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夢寅의 遊頭流山錄 연구*1)
―지리산 遊記의 전통과 관련하여―
안 세 현**1)
<목 차>
Ⅰ. 머리말
Ⅱ. 유두류산록 의 구성과 그 특성
Ⅲ. 인간사에 대한 회의와 정치현실에 대한 우의적 풍자
Ⅳ. 기발한 경물 묘사와 참신한 비유법․의인법의 활용
Ⅴ.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는 柳夢寅의 遊頭流山錄 을 金宗直의 遊頭流錄 을 비롯한 조선전기․중기의 지리산 遊記와 비교․분석하여, 이 작품이 지닌 구성, 주제의식 그리고 표현적 측면에서의 특징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비교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을 비롯하여 南孝溫의 遊天王峰記 , 金馹孫의 頭流紀行錄 , 曺植의 遊頭流錄 , 梁大樸의 頭流山紀行錄 , 朴汝樑의 頭流山日錄 , 趙偉韓의 遊頭流山錄 등이다.
구성적 측면에서 유두류산록은 이전의 지리산 유기와 마찬가지로 일기체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마무리 부분을 확대시키고 장대한 의론을 전개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지리산의 특성과 지리산으로의 은거 의지를 전체적․집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두류산록에는 일반적인 유기에서 보이는 탐승에서 오는 흥취뿐만 아니라, 인간사에 대해 회의하고 당대 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는 의식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는 기본적으로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의해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쫓겨난 유몽인의 정치적 불우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을 굽히면서까지 남을 따르려 하지 않고 붕당 정치 속에서 一人으로 고독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기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세상의 가치를 상대주의적으로 보는 장자적 사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표현적 측면에서는 참신한 비유법과 의인법을 활용하여 경물을 묘사하거나 감회를 드러내는 것이 돋보인다. 또한 다소 장난스런 상황을 연출하여 부정한 정치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거나 경물을 묘사하는 데에 활용하였는데, 이는 여타의 지리산 유기에는 보이지 않는 유두류산록 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주제어: 柳夢寅, 遊頭流山錄, 金宗直, 遊頭流錄, 山水遊記, 지리산.
■ Ⅰ. 머리말
본고는 柳夢寅(1559~1623)의 遊頭流山錄 을 지리산 遊記의 전통 내에
서 검토하여, 이 작품이 지니는 구성, 주제의식 그리고 표현적 측면에서의
특징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金宗直(1431~1492)의 遊頭流錄 이 나온 이래로 대부분
의 지리산 유기는 이 작품의 구성 방법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도 예외가 아니지만, 마무리 부분이 여타의 지리산 유기에
비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으며, 그 의론 전개 또한 한 편의 독립된 글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결된 짜임을 이루고 있다. 유두류산록 은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특이하다. 이 작품에는 여타의 지리산 유기처럼 세
속을 잠시 잊고 탐승과 경물을 즐기는 흥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사에 대해 실존적 물음을 던지고 정치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는 의식이 보인
다. 이는 일차적으로 유두류산록 의 창작 당시 유몽인의 정치적 상황에
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기질과 사유방식을 종합적으로 고려하
여 그 배경을 밝힐 필요가 있다. 한편 표현의 측면에서 보면 참신한 비유
법과 의인법을 활용하여 경물을 묘사하거나 감회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적
이다.
지금까지 지리산 유기에 대해 김종직의 유두류록 과 曺植(1501~1572)
의 遊頭流錄 을 중심으로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었다.
1) 특히 최석기는 조선시대 지리산 유기와 관련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였고
2),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지리산 유기의 명편을 뽑아 번역집을 내기도 하였다.
3) 또한 지리산 유기 가운데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으면서, 이에 나타난 작가의식을 ‘산수에 대한 섬세한 관찰’, ‘역사에 대한 회고’, ‘현실에 대한 인식’, ‘국토산하에 대한 인식’으로 나누어 살펴본 바 있다.
4) 한편 안득용은 16세기 李滉(1501~1570)․조식 등의 산수유기가 17세
기 金昌協(1651~1708)과 金昌翕(1653~1722)의 산수유기로 변모해가는 과정의 한 사례로서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에 주목하였다. 곧 유몽인의 유
두류산록 에 인간존재의 불완전성이 보이긴 하지만 이는 16세기의 哲理
的 경향과는 다른 것이며, 17세기 후반에 농후해지는 餘興追求로의 의식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5) 이들 선행 연구를 통해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에 나타난 작가의식과
심미의식이 16세기 도학자들과 다른 점이 밝혀지긴 했지만, 이 작품이 지
닌 문체와 주제의식의 특징적인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못했다. 이는 유몽인 이전이나 동시대 지어진 지리산 유기와의 비교를 통해 구명할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 비교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을 비롯해 南孝溫(1454~1492)의 遊天王峰記 , 金馹孫(1464~1498)의 頭
流紀行錄 , 조식의 유두류록 , 梁大樸(1543~1592)의 頭流山紀行錄 , 朴
汝樑(1554~1611)의 頭流山日錄 , 趙偉韓(1567~1649)의 遊頭流山錄 등
이다. 이들과 변별되는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만이 지닌 특성을 구성과
주제의식, 표현적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작품을 분석할 때
유몽인의 여타 詩文을 폭넓게 활용하고자 한다.6)
■ Ⅱ. 유두류산록 의 구성과 그 특성
유두류산록 에서 회고하고 있듯 유몽인은 삼각산, 금강산, 설악산, 묘
향산, 지리산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을 거의 다 유람하였다. 또한 중국
에 세 차례 사신으로 가며 요동으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아
름다운 산수를 다 보았다고 하였다.7) 산수를 유람하거나 중국 사행길에 지은 시들은 關東錄 , 金剛錄 , 頭流錄 , 朝天錄 등의 편명 아래 문집
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1590년 江原都事 시절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
은 關東紀行二百韻 (후집 권1, 456-459면)과 1611년 남원부사 시절 지리산
을 유람하고 지은 遊頭流山百韻 (후집 권2, 495-496면)은 시로 쓴 山水遊
記라 할 정도로 여정이나 경물 묘사 등이 비교적 상세하다. 유기로는 금강
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산록이 있었는데 임진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고
하며,
8)현재 문집에는 1604년 동지사로 가는 尹昉(1563~1640)에게 써준 燕京沿路可遊者記, 送冬至副使尹(昉)可晦參知 (후집 권4, 537-538면)와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두류산록 이 전한다.
9)유두류산록 은 1611년(광해군 3) 53세 때 남원부사에 부임하여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총 6,300여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10) 3월 29일 在澗堂에서 출발하여 4월 8일 남원의 관아로 돌아오기까지 총 8박 9일 일정으로 다녀온 지리산 유람을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유기
이다.
11) 이 작품은 크게 지리산 유람을 하게 된 배경을 서술한 도입부, 날짜별로 이동한 장소와 견문 및 감상을 서술한 여정부, 여정을 마친 후 유람의 전체적인 감회를 서술한 마무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 방법은 조선시대 지리산 유기의 전범이 된 김종직의 유두류록 이후 거의 모든 지리산 유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유몽인 스스로 김종직의 두류산록 과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을 보았다고 밝히고 있듯이,
12) 지리산 유람과 유두류산록 의 집필에 있어서 기존의 유기
를 많이 참고했을 것이다. 다만 유몽인의 경우 전체 분량을 감안하더라도
마무리가 여타 지리산 유기에 비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으며, 그 의론 전
개 또한 한 편의 독립된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결된 짜임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지리산 유기는 유람의 감회를 총평식으로 간략하게 서술하거나 자신의 유기 창작 목적을 부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1472년 작)은 두류산이 중국의 崇山보다 나으며 최소한 武夷山이나 衡岳에 비견될 만한 명산인데도, 지금 도망친 종이나 중들이 머무는 소굴이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자신의 유람이 청학동과 오대사까지 이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끝
맺었다.
13)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1482년 작)의 마무리에서는 지리산 유람
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불일암이며, 산세가 매우 험해 청학동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산보다 물이 더 낫다는 친구 정여창
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날 악양성(하동군 악양면)에 있는 호수를 구경 가자
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14)조식의 유두류록 (1558년 작)에서는 자신이 지리산 유람을 제일 많이
했기 때문에 유람의 전말을 기록하라는 동행자들의 부탁에 의해 글을 짓
게 되었다는 집필 배경을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지리산 유람 목적이 단순
히 탐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평생 이 산에 은거할 계획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늙어 다시는 갈 수 없게 된 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15)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1586년 작)에서는 두 번째 지리산 유람이 첫 번째 유람과 다른 점을 부각시키고, 자신에게서 산수를 감상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
며 벗과의 사귐에 유람의 목적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훗날의 와유로 삼고자 이 글을 쓴다는 집필 목적을 밝혔다.
16) 조위한의 유두류산록
(1618년 작)에서는 동생 趙纘韓(1572~1631)과 외지에서 만났고 함께 유람
하였으며 더욱이 함께 시를 나누었기에 매우 기이한 만남[千載難遇之奇
會]임에 감격하고, 공무로 바빠서 깊숙한 곳까지 탐승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17)이에 비해 유두류산기 의 마무리에서는 장대한 의론이 전개되는데, 다
음의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산수유람 편력:嗚呼! 余性踈放〜其間佳山美水, 無不領略而來.
②지리산의 특징1(多肉少骨):嘗謂地勢東南低西北高〜是可謂知山也哉?
③ 지리산의 특징2(넓고 높음):今夫頭流〜其地之高下, 推此可測.
④ 최고의 산 지리산:古人嘗論天下大水三〜頭流爲東方第一山無疑.
⑤ 지리산으로의 은거 의지:如欲謝人間榮利〜豈獨高興舊貫可志我輿地哉.
이 의론의 요점은 지리산이 우리나라 최고의 산임을 증명하고, 이 산에
은거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하는 데에 있다. 먼저 ①에서는 약관 때부터
지리산 유람 전까지의 산수유람 편력을 빠짐없이 서술하였다. 우리나라
유명 산수는 물론 사행길에서 본 중국 산수까지 아우르고 있다. 이는 ②와
③을 거쳐 ④에서 “나는 우리나라 바다와 산을 모두 내 두 다리 아래 두었으니, 비록 천하를 두루 유람한 자장(곧 사마천)에게 비할지라도 내가 크
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을 들어서 높낮이를 차
례 짓는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 첫 번째 산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18)”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이다.
②와 ③에서는 지리산의 특성을 특히 금강산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 었다. 처음에 유몽인은 남쪽에 있는 지리산은 당연히 낮고 금강산에 비해서는 주먹 하나에 불과할 것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유몽인만이 지녔던 생각이 아니며 당시 일반적인 통념이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지리산의 특징을 말하기에 앞서 금강산과의 대비를 통해 지리산을 다소 누르는 것은[抑] 뒤에서 지리산을 띄우기[揚] 위한 설정이다.
19) ②에서 유몽인은 지리산의 특성을 ‘살이 많고 뼈대가 적은 것[多肉少骨]’으로 요약한다. 주지하다시피 살이란 나무가 많고 산세가 넓게 퍼져 있으며 웅장함을 뜻하며, 뼈는 바위가 많아 산세가 험한 산을 뜻한다. ③에서는 지리산의 높이와 넓이를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지금 두류산은 그 뿌리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면면이 4천 리나 뻗어와 飛
騰하고 웅대한 기세가 남해에까지 이르러 응축되어 모이고 우뚝 일어난 것으
로, 주위에 열두 고을을 끼고 있고 사방 2천리를 두르고 있다. 안음과 장수는
두류산의 어깨를 메고, 산음과 함양은 그 등을 짊어지고, 진주와 남원은 그 배
에 잉태해 있고, 운봉과 곡성은 그 허리에 달려있고, 하동과 구례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과 곤양은 그 발에 임박해 있으니, 그 뿌리에 서려있는 영역이 영남
과 호남의 반이나 된다. 저 풍악산은 북쪽에 가깝지만 4월이 되면 눈이 녹는데,
두류산은 남쪽 끝에 있는데도 5월까지 얼음이 있으니, 그 땅의 높낮이를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20)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남해에까지 4천리를 내려와 응축된 웅장한 기세, 사방 2천리로 열두 고을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산세, 한여름에도 얼음이 남아 있을 정도로 높은 산세가 금강산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리산을 사람의 신체부위로 의인화하여 지리산의 넓고 높은 산세를 표현한 점이 참신하다. 곧 지리산을 인간 몸으로 보고, 지리산 주변의 고을이 허리, 무릎, 발 등의 신체부위에 각각 걸쳐있다는 설정이다.
④에서는 전해오는 말이나 기록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며, 지리산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나라 최고의 산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전하는 기록에는 천하의 3대 강으로 황하․양자강․압록강을 꼽았는데,
21) 실제로 보면 압록강은 한양의 한강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산수를 두루
돌아본 유몽인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리산이 최고의 산임에는 의
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②와 ③에서
지리산의 특성을 서술한 것뿐만 아니라, ①에서 그간의 산수유람 편력을
자세히 소개한 데에서 힘입은 바 크다.
그렇다면 유몽인은 왜 이처럼 마무리를 확대시키고 장대한 의론을 전
개한 것일까? 유두류산록 과 같은 일기체 산수유기는 날짜별․여정별로
그때그때의 감회와 생각을 단편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뿐, 작가의 메시지
를 전체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전달할 방법이 없다. 요컨대 형식적 제약이
많지 않아 자유롭게 글을 전개시킬 수 있는 반면, 메시지를 집중시킬 장치
가 부족한 것이다. 山水遊記 작가가 단순히 와유를 목적에서 작품을 창작
할 경우 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마무리에서 전체적인 유람의 소감
을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몽인은 서두에서 지리산 유람의 배경을 가볍게 서술하는 정도였고, 여정부에서는 날짜별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단편적으로 언급하기에
바빴다. 여정부 중간 중간에 자신의 의론을 길게 서술하는 것은 글의 전개
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마무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무언가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 결국 마무리 부분
의 확대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몽인이 마무리의 의론을 통해 말
하려고 한 것은 우선 지리산이 명산이라는 특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글의 서두에서 이미 은퇴를 결심하고 본향인 고흥으로 낙향할 것
임을 언급하였으며22), 이런 생각은 글의 말미에서 “만일 인간 세상의 영리
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산이 편히 은거
할 만한 곳이리라. … 조만간 허리에 찬 긴 끈을 풀고 내가 생각한 애초의
일을 이룰 것이다.23)”라고 하여 다시 한 번 상기되고 있다. 유몽인은 또한
세속의 영리를 마다하고 속세를 영영 떠나 은거할 곳으로 지리산을 발견
했던 것이다.
요컨대 여타의 지리산 유기와 달리 마무리를 확대시켜 장대한 의론을
펼친 것은 지리산의 특성과 지리산으로의 은거 의지를 전체적․집중적으
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 Ⅲ. 인간사에 대한 회의와 정치현실에 대한 우의적 풍자
일반적으로 산수유기는 그리 특별한 주제의식을 요구하는 양식이 아니
며, 산수유람 과정에서 보게 되는 경물을 묘사하고 여기서 느끼는 감흥을
기술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런 가운데 여행 장소, 여행 거리 등과 같은
지리적 정보의 제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이는 후대 여행자에게 하나의 실용적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24)
그런데 유두류산록 에는 세속을 벗어나서 산수를 즐기는 흥취가 있는
가 하면, 인간사에 대해 회의하고 당대 정치 현실을 우의적으로 풍자하는
편린이 보인다. 글의 말미에서 지리산으로의 은거 지향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이런 고민의 흔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사에 대한 유몽
인의 회의는 천왕봉 정상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 덧없는 세상살이 가련하구나. 초파리 떼는 술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
으니, 다 긁어모아도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 저 조잘조잘대며 자기 잇속만
차리고 옳으니 그르니 기쁘니 슬프니 하며 떠벌리는 자들을 어찌 크게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오늘 본 것으로 치면, 천지도 또한 하나의 손가락일 뿐
이다. 더욱이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하나의 작은 물건이니, 이곳에 올라 높다고
하는 것이 어찌 거듭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 安期生․偓佺의 무리가
난새의 날개와 학의 등을 침상으로 삼아 저 구만리 상공까지 높이 올라가 아래
를 바라볼 때, 이 산이 아주 작은 털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지 않겠는가?25)
이는 천왕봉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두루 조망한 후 그 소감을 적은 것이
다.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의 목적은 천왕봉 등정에 있었으며, 천왕봉은 인
간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속세와는 격절된 공간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여타의 지리산 유기를 보면 천왕봉 정상에 섰을 때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감격을 토로하거나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경관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기개
를 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속세와 완전히 격절된 공간에 자신
이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고 신선 세계를 꿈꾸기도 한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을 보면 흐린 날씨가 계속되자 김종직은 밤에 홀
로 일어나 자주 하늘을 살피고 사당에서 맑은 날씨를 기원하기도 한다. 그
러나 결국 첫 번째 정상 등정 때는 구름이 많이 끼어 실망하고 만다. 그러
다가 다음날 날씨가 맑아지자 지금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라며, 홀로 정상 등정에 대한 열정과 끈기를 보인
다. 그리고 정상에서 아래를 조망하고는 한껏 ‘快’를 느낀다.26)
김일손은 두류기행록 에서 “돌무더기에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외람
되게도 마음과 정신이 모두 늠름하고 몸은 아득한 태초에 있는 듯하여 회
포가 천지와 함께 흘러가는 듯하였다.”, “무한한 회포를 품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감개가 그지없었다.”27)고 하며 천왕봉 정상에 오른 남다른 감
회와 기개를 과시하였다. 남효온은 유천왕봉기 에서 천왕당에 앉아 한참
을 둘러보니 세속에 대한 생각은 다 사라지고 정신이 태연자약하게 되었
다고 하였다.28) 박여량은 두류산일록 에서 “각자 바위를 부여잡고 비탈
길을 올라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아련히 세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왔다
는 생각과 유쾌히 閬風과 玄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29)”고 하였다.
그런데 천왕봉 정상에서 유몽인은 돌연 비애에 빠진다. ‘嗚呼’의 감탄구
에 이어서 세 개의 반어의문문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인간사에 대한 회
의를 강개하게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자연에 비해 인간의 왜소함과 한계를 느낀 것이다. 술항아리에서 태어났다 사라지는 초파리마냥 인간의 삶
도 보잘것없기는 마찬가지이다.30) 더욱이 높은 천왕봉에 올라 내려다본
그 드넓은 땅도 손가락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31) 그리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높은 천왕봉도 안기생․악전과 같은 신선들이 난새나 학을 타고 저
구만리 하늘로 날아올라 내려다보면 그저 작은 털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보이는 유몽인의 사유는 상당히 장자적이다. ‘天地亦一指也’이
라는 齊物論 의 구절을 가져다 쓴 것이나 구만 리 장천을 날아올라 아래
를 조망하는 설정 등이 장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초파리와 난
새․학, 인간과 안기생․악전의 대비는 逍遙遊 에 보이는 붕새와 메추라
기의 대비를 연상시킨다. 유몽인의 사유와 산문에 끼친 莊子 의 영향은
일찍부터 지적되었다. 成汝學(1557~?)은 유몽인 산문의 특성을 장자에 견
주어 논한 바 있는데32), 다음에서 그 연관성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누런 것은 스스로 누렇다 하고 푸른 것은 스스로 푸르다 하는데, 푸르고
누런 것이 과연 본래 지니고 있는 본성인가? 갑에게 물으면 갑이 옳고 을은 그
르다 하고, 을에게 물으면 을이 옳고 갑은 그르다 하니, 그럼 둘 다 옳은 것인
가? 아니면 둘 다 그른 것인가? 갑과 을이 둘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인가?33)
② 세상 일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순리에 맞고 무엇이 순리
에 맞지 않은가? 무엇이 같고 무엇인 다른가?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사악
한 것인가? 무엇이 펼쳐지고 무엇이 움츠려지는 것인가? 무엇이 죽고 무엇이
사는가? 또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34)
유몽인의 평생 知友였던 李廷龜(1564~1635)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써 준 贈序의 일부로 ①은 1604년에, ②는 1619년에 지은 것이다. 구법이나
사유에 있어서 장자 , 제물론 의 영향이 뚜렷하다.35) 여기서 유몽인은
세상의 정의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처럼 연속되
는 물음과 외침 속에는 인간사에 대한 회의와 혼란, 그리고 당대 정치 풍
토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①은 붕당으로 인한 友道의 붕괴를 개탄한
것이고36), ②는 출처에 대한 고민과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37) 당파에 따라 세상의 정의와 가치가 좌우되는 현실에서 유몽인
은 어느 당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철저히 一人으로 살고자 하였다.38) 유두류산록 은 16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시기적으로 위의 두 글 사이에 놓여
있다. 여기서도 유몽인은 인간사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
는데, 이것이 은거하고자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한편 유몽인은 유두류산록 곳곳에서 당대 비정상적인 현실을 다소
희학적인 상황 속에서 우의적으로 풍자하기도 하였다.
① 높이 솟은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
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먼저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어,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데 위치하고 종들은 높은 데 처하게 되었다.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인데 내 머
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39)
② 대나무 숲을 헤치고 義神寺를 찾아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나의 유람이 인
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 내가 두 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속
세를 떠난 사람들인데 어찌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지 않소? 내가 지나온 것과
비교해 보면 그대들은 일찍이 함정을 떠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이 외진 곳에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푸른 솔을 벗하고 흰 사슴과 함께하는 것에 지나지 않
소. 생각건대 나의 발자취는 푸른 솔과 흰 사슴이 사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온 것이니, 내가 그대들보다 낫소.” 두 중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40)
①은 향적봉을 내려올 때 경사가 급해서 한 줄로 힘들게 내려오는 모습
을 서술한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먼저 가고 낮은 사람이 뒤를 따르
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떠받들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누르고 있는 꼴이다. 이는 비정상적이다.
이를 두고 유몽인은 세상사와 같다며 비정상적인 정치 현실을 우의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②는 義神寺에 묵을 때 두 시승과 함께 밤을 보내며 한 말이다. 의신사
는 지리산을 거의 다 내려온 곳에 있다. 여기서 유몽인은 자신이 인간 세
상과 가까워짐을 느낀다. 유몽인의 귀에 들리는 두견새 소리와 계곡물 소
리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세상 가까이 살고 있는
두 중은 함정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고, 자신은 지리산 깊숙한 곳까지 갔
다 왔으니 속세와는 더 멀어진 것이라 우수개 소리를 하였다. 속세를 함정
으로 설정한 데에서 당대 현실에 대한 우의적 풍자를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유몽인이 인간사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당대 정치 현실을 우
의적으로 풍자한 배경은 무엇일까? 유몽인은 1589년(선조 22) 31세에 증광
시에서 삼장에 모두 장원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별다른 정치적 좌절 없이 선조만년에 대사간․도승지 등 요직을 역임하면
서 명나라의 접반사나 사신으로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李爾瞻(1560~1623) 일파의 탄핵을 받고 西湖에 퇴거하게 된다. 이
듬해 성절사 겸 사은사로 발탁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지
만, 이는 이이첨과의 갈등이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몽인이 중국과
의 외교에 경험이 많았기에 일시적으로 기용된 것일 뿐이었다. 우두류산
록 을 쓴 시기는 유몽인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 맞는 최초의 시련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남원부사를 제수 받았지만 정치적 입지는 상당히 위태로
웠다. 광해군일기 3년(1611) 7월 29일조에 사헌부에서 전주부윤 鄭光績,
나주목사 宋錫慶, 남원부사 柳夢寅, 순천부사 柳永詢이 지방 수령의 임무
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며 파직을 요구한 기록이 보인다.41) 이는 유몽인이 지리산 유람을 다녀온 직후에 이루어진 탄핵으로, 이 중 유영순은 유
몽인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던 사람이다. 결국 유몽인은 정광적․송석경
과 함께 遞差되고 만다. 유몽인이 지리산 밖의 세상을 함정으로 본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유몽인은 세계를 상대론적으로 바라보는 장자적 사유를 지니고
있었고, 기질적으로 자신의 뜻을 굽히면서까지 남을 따르려 하지 않고 一
人으로 살고자 했고 때문에, 당쟁이 격화되고 이이첨 일파의 전횡이 심해
지는 정치현실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고흥으로 낙향하는 길밖에 없
었다.42) 유두류산록 에 보이는 인간사에 대한 회의와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한 우의적 풍자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 Ⅳ. 기발한 경물 묘사와 참신한 비유법․의인법의 활용
산수유기 중에는 柳宗元의 永州八記 나 袁宏道의 유기처럼 대단히 문
학적인 작품이 많은데, 이들 작품의 문학성은 산수를 감수하는 작가의 독
특한 인식 태도와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의해 담보된다.43) 대개 표현 방식은 경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한 치밀한 묘사가 주조를 이룬다. 유몽인
도 예외는 아니지만, 경물 묘사 방법이 기발하다.
① 용유담의 폭포와 바위 묘사
龍游潭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모여 있는데 대부분 바위고 흙
이 적었다. 푸른 삼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모여 있는데다가 넝쿨이 이리저리 뻗
어 있었다. 일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에 양쪽 절벽을 쪼개어 거대한 협곡을 이
루었고, 강물을 그 안에 잡아매어 세차게 흐르게 하니 포말을 뿜어내며 아래로
부딪쳤다. 바위는 사나운 물살에 깎여 혹 웅덩이를 이루기도 하고 혹 둔덕을
이루기도 하며, 혹은 입을 벌린 듯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혹은 평탄하게 너른
마당을 이루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바위가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그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양하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② 용의 설화를 활용한 바위 묘사
승려들은 허탄함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
이라 하고, 바위가 움푹 들어가 둥근 것은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며,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백성들은 무지하여 모
두들 이를 믿고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한다. 士人
들도 또한 “용은 바위를 보지 못하니44), 음양의 조화가 만들어 낸 것이로다.”고 한다. 나도 또한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
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으니, 이 어찌 夸娥나 巨靈45)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③ 유몽인의 장난과 용의 造化
시험 삼아 시로써 증험해보기로 하고, 절구 한 수를 써서 연못에 던져 희롱
해보았다. 얼마 뒤 절벽의 굴속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지러이 솟아 있는 푸른 봉우리 사이로 꽝꽝 우레 소리
가 나고 번쩍번쩍 번갯불이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곧 사라졌다. 동행한 사람들
은 마침내 바지를 걷어붙이고 잽싸게 작은 외나무다리[略彴]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빗발이 은실 같이 내리고, 세차게
우박이 새알만한 것이 쏟아지더니 일시에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얼굴
이 새파랗게 질려서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니
우주가 높게 드러나더니 햇발이 구름 사이로 새어나왔다.46)
용유담은 지리산 북쪽의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등에서 흐르는 물이 합
류하여 만들어진 엄천강 물이 기암절벽 사이로 폭포를 이루며 떨어져 만
들어진 못이다. 유몽인은 폭포수나 연못의 물보다는 폭포수가 빚어낸 바위의 다채로운 모습에 시선을 집중한다. ①에서는 웅덩이를 이루기도 하
고 둔덕을 이루기도 하며 입을 벌린 듯 바위에 틈이 벌어지기도 했고 평탄
하니 너른 마당을 이루기도 한 바위의 모습을 그렸다. ①의 말미에서 다양
한 바위의 모습을 자신은 이루다 형용할 수 없다고 하고, ②에서는 승려의
말을 통해 용의 설화를 끌어들여 바위의 묘사를 이어간다.
‘龍游潭’이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용이 노닌다는 못이다. 금
강산의 구룡폭포와 마찬가지로 폭포를 끼고 있는 못에는 용과 연관된 설
화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용의
설화를 거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위의 모습을 형용하는 데에
용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위가 떨어져간 부분은 용이 발톱으로 할
퀸 것이며, 움푹 꺼져서 둥근 것은 용이 움트고 있던 곳이며, 갈라져서 골
이 파인 부분은 용이 뚫고 나간 곳이다. 움직임이 없는 바위가 용의 역동
적인 행동과 결합되면서 더욱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47)
그리하여 모두들 바위의 모습은 용이 부린 조화라고 믿는다. 유몽인도
바위의 모습에 경탄하며 아마도 과아나 거령과 같은 神物이 살고 있는 것
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이제 정말 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바뀌며
③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단락 구성상 ②는 ①과 ③을 연결시켜 주는
過渡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유몽인은 시를 써서 잠자는 용을 깨어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그
런데 갑자기 절벽의 굴속에서 무언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봉우리 사이에선
꽝꽝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번쩍번쩍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젊은
사람들도 놀라 정신이 나갈 정도이다. 이는 물론 산에 갑자기 구름이 몰라
와 한 차례 소낙비를 뿌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구름을 용이 주관하는 것이라는 관념48)을 상기해볼 때, 여기서 구름과 비는 바로 용유담
에 있는 용이 부리는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절묘한 것은 이러
한 용의 조화가 유몽인의 장난에 의해 밖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용유담에 대한 묘사가 한층 입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두류산록 에는 의론의 전개나 경물의 묘사에 있어서 비유법과 의인
법의 참신한 활용이 돋보인다.
두류산은 살이 많고 뼈대가 적으니, 곧 더욱 높고 크게 보이는 이유이다. 문
장에 비유하면 굴원의 글은 애처롭고 이사의 글은 웅장하며 가의의 글은 분명
하고 사마상여의 글은 풍부하며 양웅의 글은 현묘한데, 사마천의 글이 이들 모
두를 겸비한 것과 같다. 맹호연의 시는 고상하고 위응물의 시는 전아하며 왕마
힐(왕유)의 시는 공교롭고 가도의 시는 청아하며 피일휴의 시는 험벽하고 이상
은의 시는 기이한데, 두자미(두보)의 시가 이들 모두를 통섭한 것과 같다.49)
이른바 ‘살이 많고 뼈대가 적은[多肉少骨]’ 지리산의 특징을 문장에 비
유하여 표현하였다. 문장가의 대표자인 사마천과 詩聖인 두보가 여러 문
인들의 특성을 모두 겸하고 있듯, 지리산은 산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들
을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유몽인은 또한 1622년(광해군 14) 64세에 지은
贈三藏菴上人慈洎序 에서, 금강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뛰어난 산이라
는 의론을 펼치는 가운데 금강산을 문장에 비유해 표현하기도 하였다. 금
강산은 기묘한 것들을 모아 전체를 이루었지만 불과 수백 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치 古人의 奇語를 모아놓은 小篇과 같다는 崔岦(1539~1612)의
견해를 논박하며 의론은 전개된다. 먼저 유몽인은 설악산, 오대산, 두류산,
묘향산 등이 금강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 산 모두를 금강산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書經 , 禹貢 편이 아홉 개의 편이
모여 한 편을 이루고 南山詩 오십 편이 혹 한 편을 이루 듯, 금강산은
마치 大篇의 문장과 같다는 것이다.50)
앞으로 나아가 少年臺에 올랐다.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잡초나 잡목이 없고 단지 푸른 측백나무만 연이어 나 있었는데, 빙설과
풍우에 시달려서 말라 죽어 뼈만 남아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가 열에 두셋이었
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으니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했다. 여기를 ‘소년대’라고 한 것은 혹 영랑의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
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인 듯하다.51)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는 소년대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모습을 그린 것이
다. 천왕봉 바로 밑에 소년대가 있고 소년대 아래에는 永郞臺가 있다. 영랑은 신라시대의 四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낭도들을 데리고 전국을 유람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승지에 많은 전설을 남겼으며, 관동
팔경 중의 하나인 三日浦처럼 그들로 인해 명명된 유적지도 많다. 바로 지
리산의 영랑대와 소년대도 그러하다.52)
그런데 여기서 유몽인은 ‘소년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래를 나름대로
제시해본다. 천왕봉은 장로와 같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
과 같기에 소년대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산의 가장 높은 주봉을 장로
로, 그 아래의 작은 봉우리들을 아이로 설정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유몽인이 천왕봉을 장로로 보고 있는 이유가 좀 흥미
롭다. 주로 산의 높이를 기준으로 하여 장로와 소년을 구분했다면, 유몽인
의 경우는 천왕봉의 모습에서 착안하였다. 곧 의인법을 활용하여 잡초나
잡목도 없이 빙설과 풍우로 인해 말라비틀어진 하얀 고목들이 듬성듬성한
것이, 마치 백발이 많아서 다 뽑아낼 수도 없는 반백의 노인과 같다는 것
이다.53)
이처럼 유두류산록 에는 여타의 지리산 유기에서 보이지 않는 참신한
비유법․의인법의 활용이 돋보이는데, 이는 自得과 奇를 강조했던 유몽인
의 산문 창작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54)
■ Ⅴ. 맺음말
지금까지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을 구성, 주제의식, 표현의 측면에서
김종직의 유두류록 을 비롯한 조선전기․중기의 지리산 유기와 비교․
분석해보았다. 먼저 구성적 측면에서 유두류산록 은 김종직의 유두류
록 이후 전범이 된 일기체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마무리 부분을 확대시
키고 장대한 의론을 전개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지리산의 특성과 지리
산으로의 은거 의지를 전체적․집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
으로 보인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은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遊記는 특별한 주제의식을 요구하는 양식이 아니며, 산수유람 과정에서
보게 되는 경물을 묘사하고 여기서 느끼는 감흥을 기술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의 목적은 천왕봉 등정에 있었으며, 대개의 지
리산 유기는 천왕봉 정상에서 주변 경관을 조망하며 기개를 과시하거나
속세와는 격절된 신선 세계로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두류산록 에는 여타의 유기에서 보이는 탐승에서 오는 흥취
뿐만 아니라, 인간사에 대해 회의하고 당대 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는
의식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는 기본적으로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의해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쫓겨난 정치적 좌절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자신
의 뜻을 굽히면서까지 남을 따르려 하지 않고, 붕당 정치 속에서 一人으로
고독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기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세상의 가치
를 상대주의적으로 보는 장자적 사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표현적 측면에서는 참신한 비유법과 의인법을 구사하여 의론을 전개하
거나 경물을 묘사한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다소 장난스런 상황을 연출하여
부정한 세태를 우의적으로 비판하거나 경물 묘사에 활용하는 것도 유두류산록 만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는 自得과 奇를 강조했던 유몽인의 산
문 창작 태도가 실제 작품에 반영된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투고일: 2007년 1월 15일 / 심사일: 2월 6일/ 심사완료일: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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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Yoodooryusanlok (遊頭流山錄)
written by Yoo Mong-in
Ahn Se-Hyun*
55)
This paper focused on Yoodooryusanlok(遊頭流山錄) written by Yoo Mongin,
comparing with the previous literary works to analyze effectively. I suggested
Yoocheonwangbongki(遊天王峰記) (南孝溫)․ Dooryukihaengki(頭流紀行錄)
(金馹孫)․ Yoodooryulok(遊頭流錄) (曺植)․ Dooryusankihaenglok(頭流山紀行
錄) (梁大樸)․ Dooryusanilok(頭流山日錄) (朴汝樑)․ Yoodooryusanlok(遊頭流
山錄) (趙偉韓) and so on as representative works in this paper.
First of all, I surveyed its construction. It's written in journal type like the
previous works, however it's somewhat special that it had longer ending part and
it provided meaningful arguments. I understood such aspects as for the purpose of
expressing his desire of retirement.
Besides we can find out the writer's exceptional opinion in addition to the basic
aspects of general travels. The writer, Yoo Mong-in, doubted about the world and
criticized social irregularity of those days. This must be came from his career that
he was expelled from the political circles. He decided to keep his creed instead of
submitting to the opposing party.
In addition, I surveyed its expression. He made full use of original figures of
speech and personification to develop his argument or to describe the scenery
vividly. Furthermore he inserted the sense of humor in the context to develop the
situation effectively. Those techniques were unique.
Key Words:Yoo Mong-in(柳夢寅), Yoodooryusanlok(遊頭流山錄) , Kim Jong-Jik(金宗
直), Yoodooryulok(遊頭流錄) , travels about landscape(山水遊記), Mt. Jiri(智異山)
1) 지리산 유기와 관련된 주요한 연구 성과로 정우락(1994); 이혜순(1997); 홍성욱
(1999) 등을 들 수 있다.
2) 최석기(1995; 1999; 2000a; 2000b)
3) 李陸 외 지음,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서울: 돌베개, 2000) 李
陸(1438~1498)의 智異山記 를 비롯하여 총9편의 지리산 유기가 번역되어 있고,
지리산 관련 기록들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본고는 이에 힘입은 바 크다.
4) 최석기(2006b)
5) 안득용(2005), 22-23면.
6) 유몽인 산문에 대한 연구는 於于野譚 에 집중되다가 최근에 들어 尙古的 경향
을 보이는 그의 산문이론의 성격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어우야담 이외의 산
문 작품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몽인 산문이론의 성격
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강명관(2002), 신승훈(2003), 금동현(2004)을 참조. 유몽인
의 산문을 다룬 연구는 신익철(1998)이 유몽인 산문의 특징적 어법으로 ‘역설적
어법’과 ‘우언과 풍유의 어법’을 제시한 이후로 다음의 연구들이 제출되었다. 송
지영(2004); 김영미(2006); 김우정(2005; 2006a; 2006b). 송지영과 김영미의 연구는
주제와 수사적 차원에서의 꼼꼼한 작품 분석이 돋보인다. 김우정은 유몽인의 樓
亭記를 대상으로 하여 이른바 自得의 실현양상을 고찰하고, 복고적 문체의 실상
을 최립과의 비교를 통해 해명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7) 柳夢寅, 遊頭流山錄 , 於于集 후집 권6, 韓國文集叢刊 63, 594면. “余性踈放,
自弱冠來遊四方山水, 未釋褐, 以三角山爲家, 朝夕登白雲臺, 讀書于淸溪山․寶盖
山․天摩山․聖居山. 逮奉使遍八道, 觀淸平山, 入史呑洞, 遊寒溪山․雪嶽山. 春
秋, 覽楓嶽九龍淵․毗盧峯, 泛東海而下, 徧嶺東九郡山水. 越狄踰嶺, 泝鴨綠江之
源, 度磨天․磨雲嶺, 倚釰長白山, 飮馬波豬江․豆滿江, 扣枻北海而廻. 窮三水甲
山,坐惠山長嶺, 俯臨白頭山, 歷明川七寶山, 陟關西妙香山, 轉而西過大海, 登九月山, 泊白沙汀. 三入中州, 自遼東抵北京, 其間佳山美水, 無不領略而來.” 앞으로
문집총간본 於于集 에서 인용할 경우 편명과 권수, 면수만을 명기하고, 韓國文
集叢刊 은 叢刊 으로 약칭함.
8) 贈表訓寺僧慧默序 (1622~23년 작), 권4, 385면. “嚮在三十年前, 富筋力善登陟,
窮蒐內外嶽, 莫我若也. 有遊山錄一通, 行于東方, 失之兵火.”
9) 편자 미상의 장서각본 臥遊錄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영인, 1997)에는 유몽인의
작품으로서 유두류산록 과 遊頭流山百韻 을 비롯하여 白頭山記聞 , 楓嶽異
聞 , 月出神夢記 , 古香山記聞 이 실려 있다. 뒤의 네 편은 모두 어우야담 에
실려 있는 것으로 산수유기라기보다 신기한 이야기를 단순히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다만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와유록 의 편자가
수록해 놓은 듯하다.
10) 참고로 김종직의 유두류록 은 4,100여 자,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은 6,400여 자,
조식의 유두류록 은 4,600여 자,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은 4,800여 자 등이다.
11) 재간당에서 함께 출발한 사람은 순천부사 柳永詢(자 詢之), 재간당 주인인 진사
金澕, 순창 사는 유몽인의 생질 申尙淵, 유몽인의 인척 생질로 서얼인 申濟이며,
운봉 역참에서 운봉 수령 李復生(자 伯蘇)이 합류하였다.
12)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4면. “竊觀佔畢·濯纓之錄, 當其登覽之日, 皆爲風雨雲
霧所魔障, 狼狽者多矣.”
13) 金宗直, 遊頭流錄 , 佔畢齋集 문집 권2, 叢刊 12, 446면. “嗚呼! 以頭流崇高
雄勝, 在中原之地, 必先嵩岱, 天子登封金泥玉牒之檢, 升中于上帝. 不然, 則當比之
武夷衡岳, 博雅如韓昌黎,朱晦菴蔡西山, 修煉如孫興公․呂洞賓․白玉蟾, 聯裾
接踵, 彷徉棲息於其巾矣. 今獨爲庸夫逃隸竄籍學佛者之淵藪, 吾輩今日, 蹤得登覽
一遭, 僅償平素之願. 而繩墨悤悤, 不敢訪靑鶴歷五臺, 遍探幽奇焉. 夫豈玆山之不
遇耶? 長詠子美方丈三轉之句, 自不覺神魂之飛越也.”
14) 金馹孫, 頭流紀行錄 , 濯纓集 권5, 叢刊 17, 265면. “前後十六日, 所歷千巖競
秀, 萬壑爭流, 可喜可愕者, 不可一二數, 而可人意者, 佛日一菴耳. 又聞鶴語, 疑眉
叟所覓者在此. 然壑谷峻絶, 非猿狖則不可行, 妻孥牛犢, 無所容矣. 巖川斷俗, 皆爲
緇場, 而靑鶴洞, 終不可得, 奈何? 伯勖曰, ‘松與竹兩美也, 而不若此君, 風與月雙淸
也, 而不若天心對影之爲奇, 山與水俱仁智所樂也, 而不若水哉水哉? 遲明, 將與子
行, 出岳陽城而觀瀾於大湖也.’ 余曰, ‘諾.’”
15) 曺植, 遊頭流錄 , 南冥集 권2, 叢刊 31, 509면. “諸君以余頻入頭流, 因知山間
事者也, 令余記之. 余嘗往來玆山, 曾入德山洞者三, 入靑鶴·神凝洞者三, 入龍遊洞者
三, 入白雲洞者一, 入獐項洞者一, 豈直爲貪山貪水而往來不憚煩也? 百年齎計, 唯欲
借得華山一半, 以作終老之地已, 事與心違, 知不得住, 徘徊顧慮, 涕洟而出, 如是者
十矣. 於今匏繫田舍, 作一行屍, 此行又是難再之行, 寧不悒悒? 嘗有詩曰, ‘頭流十破
黃牛脇, 嘉樹三巢寒鵲居’, 又曰, ‘全身百計都爲謬, 方丈於今已背盟’, 諸君皆是失路
之人, 何但僕栖栖無所歸耶? 祗爲沈酩者先道之, 爲副封焉, 南冥曺植楗仲記.
16) 梁大樸, 頭流山紀行錄 , 靑溪集 권4, 叢刊 53, 570면. “噫! 頭流之遊, 再也,
登上峯, 亦再也. 賞秋葉看日出, 乃其餘事耳. 惟幸得春澗爲詩伴, 得淸虛翁爲語伴,
得粱光祖爲戱伴, 此三者, 求之天下, 未易得也, 愛春歌守介筝生伊笛, 雖云見慣渾
閑事, 而若使外人聽之, 必有如麻衣者之所慕. 至於蛇潭之卜居, 余嘗十往來未得者,
而今忽有之, 方覺昔時遊賞, 徒勞神爾. 入山出山僅十日, 凡所經歷耳可聞目可覩者,
春澗皆括盡無餘, 以爲日錄. 世之覽者, 足以知窮山海之偉觀, 極逍遙之至樂, 奚待
余言之贅乎? 然且不已者, 吾將老矣. 尙待閉門冥搜之日, 使兒輩披而讀之, 憑几而
聽之, 所謂不出戶庭, 看盡江山, 載在錄者, 皆我有也, 所得不其多乎, 若夫山之高,
海之大, 洞壑之深, 巖石之恠, 雖窮萬穀之皮, 秃千兔之毫, 亦莫能盡紀焉. 月日, 靑
溪山人書.”
17) 趙偉韓, 遊頭流山錄 , 玄谷集 권14, 叢刊 73, 312면. “噫! 流離千里之外, 得
見骨肉, 誠人世間稀罕底事, 而得與共遊仙山, 添一詩伴, 亦千載難遇之奇會也. 登
探未窮, 官事有程, 二日山中, 淸賞未洽, 而天涯遠別, 遽出於歡會之中, 吁亦可悲,
而抑豈有數於其間耶? 聚散無端, 人生有限, 他日團圓, 亦難期容易得也. 聊書顚末,
以爲後日之覽焉.”
18)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5면. “若余者, 東區海嶽, 皆入吾雙脚底, 雖子長博望之
遊, 吾不多讓. 擧余足跡所及者, 第其高下, 頭流爲東方第一山無疑.”
19)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4면. “嘗謂‘地勢東南低西北高, 南嶽之頂, 不得與北山
之趾齊, 頭流雖曰名山, 覽盡東方, 以楓嶽爲集大成, 則觀海難爲水, 特視爲一拳石
耳.’ 及今登天王第一峰, 而後其知雄偉傑特, 爲東方衆嶽之祖.”
20)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4-595면. “今夫頭流, 根發於白頭山, 綿延四千里, 扶輿磅礴之氣, 窮於南海, 蓄縮而會, 挺拔而起, 環擁十二州, 周廻二千里. 安陰․長水擔
其肩, 山陰․咸陽負其背, 晋州․南原脤其腹, 雲峯․谷城佩其腰, 河東․求禮枕其
膝, 泗川․昆陽濱其足, 其蟠根之太半於湖嶺. 彼楓嶽, 近北而四月雪消, 頭流極南
而五月氷堅, 其地之高下, 推此可測.
21) 明의 張天復이 지은 지리서인 皇輿考 에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黃河와 長
江과 鴨綠江이다.(天下之三大水, 黃河長江鴨綠江也.)”라는 말이 보인다
22)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88면. “卽今老慵與疴恙相乘, 宜退而自適, 平生喜遊山
海, 而所思在橘柚梅竹之鄕.”
23)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5면. “如欲謝人間榮利, 長往而不返, 惟此山可安菟裘.
… 朝夕解腰間長組, 以遂吾初服"
24) 山水遊記의 일반적 특성에 대해서는 심경호(1988), 218-221면; 褚斌杰(1998),
370-377면; 陳必祥 저, 심경호 역(2001), 104-129면을 참조.
25)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1면. “嗚呼! 浮世可憐哉! 醯鷄衆生, 起滅於甕裏, 攬而
將之, 曾不盈一掬. 而彼竊竊焉自私焉是也非也歡也戚也者, 豈不大可噱乎哉? 以余
觀乎今日, 天地亦一指也. 況玆峰天之下一小物, 登玆而以爲高, 豈非重可哀也歟?
彼安期․偓佺之輩, 以鸞翎鶴背爲床席, 當其薄九萬而下視, 安知此嶽不爲秋毫耶?"
26) 金宗直, 遊頭流錄 , 佔畢齋集 文集 권2, 叢刊 12, 444면. “余念數日重陰, 忽
爾開霽, 天公之餉我, 多矣. 今在咫尺, 而不能勉強, 則平生芥滯之胸, 終不能盪滌
矣. … 自古登此峯者有矣, 豈若吾曹今日之快也.”
27) 金馹孫, 頭流紀行錄 , 濯纓集 권5, 叢刊 17, 262면. “倚壘俯仰, 然神心俱凜,
身在鴻濛太初之上, 而襟懷與天地同流矣.”; “辛亥黎明, 觀日出暘谷, 晴空磨銅, 徘
徊四望, 萬里極目, 大地群山, 皆爲蟻封蚯垤. 描寫則可會昌黎南山之作, 而心眼則
直符宣尼東山之登矣, 多少興懷, 下瞰塵寰, 感慨繫之矣.”
28) 南孝溫, 遊天王峰記 , 秋江集 권4, 叢刊 16, 87면. “余坐天王堂之石角, 回眺
移時, 塵懷散落, 神氣怡然.”
29) 朴汝樑, 頭流山日錄 , 感樹齋集 권6(경상대 남명학 연구소 소장본), 최석기 외
옮김(2000), 293면에서 재인용. “各攀危磴, 俯視人寰, 飄然有遺世出塵之想, 快然
有閬風玄圃之思焉.” 낭풍과 현포는 모두 중국 곤륜산에 있는 지명으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함
30) 지리산 유람 때 쓴 義神菴 (권2, 328면)이란 시의 결구에서도 “만약 방장산에
와서 은거하지 못한다면, 일생을 술항아리 안의 초파리처럼 살아야하리.”라 하
였다.(回回曲曲杖堪植, 水水山山詩可題. 有鳥迎人王母邇, 無花逐水武陵迷. 鬱儀
收彩昏蒼木, 師曠留音寄碧溪. 吾若不來方丈隱, 一生甕裏卽醯鷄.)
31) 莊子 , 齊物論 에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
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말[馬]
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
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以
指喻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 以馬喻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喻馬之非
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는 구절이 있다.
32) 成汝學, 於于野談舊序 , 於于野譚 (경문사 영인, 1979). “筆端鼓舞之妙, 直與漆
園老仙, 雀躍九萬里之上, 並駕齊騖, 眞雄偉不常矣.”
33) 贈李聖徵(廷龜)令公赴京序 (1604년 작), 권3, 357면. “黃者自黃, 靑者自靑, 其靑
黃果其性乎? 問于甲, 則是甲而非乙, 問于乙, 則是乙而非甲, 其俱是乎, 其俱非乎,
其甲乙不能相是乎?
34) 奉別謝恩奏請使李月沙(廷龜)四赴燕山詩序 (1619년 작), 권3, 351면. “天下之事,
奚是奚非? 奚順奚逆? 奚同奚異? 奚正奚邪? 奚起奚廢? 奚張奚歙? 奚死奚生? 又其
所以使之者奚?”
35) 장자 , 제물론 의 일부를 예거해 둔다. “旣使我與若辯矣, 若勝我, 我不若勝; 若
果是也, 我果非也邪? 我勝若, 若不吾勝; 我果是也, 而果非也邪? 其或是邪, 其或非
也邪? 其俱是也, 其俱非也邪?”
36) 贈李聖徵(廷龜)令公赴京序 , 권3, 357면. “自朝家士論相携, 朋友之道, 能皆可保終
始乎? 交之道一也, 緣何而爲二乎? 二猶不幸, 緣何而爲四爲五乎? 其爲一其爲四五
者, 自比而遂私, 能無負於一人乎? 入於一者, 各自爲一, 與四五敵, 爲一人者, 其不孤
乎? 一之勢盛則一之勢衰, 守於一而爲進退, 自以爲節義, 其節義可移於一人乎?”
37) 奉別謝恩奏請使李月沙(廷龜)四赴燕山詩序 , 권3, 351면. “吾不知聖徵相國, 奚爲
然而退, 奚爲然而進? 又奚爲然而使中國, 又所謂辨誣者何事耶?” 이 글은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출된 후 서호에 우거할 때 지은
것이다. 당시 유몽인의 지우들이었던 李睟光, 朴而章, 柳根, 李春元, 金偉男, 鄭
曄, 李慶涵, 金大德, 金世濂, 朴東說, 李綏祿 등이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투옥·유배
되거나 파직을 당했다.
38) 贈李聖徵(廷龜)令公赴京序 , 권3, 357면. “余獨也. 視今之士, 其有若余獨乎? 以
獨而行于世, 交之道, 豈泥于一乎? 一之不泥, 於四於五, 皆吾友也, 則吾之倫不亦
博乎? 其寒凝冰, 而吾不慄, 其熱焦土, 而吾不灼. 無可無不可, 惟吾心之從, 而吾心
之所歸, 惟一人而已, 則其去就豈不綽有裕乎?
39)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2면. “出昂藏老樹下, 踏氷雪凌飛梯, 直南而下. 先行者
在下, 後行者在上. 官士處卑, 僮僕處高, 可敬者履加其髻, 可慢者頭戴其足, 又間事
類是行哉!”
40)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2면. “披高竹尋義神寺而宿. 夜聞杜宇亂啼, 溪聲繞榻,
始覺吾遊近乎人間世矣. … 余謂兩僧曰, ‘爾輩皆以離俗絶世, 惡入林之不密, 而比
吾所履歷, 曾不離於阬穽, 爾之居僻則僻矣, 而不過友靑松群白鹿而止耳. 思吾蹤跡,
出靑松白鹿之外而來, 吾於爾多矣夫.’ 兩僧抵掌而笑
41) 광해군일기 권43, 3年 7月 29日(丙寅). “司憲府啓曰: ‘近年以來, 人心日偸, 公道
幾熄, 除拜之際, 爲人擇官之弊, 已至濫觴, 積謬成習, 恬不知恥. 求之者旣不自量,
授之者未免循情, 內而名器之混淆, 外而郡邑之凋弊, 職由於此, 豈不寒心哉? 擧其
守今中最不治者言之, 全州府尹鄭光績․羅州牧使宋錫慶․南原府使柳夢寅, 俱乏
吏才, 官事不擧; 順天府使柳永詢, 怠棄職事, 民受其弊, 使湖南雄藩巨邑, 日就疲
弊. 請竝命罷職, 其代各別擇遣.’ 答曰: ‘依啓, 鄭光績․宋錫慶․柳夢寅, 遞差.’”
42) 유몽인은 1622~3년 금강산에 은거할 때 지은 與楡岾寺僧靈運書 (권5, 419면)에
서 자신의 일생을 회상하며 광해군 즉위 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余性剛自守己見, 不曾枉己而從人, 剛其心柔其言, 一以直其事, 一以自免於禍. 故
平生尙友古人, 恥與恒人爲朋比. 東西南北, 無一私黨, 榮宦之來, 任彼不自力, 蹤跡
之孤, 莫我若者也. 當戊申新王(필자주-광해군)卽祚, 適余忝都承旨進圭, 自朝宗朝
進圭承旨陞階例也. 余於其時, 祗受大妃殿敎, 盖先王遺敎于七大臣及先王臨終亂
筆大君事及大妃諺書先王行狀事及山陵事也. 以此被劾於言官, 祗受國母之傳旨及
先王之遺敎, 是何等大罪? 而鄭之成․崔之源輩乃敢攘臂肆言而劾之. 是無他, 蔑視
國母, 廢黜之兆自此萌也. 余甚痛之, 非爲私也. 自此守 私第, 又轉而流落高興.”
43) 원굉도의 다음의 언급은 산수유기의 문학성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開
先寺至黃巖寺觀瀑記 , 袁宏道集箋校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1), 1145면. “諸
客請貌其似. 或曰, ‘此鮫人輸綃圖也.’ 余曰, ‘得其色, 然死水也.’ 客曰, ‘靑蓮詩比
蘇公白水佛跡孰勝?’ 余曰, ‘太白得其勢, 其貌膚, 子瞻得其怒, 其貌骨, 然皆未及其
趣也. 今與客從開先來, 欹削十餘里, 上爍下蒸, 病勢已作, 一旦見瀑, 形開神徹, 目增而明, 天增而朗, 濁慮之縱橫, 凡吾與子數年淘汰而不肯淨者, 一旦皆逃匿去, 是
豈文字所得詮也.’” 이는 원굉도가 황암사에 이르러 폭포를 본 후 함께 온 객과
나눈 대화이다. 원굉도는 폭포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이백은 ‘皮’의 ‘勢’를, 소
식은 ‘骨’의 ‘怒’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趣’를 얻어야 한
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趣’는 객관 대상을 감수하는 주체의 심리상태를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뙤약볕을 받으며 수십 리 절벽 길을 힘들게 오르다가 폭포를
마주하고 수년 동안 씻어낼 수 없었던 속세의 떼를 한 번에 말끔하게 씻어다는
것을 통해, 독자는 폭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곧 원굉도의
기분을 통해 폭포수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이며, 이는 또 다른 방식으로 폭포
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44) 용은 바위를 보지 못한다[龍不見石]: 이 말은 陰陽自然變化論 에 있는 말로 전
해지고 있다. 용은 백리 밖의 작은 겨자씨도 볼 수 있지만 바위는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驪龍之目, 見百里纎芥. 龍能變水, 人能變火, 龍不見石, 人不見風, 魚不見
水, 鬼不見地, 羊不見雨, 狗不見雪.”
45) 夸娥나 巨靈:과아는 신의 이름으로 옛날에 愚公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옮길 때 하늘의 상제가 우공의 정성에 감동되어 과아를 내려 보내 산을 옮기게
하였다고 한다.( 列子 , 湯問 ) 거령은 華山을 쪼갠 河神의 이름으로, 옛날에 산
하나가 河水를 막고 있어서 하수가 빙 돌아서 흘렀는데, 하신이 이 산을 둘로 쪼
개어 하수를 곧게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張衡, 西京賦 , 文選 )
46)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0면. “① 至龍游潭. 層峯合沓, 皆多石少土. 蒼杉赤松所
攢聚, 復以蘿薜經緯之. 亘一大石, 劈兩厓成巨峽, 束江流其中而奔注之, 噴沫舂撞.
石爲猛浪所簸磨, 或成窪, 或成堆, 或呀然而成罅, 或坦然而成塲. 高低起伏數百步,
萬千殊狀, 不可以殫形. ② 釋徒尙誕, 指石缺者爲龍抓, 石嵌圓者爲龍蟠, 石中裂谺
谽者爲龍抉穿而行. 民之無知, 咸以爲信, 至此不覺頂禮. 爲士者亦曰: ‘龍不見石,
爲變化所使.’ 余亦目其可駭可愕, 想有神物宅玆, 豈夸娥巨靈能斧斤以成之者? ③
試以詩驗之, 乃書一絶投之淵, 以調戲之. 俄而厓窟中有如烟非烟之氣脉脉而昇, 亂
峰蒼翠之間, 有殷殷之聲, 閃閃之光, 乍作而乍止. 同行者遂褰裳徑渡略彴, 走投于
荒祠中以竢焉. 須臾雨足如銀繩, 飛雹大如鳥卵, 一時驟至. 座中年少輩色沮, 幾失
匙焉. 移晷而後, 宇宙盤駁, 日脚漏於雲際.”
47) 최석기는 ③부분을 인용하여 용유담 주변경관을 유몽인만큼 정밀하게 묘사한 것
은 없다며,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과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에 있는 용유담 묘
사 부분을 소개해 두었다. 최석기(2000b), 162-163면.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 에
있는 용유담 묘사 부분을 한 가지 더 예거해 둔다. 梁大樸, 頭流山日錄 , 靑溪
集 권4, 叢刊 53, 569면. “自此峽束淸潭, 黛蓄膏渟. 平者深黑, 峻者白, 斗折虵
行, 與山升降, 而恠石離列. 若頦頷齦齶者數十里. 雖比之金剛萬瀑, 亦無甚愧焉.”
48) 周易 , 乾卦 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고
하였다.
49)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4면. “其多肉少骨, 乃所以益其高大. 比之文章, 屈原哀,
李斯壯, 賈誼明, 相如富, 子雲玄, 而司馬遷兼之. 浩然高, 應物雅, 摩詰工, 賈島淸,
日休險, 商隱奇, 而杜子美統之.
50) 贈三藏菴上人慈洎序 , 권4, 382-383면. “昔者簡易翁崔立之謂余曰, ‘世稱金剛山
天下第一佳山, 殆不然. 凡爲山或石或土, 雄深渾厚, 往往有奇絶處, 所以貴其奇也.
此山只聚奇絶爲全軆, 東西不過數十百里, 譬猶爲文章, 集古人奇語爲小篇, 眞箇抄
集之山也.’ … 繼自今宜總東西南北之山, 皆統於金剛, 而變山號爲峯名, 如曰寒豀
峰․曰雪嶽峰․曰五 峰․曰太白峰․曰頭流峰․曰淸平峯․曰天摩峯․曰聖居
峯․曰妙香峯可也. 古稱金剛萬二千峯, 安知此許多山不盡入於萬二千之中, 爲高
下遠近之峯, 而今之俗未知省也. 比之文章, 禹貢九州爲一篇, 洪範九疇爲一篇, 南
山詩五十或爲一篇, 醉翁亭二十也爲一篇, 今若分而離之, 夫豈曰文章之奇乎?” 이
러한 주장은 유두류산록 에서 금강산과 비교하며 두류산을 우리나라 第一山이
라 주장한 것과는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유몽인 자신이 금강산에 은거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금강산의 빼어난 점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유두류산록 에서 지리산에 은거하려고 했을 때, 지리산이 금강산에
비하여 더 좋은 산임을 역설한 것과 같은 논리이다. 한편 김창흡(1653~1722)의
東遊小記 에 산수의 우열을 문장에 비유한 것이 보인다. 東遊小記 , 三淵集
권24, 叢刊 165, 496면. “香湖瀟洒可愛, 無愧於牛溪題品, 而亭閣所據, 稍似低微.
若以文章爲比, 則鏡浦爲大家, 而此爲名家, 其猶王孟之於李杜乎.” 이를 안득용은
山水品評의 측면에서 언급한 바 있다. 안득용(2005), 98-101면.
51)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1면. “前登少年臺, 仰瞻天王峯, 高出雲漢, 無雜草木,
只蒼栢聯緣而生. 被氷霜風雨所侵暴, 枯死骨立者十居二三. 望之如頒白老人頭, 殆
不可盡鑷者也. 少年云者, 或稱永郞之流也. 余意天王峯, 長老也, 此峯, 奉承之如少
年, 故名之歟
52) 김종직은 少年臺에서의 少年은 令郞臺와 마찬가지로 令郞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
았다. 金宗直, 遊頭流錄 , 佔畢齋集 , 문집 권2, 442면. “自此至永郞岾, 道極懸
危. … 永郞者, 新羅花郞之魁, 領三千徒, 遨遊山水, 嘗登此峯, 故以名焉. 少年臺,
在峯側, 蒼壁萬尋, 所謂少年, 豈永郞之徒歟.” 소년대와 관련하여 조선전기․중기
의 다른 지리산 유기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53) 다음의 나무 묘사도 의인법을 활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髮․骨․皮․腸․頭’
등을 글자를 사용하여 나무를 인격화시키고 있다. 遊頭流山錄 , 후집 권6, 590
면. “山多烈風, 樹木皆擁腫, 枝柯向山而靡, 苔髮骨樹, 鬖鬖如人被髮而立, 松皮柏
葉之木, 中無腸而榦四披, 枝頭下搶干地.”
54) 유몽인은 贈乾鳳寺僧信誾序 (1622~1623년 작, 후집 권3, 530-531면)에서 학문
과 문장에 있어서 自得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死語(경전의 죽은 언어)와 活語(마
음 속 깨달음의 언어)의 대비를 통해 당시 死語에 골몰하는 학문 태도와 문장
창작 태도를 우의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유몽인은 時文을 따르지 않고 격식에
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당시 그의 문장은 奇文으로 평가받았다.
與尹進士(彬)書 , 권5, 414면. “雖占魁科, 而文不由程式. 當時典文衡者, 皆稱百年來未有之奇文. 而沈守慶․鄭文孚則非笑之, 所以不由時文而得之者.
끝
* 이 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는 ‘2단계 BK21 고려대학교 한국어문학교육연구단’의
지원비를 받았음.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 kongsky@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