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살이
박말이(2005. 4. 5.)
얼마만에 가져보는 한가한 시간인가
코끝에 살랑대는 풀 냄새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장다리 곱게 핀 밭둑길을 내려와 보니 자신도 모르게 발이 멈추고 얼마 동안 서 있었든지 새 한마리가 포르릉 하고 머리 위로 날아 오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미운 첩년 머리 끄댕이 잡아 뜯 듯 쑥을 아둑 아둑 뜯어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줄 다름질로 집으로 돌아 왔다
집안에 들어 서자 말자 책을 보시든 친정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돋보기 넘으로 저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얘야 나는 저것이 미워 못 보겠다"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아버지 곁에 두고 간 이제 갓 돌지난 아이를 쳐다 본 다음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다. "완전히 좋아 졌다는 것이 저 모양이니 그 전엔 어떠하였는지? 네가 올때까지 저러고 있다" 칭얼 칭얼 울고 있는 이제 갓 돌지난 내 아이를 가리키며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었다.
"그리고 네 시 아버지 그 영감탱이 아주 나쁜 영감탱이 진작 살림이라도 내어 보낼 것이지 저런 아이를 데리고 시집실이 시키며 살고 있단 말이가?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노" 나는 아버지 께서 저의 시집살이를 반이라도 알아 주는 동지애를 느끼며 목이 메여 몇초를 쉰 다음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소중한 자식이 듯 저 아이도 저의 자식이기에 가슴 아프고 측원할 따름입니다"하고 말 하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첫째 아이를 성에 차도록 않아 주지도 젓 한 번 마음 놓고 먹여 보지도 못하고 무지한 눈치만 받게 만든 어미로서의 안타까움이 설움으로 북바쳐 그냥 불효를 지지른다는 생각을 못한채 아버지의 눈물이 서러운 저의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나의 목메인 눈물을 보신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어셨다.
장마가 몇 달을 계속하여 보리가 낫가리에서 혹은 밭에서 다 썩어 흉년이 들었든 윤 4월이 겹친 그 해 맏동서의 다섯째 막내 아들은 3월에 나는 11월에 아이를 낳았다. 나의 아이가 태어 난지 한 달 쯤 되었을까! 저녁 부터 자정까지 심하게 우는 것이었다.그리하여 내 아이의 이름은 울뱅이가 되고 시 아버지는 울뱅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랫채에서 젓먹이는 아이를 시아버지는 따라 내려와 외초리로 때렸다. 돌도 안 지난 아인데도 외초리 자국에 피가 몇인 것에 나는 무척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무슨 죄인처럼 지냈다. 하지만 가슴은 터칠 드시 아팠다
업고 일하면 등에서 불편하다고 아이는 칭얼그렸다
그러면 시 아버지는 아이를 내려 놓으라고 야단치고 내려 놓으면 운다고 야단치고 아이를 봐 준다고 한 손으로 들고 다니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믿을까! 시아버지를 모함하는 나쁜 며느리가 될까!싶어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이런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나의 일상이 되어갔다 맏동서의 막내는 왕자처럼 받들었다 맏동서의 막내는 특히 자고 일어나면 벽에 머리를 부딫히면서 울었다 벌렁 드러누워 버둥대고 악을 쓰기도 했다. 그러면 시 아버지는 나보고 맏동서 불러 오라고 야단치고 어찌 할 줄 몰라 하며 쩔쩔매는 것이 었다 맏동서의 막내는 시 아버지가 땅에 내려 놓지를 않을 정도로 사랑했다. 시 아버지가 사랑했어 맏동서 아이를 부르는 애칭은 학거나 학상 학상 학거나였다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랬다 할아버지로서 애정이 넘쳐 강물 흐르듯 했다.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려는데 업고 있는 아이를 내려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작은 머슴을 불려 아이를 연장을 두는 방에다 가두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꾸중물을 비우려고 마당에 나와 보니 어른들은 한가하게 마당에서 휴식을 취하고 시아버지는 담배을 피우고 맏동서는 막내 둥이를 재우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가두워 놓은 헛 방문을 열었다. 바지도 입지 않은 아이는 낮 날이 시퍼런 위에 앉혀 있었다 그 모습들이 얼마나 가상한지 내 가슴속에서 슬픈 안개가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그리고 편두염이 생겼다 침을 삼킬 때 마다 잊지 말라고 편두염이 콕 콕 찔러댔다 그렇게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일들이 수없이 일어 나고 있었다.
그 해 여름 시 아버지가 모닥 불을 훨훨 피어 놓았다.
나는 늦은 저녁 밥을 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때 시아버지가 작은 머슴을 불러 내 아이를 모닥 불에 던져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차마 머슴 아이도 모닥불에 던지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내 새끼라면 업하 죽이겠다만 평윤아 그 새끼 모닥불에 던져 버려라"고 하는 그 소리가 크게 부엌까지 쩌령거렸다. 그 말은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 날 밤 나는 아이를 안고 사립문을 나와 작은 돌 위에 앉아 있었다. 돌도 풀도 잠들어 정적이 흘러 고요한 밤 멀리서 들려 오는 파도 소리가 내 가슴을 치는 양 내 가슴이 팔딱거렸다.
배를 타려 갔든 남편이 돌아 왔었다
그 날 밤 나는 남편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이를 모닥불에 던지라고 한다고 일렀다. 뒷 날 아침에 남편은 아버지께 돈을 달라고 티를 뜯었다 "야이 개자석아" 소리쳤다. "내가 개 자석이라서 새끼를 모닥불에 던지라고 했소"하고 남편이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시아버지와 남편 둘다 아이처럼 느껴졌다. 그 날 부터 시아버지의 화살은 나와 나의 아이에게로 떨어 졌다 그 후 부터 지금까지 남편에겐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는 다른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단골로 다니는 인삼장사 할머니는 식사 때 시 아버지가 내 아이를 야단치고 미워해도 눈섭하나 까닥하지 않는 며느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빨래 방망이로 뒷 통수를 치고 경찰서로 뛰어 들어 징역 살이를 하더라도 이 무지한 시집살이를 마감하고 싶었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 배적삼 새 베치마 주름이 다 빠지고 얼굴이 멍게처럼 된 것은 6개월 동안 아이를 업고 밥먹고 일한 탓이었다 그 어느 날 밤 지네가 방문을 타고 내려와 내 머리를 꽉 깨물어 버린 적도 있었어 얼굴이 비틀어지게 부워 올라도 아무도 <식구 열두명> 모르는 것이 었다
맏 동서는 시 아버지 영전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지만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나를 못살게 굴든 생각만 났다 이제 그 억울한 미움도 끝이구나 생각하면서 내가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쩩끔 나왔다. 이것이 내가 모질게 살아 온 시집살이 4년 간의 혹독한 공부였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신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고생하며 사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가 친정 아버지가 알게 된 것이 었다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한 동네 사람들인데도 그렇게 혹독한 사람들인 줄을 몰랐든 것이 었다. 나의 부모님은 딸 하나 잘 못 외운죄로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했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불효 중에 불효 였다 날이 가고 내가 늙어 갈 수록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 특히 마음 고생 시킨 그 죄가 내 가슴에 남아 날마다 맴도는 것이다
2023.12.13.
이 글도 오래된 글이라서 그렇지만 읽어 주셨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말 피눈물로 견딘 세월이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행전 선생님~~^^
그 때 그 시절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허다 했을 겁니다~~^^이해 못하실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눈시울 시큰한 글밭에 머뭅니다.
오늘도 평안하소서~!^^*~
고맙습니다~~청송 선생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다보니 제가 더 분합니다.
몰지각해서 그랬겠지요. 그래도 그렇지ᆢ
마치 오늘날 정치인들의 증오감정 같습니다.
어려우시겠지만, 이제 잊으소서ᆢ
참 많은 위로가 됩니다^^정암 선생님~~^^
내가 이제 아이가 되어 가나 봅니다^^
많은 이해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