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누가복음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누가복음 1:1-4)
서 론 : 누가복음을 복음서의 제 3권으로 제 3복음서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서두에서 밝힌 대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ꡑ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책으로 예수님의 태어나심에서부터 그의 부활 승천하시기까지의 배경과 사역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 복음을 어느 특정인에게 보내는 한 서신의 형태로 썼는데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누가복음을 배우면서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운 바의 더 확실함을 아는데 큰 유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누가라고 하는 사람과 본서의 기록 연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물론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 생존하셨을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인물도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복음서에 한번도 나온 일이 없습니다. 골4:1절 말씀을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가의 신분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출신으로 바울의 전도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고 하는 분명한 사실과 그 당시 명성이 많은 사람과 친분이 두터운 이름 있는 인사였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의사였으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가 철두철미한 인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사랑을 받았다는 말에서 그의 원만한 성품과 그의 존경할 만한 인격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 복음에 관한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간절한 의욕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여러 사도들과 그리고 예수님과 상면하고 대화하고 병 고침을 받고 주님의 여러 기사 이적을 친히 목격하고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과 친히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생존시의 행적을 자세히 들었고 또 몇몇 기록된 문서에 의하여 예수님의 여러 가지 행하신 일에 대하여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이 기록된 연도에 대하여는 많은 주장과 이에 대한 이견들이 있으나 주후 60년으로 주후 65년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2. 누가복음의 특징
이 책은 여러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색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 책은 목격자가 아닌 사람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이 복음서를 썼고 이 기록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의의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이 책은 다른 증인들의 토대 위에서 연구하여 결론적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사도 바울이 수집해 놓은 자료를 많이 인용했을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도 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이 모든 사실을 친히 자기가 확인하고 더 낳은 자료를 얻고자 많은 사람들을 접촉했을 것입니다.
③ 이 책은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본 책입니다. 근원이란 일의 근본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추적을 말합니다.
④ 이 책은 역사 서로서의 특징을 살린 책입니다. 누가는 이 책을 수신할 대상자에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쓴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차례대로 그리고 순서대로 정연하게 기록한 것으로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자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부각시킨 책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누가복음을 ‘인자이신 그리스도’란 주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복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때 복음은 중대한 오류에 빠지게 되며 이런 변질된 복음을 성경에서는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고 있으며 이단으로 낙인찍혀 왔습니다(요일4:2-3).
⑥ 이 책은 한 특정인에게 보낸 서신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누가는 이 복음서를 받을 대상이 데오빌로란 사람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누가와 이 데오빌로는 오랜 교제를 해 온 친밀한 사이로 보여지지만 누가가 그를 각하란 말로 상당한 존경을 표한 것은 그가 상당한 신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데로빌로란 인물 역시 이방인이며 그의 이름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라고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누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연구는 참으로 감탄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베뢰아 교회 교인들로부터 이 누가와 같은 깊은 연구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도 이 누가복음을 누가와 같은 자세로 연구한다면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ꡑ 되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세례요한의 잉태
(누가복음 1:5-25)
서 론 : 누가는 그의 복음 서두에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도의 나심을 기록하기 전에 그의 선구자로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의 잉태된 사실부터 자세히 추적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출생은 이미 이사야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마2:1-3).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원래가 잉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이사야로 예언된 선지 요한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이 태어난 역사적 배경
세례요한은 헤롯왕때에 태어났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헤롯왕은 헤롯 왕조의 우두머리가 되는 헤롯 1세를 말합니다. 주전74년경에 출생한 자로 예수님의 출생 전후 유대지방을 다스려온 왕입니다. 그는 주전 40년에 로마원로원에 의해 유대 왕으로 지명 받았고 그에게 주어진 군사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 상당한 영토를 자기 지배아래 두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사가랴입니다. 사가랴란 이름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으로 아론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이란 이름은 하나님이란 뜻과 약속하다의 두 가지 뜻이 합쳐진 이름으로 ‘하나님이 약속하다’란 뜻입니다. 이 두 부부는 다 함께 제사장 계열의 자손으로 복된 가정을 이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2. 사가랴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
사가랴은 마침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24반열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대상24:1-19). 스가랴은 여덟 번째 반열에 속해 있었는데 이 반열은 아비아의 반열입니다(대상24:10). 각 반열은 한해에 두 번씩 성소에서 봉사했는데 그 기간은 한 주간씩이었습니다. 분향하고 있는 사가랴 앞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때 사가랴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사가랴 앞에 선 주의 사자는 가브리엘 천사였습니다. 가브리엘은 놀라면 무서워하는 사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때가 있다는 10 \ 누가복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세례요한이 때가 됨에 그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가브리엘을 사가랴에게 보내셔서 요한의 탄생을 예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너희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말했습니다. 사가랴는 아들을 낳기 위해 오랜 동안 기도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례요한의 잉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나 약속의 성취는 어느 누구인가의 간구를 통해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70년으로 약속했지만 이를 위해 예레미아는 눈물의 회개와 간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을 잘 보살피시고 인도하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 주시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는 반드시 그와 같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우리의 간구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겔36:37).
그리고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몇 가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1) 요한은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말라기로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전 생애는 통하여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3)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이란 말은 엘리야란 말이 아닙니다. 다만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상징적인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그런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말이 많은 경우 잘못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말라기서를 보아야 합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에서 아비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자녀란 그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세례로 하나님의 무한히 자비하신 긍휼하심이 그 자녀들에게 내리시게 하고 그의 백성들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 론 : 또한 세례요한의 위대한 사역의 결론으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으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의 짧은 생애 동안에 이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그의 아내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잉태케 하셨습니다.
(3) 은혜를 받은 여인
(누가복음 1:26-38)
서 론 : 엘리사벳의 잉태소식을 사가랴에게 전해준 천사 가브리엘이 다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 동리에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기적 중에 기적이요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태어나신다고 하는 일은 이때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예언은 많았지만 그가 친히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그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신비에 싸였던 메사야의 탄생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분을 잉태한 여자야말로 인류의 여성 중 가장 축복 받은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에게 한 첫 말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하려는 은혜의 소식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1)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이 사실이 마리아에게 왜 은혜가 되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써 택정을 입은 여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야의 후손의 태어나심에 대하여 이미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마리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로 예언케 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라”고 하신 처녀가 바로 이 마리아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역사이래 그 모든 여인 중에서 이 같은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어머니로 선택받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마리아는 정결하고 깨끗한 처녀였습니다. 그는 사내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혼한 남자가 있었지만 그의 순결함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깨끗한 그릇을 은혜의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2:20-21).
(3)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말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놀라 12 \ 누가복음
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자기로 잉태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했을 때 그런 분이야말로 메시야가 아니시면 누구 시겠는가? 마리아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의 가슴은 설렘과 흥분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4) 마리아는 자신의 불가사의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는 이론은 인간의 경험으로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한 말을 믿고 자신의 불신적인 말을 당장에 포기했습니다.
(5) 마리아는 메시야를 잉태하는 영광을 바라보며 그가 당해야할 모든 고난을 각오했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밴다고 하는 일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주변에서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자신이 아기를 잉태할 사실을 숨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아기를 해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운명은 어찌 될 것입니까? 마리아는 돌로 쳐죽임을 당할 것입니다(신22:23-24). 아마 마리아는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하는 각오로 이 일을 받아드렸을 것입니다(벧전4:14-16).
2. 성령이 네게 임하시면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가브리엘이 말해주었습니다. 말씀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남녀의 결합에 의해 비로소 어머니 배에 잉태됨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존재가 태초로부터 계셨으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마리아도 육신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의 모친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으로 보실 때에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피조물이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구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결 론 : 마리아는 가브리엘에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드려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리이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 마리아의 찬양
(누가복음 1 : 29 - 56)
서 론 : 하나님의 섭리는 기묘하게도 친족이 되는 여인들에게 하나에게는 구세주의 어머니로 하나는 구주의 선구자의 어머니로 택정함을 받아 서로 기뻐하고 서로 위로받게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웠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하다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라고 전해준 말을 듣게되자 이루어진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자신의 일도 알려 서로 의논하려는 조급한 마음으로 그의 발길을 산중에 있는 유대 한 동래로 달려갔습니다. 마리아가 그의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입니다.
1. 엘리사벳의 환영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그의 문안을 들었을 때 그는 갑자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들었을 때 자기가 수태한 아이가 그의 배에서 뛰노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을 것이라고 말한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대로 배 안에 있는 아이에게 성령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눅1:15).
(1)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주신 복도 크지만 마리아에게 내리신 축복이야 말로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네 태중의 아니도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태중의 아이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로 태어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일은 말할 수 없는 축복된 일이었습니다(빌2:6-11).
(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온다”고 했습니다. “내 주”라고 말한 것은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를 가리킨 호칭입니다. 이 같은 엘리사벳의 인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가 엘리사벳에게 “내 주”가 되심을 고백한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내 주라고 말한 마리아이 아이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4)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사가랴나 엘리사벳의 믿음에 비하여 굉장한 차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내 아내도 아이 많으니이다”고 말하므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말하므로 전적인 믿음과 순종의 자세를 보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는 것으로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하지만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믿음 14 \ 누가복음
다만 주시는 말씀으로 믿는 믿음을 귀히 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요20:29).
(5)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메시야이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2. 마리아의 찬양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고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1) 마리아는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고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만세란 영원한 복으로서 그의 이 같은 말은 그대로 적중하여 오늘날 마리아와 같이 복된 여성으로 일컬음을 받는 여인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의 잉태로 말미암아 얻은 현세적인 복은 없었습니다. 시므은이 예언한 것처럼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했듯이 칼이 그의 마음을 찌르는 생애를 살았으나 그가 하늘에서 받을 영광의 상급과 후세에 그의 이름에게 돌려진 축복은 만세에 없었습니다(눅2:35).
(2) 마리아는 “ 하신 이가 이를 행하셨다”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구주가 잉태된 일은 능하신 이의 크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마리아는 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여러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처럼 찬양했습니다. ① 그 이름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대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이 같은 은혜가 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③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④ 마리아는 결론적인 찬양으로 그의 백성들을 도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조상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찬양이란 말은 ‘메가루노’로 크게 한다,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이처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이처럼 마리아에게 메시야의 어머니가 된 일에 대하여 그를 보고 복된 여자라고 말하지만 그보다 더 놀랍고 기이한 복이 있으니 그것은 내 이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과 우리의 기쁨이 항상 마리아와 같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5) 세례요한의 태어남
(누가복음 1 : 57 - 80)
서 론 :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됨이 없습니다. 엘리사벳으로 인태케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로 기한이 차매 언약하신 말씀대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들을 낳은 지 팔일이 되는 날이면 할례를 받게 되어 있으므로 할례를 받으러와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했습니다. 벙어리가 된 사가랴가 이 자리에 따라오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친족이 와서 친권자의 입장에서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행을 따라간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제동을 걸게 되자 이 문제로 과연 이 아이의 이름을 어떤 이름으로 지을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다시 부친께 데리고 가서 물어보았더니 서판에 “요한”이란 이름을 썼습니다. 이런 장면을 바라본 친족들은 모두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1. 사가랴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
사가랴가 서판에 요한이란 이름을 씀과 동시에 벙어리가 되었던 사가랴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곧 풀려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의 찬송의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사가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돌보셨다고 했습니다. 그 돌아보신 일은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그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일입니다. 이 찬송에 나오는 구원의 뿔은 구주이신 예수이시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이 같은 일은 예로부터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의 중심적인 예언은 메시야의 태어나심과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구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3) 구주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을 위하심이라고 찬송했습니다. 예수의 태어나심은 우리의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원수란 사망이며 이 사망권세를 쥐고 있었던 사단입니다(히2:11-16). 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이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로 이들은 종국에 이 땅에 재앙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계19:11-21).
(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던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언약하신 거룩한 언약은 이와 같습니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7-18).
(5)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메시야가 오시면 그는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실 것이라고 찬송했습니다.
2. 세례요한에 대한 사가랴의 예언
세례요한은 태어남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태어남은 반드시 메시야의 태어나심과 연결시킬 때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그의 선구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명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1) 세례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가랴는자기 아들 요한을 가슴에 품고 “이 아이여”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앞으로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지극히 높은 분이신 그리스도의 최후 증거자요 그의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는 선지자 중에 가장 복된 선지자인 것은 메시야를 친히 자기 눈으로 바라보면서 증거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2) 선지자로서의 세례요한의 두 가지 사명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주 앞에 가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 같은 사명 때문에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가 요단에서 베푼 세례, 자기 제자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여 따라가게 한 일, 그의 순교는 모두 이 같은 그의 사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세례는 바로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는 죄 사함의 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라고 한 말은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이에게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마3:11).
결 론 :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대단히 칭찬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마11:11). 그의 위대함은 그가 그의 전 생애를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의 사명을 본 받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면 그가 받을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6)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누가복음 2 : 1 - 11)
서 론 :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류의 구속사임을 믿는 것입니다. 창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밝혀진 메시야의 언약이 있은 이래, 인간의 역사는 이메시야 탄생과 메시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로 계속되어온 사실에 대하여 인류의 역사와 성경은 일치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게된 일이라든가 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은 일 등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미가 선지를 통해 예언한대로 성취된 일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총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미5:2).
1. 아구스도의 호적령
미가의 예언이 응한 것은 바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로마 황제인 아구스도의 등장도,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 폭군 헤롯 왕의 등장도,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 아구스도는 그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수로 주전27년부터 주후14년경까지 로마황제 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통치기간 중에 인구 조사령을 내림으로 부지중에 미가서 5:2절에 기록된 메시야 탄생의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일에 쓰임 받은 인물이 된 것입니다.
(2) 호적하러 올라온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되는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의 고향인 나사렛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의 현몽을 받은 요셉은 마리아 데려 오기를 두려워하거나 지체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에서 마리아를 보호하였지만 예수가 탄생하기까지 함께 동침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마1:19-25)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해야 할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 혼자만 가도 될 일을 만삭된 마리아까지 왜 데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메시야 탄생에 대한 미가 선지의 예언을 알고 있었으며 그 예언을 응하게 하려는 믿음의 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자신에 대하여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힘쓰신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요18:9, 19:28).
2. 예수님의 태어나심
요셉과 마리아가 벧르레헴에 갔을 때 이미 잉태된 마리아의 해산할 날이 찼다고 했습니다.
(1) 아기 예수는 사관에조차 머물 곳이 없으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옛 도성으로 큰 도읍은 아닙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머물게 하기 위한 사관(여인숙)이 몇 있었지만 호적 하러온 사람들을 수용할만한 수효는 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아마 어느 사관 주이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그 집 마구간 한편 구석을 잠자리로 마련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말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자리는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철두철미하셨습니다. 인생의 맨 마지막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8:9). 이처럼 주님의 낮추심으로 우리는 어떤 부요를 얻은 것입니까? 하늘에 간직한 부요를 얻게 하셨습니다(엡1:3). 생명의 부요를 얻게 하셨습니다(요10:10). 그리스도 안에 모든 풍성한 복을 얻게 하셨습니다(롬8:23).
3.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아기 예수가 태어나실 그 지경에 양떼를 치는 목자들이 들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밤중에 이들에게 주의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된 목동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그들을 향하여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해 준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소식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결 론 : 우리는 여기서 하늘의 천사가 목동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복은 천사가 전할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는 이들 목동들에게 구주의 태어나심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을 뿐입니다. 목동들은 천사들의 구주탄생의 전달을 듣고 그가 태어나셨다고 말한 마구간에 찾아가 확인하므로 그들은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축복의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메시야를 친히 보았고 메시야 탄생의 증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축복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베들레헴 들판에 있었고 주님이 태어나실 장소에서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가까이서 주의 음성을 듣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잠8:34-35).
(7) 천사들의 찬양
(누가복음 2 : 10 - 20)
서 론 : 성탄의 깊은 밤입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양떼를 지키던 목동들에게 천사들이 주의 영광을 가지고 나타나 그들 곁에 섰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목동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그들에게 이처럼 말해주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말을 마치자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같은 찬양이 고요한 밤 하늘아래 온 누리를 메아리쳤습니다.
1.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천군과 천사의 찬양은 구주의 탄생을 두 가지로 구분해 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으며 다른 하나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탄생이 어찌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대로 언약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메시지의 기원은 창3:15절로 올라갑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인류 구원의 구주이신 그리스도 주를 여인의 후손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로 운행되어 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베들레헴에서 언약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심으로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선지자로 말씀하신 메시야 탄생의 예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탄생을 위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인류의 역사를 주장해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숨기시고 오랜 기간 내려오시다가 이사야를 통하여 메시야의 태어나심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밝히신 처녀란 창3장에서 말씀하신 여자이며 후손이란 이 처녀가 낳은 아들,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를 통하여 이 여인이 탄 20 \ 누가복음
생할 고장에 대하여 예언하셨는데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미5:2).
(3)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일은 그의 말할 수 없는 사랑에 기인하지만 더 근원적인 뜻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그 아들을 통하여 의를 주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신 일이기 때문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롬3:25-26).
2.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면 왜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한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란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 이 땅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심으로 평화를 누리게 될 대상은 온 인류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이 같은 축복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예정하신 자들입니다(엡1:4-5).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요1:12-13).
(3) 그리스도의 나심은 죄인과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성소의 막혀진 휘장으로 상징되고 예수님께서 이 휘장을 찢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셨습니다(엡2:13-15). 이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이처럼 죄인과 하나님과의 개선관계가 바로 복음입니다.
(3) 이 평화는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한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인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그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축복이 임하시게 된 것입니다.
결 론 : 천사들이 얼마 후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 다음 천사들을 통해서 알려주신 기쁜 소식을 알아보려고 그들은 빨리 베들레헴까지 달려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경험한바 놀라운 사실을 말했을 때 그곳에 있었던 이들은 이를 기이히 여겼지만 마리아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처럼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8)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
(누가복음 2 : 21 - 39)
서 론 : 예수님은 율법아래 태어나신 분이시므로 그의 생애는 율법을 지키시고 율법의 의를 얻으셔야 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갈4:4-5). 요셉과 마리아는 결례를 따라 제사를 드렸고 예수님은 할례를 행하시고 또 장자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므온의 찬양과 안나의 감사가 나옵니다.
1. 율법의 율례를 따르신 예수님
어린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행하시고 장자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그 결례의 제물이란 일년생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로 규정하고 있지만 형편이 미치지 못하면 어린양 대신 비둘기 한 마리를 더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로, 하나는 번죄물로 하나는 속죄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들이 비둘기 한쌍으로 제사하려고 한 일은 그 당시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어린양을 사기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으로 참으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2. 시므온의 찬양
예수님의 부모들이 모세의 결례대로 제사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이 같은 예식을 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주님의 가족들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1) 시므온의 신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있지 아니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라고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에 대하여 이 사람이 의롭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2) 주님도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원래 할례란 양피를 제거하는 의식으로 이 의식의 영적인 뜻은 몸에서 죄를 제거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마음의 할례를 뜻하고 있습니다(롬2:28-29). 구약에서도 할례의 의미를 육체에 두지 않고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신10:16). 이 할례를 주님이 받으신 이유는 그가 율법아래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아래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의 의를 이루셔야 했습니다.
(3) 주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그 첫 태에서 난 아들을 주의 거룩한 자라하여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습니다. 이런 의식의 동기는 애굽에서 노예로 지낼 때 애굽사람들에게 내려진 마지막 재앙에서 장자를 죽이는 심판은 내리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특별하신 은혜로 이 죽음의 재앙에서 유월하게 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자로써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은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실로 세상의 모든 장자(하나님의 자녀가 될 구속받은 백성들)들을 대신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의 바쳐지심을 인하여 우리는 다시는 율법의 율례에 따른 의식이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속전을 갚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4)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낳은 여자의 결례기간은 40일간으로 율법에서 명하는 바 결례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레12:1-6).
(5)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찬양했습니다. 주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구원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약속하신 그 언약의 성취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의 구원을 본 사람이요 친히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감사와 찬양은 시므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요 만민에게 예비하신 것으로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야이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방을 비취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3. 안나의 감사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요셉가 마리아에게 축복하고 있을 때 안나라고 하는 여 선지자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 안나는 84년간이나 과부로 지낸 여인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메시야를 보여주시고 참 소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시므온과 안나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경건하며 기도생활을 해온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고 또 그들에게 메시야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하신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생활을 하면 이 같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9) 잃어버린 예수
(누가복음 2 : 40 - 52)
서 론 : 아기 예수는 지혜가 충족하며 강하여지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예수님이 열 두 살 되시든 해 유월절을 당하여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예수님의 가족은 유월절을 당하면 이 절기의 전례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 율법이 명하는 대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수장절 등이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 삼대절기 중에 한 절기만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유월절을 지켜온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자라나심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그의 성장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누가가 이곳에서 얼마간 언급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했습니다(40절). 또한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50절).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도 하나님으로서의 자혜가 계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에게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심을 알고 계셨으며 인류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신 일에 대하여 알고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이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어리실 적 자라시는 과정에서 남다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셨지만 그가 일정한 나이에 이르시기까지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유보적인 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자신의 존재와 사역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셨다고 해도 그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요1:14).
2. 잃어버린 예수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가 그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고 하룻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들 생각이 나서 그들 일행 중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찾으면서 다시 예루살렘 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 부모들이 예수를 잃어버린 일을 영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연결시켜보려고 보려고 합니다.
(1) 그리스도인중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도 주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그리스도 없이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인생 길을 그리스도 없이 자기 혼자 걸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이 같은 생활은 그리스도와의 단절된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와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수시로 주님을 찾지 아니할 때 단절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하룻길이나 가면서도 찾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주님을 찾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도가 끊어지면 그리스도 없는 인생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죄는 우리로부터 주님을 멀리 떠나게 합니다. 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생활은 주님 없이 자기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잃어버린 예수님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생애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 걸어가는 인생 길은 헛된 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처럼 언제인가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야 할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찾는 일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의 인생은 암담하고 큰 손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인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이 조금이라도 신앙에서 비뚤어진 길로 걸어가고 있다면 이때 그 발걸음을 멈추고 잃어버린 주님을 찾아 그와 함께 동행하는 생활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모들은 주님을 잃어버린 줄 알고 먼저 친족과 아는 사람 중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잃어버린 정확한 장소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국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그들은 사방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찾은 것입니다.
결 론 :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찾고 또 찾으면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찾는다는 말은 기도를 말합니다. 그를 향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 중에 계시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전을 떠나면 주님을 잃어버릴 줄 알고 성전을 부지런히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