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가 중앙일보에 올린 글인데, 마음에 와 닿기에 모아보았어요.
우리 이야기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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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없이 살았던 1년 반, 내 인생의 민낯이 보였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은 대부분 명함 교환 의식에서 시작된다.
명함지갑을 꺼내 공손하게 명함을 건네면 상대방으로부터도 “잘 부탁 합니다”라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명함이 오기 마련이다. 등가교환(等價交換)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등가교환이란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일치하는 교환이란 뜻인데, 이 경우 경제적 의미가 아닌 감성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회사 퇴직 후 명함 없이 다녔다.
엄정하게 말하면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의 관행적 룰에서 벗어나 부등가교환을 해온 셈이다. 처음 만나는 상대들은 자신이 뭔가 건넸는데 이쪽에서는 빈손이니 손해 본 표정이 역력했다. 공정한 거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함이 없으면 흡사 사회적으로 거세된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오죽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녀석’이라는 표현까지 있을까. 상대방에 비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상태, 초라한 현재를 담은 말이다. 나는 말 그대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실상은 1인뿐인 연구소 명함이라도 새겨 갖고 다니라는 충고도 들었지만 나는 낯간지러워 1년 반 동안 그냥 다녔다. 명함 없는 시기를 살아보아야 진정한 인생을 알 수 있다. 화장기를 걷어낸 민낯으로서의 자기 얼굴도 만나게 된다.
명함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큰 것 같다.
서양인들은 상대가 멀리 있을 경우 명함을 탁자에 휙 던져주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한국의 파트너는 모욕당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인들에게 명함은 단지 연락처를 적어놓은 하나의 종이일 뿐이다. 그들은 공적인 모임 아니면 사적인 자리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필요하면 그냥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한국 사회는 사적인 모임조차 명함을 교환하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의 차이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명함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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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에 대해 한국보다 더 경건한 의식절차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일본인들이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거룩한 의식(ritual)이라 부르는 편이 더 낫다. 마치 종교의식처럼 두 손으로 경건하게 명함을 받아들고 혹시 명함에 커피라도 묻을세라 조심을 해가며 소중하게 챙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한류 콘텐트 비즈니스를 위해 일본 방송사 혹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임원들과 교류가 잦았는데, 그들은 식사자리에서 나의 음식메뉴와 술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명함에 연필로 조심스레 나와 관련한 특징을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명함에 더 집착하는 시기는 아마도 중년이 아닌가 한다.
특히 자녀들의 혼사를 앞둔 때에는 더 예민해진다. “그래, 사돈은 뭐하십니까?”라는 저쪽의 질문에 밀리고 싶지 않아서 무리해서라도 허세를 부린다. 사돈 쪽에 비해 하객이 적으면 어떻게 하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다. 자녀의 결혼식은 부모의 사회적 성공을 과시하는 기회이고, 부모의 장례식은 자식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시간인 듯싶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절대로 못 참는다. 2막 인생을 결정할 때 연봉은 양보할 수 있지만 명함의 타이틀만큼은 고집을 부리는 이유다. 한번 사장이면 영원한 사장이다. 본부장, 국장 이렇게 한번 올라간 타이틀과 직함은 내려오는 법이 없다. 과거의 직함보다 조금 낮은 자리를 제안받으면 무시당했다고 속상해한다.
죽겠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무리해서라도 그 타이틀에 합당한 축의금 봉투를 내는 사람들이 한국의 중년들이다.
이런 명함사회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사람들이 바로 사기꾼들이다. 그럴듯한 명함과 타이틀로 유혹하며 퇴직금과 집 담보물을 노리고 있는데도 눈뜨고 당하고 있다. 명함 때문이다. 제 2의 인생에서 최대 걸림돌은 명함이다.
최근 받은 명함 한 장은 그런 점에서 신선했다.
이름 앞에 ‘농부’라는 단 두 글자만 쓰여 있었으니까. 아주 당당한 명함이었다. 그 명함의 주인공은 원래 서울 유명 대학병원 의사다. 그는 언젠가부터 주말마다 수도권에 있는 밭으로 달려가더니 최근에는 굴삭기 배우는 자격증까지 획득하고 농사와 관련한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노동의 즐거움과 땀의 미학을 새롭게 발견하는 중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성적순으로 의대를 선택했지만, 이제 그는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다고 들떠 있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지쳤고 이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다. 나이 들어 뭔가 배우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광채가 흘러나왔다.
몇 년 전 프랑스 남부 도시 앙티브의 피카소 박물관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앙티브는 니스와 칸에 인접한 작은 바닷가 도시로 피카소가 장년에 작품인생을 보낸 곳이다.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듯 나는 그림을 그린다. 자네는 단 한번이라도 완성된 그림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다. 만약 자네가 이제는 완성했다고 중얼거렸다면 이미 끝장이다. 작품을 완성했다는 속단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그렇다. 이 말 속에 수퍼 시니어 정신이 들어있다. 평생 현역 정신이다.
잘 아는 것처럼 피카소는 과거의 타이틀과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신을 시도했다. 피카소가 글로벌 수퍼 시니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얼마 전 내게도 새로운 명함이 생겼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보다 더 많이 배우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시대의 흐름인 양방향 학습을 시도한 덕분이다. 중년의 나이에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가르치며 배우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이제 내 명함에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명함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성공과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명함들은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던가. 그 명함의 수식어가 없어지는 즉시 효용가치도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명함은 1회용인 것이다.
명함에 속박되지 않아야 수퍼 시니어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수퍼 시니어가 아닐까. 명함의 전성기야 이미 지났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인생이란 위대한 작품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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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나의 이야기’…수퍼 스토리 써보자
꿈·여행·사랑. 혈관의 아드레날린을 펄떡펄떡 뛰게 만드는 세 가지 단어다. 이 단어를 듣고도 무덤덤하다면 그는 이미 늙었다. 아무리 나이가 젊다고 해도 그렇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분별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가방이다.
며칠 전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교에서 복도를 지나다 한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소지품이 와르르 쏟아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물건 줍는 것을 도와주다 색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연필로 쓰고 지우다가 몇 번이고 고쳐 쓴 노래 가사와 곡이었다. 치열한 내적 전투의 생생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실용음악과 학생이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작품인 듯 당황해 했다. 인사와 함께 총총히 사라지는 그 학생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흐뭇했다. 그녀는 언제일지 모르는 전성기, K-POP의 주인공이 될 날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완성이 안 된 그녀의 작품은 분명 꿈을 실현시켜줄 마법의 도구가 될 것이다.
노트와 수첩은 정신적 결사체
나는 대학교 강의와는 별도로 저녁 시간에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일명 ‘파스텔’이라는 파워 스토리텔링 강좌를 이끌고 있다.
강연을 끝내면 지친 목을 달래기 위해 가끔 근처 카페로 가는데 그날은 적지 않은 수강생들이 나를 따라왔다. 생맥주를 나누며 자연스레 트랜스 미디어 시대, 글과 말 그리고 이미지가 섞인 융합 스토리텔링으로 화제가 옮겨지자 여성 수강생 몇 명이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날로그 식 노트였다. 몰스킨 같은 브랜드 수첩도 있었지만 이름 없는 국산 공책도 있었다.
그들은 수첩의 빈 공간 위에 그림을 그리고 뭔가 글을 적어 놓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과 함께 죽어가던 종이 수첩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흐와 피카소, 헤밍웨이가 즐겨 사용했다는 전설의 수첩 몰스킨을 극적으로 살려낸 것은 극성스런 마니아들이었다. 몰스킨은 이제 할리 데이비슨과 어깨를 겨루는 가장 충성도가 높은 브랜드가 되어서 연간 1000만 권 이상이 팔린다고 할 정도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어떤 아날로그 제품은 오히려 시장이 더 늘어났다. 하긴 꿈을 표현하는데 디지털이면 어떻고 아날로그면 또 어떤가. 그들에게 노트와 수첩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정신적 결사체인 것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플랫폼’이라는 몰스킨의 모토처럼 말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 젊은 남성의 소지품이었다.
개인 비용으로 참가하는 문화강좌에 가보면 압도적으로 여자 수강생이 높은데 놀란다. 술집에서 남자들이 호연지기를 뿜어내고 있을 때 여성들은 열심히 자기개발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 남성 수강생은 예외였다. IT회사에 근무하기 때문에 업무용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만, 동시에 편지지를 항상 가방 안에 넣어 다닌다고 했다.
아날로그면 어떻고 디지털이면 어떤가
편지지? 의외였다.
지금은 편지를 잃어버린 세대가 아니던가. 커피를 마시다가, 또 누구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어지면 그 자리에서 편지를 쓴다고 했다.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림을 그리건 편지를 보내건 모두 남모를 꿈을 꾸고 있다는 의미다. 또 다른 피카소, 헤밍웨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 수강생 가운데 가장 연장자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받았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60대가 아닐까 싶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강의실에 도착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과제를 해내는 분이다.
“사실 몇 번이고 고민했습니다. 이 나이에 젊은이들에 섞여 뭔가 배운다는 게 어색해서 올까말까 망설였어요. 아, 그런데 지금 너무 행복해요. 뭔가 다시 배운다는 것 말이죠. 정말 잘한 결정입니다. 하하하!”
또래의 다른 이들이 골프가방 아니면 등산용 배낭이 전부일 때 그는 공부 가방을 챙겨서 강남에서 강북까지 달려왔다. 큼직한 옛 공책 위에 손 글씨를 써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멋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몰입한 얼굴은 흡사 쾌활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냥 얻어지는 2막 인생은 없다.
나는 중년들이 손가방에 영양제와 콜레스테롤 억제하는 약봉지만 넣어 다니지 말고 꿈도 함께 넣어 다녔으면 좋겠다. 나의 쾌활한 수강생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방은 배움을 의미한다. 10대들의 백팩에는 무거운 입시용 책들로 가득하고, 20대의 가방에는 취업용 서적과 서류가 들어있다. 그러다가 직장에 들어가서 1~2년이 지나면 남자들의 손에서는 갑자기 가방이 사라진다. 손에서 가방이 떠나는 것과 함께 배움도 뚝 끊어진다.
평생교육 시대다. 제 2의 인생에 안착하는 비결은 새로운 몰입 대상을 빨리 확보하는 거다.
미술 작가들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은 더욱 섬세해진다고 한다. 게다가 미술은 근본적으로 육체운동을 수반하기에 건강에도 좋다고 권유한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한편 슬픈 일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평소 꿈꿔왔던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30년 모아두었던 자료를 다시 뒤져 책 쓰는 작업하느라 흥분되어 있다. 내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자료들에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서 좋다.
He Story보다는 I Story에 더 공감
나는 나이를 ‘나의 이야기’의 준말이라고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들려줄 나만의 이야기가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흔히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권’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구슬도 꿰매야 보석이니까.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직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때다. 뒷담화하고 살기에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의 이야기인 히스토리(He Story)보다는 아이 스토리(I Story)에 사람들은 더 공감하는 법이다.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공간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다. 동시에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우선 필요한 부문만을 뽑아서 초록으로 담아도 충분하다. 글을 쓰든 스케치를 하던 그것은 자유다. 소중한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담아보는 거다. 무에서 유로 창조자가 되는 연습을 해보자.
어떤가. 수퍼 시니어의 수퍼 스토리.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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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와 이별 아쉬워 말자, 삶의 혁신 과정이니까
직장이 바뀐다는 것은 이방인이 된다는 뜻이다.
처음 보는 얼굴들, 달라진 업무시간, 익숙지 않은 공간, 호칭마저 낯설다. 어느 날 나는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슬며시 넥타이를 풀어 버렸다. 내친김에 나도 ‘운도남’ 대열에 합류했다. 운동화를 신은 도시의 남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넥타이와 구두 대신 간편복 차림이다. 가르치는 과목이 실용학문이어서 가급적 학생들과 거리를 좁혀 보자는 뜻이고, 그렇게 하면 혹시 ‘동족’으로 대접받을까 하는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다.
얼마 전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 장례식 사진을 보다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1700여 명의 조문객 가운데 단 한 명도 넥타이를 맨 사람이 없었다. 미국의 조문 관습에 비춰보면 무척 이례적인 광경이었다. 하버드 대학출신에다 미국 재무장관 비서실, 구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그에게 남편이 러닝머신에서 넘어져 숨지는 황당한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넥타이 없는 의식을 치르려는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데이브가 생전에 넥타이를 증오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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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잘라 새 시대 예고한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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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는 그의 남편이자 서베이몽키 CEO 데이비드 골드버그를 말한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면서 2006년 뉴욕에서 치러진 위대한 예술가 백남준의 장례식 장면이 떠올랐다.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를 비롯한 400명의 참석자들은 옆자리에 앉은 조문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깜짝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는 백남준이 1960년대 독일에서 작품 발표를 하다 갑자기 청중석에 있던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렸던, 예술계의 일대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백남준에게 그 넥타이 퍼포먼스는 스승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였다.
백남준의 영향 때문인지 베를린에는 특이한 규칙을 가진 클럽이 있었다.
중년층이 주요 고객인 이 클럽에서 남자들은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규칙이다. 파트너 선택 권한은 오로지 여성에게만 주어졌다. 마음에 든 남성을 발견하면 가위로 넥타이를 자르기만 하면 되었고, 그 남성은 무조건 춤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 게 두 번째 규칙이었다. 덕분에 이 클럽은 여성 손님들로 호황이었다.
유럽 넥타이 문화의 역사는 350년이 넘는다.
크로아티아 군인이 한 것에서 발단이 되어 프랑스 루이 14세 때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 유럽에서조차 탈(脫)넥타이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빠른 곳이 독일이다. 1990년대 중반 처음으로 독일에 갔을 때 내 눈에 인상적으로 비친 것은 아우토반이나 벤츠 자동차가 아니라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일선 공무원들의 차림새였다. 독일이라고 하면 규율과 제복을 상상하고 있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미 ‘68 학생혁명’ 이후 넥타이는 격식과 질서, 억압과 숨막힘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넥타이와 실크산업의 중심지 크레펠트에서는 30년 전에 40여 개나 되던 넥타이 제조업체가 현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아웃소싱 생산방식이다.
넥타이 기피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스타트업이 활성화된 미국 실리콘밸리일 것이다.
10년 전 IT혁명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 대상 가운데 단 한 명도 넥타이를 맨 사람은 없었다. 예의상 넥타이를 매고 있던 내가 오히려 이단자였다. 단색 정장차림으로 유명한 일본조차 2005년부터 ‘쿨 비즈(Cool Biz)’라고 하여 여름철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넥타이 기피현상의 세계화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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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탄생 초기엔 탈권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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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료에 따르면 넥타이를 매는 방식이 18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좌우 대칭으로 넥타이를 굵게 묶는 것을 가리켜 풀 윈저 노트(Full Windsor Knot)라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윈저는 미국인 이혼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한 세기의 로맨티스트 영국의 윈저 공을 말한다. 그는 개성 있는 패션 감각으로도 주목받았다. 종종 멋진 넥타이를 매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는데, 이는 기득권 포기와 탈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져 환호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넥타이가 기득권과 권위의 상징이 되었으니 역사의 패러독스다.
넥타이는 목(neck)에 묶는다(tie)는 의미다.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은 ‘넌 내 거야’라는 메타포다. 반면 직장인에게 넥타이는 생명줄이다. 취업 준비생은 넥타이 인생에 합류하길 학수고대하지만, 정작 직장에 들어가서는 하루빨리 이 사슬을 풀고 싶어 한다. 넥타이는 어느덧 노예의 사슬이 된 것이다.
넥타이를 볼 때마다 나는 로마시대의 검투사가 떠오른다.
자유와 부를 얻기 위해 생명을 건 결투를 했던 검투사처럼 현대인들도 매일 보이지 않는 전투를 해야 한다. 검투사에게 몸을 보호할 창이 있다면 현대판 검투사에게 그것은 넥타이다. 몸을 의탁할 조직을 말한다. 젊을수록 자유로운 분위기의 직장을 선호하지만, 그런 직장일수록 ‘장점이 곧 단점’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자유에 엄정한 책임이 따라오고 철저한 성과주의가 수반된다. 자유직업, 지식유목민, 멋진 말이긴 하지만, 자유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남다른 기술, 차별화된 콘텐트, 전문지식 같은 무기가 없다면 그냥 넥타이를 매고 있는 편이 낫다. 적의 공격 한방에 인생이 훅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의 고통 외면하고 흉내만 내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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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를 푼다는 것은 결국 자기혁신이 아닐까.
검정색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스티브 잡스가 될 순 없듯이 후드 티셔츠를 걸쳤다고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업과 리더들이 혁신의 고통은 외면하고 겉만 흉내 낸다. 혁신 없는 넥타이 풀기는 일회성 쇼일 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넥타이를 풀어야 한다.
퇴근 후 넥타이를 푸는 것처럼, 퇴직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넥타이를 벗는 일이다. 잠시 퇴근했다고 마음을 편하게 먹었으면 좋겠다. 내가 풀어두었던 넥타이를 다시 맨 것은 1년 반이 지나서였다. 수퍼시니어란 결국 넥타이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관능적인 날씨다. 괜히 넥타이와 싸우지 말고 이 계절 즐겨보았으면 좋겠다.
자기학대보다 더 나쁜 것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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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에서 벗어나는 순간, 당신의 삶은 ‘섹시’해진다
베를린에서 호텔에 투숙하는 것은 한때 이 도시에 살았던 자로서 예의가 아니다.
더더욱 어떤 영감을 원한다면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호텔방은 피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이에게 집을 빌려준다는 독일의 예술가 겸 작가와 인터넷을 통해 연락이 닿았다.
초고속 열차인 ICE를 타고 베를린 중앙역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옛날식 아파트의 4층이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대형 여행가방을 옮기느라 셔츠에 땀이 흠뻑 젖었지만 방을 둘러보는 순간 모든 피곤이 달아나 버렸다. 그래 바로 이런 공간이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환하고 조용하며 무엇보다 작업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군더더기가 없고 단순하다. 작가 겸 예술가인 집주인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나의 표정을 읽고 호쾌한 웃음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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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에도 페달 밟는 베를린의 중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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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동안 이 집은 완전히 당신 것이에요. 이 공간을 독점하면서 제가 쓰던 주방기구는 물론이고 책과 음악 CD들도 마음껏 보고 들어도 됩니다. 여기서 멋진 글을 써보세요. 나도 지난달에 여기서 소설 한 권 탈고했답니다. 집중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죠. 하하!”
그는 내게 두툼한 구식열쇠 꾸러미를 전달하고 사라졌다. 스마트키와 전자 카드가 일반화된 서울과는 달리 베를린에서는 아직도 많은 것이 옛날식이다.
베를린에는 적은 비용을 받고 집을 빌려주는 곳이 제법 많다.
내 집의 열쇠이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손님에게 빌려줄 수 있다는 자세다. 이름하여 ‘공유경제(Sharing Economy)’의 현장이다. 소유가 아니라 점유에 익숙해진 생활 방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기에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무거운 생수와 먹거리를 실어 나르는 것은 여간 불편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한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다.
돌아보니 나의 서울생활은 편안함에 중독되어 있던 듯싶다. 모든 것이 전화 한 통, 클릭 하나면 해결되었다.
베를린에 체류하는 단 열흘 동안만이라도 나는 가급적 차를 타지 않고 많이 걷기로 했다. 최대한 인터넷도 자제할 생각이다. 대신 몸의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 이 도시를 느끼고 있다. 새벽잠을 깨우는 암젤이라는 새의 아름다운 소리, 동네 빵집에서 배어나오는 구수한 브뢰첸 냄새, 냉기와 온기가 적절히 배어 있는 숲 속의 진한 공기, 동네 모퉁이 이탈리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에스프레소의 향기, 되너 케밥을 만들고 있는 터키 식당 종업원의 경건한 얼굴이 서서히 나의 오감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중년들은 축 늘어져 있지 않아서 반갑다.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중년들의 뒷모습을 보면 뭔가 뭉클해진다. 건강한 게르만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수퍼시니어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절대로 위축되지 않는 정신이다.
베를린 한국문화원으로부터 ‘한류’ 강연을 요청받고 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K-POP에 빠진 독일 청소년들만 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중년의 독일인들도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쁘고 지친 평일 저녁 시간인데도 그들은 시간을 내어 끝까지 경청하는 눈빛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익숙지 않은 이문화(異文化)일 텐데도 왜 대장금이 한류 사극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베를린에 갑자기 50개가 넘는 한국 음식점 붐이 일어났는지, 그 이면을 알고자 했다.
수퍼시니어에게 필요한 독일식 표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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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의 대화에서는 월급이 얼마인지, 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몇 등인지는 등장하는 법이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서울의 중년들 사이에는 ‘평등’이 주된 대화의 소재 아니던가. 평등이란 아파트의 평수와 아이들의 학업 등수를 조합한 말이다. 베를린에서는 얼마짜리 옷을 입었는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어떤 식으로 자기의 개성을 표현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성형과 진한 화장발, 그리고 옷의 브랜드만으로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은 베를린 시장 보베라이트가 했던 말처럼 “가난하지만 섹시”한 삶을 지향하는 곳이다.
한국 기준으로는 절대로 가난하다고 할 수 없지만 독일 다른 지방정부에 비해 산업시설이 적어 지방재정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나온 말이다.
“나는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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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당당하면서도 또 얼마나 매력적인 표현인가.
여기서 섹시하다는 것은 남과 다른 인생, 매력적인 삶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것보다 자기를 둘러싼 것으로 웅변하려 든다. 내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지, 어떤 동네의 아파트에 사는지, 자식이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지, 골프채 값은 얼마인지, 유력한 정치인이 동창생이라는 얘기 등으로 자기를 포장하려든다. 한국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걸 가리켜 영어로 ‘overstatement’라고 표현한다. 실제 이상으로 자기를 부풀려 말하려는 습관이다. 표현의 거품이다. 반면에 독일인들의 일상은 ‘understatement’의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절제하거나 실제보다 낮춰서 표현하는 걸 말한다. 권력과 부유함도 웬만해서는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식인들 역시 자기가 아는 이상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큰 차이다.
열쇠에 얽매이지 않는 베를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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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 내가 선택한 숙소는 과거 베를린 장벽 주변이다.
분단 시절에는 가난한 예술가와 학생, 그리고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했지만, 지금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새로운 문화 흐름의 핫스팟(Hot Spot)이 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가 이제는 현대 미술의 메카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섹시한 곳이기 때문이다.
며칠 뒤 나는 이 아파트의 열쇠를 반납해야 한다. 어쩌면 인생은 열쇠를 받고 반납하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여행자처럼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이름의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가 어느 날 체크아웃 해야 한다. 직장 생활 역시 그렇다. 중요한 자리에 있을수록 열쇠가 많지만 퇴직할 때 이 모든 것을 반납해야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호텔처럼 잠시 점유하다 떠난다고 쿨하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열쇠에서 벗어나는 것이 섹시한 삶의 시작이다.
베를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 문제가 없겠는가. 걱정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열쇠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도 시작해보면 어떨까. 섹시한 인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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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이겨낼 수 있는 ‘정신 근육’ 키워보자
“아,백수가 과로사할 지경이야. 자유인으로 지내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냥 놔두지를 않네.”
그 마음 누구보다 공감한다.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밀려오는 약속으로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서너 달이 훅 지나간다. 퇴직을 실감하기 어려울 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과 같은 적막감이 찾아온다.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고 문자와 카톡조차 쥐죽은 듯 고요하다. 전화기가 고장 났나하고 여기저기 만져보지만 멀쩡하다. 오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 새벽형 인간들에게 그 고통은 두 배다. 그때부터 안절부절,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보지만 상대방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어…어떻게 하지요. 요즘 바쁩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깨닫는다.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것은 곧 만나고 싶지 않다는 우회적 표현이라는 것을.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차가운 거절이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어금니를 꽉 물지만 치아만 아플 뿐이다.
“내 시간을 조금 더 가질 걸”
하지만 되돌아보면 나 역시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터이다. “바쁜데요”라는 단 한마디로 말이다.
물밀듯 후회가 몰려온다. 실패를 통해서 사람은 많이 배운다고 했던가.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쓰리 걸'이 쓰라리게 그리워졌다. 선배들에게 좀 더 잘해드릴 걸, 직장 후배들에게 말 한마디 잘해줄 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조금 더 가질 걸. 그 ‘쓰리 걸’ 가운데 어떤 걸이 가장 아쉬웠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내시걸’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 시간을 가질 걸.”
CEO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때는 내가 조직을 리드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표와 조직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가지고서야 무슨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경영자와 리더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다. 무형에서 유형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집단지성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하겠지만, 때로는 독창적인 리더십도 필요하다. 조직의 도그마, 고정관념, 지금까지 갇혀 있던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성장 동력은 기대하기 힘드니까. 홀로 있는 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가 많다고 자랑할 일은 절대로 아니다.
직위 때문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금방 생명력이 증발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인간관계를 챙기는 열정의 10분의 1 정도라도 빈 공간으로 남겨놓으면 좋겠다. 구조조정 해야 할 것은 조직만이 아니다. 리더의 일정표부터 과감히 다이어트 해야 한다. 멋진 아이디어를 낸 젊은 친구들에게 점심 사주고 싶어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면 무슨 창조적인 리더십이 가능하겠는가. 경영도 타이밍의 예술인데, 김빠진 맥주가 되지 않을까. 비어 있어야 생각이 고이고, 생각이 고여야 새로움이 생긴다. 여백 없이 새로운 리더십은 생기지 않는다. 단지 리더놀이, CEO흉내만 하다 갈 뿐이다.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하게(FAE)’
음악가들에게 브람스의 인생은 F.A.E.로 유명하다.
F.A.E란 ‘Frei aber Einsam'(프라이 아버 아인잠)의 줄임말이다. 독일어로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하게’란 뜻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그에게 위대한 작품이 되어 돌아왔다. 원래 브람스가 좋아했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좌우명이었지만, 그를 위해 바이올린 소나타, 일명 'F.A.E'를 만든 까닭에 지금은 브람스가 자유인의 아이콘이 되어있다.
여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를 '외로운 비타민 E'라 표현하고 싶다.
브람스의 작품 F.A.E가운데 E를 딴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가끔은 홀로 있어야 한다. 일정표의 중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원래 비타민 E는 흔히 젊음을 지켜주는 비타민이라 부른다. 노화를 방지하고, 여성들에게는 토코페롤 성분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비타민은 몸 안에서 스스로 생기는 호르몬과 달라서 반드시 몸 바깥에서 섭취해야 한다. 그렇듯 제2의 인생에서 외로운 비타민 E 역시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종합비타민을 챙겨 먹듯, 외로운 비타민 E도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저항력이 생긴다.
인간은 물론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 필요하고 모임도 당연히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잠시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독이다. 지나치면 ‘사회독(社會毒)’이 되어 돌아온다. 내 영혼과 인생을 해치는 독소가 된다는 뜻이다. 외로운 비타민 E는 그 독소를 줄이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외로운’ 비타민 E는 해독제
늘 일정표가 빡빡한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되기 힘들다.
모든 것이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는 10가지, 100가지 말할 수 있다. 시간을 내야 할 이유 역시 10가지, 100가지 가능하다. 애인을 만들 때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지 않던가. 여백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
가끔 이런 사람들을 본다. 식사약속 해놓고, 당일이 되어서는 ‘우리 둘이서만 밥 먹는 거야? 부를 사람 누구 또 없나?’
이렇게 황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1대 1 소통에 훈련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더욱 두려워한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45세를 정점으로 사회관계가 꺾인다고 미국 의학저널에 발표되지 않았던가. 새로 사귀는 것보다 잃는 사람 수가 많아지는 네트워크의 변곡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된다. 어떤 조직이든 끝까지 챙겨주지는 못한다. 홀로 있는 연습을 충분히 해둬야 한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캘린더의 여백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인의 자세가 아니다. 헬스클럽에서 근육 키우듯 홀로 이겨낼 수 있는 정신 근육도 키워야 한다.
일정표가 비었더라도 외롭다고 투덜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홀로 낯선 커피숍에 들어가 황금빛 거품으로 덮인 에스프레소 한잔 주문해보자. 강렬하고 매혹적인 쓴맛이 목안에 넘어올 것이다. 이어폰이 있다면 조용히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을 들어보자. 고독하면서도 자유로운,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브람스의 마음이 전달되어 오는가. 수퍼시니어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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