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골 시골즈 10
이야기를 끝낸 러러가 콜라를 들이켜자 잠자코 듣고 있던 나 역시 컵을 들었다. 가득 담긴 콜라가 찰랑인다. 내 마음처럼 흔들렸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너희는 날 위하고 있구나. 찡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콜라를 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렸으나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울 것 같아. 나를 기다리고 위했던 마음이 날 울게 만들 테니까. 마지막 한 모금까지 깔끔하게 넘기고 나서야 감정이 가라앉는다. 울 순 없다. 울고 싶지도 않다. 웃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고 싶지 않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컵을 내려놓자 민형이 닭을 먹다 말고 나를 바라본다. 귀여워. 동그랗게 놀란 눈이 살코기를 문 채 멈춰있다. 그 정도로 세게 내려놨나?
"민형아. 빨리 먹어."
"아...어..."
재촉에 그제야 살코기를 다시 씹기 시작했다. 가끔 어벙할 때가 있다. 가만히 애들을 보고 있다면 의외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지금처럼. 치킨과 콜라가 번갈아 입술을 스친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과 옆에 널린 휴지들. 부모님이 오신다면 뒤로 넘어가실지도 몰라. 특히 주방은 더더욱. 근데 어떻게 되든 좋다. 이 시간이 즐거워서 혼난다 해도 걱정되지 않는다. 살며시 뒤로 넘어간 상체, 기름에 버린 손가락을 슬쩍 들어 평상을 짚었다. 팔로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들면 어두운 비단 위로 콕콕 박힌 반짝임이 보인다. 돈 주고도 못 볼 장관이었다. 멍한 시선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빠르게 떨어진다.
"얘들아. 빨리. 빨리!"
다급한 외침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별똥별. 자연스레 감탄이 터졌다. 아름답다. 지금까지의 미의 기준은 방송에서 나오는 요소뿐이었다. 적어도 서울에선 그랬다. 그러나 더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래골의 풍경이, 기름으로 반짝이는 모두의 입술이, 쏟아지는 별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시간이 가장 아름다웠다. 동혁이 빠르게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를 콕 집는다.
"야야, 빨리 소원 빌어!"
모든 행동은 재빠르게 이뤄졌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간절한 시간이었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비는 건 처음이다. 그래, 처음. 처음이 될 소원.
'동래골 시골즈 모두가 영원히 함께이길.'
별똥별님 부탁해요. 제 소원이 제일 커, 지금처럼 지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영원이란 단어는 비현실적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예외가 있다면 예외 속에 우리가 있길 바랐다. 이 밤이 영원하게 해주세요. 우리의 순간이 영원하게 해주세요. 열아홉의, 이 여름밤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어른이 되기 한 보 직전, 우리는 모두 같은 소원을 빌고 있었다. 소원을 다 빌고도 한동안은 조용했다. 소원을 이야기하면 이뤄지지 않는다는 미신을 찰떡같이 믿으니까.
서로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별똥별님만 알겠지. 우린 영원히 말하지 않을 테니 꼭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길 바랐다. 여덟 명 모두가 또 한 번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본다. 모두 같은 소원을 빌었다는 걸, 까맣게 모른 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먹고 떠드는 사이, 마을은 다시 빛을 되찾았다. 우리 집 역시 전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모두 사실을 외면했다. 빛이 돌아왔다고 말하는 순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 접시 위에 놓인 튀김옷을 먹다 친구들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얘들은 수능을 보지 않는 걸까? 곧 있으면 6월인데. 서울에선 모의고사다, 논술이다, 수시다. 바쁜데, 동래골은 그러지 않았다. 대학이 먼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살고 있다. 얘들은 꿈이 뭘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을까. 미래와 꿈이 궁금해졌다.
"여주야."
"응?"
"손 닦아."
반대편에 앉아있던 제노가 휴지를 건넨다. 아. 손가락. 번들거리는 살갗 위로 휴지를 비볐다. 손을 닦는 순간에도 생각은 계속됐다. 상상은 어느새 커다란 날개를 달아 현실에 다다랐다. 필요를 다한 휴지를 뭉치며 모두에게 물었다. 너희는 꿈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잔뜩 당황한 재민이 지성을 바라본다. 우리 꿈?
"응. 너희 꿈. 너희는 대학 안 가?"
동래골로 내려와서 처음 하는 현실적인 질문. 대한민국의 열아홉, 곧 있으면 수능을 봐야 하는 나이였다. 시험을 치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근데 아마 나는 보지 않을까. 동래골에서 살던 사람도, 농사에 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익숙한 절차를 거쳐 대학에 가겠지. 그렇게 되면 동래골을 떠나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다리를 비관하게 될 테지. 이런 나와는 다른 너희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
"대학은 가야겠지."
민형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앞에 있던 잔 안으로 콜라를 채우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대뜸 재민의 어깨를 툭 친다. 너는? 민형의 질문에 재민 또한 한참을 고민했다. 음. 음. 소리를 내던 그 애가 모르겠다며 얼굴을 감싸자 모두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 올 차례에 자기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끙끙거리던 재민이 얼굴을 다시 보였다. 나는 말이야.
"사실 잘 모르겠어. 지금처럼 부모님 농사를 돕다가 그대로 물려받지 않을까?"
"난 솔직히 대학 가고 싶어."
재민의 말을 인준이 이어받는다. 나는 말이야. 굳이 서울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동래골을 떠나 어디든 살아 보고 싶어.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고 해야 하나? 기름 묻은 입술을 닦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근데 만약 대학을 간다면 서울이랑 가까운 곳이면 좋겠어.
"왜?"
"안여주, 네가 있잖아."
아는 사람 있으면 얼마나 안심되고 좋냐. 무심하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하긴 아는 사람 하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지.
"근데 말이야."
콜라를 홀짝이던 제노가 조심스럽게 끼어든다. 난 동래골에서 벗어나고 싶진 않아. 근데 인준이랑 비슷한 생각이긴 해. 제노의 말에 인준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우린 아직 열아홉이잖아. 하고 싶은 것도, 경험해야 하는 것도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 제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도록 러러가 말을 잇는다. 나는.
"자라고 싶지 않아."
"그건 나도 동감."
러러의 의견 위로 동혁이 힘을 싣는다. 둘의 의견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라고 싶지 않다. 어른이 된다면 동래골을 떠나야 할 상황이 생겨버릴 테니까. 헤어져야 해. 그건 정말 싫다. 상상이라도 한 건지 민형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근데 민형이는 대학을 간다고 했잖아. 서로가 바라는 미래가 다르면 어쩔 수 없단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아쉽다. 아쉬워 죽을 것 같다.
"나는 그냥 우리 다 같은 곳에서 살던가, 같은 대학을 갔으면 좋겠어."
지성이 말문을 연다. 솔직히 우리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잖아. 앞자리가 일에서 이로 바뀐다고 헤어진다는 게 말이나 돼? 제노가 맞는 말이라며 동조했다. 모두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말했다. 애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태어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뭉쳐서 놀았을 테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도 이렇게 헤어지기 싫은데 시간을 같이한 너희는 얼마나 끔찍할까. 동혁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나는 그냥 천천히 생각할래."
답지 않게 진지한 답이다. 즐거웠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이걸 어떻게 풀지? 눈치를 보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린다. 입이 방정이야. 궁금증은 풀렸으나 분위기는 풀릴 줄 몰랐다. 미래를 생각하듯 시선들이 멍하다. 입술을 말며 씹던 중 화살표는 조용히 내게 돌아왔다. 여주, 너는?
"나는."
"응."
"아마 대학은 갈 것 같아. 꿈은..."
내 꿈이 뭐였더라. 꿈. 다리를 다치기 전 꿈은 여행사 가이드였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얽힌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미래를 꿈꿨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앉아있을 땐 멀쩡하지만 걷는 순간 엉망이 된다. 시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내 꿈은 말이야.
"너희랑 같은 대학을 가는 게 꿈이야."
답을 기다리고 있던 민형이 손바닥을 보였다. 판판한 손바닥 위로 재빨리 손을 마주하곤 웃는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손이 화끈거렸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제노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여주야. 어디로 가고 싶어?"
얼마 만에 듣는 소리일까. 다리에 다친 후, 누구도 내 목표를 묻지 않았다. 그 누구도 미래를 얘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리 때문에 막힐 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노의 눈이 내게 향했다. 당연한 질문이 내겐 당연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동래골에선 내가 당연한 게 돼. 그냥 그렇게 돼. 바라던 목표를 말하는 일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한국대."
"와, 거기 진짜 높잖아."
"안여주. 공부 잘했네."
지성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대학 이야기에 관심이 생긴 인준은 턱을 괸 채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모두가 본격적이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민형은 애들을 둘러봤다. 우리가 한국대라...
"근데 나도 점수 안 돼."
"아, 뭐야."
사실이다. 가고 싶다는 거지. 갈 수 있는 실력까진 한참 멀었다. 다리까지 다친 후 반절쯤 포기했다. 대학에도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꿈꾸던 모든 게 망가졌다. 걷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 내려온 동래골. 현실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미묘한 뭔가가 자꾸만 등을 민다.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아주 조금 보이는 것 같은 기분. 재민이가 잔 가득 콜라를 따라주며 중얼거린다. 근데 뭐.
"안 될 건 없지?"
지성이 평상 위로 벌렁 누우며 속시원하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돼. 투덜거리는 말에 러러가 지성의 이마를 가볍게 때린다.
"그냥 네가 공부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정답."
재치 넘치는 답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알게 모르게 한 가지 약속을 마음 깊은 곳에 소중히 새겼다. 동래골 시골즈, 같은 대학 가기. 이뤄진다는 확신은 없으며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뭐 어떨까. 우리 모두 한 가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단 것만 알면 됐어.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휴지를 손 가득 쥔다. 그 애의 움직임을 신호로 모두가 일어나 하나씩 뭔가를 잡았다. 빈 잔을 드는 민형과 남은 음식을 치우는 제노. 러러와 지성은 그릇과 식기류를 치우기 시작했다. 여덟 명이 비워버린 페트병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아. 콜라. 엄마가 보면 놀라겠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 나 또한 애들을 돕기 위해 일어나려는데, 조용하던 인준이 손을 잡아끈다.
"안여주."
몸이 엉거주춤 멈춘다. 어설프게 다시 앉자 인준의 시선이 내게 차분히 향했다.
"스물도 별 건 없을 거야, 그렇지?"
"응."
"대학 그것도 진짜 별 거 아닐 거야. 맞지?"
"응."
착실한 대답에 네가 씩 웃는다. 그러니까.
"쫄지 말라고."
네 어깨가 내 어깨 위로 툭 닿았다. 따뜻한 체온이 흘러들어왔다. 멀리서 민형이 인준을 불렀다. 황인준. 혼자만 노닥거리네. 투덜거림을 들은 그 애가 몸을 일으켜 신발을 구겨 신는다. 아, 간다. 간다고. 잠깐을 못 기다려요. 눌린 신발 뒤축이 앞으로 턱턱 향한다. 불편한 내색 없이 반쯤 가던 네가 돌연 고개를 돌린다. 안여주.
"응?"
"안 올 거야?"
멈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보처럼 눈을 끔벅거리다, 허겁지겁 신발을 신었다. 어, 어... 갈게! 집 안에서 애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아. 이제노. 그거 아니라고! 러러가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행주를 들고나온 지성이 평상 위를 닦는다.
"기름 어떻게 닦아?"
제노의 말에 재민이 답한다.
"퐁퐁으로 닦는 거 아니야?"
애들의 대화를 가득 담으며 천천히 걷는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는 인준을 향해. 즐거운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누가 넘어졌는지 우당탕하는 소리가 울리자 평상을 닦던 지성이 놀라 뒤돌아본다. 동그랗게 토끼눈을 보이며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지성을 보자마자 인준과 동시에 탄식을 뱉었다. 정말이지. 조용할 날이 없어.
*
애들이 모두 돌아가고 부모님이 돌아왔을 때, 방 안에서 조용히 쿠션만 쥐고 있었다. 너무 떨려. 엄마가 놀라시면 어떡해. 발발 떨리는 손이 쿠션을 마구잡이로 뜯고 있다. 손으로 부족해, 물기까지 했다. 곧이어 들릴 호통에 다리까지 달달 떨린다. 한쪽 다리가 시끄럽게 바닥을 두드린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근데, 생각보다 조용했다. 예상했던 상황과는 달리 엄마 아빠의 다정한 대화만 가득하다. 이상하다. 난장판이 된 주방을 모르실 리 없는데. 한 통 가까이 쓴 기름. 기름을 닦겠다며 들이부었던 퐁퐁. 더러워진 행주는 쓰레기통으로, 옮기다 떨어진 탁자 끝은 칠이 벗겨졌다. 모를 수가 없는 변화였다. 조용하니까 더 무서워. 더는 견딜 수 없어 문 가까이에 귀를 대고 부모님의 동태를 살폈다. 잘 안 들려. 안방에 계셔서 잘 들리지도 않잖아. 어떡하지. 나가볼까? 문에 바짝 붙은 채 고민하다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안 혼나면 나야 좋지. 좋게 생각하자. 어쩌면 엄마가 모르실 수도 있잖아? 애들이 나름 잘 치웠나 보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토닥여야 했다. 비겁하지만, 불안해서 잘 수 없을 것 같으니까.
*
여주 부모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여주 친구 동혁이라고 합니다. 집이 난장판이라서 많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요리에 서툴러서 뜻하지 않게 일을 벌였어요. 치운다고 열심히 치웠는데 성에 안 차실 것 같아 죄송합니다. 만약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바로 가서 다시 치우겠습니다. 아. 전학생. 여주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러니까 여주에게는 뭐라고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콜라랑 식용유, 퐁퐁 그리고 행주는 내일 바로 새 걸로 사다 드릴게요. 꾸짖으시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여주랑 놀지 말라는 말은 안 해주셨으면 해요... 저희는 여주랑 노는 게 너무 재밌거든요. 혹시 버릇없게 보였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여주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어요.
추신, 정말로 여주는 잘못 없어요 ㅠㅠ...
*
여주와 인준이 대화하던 사이, 연습장 하나를 쭉 찢은 동혁은 쪽지를 적기 시작했다. 여주 부모님께. 삐뚤삐뚤한 자신의 글씨가 못나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아씨, 더 잘 써야 하는데. 어느새 동혁의 손에 땀이 촉촉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긴장했다. 전학생 부모님에게 드리는 편지라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손이 벌벌 떨리는데 박지성은 조금 더 귀엽게 쓰라며 달달 볶는다. 얄미운 새끼.
"전학생이라고 하면 여주 부모님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
무의식중 적어버린 전학생이라는 단어에 재민이 혀를 찬다. 황급히 줄을 찍 긋자 러러가 이마를 쳤다. 이미 망했어. 망연자실한 어투에 욱한 나머지 그 애를 바라본다. 그럼 네가 써! 그 말에 민형이 바로 볼펜을 뺏는다.
"그럼 내가 쓴다?"
동혁은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난 더는 못 하겠어. 동혁이 열심히 써둔 편지를 차분히 읽던 민형이 볼펜을 든다. 그러니까 여주에게는 뭐라고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살짝 버릇이 없어 보이나. 잠시 고민하던 민형은 그 옆에 점 세 개를 찍는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여주 곧 들어올 것 같아. 빨리 써."
제노의 닦달에 민형의 손이 빨라진다. 퐁퐁도 사드리고 잘못은 다 저희가 했어요. 말과 손이 동시에 나간다. 여주의 걸음 소리가 천천히 들려올수록 괴도 시골즈의 마음이 급해졌다. 망을 보던 지성이 급하게 손을 휘적거린다. 신호를 눈치챈 민형이 가까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다행이다. 신발을 먼저 벗는 인준을 확인한 지성이 안으로 달려와 편지를 쥔다.
"너희 뭐 하고 있어? 누구 넘어지는 소리 들리던데. 괜찮아?"
걱정스러운 여주의 물음에 인준과 그 애를 뺀 모두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럼, 우리 괜찮지. 고무장갑을 낀 재민이 무턱대고 퐁퐁을 잔뜩 뿌린다. 놀란 여주가 재민을 말릴 때, 몸을 뒤로 돌린 지성이 쥐고 있던 쪽지를 펼쳤다. 음, 이건 좀 심심하다. 이런 것도 있어야지. 볼펜을 쥐자마자 추신이라는 단어가 달렸다. 정말로 여주는 잘못 없어요.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다. 이건 귀염성이 좀 떨어지네. 여주를 힐끔거리다 우는 표정을 추가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지성이 남몰래 웃으며 눈치를 여러 번 보다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안방으로 보이는 문을 찾아 틈 안으로 쪽지를 밀어 넣었다. 안전하게 쏙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거창한 임무라도 한 듯 긴장된 숨을 내쉰다.
"오늘도."
"응?"
지성의 말에 여주가 뒤돈다. 지성아, 뭐라구?
"괴도 시골즈가 한 건 했지."
지성이 여주를 향해 눈을 찡긋거린다. 치킨 이야기라고 단단히 오해한 여주는 어이가 없단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재민이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 여주에게 등을 얻어맞았다. 퐁퐁 이렇게 많이 쓰면 어떡해! 난데없이 맞은 재민을 본 제노가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럴 줄 알았다.
*
즐거웠던 주말 후, 그토록 기다렸던 월요일. 생각할수록 놀랍다. 누가 월요일을 바랄 수 있겠어. 닫힌 문을 힘차게 열며 생각했다. 월요일이 왜 즐겁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동래골로 와 너희와 함께 지내보라고. 모를 수 없을 이유가 존재한다. 먼저 도착한 제노가 당차게 열리는 문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든다.
"여주야. 오늘은 일찍 왔네."
인사에 답하기 전, 앞문이 거세게 열린다. 반동으로 인해 다시 반쯤 닫히는 문 사이로 동혁이 들어온다.
"야야, 전학생. 어제 치킨 먹었더니 얼굴이 부었네?"
참을 수 없는 얄미움에 손이 먼저 마중 나간다. 반듯한 이마를 탁 때리자 엄살이 뒤따른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비명을 내지른다. 둘을 번갈아 보던 제노의 어깨가 으쓱거린다. 엄살은. 절뚝이며 느리게 움직이자, 붉어진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나와 함께 발을 맞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전학생, 너 손 매운 거 알아? 다소 퉁명스러운 투정에 웃음이 터진다. 아니. 몰라.
"근데 있지.”
"형님 도착했다."
"쟤는 아침마다 헛소리하네."
준비한 얘기를 하기 위해 벌어졌던 입술이 민망해진다. 앞으로 가방을 멘 재민이 손을 휘적거리며 짐짓 거만하게 군다.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자마자 진심 어린 당부가 이어진다.
"전학생, 받아주면 안 돼. 진짜 형님인 줄 안다니까?"
까불거리는 어투. 재민이에게 한 대 맞겠구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동혁의 머리가 앞으로 쏠린다. 수박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나재민! 울분이 가득한 외침에 제노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린다. 오늘도 시작이네. 난장판이 따로 없다. 시장도 여기보단 조용할 거야. 그나저나 이거 말해야 하는데. 기대와 긴장이 요란하게 얽혀 설렘을 만들어냈다. 좋아하겠지?
"또 싸우냐?"
"아침부터 잘한다."
정신없는 시간, 인준과 민형이 동시에 등장했다. 다들 일찍 왔네. 감흥 없는 눈들이 한쪽에서 싸우는 동혁과 재민을 바라본다. 이제 러러와 지성이만 오면 된다. 모두 모이는 순간 말해야겠다. 다 같이 있을 때 말하는 게 분명 더 재밌을 테니까.
"근데 여주야, 아까 하려는 말 뭐였어?"
뒤늦게 생각이 난 듯한 제노가 내게 고개를 숙인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됐다며 고개를 돌리자 풀 죽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진다. 표정에서 그게 다 보였다. 나 지금 서운해요. 아, 여주야... 급기야 팔을 잡곤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여주야. 말 안 해줄 거야? 나 궁금하면 수업 못 듣는 병에 걸렸어. 눈꼬리가 처지며 짙은 눈썹 위로 갈망이 매달렸다. 하지만 안 돼. 애절한 모습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러러와 지성이 시끄럽게 교실 안으로 등장한다.
"게임 하자니까?"
"지면 오이 먹이려는 거잖아!"
"지금 우리 집 오이 무시해?"
"널 무시하는 거야."
진절머리가 난단 듯 몸을 부르르 떤다. 책상 위로 가방을 올려두곤 도와달란 듯 두 눈을 깜빡거린다. 여주야. 러러 좀 말려봐. 자꾸 나한테 자기 반찬 먹이려는 거 있지?
"박지성 너 그러기 있어? 여주한테 이르는 거 반칙이야.”
의리 없는 놈. 러러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팽 돌아간다. 토라진 뒤통수를 보던 지성이 억울한 마음을 토해냈다. 여주야. 방금 봤어? 의리가 없다고? 한숨이 연달아 터진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아침. 여전히 투닥거리는 동혁과 재민에게 시선을 한 번, 삐친 러러와 지성에게 한 번, 문제집을 펴는 민형에게 한 번, 끈질기게 내 팔을 흔드는 제노에게 한 번,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필통을 꺼내는 인준에게 마지막 시선. 고개가 정신없이 돌아간다. 어지러워.
“나 할 말 있는데 다들 이렇게 정신없이 있을 거야, 정말?”
참지 못하고 터진 앙칼진 목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멎는다. 기름칠이 덜 된 철문처럼 빳빳하게 굳은 목들이 내게 향했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오거나 쥐고 있던 볼펜을 놓곤 몸을 완전히 돌린다. 날 가운데 두고 둥글게 모였다. 이제야 들을 준비가 된 애들을 보곤 목을 가다듬었다. 음. 그러니까.
"내가 사실....우리 이야기 라디오 사연으로 보냈거든?"
"헐!“
"근데 그거 오늘 방송해!"
"진짜?”
"응. 그러니까 같이 듣자. 그게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안 나와도 들어야지!"
재민이 과한 리액션을 남발한다. 당연히 들어야 한다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렸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집에서 가져온 소형 라디오를 주섬주섬 꺼냈다. 여덟 개의 시선이 라디오 위로 꽂힌다.
“근데 그게 점심 먹고 해.”
라디오 모서리를 매만지던 동혁이 탄식을 내뱉는다. 점심까지 어떻게 기다려.
"눈치 있게 시간 돌리자."
"되겠냐?"
"말이 되는 소리 좀."
진심이 담긴 제노의 말 뒤로 비난이 쏟아진다. 민형과 지성이 동시에 고개를 내젓는다. 정확히 몇 시에 시작하는데?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던 러러가 시간을 물었다. 두 시야. 답과 당시에 지성의 주먹이 꽉 말린다.
"두 시면 체육인데 체육 하지 말고 라디오 듣는 거, 콜?"
"콜."
이미 결론이 난듯한 지성의 의견을 모두가 찬성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힐끗 본 인준이 짧게 답한다. 그래. 날도 더운데 뭐하러 나가. 모두의 눈 안으로 별이 박힌다. 더는 혼자만의 설렘이 아니었다. 여덟 명의 눈이 라디오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아까와는 다르게 초조하다. 앞으로의 모든 날이 불행해도 좋으니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했다. 기대로 점철된 반, 앞문이 예고 없이 열린다. 뭔가가 걸린 듯 덜그럭거리며 열린 문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쏠렸다.
"...왜 그렇게들 봐?"
동래골 분교의 마지막 등장인물. 여러 개의 시선이 한 번에 꽂히자 당황한 듯 발이 주춤한다. 쌤! 인준의 목소리가 반갑게 올라간다.
"응?”
"우리 두 시에 체육 안 하고 라디오 들으면 안 돼요?"
"상관은 없는데. 근데 너희 이번 체육에 하,“
"아, 쌤!"
동혁이 다급하게 그의 말문을 막는다. 잔뜩 심각해진 그 애의 표정을 보던 선생님이 그러라며, 웃는다. 이상해. 다 잘 풀렸는데 뭔가 좀 찝찝하다. 선생님의 말씀을 일부러 막은 느낌이잖아. 원래 체육 시간에 뭘 하려고 했지? 아무래도 수상하다. 일부러라는 게 티가 나 오래 고민할 것 없이 몸을 돌려 제노에게 속닥거렸다.
"제노야. 체육 시간에 뭐 하려고 했어?"
눈을 빠르게 깜빡거린 제노는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긴 속눈썹을 나풀거렸다.
"아니."
생각 외로 단호한 대답을 듣자마자 얼떨결에 수긍했다.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 있겠구나, 란 생각이 짧게 지나간다. 여주가 궁금증을 해결하던 시각, 둘을 힐끔거리던 선생님의 입술이 열린다. 둘에게 닿지 않도록 뻐끔거렸다.
'너희 체육 시간에 하고 싶었던 게임 하겠다고 했잖아?‘
영문을 모르겠단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돌아오는 체육 시간엔 마음대로 놀게 해달라며 억지로 떼를 써 얻어낸 자유였다. 애들을 이길 수 없어 어렵게 허락했건만, 그걸 포기하고 라디오를 듣겠단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라디오는 왜 듣지? 의문이 가득한 눈을 알아챈 민형이 입가를 가린 채 소곤거린다.
'라디오 듣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말을 끝내자마자 여주가 앞을 바로 본다. 아슬아슬했다. 지성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여주와 상황을 숨기려는 아이들. 선생님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얘네들 봐라. 화분 하나 없는 반 안으로 꽃내음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이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선생님의 시선이 마음껏 설레하는 여주에게 닿는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그럼 우리 수업 시작할까?"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 이 말썽꾼들아.
*
"와. 진짜 힘들었다."
"동감."
민형과 제노가 동시에 책상 위로 늘어지며 투덜거린다. 오지 않는 두 시를 기다리느라 모두가 진이 빠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 기다리는 만큼 고역스러웠다. 거짓말 한번 보태지 않고 정말 잠시 기절했다 일어나고 싶었다. 일 분이 한 시간 같았다. 점심시간이 와도 먹는 둥 마는 둥, 밥 한술 뜨고 시계를 보고 다시 먹고 또 보고.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끝낸 후에야 겨우겨우 두 시가 왔다. 오 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선생님의 질문이 쏟아진다.
"너희 왜 그렇게 두 시를 기다린 거야?"
"쌤 궁금하세요?"
"너희 같으면 안 궁금해?"
답을 알려달라며 눈을 찌푸리는 선생님의 성화에 넣어뒀던 라디오를 책상 위로 올렸다.
"선생님. 저희 라디오 들으려구요."
"라디오?"
"네."
흐흐, 웃자 못산단 듯 허탈하게 웃으신다. 내가 또 너희한테 넘어갔구나. 퍽 속상한 어투처럼 들렸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의 입꼬리 위로 웃음꽃이 달랑거린다. 어느덧 시간은 두 시 오 분.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채널을 맞추자 모두가 의자를 끌고 책상 주변으로 모여앉았다. 이럴 땐 한마음이다.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 또한 의자 하나를 끌어 근처에 조용히 앉으셨다. 긴장되는 순간. 재생 버튼을 누르고 두 손을 모았다. 제발 당첨되게 해주세요. 제발요. 하나님, 별똥별님. 제 운을 여기다 몽땅 쏟아도 좋으니 제발 당첨만 부탁드릴게요. 끝을 모르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진행자의 명랑한 목소리가 교실 안으로 퍼진다. 두 시의 데이트입니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오늘의 라디오. 점심 이후 슬슬 몰려올 잠을 깔끔하게 깨운다. 명쾌하고 활기차다.
"...나 떨려서 못 듣겠어."
그에 반해 바짝 긴장한 목소리가 튄다. 어깨까지 바들바들 떨린다. 아랫배가 꼬여 등허리가 굽자 재민이 어깨를 토닥거렸다. 괜찮아. 여주야.
"당첨 안 되면 어떡하지?"
"괜찮아."
"난 안 괜찮을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민형이 얄미울 정도로, 괜찮지 않다. 한숨 섞인 목소리를 들은 러러까지 덩달아 긴장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까맣게 타는 속을 모를 라디오는 흐름을 따라 이어졌다. 네. 오늘은 엔시리의 도영 씨를 모셨는데요. 어제는 엔시리의 재현 씨가 오셨잖아요. 같은 그룹이 번갈아서 나오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우선 이번 타이틀인 종이비행기, 듣고 오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곡이 흘러나온다.
"와, 나 미치겠네!"
잠시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동혁이 반을 빙빙 돈다. 정신없다며 앉으란 인준의 말에도 노래가 끝날 때까지 돌기 바빴다. 노래 좋네. 영혼 없이 중얼거린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긴장으로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감정 없이 뱉는 기계적인 말에 인준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안여주. 긴장 좀 풀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맘대로 안 돼..."
늦지 않게 돌아온 진행자의 목소리, 동혁이 재빨리 착석한다. 모두의 귀가 다시 쫑긋, 라디오로 향했다.
도영 씨, 오늘의 사연을 읽어봐야겠죠. 저번에 사은품을 드린다고 했잖아요. 그게 뭔지는 다들 알고 계실 테니까 말하지 않을게요. 그러면 대망의 사연, 사실 이 사연을 보자마자 이건 꼭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피디님한테 적극적으로 어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연을 보내주신 당첨자님, 제 노고를 꼭 알아주셔야 해요. 자, 도영 씨. 도영 씨가 한 번 읽어주시겠어요?
축축해진 손을 바지 위로 쓱쓱 문지른다. 제발 내 거여라. 제발 내 사연이길. 어느새 모두가 두 손을 포갠 채 라디오를 바라봤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디오 속 도영이 웃는다. 아, 이 사연 정말이지. 제가 잠깐 코멘트 좀 해도 될까요?
"아...미치겠네. 빨리 말해주지."
제노가 표정을 구기며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클인다. 작은 소리에도 민형이 입술 위로 손가락을 붙였다. 조용히 해봐. 다시 이어지는 도영의 말에 모두가 집중했다.
제가 잠깐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행복하네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당첨자분께 선물 하나 드리고 싶은데. 개인적으로요. 괜찮을까요? 아, 괜찮다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준비할 깜짝 선물도 기대하시면서 항상 행복하게 웃으시길 바랄게요.
사연 들어가겠습니다.
동래골 시골즈
제겐 아주 특별한 일곱 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조금 아픈 저를 정말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랍니다. 어디가 아픈지는 비밀로 할게요. 그걸 전국적으로 알리고 싶진 않거든요. 하여튼 아픈 제가 강원도의 어느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동래골이라고 하는, 아주 깊고 깊은 산골 마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 제 친구들은 차별 없이 대해줘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저희가 무슨 일들을 했는지 아세요? 축구를 하고 계곡에 가고 폭죽을 터트렸답니다. 상쾌한 시골 공기와 함께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경험하신 적 있으세요? 저는 있어요. 또 우리는 자전거를 이용해요. 아, 저 경운기도 타봤어요. 제가 직접 타는 건 아니지만 친구들이 항상 저를 태워주고 데려다줘요. 잊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선물해주고 있어요.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제가 전학을 오지 않았다면, 제 미래는 아마 처참했을 거란 생각을 해요. 지금까지 저는 제가 아픈 게 너무 싫었어요. 끔찍했고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좋아요. 아픈 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나를 대해주는 친구들이 좋아요. 친구들이랑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요. 친구들이 제게 해줬던 것처럼요. 그러니까 제발 당첨되게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나긋한 목소리가 사연을 읽었다. 그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모두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일그러졌다, 끝내 웃었다. 알 수 없는 표정에 괜스레 초조하다. 혹시 자기들 얘기를 라디오에 넣어서 그럴까. 싫을 수도 있잖아. 생각이 짧았다. 입술을 씹으며 눈치를 보는 사이, 내 사연이 막을 내렸다. 조금 가라앉은 도영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이 친구들, 그러니까 동래골 시골즈 친구들 다들 듣고 계세요? 당첨 축하드려요! 사은품은 놀이공원 표인 거 다들 알고 계실까요? 축하드립니다. 같이 갈 제 특별 선물도 꼭 기대해주세요.
쾌활한 목소리를 끝으로 라디오가 끊어졌으나 전과는 달리 쥐죽은 듯 조용하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또한 다리를 꼰 채 생각에 잠겨 계셨다. 괜한 짓을 한 걸까. 스스로를 탓하며 라디오만 만지작거리던 중, 동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나이스! 당첨이다. 전학생, 우리 당첨이야!”
두 주먹이 요란하게 흔들리자 민형의 입꼬리가 들썩거린다. 라디오까지 덥석 잡아 손을 흔들어댔다. 여주야, 우리 당첨이야. 옆에선 지성과 러러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야. 우리 서울 가! 눈 깜짝할 새 바뀐 분위기를 타지 못해 눈만 끔뻑거리자, 제노가 등을 쿡 찌르며 나직이 부른다. 여주야.
"응?"
"동래골에 와줘서 고마워."
"...어..."
"그리고 말이야.“
"...응?"
손목을 잡아 하늘 높이 팔을 들어 올린다. 얼떨결에 같이 하늘을 나는 순간.
"놀이공원에 초대해줘서 더 고마워!"
누구라 할 것 없이 일어나 교과서를 던지고 교실 안을 뛰어다닌다. 우리 서울 간다. 우리도 서울 가! 야, 씨. 무려 놀이공원이야! 미친다. 상황을 지켜보시던 선생님 또한 웃으신다. 다들 신나겠네. 진심이 담긴 짧은 말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심장 부근을 꾹 누르던 인준이 책상 위로 엎어지며 믿기지 않는단 듯 중얼거렸다. 와, 진짜 가냐. 우리 진짜 서울 가? 애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쏟아진다.
"안여주. 우리 진짜 서울 가?"
잔뜩 애가 타는 눈들로 뜨겁게 응시한다. 한여름의 태양 같은 시선. 답을 해야 할 시간이다. 제노의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응! 우리 서울 가!"
"야호!"
모두가 만세를 불렀다.
"우리 서울 가면 뭐 입고 가냐."
"아무거나 입어."
즐거운 핀잔이 오고 간다. 걱정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고 없는 선물을 품 가득 안고 기뻐 웃으며 어쩔 줄 몰라 서로의 어깨 위로 몸을 붙였다.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는 미소 위로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다들 앉아. 수업해야지. 잠시 멈춘 행동, 곧이어 야유가 이어진다. 쌤, 이렇게 기쁜 날에 그러시면 안 되죠. 민형과 지성이 말도 안 된다며 팔로 엑스를 만든다.
"쌤. 우리 서울 가요! 서울요!"
러러의 우렁찬 목청에 다시 시끌벅적해진다. 쉽게 가라앉지 않을 불꽃이 핀다. 다가올 설렘을 온몸 가득 누리는 아이들을 새기고 또 새겼다. 교탁 위로 몸을 기댄 선생님 역시 입꼬리 위로 달이 떴다.
"여주야."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민형이 옆으로 바짝 붙는다. 왜?
"우리 앞으로도 계속 친구 하는 거지?"
알쏭달쏭.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무슨 의미일까? 방방 뛰던 동혁이 턱에 걸려 바닥으로 넘어진다. 맹렬한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진짜 아프겠다. 시선이 흩어지자 옅은 웃음이 흘렀다. 여주야. 자연스레 고개가 다시 네게 향했다.
"응."
"앞으로도 우리랑 놀아줄 거지?"
"당연하지!"
"다행이다."
긴 손가락 하나가 한쪽 볼을 콕 찌른다. 언젠가의 내가 재민이에게 했던 것처럼.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둘의 입가에 미소가 곱게 핀다.
"근데 그건 왜?"
"아직 너한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이 남았거든."
동래골은 더 많은 것들을 숨기고 있어. 민형이 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기울인다. 그걸 다 보여주려면 시간이 꽤 걸려. 여주야. 그러니까 우리 오래, 아주 오래 친구 하기로 해.
우리의 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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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들이 라디오를 듣다 표정 변화가 있는 건, 여주의 아픔을 온전히 다 알아버려서 그렇답니다. 여주가 안 좋은 생각을 했다는 거에 대해서 안타깝고, 여주의 아픔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그걸 여주 앞에서 티낸다는 건 여주를 더 슬프게 만든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놀이공원 가는 것에 신나만 합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아픔을 보인 거니까, 애들이 할 일은 기뻐하는 것 뿐이니까요. 그래서 그렇답니다! 애들은 이제 더욱 더 여주를 이해하게 됐을 겁니다! ㅎㅎ
+ 여주 다리는 붙어있고 감각도 있어요. 다만 다리 뼈가 박살 난 거랍니다ㅜㅜ 무릎 아래부터 발목까지... 그래서 잘 걷질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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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씨... 눈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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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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