이> 라 했습니다
여기서 소시<壯士(장사)>는 草野(초야)에 있다가 政治活動(정치활동)에 投身(투신)한 청년을 말하는데 그들은 正論(鼓吹(정론고취)를 위하여 演劇(연극)을 이용했읍니다
1887년전후 후일 안중근의사에게 하얼빈서 척살당하는 이등박문 내각이 極端(극단)의 Europe 化政策-유럽화정책-으로 비판을받자 安保條例(안보조례)를 발표 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言論(언론)이 막혀버린 청년들은 演劇型式(연극형식)을 빌어서 그들의 不滿(불만)을 呼訴(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契機(계기)가 되어서 소박한 演劇改良(연극개량)의 意圖(의도)가 부각되고 演劇(연극)을 生活手段(생수단)으로까지 이용하게됩니다
허나 점차 當初目的(당초목적) 이었던 政治意識(정치의식)이 사라지고 商業演劇化(상업연극화) 됩니다
결국 메이지시대 西洋演劇型式(서양연극형식)을 받아드려 政治劇(정치극)으로 시작한 新派劇(신파극)은 점차 초기의 啓蒙的(계몽적), 政治的(정치적) 요소가 사라지고 娛樂性(오락성)이
가미된 感傷的(감상적)인 극으로 변질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淸日戰爭(청일전쟁) 발발후 일부의 演劇團體(연극단체)가 戰況說明(전황설명) 형식을 빌어서 演劇(연극)을 公演(공연)하기 시작 好評(호평)을 받습니다
이러한 軍事劇(군사극) 으로 인하여 자리잡은 新派劇(신파극)은 1897년이후 文壇(문단)에 접근하여 소설극, 서구극번안물, 新聞連載小說(신문연재소설)를 脚色(각색) 연극으로 公演(공연)하면서
비로소 “新派(신파)의 藝風(예풍)”이 確立(확립)됩니다
이때부터 新派(신파)는 舊派(구파)와 對立(대립)할수있게 되고 新派劇(신파극)이라 불립니다
수년간 신파극 發展期(발전기)는 계속되고 처음 政治劇(정치극)에서 出發(출발) 家庭悲劇(가정비극), 花柳悲戀(화류비련)극등을 公演(공연)하기에 이릅니다
舊劇(구극) 과 反對(반대)되는 槪念(개념)으로 일본에서는 전통극인 가부키를 대신하여 政治軍事的目的劇(정치군사적목적극)으로 만들어진극으로 이를 다시 家庭劇(가정극)으로
再編(재편)한 양식이었던 것인데 1900년대 日本列島(일본열도)를 興行(흥행)의 물결로 휩쓸었습니다
誇張(과장)된 말투와 扮裝(분장) 極端(극단)의 善-선-과 惡-악 의 二分法的久成(이분법적 구성) 觀客(관객)을 意圖的(의도적)으로 激憤(격분)시키는 刺戟的(자극적) 이야기, 反轉(반전)의
劇的效果(극적효과)로 通俗性(통속성)과 興行性(흥행성)을 最高潮(최고조)로 끌어올린 양식입니다
이처럼 新派劇(신파극)에대한 歷史(역사)는 여러 通說(통설)이 있어서 混亂(혼란)스럽습니다
1145—新派歌謠(가요) (신파가요) –d
新派劇(신파극)은 政治的目的劇(정치목적극), 時事的娛樂劇-시사적 오락극-에서 시작되어 melo drama-멜로드라마-樣式(양식)의 家庭悲劇(가정비극)으로 자리잡습니다
草創期(초창기)에 서울에 와있던 日本人 劇場(일본인 극장)에서 公演(공연)되었던 것이 점차 韓國人(한국인)에게 傳播(전파)되면서 1910년대에서 解放(해방)될떄까지 朝鮮新劇史(조선신극사)
의 主流(주류)를 形成(형성) 하게됩니다
“長恨夢(장한몽)”을 新派劇(신파극)으로 舞臺(무대)에 올린 임성구는 日本人(일본인)들의 新派劇場(신파극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며배운 新派技術 (신파기)술을 익힌 사람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新派劇團(신파극단) “혁신단”을 구성하여<불효천법><六穴砲强盜(육혈포강도)>등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바로 그 혁신단에 의하여<장한몽>이 新聞連載小說(신문연재소설)에서 新派劇(신파극)으로 誕生(탄생) 하게됩니다
1910년대 朝鮮新派劇(조선 신파극)을 이끈 것이 임성구의”혁신단” 이기세의”유일단” 이었습니다
物質萬能主義(물질만능주의)의 通俗的(통속적) 價値觀(가치관)의 icon-아이콘-인”돈이냐 사랑이냐”는 title-타이틀-을 내새운<장한몽>은 그야말로 長安(장안)의 화재와 人氣(인기)를 독차지하여
新文學 最初(신문학 최초) best seller-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호한 일이 되었습니다
“신파문학” 樣式(양식)을 創出(창출)함으로써 近代 novel-근대노벨-의 嚆矢(효시)가 되었읍니다
이렇게 新小說(신소설)과 新派劇(신파극)으로 興行(흥행)에 成功(성공)한 <長恨夢(장한몽)>은 이후 大衆歌謠(대중가요) 樂劇(악극) 映畵(영화) 連鎖(연쇄)劇(연쇄극) musical-뮤지컬-등 장르를
超越(초월)하여 再生産(재생산)됩니다
新派劇(신파극) “長恨夢(장한몽)”을 人氣(인기)의 頂上(정상)에 올려놓은 揷入曲(삽입곡)은 이상준편저<신유행창가집>에 전합니다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 양인이로다
악수논정하는것도 오늘뿐이요
보보행진 산보함도 오늘뿐이다------------------후략-------------------------------------------<長恨夢歌(장한몽가)>
7.5조 日本調(일본조) 唱歌rhythm-창가리듬-으로 되있는 이곡은 1918년 미야지마이쿠호 고토시운이 작곡한 金色夜叉(금색야차) 에서 melody 를 차용했습니다
헌데 1918년 고토시운작곡의 노래가 發表(발표)되기 전에는 <장한몽> 주제가를 日本學校 校歌(일본학교교가)에서 멜로디를 따왔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上記(상기) 韓國語歌詞(한국어가사)는 1920년도 발간 정경운편저 <낙원창가>에서 올겼습니다
이노래나오는 노래중에”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탐이나더냐 만일에 저달이 오늘같이 흐리거든 이 수일이가 어디에선가 너를 원망하는 줄이나 알아라”른 처절한 대사
를 삽입하여 新派調 效果(신파조 효과효과)를 極大化(극대화)했습니다
고복수 황금심부부의 音源(음원)에서 臺詞(대사)들을수있습니다
노래와 대사가 혼합된으로써 청중의 感情移入效果(감정이입효과)를 高調(고조)시킨 것입니다
이극은 解放後(해방후)에도 映畵化(영화화)되어 1969년 신상오감독의<장한몽> 김기감독의<가버린사랑> 1987년이석기감독<성 리수이뎐> 으로 이어집니다
1969년 신상옥감독의<장한몽>은 신성일, 윤정희씨 콤비출연으로 人氣(인기)의 頂點(정점)을 찎습니다
그야말로 “장한몽”은 時代(시대)와 genre-장르-를 超越(초월)하여 존재하는 綜合藝術的-종합예술적- 共時性(공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1913년 飜案新小說(번안신소설)<장한몽>으로 시작한 조그만 나비짓은 韓國藝術(한국예술)의 地殼變動(지각변동)을 일으키며 現在進行形(현재진행형)으로 擴大(확대)되고 있는것입니다
나비짓이 큰暴風(폭풍)을 불러온것입니다
이를 “나비 效果(효과)<butterfly effect>”라 부릅니다
韓國藝術史(한국예술사)에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불러온 것은 長恨夢(장한몽)이 처음입니다
이와 類似(유사)한 新派劇(신파극)이 1930년대<사랑에속고 돈에울고>입니다
<장한몽>이 노래대한 상세한 설명은 앞선 <종횡무진가요사 1011~1016>를 참고바랍니다
신파극초창기 김도산 중심의 신극좌에서 공연된 <카츄사>도 大人氣(대인기)를얻었습니다
이에대한것도 종횡무진가요사 <장한몽>과 같이 설명되있습니다
解放後(해방후)에는 조금 內容(내용)은다르지만 이인권이 創作(창작)한 格調(격조)높은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카츄사노래>가 송민도에 의하여 불리고 김부자가 remake 하기도 합니다
이곡 역시도 해당하는 종황무진가요사를 보시기 바라며 여기서 줄입니다
1147—新派歌謠(신파가요) e
新派劇(신파극)은 朗讀劇(낭독극)으로 變身(변신)하기도 했습니다. <劇說明(극설명) 레코드> 라고도 합니다
“朗讀劇(낭독극)”은 글자그대로 낭독과 노래로 신파극을 變形(변형)한것입니다
신파극은 舞臺(무대)에 올려지는 公演(공연)이지마 낭독극은 實際公演(실제공연)이 아나라 record-레코드-로 녹화하는 것입니다
代表的(대표적)인 것이 저 유명한 1935년발매 <港口(항구) 의 一夜(일야)> 1,2편입니다
演劇舞臺人(연극무대인)등 藝術人(예술인)으로 큰業績(업적)을 남긴 王平(왕평)作(작)으로된 이낭독극은 그시기 “눈물의 女王(여왕)”로 인기가 높던 全玉(전옥)과 왕평이 남녀주역을 맡았고
낭독극중 主題歌(주제가)는 歌謠界(가요계) 代父(대부)로 불리던 김용환씨가 불렀습니다
이sp음반이 big-hit 하자 1936년 최종편이 나와 마침내 1939년 sp 4장으로 全集(전집)으로 출시됩니다
解放後(해방후)에는 대표적인 歌劇團(가극단) 전옥씨 운영의 白鳥歌劇團(백조 가극단)의 人氣(인기) repertory-레파토리-로 자리잡아 최고의 흥행을 이루었습니다
그 人氣(인기)의 餘勢(여세)를 몰아 1957년 그무렵 장모와 사위 관계였던 전옥, 최무룡이 주인공으로 출연 영화로 만들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朗讀(낭독)劇(낭독극)에서 樂劇(악극)으로 다시 映畵(영화)로 再生産(재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王平原作(왕평원작)의 이 낭독극의 줄거리는---典型的(전형적)인 新派調(신파조)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南女(남녀)가 사랑했지만 끝내 男子(남자)가 背信(배신)을 함으로 女主人公(여주인공) 탄심은 絶望(절망)에 빠집니다
사랑했지만 돌아온 것은 씁쓸한 背信(배신)뿐이었습니다
“사랑과 背信(배신)” 이라는 主題(주제)를보인 典型的(전형적)인 melo drama-멜로 드라마-였습니다
신파극의 公式(공식)은 不遇(불우)한 職業女性(직업여성)이 獻身的苦生(헌신적고생)으로 男子(남자)를 出世(출세)시키나 끝내 背信(배신)당하고 만다는 이야기 중심을 이룹니다
1929년 출시된<落花流水(낙화유수)>는 大衆的(대중적)인 人氣(인기)를 끈 最初(최초)의 韓國(한국)사람에 의한 最初(최초)의 創作歌搖(창작가요)로 評價(평가)받습니다
一名(일명) <江南(강남)달>로 불리는 이곡은 그당시 長安(장안)의 名物(명물)로 爆發的(폭발적)人氣(폭발적 인기)를 얻고있던 辯士(변사)出身(변사출신)이요 映畵管(영화관) 無聲映畵(무성영화)
樂士(악사)이기도 했던 萬能(만능)재주꾼 김서정이 創作(창작)한거였습니다
또한 record 錄音史的(레코드녹음사적)으로는 吐手(토수)시대서 마이크로폰을 使用(사용)한 電氣吹入(전기취입)으로 바뀌었을시 처음나온 음반이기도 했습니다
그전 1925년 취입, 西洋音樂(서양음악) 先驅者(선구자) 정사인 작곡 tenor-테너- 안기영취입<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있긴하나 이곡은 엄밀히 아야기하면 歌曲(가곡)으로 분류됩니다
낙화유수는 젊은 畵家(화가)와 妓生(기생)의 이루어질수없느 사랑을 그린 新派drama –신파드라마-로 長安(장안)의 화재가된 無聲映畵(무성영화)입니다
名門(명문)의 젊은화가가 妓房(기방)에서만난 사랑하였으나 집안의 反對(반대)로 結婚(결혼)에 失敗(실패)하고 여주인공이 강에 투신한다는 줄거리를 갖고있습니다
團成社(단성사)의 전문변사였던 김영환<김서정>이 각본으쓰고 이구영이 감독한 한국영화사 초기영화입니다
이영화를 감독한 이구영의 여동생이요 중앙보육학원 출신인 이정숙이 이영화 主題歌(주제가)를 부릅니다
그녀는 양악선구자 홍난파에게서 노래를배운 동요선구자로<가을유희><고국생각><비행기의꿈>등을 우리레코드사 초창기 음반사 일축음반에서 취입했습니다
그녀는 영화 <아리랑>이 開封(개봉)되어었을때도 映畵管(영화관)에 마련된 뮤지박스에서 主題歌(주제가) 아리랑을 live 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기생으로 출연한 복혜숙은 韓國最初(한국최초) 女俳優(여배우)라는 기록이있으나 잘못된 정보입니다
이영화는 1938년경 解放後(해방후) 불행하게도 極右新聞社(극우신문사)가 되어버린 조선일보 선정 10대 무성영화에 뽑히기도 합니다
앞서언급한 <落花流水(낙화유수)>를 韓國最初創作曲(한국최초창작곡)으로 작곡한 김영환은 晋州(진주)出身(출신)으로 이영화 劇本(극본)이 자신의 經驗談(경험담)이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당시영화는 無聲映畵(무성영화)여서 일정한공간에서 西洋(서양)映畵(영화) 字幕(자막)처럼 영화 줄거리, 대사를 변사가하고 樂士(악사)들이 背景音樂(배경음악)을 연주했습니다
無聲映畵(무성영화)라 해서 소리가 전혀없는게아니라 臺詞(대사)歌(가)없을뿐 영화의 劇的(극적)場面(극적장면)에 영화에딸린 樂譜(악보)대로 극장전속 樂士(악사)들이 背景音樂(배경음악)을
演奏(연주)했습니다
이러한 樂士(악사)들중에서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 草創期(초창기) 作曲家(작곡가)로 變身(변신)하는 사람들이 배출됩니다
映畵(영화)가 人氣(인기)를끌자 映畵(영화)속 主題歌(주제가)도 널리알려지고 노래를 愛唱(애창)하는fan-팬-들이 늘어나자 Columbia-record 서 이정숙의 목소리로 취입해서 발매합니다
1148--新派歌謠(신파가요)-f
江南(강남)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곳
구름속에 그의얼굴 가리워졌네
勿忘草(물망초)핀 언덕에 외로히 서서
물에뜬 이한밤을 홀로 새울까--------------------------------------------------------------------<落花流水(낙화유수)> 一名(일명) <江南(강남)달>
日本流行歌(일본 유행가)나 飜案曲(번안곡)이 불리던 當時(당시) 우리나라 創作歌謠(창작가요)의 登場(등장)은 그自體(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落花流水(낙화유수)”는 그야말로 創作歌謠(창작가요) 1號(호)로서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 의 劃(획)을 그은 作品(작품)입니다
妓生(기생)을 model-모델-로 했기에 長安(장안)의 妓房(기방)에서 人氣絶頂(인기절정)이었고 특히 젊은 學生層(학생층)에서 즐겨불렀습니다
1930년대 들어서 俳優出身 歌手(배우출신 가수)김연실, 신카나리아등에 의하여 remake 되었으며 “絶頂-절정-의 人氣-인기-를 누린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最高名曲中(최고명곡중)의 한곡”
이라는 主張(주장)이 보입니다
이후에 노래가사 1절 導入部(도입부)”江南(강남)달이 밝아서 임이놀던곳”에서 제목을 따와서<江南(강남)달>로 題目(제목)이 바뀌어 불러졌습니다
이처럼 이곡은 留聲機時代(유성기시대)의 最高人氣曲(최고인기곡)으로 大衆(대중)들에게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낮에는 채규엽의 <봄노래부르자>를 부르고 밤에는 <江南(강남)달>를 부른다는 一話(일화)가 전해질정도 였습니다
또 이곡은 1960년대 kbs-radio방송”그리운 옛노래”의 signal music-시그널 뮤직-으로 使用(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강남달>을 生角(생각)하면 또한곡의 同名(동명) 異曲(이곡) 이 存在(존재)함을 알수있습니다
우리 大衆歌謠史(대중가요사) 唯一(유일)하게 “歌謠皇帝(가요황제)”로 불릴만한 力量(역량)을 갖춘 singer 南仁樹(남인수)씨의 노래가 그것입니다
이 江山(강산) 落花流水(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꿈을 엮은 盟誓(맹세)야
歲月(세월)은 흘러가고 靑春(청춘)도가고
恨(한)많은 人生(인생)살이 꿈같이 갔네----후략---------------------------------------<落花流水(낙화유수)> 南仁樹(남인수)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 不朽(불후)의 名曲(명곡)이요 “木浦(목포)”라는 閑寂(한적)하기만 했던 地域(지역)을 一躍(일약) “追憶(추억)과 浪漫(낭만)의 都市(도시)”로 全國(전국)에 알린 歌謠(가요)이기도
한<木浦(목포)의 눈물>를 부른 이난영씨의 친오라비요 술주정뱅이 父親(부친)밑에서
家難(가난)의 서러움을 함께겪었던 마치 사랑하는 戀人(연인)들처럼 가까운사이였던 이봉룡이 그의 매부가된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 最高天財(최고천재) 金海松(김해송)의 指導(지도)를 받아
그저 樂團(악단)서 드럼이니 두들기던 그가 作曲家(작곡가)로 變身(변신) ok-record 頂上歌謠 創作者(오케이 레코드사의 정상가요 창작자) 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亦是(역시) 金海松(김해송)!!!” 이라는 感歎(감탄)이 나오도록 만만찮은 作曲實力(작곡실력)을 發揮(발휘) 金海松(김해송) 의 期待(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동생 난영의 體面(체면)도 세워줍니다
바로 이러한 說明(설명)이 진짜임을 證明(증명)하는 歌謠(가요)가 南仁樹 歌唱(남인수 가창)의<落花流水(낙화유수)>입니다
이곡은 특히 waltz-rhythm-왈츠리듬- 으로 불린 韓國大衆歌謠(한국 대중가요)의 絶唱曲(절창곡이)이요 代表曲(대표곡)입니다
上記 說明(상기설명) 落花流水(낙화유수)를 創作(창작)한 김영환은 이곡외에도 채규엽의<봄노래부르자> 김연실의<세걸인> 이애리수<강남제비>등의 우리 歌謠(史(가요사) 黎明期(여명기)
名曲(명곡)들을 만든 결코 잊어서는 안될 萬能才幹(만능재간)꾼입니다
이詩期-시기-에는 流行歌(유행가)외에도 外國歌曲(외국가곡) opera aria-오페라 아리아-도 飜案(번안)해서 불렀습니다
슈베르트작곡 <heidenroslein-들장미->, 美國民謠(미국민요) <clementine-클레멘타인->등이 代表曲(대표곡)입니다
1920년대 西洋音樂(서양음악)을 專攻(전공)한 留學生(유학생)들에 의해서 西洋音樂(서양음악)이 이렇게 朝鮮(조선)땅에 紹介(소개)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西洋飜案曲(서양번안곡)들은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 飜案曲(번안곡)의 絶對的(절대적)인 影響(영향)하에 놓여있던 韓國歌謠界(한국가요계)에 新鮮(신선)한 衝擊(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로서 韓國歌謠(한국가요)도 世界的(세계적)인 地坪(지평)으로 眼目(안목)을 넓히는 契機(계기)가 됩니다
1149--新派(신파)歌謠(가요)-g
日本(일본)의 明治維新(명치유신)은 곧바로 武斷政治(무단정치)로 包裝(포장) 된 現代化(현대화)였습니다
1876년 濟物浦條約(제물포조약)이 곧 韓國(한국)의 開港(개항)이라는 近代史(근대사)의 새로운 으로 열렸지만 이것은 日帝(일제)의 一方的(일방적)인 壓力(압력)이었을 뿐입니다
일본의 명치유신의 社會的(사회적) 傾向(경향)은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西歐文明(서구문명)의 導入課程(도입과정)에서 人權(인권)을 尊重(존중)하는 時代的思潮(시대적사조)에 점점 눈뜨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知識層(지식층)에서 룻소의<민약론>같은 西歐思想家(서구사상가)를 羨望(선망) 의 對象(대상)으로 받들기 시작 했습니다
말하자면 近代文明(근대문명)의 基礎(기초)가되는 人權主義(인권주의) 源泉(원천)에 눈을 뜬것입니다
일본의 傳統社會(전통사회) 즉 武士階級(무사계급) 이 支配(지배)하는 從屬的(종속적)인 身分社會(신분사회)에서 平等思想(평등사상)이 움텃던 것입니다
이러한 混沌期(혼돈기)는 民主主義(민주주의)를 志向(지향)하는 하나의 民衆的(민중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러한 民衆(민중)의 심상치않은 움직임은 1878년 드디어 公安(공안)을 헤치는 演說(연설)을 禁止(금지)시기위한 하나의 方便(방편)으로 惡用(악용)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執權層(집권층)에선 統治(통치)하는데 公安(공안)을 헤치는 것으로 行爲(행위)로 歪曲(왜곡)시켜 이를 핑계로 禁止(금지)시키는 만행을 저지른것입니다
그런 움직임이 누구 때문에 왜생겼는지는 말하지않은체---
이는 當時(당시) 自由人權論(자유인권론)이 얼마만큼 팽배하고있었는지 하나의 證據(증거)입니다
1883년부터는 執權層(집권층)은 더욱 軍國主義(군국주의)를 다져나갔으며 當時執權層(당시 집권층)의 최고우두머리인 天皇(천황) 의<군인칙어> 그리고 獨裁者(독재자)들의 단골메뉴인
言論(언론)을 彈壓(탄압)하는<新聞條例法(신문조례법)><徵兵令改定 (징병령개정)>등의 發表(발표)로 當然(당연)히 이에 反撥(반발)하는 靑年知識層(청년 지식층)인 <조오시 壯士(장사)>들의
政治諷刺-정치풍자-, 그리고 批判的(비판적)인 時局諷刺劇(시국풍자극)이 盛行(성행)했습니다
自由民權思想(자유민권사상)을 鼓吹(고취)시키는 <조오시시바이 壯士芝0屋(장사지0옥)> 一種(일종)의 新派劇(신파극)이 人氣(인기)를 끌었습니다
大衆(대중)앞에서 時局(시국)을 批判(비판)하는 演說(연설)을 禁止(금지)시키자 諧謔的(해학적)이고 社會諷刺的(사회풍자적)인 노래말에다 일본의 傳統民謠(전통민요)나 民俗的(민속적)인
가락에 맞추어부르는 노래가 流行(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樂師(악사)를 <자유엔카시 自由演歌師(자유연가사사) )>라고 합니다
노래말의 內容(내용)에따라 人氣(인기)가 左右(좌우)되었는데 노래 melody-멜로디-는 새로 創作(창작)된것보다 大衆(대중)들에게 익숙한 在來的(재래적)인 俗謠(속요)가락 이었습니다
그래야 一般大衆(일반대중)들의 接近(접근), 參與(참여)가 쉬워지니까요
이런류의 노래를 <조오시부시 壯士節(장사절)>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시節(절)>는 우리 民謠(민요)에서”00打令(타령)”에 該當(해당)하는 말입니다
이 자유 엥카시<自由演歌師(연가사)>들은 새노래말을 인쇄하여 그들특유의 악기 샤미생을 반주해 노래하면서 歌詞集(가사집)을 1전에 팔았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개창운동 같은 것이었는데 意識歌謠(의식가요) 抵抗歌謠(저항가요) 같은 mood-무드-를 자아내어 예상외로 잘팔려나갔습니다
얼마후에는 西洋樂器(서양악기)가 導入(도입)되면서 샤미생대신 바이올린, 아코디언 같은 樂器(악기)가 代身(대신) 伴奏役割(반주역할)을 담담합니다
그러고는 그등 俗謠(속요)가락이 별저항없이 自然(자연)스럽게 西洋平均率 (서양 평균율)과 融合(융합)되어 갔습니다
日本學者(일본학자)들은 이것을 일본노래의 西歐化(서구화)로 變質(변질)되어 갔다고 보고있습니다
이런 風潮(풍조)가 漫然(만연)되자 일제는 西洋音樂(서양음악)을 導入(도입)하면서 재빨리 唱歌敎育(창가교육)을 國策的(국책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西洋文明(서양문명)을 배우자” “勤勉(근면)하자” “工夫(공부)하자” “나라에 忠誠(충성)하고 父母(부모)에 孝道(효도)하자” 등 일종의 社會淨化運動(사회정화운동)을 急進的(급진적)으로
펴나갔습니다
이부분은100년의 歲月(세월)이 한참흘러서 韓國(한국)에서도 1980년대 박정희에이은 쿠테타 세력으로 登場(등장)한 전두환의 新軍府(신군부)가 이를 惡用(악용)하기도 합니다
1881년 唱歌讀本(창가독본)이 發行(발행)될즈음 그들은 올겐을 생산할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레 唱歌(창가)先生(선생) 養成(양성)이 必要(필요)해졌습니다
專門的(전문적)인 창가선생 양성소가 차차발전해서 일본의 最初(최초) 官立音樂學校(관립음악학교)로 발전 현재 일본의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국립예술대학이 된것입니다
1910년대 일본의 학생들중심인 특유의 풍자적인 노래 <쇼세이부시 書生節(서생절)>가 유행하면서 엥카가 절정기를 맞습니다
1150—新派歌謠(신파가요)-
大學 campus-대학캠퍼스-특유의 雰圍氣(분위기)에서 번져가는 엥카조의 노래도 자생적으로 생기게마련 大學寄宿舍(대학기숙사)에서 불려지고 만들어진 노래로 <료오카 寮歌(료가)> 가 젊은이들
特有(특유)의 campus song-켐퍼송- 이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창가는 軍歌調(군가조)로 바뀌어갔으며 10년뒤인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엥카조의 군가가 많이 등장합니다
학생들의 료오카가 유행하면서 청년구락부는 엥카의 본부역할시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07년경부터 일본거리의 악사 엥카시의 반주악기 샤미생은 서양악기 바이올린으로 바뀌면서 하모니카 만돌린등이 기호물로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1928년 日本(일본)의 有名(유명)韓(한) 3.15사건 즉 젊은 陸軍將校(육군장교)들이 일본의회 정치의 수상을 射殺(사살)하는 군부쿠테타가 성공 完全無缺(완전무결)한 軍人政治(군인정치) 獨裁政治時代(독재정치시대)가 열리면서 그들이 가장잘할 수 있는 分野(분야)인 戰爭(전쟁)을 시작 1931년 大陸侵略(대륙침략) 滿洲事變時代(만주사변시대)로 突入(돌입)합니다
이를 60년의 세월이 지난후 韓國(한국)의 陸士出身(육사출신) 박정환 전두환이 흉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反體制(반체제) 또는 社會(사회)諷刺(풍자)的(적)인 엥카를 檢閱(검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流行歌(유행가)는 엥카가락 중심이었지만 人間(인간)을 敗北意識化(패배의식화) 시키는 sentimentalism-센티멘탈리즘-으로 屈折(굴절)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굴절은 쿠테타세력이 바라던 바였고 朝鮮亦是(조선역시) 韓日合邦(한일합방)후 이러한 傾向(경향)의 音樂(음악)으로 (澎湃(팽배))해집니다
사랑, 이별, 눈물, 미련, 大衆怨望(대중원망), 無氣力(무기력) 등의 歌詞(가사)로 變質(변질)되어 갔습니다
일본의 문화사적인면에서 이시대를 <엥카演歌(연가)->가 아니라 <엥카艶歌(염가)> 時代(시대)라 부릅니다
바로 이 時期(시기)가 韓國(한국)에서는 record 文化(레코드문화)가 꽃피기시작 大衆歌謠(대중가요)가 레코드를 통해 널리 普及(보급)되어 가던때 였습니다
이시기는 政治文化的(정치문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大衆歌謠史(대중가요사) 側面(측면)에서도 매우 不幸(불행)한 時期(시기)였습니다
일본의 젊은 엘리트 사이에 널리 불려지던<데칸쇼부시>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노래의 특징은 후렴 끝부분에”무엇~데칸쇼~”로 끝나는 노래였습니다
이”데칸쇼”라는 擬聲語(의성어)같은 말의 본래뜻은 “데-데카르트, 칸-칸트, 쇼-쇼펜하워 를 모르는 놈들<日本軍閥(일본군벌)>하고는 통하지않는다”는諷刺(풍자)的(적)인 抵抗(저항)을 內包(내포)하고
있는 歌詞(가사) 였습니다
얘기는 1910년대로 돌아가 이 時期(시기)는 일본 엥카의 絶頂期(절정기) 였습니다
日本(일본)이 한국을 植民地(식민지)로 本格的(본격적)인 통치를 하기시작 하면서 자기네 歷史(역사)가 증명하듯 大衆(대중)들의 意識(의식)속 창가가 얼마나 큰作用(작용)을 하는가를 몸소겪어서
잘알고있기에 韓國唱歌時代(한국창가시대)에 미리 급을먹고 神經過敏的(신경과민적)인 彈壓(탄압)을 하지않았나 生角(생각)됩니다
여러해전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소련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공화국에 살고있는 少數民族(소수민족) 한국사람 부락을 탐방을 했다합니다
평소 강한정신의 소유자들인 조선인들답게 조국의 풍속과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합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중이들이 즐겨부르는<望鄕歌(망향가)><思鄕歌(사향가)>등을 이 新聞記者(신문기자) 요시다는 들을수 있었다 합니다
이런노래중 melody-멜로디-를 들어보니 일본서 1900년대 유행하던 <天然(천연)의 美(미)> 와 1920년대의<선도고우다> 가락이었습니다
이에 요시다는 인래의 曲調(곡조)는 일본곡이라 했더니 한국인 3세들은 펄쩍뛰면서 “우리들의 할아버지 때부터 불러오던 한국노래”라고 우기드라는 것입니다
도한곡<해란강>이라는 곡도 있었는데 잘모르겠다 했다합니다
다분히 요시다의 그들을 無視(무시)하고픈 意圖(의도)가 깔린 말입니다
이곡은 조명암사 김해송작곡으로 박향림이부른< cosmos 歎息 코스모스탄식>입니다
가사속에 동만주지방 용정촌 앞을 흐르는 <해란강>이 나옵니다
지금은 작가의 친일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곡 <先驅者(선구자)>에서도 들을 수 있는 지명입니다
결국 이곡은 자진월북자 작품으로 낙인찍혀 해방이후 남한에서 불려지지 못했고 멜로디는 역시 일본속요음악 미야코부시 로 구성되 있습니다
자기들 母國(모국)의 歌手(가수)가 부른곡은 잘알지못하고 日本曲(일본곡)은 모국의노래라 알고있는 歷史意識(역사의식)을 卑下(비하)하고 싶은-----
開化期以後(개화기이후) 우리노래속에는 日本音階(일본음계) 影響(영향)에서 自由(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우선 노래를 항유하는 대중들이 無意識的(무의식적)으로 이런노래를 원하고 어차피 音盤社側(음반사측)에선 利潤(이윤)을 남기기위해서는 그들의 입맛을 맞추지않으면 안되었고 곡을녹음해
商業的(상업적)으로 音化(음반화) 하는 데 드는 費用(비용)을 投資(투자)하는 主體(주체)가 우리나라가 아닌 日本人(일본인)들 이었기에 알게모르게 더욱더------
이는 政治的(정치적), 社會(사회)背景(사회배경)이 그러했다해도 우리자신의 自覺心(자각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피할수없습니다
이런맥락은 오늘날도 지워지지않으고 한구석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음미해볼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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