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 24장 분량의 장문 기사입니다.
천천히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은 사랑입니다 ❤️)
RIP Gerard Houllier.
(사이먼 휴즈; 2020년 12월 14일자 기사)
내가 지난번에 제라르 울리에와 이야기와 나누었을 때, 그의 기억은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웠다.
두 달 전, 나는 닉 밤비가 에버튼에서 리버풀로 이적한 이야기에 대해 기사를 쓰기로 마음억었다. 당연히 그 이적을 추진한 당시 감독과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느 정도 이른 시간의 아침이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조금 묻어났다. 대화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울리에는 그가 리버풀을 감독했을 당시 리버풀에게 에버튼에 비해서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도록 했다. 나는 그것이 에버튼 최고의 선수 밤비를 영입함으로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궁금했다.
그의 머지사이드 더비 전적은 훌륭했고 역대 리버풀 감독 중 유일한 구디슨 파크 원정 4승 기록을 보유한 감독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리버풀 시절 11번의 머지사이드 더비를 치렀는데요...”
그는 내 말을 정정했다. “사실 12번이었답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도 살짝 웃었던 것 같지만, 이는 기록이 그에게 중요함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했다. 내가 간과한 12번째 더비는 그와 로이 에반스 공동감독 체제에서 치러진, 0-0 무승부로 끝난 경기였지만 울리에는 세부적인 사항들에도 신경을 썼다.
밤비에 관련된 대화는 20분 가량 진행되었고 나는 인터뷰를 끝마칠 준비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리버풀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는 리버풀이라는 클럽을 사랑했다. 또한 리버풀이라는 도시도 사랑했다. 지식을 향한 갈망은 아직도 건재했다.
그가 오늘 아침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우리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리버풀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둔 전 감독이었고, 클럽이 다시금 유럽을 재패할 수 있는 위치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부임 기간 동안 체념에 빠진 클럽을 끄집어냈고 팬들이 다시 불가능을 꿈꿀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친절한 사람이자 도움을 주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2015년, 나는 내가 쓰던 책의 한 부분을 완성할 인터뷰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감색의 메르세데스 벤츠가 러시아워 때 파리의 마레 구역 가장자리를 돌며 휘볼리 거리를 내려왔다. 이윽고 이 고급 자동차는 급정거를 하더니 안에서 한 사람이 나오며 대로 너머에 있는 내게 손짓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그의 빡빡 깎은 머리 위로 내리쬐었다.
차를 몰고 있던 건 제라르 울리에였다. 내게 손을 흔든 사람은 그의 운전기사였다. 샤비에르 페레즈라는 이름의 그는 빳빳하게 다리미질이 된 흰색 랄프 로렌 셔츠와 검은색 넥타이, 그리고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금색 커프스 단추들은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반사되어 빛났다.
“이쪽은 샤비에르입니다.” 울리에가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옆사람을 소개했다. 페레즈는 1980년대에 레드스타에서 골키퍼로 뛰었다. 당시 레드스타는 파리 생제르맹과 라싱 클럽 이후로 세 번째로 파리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었다. “제 운전기사이기도 하지요. 안정감이 있다고 보증합니다.” 울리에가 농담을 던졌다. 울리에는 당시 68세였지만 5년 전 감독직에서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그렇기에 알랭 프로스트만큼이나 멋진 운전실력을 보유하며 그를 유럽 전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샤비에르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나는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울리에의 일정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수요일 아침에 그는 뉴욕에서 레드불 산하 축구팀들에 관한 비즈니스 미팅에 참석했고, 초저녁에는 프랑스 북부의 렌에 도착해 Leaders’in Football 컨퍼런스에서 참석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연했다. “미래의 운동선수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큰 책임감도 뒤따릅니다.”
울리에가 나를 만나 준 것은 그의 관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시간은 금요일 오전 10시였지만, 내가 그 전날 오후에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해서 다음날의 일정 조율을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지난 48시간동안 소화한 피로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만나는 것이 어떻겠냐고 내게 제안했다.
“60분 후에 봅시다.” 여권 검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날은 그 해 여름 파리에서 두 번째로 가장 더운 날이었다. 지하철 내부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고 철로 위는 끔찍할 정도로 건조했다. 차량이 취소되고 지연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70분 후에 호텔에 도착하며 공포에 질려있었다. 리버풀 감독이었던 울리에는 겉모습처럼 약속시간을 준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시간을 금처럼 쓰는 그가 특정 시간에 약속을 잡는다는 것은 그가 단 1분도 늦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울리에는 내가 허둥대며 지각을 한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더니 놀랍게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제스처를 취하며 내 걱정을 덜어주고 위로해줬다. 순간, 안도감이 파도처럼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샤비에르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어디로 가서 인터뷰를 진행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울리에는 나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그래서, 당신 캐라를 압니까?”라고 물었다. 비싼 가죽 커버가 그가 몸을 돌리자 구겨졌고, 나는 마침내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건강해 보였다. 그의 이마는 일자로 정리되어 있었고 주근깨가 나 있었으며, 그의 짙은 머리칼은 뒤로 쓸려 있었고 팔은 햇살에 검게 탔다. 땡땡이 무늬의 라코스테 셔츠 소매는 걷혀져 있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캐라는 참 환상적인 사람이지요.” 그가 마치 그 문장이 사견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다는 듯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리버풀에서 보냈던 좋은 시간들에 대해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침묵을 제이미 캐러거가 울리에처럼 감독이 될 것 같냐는 질문으로 깨뜨렸다. 캐러거는 언론에서 일하는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울리에는 몸을 일으켜 앉더니 팔짱을 끼고 허공을 응시했다. 한 번 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시도해 보면 좋겠네요.” 그가 말했다. 그의 말에는 그의 바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캐라가 시도해 봤으면 좋겠어요.”
1797년에 오스트리아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위풍당당한 대로 휘볼리 거리를 타고 돌아다닌 건 상황에 딱 적절해 보였다. 프랑스의 위대한 지도자 나폴레옹은 훗날 “영광은 덧없지만 무명은 영원하다”고 말했고, 이는 울리에의, 특히 울리에의 리버풀 커리어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의 체제에서 리버풀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경했는지를 쉽게 잊어버린다.
콥 스탠드에 자주 내걸리던 응원기만 봐도 그의 리버풀 시절이 얼마나 잘 잊혀지는지 알 수 있다. 응원기의 문구는 “성공에는 여러 아버지들이 있다”이며 지난 55년 동안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들의 얼굴이 있다. 빌 샹클리의 얼굴. 밥 페이즐리의 얼굴. 조 페이건의 얼굴. 케니 달글리쉬의 얼굴. 그리고 라파엘 베니테즈의 얼굴까지. 하지만 지난 25년 동안 그 어느 리버풀 감독보다도 더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제라르 울리에의 얼굴은 찾아볼 수가 없다.
리버풀 팬들에게 울리에의 위상은 희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01년에 리버풀에게 리그 컵, FA 컵, 그리고 UEFA 컵을 선물했고 그 다음 시즌에는 병으로 인해 입원하기 전까지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과 프리미어리그 2위라는 업적을 세웠다. 중요했던 리즈 유나이티드전에서 흉통으로 인해 하프타임에 브로드그린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된 울리에는 11시간의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1년 동안이나 검진을 받아야 했던 울리에는 5개월만에 감독직으로 복귀했으나 상황은 변했다. 그 다음 두 시즌 간 울리에의 영입 실적은 처참했고 거기에 더해서 과도하게 조심스러웠던 전술은 팬들로 하여금 그를 향한 사랑을 점차 거두도록 만들었다. 2004년 6월, 베니테즈가 울리에의 후임자로 결정되자 팬들은 이를 반겼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인 루브르 쪽으로 향했다. 샤비에르는 우회전을 하며 고급 패션 상점과 미용실들이 즐비한 레셸 거리에 우리를 내려줬다. 울리에는 상점 주인들 중 한 명과 친했다. 리넨 옷을 걸치고 멋진 은발을 한 중년 남성과 짧게 대화한 후, 우리는 노르망디 호텔 바로 들어갔다. 훌륭한 매력에 한 마디로 ‘프랑스다운’ 장소가 우리를 맞았다.
우리와 작별하기 전, 울리에의 친구는 일요일자 신문을 꺼냈다. 주말 신문에는 미셸 플라티니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눴던 바로 그 장소에서 가진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울리에는 이 사실이 퍽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미셸은...” 울리에가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소곤거렸다. “...아직도 신 같은 존재입니다.”
노르망디 호텔은 여느 스파이 영화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멤버들이 윗선을 상대로 모의를 짜는 장소처럼 생겼다. 아니면 자크 메스린의 흥망을 다루는 갱스터 영화라던가.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범죄세계의 통치자로 분해서 커튼 뒤에 숨어 누가 다음에 자신을 노릴지 긴장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햇빛 한 조각이 어두운 방을 밝혔고, 연한 적갈색 가죽 쇼파와 마호가니 원목 탁자, 그리고 버건디 색으로 칠해진 천장이 드러났다. 커다란 참나무 문은 열려 있었고, 벨벳 커튼이 실내와 외부를 구분했다. 옛 시간대에서 온 듯한 희미한 담배 향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피아노 옆의 호텔 카트에는 오늘자 레퀴프와 르 피가로 신문이 있었고, 작은 말굽 모양의 바에는 뚱뚱한 현지 남성들에게 페르노리카와 캄파리를 따라 주는 모로코인 웨이터 파리드가 있었다. 울리에가 와인을 마실 것이라고 예상한 나는 소비뇽 한 잔을 주문했지만 그는 기다란 잔에 라임을 넣은 에비앙 한 병을 주문했다. 그는 아내 이사벨을 지난 8일 동안 보지 못했기에, 그 날 저녁에 아내와 시간을 보낼 것이라며 그가 술을 시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로이 에반스는 그가 리버풀 감독직을 사임하며 5개월간의 험난했던 공동 감독 체제를 마치고 울리에에게 감독 전권을 이양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울리에를 두고 ‘자신보다 더 무른 감독’이라고 표현했지만, 동시에 그 자신은 할 수 없었던 리버풀의 발전을 이룰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앞으로 펼쳐진 몇 시간은 울리에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손쉽게 언어를 바꿔가며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다국어 가능자였고 항상 알맞은 어휘와 뉘앙스를 선택했다. 또한 그는 열정적이고 감정적이며 곱씹을 줄을 알았다. 그를 똑똑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과소평가로 느껴졌다. 그가 바이러스라고 표현한, 축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아우라의 형태로 노르망디 호텔 곳곳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대학교 강의실에 온 교수님과도 같은 권위로 이야기했다.
울리에는 질문을 기다리는 대신 그가 다져낸 팀이 이룩한 성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좋아하지만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가 깊은 생각에 빠지며 말했다. “인생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예술이 다가 아닙니다. 기초를 짓는 것과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축구에서 영원이라는 것은 매우 짧습니다. 길어야 3년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변화하고 발전하며 성장해야 합니다.”
“제가 받은 가장 기억에 남는 칭찬은 2001년에 UEFA 컵에서 우승한 후 데이비드 무어스에게서 들은 칭찬입니다.” 그가 말했다. “데이비드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라르, 자네는 리버풀을 다시 유럽의 정상으로 올려놓았어. 그뿐만 아니라 클럽을 21세기로 인도했지.’ 돌아보면 그 말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 때 UEFA 컵을 우승한 것이 선수들로 하여금 2005년에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살린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팀들과 싸울 수 있는 욕구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입니다. 그 전이었다면 리버풀은 스트라스부르한테도 졌을 겁니다.”
그는 그가 리버풀의 주장으로 임명한, 그리고 그럼으로써 나중에 레전드 반열로 올라간 한 선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티븐 제라드는 나중에 제게 UEFA 컵에서 우승한 것이 4년 후 2005년에 리버풀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바로 요점입니다. 도움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축구에서는 흔히 A라는 사람이나 B라는 사람이 팀이 이뤄낸 성과를 혼자 캐리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축구는 때때로 개인적인 성과로 변모되어 버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팀 없이는 성공도 없습니다. 도움 없이는 성공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리버풀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서 90년대 후반에 많은 변화를 감행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릭 패리와 피터 로빈슨과 함께 저를 보러 파리로 왔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이유를 들어 제 리버풀 부임을 바랐습니다. 그들은 클럽의 변화를 바랐지만 또한 트로피를 자주 들어올렸던 한때의 문화를 재발견하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릭이 이를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팀이 경기를 준비하고 연습에 임하는 방식들을 바꿨습니다. 식단에도 변화를 주면서 선수들에게 훈련에 임하는 자세를 똑바로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들, 다른 리그들, 그리고 다른 태도들을 가진 선수들을 영입하며 장기적인 미래를 꿈꿨습니다. 축구계에서 막 일어나고 있었던 움직임과도 비슷했습니다. 전에 행해졌던 방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진화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할 때도 있다는 뜻입니다.”
울리에 체제 전의 리버풀은 40년 동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선수들은 바뀌었지만 감독이 바뀌어도 팀이 운영되는 기본 방식은 똑같았다. 성공은 적응에 대한 갈망을 없앴다. 선수 시절 리버풀에서 유러피언 컵을 들어올렸던 그레이엄 수네스는 1991년의 케니 달글리쉬의 후임자로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 전에 글래스고 레인저스에서 성공을 맛봤던 수네스는 레인저스의 현대화를 경험했고, 리버풀의 훈련 시설, 식단, 훈련 세션 등을 개혁하려 했으나 멜우드의 리버풀 선수들은 그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비록 많은 팬들이 수네스 시절을 재앙이라고 치부하지만, 울리에는 수네스가 아니었다면 그 역시 리버풀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선수 시절의 그레이엄 수네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제 우상 중 하나였습니다.” 울리에가 말했다. “프랑스에서 그는 가장 영국다운 축구선수로 비춰졌습니다. 신체적으로, 기술적으로, 그리고 전술적으로 무척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저는 리버풀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그에 관련된 책들을 읽었고 그가 감독직을 수행했을 때 마주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갑작스러운 변화들을 너무 많이, 너무 빨리 감행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변화를 서서히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쩌면 시즌 중간에 로이를 대신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의 습관을 섣불리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수네스를 에반스로 교체한 리버풀은 다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갔다. 역대 최고 득점자 이안 러쉬는 수네스가 금지했던 경기 전 빈즈 앤 소시지와 토스트를 다시 먹기 시작했고 리버풀 선수들은 보다 많은 사회적 자유도를 다시 보장받았다. 또한 부상 담당은 간단한 조치만 취할 수 있던 로니 모란에게 다시 돌아갔다. 수네스는 멜우드에서 부상자들이 전문적으로 정밀 진단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도입하기를 원했으나, 해당 요청은 보드진에 의해 묵살되었다.
당시 다른 클럽들은 영양사들과 체력 코치들을 고용하며 선수단을 더 프로답게, 그리고 건강히 유지시켰다. 어린 영국 선수들은 전술적이고 기술적으로 성장해갔으며 외국에서 초빙된 강사들의 강연을 들으며 음주를 줄이고 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사람들이 되어갔다. 반면 리버풀은 여전히 편협한 사고방식에 갇혀 있었고 에반스는 ‘다른 클럽들도 다 한다는 이유로 섹시한 외국인을 영입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외국인을 영입하지 않겠다고 말한 에반스는 세 시즌 연속으로 선두 레이스를 달리다가 뒷심 부족으로 항상 우승컵을 내 준 이후로 외국인과 자신의 직책을 공유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에반스가 선수들을 너무 살살 대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수네스가 수년 전 시도했던 것처럼 선수들의 기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1996년에 아스날 감독으로 부임한 아르센 벵거의 이름을 들어 본 영국인들은 드물었다. 그러나 벵거는 두 시즌만에 중위권 아스날을 우승으로 인도하며 아스날의 이미지를 자동문 수비에서 센세이셔널한 공격으로 변화시켰다. 벵거는 프랑스 출신이었다. 리버풀 보드진은 그들 역시 비슷한 배경의 감독을 데려올 수 있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울리에와 리버풀의 인연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69년에 월튼 지역과 부틀 지역이 만나는, 그리고 안필드에서 1.5마일도 안 떨어진 퀸즈 드라이브 거리에 위치한 알솝 컴프리헨시브 중등학교에서 조교로 일했다. 또한 그는 공부를 계속하면서 “불우 지역에서 자라나며”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가 아직도 “리버풀 8지구”라고 부르는 톡스테스 지역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논문이었다.
“리버풀은 항구도시고 잉글랜드 북부 무역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울리에가 회상했다. “그러나 맨체스터가 국제공항을 지으며 항구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항만 관리소장들과 영연방 이민자들이 리버풀 8지구에 살았습니다. 기근이 시작되고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지역의 정체성은 완전히 바뀌어버렸고 리버풀에서 산다는 것은 점차 어려워져 갔습니다. 1970년의 리버풀 실업률은 20%가 넘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로 그렇게나 높았던 적은 없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리버풀은 축구를 잃지 않았다. 1960년대의 빌 샹클리의 팀은 불멸의 팀이었고, 해리 캐터릭의 에버튼은 자본을 앞세운 모습 때문에 ‘머지사이드 갑부’로 불렸다. 울리에는 콥 스탠드의 테라스에 서서 리버풀이 UEFA 컵 경기에서 던도크를 상대로 10-0 대승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봤다. 울리에의 옆에는 프랑스에서 리버풀을 방문한 친구 파트리스 베르게스가 있었다. 베르게스는 나중에 울리에를 보좌하는 리버풀의 수석코치가 된다. 울리에는 토요일 아침마다 강한 팀들만 살아남는다는 아마추어 레벨의 징가리 리그에서 알솝 청소년들과 뛰며 스트라이커 자리를 소화했다.
학기가 끝나자 울리에는 프랑스 북동부의 농업 마을 테루안으로 돌아갔다. 울리에는 농부에서 도축자로 업종을 변경한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울리에는 교사의 꿈을 가지고 여러 초등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중등학교에서 가르쳤고 20대 중반에 상업 학교 강사가 되었다. 울리에는 계속해서 아마추어 축구를 계속했고, 위케이어와 르 투케에서 뛰었다.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던 울리에는 지역 클럽 뇌 레 민의 코치직이 비었다는 광고를 보고는 교육의 길을 벗어나 축구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바이러스죠.” 그가 말했다.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뇌 레 민의 역사는 석탄 광산에 있다. 울리에는 1976년에 헤드 코치로 부임했고, 나중에는 감독직에 올랐다. 베르게스는 미드필더로 뛰었다. 울리에는 6년간 클럽에 있으면서 팀을 프랑스 3부리그 하위권에서 1부리그 승격 직전까지 끌어올렸다. 모두가 놀랄 만한 성장이었고 1부 리그 팀 랑스는 울리에가 더 큰 클럽을 맡을 재량이 된다고 믿었다.
울리에보다 훨씬 더 많은 프로 축구 경험이 있는 감독들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울리에는 자신의 경험 부족을 동기부여로 삼았고 그의 축구에 대한 집착을 이용해 더 멀리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부를 좋아하는 그는 하루를 알차게 사용했다. 울리에는 일주일에 6일을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11시 이후에 집에 들어왔다. 울리에는 그의 헌신과 기발함만이 뇌 레 민같은 작은 클럽을 더 큰 자본을 가진 다른 클럽들과 견줄 수 있도록 만든다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저나 아르센 벵거같은 사람들은 코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왜냐구요? 프랑스 축구협회는 코치 양성에 매우 진지하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30년, 아니 40년 전부터 생겨났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보다 더 최근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제가 만약 영국인이었다면 제게는 당시에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선수 생활을 하려면 실력을 키우고 배워야 하는데, 코치와 감독도 선수와 같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의사가 되려면 7년을 공부해야 합니다. 엔지니어가 되려면 5-6년이 필요합니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탑클래스 코치가 되기 위해서 탑클래스 선수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기수가 되기 위해서 최고의 말이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울리에는 랑스를 감독함으로서 또 하나의 탄광 도시를 대표하게 되었고, 팬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수준이 자신들이 보여주는 극성의 헌신에 알맞기를 요구했다. 100%를 보여주지 않는 선수들에게는 팬들의 “a la mine”라는 고함이 뒤따랐고, 수많은 탄광들이 버려진 랑스는 리버풀처럼 사회적인 문제들이 산재한 곳이었다.
그러나 울리에 체제 하에서 랑스는 UEFA 컵 진출을 해냈고 세 시즌 동안 두 번의 탑7 진출에 성공했다. 이 성공은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클럽인 파리 생제르맹의 접촉을 불렀다. 1년 후, PSG는 클럽 역사상 첫 리그우승을 차지했다. 울리에의 부임은 성공적인 결정이었고 타이틀이 확정된 날, 선수들은 파르크 데 프랭스 경기장에서 그를 안고 높이 들어올렸다.
울리에 체제 파리에서 뛰었던 아르헨티나 공격수 오마르 다 폰세카는 후일 벵거 체제 모나코에서 두 개의 타이틀을 들어올렸고, 두 감독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는 울리에와 벵거 이전에 함께했던 감독들을 회상하며 그들은 전 축구선수들이었고 경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평가했다. 폰세카는 울리에와 벵거가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더 미래지향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말했다. 울리에는 심리학에 능했고 언론을 인상깊을 정도로 매우 잘 다루었다. “그의 배경과 언어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선수들을 어떻게 잘 다루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울리에와 파리의 동행은 실망스러웠던 1987/88 시즌 이후 상호 협의 하에 끝났고, 그는 프랑스 축구협회에 영입되어 코치직을 맡았다가 전술 디렉터로 취임했고, 곧 1992 유로에 나가는 미셸 플라티니의 프랑스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다. 플라티니가 조별리그 탈락 이후 경질되자, 감독직은 그 다음 순위의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44세의 울리에는 리버풀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뛴 지 22년만에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감독직을 맡게 된 것이다.
울리에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을 자신의 핵심 임무로 삼았고,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남은 두 경기인 이스라엘전과 불가리아전을 홈에서 치르며 각각 승점 1점만 얻으면 본선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 최하위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모두를 깜짝 놀래키며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뒀고, 불가리아전에서 다비 지놀라는 마지막 순간에 부주의한 플레이로 공을 빼앗기며 에밀 코스타디노프에게 생각지도 못한 결승골을 안겨주고 말았다. 프랑스의 월드컵은 거기서 끝이 나버렸고 그 경기의 여파로 울리에는 지놀라를 두고 ‘범죄자’라고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그 악명 높은 인터뷰를 해버렸다. 그 때 생긴 둘 사이의 앙금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에메 자케에게 지휘봉을 넘겨주며 해임당한 울리에는 축구협회로 돌아가서 프랑스 유소년 축구를 감독하고 기반을 다지는 업무를 맡았다. 1996년,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니콜라 아넬카 등이 있던 그의 선수단은 U18 유로 결승전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승리했다. 2년 후, 앙리와 트레제게는 프랑스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리버풀은 1997년에 처음 울리에와 비공식적으로 접촉하며 그가 안필드로 올 수 있는지 문의했다. 울리에가 로이 에반스와 공동 감독 체제에 돌입하기 12개월 전이었다. 리버풀은 에반스 체제에서 1996/97 시즌에 우승에 근접했으나, 2위 뉴캐슬과 같은 승점을 거두고는 득실차에서 밀려 4위를 차지했다. 시즌 막바지에 다다라서 실망스러운 패배를 연거푸 거둔 것이 에반스의 감독직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 해 초여름에 피터 로빈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울리에가 설명했다. “하지만 저는 월드컵 준비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국가대표팀을 버렸다면 역적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프랑스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겁니다.”
12개월 후, 울리에의 계약은 만료되었고 그는 다른 것을 시도해보기로 결정했다. 10년만에 첫 스코틀랜드 리그우승을 차지한 셀틱은 빔 얀선의 후임으로 울리에를 원했다. 론 앳킨슨을 경질한 셰필드 웬즈데이의 제의는 훨씬 더 구미가 당겼다. 울리에는 잉글랜드행에 매료되었다. “저는 잉글랜드 축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힐스보로로 향하는 것에 매우 근접했었다.
그리고는 로빈슨이 다시 전화를 걸어 와서 행운을 빌었다. 울리에는 여타 유럽 감독들처럼 프랑스의 윈터 브레이크 때 안필드로 와서 축구의 여러 방법론들을 배웠고, 그 때부터 로빈슨과 울리에는 정기적으로 서로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르센 벵거 역시 낭시 감독이었을 1980년대 중반에 같은 연수를 들었다.
“피터는 제게 ‘셰필드행을 축하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침묵했습니다. ‘음, 설마 아직 합의를 안 한 건가?’ 피터는 그의 논지를 매우 빨리 전달했습니다. ‘아직 셰필드행 결정을 안 했다면,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직 저와 셰필드 사이에는 계약 협의점이 모두 찾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 부임은 늦춰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터, 당연히 이야기를 나누겠네’라고 답했습니다. 그 다음 날, 피터는 릭 패리와 데이비드 무어스와 파리로 왔습니다. 10분 이후, 우리는 합의에 다다랐습니다.”
울리에가 안필드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불명확했다. 로빈슨의 접촉과 파리에서의 급한 만남은 리버풀의 보드진의 승인을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울리에가 클럽 감독으로 부임한다면 빌 샹클리 이후 40년만에 외국인 감독이 리버풀로 오는 것이었다.
당초 보드진은 로이 에반스 유임을 더 원했다. 그들은 울리에가 로니 모란 대신 1군 코치직을 맡기를 원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그러한 제안이 울리에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사람에게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풋볼 디렉터직도 제의되었지만 로빈슨은 울리에가 선수들과 만나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보드진은 둘을 공동 감독으로 만드는 것을 승인했고 울리에는 에반스가 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저는 그가 몇 년간 잘 해왔다고 생각했고 그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울리에는 자신이 10년이 넘도록 클럽 팀을 맡지 않았다는 사실에 걱정하지 않았으나, 클럽 감독직과 국가대표팀 감독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클럽 축구는 절대 멈추지 않는, 매일매일 헌신해야 하는 축구입니다.” 그가 말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좀 더 멀리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반대로 기세를 타는 것이 더 까다롭습니다. 팀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적게 주어지기에 결정을 보다 예리하게 내려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클럽 축구를 더 좋아합니다. 더 기반을 다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수들이 축구선수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깁니다. 클럽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단기적인 계획, 중장기적인 계획, 장기적인 계획을 모두 세울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것밖에 신경쓸 수 없습니다.”
“제가 리버풀로 갔을 때 저는 아마추어 수준부터 국가대표팀 수준까지 모든 수준의 축구를 경험해 봤기에 준비되어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술 디렉터로 일했던 시간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게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줬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라운드 위의 코치 역할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프랑스에서 저는 한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열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전술 디렉터로 부임한 뒤로 저는 향후 십 년을 어떻게 준비할지를 배웠습니다. 저는 리버풀에서 팬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트로피를 최대한 빨리 따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장기적인 계획도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리버풀에는 모든 것을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안필드 부임 4개월 후, 결과는 좋지 못했고 선수단은 감독진 상태에 혼란을 느꼈다. 오래된 선수들은 에반스의 편을 들었고 새로 온 선수들은 울리에의 편을 들었다. 둘의 관계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울리에는 보드진 회의에 참석해 만약 모두가 원한다면 에반스에게 전권을 부여해 시즌을 끝내고 새 시즌에 자신이 전권을 맡는 것을 제안했다.
“공동 감독 체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팀이 어떻게 경기를 준비하고 선수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울리에가 설명했다. “저는 선수들에게 더 단호했고 로이는 더 편하게 대했습니다. 우리가 훈련 세션을 계획하면 몇몇 선수들이 ‘로이, 그냥 체육관에나 있을게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됐을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선발 라인업에 대한 이견조차도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로이의 팀입니다.’ 만약 리버풀이 다음 여름에 저를 원한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릭 패리가 나서서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선수들이 자신들이 결정권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논점을 펼쳤습니다.”
보드진과 멜우드의 전달자 톰 사운더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울리에가 말했다. “필 톰슨에게 물어봐도 같은 이야기를 할 겁니다. 톰은 늘 지혜를 가지고 친절하게 도움을 자청했습니다. 한 번은 보드진 회의에서 그가 일어서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리에 씨, 우리는 우리가 세계최고의 팀이 아직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우리는 인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일을 하세요. 클럽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저는 그 회의장에서 퇴장하면서 이제 리버풀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필요한 자신감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울리에는 그의 앞에 놓인 일을 정리하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
“리버풀 감독의 역할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결과를 얻고 트로피를 따내는 것. 저는 릭 패리에게 ‘제가 해냈으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제게 리버풀에는 우승의 전통이 있기에 이것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유산을 남기는 것. 제가 떠난 후에 유산을 남겼는지에 대한 언쟁이 없도록 확실히 하고 싶었습니다. 몇몇 감독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샘 앨러다이스는 끊임없이 선수들을 사고, 사고, 또 삽니다. 유리 조르카에프 등 34, 35세 먹은 선수들까지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히피아, 헨쇼, 하만같은 선수들을 샀습니다. 어린 영국 선수들도 활용했습니다. 최상의 방법은 모두의 기여를 등에 업고 클럽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타일을 가지고 감독직을 수행하고 자신의 특색을 보여준다면 클럽에 족적을 남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필드를 발전시켰고 새로운 멜우드를 지었으며, 데이비드 무어스의 말을 빌리자면, 리버풀을 21세기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보유한 선수들은 모두 동시에 커리어 황혼기를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역할은 선수들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캐러거는 발전했습니다. 머피도 더 나은 선수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크루로 임대보내서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탑재한 선수가 되어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마이클 (오웬)은 발롱도르를 탔습니다. 히피아는 리버풀로 오기 전까지 무명이었습니다. 헤스키는 아무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했지만 저만은 그를 믿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좀 더 믿었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따낼 수 있었을 겁니다. 때때로 모든 선수들을 통해 성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로비 (파울러)는 좋은 순간들도, 나쁜 순간들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저는 우리가 괜찮게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5년 동안 여섯 개의 트로피를 따낸 건 꽤 나쁘지 않았습니다.”
울리에가 리버풀로 와서 로이 에반스와 공동 감독 체제에 돌입한 1998년 여름, 그는 자신의 선수단을 ‘재능 많지만 제 실력을 못 내는 선수단’이라고 평가했고 수비가 조금 약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로비, 마이클 오웬, 그리고 스티브 맥마나만으로 이루어진 좋은 공격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스티브가 우리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가리라는 것을 얼마 안 되어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리버풀의 문제는 외부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드레싱룸은 자기 자신을 총독이라고 불렀던 폴 인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울리에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스를 판매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그는 알렉스 퍼거슨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맏았다. 퍼거슨은 3년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똑같은 결정을 내렸던 적이 있다. 퍼거슨은 울리에에게 인스의 판매는 리버풀 감독으로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정 중 하나라고 조언했다.
“주장을 파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울리에가 주장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그 방출이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왜냐구요? 폴 인스의 방출로 인해 스티븐 제라드, 마이클 오웬, 제이미 캐러거, 대니 머피, 그리고 데이비드 톰슨이 모두 자신들의 재능을 꽃피웠기 때문입니다. 폴은 매우 거대한 영향의 선수였고 환상적인 선수였습니다. 저는 그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이자 리버풀 주장이었습니다. 왜 그를 방출했을까요? 왜냐하면 유망주들에게는 숨을 돌릴 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폴은 사교 모임을 개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계속해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문화가 없어지기를 원했고 선수들이 축구에 집중하기를 바랐습니다.”
리버풀이 FA 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경기 막바지에 두 골을 실점해 탈락한 후, 폴 인스의 리버풀에서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은 명확해졌다. 리버풀은 경기 시작 3분 후 마이클 오웬의 선제골로 승기를 잡았다. 울리에가 전권을 잡은 지 두 달 만의 일이었고 당시 경기에서 리버풀은 리드를 지키기 위한 수비를 견고하게 해냈다. 경기 71분, 인스는 교체가 필요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우리는 맨유를 탈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울리에가 회상했다. “우리에게는 매우 큰 결과였을 겁니다. 결국 맨유는 그 시즌에 트레블을 달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순간들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폴은 근육 염좌가 생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라운드를 걸어 나갔습니다. 저는 ‘잠깐만, 넌 리버풀 주장이잖아. 올드 트래포드에서 네 친정팀을 상대로 1-0으로 이기고 있다고’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리버풀 주장이 이런 경기에서 교체되어 나간다면,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됩니다. 며칠 후, 폴은 다시 훈련을 받으러 훈련장으로 나왔습니다.”
팀 미팅에서 인스는 선수단 앞에서 울리에에게 훈련에서 공격의 비중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울리에는 이를 감독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울리에 부임 이후 팀이 득점을 덜 한 것은 사실이나 수비적으로 골을 훨씬 덜 실점했다. 울리에는 이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저는 수비, 중원, 그리고 공격을 이어주는 전술적인 움직임에 집중하는 훈련 세션을 짰습니다. 그게 제 코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5인 모의 훈련을 할 때마다 전체적인 움직임을 관찰하는 제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습니다. 훈련 결과를 기록하면서 저는 누가 모의 훈련에서 이겼는지, 누가 졌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폴은 5인 모의 훈련을 좋아했지만 승리하는 팀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공격 전술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 기분 나빠했을 때 저는 선수단 앞에서 그가 60번의 5인 모의 훈련 중 고작 다섯 번 이겼다고 말해줬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토론은 끝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울리에는 잉글랜드 선수들의 성격을 좋아했다. “일단 그들은 기꺼이 더 싸우려 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팀과 클럽을 향한 커다란 갈망이 있습니다. 그들의 승부욕은 굉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충성스럽습니다. 그들의 감독과 팀 동료들에게 충성스럽고 솔직합니다. 진실을 말해주고 부정한 방법을 쓰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계질서를 매우 중시합니다. 상관은 상관으로 대우합니다.”
그러나 리버풀 선수들은 너무 많은 권력을 쥐고 있었고, 울리에는 선수들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질 경우 비현실적인 기대가 뒤따른다고 믿었다.
“압박감은 팀의 가능성과 그들의 능력 사이의 괴리감으로부터 나옵니다. 제가 클럽에 왔을 때 선수단에는 바브, 하크니스, 맥아티어 등 유명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가 영입한 선수들은 하만, 헨쇼, 히피아였습니다. 팀과 클럽 내의 결합을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3년은 팀에 머물러야 합니다. 저는 그 기회를 받았습니다. 1998년에 리버풀로 온 저는 2001년까지 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습니다.
제이미 캐러거는 울리에가 리버풀의 플레이 스타일을 논의할 때 잉글랜드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울리에는 이것이 급한 변화를 주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저는 프랑스인이긴 하지만 혁명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은 개혁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변화를 설득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캐라와 대니 머피에게 특히 그랬습니다. 그들은 야성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제 말을 들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옳은 결정을 내렸고 히피아같은 경험많은 국가대표 수준의 외국 선수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항이었습니다. 제이미 레드냅도 좋은 선수였지만 부상을 당했습니다. 로비 파울러도 그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었고, 저는 제가 그의 전성기였던 2-3년 전에 리버풀로 왔으면 어땠을까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울리에는 21세기에 축구선수로 뛰면서 압박감을 견딜 수 있는 멘탈리티를 가진 어린 로컬 선수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파울러와 데이비드 톰슨에게도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결국 둘 모두 판매되었다.
그는 제이미 캐러거가 자신의 양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제이미는 경기를 영리하게 읽을 줄 알았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경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습니다. 중앙 미드필더, 레프트백, 라이트백까지. 어쩌면 그는 한 포지션에서 계속 뛰기를 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러한 갈망이 자신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인내심을 가졌고 제게도 인내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헨쇼와 히피아를 중앙 수비수로 기용했고 이는 모두가 알다시피 캐라의 주 포지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애초부터 그에게 그를 스스로 진화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찾을 수 있는 선수로 보고 있다고 설명해 줬습니다. 캐라는 프랑스의 파트리크 바티스통과 막심 보시스같은 선수였습니다. 그 둘은 풀백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핵심 중앙 수비수로 거듭났습니다. 어렸을 때 겪었던 다양한 경험이 경기를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상황들에 마주했습니다. 풀백들은 센터백보다 공 소유에 있어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캐라는 자신에 실력에 걸맞는 찬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패스 실력을 보유했고 공을 잃는 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그가 빌드업의 시초가 되었던 수많은 경기들과 수많은 득점들을 기억합니다.”
“캐라는 매우 승부욕이 강한 사람입니다. 승부욕 면에서는 루이스 페르난데즈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때때로 재능많은 선수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 중 일부는 태만한 태도로 인해 커리어의 정점을 찍지 못합니다. 캐라는 아마 몇몇 선수들에 비해서 재능은 부족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좌우한 것은 그의 태도입니다. 프로정신 없는 재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옳은 방향으로 일을 하며 세부적인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건 제게 있어서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선수들에게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일하고 연습하는 방식이 결국 그들의 실력을 꽃피울 것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캐라가 이 철학의 산 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재능많은 선수는 아닐지도 모르나 매우 결단력 있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승부욕이 강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팀플레이어입니다.”
“그의 공포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몇몇 선수들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캐라는 정말 자신감 있는 사람이고 저는 그 모습을 좋아합니다. 마이클 오웬도 똑같습니다. 스티비는 초반에 조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의 자신감을 찾도록 도와줄 수도 있고 깨부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균형을 내면화시킬 수 있는 건 선수 자신들뿐입니다. 공포와 자신감, 겸손과 야망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다가올 일에 대비하는 것이겠죠.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모습입니다.”
울리에는 리버풀로 왔을 때 스티븐 제라드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나 로이 에반스가 떠나고 수 주 뒤, 울리에는 제라드가 유소년 선수단에서 보여준 공격적인 경기력에 대한 보상으로 1군 데뷔를 선물했다.
“모든 감독들은 저마다의 철학이 있습니다. 저는 측면 선수들을 활용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중앙 플레이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선호했습니다. 팀이 더 견고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중앙 미드필더는 경기가 벌어지는 곳 정중앙에서 뛰기 때문에 각 포지션의 역할을 잘 이해합니다. 그들은 골키퍼나 중앙 수비수, 풀백들에게서 공을 받아 측면과 전방, 또는 후방 패스를 수행합니다. 그렇기에 각 포지션의 전술적인 움직임을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른쪽에서 뛸 선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스티브 헤이웨이는 ‘어쩌면 내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게 아카데미로 가서 유소년 축구 경기를 관전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블랙번을 상대했던 경기로 기억합니다. 저는 멜우드에서 헤이웨이가 말해 준 선수가 연습 경기를 뛴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실제 경기의 치열함은 연습과는 다릅니다.”
“5분 후, 저는 그 선수가 제가 찾는 역할에 맞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리치 파트리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중원을 뛰어다니며 동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거친 태클을 일삼으며 장거리 패스든 단거리 패스든 계속해서 찔러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빨랐고 경기를 읽을 줄도 알았습니다.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누구인지 물었고 그들은 제게 그 선수가 U18 선수라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그는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대신 콜업되어 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지켜볼게’라고 말하며 경기장에 남았습니다. 후반전에도 똑같았습니다. 그는 경기를 지배했고 경기의 속도를 조절했습니다. 18살이 된 지 얼마 안 됐고 다른 선수들보다 2년은 더 어렸는데도 말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저는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름이 뭐니?’라고 물었고, 그 아이는 제게 자신의 이름이 스티븐 제라드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내일부터 멜우드로 나와서 1군 선수들과 같이 훈련해라’고 일러 줬습니다. 그는 살짝 긴장하며 다음 날에 이미 아카데미 일정이 잡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스티븐. 이제 너는 우리와 함께 할 거다.’”
“다음 날 아침, 훈련 세션 중 중원에서 공 탈취 훈련이 있었습니다. 스티븐 제라드가 폴 인스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저는 파트리스에게 돌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준비가 됐어.’”
그러나 제라드의 몸은 프로 축구에 적응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멘탈리티 면에서 그는 제가 봐 왔던 어린 선수들 중 최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상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훈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유를 찾지 못했고 이는 제게 좌절감을 안겨다 줬습니다. 훈련을 하지 못한다면 뛸 수가 없습니다. 한 시즌에만 70경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티븐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상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울리에는 프랑스의 외부 물리치료사들을 불러 제라드를 특별 전담하도록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몇몇 사람들이 그의 부상 때문에 그를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말입니다. 당시 리버풀에는 부상 문제를 달고 있는 선수라면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잠재력을 알아봤습니다. 저는 그의 잠재력에 들떠 있었습니다. 스티비의 몸은 계속해서 자라고 있었고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시간을 줬습니다.”
울리에가 값싼 이적료의 사미 히피아와 스테판 헨쇼를 주전으로 발탁하기 전, 그는 센터백으로 젊은 영국 듀오를 세우려 했었다.
“솔 캠벨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리오 퍼디난드도 특출났습니다. 저는 퍼디난드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매우 현대적인 수비수였고 볼터치로 점유율을 가져갈 줄도 알았습니다. 그는 수비수였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그 사실을 잊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주어진 예산은 £12m이었고 저는 그 예산으로 수비진을 개편해야 했습니다. 제 탑 타겟은 퍼디난드였습니다. 그는 당시 18살이었습니다. 이적료는 £12.5m였지만, 저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의 센터백을 영입해야 했습니다.”
“피터 로빈슨의 도움으로 저는 빌럼 II의 사미 히피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피터는 유럽 축구를 담당하는 TV 프로그램 스태프를 친구로 두고 있었고, 그 친구는 주로 네덜란드에 있었습니다. 그는 피터에게 좋은 센터백이 있다고 귀띔해줬습니다. 저는 피터에게 만약 그가 정말 좋은 센터백이라면 아약스나 PSV 에인트호번이나 페예노르트가 그를 영입했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저는 결국 적절한 후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보러 갔고, 15분 후 그를 원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가 수비하며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는 모습과 자신감 있게 패스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히피아를 영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헨쇼는 블랙번에 있었습니다. 로이 호지슨은 제 친구였고 당시 블랙번 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는 블랙번으로 갔었고 경기를 볼 때마다 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견고한 수비를 펼쳤고 늘 있어야 할 곳에 가서 수비를 했습니다. 히피아의 이적료는 £2m였고 헨쇼의 이적료는 £3.5m였습니다. 남은 돈으로 하만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는 향후 몇 년을 책임질 클럽의 초석이었습니다.”
울리에는 탑 타겟을 데려오기 위해 리버풀의 역사를 이용했다.
“리버풀은 두 가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틀즈와 축구죠.” 그가 말했다. “사람들의 가슴에 특별한 공명을 가져다 줍니다. 마법을 부린다고나 할까요. 리버풀은 그만의 문화와 역사, 성격, 그리고 도시의 따뜻함으로 인해 인기를 끕니다. 우리는 많은 클럽들의 구애를 받던 마르쿠스 바벨의 영입에 성공했습니다. 영입전은 치열했지만, 저는 베벨에게 우리는 단기간 안에 트로피들을 따낼 거라고 설득했습니다. 또한 리버풀에서 트로피를 따내는 것이 다른 클럽에서 트로피를 따내는 것보다 더 값질 거라고도 이야기했습니다. 리버풀을 위해서 무언가를 우승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으로 그는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는 클럽의 보드진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다른 클럽들만큼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리버풀은 단 한 번도 부유한 적이 없었습니다. 클럽의 철학은 늘 어린 선수들을 사서 그들을 발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욘 아르네 리세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그를 적은 이적료에 데려와 제 시절과 베니테즈 시절을 포함해 그의 전성기를 이곳에서 보내게 했고 더 큰 이적료에 그를 로마로 판매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었습니다. 다른 클럽들은 이적시장에서 실패를 저지르고도 큰 타격 없이 지나갈 수 있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로이 에반스의 리버풀은 허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울리에 부임 2년 후, 그러한 평판은 뒤바뀌었다. 리버풀은 상대하기 까다롭고 힘든 팀이 되어 있었다.
“감독이 되면 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상대팀을 어떻게 하면 더 괴롭게 할 수 있을까?” 울리에가 말했다. “예를 들어, 저는 로마가 좋은 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를 막으려 노력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강점이 그들에게는 약점이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상대하는 팀들의 약점들을 탐구했고 이는 우리의 선발 명단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항상 같은 선발 라인업만을 고집하던 리버풀에게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로테이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로테이션으로 멋진 결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에밀이 왼쪽에서 뛰고 마이클이 전방에서 혼자 뛴 바르셀로나전 0-0 무승부가 이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경기가 끝나고 너무 수비적으로 나섰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저는 이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2차전을 반드시 승리로 장식하리라 마음억었고, 개리 맥칼리스터의 페널티킥으로 1-0 승리를 거뒀습니다. 사람들은 안필드의 분위기 때문에 2차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1차전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 경기는 바르셀로나에게 ‘이 리버풀 팀은 한 골도 내 주지 않을거야. 캄프 누라고 해도 말이지’라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심리학적으로, 그 결과는 그들에게는 손해였고 우리에게는 훌륭한 결과였습니다.”
울리에는 전무후무한 트레블을 달성하고 부임 후 처음으로 3위에 들어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한 2000/01 시즌 선수단을 표현하기 위해 다섯 개의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또한 내게 UEFA 컵 우승이 자신을 유럽 대륙 대회 컵을 들어올린 유이한 프랑스 출신 감독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다른 한 명은 1996년에 파리 생제르맹에서 리버풀을 누르고 컵 위너스 컵을 우승한 루이스 페르난데즈였다.
“제 선수들은 너그럽고, 재능 많고, 자신들을 믿었고, 야망이 있었으며 회복력도 대단했습니다 (My players were generous, talented, believing, ambitious, and resilient).” 그가 말했다. “그들은 축구를 즐겼습니다. 훈련에서 그들의 동료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매우 빨리 좋아졌고, 기쁨과 좋은 경기력이 만연했습니다.”
그가 리버풀 감독이 되었을 때, 클럽은 피트니스, 골키퍼, 수비, 그리고 공격 전문 코피들을 고용할 만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 저는 제 코치진들과 회의를 가지며 제가 원하는 바를 피력했습니다.” 울리에가 말했다. “그리고는 훈련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며 전술적으로 추가할 사항이 있을 때만 나섰습니다.”
그러나 클럽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인생을 지배했다. 리버풀 감독이 되려면 감독직에 집착해야 했고, 이를 중대한 임무처럼 다뤄야 했다.
“네, 150% 집중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단순한 직업이 아닙니다. 임무입니다. 패배할 때도 있지만 그 패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패배했다고요? 괜찮아요, 다음 경기로 가면 됩니다. 잘못된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된 메시지를 던지는 꼴입니다. 몇몇 감독들은 영상을 돌려 보지만, 저는 제 선수들을 믿었습니다. 저는 영상을 이용해서 선수들이 잘한 일들을 보여주고 싶었지, 그들이 잘못한 일들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과거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축구 외의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가령 친구들과 식사를 한다거나 영화관에 가는 일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일들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가 없습니다. 외부의 사람들은 시즌이 끝나면 축구도 잠시 멈춘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들에게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빌 샹클리는 한 해에 있어서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시즌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을 제외한 클럽의 모든 사람들은 휴가를 떠납니다.”
“그러나 감독은 그럴 수 없습니다. 바로 다음 도전에 대비해야 합니다. 지나간 시즌은 과거에 두고, 잘못된 것들로부터 배우며 다음 무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늘 그래 왔습니다. 그 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팀을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영입생들과 방출되는 선수들에 달렸습니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울리에는 2001년 10월에 안필드에서 열린 리즈전 하프타임 때 흉통 때문에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흉통의 원인이었던 고혈압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집안 내력인 유전적으로 얇은 동맥 때문이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바쁜 여름 이적시장을 보냈던 울리에는 휴식을 취하지 않았고, 리버풀은 채리티 쉴드와 유러피안 슈퍼 컵을 들어올리며 리그에서도 좋은 출발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9월 첫째 주에 선수단 대부분이 A매치에 차출되어 갔을 때 휴식을 잠시 취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쉬는 대신 프랑스로 돌아가 안소니 르 탈렉과 플로랑 시나마퐁골레를 관찰했다. 나중에 그는 르 아브르에서 그 두 선수들을 데려왔다.
울리에는 리즈전 동안 발생한 흉통이 왜 생겨났는지 영문을 몰랐다.
“하프타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만약 경기 종료 즈음에 흉통을 느꼈다면 저는 지금 이 곳에서 당신과 얘기하고 있지 못하겠지요.” 그가 냉혹하게 말했다. “풀타임 후에는 안필드 주변 교통 상황이 무서울 만치 정체되고 만약 그 때 병원으로 갔다면 앰뷸런스가 제 시간 내에 병원으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프타임 때는 그러지 않아요.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독감인 줄 알았습니다. 비타민제를 복용하고 다시 경기에 나서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클럽 팀닥터 월러 의사가 저를 막아서더군요. 그는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절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 혈압을 재더니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상황은 행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잉글랜드에는 심장 전문 병원이 고작 세 곳밖에 없었고 그 중 하나가 안필드에서 몇 마일 안 떨어진 브로드그린입니다. 하프타임 때의 원할했던 교통 상황 덕분에 10분도 안 되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행운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심장질환 수술을 주로 담당하는 의사가 해당 주말 동안 딸을 리즈에 바래다주기 위해 휴가를 내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피곤했는지 리버풀에 남기로 결정한 겁니다. 다행히 제가 병원에 갔을 때 주변에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울리에는 곧바로 대동맥 수술에 들어갔다. 보통 9시간 걸리는 수술이지만 11시간 반이 걸렸다. 그의 생사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팀은 챔피언스리그 경기 때문에 키예프로 갔습니다. 그 일이 비행기 안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아마 죽었을 겁니다.”
병원에서 머문 3주 동안 그는 두 발로 걸어다니기 시작했고 방에 텔레비전을 특별히 주문해 최신 축구 뉴스를 계속해서 봤다.
필 톰슨은 곧 대신 팀 선발과 다른 여러 문제들을 담당하기 시작했고, 축구에 관련된 여러 사항들을 울리에에게 곧바로 알리라고 릭 패리에게 주장했다. 울리에는 12월과 1월에 이루어진 아벨 사비에르와 니콜라 아넬카의 영입에 관여했다. 울리에가 요양하는 동안 아넬카는 코르시카로 날아가 그를 방문했다.
당시 리즈 감독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울리에에게 수시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전화들은 가끔 희한한 시간에 걸려오곤 했었다. 오리어리는 울리에를 두고 ‘밤 이외의 시간대에도 일하는 야행성’이라고 표현했다. 오리어리는 나중에 공개적으로 울리에가 축구 감독직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던 바 있다. “저는 그에게도 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 정도의 수술을 받은 후에는 축구 감독직같은 일을 맡으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울리에는 리버풀 에코 올해의 스포츠인을 뽑는 저녁식사에서 참석자들에게 당시 자신에게 축구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조언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차라리 숨쉬는 걸 완전히 잊어버리는 게 더 낫습니다.”
의사들은 울리에에게 적어도 11개월에서 12개월은 직장에 돌아가지 않고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5개월도 안 되어 정식으로 다시 복직했다. 당시 그는 54세였다.
“우리는 홈에서 로마를 상대로 2-0으로 이겨야만 했습니다. 저를 대신했던 필은 환상적이게 팀을 관리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가 경기장으로 가는 것이 팀에게 도움이 될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요소로 말이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화제가 제게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이 다른 데에 정신 팔리도록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약해진 모습의 울리에가 킥오프 조금 전에 덕아웃에 나타났을 때, 안필드 스탠드는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리는 2-0으로 이겼습니다.” 그가 미소지었다. “로마 감독 파비오 카펠로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나중에 제게 저를 본 순간 리버풀이 승리할 줄 알았다고 말해줬습니다. 선수들 역시 굉장한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 울리에의 복귀 시점은 알맞았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복귀 시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는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었다. 리버풀은 바이어 레버쿠젠을 상대로 1차전에 가져온 리드를 지키려 했었고, 수비적인 선수 디디 하만을 공격형 미드필더 블라디미르 스미체르로 교체했다. 결과는 4-2 패배였다.
“저는 상대 팀을 뒤흔들 변수를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울리에가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 “4강전에 진출했다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했을 겁니다. 만약 그 경기가 성사되었다면 우리보다 맨유가 더 힘겨워했을 겁니다.”
울리에는 다시금 한 번 축구의 성공은 종종 영입과 판매에 달렸다고 강조했고, 특히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투병 전 울리에의 영입 성적은 대단했다. 투병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울리에는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아니라 시간적 여유의 부재가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는 휴식 시간을 더 정기적으로 취해야 함을 강조받았고 리버풀 경기 직후 유럽 전역으로 날아가 선수를 관찰하는 대신 세프튼 파크의 자택으로 가서 아내 이사벨과 저녁을 보내야 했다.
“첫 결정은 제가 합니다. 어떤 유형의 선수가 필요하고 어떤 포지션에 필요한지 등 말입니다. 스카우트는 제게 선수 목록을 주고, 어떨 때는 새로운 이름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선수를 몇 번 관찰한 후 다른 스카우트들을 보냅니다. 그 선수의 성격에 대해서도 신중히 물어봅니다. ‘팀플레이어인가, 개인을 더 생각하는가? 훈련 때 성실히 임하는가?’ 이런 결정을 내릴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세 명의 선수들에 대해 잘못 판단했습니다. 선수를 사고 난 다음에야 그가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챈 적도 있었어요. 물론 맞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책임져야 하는 것은 감독입니다. 영입생의 실패는 감독의 책임입니다. 결정권자는 감독입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던 건 저입니다.”
2001/02 시즌 말과 그 다음 여름, 울리에는 투병 전에 영입을 위해 쏟았던 시간과 노력을 다시 쏟으면 안 된다는 의사의 충고를 들었다. 그는 그 때 영입한 세네갈의 엘하지 디우프, 살리프 디아오, 그리고 프랑스의 브루노 셰루를 두고 ‘기대한 것만큼 팀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울리에는 그 때 랑스에서 디우프를 감독했던 파트리스 베르게스의 추천과 조언에 많이 의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시인했다.
울리에는 2001년 12월에 파리 생제르맹에서 니콜라 아넬카를 임대로 데려왔다. 아스날과 레알 마드리드에서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전적이 있는 아넬카는 멜우드에서 태도 문제를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울리에는 아넬카의 완전영입을 마다하고 대신 디우프를 골랐다.
“일단 그 전 시즌에 거뒀던 성적에는 아넬카의 영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그를 영입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대리인들이 리버풀이라는 클럽을 불공평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커리어를 부활시켰던 클럽입니다.”
파리 생제르맹 회장 로랑 페르페레와 울리에의 친분은 이적료 협상으로 이어졌다. 리버풀은 아넬카의 재정 대리인과 협상에 들어갔고, 치열했던 협상은 꽤 잘 끝났다. 그러나 리버풀은 곧 아넬카가 다른 클럽들과도 협상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울리에는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은 정말 많은 돈을 원했고 만약 우리가 그 조건을 들어줬다면 그의 급료 때문에 드레싱룸에서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그만한 돈을 지불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협의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저는 그가 다시 아스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그가 급료를 더 올려받기 위해 경쟁을 붙이려고 맨체스터 시티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만약 그를 영입하고 그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계약 조건을 더 좋게 하기 위한 협상 전쟁이 일어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가 불만을 가진다면 다른 클럽으로 가기 위해 팀을 떠나려 했겠죠. 협상은 너무 오래 걸렸고, 궁극적으로 그만한 노력을 들여야 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넬카에 대한 제 생각은 맞았습니다. 그는 리버풀을 떠난 후 수많은 클럽들을 전전했습니다. 너무 많은 팀을 옮겼습니다. 다른 감독들도 같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의 대리인들이 주던 압박감에 대면할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축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그를 데리고 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재능많은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클럽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의 계약 문제는 위험 요소였습니다. 감독으로서 저는 클럽과 드레싱룸의 안정성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디우프는 골가뭄을 겪었고 오른쪽 윙으로 밀려나다가 리버풀 이적 첫 시즌에 셀틱 팬에게 침을 뱉고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울리에는 당시 그에게 ‘네가 방금 저지른 일은 남은 커리어 내내 너를 따라다닐 거다’라며 경고했다.
제이미 캐러거는 디우프가 멜우드에서 훈련한 첫 주에 그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할 만한 스피드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다. 울리에는 그와는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디우프는 잘 될 수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장했다. “성공의 완성은 멘탈입니다. 신체적으로, 기술적으로, 그리고 전술적으로 뛰어나야 하는 건 맞습니다. 디우프는 전술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멘탈리티가 없다면 본래 이뤄낼 수 있는 것의 절반도 이뤄낼 수 없을 겁니다. 스티비와 캐라는 올바른 멘탈리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두 시즌 동안 여론은 울리에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했다. 당시 전 리버풀 선수들이 울리에를 두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치명적이었으나, 울리에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를 비난해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빌 샹클리의 선수들 중 하나였던 이안 세인트존도 그 중 하나였으며, 라디오 해설자로 활동했을 때 울리에를 ‘그 프랑스인’이라고 불렀다.
“삶에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제게 묻는다면, 저는 당시 제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너무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때로 전 선수들에게 받는 비난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캐라도 제게 ‘왜 전 선수들은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클럽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저는 그들이 우리를 좀 더 응원해줘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나 비, 원정 경기장의 그라운드 상태 등의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심판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판정을 바꿔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언론도 우리가 제어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 의견이 옳지 않은 의견이고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해도 말입니다. 철면피가 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비판에 반응하는 방식을 충동적이기보다는 침착하게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에게는 수비적인 팀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그러한 꼬리표가 붙는다면 떨쳐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2000/01 시즌에 우리는 127골을 넣었습니다. 단일 시즌에 그보다 많은 골을 넣었던 리버풀 선수단은 역사상 딱 두 번 있었을 겁니다. 좋은 골키퍼, 좋은 수비, 그리고 좋은 스트라이커가 없다면 아무것도 우승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라운드에서는 그렇습니다.”
“그 다음 해에 우리는 승점 80점을 따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0년 동안 리버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더 높은 순위로 리그를 마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리그우승 역시 자연히 따라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해, 아스날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비난을 해댔습니다. 마치 결과가 좋지 않기만을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울리에가 정말 영입하고 싶었던 선수는 골키퍼 에드윈 반데사르였다. 멜우드 투어까지 했던 반데사르는 풀럼으로 갔다. 두 번째 옵션이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옌스 레만과 그의 팀 동료 토마스 로시츠키 또한 그 해 여름에 리버풀로 올 뻔했다. 그 둘은 나중에 아스날로 향했다.
노르망디에서의 인터뷰가 끝나자, 울리에는 다음날 나를 사무실로 초대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축구와 감독직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경기 자체가 젊어졌다고 표현할 수 있겠군요. 선수들, 코치들, 행정직들 모두가 더 젊어졌습니다.” 그가 말했다. “젊음은 곧 에너지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함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할 겁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가끔씩은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도 좋은 선택지입니다. 그러면 더 세부적인 것들을 볼 수 있거든요. 선수들의 태도, 공을 잃을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 등. 한 발짝만 물러나면 그들의 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라운드 중앙에서 모두에게 뭘 해야 하는지 시시각각 알려준다면 제어는 할 수 있겠지만 주관을 잃게 됩니다.”
“선수들에게는 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수들은 감독을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저는 아침 7시에 전화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감독으로서 우리는 결정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면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내린 결정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존중을 받는 겁니다.”
울리에는 2004년에 팀을 떠난 이후로 리버풀이 따낸 트로피 개수를 떠올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리버풀은 11년 동안 그의 후임자 라파엘 베니테즈가 따낸 챔피언스리그와 FA 컵을 포함해 세 개의 트로피를 따냈다. 울리에는 5년간 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지는 않았군요.”
역사는 응당 울리에 체제를 더 관대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리버풀은 빌 샹클리가 1959년에 리버풀 지휘봉을 잡기까지 12년 동안 리그 무관을 포함해 어떠한 트로피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울리에가 리버풀 감독직에 부임했을 때, 리버풀은 8년동안 리그 우승 트로피가 없던 상태였다.
울리에는 샹클리보다 단기간에 더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긴 했지만, 그가 떠났을 때와 그가 부임했을 때를 비교해 보면 리버풀은 리그 우승에 더 멀어져 있었다. 나는 울리에에게 심장 질환만 아니었다면 일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물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는 그가 남겨놓은 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감독으로 안필드에 처음 온 날에 대해 회상했다.
“샹클리 이후에 누가 왔나요? 페이즐리죠. 페이즐리 다음에는 그의 수석코치 페이건. 페이건 다음은 달글리쉬. 달글리쉬 다음에는 수네스. 그 후에는 로이 에반스. 언론이 ‘제라르가 누구야?’라는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내놓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감독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클럽을 떠날 때 그 팀의 상태가 어떠한지입니다. 팀에 부임했을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시작할 때부터 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팬들은 유산을 남긴 감독을 항상 기억할 겁니다. 저는 제가 베니테즈를 위해 유산을 남겼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제가 부임함으로서 저는 리버풀 감독직의 전통을 깼습니다. 저는 외국인도 리버풀 감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둘째. 베니테즈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선수단을 물려받았습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선수단 중 열두 명은 그 전 해에 저와 함께 뛰던 선수들이었습니다.”
“셋째. 저는 물러나기 전에 팀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시켰습니다. 2003/04 시즌에 탑4에 들지 못했다면 베니테즈는 부임한 시즌에 챔피언스리그에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부임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베니테즈가 사용할 수 있었던 리버풀의 시설들은 새로 지어졌고 다른 리그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리버풀은 리그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저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https://theathletic.com/2246606/2020/12/14/gerard-houllier/?source=user_shared_article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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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번역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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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감독상 시상에서 뱅거감독이 울리에 감독님 얘기를 먼저 꺼내고 클롭감독님이 울리에 감독님의 공과 그리움을 나타냈던 이유가 이해됩니다.
장문의 번역글 너무 감사해요!! 덕분에 리버풀의 역사와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되는 기쁨을 가질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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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2.21 09:13
번역하신다고 고생많으셨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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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신글 항상 잘읽고 있습니다 좋은 번역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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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감사합니다 ㅠㅠ 좋은글이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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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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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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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번역 감사합니다 막줄대로 아프지 않았따면 어땠을지 궁금하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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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님 늘 고생 많으십니다ㅎㅎ 혹시 복금 잠시 풀어주실수있을까요? 회사서 읽고싶응데 복사가 안되서요..ㅋㅋ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2.1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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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번역 고생 많으셨습니다ㅠㅠ 거의 자서전이네요. 울리에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RIP Houl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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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노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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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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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댓 후 감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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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엄청 길다 고생하셨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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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정말 고생하셨겠네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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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이제야 다 읽었네요 ㄷ 읽는것도 힘든데 만드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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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넬카가 지난번에 했던 리버풀을 향한 애정어린 인터뷰를 봤을 때 리버풀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본인이 종용했는지 에이전트의 농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돈으로 장난질을 좀 심하게 했군요.
아넬카를 잡지 않은 이유가 명확하게 있었네요.
전 리버풀 선수들의 비판을 이해하지 못 하던 어릴적 캐라는 지금은 본인이 그 전 리버풀 선수의 입장이 되어버렸고요. 참 인생사 새옹지마예요.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장문의 번역글 정말 잘 봤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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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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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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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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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마감합니다! 참여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