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3월 27~4월 16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독일철학과 프랑스 철학의 화해라는 주제로 석학들의 모임이 있었다. 거기서 압권은 하이데거와 카시러의 논쟁이다. 1874년생인 카시러는 1889년생인 15세 연하인 하이데거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지켜보던 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신칸트학파의 수장이자 브레인과 칸트로 논쟁을 벌인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포기는 철학의 포기라는 입장이고 카시러는 동의 하였다. 카시러의 철학은 다음과 같다.
『그는 물질세계를 순수 사고의 범주로 해소시켜 버리고, 그 세계의 법칙을 관념론적으로 해석하여 함수적 의존관계로 바꾸어 버렸다. 이리하여 문화의 기본을 상징이라 보고 과학적 인식도 이 상징적 사고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기타 언어ㆍ신화적 사고에 대해서도 상징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시러 [Cassirer, Ernst] (철학사전, 2009.) 』
카시러는 칸트가 형이상학(신 영혼 우주의 기원 등)을 인식 불가능으로 선언하자 상징으로 치환하여 신화를 해석하려고 했다. 형이상학의 종말은 로고스의 포기가 될 수도 있다. 19세기말 20세기초 카시러를 비롯한 수많은 천재들이 신화에 집중하였다. 이유는 최초의 철학 즉 소피스트와 플라톤의 철학이 신화를 카오스의 영역으로 집어던지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해서 이 시대 천재들은 문화의 원형인 신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각국의 민간종교를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종교학 민속학 등등의 분야를 개척하였다. 헌데 문제는 필자가 항상 지적하듯이 이 모든 학문의 뿌리는 로고스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로고스를 획득하면서 모든 신의 영역은 파괴 되었다. 해서 그리스 철학을 계승한 사도바울과 초기 교회 설립자들은 로고스에 기초한 이성신학을 만들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다. 카시러 철학이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 의도는 정확했으나 그 설정은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논리분석의 시각으로 신화는 해득 되지 않는다. 각국 신화의 유사성만 발견하고 기껏해야 인류 문화의 원형은 비슷하다...이다. 이게 모든 종교 상징을 탐색한 종교학 민속학 구조주의 등등의 주장이다. 이거 머 개소리인지... 그럼 유인원도 비슷한거 아닌가? 동물학자들은 침팬지 오랑우탄 등의 생활이 초기 인류 생활의 원형이라고 한다. 혹성탈출이니?
하이데거 카시러의 논쟁을 이른바 세계 철학계에서 다보스의 논쟁이라고 알려졌고 하이데거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디 나이어린 놈이 어른에게 대들고 지랄이야 할 일이다. 이래서 한국에는 철학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보스 논쟁에서 둘의 합의점은 두가지다.
1. 로고스
2. 언어
어차피 로고스가 논리학을 포함하기에 둘은 공집합이지만 언어학의 발전을 철학에 적용하자는 합의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카시러는 별볼일 없어졌는데 2000년대 이후 하이데거에 대중이 관심을 보이자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전설의 다보스 포럼에 대한 대중이 관심이 높아지자 2022년 미국인 마이클 프리더먼의 책이 번역되었다. 프리더먼은 성이 독일계다. 젊은 소장파 철학자가 2000년에 발표한 책이다. 이 책을 보면 미국이 독창적 철학자를 단 한명도 생산하지 못한 이유를 보여준다. 20세기 초에 끝난 철학을 아직도 이해를 못한 미국이기 때문이다.
1989년 부산대에서 행한 오토 페겔러(푀겔러가 정확한 발음)의 강의에 대한민국 철학과 교수들이 총집합 했다. 당연히 빡빡이 김용옥도 있었다. 한복 입고 거만한 표정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거들먹 거리는데 눈에 안띌리 있나? 필자는 보면서 참 또라이네...그러다 1990년대 중후반 노자로 크게 히트 치는거 보고 참 한국놈들 수준이 개쓰레기네...저런 수준 떨어지는 강의하는 걸 좋다고 개난리인가? 이유는 하버드 박사....이러니 출세 명예에 미친 이놈이 표절해서 박사 받았겠지... 지금도 서울대라면 개거품 내는 여자들 수두룩이니 할말은 없다. 세상과 담쌓고 살아야지....
페겔러는 헤겔학회 회장이며 헤겔철학의 일인자였고 1980년대 국내에서도 현존하는 세계 최고 철학자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 세계적 석학이 국내에 온다길래 수백명 박사 교수들 사이에 점치는 잡놈 필자도 참석하였다. 강의 후 지들끼리 술처먹으로 가는 길에 배학수 교수가 지나가다가 필자에게 "와 졸나 어렵네... 넌 이해되니?" 한다. 필자가 초롱초롱하는 눈빛으로 "예"하니, 혀를 내두르며 질리는 표정이다. 3년 후 전영갑 학장(당시교수)를 만나 술 한잔 하면서 하이데거와 노자를 비교 설명하자 전영갑은 눈빛으로 "역시 너는 천재적이다"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필자 : 아니 거기 참가한 교수들 페겔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이지도 이해도 못하더군요.
전영갑 :
나도 그 머저리들이랑 동급 수준이다. ㅎㅎ 한국 철학교수들 다들 골방에서 남모르게 포르노 보며 자위하는 수준이지...역시 윤관장은 한 번 듣고 답을 찾네....내가 작년 1년 동안 독일에 교환교수로 갔다. 거기서 철학교수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공통적으로 하이데거는 노자 표절한 놈이고 철학자가 아니라고 욕을 하더라구....ㅎㅎ
전영갑은 훗썰 현상학으로 석사 박사를 받았으나 페겔러의 강의에서 충격을 받았고 현타를 얻었었다. 그가 필자에게 박사받으면 교수시켜 주겠다고 적극 권한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것 때문이다. 김용옥을 비롯한 한국의 동서철학 석학들이 다 참석한 포럼에서 페겔러의 강의를 이해한 놈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페겔러는 2시간에 걸쳐 노자의 무에 대한 강의를 존재와 시간에 비교하며 강의했다. 국내에서 하이데거로 박사받은 대학교수 3-4명이 개거품을 물었다. 존재와 시간과 기타 하이데거 강의에 왜 뜬굼없는 노자의 無가 나오냐고 개거품이다. 참 무식한 40대 교수들이다. 20대 후반 필자 눈에 머저리로 보인 교수들이다.
필자는 노자 장자를 고1 마치고 겨울방학 때 마스트 하고 금강경 육조단경 등 번역된 조사선 주요 경전을 마스트 했다. 그때 독서만으로 이후 수십년간 수많은 노장철학자들에게 극찬을 들었다. 그리고 프릿츠 하이네만의 "실존철학 살았는가 죽었는가"를 고1 초에 3번 읽고 통암기하였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 교수 이성훈이 석사 2년차에 읽었는데 이해가 안되고 교수가 된 후에도 이해가 안된다고 한 책이다. 그래서 그는 지 입으로 필자를 미워했다고 선언했다. 프로이드 심리학도 고1때 싹 다 읽었다. 학교공부는 안하고 철학책만 읽었다. 필자의 10대는 위대한 사상가들과 싸우며 살았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중2때 읽었는데 고2때 완전히 이해가 되었다.
페겔러가 말한 여러가지 내용 중 제일 강조하고 핵심인 내용이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는 제사지내는 성물(聖物)과 음식먹는 그릇이 성과 속(俗)이란 이름으로 분리가 되는데 중국인들은 성과 속을 하나로 본다. 밥먹던 그릇을 씻은 후 새물을 받아 신에게 올린다. 그릇 하나가 성이 되고 속이 된다. 너무 놀랍다고 했다. 서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는 이 그릇이라는 표현에서 바로 노자를 만났다. 밥그릇은 가운데가 비어 있다. 즉 無 空이다. 노자의 곡신불사(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계곡이 텅비어 無이기에 끊임 없이 비워내고(無 空) 새로운 물을 받아낸다(生 창조). 필자는 페겔러의 강의를 들으며 "존재와 시간"을 완전히 마스트 했다.
전영갑 학장에게 하이데거와 노자를 비교설명하자 크게 공감을 한다. 필자는 정리해서 책으로 내고 싶다 도와달라고 하자 단호하게 거절한다. " 철학책을 내려면 최소 박사를 받아라 안그러면 누구도 출판 안해준다. 나도 추천 못해준다. 한국사회가 철저히 자격증 사회고 계급이 정해져 있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머저리 바보 교수를 이길 수 없다. 이게 한국이다."
* 로고스의 포기는 곧 철학의 종말이다.
고대사회는신이 지배하는 사회다. 인문철학의 탄생은기원전 5천년~ 3천년전 우파니샤드로부터다. 진아(아트만)를 발견하였다. 로고스의 발견이다. 2천5백년전 그리스 철학은 신의 세계를 카오스(혼돈)이라고 부르고 철학을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합리적 합목적적 우주다. 이 우주는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다. 이성신학을 채택한 기독교는 기성의 모든 종교를 카오스로 규정하고 카오스는 곧 악마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철학의 여정이 2천5백년을 오디세우스처럼 항해해 왔다. 이것을 노래한 책이 " 계몽의 변증법"이다. 프랑크프루트학파의 거성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공저인 책이다. 로고스와 언어가 없으면 철학이 아니다.
『철학에서도 우리는 정서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서적 욕구는 개념의 명확성, 방법의 결벽성, 테제의 책임성, 그리고 개인이 참여하는 협력을 통한 성취를 말한다. 』 - 루돌프 카르납 《세계의 논리적 구조》
『논리학은 세계를 충족시킨다. 세계의 한계는 논리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논리학은 학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초월론적이다. 』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구》
결국 논리학 로고스는 언어로 하는 것이고 동시에 복제된 세계이며 이는 곧 빙의의 세계다. 철학이 인성을 파괴하고 영혼을 오염시키는 이유가 날카로운 칼 논리학이라는 양날의 검을 쓰기 때문이다. 철학이 발전할수록 인간 영혼은 붕괴하였다. 조사선이 완성되자 수많은 영혼들이 오염되어 망령 악귀 악마 이매망량이 되었다. 지난 2천 5백년의 역사는 영혼이 처참히 파괴되는 빙의의 역사다. 문화 문명이 융성해지면서 엄청난 부자들이 나타나고 거대권력이 탄생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무참히 망가졌다. 예수가 나타난 이유다. 인간에게 내재된 신성(神性)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너희가 구원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다"는 말은 이 신성파괴를 말한다. 무수무변한 악마의 탄생은 철학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영혼이 파괴된 자를 악마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알렉산더를 가스라이팅하여 무자비한 정벌자 살인마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고 神이라고 부른다. 제국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살인과 약탈의 시대가 열렸다. 철학의 시작은 정벌 인간사냥 인간 약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그 살인 약탈의 명분을 철학이 제공하였다. 이데아 세계, 성인이 다스리는 철인왕국, 재림예수를 기다리는 피의 왕국, 신의 이름으로 살인 약탈을 저지른 십자군 원정.....일본의 오규 쇼라이는 논어징을 통해 논어를 지맘대로 조작하고 해석하여 조선과 중국을 정복해야 일본이 불국정토(佛國淨土) 성인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고 천명한다. 그 논어징을 표절한 놈이 김용옥이다. 철학은 항상 정치권력에 기생하면서 서민들 복종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여 왔다.
로고스와 언어를 포기하면 철학이 아니다. 신화나 神의 세계는 로고스와 언어를 벗어난 카오스의 세계다. 로고스의 시선에서 카오스다. 그러나 사람들이 개 고양이에게 힐링하고 자연 속에서 힐링 하는 것을 보면 카오스의 세계가 곧 힐링의 세계다. 카오스라는 언어가 만든 거짓 장막의 세계다. 언어의 장막을 걷으면 힐링과 행복이 거기에 있다. 철학은 종말을 고했다. 지난 2천5백년의 대탐험, 오딧세이의 탐험인 계몽의 변증법은 난파선으로 종말을 고했다. 그 마지막 발악이 1925년 "존재와 시간"이다. 1947년 나온 "계몽의 변증법"은 웃기게도 철학의 난파선이 되었다. 오늘날 철학 공부는 철학의 무덤에서 죽은 구신과 대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악마에 빙의된 현대인이다.
* Das Nichts selbst nichtet 무는 스스로를 항상 비워둔다.
이 명제는 다보스 포럼을 뒤 흔든 하이데거의 명제다. 전 유럽을 경악케 한 천재의 명제는 마치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버금가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인 프리더먼의 "다보스에서의 결별"이라는 책의 2022년 번역본에는 "무 자체가 무화 한다"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노자를 모르는 자의 번역이다. 서양철학적 시각에서 보니 번역이 요따위다.
Das Nichts는 無라고 사전에서 말한다. 하이데거 의도는 수많은 無들이 모인 것을 의미한다. 푹 파여진 그릇들, 계곡들, 그루터기. 웅덩이 등등 기물이나 파여진 땅은 無이며 空이다. 그것들의 총합이 Das Nichts 다. Nicht의 복수로 하이데거는 본다. 하이데거는 독일어를 조작하여 새로운 단어를 엄청 양산한다. 해서 어렵다. 하이데거 만큼 독일어로 조어를 많이 만든 이가 칼 야스퍼스다. 야스퍼스가 100권에 가깝게 다작을 했지만 번역이 안된 이유다. 조어 때문에 번역에 엄청 힘든 책이다. 하이데거는 언어 자체를 무화(無化) 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nichtet이란 말도 조어다. Nichte는 조카딸, 질녀이다. nicht는 『∙∙∙ 아니다, ∙∙∙ 않다 Das glaube ich nicht.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등으로 쓰인다. nicht는 동사나 형용사를 부정하는 용어다. 동사나 형용사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불가다. 이 nicht를 독립시켜 동사화 시킨 것이 nichtet 다. 하이데거 책은 사전이 있어도 독해가 안된다. 해서 한국인들이 수수께끼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은 그리스어 라틴어를 곳곳에 쓸데 없이 박아놓고 나아가 nichtet 같은 자신이 만든 조어를 곳곳에 심어 놓았다. 해서 한국인에게 졸나 어려운 것이다. 지 자랑만 늘어놓은 사기꾼이다. 천박한 놈들은 내 책 읽지마라는 놈이다. 적어도 라틴어 그리스어 단어 정도는 알고 읽고 내가 만든 조어(造語)도 파악하며 읽어라....하인들아....여기에 이 사기꾼은 노자의 무를 심어 놓았다.
1925년 출판 후 수십년간 서양 지성인들이 골머리를 싸맨 건 설마 노자의 無를 Das Nichts 라고 표현했다고는 생각 못하고 Sein(존재 有)의 반대말로 본 것이다. 노자를 이해하고 노자의 무를 이해 한 후 보면 욕이 나오는 책이다. 자 그럼 이 명제의 바른 번역을 살펴보자.
곡신이 물을 비우는 건 스스로 무화인가? 스스로 무화는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느깜이고 "스스로를 항상 비워둔다"는 자기를 비운다는 의미다. 승려들이 "마음을 비우세요"라고 말한다. 조사선의 화두 수행 중 하나다. 전문 용어로 방하착(放下着)이다. 조사선이 노장사상인 증거다. 마음을 비우세요는 마음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즉 곡신불사다. 무는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비운다는 말이다.
숲속의 공터 그루터기는 숲이 스스로를 비워둔 곳이다. Holzwege 숲길이란 번역이 틀리고 오솔길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도 숲길은 철학의 숲을 헤쳐나간다는 의미이고 오솔길은 숲이 스스로를 비워둔 곳이기 때문이다. Das Nichts selbst nichtet 무는 스스로를 항상 비워둔다. 그릇도 항상 자신을 비운다. 그래야 밥도 담고 물도 담고 성수도 담는다. 국내번역 "무 자체가 무화한다"는 문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숲길이란 번역처럼 철학적으로 문제가 많다. 하이데거 철학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든다. 독일인들도 무지 열받은게 그의 책이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시각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제자들의 증언이 새어 나오면서 학자들이 노자 번역과 중국어를 아는 이들이 노자 연구서들을 번역하거나 중국어로 직접 읽기 시작하면서 표절자로 의심하다가 나중에 지탄을 받은 것이다. 페겔러는 "노장 사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체득한 도사를 평생 만나고 싶어한 분이 하이데거"라고 말했다. 하이데거 필생의 꿈이 결국 필자였던 것이다. 그 역시 경허선사처럼 필자와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을 땅을 치고 후회했을거다.
하이데거가 평생 희망했던 것이 필자 같은 도사다. 그는 밥그릇이 물그릇이 되고 동시에 신에게 기도하는 성물이 되는 것을 감탄하였고 이것을 구현하는 필자같은 도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럼 솔직해야지 비겁하게 책의 그늘에 숨어 교수라는 권위에 기생하였다. 그런 정신 자세로는 필자를 만나도 누군지도 못알아 볼 것이며 지나가는 잡놈으로 볼 것이다. 위선자다. 그러니 히틀러 정권에 부역하고도 평생 모르쇠로 일관 하였다. 일제에 부역한 서울대 출신 교수들과 똑같다. 이래서 서울대 교수들이 하이데거 좋아하나? 같은 위선자라서?
이런 인간은 예수가 옆을 지나가도 잡놈 취급할 것이다.
2024년 3월 2일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