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어느 성탄절을 앞두고 미국 동부에 있는 어느 도시 시청 앞 광장에 성탄절 트리를 장식했습니다. 성탄 트리 앞에는 작고 초라한 마구간도 만들고 그 안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 동방박사들의 모습까지 그대로 재현해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모형을 바탕으로 성탄절에 특별 행사를 할 계획을 세워두었었는데 어느 날 어느 사람이 장난삼아 아기 예수 인형을 숨겼습니다. 아기 예수 인형이 없어졌으니 성탄절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급박해진 시 당국은 각종 방송매체를 통해 아기 예수가 사라져서 행사를 할 수 없을 수 있으니 아기 예수를 갖다놓아달라는 방송을 했고 이 일이 큰 잘못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가진 범인이 몰래 아기 예수 인형을 갖다놓으면서 무사히 성탄절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은 아무리 다양하고 성대한 성탄행사를 준비했어도 성탄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정확한 의미와 뜻을 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입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주여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지만 천사의 예언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그대로 인정할 때 마리아는 복된 사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아침 우리가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으로 온 세상이 떠들석하던 그 때 조용히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밤중에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천했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순전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깨어 있었기에 아기 예수님 탄생을 만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전해주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까지 달려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베들레헴 탄생은 성경 약속 성취와 다윗 후손의 증거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성탄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정말 이 시간 참 성탄의 의미를 깨닫고 정말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에 받아들이면서 성탄의 감격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가복음 1장 31절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자 예수의 탄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그녀와 정혼한 상태였던 요셉에게도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 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은 요셉이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다가 이제 마리아를 데려와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남자와 관계하지 않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마리아에게 예언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영광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진리에 대해 이런 예화를 이야기합니다. 어느 농촌 소녀와 사랑에 빠진 왕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간 젊은 왕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한 소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혀 꾸밈이 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해 보였습니다. 그녀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농촌의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왕은 한 순간 사랑의 포로가 되어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왕은 소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분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문관들은 명령을 내려 그녀가 이제 왕비라는 것을 선포하라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강요된 순종으로 얻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 수가 없다고 왕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참모는 그러면 그 소녀의 지위를 먼저 격상시켜 벼슬을 내리고 선물을 하사하셔서 공주들이 입는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그녀를 궁중으로 데려오라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녀가 지위와 보석 때문에 왕에게 시집을 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마침내 중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왕은 잠시 왕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농부가 되어 그가 사랑하는 소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농부로 살며 그녀가 입고 있는 동일한 누더기를 입고 동일한 음식을 먹고 동일한 오두막집에서 살아가며 그녀의 사랑을 얻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마침내 서로를 사랑하여 행복한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왕이 어느 시골처녀에게 찾아가서 그녀의 마음을 얻은 뒤 결혼을 하게 되는 이 이야기를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이 바로 이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절에 구원하러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 분을 모셔야 합니다. 또한 이미 우리의 삶가운데 그 분을 모시고 영접하여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이 구원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구원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 성탄절을 제대로 보내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살리는 삶은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내 마음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살아갈 때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지옥불에 떨어질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참 사랑을 전하며 구원의 감격을 알려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맞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 사랑의 증거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의 실천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이 일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정신과 생각과 지능을 갖고 돼지가 되어 돼지와 함께 돼지 우리에서 살아간다면 어떤 심정일지를 여쭤봅니다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그와는 전혀 비교가 될지 않을 정도록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십니다. 더욱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갚아주시기 위해 우리가 못박혀 죽어야할 형벌인 십자가의 형벌을 죄없으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최고의 사랑, 가장 고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9절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잭 켈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에 생긴 가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상황을 취재했을 때의 경험입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를 방문했을 때 그 곳에도 가뭄이 심각해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도시의 어느 동네에 들어갔을 때 한 작은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있고 배만 불룩했습니다. 한 사진기자가 가지고 있던 사과 하나를 그 소년에게 주었지만 소년은 힘이 없어 사과조차 받아들 수 없었습니다. 그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쪼개서 소년에게 주었더니 겨우 들 수 있었습니다. 사과를 받아든 소년은 한 입 꽉 깨물고 꼭꼭 씹었습니다. 그렇게 잘근잘근 씹어 즙처럼 만든 사과를 옆에 누워있는 더 작은 소년의 입에 넣었습니다. 기자가 볼 때에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였던 그 작은 아이지만 사과를 입에 넣어주고 씹을 수 있도록 머리와 턱을 손으로 잡고 움직여주었습니다. 알고보니 사과를 처음 받아든 아이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동생의 입에 자신이 먹던 사과를 넣어주고 동생이 싶을 수 있도록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기자들이 알아보니 이 형은 죽어가는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동안이나 이렇게 음식을 먹여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둘 다 숨이 붙어있는 것을 보며 빨리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해주었는데 안타깝게도 결국 형은 영양실조로 죽고 동생은 천신만고 끝에 기력이 돌아와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형의 처절한 사랑, 동생을 어떻게든 살리려는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사랑을 나눠주며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이 성탄절의 사랑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이웃에게 보여주는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자녀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오늘 우리가 오후에 예수탄생기념 사랑나눔잔치를 진행합니다. 벌써 12년째 계속되는 행사입니다. 매년 성탄절만 되면 가가호호 모든 고주리마을의 집에 찾아갑니다. 선물을 나눠드리고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탄생의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가 큰 사랑을 보여줄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아직 아니지만 이 추운 날씨에 집집마다 조그마한 선물과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간단한 선물이고 우리 가족만 시작했지만 우리 교회성도와 와우리교회 성도까지 거의 20여분이 함께 이 일에 동참합니다. 앞으로도 더 큰 사랑을 전하며 예수탄생의 의미가 이 땅에 참 사랑을 전해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이 성탄절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저와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맞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셋째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입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 마구간이었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 뉘어졌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상황에 대해 호적하러 올라온 사람들이 많아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참 사랑의 예언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구간탄생과 말구유에 뉘어지신 일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낮아지고 겸손해지신 것인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얼마나 낮아지신 일입니까? 그런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면서 귀족의 자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오신 것도 엄청난 낮아지심입니다. 또한 그렇게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평범한 상황에서 태어나실 수도 있는데 베들레헴탄생예언의 성취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시게 되었을 때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말구유에 뉘우시게 된 것도 낮아지심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공생애시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늠름하고 장성한 말을 타시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 또한 낮아지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낮아지심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가장 낮아지심을 보여주시는 사건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보여주는 여러 상징물을 따져 보자면 구유와 어린 나귀, 십자가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는 낮아지심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시는 겸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주시는 희생이 우리를 참 생명과 참 평화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의미있게 보내시려고 한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처럼 우리도 철저하게 낮아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사회, 우리의 모든 사람관계에서 우리가 진정 겸손과 낮아짐을 보일 때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는 평화가 이루어지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장 14절을 보세요. 함께 함께 읽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 천사들의 노래가 이 땅에 울려 퍼졌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이 땅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참된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그 사람이 있는 그 곳에서 참 평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가정, 직장, 학교, 사회, 길거리, 교회 어디에서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기독교가 있는 곳에 계급제도, 남존여비가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평화와 자유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 거룩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성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두움에 빛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진정한 신앙인의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94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독일과 벨기에 국경 부근의 오두막집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오두막집에는 한 엄마와 아이가 치열한 전투를 피해 지내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문밖에는 부상자를 데리고 길을 잃고 헤매던 두 명의 미군이 서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미군을 숨겨놓았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미군을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아들을 시켜 군인들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하고 자신은 수탉을 한 마리 잡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두 번째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문 밖에는 독일군 병사 넷이 서 있었습니다. 자기가 미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엄마는 그러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 인사를 합니다. 독일군들도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합니다. 독일 군인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고 오두막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들어가 쉬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이의 엄마는 엄숙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지금 다른 손님 셋이 계신 데 아마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요. 이곳에서 총질을 하면 안됩니다”라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독일 군인이 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그 여인이 답을 했습니다. “미군입니다.” “여러분은 내 아들 같고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부상을 입은 소년 하나가 죽음과 싸우고 있고 그의 두 친구도 여러분처럼 길을 잃고 배고파 지쳐 있어요. 오늘 밤만은.. 이 크리스마스이브만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잊었으면 합니다.” 독일군 하사는 잠시 멍하게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그 순간 그들에게 그들의 무기를 바깥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이어 아이의 엄마는 미군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역시 총을 빼앗아 독일군 총이 있는 장작더미에 함께 올려놓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군인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준비했고 먹을 것을 계속해서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군인들은 서로에게 있던 포도주와 빵 덩어리를 꺼내 나눠 먹고 마시며 밤새워 서로 먹고 이야기했습니다. 적의가 가득 차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가 점차 풀리더니 서로 이해하는 우정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즉, 크리스마스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독일 하사가 미국 병사에게 근방의 지도를 보여주더니 독일군이 있는 곳을 피해서 연합군의 부대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서로 적군으로 만나 어느 누군가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독일군과 미군이 화해하며 생명을 살려주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독일군과 미군은 악수를 나누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각자 가야 할 길로 갔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서로 죽여야만 살 수 있었던 미군과 독일군이 서로 죽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처럼 아기 예수의 탄생은 도저히 화해를 이룰 수 없는 관계까지도 화해케 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허락하시고 서로 용서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혹 형제자매중에 갈등이 생겨 해결하지 못한 동기간이 있습니까? 이웃중에 다툼이 일어나 아직 갈등이 깊은 사람이 있습니까? 성도나 가족중에 서운한 감정이나 갈등이 일어나 불화의 관계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의미있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담벽을 다 없애시고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의 의미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탄예배를 통해 가르쳐주신 성탄의 참 의미속에서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참 성탄의 의미로 인해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가정, 우리의 직장, 이 고주리마을과 이 사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