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목록/김기화-
물이 부족할 때마다 그녀는
얼음창고에서 결빙의 얼음조각을 꺼내 먹었어
누구의 폐부를 하나씩 꺼내 먹었던 걸까
간간 심해의 뒤척임인 듯 쿨럭이면
꽁꽁 동결된 채 명멸하던 바다를 보았어
배고픈 식솔들의 오장육부 서랍을 열면
달그락달그락 뼈마디 소리가 났어
가파른 파도에 빈 가슴 해갈하고 나서
물비린내를 굽다가 바다가 된 여자
썰물 진 포구에 묻힌 시간 위에서
물빛 망부석으로 남아 파랑을 치던 거야
목이 마를 때마다 그녀는 짠물이 곡기였어
먹잇감을 물고 파고처럼 일어선 기슭에서
패인 동공을 씻고 차지한 좌판 한 뼘은
냉골 길바닥을 파닥이던 궁핍의 심장이야
갈퀴손으로 차린 최상의 밥상
울금울금 하얀 포말처럼 내장까지 쏟아주었어
꾸륵꾸륵 배가 고플 때마다 그녀는
얼음창고에서 냉동비늘을 꺼내 해동을 했어
살점 뜯긴 누구의 널브러진 육신이었던 걸까
쟁여 놓은 냉동목록을 퍼 나르다가
그녀의 뱃속이 속속들이 다 바다였던 거야
-바다로 가는 나무/황구하-
남장사 상수리 큰 그늘
넘치고 넘쳐나 물소리에 닿는다
지난겨울 끝자락 한쪽 팔
폭설에 내어주고도
뻗어나가는 두터운 그늘에 들면
옹이를 열어젖힌
굽은 등걸 속 둥근 물결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깊숙이 감춰두었던 수의(水衣)까지
가느다란 햇살의 손을 빌려
골짜기로 골짜기로 보내주었다
눈치 빠른 딱따구리도
따신 햇볕 날개에 퍼 담아
상수리나무 속으로 들앉는다
거기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참다람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애기벌레들까지
연방 들락거리며 물소리를 퍼 나른다
저토록 두껍고 딱딱한 외피를 두르고
태초의 물너울을 키우고 있다니
천 년 목숨 지켜낸 남장사
상수리나무숲 바다로 가는 물결을 본다
-바다의 아코디언/김명인-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 소릴 긁어대던 아코디언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무지의 음자리까지
천천히, 천천히 파도 소리가 씻어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여름바다/김기택-
낮은 곳 후미진 곳까지 남김없이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잔잔해진다. 꺼끌꺼끌하게 와 닿은 바위와 돌멩이들이 매끈
매끈해질 때까지 그 오랜 날들을 나는 끊이없이 찰랑거려야
만 한다.
한적한 하오의 햇볕 아래 나는 하릴없이 누워 있다. 파리
를 쫒는 게으른 소처럼 해변에서 깔깔거리는 여자들 흰 잔등
을 작은 파도로 찰싹찰싹 밀어내며. 수면 아래로는 푸른 위
장을 지나가는 수백만 마리 은빛 고기떼. 푸른 이두박근 삼
두박근 사이 정교한 결을 따라 날렵하게 새어나오는 넙치떼
와 가자미떼.
고기들이 떼지어 이동하는 산란기가 가까워오면 나는 지
구가 흔들리도록 거대한 몸을 뒤채이고 싶어지리라, 물 밖으
로 나오기만 하면 생선처럼 펄럭펄럭 뛰는 굵은 파도를 해변
넘어 아스팔트 가득 쏟아내고 싶어지리라. 조금만 몸을 흔들
어도 배를 삼키고 섬을 덮치며 일어날 것 같은 파도는 아직
잠에 빠져 있다. 잠속의 바다, 아아, 그 목구멍에 아직도 걸
려 있는 착한 심청이 만 아니어도 흰 거품 게워내는 뜨거운
몸의 일부를 지구 밖으로 쏟아내고야 말았으리라.
지금 , 한류와 난류가 뒤엉켜 도는 허리 어디쯤에서 나는
낮꿈을 꾸며 졸고 있다. 꿈틀 거리는 내 꿈의 저편 끝에서 물
보라를 일으키며 요동치다 잠기는 거대한 꼬리 하나. 며칠
후에 들이닥칠 천둥 소리의 떨림이, 순간, 전해온다.비늘 몇
개만 보석처럼 반짝이며 떠가는 여름 하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조지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人生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亡靈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이중섭의 제주 앞바다/이숙이-
반짝이는 물결 만큼 배가 고팠다
백사장 모래가 하얗게 바래도록 배가 고팠다
햇볕이고 물이고 흰 모래고 무엇이든 넘쳐훌렀다
배가 고팠다
알몸으로 모래밭을 뒹구는 두 아들
잠자리 만큼 가는 몸통에 갈비뼈가 불거져 있었다
푹 꺼진 아들의 뱃가죽 위로
쌀밥 같은 흰 모래를 고봉으로 퍼 담는다
밤이면 눈이 부신 알전구 때문에 배가 고프고
낮이면 모래가,
물결이,
담뱃갑에서 빼낸 은박지가,
하얗게 눈이 부셔 앞이 안 보이도록 배가 고팠다
예술도 사랑도 꿈도 현실도
중섭의 것은 모두 배가 고팠다
-환승을 기다리는 바다/이광석-
밀양역에서 서울행 ktx 환승차편을 기다린다
나를 부려놓고 간 ‘무궁화’는 서울서 하행열차로 몸을 바
꾸어 돌아올 것이다
돌아갈 길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길 종점에 언
제나 바다가 있었다 오늘 내가 닻을 내릴 환승역도 바다다
마산바다는 역사의 환승역이다 시대가 아파할 때마다
크게 반응했다 지금 그 바다는 와병중이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물“도 매립되고 낭만도 꿈도 돝섬 밖으로 유
배됐다
마산의 바다는 날개가 없다 날개없이 날 수 있는 바다는
없다 누가 바다를 황량한 폐선으로 만들었는가
사람들이 내다버린 바다, 섬보다 더 멀리 있는 낯선 섬,
바다는 제 자리를 내 달라고 한다
당신의 잔등에 파릇파릇 ‘시그리’ 불빛이 빛나고 희망이
거센 입질을 할 때 우리는 보리라
환승을 넘어 항해일지를 다시 쓰는 당신의 청정한 출항을
-바다 변주곡/이광석-
바다는 제 혼자 다니는 길이 있다
고급 세단 같은 상어가 다니는 길을 비켜
토종 전어 고등어떼 마실 다니는 작은 골목길을 달빛으로 간다
세월의 파편이 된 낡은 기억들 하나 둘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낯선 길 앞에 바다는 지금 아프다
보아라 물 어디에도 내가 적실 그리움은 없다
각혈하듯 시의 꽃을 피우던 가포 겨울바다도
조개껍데기처럼 개펄에 엎드려 있다
바다가 마지막 종점인 사람들에겐 바다는 더 이상
내 줄 어깨가 없다 세상의 집들이 어둠에 업혀
잠들 때 밤새 뒤척이던 바다는 제가 숨겨놓은
옛길 하나 불러낸다 그 길섶에 문신처럼 박힌 묵은 통증,
등지느러미 날 세운 쪽빛 너울로 환급 받고 싶다
-물고기 뱃속에는 바다가 없다/권혁희-
칼도마 위에서 민어가 눈깔을 굴리며
칠테면 쳐봐! 빳빳한 비늘로 감싼 꼬리를
휘영청 접어 올린다, 반달이 뜬다
나는 식칼로 물고기 등판을 힘껏 내리친다
토막 난 민어가 선홍색 아가미를 헐떡거리며
남은 숨을 고른다, 달의 둘레가 툭 끊어진다
잘못 건드린 물고기 뱃속에서 밀물이 터져 나오고
부엌은 파도가 뒤집히는 요나의 바다가 된다
그렇다, 남편의 희망은 내가 밥 잘 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밥 냄새가 나고
가스불 켜는 소리, 컵에 가득 물을 따르는 소리......
물고기 뱃속에 들어있는 바다처럼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남편의 밥이 가득 들어있다
밥이 소명이다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소리........
수돗물을 펑펑 틀어 먹은 그릇을 닦을 때
하복부에 세제 거품 같이 끓어오르는
거북한 팽만감을 느낀다, 어제도 그랬다
바닥부터 차오르는 바다로 가스레인지의 불이 꺼지고
실내등이 이내 점멸한다
캄캄한 고래 뱃속, 소리가 되지 않는 외마디 소리들이
부력을 못이긴 플라스틱 그릇들과 함께 천정 높이까지 떠오른다
복도의 맨 끝 집,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기 일쑤인
그 집의 고요를 누가 의심할까
그리하여 나는 칼집 많은 도마 위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던,
뱃속의 바다를 다 쏟아낸 민어처럼
36도 5부의 등판에서 비로소 남편의 밥을 내려놓는다
개수대에 씻어둔, 밥이 되기는 다 틀린 쌀톨들이
투항하듯 하얗게 흩어져 물속에 잠긴다
-바다의 등/차주일-
바다가 돌연 해류를 바꿔 마음에 이을 때가 있다
굳은 맹세 끝에 조바꿈표 같은 숨 몰아쉬듯
바다도 조를 바꿔 파도를 모는 밤이 있다. 그런 날은
네 숨소린 바다를 닮았지, 라고 말하던 해녀가
바다에 그림자를 지우며 물질한 날이다
젊은 지아비를 파도의 쉼표로 떠나보내고
급살맞을 년이란 주홍글씨를 낙인한 채 살아온 그녀
어둡고 슬픈 A단조로 평생을 살아야한다
음자리표를 내리긋는 동작으로 무잠이질한다
그녀가 호흡을 끊고 견디는 시간은 생계를 잇는 일이어서
자맥질로 펼쳐진 빈 악보에는
자식들의 숟가락질이 음표처럼 걸린다
바닷물로 그림자를 다 지운 그녀가 뭍을 밟으면
내일의 생계는 늘 오늘에 남는다
찌그러진 부레처럼 잠든 그의 등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등가죽이 파도 형상으로 출렁거린다
-바다 건너 등불/서규정-
다만 붉은 등불이 황혼으로 가라앉고 있을 뿐
한참이나 내일을 꼼지락꼼지락 해보았다
욕구이고 갈증이 고인 곰소 항에서
엮이고 설 킨 발가락을
일렁이는 물그림자와 함께 통째로 젓을 담갔다
발갛게 벗겨진 젓갈을 한 옹동이 퍼
서해에서 동쪽으로
그렇지 양산이나 통도사 그쯤에서
발가락젓갈 사라고 외치리
사요, 사
뽀글뽀글 숨을 쉬는 이 젓갈과 맞 바꿔줘요
화엄이나 금강
점차 점점 부드럽게 사그라지고 곰삭아가는 젓갈
바다 건너 등불처럼
名利 밖으로 한 발짝 딱 한 발짝만 미리 내다 건 내 마음
-바다여 당신은/이해인-
내가 목 놓아 울고 싶은 건
가슴을 뒤흔들고 가 버린
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다
한 밤을 보채고도 끊이지 않는
목쉰 바람소리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어둠을 울다
빛을 잃어 버린
사랑의 어둠
죄스럽게 비좁은 나의 가슴을
커다란 웃음으로 용서하는 바다여
저 안개 덮인 산에서 어둠을 걷
오늘도 나에게 노래를 다오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서투른 이방인
언젠가는 모두가 쓸쓸히 부서져 갈
한 잎 외로운 혼임을
바다여 당신은 알고 있는가
영원한 메아리처럼 맑은 여운
어느 피안 끝에선가
종이 울고 있다
어제와 오늘 사이를 가로 누워
한번도 말이 없는 묵묵한 바다여
잊어서는 아니될
하나의 노래를 내게 다오
당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면
나는 이미 슬픔을 잊은
행복한 작은 배
이글거리는 태양을
화산 같은 파도를
기다리는 내 가슴에
불지르는 바다여
폭풍을 뚫고 가게 해 다오
돛폭이 찢기워도 떠나게 해 다오
-바다의 경전/최동호-
그리움도 사라진 먼 바다에
고래는 보이지 않는
작은 점이다.
검푸른 올챙이 물결 새끼처럼 기르던 고래가
일만 마리 파도의 떼를 몰고
한순간 나타나
거대한 물줄기 일제히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고
삼각 꼬리로 빙하의 계곡을 내리쳐
만년설이 무너진 바다를 들끓어 오르게 하는
경이를 본 적이 있다. 내 마음은 먼 바다
빙하의 전설 담긴 씨알의 눈동자
아직 펼쳐 보지 못한 바다의 경전이다.
-바다가 있는 지하실/강신애-
그 바다는 흐르지 않아
회벽을 붙들고 나지막이 철썩일 뿐
퀴퀴한 동굴 속에 바다라니!
처음엔 수건인 줄 알았지
만지면 손에 푸른곰팡이가 묻어나는
바다는
어둠과 거미줄, 망가진 집기들과
먼지에 찌든 지하실의 햇빛 목마름이 만들어낸 몽상일까
바다를 고정하고 있는 수평선에서
지난여름 백사장 가설무대
색색의 리본을
뭉게뭉게 뽑아내던 마술사의 끝없는 입이 떠올랐지
아니, 바다가 토해낸 거품 속 리본이 마술사의 혀를 끌고나왔던가
무언가를 정밀히 반추하기엔
진한 하수구 냄새의 지하실
이곳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바다를
나는 네 귀퉁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지퍼를 열면
왈칵, 쏟아지는
이 신성한 허무를 어떻게 걸어놓을까
수평선이 허물어져
내 거실의 너무 많은 지하실에 스며
바다는 흔적도 없어질 테니
-바다 건너온 夢遊挑源圖/전순영-
어두컴컴한 유리집 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夢遊挑源圖......, 우유빛 안개
피어오르는 오솔길이 구불구불 펼쳐진다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산 봉우
리 봉우리가 치옷아 길은 갈수록 깎아지른 절벽 우뚝우뚝 솟아오른 바위 밑
으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물소리
하늘을 가린 숲속에 서 있고 앉아 있고 누워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 바위
위에 또 바위 구름처럼 솟아 있는... 하늘에는 구름 산에는 안개 자욱이 서려
있고 대나무 숲 속에 초가집 한 채 사립문은 열려 있고 호수에는 조각배 한
척 실바람 타고 노는데, 복사꽃밭에는 햇볕이 가득 분홍 꽃망울 천 송이 만
송이 노랑나비 떼춤을 춘다
1447년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고 꿈 밖에서 다시 꿈을 꾸었던 무릉도원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흐르는 물에 마음 씻으며 군주보다 위에
있던 무릉도원 어찌하여 남의 땅에 끌려가 열두 대문 금고 속에 갇힌
나 지금 무릉도원에 들었노라 큰대자로 누웠노라 아홈 밤 구말리 되거라
아홉 밤 구억 년 되거라 나 안갈란다 안 갈란다 바늘방석 그 땅으로 안 갈
란다 누가 이 몸을 구해줄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夢遊挑源圖
-바다 은퇴식/김명이-
지는 해가 기관실을 더듬는다
수십 년 치부책에 마지막 물길을 적는 해
미처 못다 한 말 푸념처럼 던져보는 마지막 뱃길
갑판 위 어망과 도구
몽키 스패너 기름 냄새까지도 무어라 작별인사를 건넨다
자식만이 피붙이는 아니었다
나를 우걱우걱 갉아먹던
고래 심줄보다 질긴 사십년, 나는 바다를 끼고 살았다
파도와 물새울음이
궂은 날 수시로 내 몸에서 새어 나왔다
수없이 써 펼쳤던 뱃길
바다는 따라오며 다 지워버렸다
한 장 백지만 펼쳐놓고 읽어보라는 결벽증
이른 봄날 물안개로
온몸을 비벼대던 저 바다
장문의 편지를 다 받아 읽은 바다가 보낸
광어 우럭 도다리 노래미,
그 답장을 찾아 읽으며
여기까지 왔다
갈매기가 운다
지는 해를 따라가던 바다도 눈시울을 붉힌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