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3주)
하루하루, 한결같이
창18:9~15; 롬5:1~8; 마9:35~10:8
지난 주간에 수도원에서 닷새를 머물다 왔습니다. 우리 살림교회 여러분들 덕분이었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무는 동안 우리 교우들과 우리 살림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적한 곳에 와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하신 분들이 바로 살림교회와 우리 교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주 집단상담, 오전반, 저녁반을 끝내면서 들었던 생각도, 이런 장을 마련해준 우리 교회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또 향심기도 모임을 줌으로 일주일에 두 번 모이고 있는데, 줌으로 하다보니 전국적인 모임이 되었습니다. 모이는 인원수에 상관없이, 이런 장을 마련해 준 교회가 참 고맙습니다.
이번에도 수도원에 가서 전 수도원장이셨던 이수철 프린치스코 신부님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80세를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어 요즘도 12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말씀 묵상하고 강론 준비하고, 새벽4시 50분에 시작되는 아침기도부터 미사와 하루 일곱 번의 전례기도에 다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꾸준히도 사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을 30년 이상 하셨다니, 참 한결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좌우명이고, 당신 묘비에 새겨넣고 싶은 글이라고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라는 자작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한 대목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이 불러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을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여러 연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2연만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꾸준함, 이 한결같음은 중심 잡혀 있다는 표지입니다.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없지요.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인데, 그 중심인 그리스도로 향해 가려는 “노력”이 바로 “시간표대로 드리는 기도”(전례기도)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삽니다, 라는 말을 수없이 하셨습니다. 그냥 수긍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내려오셨을 때, 남아 있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의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고 쩔쩔 맸었잖아요. 나중에 그들은 예수님께 “왜 우리는 귀신을 쫒아내지 못했습니까?” 묻지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뭐였습니까?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쫒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쫒아낼 수 없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이 내적인 힘, 내적인 능력이 없는 걸까요? 저는 중심을 향해 들어가려는 노력, 즉 기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드리는 기도가 없는 거지요. 모르겠어요,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허락해 주시옵소서, 축복해 주시옵소서, 감정에 복받쳐서 뭘 달라는 요구는 많은데, 정작 하나님의 마음이 뭔지, 중심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얼마나 했을까요? 지난 주일에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셨던 “나 하나님을 알기를 바란다”라고 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꾸준함” “한결같음”이 참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난 주일에 보았던 호세아의 말씀 속에,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헷세드)이지 제사가 아니다”라고 했던 말씀도 떠오릅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뭡니까? 이것이 바로 한결같음, 신실함, 충실함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분이 좋으니 기분이 나쁘나, 꾸준한 거예요. 하나님은 헷세드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신부님의 다른 시에 이런 글귀도 있었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진정 살 줄 아는 거죠. 그렇다고 그분들의 삶이 어려움 전혀 없이 여유만만, 희희낙락 한 건 아닙습니다. 그분이 들려주는 수도원 생활은 그야말로 우리와 똑같은 환난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독립해서 수도원을 꾸려야 하느라 먹고 사는 문제는 늘 따라 붙지요. 공동체 생활, 그야말로 난제 중에 난제지요. 그런데, 살 줄 아니까, 사는 법을 아니까, 그런 어려움과 환난 중에도,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요.
물론, 우리가 수도자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무엇이 중한지,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하고, 반복과 지루함을 수련의 도구로 삼고, 한결같이 꾸준하게 중심을 향해가고, 그 결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모으는 거지요. 그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고를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누구를 통해 듣습니까? 그게 조금 묘합니다. 18장 1절을 보면,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이야기에서는 찾아온 사람들은 “웬 사람 셋”, 혹은 “손님”으로 표기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환대하여,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대접을 하지요. 그러다 오늘 우리가 읽은 9절 이하에서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고를 할 때는 다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 있다가, 웬 세 사람이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을 보지요. 아브람은 그들을 자기 장막으로 모시고, 우리가 보기엔 좀 이상하리만치 지극정성으로 손님을 맞아하지요. 그들에게 절을 하고 물을 가져다 발을 씻기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해서 대접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식사를 하는 내내 시중을 듭니다.
보통 셈족의 유목민들은 손님 환대를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사막이라는 거친 환경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서로의 생존을 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야기는 문자적으로는 유목민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을 접대한 단순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체 의미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매우 의미심장하게 바뀌어집니다. 유목민들에게 흔히 있는 손님 접대가 그 깊이에서는 하나님을 받아들인 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을 주님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 세 분은 삼위의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세기에 정교회 이콘 작가인 안드레이 류블료프가 그린 이콘이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아 있는 그림인데, 삼위일체 이콘(1411년)으로 아주 유명하지요.
물론 이 이야기가 사람들을 환대하라는 교훈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요.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13:2) 그러니까 이 말씀을 손님 접대를 잘 하라는 교훈으로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깊은 근본적인 의미는 결국 자신의 삶에 정성을 들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자신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을 소홀함 없이 살아내는 것이지요. 이것이 손님을 환대하고 주님을 환대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사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루하루 산 거지요. 그의 삶이 평탄하고 순조로운 삶이 아니었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아들 약속)을 믿고” 하루하루 한결같이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거목이 되고 바다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산이 되어,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 뭡니까? 중심을 잡기 위해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는 겁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구습, 이미 규정된 자기를 떠나, 자기 고유의 삶을 살려는 출발입니다. 보통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자기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고, 하루하루 산 것이지요. 그 중에 일면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 환대입니다. 손님 환대에, 주님 환대에 정성을 기울인 것은 결국은 자신의 삶에 정성을 기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환대를 받은 손님들은 식사 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찾더니 그녀에게 아주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줍니다. 내년 이맘 때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나 있을 것이라는 전갈입니다. 이 말에 사라는 웃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었지요. 웃기는 소리 말라는 웃음이었지요. 그러나 나중에 사라는 진짜 웃음을 웃습니다. 진짜 웃음을 웃는 삶,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고, 진짜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하나님이 소위 축복해 주셔서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신 이야기로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소원하던 아들을 얻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하나님을 잘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제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온전한 전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으로 상징화되는, 온전한 자기를 실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욕망을 부추기는 자기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숨어서 일하시는, 아니 온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오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각자 자기들이 맞았던 거칠고 예상할 수 없던 하루하루, 도저히 자존감을 세울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주어진 약속”을 잊지 않고,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갔고,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추상적인 얘기처럼 들릴 수 있겠는데, 나의 하루하루가 어떤가, 나의 순간순간이 어떤가를 보면 우리의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온갖 문제들, 앞이 안보이는 현안들, 실타래 엉키듯 엉켜버린 것 같은 복잡한 삶의 문제들을 앞에 두고, 우리는 한 방에 뭔가 해결을 보려는 환상에 젖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사 이런 식이지요. 그러니까 생각으로 만리장성을 쌓고,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 비디오를 찍어댑니다. 드 멜로가 말한대로,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주 대단한 연출가입니다. 온갖 복잡한 극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고 비극적 결말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로또 한 방을 상상하지요. 그런데 이런 삶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삶인지, 우리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서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에 두고, 오롯이 그것을 지향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가 원하는대로, 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중심을 잡는 문제요, 자기 삶의 온전한 실현입니다. 참된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소위 좋은 신앙인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참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그렇게 한 평생을 하루같이 중심을 향해 달려온 것입니다. 삶에서 우선순위를 분명히 한 것이지요.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 일흔 다섯이고 아들을 얻은 때가 백세고 그가 죽은 나이가 백 일흔 다섯이니까, 백년을 한결같이 하루하루 중심을 향해 나갔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뭡니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삶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시고,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뭘 가르치셨나요? 하나님을, 곧 사는 법을 가르치신 것지요. 하늘나라의 복음, 즉 우리가 본디 어떤 사람들인가, 진짜 현실은 무엇인가를 선포하신 것이구요, 실제적으로 약한 이들의 온갖 질병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며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제자들에게 이 일을 하라고 맡겨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며 파송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하며, 귀신을 쫒아내어라..”
저는 오늘 이 말씀이 멀리 가지말고 너 자신부터 살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너의 자녀부터 살려라 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옛날엔 세 끼 밥만 먹여주면 저절로 큰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참 자식의 문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공부 잘하는 게 최고니까, 그러다가 아이들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아이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문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당황하기도 하고, 화냈다 얼렀다, 열 받다 걱정되다 정말 난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는데, “스플랑크니조마이” 창자가 끊어지는 거지요. 정말 창자가 끊어집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일은 우리의 중심을 잡고 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중심이 잡혀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데, 그래도 중심을 잡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묵묵히 감당해 내면서, 삶을 희망 가운데 살아가는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 대한 믿음이 있구나”, 자녀가 이것을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부모는 조건을 걸고, 조건에 따라 나를 대하지 않고, 정말 조건 없이 사랑하는구나, 내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구나” 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련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사는 법을 부모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삶에 기운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말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지요. 그야말로 사는 법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겁니다.
이것은 완벽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그런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의 중심이 아닐까요?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고 온갖 질병과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오늘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선은 자신에게요,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말입니다.
이런 능력이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중심을 잡으려는 한결같은 마음! 하나님 그분의 또 다른 이름이 헷세드, 한결같음, 신실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