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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다시 찾은 고향 농암종택
이장희 추천 0 조회 63 14.10.28 16: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찾은 고향 농암종택


국학진흥원을 나와 곧 바로 농암종택으로 향했다. 종택 근처는 수없이 많이 지나갔지만 정작 농암종택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가는 길은 해가 아직 많이 남아있을 때 가는 것이 상식이다.

농암은 이현보(李賢輔:1467-1555)선생의 호다.

이현보 선생 하면 가사문학의 효시로 퇴계선생의 도산12곡과 고산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끼친 분이라는 게 내가 아는 상식의 전부였다. 수 년 전 도산서원에 있는 유물전시관에서 농암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전시관에 전시된 글귀 중 퇴계선생을 자랑하는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이현보 선생이 퇴계선생의 과거 급제 소식을 듣고

“요즘시절에 기대되는 사람으로 이 사람을 뛰어넘을 이가 없으니 나라의 다행이며,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퇴계 선생보다도 더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도산서원 박물관에 가면 강세황(1712∼1791)이 수묵담채로 그린 진경산수화인 ‘도산서원도(보물522호)’가 있다.

 도산서원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 반타석 등을 그렸다. 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 애일당, 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적혀있다.

여기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분강서원인데 강세황은 분천서원으로 표기를 했다.

도산서원과 분강촌을 한 폭에 담았다는 것은 바로 이웃한 것이 아닌가. 이번에 도산서원을 가면 분강촌의 본래의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꼭 한번 찾아보리라 마음먹었다.

농암종택은 원래 분강촌에 있었다. 오천군자리와 같이 고향을 안동댐에게 빼앗긴 것이다. 도산구곡 <제1곡이 운암(雲巖), 제2곡이 월천(月川), 제3곡이 오담(鰲淡), 제4곡이 분천(汾川), 제5곡이 탁영(濯;), 제6곡이 천사(川砂), 제7곡이 단사(丹砂), 제8곡이 고산(孤山), 제9곡이 청량(淸凉)> 중 제4곡인 분천(汾川)이다.


농암종택의 현 종손인 이성원님이 수몰된 이후 30년 동안 종손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회한을 들어보자.


“농암종택의 역사는 길다. 1370년경에 지어졌고, 1526년에 그린 ‘분천헌연도’에도 그 모습이 뚜렷하다. 그러니 적어도 600년 확실히 넘었다. 농암 선조도 여기서 태어났고, 조상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한 번도 떠난 적은 없다. 그런 집이었지만 지금은 수풀만이 무성하다. 수몰 이후 30여 년, 나는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도산서원을 오고가고 했지만, 그때마다 전연 관심 없는 사람처럼 하고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농암종택 650년 역사의 어제와 오늘-, 18대 종손 이성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한 번도 찾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일까!

650년을 면면이 이어온 종가집의 종손으로 태어난 이유로 겪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음 이야기에서 들려주고 있다.


“내가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은 최근인데, 아마 가송리에 새 터전을 발견한 이후가 아닌가 한다. 그때까지 나에게 고향은 그렇게 남아 있었다.

‘고향故鄕’은 무엇인가? 가령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 나는 나훈아가 제일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최고로 좋다. 집에 온통 나훈아 CD뿐이다. 이미자도 물론 좋다. 된장도 맛이 좋고, 시래기 국도 좋고, 국수도 점점 입에 맞다. 인생은 그렇게 흐르는 모양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맛이 새로워지는 곳, 세월이 흐를수록 그 멋이 정겨워지는 곳. 우리 영혼의 심원으로 들어가는 곳. 정녕 고향은 그런 곳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훈아가 싫었던 것은 명절만 되면 단연 인기순위 1위인 '고향역'이 듣기 싫은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나훈아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터전이 생긴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지 종손 이성원님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본다.

 

 해질녘 가송리 농암종택 가는 길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정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입니다.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14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안동문화의 절정의 한 장소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등의 명소를 감싸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곳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는 의미다. 분천에서 종택의 면적이 이천여 평이었지만 이곳은 만오천 평으로 더 넓고 더욱 풍광이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내가 봐도 완벽한 풍수다. 지금까지 이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풍수를 자랑하고 있다. 사신사(좌청룡,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뚜렷하고 남주작은 반풍수인 내 눈에도 새로운 천년불패지지가 아닌가.

어찌 다시 찾은 고향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농암종택 앞에서

 

이곳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에 다니면서 아름다운 경관에 도취되어 시를 읊으면서 다니신 예뎐길이다.

‘퇴계예뎐길’은 지난날 전 영남의 문인, 시인, 묵객들이 저마다 일생에 한 번 다녀가는 꿈의 순례코스였고, 지금 남아있는 기행문만도 100편이 넘는다고 한다.

 ‘퇴계예뎐길’은 퇴계종택에서 이육사 생가가 있는 원천동을 지나 천사 - 단사(丹砂) - 매내 - 올미제 - 가사리 - 너분들 -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이런 우리말  이름은 참 곱고 아름답다.

이육사 생가가 있는 원천동에 대한 내 고향 초등학교 동창생인 이삼희가 내가 쓴 글 학봉종택에 댓글을 올렸는데 그대로 옮긴다.


“난 처가의 본가가 안동인데 장가 든 이후 근 십 년만에 거기서 여름 휴가를 두어번 보냈고, 4년 전쯤에 잠깐 다녀온 이후 아직 못 가 보았어... 내 처가집은 도산면 원촌리 이육사 생가터 바로 옆집인데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ㅇ제"라는 당호까지 소박하게 붙어 있는 사랑채가 괜찮은 곳이다. 그 사랑 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들판과 앞산의 전망이 일품이고, 뭔지 모를 느낌이 참 좋아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지겹지 않을 것 같은 곳인데...(황교감이 가는 길 있으면 풍수 한번 봐 주시길..) 거기서 종일 바둑도 두고, 그 집에 굴러다니던 오래된 책 읽던 생각이 나네...

지금은 비어 있고, 명절이나 가을에 집안 시제 지낼 때만 가는가 본 데 내가 퇴직하면 좀 이용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장인 권고도 있고, 바로 옆의 온혜 온천도 좋고) 요즘은 장인 영감 건강이 안 좋아 집 관리하러 자주 가질 못하니,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지 않을까 싶네...고종 때 영해부사를 지내셨고, 대사헌인가 당상관까지 지낸 장인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라던데...(난 한문이 달려 그 집 내력을 내 눈으로는 확인 못하고, 장인은 집안 예기는 일체 않는지라 잘은 몰라...)

혹시 육사 생가터를 방문하러 가거든 한번 들어가 보아도 괸찮을 듯... 사랑까지 들어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

원촌 들어가는 길목에는 퇴계 종택이 있는데 나도 TV 같은 데서 몇 번 보기는 해도 들어가보지는 못했어.... 내 장인은 퇴계 후손이라 종택에서 제사 모시는 멤버에 들어가는데 그 동네는 제사 장을 남자들이 본다나 ... 내가 처음 갔을 때도 문학기행 하는 분들이 이육사 생가터를 가끔 방문하곤 했었는데 수 년 전 이육사 문학관을 짓고 나서는 꽤 유명한 관광코스가 되어 요즘은 많이들 갈 거야, 내 장인은 육사하고 칠촌이나 구촌 쯤 되고, 부산 사대에서 국문학 가르치던 이동영 교수가 육사 조카인데, 육사는 형님 두 분이 월북하고 딸 한 분만 두고 계셔서 이 교수가 육사의 유일한 후예로서의 이점을 잘 활용한 수완가로 보이던데, 내 장인하고는 안동고 동창이면서 평생 친구이기도 하지...

10년 전쯤에 그분이 육사 문집 3권을 발간하였는데, 그분 개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육사 연구를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닐 거야... 당시 육사 형제들이 천재들이었다고 하네, 특히 월북한 형님 중 한 분은 당시 경성 3대 천재 중 한사람으로 꼽혔고, 3형제가 다들 나름대로 잘나가는 분이라 부친상 당했을 때 명사급만 1천여 명이 다녀 갈 정도로 명망가였다는데, 두 형은 월북하였다고 역사에서 깡그리 지워버리고, 육사만 부각시키는데, 이육사의 정치노선인 아나키즘도 사실은 사회주의 형제쯤 되고, 레닌의 사형 당한 친형이(맏형 알렉산드르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3세 암살계획에 참여했다 처형, 이후 레닌은 혁명가로...) 신봉하던 매우 급진적인 정치 노선이었던 같은데, 이건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아. 시대의 영웅은 필요한데 주인공들이 대부분이 사회주의 계열이다 보니 육사는 살려주는 것 같아...당시 제대로 된 독립투사는 아나키스트 아니면 사회주의자들뿐이었으니...(아나키즘이 왜 뒤늦게 우리나라 지사들한데 유행했는지는 늘 의문...혹시 관심 있는 분은 '마지막 아나키스트 이회영'을 참고 하시길)”


부러운 처갓집을 둔 친구다. 7월 17일 아침 농암종택에서 육사생가까지 아침 일찍일어나 예뎐길을 거닐고 싶다. 육사생가도 보고, 내 친구 장인집 풍수도 보고 그러나 주(酒)님이 허락을 하실지가 의문이지만.....

예뎐길은 우리나라에서 어딜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절경이다.

오천 군자리도 이 예뎐길로 다시 이전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바램이다.


시대가 변하면 종가집의 역할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 종가집 여행을 하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종가집이란 자기 성씨들만의 고유한 특권과 의무는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자란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할머니, 엄마, 이모, 고모, 사돈에 팔촌까지 다 넣으면 안 걸리는 성씨가 어디 있겠는가!


이젠 종가집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역사이자 교훈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물질은 풍족하나 인성적, 정서적, 정신적인 면에서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20년 이상 선생을 해 본 분들은 절실히 느낄 것이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학생들의 인성적인 면에서는 퇴보한다는 것을! 갈수록 정신문화가 황폐화해 가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러한 정신교육은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 맡아야 할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농암종택의 종손은 앞서 나가시는 분이라고 생각된다.

농암선생과 주요 유적과 유물에 대해 종손님께 한수 배울 날을 기다리면서 농암가 한수를 감상하고 마치겠다.

 분강서원


농암가(聾巖歌)

『농암(聾巖)애 올라 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이 변한들 산천(山川)이야 가샐가.

 암전(巖前) 모수모구(某水某丘)이 어제 본 듯 하예라.』

【어휘풀이】

<유명(猶明)이로다> : 오히려 밝도다

<가샐가> : 변할까

<모수모구(某水某丘)> : 물과 언덕들.

【풀이】

농암에 올라가 보니 늙은 눈이 오히려 밝아지는구나

사람의 일이 변한다 하지만, 산천은 변할 리가 있을까

바위 앞 물과 언덕이 어제 본 듯 선하구나.   -김영관의 국어방-에서 인용


 ◆ 주요유적

 1) 긍구당(肯構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2호)

 2) 애일당(愛日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4호)

 3) 분강서원(汾江書院)

 4) 농암사당 (聾巖祠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1호)

 5) 농암종택(聾巖宗宅)

 6) 신도비 (神道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4호)1566년 건립

 7) 농암각자 (聾巖刻字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3호)

 8) 농암 (聾巖 농암이 자호를 인취한 바위)


◆ 주요유물

 1) 영정(影幀)一 (보물 872호)

 2) 영정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3호)

 3)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보물 1202호)

 4) 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 보물 1202호)

 5) 농암집 필사본 (보물 1202호)

 6)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보물 1202호)

 7) 분천긍호록(汾川肯好錄 보물 1202호)

 8) 교지, 교첩(敎旨, 敎牒 보물 1202호)

 9) 농암면례일기 및 영정개모일기 (보물 1202호)

 10) 구로회첩 (九老會帖보물 1202호)

 11) 내사본(보물 1202호)


◆ 긍구당(肯構堂)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2호, 긍구당이란 서경(書經) 대고편(大誥篇)에 나오는 구절로, 조상의 업적을 길이길이 이어받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는 신잠(申潛)이 현판을 썼다.


◆분강서원(汾江書院)

이 서원은 1613년(광해군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현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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