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끝나자 나는 숨이 막혀올 만한 일을 당했다. 기습(?)이라 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그녀가 내 뒤로 돌아 와서는 나를 껴안더니 그녀의 일방적 입마춤이 다가왔다. 저돌적이고 격렬하고 그리고 무슨 향기를 담은 듯 아주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무슨 아가씨가 그리 무슨 흥분해요? 그런 말에.....! 그래도 순서는 있지 않아?"
"순서요? 무슨? 사랑에 무슨 순서가 있어요? 좋아하고 또 좋아하면 되는 거죠?"
"그래도 순서는 있는 거야!"
나도 그렇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사랑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는 사랑한 만큼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랑에 순서는 결코 없는 것'이라고.....'
다만 순서가 있다면 계획을 세우는 일이 필요한데 사랑을 계획적으로 한다면 그 얼마나 딱딱한 각본인가? 그로 인하여 나 역시도 사랑에는 격식이나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혼전 순결이라든가 낳아 주신 부모님게 인사를 드리고 허락을 득하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걸 뛰어 넘은 사랑이라는 작은 외침에 그녀는 내게 큰 기쁨을 표현하였다.
나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조금 표현을 아끼고 있지만....
그날은 야간학교에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나는 어설프게 나의 지각을 외면하려 출석을 호명하였다.
"백양미 학생!"
"네!"
"다음은 윤화선, 이윤하 ,고필미, 정미라, 김지연, 박화란, 유새미, 이미홍, 차선화, 홍루아, 나오미, 연현, 이상 열세 명의 여학생들이 다 출석하였고 남학생으로는 나이가 제일 많은 어연탁, 나오근 ,탁주하, 노염밀, 가택근과 가택림 멀리서 야간 근무가 없는 날만 나오는 김민철이 나왔고 별명이 홍두깨인 우민규 등 모두 출석하였다. 이상 스물 한 명의 학생들이 잘 빠지지 않고 출석하니 나도 어엿한 선생이 된 기분이었고 흡족하니 좋았다.
그들 중에 나오미와 나오근은 남매 간이었고 가택근과 가택림은 형제였다.
오늘은 일반 상식으로 통용되는 물리학에 대하여 공부해 볼 생각이었다.
"대기의 평균 기압은 얼마일까요?"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공기의 호흡과 관련하여 그 압력을 묻는 극히 일상적인 이야기였으나 아는 바가 극히 적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대기의 해수면 평균 압력은 1013 밀리바이고 이를 발견한 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의 이름을 얻어 헥토 파스칼이라는 용어를 적용합니다. 그리고 이 평균 대기압은 계절과 바람 및 대기 온도에 따라 달라지며 해수면에서 100미터 올라갈 때마다 1기압씩 낮아집니다. 우리가 아는 높은 산의 높이를 측정하는 원리도 해수면의 기압을 측정하여 얻어지는 것이죠.. 자로 재어 산의 높이를 계산 한다면 쉽지는 않겠죠!"
-"네!"-
또 시시각각 변하는 기압을 항공기 운항에 적용하여 착륙하고자 하는 비행장의 고도를 확인하고 재 설정하여 고도 치를 입럭하고 자동 착륙을 유도 한답니다.
"어느 임의의 측정장치를 액체로 만들어 고도를 측정하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100미터 오를 때마다 측정기의 액체가 1센티미터씩 올라 가지요. 이는 기압이 낮아지므로 물의 부피가 늘어나는 현상을 이용한답니다.
-
'네,"-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지루하다거나 아니면 이런 것도 학문으로 인정해야 하나? 등의 표정이 엿보였다.
그러나 학문에 편파적이고 이기적인 것만 맛들인다면 어찌 오늘날의 화려한 문명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는가?
"여러분! 산이나 계곡에 가서 밥을 지으면 밥이 설익는 경우가 있지요? 이것은 기압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고. 또 하나는 높은 산에서 갑자기 내려오면 귀가 멍해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거예요. 이것 역시 기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랍니다. 그와 반대로 기압이 높거나 물 속에 잠수하여 들어가면 수압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지는 일을 겪게 된답니다, 이것 역시 압력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지요. 그 압력이라는 것의 불안정한 느낌들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늘상 편안하게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요. 그렇죠?"
-"....네!"-
학생들이 시무룩해서인지 오늘따라 그녀 생각에 나도 본연의 자세가 흐트러져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음은 자꾸 이상향의 나라로 이끌려가고 그녀가 내게 남겨준 작은 키스의 흔적,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표적 같은 것이 그동안 학교에 붙였던 취미의 방향이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여러분! 칼로리에 대해서 잘 아시죠? 만약에 여러분 중 특히 여학생들은 나중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게 되면 가족들 영양에 대해 관심이 많이 가게 되겠죠? 그때 영양 섭취를 골고루 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칼로리를 충분히 그리고 너무 과하게 섭취해도 안 되겠죠!"
-"네 ,그렇긴 해요."-
"그럼 여러분 칼로리에 대하여 설명을 해 볼 학생이 있나요?"
그래도 학생들은 기분이 안 나는지 시무룩 하였다.
공부가 잘 안되는 날도 있겠지! 또 여학생이 많은 곳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온다는 그날 인지도.... 그것도 대부분의 학생이 여학생들 앞에서 총각 선생으로서는 입에 올리기 쑥스러운 여자들만 알고 있는 그런 날이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알만한 일을 우선 생각나는 대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오늘 칼로리에 대해서 대답을 잘하는 학생은 여기 샘이 아끼는 빠이롯트 만년필을 드리겠어요!"
방법이 없었다. 필연코 기운을 업시킬 묘책이 필요했다.
-"저요, 저요!"-
"저쪽 제일 손을 빨리 든 우민규 학생 말해 봐요."
"네, 선생님! 라면이요."
"네~에?....! 라면이라구요?
"네! 선생님, 라면 껍데기에 보면 칼로리가 적혀있고 또 나트륨인가 뭔가 너무 먹지마라 등 칼로리에 대해 많이 적혀 있던데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는 목에 힘주어 말하였으나 그 말에 학생들은 모두 웃어댔다. 생각치 못한 엉뚱한 대답이었고 그 때문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 대답 속에서 무엇인가 우러나오는 다른 이미지가 있었다.
그때 저쪽 두번째 줄에 앉은 한 여학생이 웃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미홍 학생이었다.
"이미홍 학생 말해봐요."
"칼로리란 물 1리터를 섭씨 1도 올리는데 필요한 열량을 말합니다."
"네, 좋아요. 하지만 약간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보충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진데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뒷줄에 앉은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어연탁 학생이었다.
"이거 쑥스럽구만! 이 나이에 내가 일어나야 하나?"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유행어를 한마디 붙이고 일어섰다.
"칼로리란? 으~흠! 섭시 4도의 물 1리터를 1도 올리는데 필요한 열량이며 이를 주울이라하고 cal로 표기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군요! 그러면 왜 섭씨 4도이어야 할까요? 물의 빙점은 섭씨 0도인데 어연탁 학생은 왜 그런지 아나요?"
다시 잠잠해졌다. 그때 앞줄에 앉아 있던 양미학생이 작게 입을 열었다.
"샘, 왜그러냐 하면요. 섭시 4도의 물이 분자의 밀도가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에요."
"섭씨 4도의 물은 물맛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요? 덧붙여 말한다면 음식물 특히 야채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도 그 온도에서 가장 신선하답니다.
-아! 그렇군요. 냉장고의 온도를 섭씨 4도로 맞추어 놓은 까닭을요."-
여학생들은 음식물이야기가 나오자 금새 주방 이야기까지 스치고 지나갔다.
"자, 어연탁 학생 이리 나오세요. 이미홍 학생도 설명을 잘 하였지만 당첨은 어연탁 학생인 것 같군요."
나는 빠이롯트 만년필을 높이 들어보인 다음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는 만년필을 받아들고 생각 난 듯 뒤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한참 공부에 열의를 다하고 있는 우민규에게 이 뜻깊은 만년필을 선물할까 합니다!"
-"와~아~아!"-
짝짝짝!
"오늘은 어땠어?"
나는 퇴근하여 집에 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움의 여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나를 유혹하는 맘을 갖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낮에 시장이라는 데를 다녀왔어요. 사람들이 엄청 많데요!"
"근데 뭐 기억에 남을 좋은 기념품이라도 챙겨온 거야?"
나는 그녀의 옷매무시를 눈여겨 보지않고 그냥 흐르는 느낌으로 물어보았다.
"네, 옷을 사왔죠! 근데 여기 옷은 복잡한 거 같으면서 참 단순하데요."
"옷이라는 것이 뭐 다 그런 거 아녀?"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하며 묻기도 하였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야근도 없고 하여 느긋한 기분으로 그녀와 말씨름을 하게 되었다. 직장생활에서의 토요일은 참 좋은 날이었다.
"그야 그렇지만요. 그럼 제가 살던 곳에서의 옷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줄까요?"
"맘대로!"
나는 기성세대가 가정에서 아내에게 하듯 몸을 쇼파에 뉘이며 가장 편안한 자세로 리모콘을 만지며 말을 섞었다. 가끔은 그녀가 미래에서 왔다는 호기심에 말을 이어가고 있는 어설픈 가장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늘그막을 향해가는 늙어가는 중년의 말투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득 머리를 치며 스쳐갔다.
그녀는 나를 위해 그리고 여태껏 한집에 있으면서 자기 몸에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는 남정네에게 환심을 사기라도 하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너무 당연하게 느끼는 노인네 같은 망가짐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아차! 내가 왜 이러지? 내 나이 이제 삼십인데.... 노인네 처럼 변해가는 것 아냐?'
그녀는 밥을 먹었느냐는 말은 없고 입고 있던 검은 옷을 집어 길게 펼쳤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보라색이 옅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어제 입었던 흰빛깔의 옷과 별로 다를바가 없는 색이어서 그랬는지 눈에 쉽게 띄질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에 매우 미안한 마음을 그녀에게 나타내기로 하였다.
그녀가 검정 드레스를 길게 펼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를 만나고 이런 행동은 처음이었다.
아니 내 마음에서는 벌써부터 그녀의 모든 면을 주시하며 날아빠진 규칙이라든가 예전부터 받들어 모시듯 내려오는 유교사상이라든지 어설픈 가정교육이라도 없었다면 그녀는 벌써 나의 2세를 출산 할 때쯤 되었다고 장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절제라는 울타리에 갖혀 나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보다 호흡이 더 가빠졌다.
아주 사소한 감정하나를 추스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변하였다. 그녀를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몹시 흥분하고 설레는 맘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심 나도 내 행동에 대해 놀랐다. 그녀보다 내가 그녀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제와는 다르게 냉냉한 표정이라든가 진지한 표정조차도 나타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어찌보면 그녀도 나처럼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결혼한 사이처럼 느껴지거나 허리를 감싸안거나 해도 당연하고 밋밋한 감정을 지닌 초 동물적인 감각을 갖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다르게 나에게 보여 줄 새삼 놀라만한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라 감정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서 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로 이끌며 안아주기를 간청하는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어떤 유교적 교육이나 높은 이성의 정점에 도달한 초인으로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보라는 듯 내 앞에서 입고 있던 검은 옷을 펼쳤다.
마법의 옷처럼 옷은 여러 겹이었던 것처럼 펼쳐졌고 아주 넓게 창문을 전부 가릴 정도로.... 아주 넓게 펴졌다. 그녀는 그 옷의 한쪽 끝을 편다음 커튼처럼 벽에 둘러쳤다.
"그렇게 큰 거였어?"
그녀는 싱긋이 웃어 보이며 펼쳐진 옷을 보라는 듯 위에서 아래로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안다는 것, 미래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 것 등등 설레었던 맘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는 텔레비젼 수상기의 화면이라든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영화관의 스크린 처럼 움직이는 장면들이 화면처럼 나타났다. 신기해 보이는 놀랄만한 낯선 도심의 풍경이 보였다. 옆에서 조잘대는 텔레비젼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그녀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보셨죠! 어제 하얀 옷도 이렇게 바뀐 것이었답니다."
나는 어제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 하면서 잊혀진 일을 떠올리게 해서야 비로소 그녀가 새 옷을 준비해 주면 하얀 드레스의 출처를 말해주겠다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하얀색은 어떤 옷이야? 처음에 나에게 올 때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말야!"
"네, 그랬었죠! 그 옷이 그 날은 그렇게 변신한 거였어요!"
"참 좋은 세상이네!"
나는 빈정댄 것은 아니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비꼬는 심사로 여길지 몰라 다른 말을 붙였다.
'그렇게 좋은 세상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듣기에 따라서는 그 말도 비비꼬는 차림새로 여길지 모르나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는 가쁜 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결혼을 하려면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야만 하나요?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이면 함께 살면 안 되는 세상인가요?"
"......"
나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도 너를 많이 좋아해! 하지만 때로는 이성이 지배 할 때도 있잖아!'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잠깐 있었을 때 그녀가 무슨 말인가 하기위해 고개를 쳐들다가 그만 둘의 입술이 겹치고 말았다.
뜨거운 혈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여인의 향기가 그동안 가려져 온 사내의 품에서 반향하였다. 절제하기 힘든 절규가 심장을 타고 넘쳐 흘렀다.
그녀가 쳐 놓은 벽면 커튼에서는 음악 분수가 황홀한 음향과 조명과 함께 흘렀다. 주인의 감성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에 맞춰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듯이 흐르는 화면....! 수줍음을 감추려는 황홀감과 쉼없이 흐르는 성난 고요.....
시간은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얼마간 긴 호흡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있던 나는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귓불을 애무하듯 작게 속삮였다.
"미안해! 글구 널 사랑해! 아주 많이 마니...!"
그녀는 아직도 키스의 여운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비록 육체적 사랑이 그 깊이를 채우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한 사내의 진정한 사랑을 얻었다는 표정이었다. 붉게 젖은 입술에서 아직 흔적을 지우지 못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그녀는 내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작게 조근거렸다.
"저도 사랑해요!"
그날로부터 여러 날이 무탈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한 주일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콧물이 흐르고 감기가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환절기에 감기가 찾아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감기약을 하나 사 먹었다. 그런데다가 그날은 회사에서 바쁜 일을 마무리 하느라 저녁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빵과 우유를 급하게 먹고 야간학교로 나갔다.
그런데 야간학교의 교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듯 교실 안은 허전하였다.
'오늘은 휴교인가?'
나는 교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직 시간이 덜된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없어도 냉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고요할 뿐이었다.
직감이라는 것이 있어 교실 안의 열기가 잠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교실 안의 불이 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여운!
나는 놀라서 교실 불을 켜려고 돌아섰다. 그때 학생들이 우르르 밀려들어 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놀란 중에 교실 안의 형광등이 켜졌다. 그러자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작고 아름다운 꽃다발이 교탁 위에 얹혀 있었다.
-"오늘은 선생님 날이에요!"-
'무슨 일이지? 스승의 날도 아니고 내 생일도 아니고....!'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별다른 감이 오질 않았다.
'이녀석들이 공부하기 싫으니 이벤트랍시고 괜히 장난치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 일 년동안 저희를 가르치고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별로 가르친 것도 지도해준 것도 없는데 그들에게는 그동안 얻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들에게서 나누어 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나도 고맙다. 너희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 내게 가르침을 얻게 해준 스승이요, 또한 참다운 벗이니라!"
"어떻게 저희가 선생님을 가르쳐요? 저희가 스승이라뇨?"
나는 대답 대신 다른 말로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내게 좌우명이 하나 있어요."
나는 진지한 어조로 음성을 가다듬었다. 평소 숙어처럼 외우고 나를 각성시키는 단어같은 짧은 것이었지만 그 뜻이 자못 진지한 것이었다. 나는 칠판에 내가 아끼는 한자 숙어를 적으며 설명하였다.
"그 좌우명이라는 것은 '선악이 개오사' 라는 것인데 그 뜻을 풀이하면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나 모두 다 나의 스승이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샘! 저희가 선생님께 선하기도 하고 악하게도 굴었다는 뜻인가요?"
"그것 참 맹랑한 질문 입니다요! 너희가 내게 있어서 잘 지도할 줄 모르는 문와한을 선생님처럼 보이게 만들어준 고마운 면이 있어서 비유한 거에요. 나를 참 스승으로 오늘처럼 반겨 주었으니 말에요."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감사해요!
꾸벅!
-하늘 바보-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