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8 章 암계제일보(暗計第一步)
전 무림이 돌연 긴장했다.
― 신비마제가 꼬리를 감췄다. 삼대거파를 격파한 옥면살성자가 신비
마제마저 굴복시켰다. 강호사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천하제
일존만이 존재할 뿐이다.
옥면살성자가 신비마제를 물리쳤다는 소문이 강호상에 퍼져 나갔고,
사흘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무사라면 그 소문을 듣지 못하는 이
없었다.
마사자를 부려 천하를 정복하려던 신비마제가 패했다는 것을 소문대
로 믿는 사람은 없었으나, 마도 세력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 파는 이미 궤멸되었다. 수많은 강호인들이 삼 파의 본거지로 찾아
가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마도인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감에 따라 협의도를 걷는 사람들이 많
아졌다. 강호사존의 세력을 피해 은거했던 무림인들이 속속 그 모습
을 나타냈고, 그들은 새롭게 기치를 올린 협맹의 그늘 속에 몸을 의
지하게 되었다.
강호를 휩쓸던 마풍(魔風)은 사라졌고, 정풍(正風)은 거세게 일어나
고 있다.
하나, 마가 거세됐다고 완전하게 믿는 사람은 없었다.
* * *
회남(淮南).
회수(淮水)의 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저자를 이름하는 것이다.
사통팔달(四通八達)되어 있는 회남의 거리는 늘 사람들도 메워져 있
다. 물자도 흔하고, 사람들도 흔한 곳. 이곳에는 부족함이란 없다.
낮이면 상인들로 분주하던 길은 해파리마냥 떠다니는 궁등의 수가 늘
어남에 따라 취객들로 가득 메워지게 된다.
밤이 없는 곳. 진회하(秦淮河)의 화방(花舫)에 오색등이 걸리게 되면
밤은 절정에 다다르고, 햇살과 더불어 거리는 다시 천하각지에서 몰
려드는 상인들의 차지가 된다.
정오경이었다.
회남의 동쪽 경계에 있는 집운주루(集雲酒樓)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남자는 검은 옷에 모자를 썼고, 여인은 눈같이 흰 비단옷 차림이었다
. 의아한 것은 청년이 매우 큰 철괘 하나를 가볍게 들고 있다는 것이
었다.
철괘 안에서는 쓰디쓴 약향(藥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좌중을 둘러보다가 빈자리를 찾아 마주 보는 자세로 앉으
며 철괘를 탁자 가운데 올려놓았다.
"낭자 덕에 일을 쉽게 한 것 같소."
흑의청년의 말소리는 아주 청아했다.
"돌아가신 줄 알았던 사저를 다시 뵙는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습니다.
"
여인의 음성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 영롱했다.
"여기서 한 가지 약재만 구하게 되면 그분 곁으로 갈 수 있소."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하는 청년은 옥면살성자로 부리는 냉운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여인은 과거 백화궁의 총순찰이었던 유화선자 일타운
이었다.
두 사람은 냉하곡을 떠난 즉시 망망신니와 귀검사가 있는 무창으로
가 보았으나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냉운에게 소주 냉가장으로 오라는 기별을 남긴 채 먼저 배를
저어 떠나갔던 것이다.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은 귀검사였다.
"청성은옹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 청성은옹의 혼백을 위로하는 동시
에 흩어졌던 백도무림을 한데 모은다는 것이 망망신니의 뜻입니다."
귀검사는 이런 말을 했고, 냉운도 귀검사에게 두 개의 관을 주어 냉
가장으로 운반해 가게 했다.
그리고 사흘 뒤였다.
두 사람은 회남에서 한 가지 물건을 구한 후 소주로 돌아갈 작정이었
다.
철괘에는 가득 약재가 담겨 있다. 냉운은 약재들을 구하기 위해 세
군데 비밀스런 곳을 다녀왔다.
백화궁의 비밀 장원, 백화궁이 무너질 것에 대비하여 만들어 둔 비밀
장원 안에서 십여 종의 진귀한 약재를 구하지 못했다면 냉운의 행보
는 길어졌을 것이다.
"낭자가 있었기에 약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소."
"제가 순찰직을 맡고 있기에 궁내의 사정에 밝은 탓이지요."
일타운은 밝은 음성으로 말했으나 얼굴에 그늘이 역력하다.
철괘에 가득 담긴 약재, 한 가지 약재만 구하면 냉운은 소주 냉가장
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냉운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그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그녀는 백도인이 혐오하는 백화궁 출신.
비록 처녀지신을 냉운에게 바쳤다 하나 그것을 믿어 줄 사람은 없다.
일타운은 냉운과의 관계가 있은 후 더 이상 무림 여인이 아니었다.
백화궁 총순찰 유화선자는 사라졌고, 냉운의 여인만이 남게 된 것이
다.
냉운은 일타운의 고민을 아는 듯 빙긋이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가볍
게 거머쥐었다.
"모두 낭자를 싫어하나 내가 있으니 감히 낭자를 구박할 수 없을 것
이오.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모두 다정히 대해줄 것이니
심려 마시오."
"저는…… 염 낭자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일타운은 부끄럽다는 듯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안심하오. 염 낭자는 내가 잘 알고 있소. 염 낭자는 아주 자상한 사
람이오. 낭자를 친자매같이 보살펴 줄 것이오. 내가 장담하겠소."
냉운은 유쾌히 말하며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천하 모든 사람이 나를 경멸한다 해도 냉 상공이 곁에만 있다면……
.'
일타운의 입가에 잃었던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다정한 연인같이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주
루 문을 벌컥 젖히면서 쏜살같이 날아 들어오는 상복 차림의 청년 하
나가 있었다.
"흥!"
청년은 주루 안으로 들이닥치며 냉소를 터뜨렸다.
탄지지간 그는 냉운과 일 장 떨어진 주루 바닥을 밟고 있으니 가히
놀라운 경신법이었다.
"냉운, 여기 있었군."
청년은 냉운을 보자 안면근육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
다.
바로 천외옥룡 제소옥이었다.
"개방 제자들의 도움을 빌어 네가 있는 곳을 찾았다."
제소옥은 이글이글 타는 눈빛을 던지며 자신이 걸친 상복을 매만졌다
.
"나는 내가 왜 이런 옷을 걸쳐야 했는지…… 그 자세한 연유를 알고
싶어 너를 급히 찾았다."
그는 관 속에 담긴 강남대협 제영천의 시신을 본 후였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
도저히 나무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제소옥이 살기를 흘리며 냉운을 당장 죽일 듯하자, 일타운이 겁먹어
하며 냉운을 바라봤다.
냉운은 아주 안정된 모습 그대로였다.
"앉으시오!"
냉운이 한쪽 의자를 가리키자 제소옥이 뺨을 실룩실룩거리다가 냉운
이 말한 대로 털썩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는 냉운을 당할 수 없다.'
제소옥은 냉운이 삼 년 전, 냉가장의 병약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냉하곡의 일이 있은 후 냉운은 보다 성숙했고, 이제는 무형의 기도만
으로 남을 압도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제소옥이 격류로 흐르는 계곡수라면, 냉운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대해였다. 제소옥은 물끄러미 냉운을 바라보았고, 냉운은 그가 안정
됐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냉가장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오늘중으로 소주를 향해 가려던
참이었소. 이렇게 수소문해 찾아올 줄은 몰랐소."
냉운은 침착히 말하다가 제소옥을 위해 술잔 하나를 더 갖고 오도록
했다.
잠시 후, 냉운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품안을 뒤져 비단으로 싼
작은 물체 하나를 제소옥 앞으로 밀어놓으며.
"뵙게 되면 이것을 드리려 했소."
"이, 이게 무엇이오?"
"제 대협께 전하려 했던 것이오. 제 형이 가지셔야 할 물건이기도 하
오."
냉운이 건네주는 물건은 바로 비룡신군이 냉운에게 준 바 있던 협맹
의 태상맹주 신패였다.
제소옥은 내용물을 확인한 후 크게 놀랐다.
'왜 이것을 내게 준단 말인가?'
그는 너무 놀라 뭐라 할 말을 잊었다.
"협맹은 삼기와 청성파를 주축으로 세워진 문파가 아니겠소? 제 형이
야말로 협맹의 우두머리가 되실 분이오."
"아……."
제소옥은 냉운이 명예욕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크게 놀랐다.
'내가 이제껏 냉운을 잘못 생각했었단 말인가?'
제소옥의 입술 끝이 미묘히 일그러졌다.
"소생은 강남대협과 염 백부께서 돌아가실 때 한 가지를 맹세했소.
그것인즉, 신비마제를 처단한 후 무림을 떠나겠다는 맹세외다."
"은, 은거하겠단 말이오?"
"그렇소. 사실 나는 무림계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오. 협맹은 의당
제 형의 지휘 아래 있어야 하오."
"그, 그럴 수 없소. 나는 자격이 없소."
제소옥이 정색을 했다.
"아니오. 냉가장과 청성파는 한집안이나 다름없소. 내 뜻은 곧 돌아
가신 강남대협의 뜻이오."
"아, 아버님의?"
"그렇소."
"아, 아버님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셨는지 알고 싶소. 부디, 부디 자
세히 말씀해 주시오. 간곡한 부탁이오."
제소옥은 처음 나타난 때와는 달리 온화한 투로 말해 주기를 간청했
다.
"그분들은 신비마제의 마사자들에게 잡혔다가 비참히도 돌아가셨소.
내가 어리석지 않았다면 구할 수 있었을 것이오만…… 불행히도 그분
들을 구하지 못했소이다. 제 형을 뵐 면목이 없소."
"그, 그럼 신비마제가 흉수란 말씀이오?"
"그렇소. 그분들은 수라신궁 무리들에게 쫓기던 중 신비마제의 부하
에게 잡히게 되었던 것이오.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셨으니,
아랫사람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오."
냉운이 괴로워 말해 가자 제소옥은 냉운이 힘을 다했으나 구하지 못
했음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냉운은 천하제일고수다. 냉운이 구하지 못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
가?'
제소옥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제소옥은 냉운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커다란 철괘를 보고
멋쩍게 물었다.
"약을 갖고 다니시는구려? 냉가장으로 돌아가는 일이 지체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오? 냄새로 보아 구하기 힘든 약재인데…… 어디다 쓰시
려 하오?"
"소생의 사문에 전해지는 한 가지 단약을 만들려 하는 중이오. 그것
을 만드는 이유는 제소청 소저가 구한 괴여인을 구하기 위함이오."
"미친 여인 말이오?"
제소옥은 광녀를 알고 있었다.
"그렇소. 색혼경을 지닌 광녀를 말하고 있는 것이오."
냉운이 조그맣게 말할 때, 짐짓 벙어리인 양 하고 있던 일타운이 제
소옥을 향해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그분은 바로 백화궁주(白花宮主)이십니다. 소녀는 제소청 낭자에게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백, 백화궁주!"
제소옥이 흠칫 놀랬다.
"예, 실종되셨던 저의 사저입니다. 강남미연자 제소청 낭자께서 그분
을 구하셨다는 데 너무도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으음……."
제소옥이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쓰디쓴 한숨을 토해냈다.
백화궁과는 철천지원수 사이가 아니었던가!
누이동생 제소청이 구한 광녀가 바로 백화궁주일 줄이야?
강호의 은원은 돌고 도는 수레바퀴와 같다. 친구가 원수가 되고, 적
이 어느 순간 친구가 되는 게 강호의 생리이다.
제소옥은 그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약을 구하러 다니는 이유가 그 때문이오. 이제 한 가지 약재만 구하
면 되오. 팔공산(八公山) 청허관(靑虛關)의 후원에 자라고 있다는 오
령신과(五靈神果)가 바로 그것이오."
냉운이 철상자를 치며 낭랑히 웃자,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청허관으로 가실 작정이오?"
제소옥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이다. 청허관 사람들은 강호 출입을 삼가고 도행(道行)에 힘
쓰며 오령신과를 보배롭게 여긴다 하여 어찌 구할까 근심하는 중이오
."
냉운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하하……, 이제야 소생이 도움을 드릴 기회가 생겼구려!"
제소옥이 쾌재를 불렀다.
찡그리던 얼굴을 활짝 펴고 웃자 용모가 한결 나아 보였다. 냉운에
대한 반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이제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
"청허관주는 청허도장(靑虛道長)이란 분이시오. 그분으로 말씀드리자
면 사조 청성은옹과 호형형제하던 분이시오. 소생도 잘 알고 있는 강
호의 명숙이시오. 냉 소장주의 부탁이라면 오령신과를 뿌리째 뽑아
선사할 것이오."
"하하……, 천외옥룡의 도움이 있을 줄이야……."
냉운이 유쾌히 웃자.
"사실……."
제소옥이 포권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냉 소장주를 만나면 제일 처음……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감사한다
는 말씀을 하고 싶었소. 이제 하게 되어 죄송할 뿐이오."
"구, 구명지은이라니?"
"냉면활불과의 싸움 때……."
"제 형을 구한 사람은 나의 사부시오."
냉운은 제소옥이 과거의 일을 들먹이자 시치미를 떼었다. 협맹의 태
상맹주가 냉운 자신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제소옥은 크나큰 상처를 받
을 것이다.
냉운이 아니라고 잡아떼자 제소옥은 더욱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이미…… 다 알고 있소이다. 냉 소장주가 나를 구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사실, 나는 냉 소장주의 놀라운 인품에 흠모하게 되었소.
하나, 이제껏 서먹서먹했는지라 차마 말하기 거북했을 뿐……."
"더 이상 말할 것 없소. 다 지난 일이오."
냉운이 마주하며 포권을 취했다.
제소옥은 감격해하며 힘 있게 말했다.
"냉 소장주가 꺼리지 않는다면 이 기회에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어
지난 시절의 오해를 완전히 풀고 싶소."
"하하……, 소생이 바라던 바요."
냉운도 쾌히 승낙했다.
나이를 따져 보니 냉운이 다섯 달 먼저 태어난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 냉운은 의형(義兄)이 되기로 하고, 제소옥은 의제(義弟)가 되기로
했다.
제소옥은 그간 많은 고민을 한 후였다.
그는 이제껏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신진고수였고, 누구건 자신을 능
가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냉운이 나타나 신위를 발휘할 때 반감
을 가진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흘러가 버린 물결과 같이 과거지사가 되었
다.
제소옥은 천하제고수라 불리어 아깝지 않을 냉운과 의형제가 되었다
는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여겼다.
냉운도 매우 기뻐했다.
강남대협을 구하지 못한 죄를 제소옥에게 용서받은 것 같아서였다.
두 사람은 술 다섯 병을 가볍게 비운 후 주루를 빠져나갔다.
팔공산에 있는 청허관으로 가는 것이다.
그들이 주루를 나선 후, 주먹이 으스러져라 불끈 쥐고 치를 벌벌 떠
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자음자작하고 있던 상인 차림의 흑의노인이 그
사람이었다.
"냉운……."
그는 냉운이 앉아 있던 자리를 노려보며 씹어뱉듯 중얼댔다.
"네놈을 죽이고 말리라……."
살기에 찬 목소리였다.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놈을 죽이려면 지금 이 순간을 이용해야 한
다. 계집들의 어린 마음을 이용한다면 옥면살성자를 폐인으로 만들
수 있다.'
흑의노인은 흉광을 폭사해 내다가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순간, 다른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백의중년인 하나가 아주 자연
스럽게 걸어서 흑의인 곁으로 다가섰다.
"부르셨습니까?"
"흐흐……, 한 가지 좋은 계획이 떠올랐네."
흑의노인이 손짓하자 백의인이 허리를 숙였다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금 냉운과 겨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본좌도 아직
냉운을 이길 자신은 없네."
"옥면살성자는 날이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본좌의 생각도 그러하네. 그래서 한 가지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
획을 생각해 냈네."
흑의인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백의인은 숨소리를 죽이고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냉운이 경계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네. 그 중 가장 의심받지
않는 사람은 놈의 정혼녀 염방채라는 계집일 것이네."
"예."
"흐흐흐……, 그 계집이라면 냉운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네."
"어떤 신묘한 계략인지요?"
"일단 그 계집을 끌어들여야겠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불러
냉하곡에서 있던 일을……."
흑의인의 말소리가 갈수록 음독해졌다.
백의인은 점점 득의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얼마 후.
"신묘한 계책입니다. 그런 계책을 세우실 분은 궁주뿐이십니다."
백의인이 무릎을 딱, 쳤다.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염려 마십시오. 염방채를 속이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일단은 강
남미연자라는 어린 계집을 잡아……."
두 사람의 밀담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었다. 전음입밀로 말하기 때문이었다.
"냉운이 소주로 가기 전 모든 것을 마련해 두어야 하니, 서둘러야겠
네."
"예."
두 사람은 한참 밀담을 주고받고 축배 한 잔을 들고 주루를 빠져나갔
다.
무슨 번천복지할 계략을 세웠는지…….
팔공산 중턱.
우거진 삼림 속, 고풍스러운 구조를 갖고 있는 도관(道關) 하나가 눈
에 띄고 있었다.
무림과는 인연을 끊은 도인들이 도행에 전념하고 있는 장소였다. 청
허관이라 불리우는 도관으로 한때 강호를 풍미했던 고수들의 은거지
이기도 했다.
청허관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 가면 오 장 높이로 자란 거목 하나를
볼 수 있다. 늘 푸르른 잎을 자랑하는 거목, 한겨울에도 잎이 시들
지 않는다.
신기한 것은 푸른 잎사귀가 불수(佛手)같이 생겼고, 어린아이같이 생
긴 열매가 나뭇잎 사이사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동자(童子) 같은 모습의 열매는 청허관의 보배로 여겨지는
오령신과(五靈神果)였다.
오령신과는 무병장수하는 데 주효한 영약으로 알려졌고, 천하에 한
곳 청허관 안에만 있었다.
그것을 탐하는 무리가 많았고, 따라서 오령신과의 주위에는 청허관의
고수들이 상주하고서 도적이 발길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관주의 거소도 오령신과수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저녁 무렵.
청허도관의 관주 청허도장의 거소 안에서 한 줄기 푸른 연기가 솟아
올랐다.
언뜻 보면 밥 짓는 연기 같은 연기의 출처는 청허도장의 침소 바로 앞
에 놓여진 화로였다. 화로는 숯불로 달구어졌고, 연기는 그로 인해
생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교한 단로(丹爐)였다.
단로 주위에 서 있는 삼남 일녀가 있었다.
모두 빼어난 모습의 소유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잿빛 도복을 걸친 백발도장이었고, 요염한 용모의 백의미
녀 하나가 있었다.
그 외, 상복 차림의 청년 하나와 흑삼차림의 미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흑삼청년이었다.
"한 시진만 있으면 단약이 구어져 나올 것입니다. 모두 관주님의 보
살피심 덕분입니다."
"옥면살성자의 뛰어난 이름을 전해듣고 내심 흠모하고 있었네. 이렇
게 보게 된 것은 일생일대의 영광이네. 오령신과 다섯 개를 선물하게
된 것은 청허관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영광이네."
회의노도장이 소탈히 웃었다.
그는 청허도관의 관주 청허도장이었다.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대체 어떤 단약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네.
단로 안으로 들어간 약재로 무엇을 만드는지 궁금하네. 빈도는 연단
술의 제일인자로 자부했었는데, 오늘 냉 소장주에게 그 자리를 내주
어야 할 것 같네."
"단약의 이름은 사정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단
약은 마성(魔性)을 치유하는 데 신효를 갖고 있는 영단이 될 것입니
다. 저는 단 한 알만 필요로 합니다. 그 외 나머지는 관주께 선물해
관주께서 선행하시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허허허……,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청허도장은 무림의 삼대 거파를 삽시간에 흩트려 버린 주역 옥면살성
자가 어떤 사람인가 안 후 세 번 놀라고 말았다.
첫째는 그의 나이가 약관이라는 것에 놀랐다.
둘째는 그가 너무나도 뛰어난 용모의 소유자라는 데 놀랬고, 마지막
으로는 냉운이 절세고수답지 않게 겸허하다는 데 놀랬던 것이다.
'무림의 장래를 짊어질 청년이다. 이 청년이 건재하는 한 마도는 무
림에 발붙일 수 없으리라.'
청허도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로 세 명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거소 안을 가리켰다.
"단약이 완성되려면 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간 청허관의 냉향차(
冷香茶)를 맛봄이 어떻겠는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제소옥이 쾌히 응낙했다.
청허도관의 냉향차는 차잎 중 가장 어린순을 따 만드는 것으로 향기
가 일품이었다.
차물이 맑은 이유는 청허관의 약수(藥水) 때문이라 했다.
사실 오령신과수가 자라고 있는 까닭도 약수의 힘 때문이었다.
물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아닌가!
맑은 물이 있는 곳에 싱싱한 생명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되는
것이다.
네 사람은 네모난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청허도장은 동자에게 차를 끓이라 한 후, 냉운을 보고 턱면을 쓰다듬
으며 말했다.
"과거 자네 선천을 본 일이 있네. 그분는 외유내강한 분이셨지. 일신
에 무공은 익히지 않았으나 감히 그분을 넘볼 사람은 없었네. 그분의
몸에서 풍기는 말할 수 없이 늠름한 기품 때문이었지. 자네를 보니
그분을 다시 뵙는 듯하네."
"부끄럽습니다. 저는 아버님만 못한 사람입니다."
"정녕 정파의 대들보네. 천외옥룡이 곁에서 도운다면 무림이 일 년
안에 평정될 것이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제소옥은 냉운과 일타운을 살피며 은연중 무엇인가를 결심하는 눈치
였다.
'일타운이 정파로 돌아서 냉 형의 여인이 되었으니, 소청이가 끼어들
자리가 더 적어진 셈이다. 하나, 냉 형은 천하삼미를 모두 얻어도
욕을 듣지 않을 대장부다. 소청이가 냉 형을 못 잊어하는 눈치이니,
사정을 해서라도 두 사람 사이를 맺어 주리라. 그렇게 하는 것이 과
거 냉 형에게 곤욕을 주게 한 데 일말의 속죄가 될 것이다.'
제소옥은 제소청이 냉운과 만난 후 냉운의 늠름한 모습을 잊지 못해
상사의 밤을 지새운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제소청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반면 냉운은 강남대협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제씨 남매의 출생 비밀에
대해 말할 순간을 찾느라 고민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우선 청성신협 방호를 잡아 마성을 벗게 한 후 그의 친자식들이 있다
는 것을 알려 주어야 순서가 제대로 될 것 같은 것이다.
제소옥은 명가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 말한다면 제소청이 오히려 제소옥보다 더 강한 자부
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나, 언젠가는 말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신비마제를 빨리 잡아야 한다. 모든 불행은 그로 인해 일어나지 않
았는가? 그 자를 죽이는 순간 마풍(魔風)은 진압되리라.'
냉운은 신비마제가 자신의 원수이기 쉽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
남은 것은 단 하나, 신비마제를 잡아 그의 입을 통해 그가 냉가장의
흉수인가를 밝히는 것뿐이었다.
담소하며 반시진 가량 보냈을 때였다.
"관주!"
방 밖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도복을 걸친 노도사 하나가 청허도장의 거소 앞에 와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부관주?"
청허도장이 몸을 일으키고 묻자.
"천외옥룡 제소옥 대협께 보내진 밀서(密書) 하나가 있어 여기 오게
되었습니다."
청허관의 부관주가 소매 속에서 붉은 봉투 하나를 꺼내 청허도장 손
에 건네주었다.
<천외옥룡친전(天外玉龍親傳)>
겉봉에 써 있는 글씨였다.
제소옥은 우연히 들른 청허도관 안으로 밀서를 보낼 만한 사람이 없
다는 데 의아해하며 밀서를 받아 뜯어보았다.
잠시 후.
"으음……."
제소옥의 밝았던 얼굴에 검은 그늘이 생겼다.
"누, 누가 이런 것을 보냈단 말인가?"
제소옥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서찰을 탁자 위에 쫙 펼쳤다.
<제소옥! 지금 곧 낙양으로 떠나라. 그렇지 않을 경우 제소청이 죽으
리라!>
협박 비슷한 글이었다.
아직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방금 전에 만들어진 것에
틀림없었다.
"제소청 낭자의 목숨이 위험하다니?"
냉운이 놀라워하자.
"소청이 소주에 있고 어디론가 떠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제소옥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누군가 권고하기를 기다렸다.
거소 안이 답답한 침묵에 젖어갔다.
"흥!"
천외옥룡 제소옥은 한참 생각하다가 냉소치며 편지에 손바닥을 댔다.
파팍!
편지가 타서 흰 재로 화했다.
"소청이가 위험해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나를
속이는 것에 틀림없습니다."
"무량수불……, 부관주에 의하면 절묘한 신법을 시전하는 자가 이것
을 던지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네. 부관주가 놀라워하는 것으로 보
아, 편지를 보낸 사람이 대단한 신법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네."
청허도장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내게 원한을 가진 자가 낙양에 함정을 파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소옥이 눈빛을 번쩍이며 자신만만히 말했다.
목소리에 실린 진기가 너무 강해 탁자 위 찻잔이 깨질 정도였다.
"소청이가 낙양에 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으나, 내게 원한을 가진
자가 낙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그 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낙양으로 갈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청허도장도 냉운도 찬동하는 기색이었다.
천외옥룡은 십오 세 이전부터 강호를 종횡했던 청년이었다.
그는 호랑이 굴에 빠져도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는 담력과 경험을 얻은
역전의 용사인 것이다.
강호 경험으로 말한다면 냉운이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제소옥은 냉운에게 배운 봉황천극신공을 완벽히 익힌 후 아직 한 번
도 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신비마제라도 제소옥을 쉽게 해치지 못할 정도였다.
"나를 노리고 함정을 판다면 일생일대의 실수가 될 것입니다. 낙양으
로 가서 나를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소주로 가 의형을 뵙겠
습니다."
제소옥은 냉운과 청허도장에서 포권지례를 취한 후 거소 밖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아주 믿음직스런 모습이었다.
"청외옥룡의 신법이라면 낙양에 가 일을 처리한 후 소주로 돌아오는
데 이틀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니, 청성은옹의 장례식 이전 다시 볼
수 있겠군."
냉운은 제소옥에게 좋지 않은 일은 없으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봉황천극신공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제소옥이라면 신비마제라도 쉽게 꺾지 못한다.'
냉운은 함정을 만든 자가 후회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함정에 빠져 가는 사람은 제소옥이 아니고 냉운 자신이라는 것
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서명 없는 밀서가 제소옥을 냉운 곁에서 떼어놓기 위한 술수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제소옥과 냉운이 함께 소주로 가는 것을 원치 않는 자가 있었다. 제
소옥과 냉운이 결의형제로 맺어져 허심탄회한 사이가 된 것을 바라지
않는 자가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이다.
냉운을 죽이기 위해.
숯에 의해 달궈지던 단로는 냉운에 의해 차갑게 식게 되었다.
냉운은 불사검제의 연단술을 익힌 사람답게 청허도장이 알지 못하는
신기한 연단술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단로 안에서 구워져 나온 것은 붉은빛 도는 대추만한 단약 이십여 개
였다.
회혼신단(廻魂神丹)이라 불리우는 기사회생의 영단이 그것이었다.
냉운은 그 중 한 개를 취해 일타운에게 갈무리하라 한 후, 나머지 전
부를 청허도장에게 선사했다.
청허도장은 감사히 받는 동시에, 오령신과로 만든 오령신단(五靈神丹
) 한 갑을 선사했다.
냉운과 일타운은 밤이 되기 전 청허도관을 벗어났다.
휙! 휙!
두 사람은 나란히 서 흑백 두 줄기 선을 그으며 팔공산 아래로 사라
져 갔다.
일타운의 신법도 무영신법이었다.
일타운은 냉운을 따르는 며칠 전에 비해 세 배 강한 고수가 되어 있
었다.
그 사이 익힌 신공은 색혼경 수법이 따를 수 없이 신기막측한 오대불
귀객의 무공이었다.
팔공산에서 소주로 가려면 동남(東南) 쪽을 택해야 했다.
낙양으로 떠난 제소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이기도 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셈이었다.
한동안 오해했다가 결의형제로 친해졌던 냉운과 제소옥이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냉운의 진심(眞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지인 하나가 자꾸 멀어
져 가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희대의 살성(煞星) 옥면살성자가 사실은 명예욕이 없고 정직한 청년
이라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떠나간 셈이다.
냉운과 길동무가 되어 있는 사람은 요녀굴의 총순찰이라는 좋지 않은
과거를 지니고 있는 유화선자 일타운이 아닌가!
까마귀 굴 안에서 백로의 순결을 유지했던 일타운이나, 그것을 알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휘휘휙!
나는 듯 달려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앞길에 도사리고 있을 마귀의 손길을 전혀 알지 못하는 순박한 모습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