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Christina's World'
- 'The Corner' - 'Alvaro Raking Hay' 2009 - 미국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Wyeth, Andrew) 사망 와이어스 [Wyeth, Andrew (Newell), 1917.7.12~2009.1.16]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가 16일 사망했다. 향년 91세. [필라델피아=AP/뉴시스] /뉴시스 2009년 01월 16일(금) 오후 11:55
2006 - `엉클 톰 오두막` 100만달러에 팔려 `엉클 톰 오두막` 100만달러에 팔린 사연 19세기 미국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에 등장하는 통나무 오두막집이 미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100만달러(약 10억원)에 팔렸다. 메릴랜드 베세즈다에 위치한 이 집은 소설 주인공 흑인 노예 톰의 실제 모델인 ‘조시아 헨슨’이 살던 집 이라는 사실 때문에 명소로 주목 받아왔다. 조시아 헨슨은 오두막이 있던 농장에 팔려와 무능한 백인 주인을 대신해 농장 감독이 됐으며 1830년에 캐나다 온타리오 근처로 이주해 생을 마감했다. 집을 사들인 몽고메리카운티는 16일 흑인 인권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생일을 기념하는 ‘마틴 루터 킹 데이’를 맞아 오두막을 사들인 것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다. 메릴랜드 수도공원계획위원회는 이 오두막을 재단장해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여명미디어. 2006)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은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던 19세기 중엽 작품을 집필했다. 여성작가들의 문학활동이 왕성하던 시기였다. 쉘비 가의 노예였던 톰(Tom)과 해리(Harry)가 노예장사인 헤일리(Haley)에게 팔리면서 시작되는 소설은 이후 톰에게 일어난 일들과, 어린 아들 해리를 팔려가게 할 수 없었던 어머니 일라이자(Eliza)가 해리를 데리고 도망가며 일어난 비극과 슬픔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을 위해 탈출이 아닌 팔려가기를 선택한 노예 톰의 희생정신은 독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 노예제도의 폐해를 주장했던 작가 스토우는 ‘여성’의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를 바라봤다. “나는 그들에게 가족의 의무를 가르쳤고, 부모와 자식의 의무를 가르쳤으며,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가르쳐 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인연도 개의치 않으며 어떤 의무도 어떤 관계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 아무리 그런 것들이 신성하다고 해도 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이런 일을 어떻게 견디라는 말인가요?”(본문 중) 쉘비가의 부인이 톰과 해리를 팔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남편을 향해 묻는 말이다. 부인의 분노는 ‘여성’ 이라는 이름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추구해온 ‘가정적 이상’이 깨져버린 시점에서 ‘도덕성’을 저버린 남편의 결정에 항의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작가 스토우의 목소리다. 노예들이 팔려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부인의 한숨과 안타까움은 동시대 여성상의 한계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작가의 시선이다. 스토우는 감상적 방법만이 아닌 ‘정치적’ 인 방법으로 노예 톰과 고용주 가족의 이야기를 다뤄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역사적으로 확대시키는 성과를 거둬올렸다. 순응할 수 없는 부당함에 몸부림쳤던 `저항`의 역사를 올곧은 시선으로 ‘목격’ 한 명작이다. [북데일리 정미정 기자] /북데일리 2006년 01월 19일 (목) 09:48:00
- Galapagos Island Scenes
역사속 오늘[2001년 1월 16일] 유조선 좌초, 갈라파고스제도 오염 극심 2001년 오늘, 남미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96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해역에서 유조선이 좌초됐다. /YTN 2013-01-16
- Peace in El Salvador
엘살바도르 정부와 반군대표들이 1992년 1월 16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지난 1981년부터 12년 동안 지속해온 내전종식에 합의했다. 알프레드 크리스티아니 대통령이 이끄는 엘살바도르 정부측과 좌익 반군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NLF) 협상대표들은 휴전발효시기가 2월 1일부터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케야르 유엔사무총장 중재로 유엔본부에서 휴전협상을 벌여온 양측은 지난 1월1일 내전종식을 원칙 합의한 바 있다. 정부측은 평화협정 체결에 따라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그간 반정부 인사 탄압에 이용되고 있다고 비난받아온 기존 경찰기구를 해체하고 반군측 병력을 일부 흡수, 새로운 경찰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1991년 1월 16일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이 이라크에 공중폭격을 개시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국경선 확정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국경 분쟁을 겪었는데, 이들 분쟁지역 중 특히 페르시아 만 어귀에 위치한 와르바와 부비얀 섬은 페르시아 만 지역의 세력 균형을 변경시킨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페르시아 만 연안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라크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은 이들 분쟁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무역금지 조치 등의 제재를 통해 이라크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파병했다. 후세인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철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1991년 1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중폭격으로 이라크의 통신시설, 무기고 등 여러 시설이 파괴되었다. /브리태니커 http://preview.britannica.co.kr/history/default.asp?num=462
대한민국미술대전 [大韓民國美術大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를 개편하여, 신인 발굴을 위해서 신설한 공모 미술전람회.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회를 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1982년 1월 16일 제도를 개편하면서 기성작가전과 분리하여 순수한 작가 발굴 및 육성을 위하여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운영되다가 이후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였고, 1986년부터는 기존 국전의 10개 부문 중에서 사진과 건축 부문은 각 해당협회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도록 이관하였으며, 동양화 ·서양화 및 조각의 구상 ·추상 구분을 폐지, 통합하였다.
[어제의 오늘]1979년 팔레비 이란 국왕 망명 ㆍ민중 혁명의 승리 1979년 1월16일 낮.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눈물 속에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 소식에 이란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2월1일 귀국한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란은 알라의 뜻과 지시만 따르는 이슬람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팔레비는 53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뒤 미국의 후원 아래 야심찬 근대화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비는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치부하면서 극심한 반발을 샀다. 더구나 그의 근대화는 다국적 기업과 절대왕권에 기생하는 세력을 길러놓았다. 신흥 부유층의 무절제와 극빈층의 신음 사이에서 축적된 모순은 결국 혁명으로 표출됐다. 78년 1월9일 종교도시 콤에서 일어난 반정부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했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팔레비의 망명은 바로 1년여에 걸친 민중혁명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경향신문 2009-01-15 17:50:5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51750585
- V. Shatalov, B. Volynov, A. Elisseyev, E. Khrunov
[오늘의 IT소사]1월 16일 1969년 러시아(구 소련)의 유인우주선인 소유즈(SOUZ) 4호와 5호가 세계 처음으로 우주 공간에서 도킹하는 데 성공한다. 소유즈 우주선은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들을 우주로 데려가고 다시 데려오는데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우주체류 실현의 꿈을 실현하자는 의미로 시작된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1967년 소유즈 1호가 폭발돼 2호(발사 못함)와의 도킹에 실패한 지 약 2년만이다.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2년 후인 1971년 세계최초의 우주 정거장인 살루트 1호를 쏘아올렸다. 이후 2호를 제외한 7호까지 쏘아올린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길게는 6개월 이상 체류했다. /전자신문 2004-01-16 08: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5&oid=030&aid=0000057522
역사속 오늘[1969년 1월 16일] 체코슬로바키아 청년 분신자살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1969년 오늘! /YTN 2013-01-16
- 'Nikola Tesla bust'
- Yugoslavia, 50 Dinara (Banknote) (Prince Marko Kraljevic)
1962 - 크로아티아 태생의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Mestrovic, Ivan) 사망 메슈트로비치 [Mestrovic, Ivan, 1883.8.15~1962.1.16] 크로아티아 태생 미국의 조각가. 대담한 면과 힘찬 디자인이 특징이다. 크로아티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대리석 석공 밑에서 견습생활을 하고 3년 뒤 빈 아카데미에 들어가 1904년까지 공부했다. 그는 빈 분리파 전시회 및 1906년 런던 얼즈코트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미술전에 출품했고 뮌헨·베네치아·파리 등지에서 작품 전시를 했는데, 파리에서는 오귀스트 로댕의 주목을 끌었다. 1910년 자그레브 전시회를 통해 크로아티아 미술운동을 절정에 이르도록 했으며, 2년 뒤 자그레브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 1월 미국으로 이주해 1954년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노트르담대학교의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 있는 부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The Deposition〉와 같이 종교적인 주제를 호두나무에 새긴 조각들과 부조 작품들이 많다. 1947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에서는 〈욥과 절망 Job and Despair〉을 비롯해 무게가 5t이 넘는 〈피에타 Pietà〉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그는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있는 자신의 집을 설계했는데, 지금은 그 집이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토스카니니 [Toscanini, Arturo, 1867.3.25~1957.1.16] 이탈리아 지휘자 토스카니니 사망 ‘엄격한 악보 제일주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1957년 1월16일, 90세로 뉴욕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지휘를 그만 둔 것은 1954년 4월4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진 NBC교향악단과의 공연 중 지휘봉을 놓치면서였다. 잊을 수 없는 날이었지만 NBC교향악단이 그의 은퇴를 기념해 10월에 마련해준 ‘지휘자없는’ 공연은 전례도 없었을 뿐더러 토스카니니에게도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 됐다.
역사속 오늘[1956년 1월 16일] 영암선 개통 1956년 오늘! /YTN 2013-01-16 http://www.ytn.co.kr/_pn/0422_201101160013126482
- 이육사 시 '광야' (공중전화 카드)
1944 - 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李陸史) 사망 이육사 [李陸史, 1904.5.18~1944.1.16] [오늘의 역사]민족시인 이육사 타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광야 중>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8.01.15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8367
[오늘의 책<1월 16일>] 이육사전집 김용직 등 편 / 깊은샘 1944년 1월 16일 시인 이육사(李陸史)가 중국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숨졌다. 40세였다. 퇴계의 14대손인 그의 본명은 원록(源錄), 아명은 원삼(源三)이다. 1926년 중국 중산대학 동창생 명부나, 1930년 발표한 첫 시 ‘말’의 필명으로 기록된 이름은 활(活)이다. 이육사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1930년부터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1년 7개월 간 옥살이를 할 때 그의 수인번호가 264였다. 그 번호를 발음대로 적은 이름이 이육사다. 처음에는 ‘죽일 육(戮) 역사 사(史)’, 혹은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 자를 썼다. 식민지의 젊음이 느꼈을 역사에 대한 절망, 자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륙 육(陸) 역사 사(史)’ 자를 쓴 것은 1932년 그가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할 때부터 보인다. 이름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그의 저항정신을 보기 위함이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일제의 감옥을 17번 드나들었다. 이육사가 남긴 시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이 40편을 넘지 않는다. 해방 이듬해 발간된 그의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에 실린 시는 20편이다. 하지만 그는 이 많지않은 시편으로 한국 현대시에 미답의 경지를 열었다. 그를 포함해 일제 때 훼절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들, 한용운이나 윤동주와도 확연히 다른 웅혼한 남성적 언어가 그의 시에는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절정’ 전문). <이육사전집>은 2004년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시와 함께 소설, 수필, 문예ㆍ문화비평, 시사평론, 편지글 등을 모두 한곳에 모아 발간된 책이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한국일보 2008/01/15 18:20:11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1/h2008011518201184210.htm
포시 [Fossey, Dian, 1932.1.16~1985.12.26] [역사 속의 인물] 마운틴고릴라의 엄마, 다이앤 포시 얼핏 무시무시한 괴물로 오해받기 쉬운 마운틴고릴라가 사실은 ‘겁 많고 순하며 착한 사회적 동물’이라는 진실을 밝혀준 다이앤 포시는 1932년 오늘 태어났다. 원래는 유인원학자가 아니었다. 1954년 새너제이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 아동병원에서 수년간 직업요법의로 일했다. 마운틴고릴라는 1963년 아프리카 여행 중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를 만나면서 처음 보게 되었다. 리키의 권유로 1966년 아프리카로 다시 가 마운틴고릴라의 자연 서식지 르완다 비롱가 산맥에서 무려 18년간이나 은자(隱者) 같은 생활을 했다. 포시는 자신의 관찰을 잡지 기고문들과 ‘안개 속의 고릴라’(Gorillas in the Mist`1983)를 통해 상세히 기술했다. 1974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뉴욕의 코넬대학에서 강의했다. 생전의 포시는 리키의 천사들 중 한 명으로, 제인 구달`비루테 갈디카스와 함께 가장 저명한 유인원학자였다. 세 여성 유인원학자는 각각 포시는 고릴라, 구달은 침팬지, 갈디카스는 오랑우탄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포시의 최후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985년 자신의 야영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많은 사람들은 포시가 비룽가고릴라를 밀렵꾼과 근처의 농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투쟁해온 것이 비극적 죽음의 원인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석민 콘텐츠평가부장 /매일신문 2014.01.16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318&yy=2014
역사속 오늘[1931년 1월 16일] 아인슈타인 미국 천문대 방문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YTN 2013-01-16 http://www.ytn.co.kr/_pn/0422_201101160014105906
1931 - 독일의 정치가,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Rau, Johannes) 출생 라우 [Rau, Johannes, 1931.1.16~2006.1.27] 요하네스 라우 (독일어: Johannes Rau, 1931년 1월 16일 ~ 2006년 1월 27일) 는 독일의 정치인이다. 소속 정당은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으며, 1978년부터 1988년까지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주 수상을, 1999년 7월 1일부터 2004년 6월 30일까지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제8대 대통령을 지냈다. 라우는 2000년에 독일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이스라엘 국회에서 독일어로 연설을 했고,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인간 복제 문제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위키백과
1920 - 미국, 금주법 시행 [오늘의 역사]미국, 금주법(禁酒法) 시행 18세기부터 금주 운동이 전개되던 미국은 1920년 1월 16일 수정헌법 18조 개정에 따라 금주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금주는 곧 무법 시대를 낳았다. 술을 밀수, 밀매하는 갱들이 판을 쳤고 무허가 술집, 폭력을 비롯한 각종 범죄가 성행했다. 유명한 조직폭력단 두목 알 카포네도 이 시기에 크게 성장했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8.01.15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8369#
1919 - 미국 금주법 비준 [오늘의 역사]미국 금주법 비준 1919년 오늘 ‘주류판매 및 양조금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금주법 18차 수정안이 비준됐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01.15 20: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914
- 멕시코 대통령 카란사(Carranza, Venustiano)
1917 - 독일 제국이 멕시코 주재 대사관에 치머만 전보를 보내다 치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17년1월 16일, 독일 제국의 외무 장관인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비밀 전보문이다. 멕시코 정부에게 미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영국에 의해 가로채져 40호실에서 해독되었다. 이 전보는 미국의 독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하여,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보의 내용 - 치머만의 전보에는 독일이 미국과의 중립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멕시코와 동맹을 맺으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멕시코에게 함께 일본를 동맹에 끌여들여 미국을 공격하자는 제안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댓가로 재정적 지원과 함께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되돌려주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멕시코의 답변 - 멕시코는 옛 땅을 회복할 가능성을 따져본 후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현실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멕시코가 옛 주를 돌려받는 것은 또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 멕시코는 국경 지대의 수많은 앵글로계 주민을 수용할만한 시설이 없다. * 독일은 미국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무기을 제공할 능력이 없다.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멕시코 대통령은 미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직후인 4월 14일 치머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위키백과
1910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디지 딘(Dean, Dizzy) 출생 딘 [Dean, Jay Hanna "Dizzy", 1910(1911).1.16~1974.7.17] 본명은 Jay Hanna Dean.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내셔널리그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팀에서 짧지만 화려한 경력을 쌓은 투수로 단체 스포츠 역사상 가장 화려한 명성을 누린 선수로 손꼽힌다. 오른손잡이 투수인 딘은 1932~36년에 가장 우수한 경기를 펼쳐 120승을 기록했으며 완봉승과 탈삼진 부문에서도 4번이나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는 1934년 시즌 개막전이 열리기에 앞서 자신은 30승을, 같은 팀에 소속한 투수인 동생 폴 디 딘은 15승을 올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해 시즌 동안 디지는 정확히 30승을, 폴은 19승을 기록했다. 그때 디지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우승기를 땄습니까? 나와 폴입니다. 누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까요? 나와 폴입니다." 딘 형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을 각각 2번씩 물리쳐 카디널스팀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겨주었다. 디지는 150승 83패의 기록을 남기고 30세에 은퇴했다. 동생 폴은 1936년에 입은 팔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끝내야 했다. 1953년 디지는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었다. 또한 야구 해설자가 되어 비록 문법을 무시한 엉터리 문장을 구사했지만 이러한 약점을 야구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감출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 Douglas Mawson, David Edgeworth, A. F. Mackay
1909 - 오스트레일리아의 남극탐험가 모슨 남극점에 도달 모슨(Mawson, Douglas, 1882~1985)은 남극탐험으로 전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모슨은 1902년 시드니대학교에서 광산공학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09년 뉴사우스웨일스 서부 중앙에 있는 브로컨힐 광산의 야외답사 연구로 과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7년에는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 경의 남극탐험대에 과학연구원으로 참가해, 1909년 1월 16일 T. W. E. 데이비드와 함께 빅토리아랜드 빙하고원의 남자기극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이 획기적인 여행을 썰매를 타고 해냈다. 모슨는 그뒤 1911~14년 오스트레일리아 남극탐험대를 지휘했으며 1929~31년에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의 연합탐험대를 이끌고 남극탐사를 실시했다. 그의 탐험으로 오스트레일리아는 남극대륙 가운데 약 647만㎢에 달하는 면적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탐험가이자 과학자로 많은 업적을 세운 모슨는 191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다른 많은 활동 이외에도 22권의 〈오스트랄라시아의 남극탐험 보고서 Reports of Australasian Antarctic Expeditions〉를 편집·집필했다. 이 책과 더불어 또 하나의 유명한 저서로 〈눈보라의 본원 The Home of the Blizzard〉(1915)이 있다. /브리태니커
ㆍ영국 탐험대 3명, 환희의 깃발 남극 탐험가로 가장 유명한 이름은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콧이다. 남극점에 먼저 국기를 꽂은 것은 아문센이지만, 살아서 남극을 떠나지 못한 스콧 또한 영웅이 됐다. 둘의 목숨을 건 경쟁 이전에 남극점에 가장 가까이 갔던 사람은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이었다. 그는 1909년 1월9일 남극점에서 약 180㎞ 떨어진 남위 88도23분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다. 대신 같은 탐험대의 데이비드 에지워스 등 3명은 1월16일 인류 최초로 ‘자남극점’에 도달했다. 지리상의 남극점은 남위 90도지만 나침반 바늘이 수직으로 서는 지점은 따로 있다. 이곳을 자남극점이라 부르는데, 지구 자기장의 변화에 따라 매년 북서쪽으로 10~15㎞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섀클턴이 탐험하던 시절에는 육지였던 자남극점이 지금은 바다로 옮겨갔다. 이 밖에 남극점이 하나 더 있는데, 지구 중심에 하나의 커다란 막대자석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자석의 끝이 지구 남쪽 표면과 만나는 ‘지자기남극점’이다. 임소정 기자 /경향신문 2010-01-15 17:52: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1151752165
머먼(머맨) [Merman, Ethel, 1909.1.16~1984.2.15] 본명은 Ethel Agnes Zimmerman. 많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주역으로 출연한 미국의 가수·배우. 머먼은 비서로 일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하다가 1929년 직업가수로 출발했다. 1930년 조지 거슈윈과 아이라 거슈윈의 뮤지컬 〈미친 여자 Girl Crazy〉로 데뷔해, 〈I Got Rhythm〉이라는 노래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어빙 벌린, 콜리 포터, 조지 거슈윈 같은 당대 일류 작곡가들로부터 인기있는 가수로 사랑받았다. 1934년 영화에 처음 출연했고 1935년 주간 라디오 쇼를 진행해 인기정상에 올랐다. 계속해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출연작품으로는 〈Anything Goes〉(1934)·〈Red, Hot and Blue〉(1936)·〈Du Barry Was a Lady〉(1939)·〈Panama Hattie〉(1940)·〈Something for the Boys〉(1943)·〈Annie Get Your Gun〉(1946)·〈Call Me Madam〉(1950)·〈Gypsy〉(1959)를 들 수 있다. 한 번도 정식 성악 레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힘차고 깨끗한 목소리는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었고, 1972년 연예업에 기여한 공로로 토니상 특별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상을 받았다. 1955년 자서전 〈Who Could Ask For Anything More?〉를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쉬페르비엘 [Supervielle, Jules, 1884.1.16~1960.5.17] 시인·극작가·단편소설가. 바스크계 혈통으로 스페인의 전통을 고수했지만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고독하지만 팜파스(pampas : 남아메리카, 특히 아르헨티나의 대초원)의 형제애를 지닌 인간의 사랑과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남아메리카의 광활한 대자연에 대한 사랑, 인간의 우주적인 동포애에 대한 향수 등이다. 그는 인간의 육체와 전우주에 걸쳐 생명의 무수한 박동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중력 Gravitations〉(1925)·〈미지의 친구 Les Amis inconnus〉(1934)·〈세계의 우화 La Fable du monde〉(1938) 등에 실린 시들은 예리하고 때로는 익살스러우며 때로는 매우 진지하다. 소설 〈어린이 도둑 Le Voleur d'enfants〉(1926)·〈거친 바다의 아이 L'Enfant de la haute mer〉(1931) 등에는 환상과 단순함이 뒤섞여 있다. 마들렌 미요와 함께 오페라 〈볼리바르 Bolivar〉(1950, 다리위스 미요의 음악)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숲속의 미녀 La Belle au bois〉(1932)·〈로벵송 Robinson〉(1949) 등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이다. /브리태니커
- Poem 'The Cremation of Sam McGee
1874 - 영국 태생의 캐나다 시인 서비스(Service, Robert W.) 출생 서비스 [Service, Robert W(illiam), 1874.1.16∼1958.9.11] 캐나다의 운문 작가. '얼어붙은 북극'(frozen North)에 대한 경쾌한 발라드, 특히 〈댄 맥그루의 사냥 The Shooting of Dan McGrew〉이라는 발라드로 '캐나다의 키플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4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빅토리아에 본점을 둔 캐나다상업은행에 들어가, 8년 동안 유콘 지점에서 일했다. 발칸 전쟁(1912~13) 때는 토론토에 본사를 둔 〈스타 Star〉 지의 종군 기자로 일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구급차 운전수 겸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첫번째 시집인 〈한 개척자의 노래 Songs of a Sourdough〉(1907)와 〈어느 치차코(알래스카 또는 태평양 북서해안에 처음 온 신참자)의 발라드 Ballads of a Cheechako〉(1909)는 캐나다 북부지방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으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후기 시집으로는〈어느 적십자 대원의 시 Rhymes of a Red Cross Man〉(1916)·〈술집의 발라드 Bar Room Ballads〉(1940) 등이 있다. 〈1998년의 행렬 The Trail of '98〉(1910)은 캐나다 북서부 지역에 있는 클론다이크 주민들과 그 생활 형편을 생생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또한 2권의 자서전 〈달의 농부 Ploughman of the Moon〉(1945)·〈천국의 하프 연주자 Harper of Heaven〉(1948) 등도 썼다. 1912년부터 유럽에서 살았으며, 주로 프랑스 리비에라(코트다쥐르) 해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브리태니커
- William Morris, Walter Crane, Eleanor Marx, John Ruskin
1855 - 영국 태생의 사회주의운동가 엘리노어 마르크스(Marx, Eleanor) 출생 마르크스 [Marx, Eleanor, 1855.1.16–1898.3.31] 엘리노어 마르크스 [책소개]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와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막내딸이다. 그녀는 당시 유럽 각지의 혁명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장소가 자신의 집이었던만큼 어렸을때부터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엘리노어, 너는 바로 나다"라고 말한 아버지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해나간다. 그리하여 이 조숙한 꼬마아이는 어느덧 런던 항만노동자와 가스노동자들을 대변하는 투사로, 또 여성운동가로 발전한다. Avalon Post Stamps for an imagined city-state based on William Morris's ideas about art, craft and Socialism. William Morris; Walter Crane; Eleanor Marx; John Ruskin http://eleanorwinter.blogspot.com/2011/12/avalon-post.html
- 'The Sick Child'
1849 - 프랑스의 화가 외젠 카리에르(Carrière, Eugène) 출생 카리에르 [Carrière, Eugène, 1849.1.16~1906.3.27] 프랑스의 세기말 상징주의 화가. 1849년 프랑스 구르네쉬르마른(Gournay-sur-Marne)에서 태어났다. 1870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으나 곧이어 보불전쟁이 일어나 지원병으로 참전했다가 드레스덴에 억류되었다. 귀환 후 복학하여 프랑스 아카데미풍의 주요 화가인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지도 아래 미술공부를 이어갔다.
미크사트 [Mikszáth Kálmán, 1847.1.16~1910.5.28] 헝가리의 소설가. 그 시대와 후세 작가들에게 20세기초의 뛰어난 소설가로 인정받고 있다. 법률을 공부했으나 곧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1887년에는 이미 명성을 얻어 의회의원으로 뽑혔다. 2편의 단편집 〈슬로바키아 친척 A tot atyafiak〉(1881)과 〈착한 팔로치 A jo palocok〉(1882)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1894년에 헝가리의 괴짜 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첫번째 장편소설 〈베스테르체 포위전 Beszterce ostroma〉을 발표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주의 색채를 띠고 있으나, 19세기말부터 사실주의로 기울었고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하고 재치있는 풍자로 주저없이 꼬집었지만 대체로 동정심과 이해심을 갖고서 일상의 삶을 묘사했다. /브리태니커
- Albania 500 Leke (1996, Banknote)
1844 - 알바니아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스마일 케말리(Qemali, Ismail) 출생 케말리 [Qemali, Ismail, 1844.1.16~1919.1.24] Ismail Kemal Bej Vlora or commonly Ismail Qemali and in Turkish Ismail Kemal Bey (16 January 1844 – 24 January 1919) was a distinguished leader of the Albanian national movement, founder of the modern Albanian state and its first head of state and government. He was born in Vlorë to a noble family. Having finished the primary education in his hometown, and the gymnasium Zosimea in Ioannina, in 1859 he moved to Istanbul where he embarked on a career as an Ottoman civil servant, being identified with the liberal reform wing of the service under Midhat Pasha, and was governor of several towns in the Balkans. During these years he took part in efforts for the standardization of the Albanian alphabet and the establishment of an Albanian cultural association. ... http://en.wikipedia.org/wiki/Ismail_Qemali
[참고] 알바니아는 AD 4세기 이전의 500년 동안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며,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4~15세기 투르크족의 침략이 있기 이전에는 고트·불가리아·세르비아 등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1479년 투르크령이 됨에 따라 대부분의 알바니아인들이 그리스도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탈마 [Talma, Francois-Joseph, 1763.1.16~1826.10.19] 프랑스의 배우, 극단 매니저. 연출 양식이나 무대의상·무대배경 등에서 그가 일으킨 개혁운동으로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주도적인 선구자가 되었다. 치과의사였던 아버지는 아들 역시 치과의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어린 탈마는 아마추어 연극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787년 11월 21일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한 볼테르의 〈마호메트 Mahomet〉에서 세이데 역을 맡아 연극무대에 데뷔했다. 화가인 친구 다비드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무대의상을 옹호함으로써, 이 방면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볼테르의 〈브루투스 Brutus〉에서 프로쿨루스라는 단역을 맡았을 때 그는 로마의 전통 의상인 토가와 로마 고유의 머리장식으로 단장하고 등장했다. 줄곧 조역만을 맡았던 탈마는 1789년 11월 4일 마리 조제프 블레즈 드 슈니에의 반(反)군주제적인 작품인 〈샤를 9세 Charles Ⅸ〉에서 마침내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배우들이 정치적 고초를 겪을까 두려워 한 나머지 모두 그 역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연극은 극장 안에서 시위를 발생하게 했고 극단 내에서의 의견 대립을 야기시켰다. 결국 공화주의자였던 탈마는 공화극단이라는 반대 입장의 극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 극단을 통해 그는 프랑스 고전극과 셰익스피어 번역극을 공연하는 한편, 무대연출과 의상 면에서 사실주의를 발전시켰다. 연기를 할 때 그는 수사적 방식의 낭독조 연기보다 사실주의적 연기를 고집했고, 대사의 끊고 이어짐은 운율에 따르기보다는 언어감각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에 언급한 두 극단이 1799년 코메디 프랑세즈라는 명칭으로 탈마의 극장에서 재결합하게 되었을 때 탈마는 그 시대 최고의 비극 배우가 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아낌없는 찬사와 후원을 받게 되었다. 탈마는 프랑스의 배우 르캥의 회고집 서문으로 〈르캥과 극예술에 대한 회상 Réflexions sur Lekain et l'art théâtral〉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1826년 6월 3일 들라빌의 작품 〈샤를 6세 Charles Ⅵ〉가 마지막 출연작이었다. /브리태니커
1749 - 이탈리아의 극작가 알피에리(Alfieri, Vittorio) 출생 알피에리 [Alfieri, Vittorio, 1749.1.16~1803.10.8] 이탈리아의 비극작가. 피에몬테주(州) 아스티의 귀족 출신. 8년간의 학교 교육을 마친 다음, 본인이 고백하는 ‘여행과 방탕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유럽 각지의 사물을 넓게 견문하였는데, 특히 각국의 극장에서 상연된 유럽 연극의 걸작을 보고는 이탈리아에 비극 작품이 드문 것을 통감하였다. 1768년 이후에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마키아벨리,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읽었으며, 여성 이외에 말[馬]을 사랑하였고, 또 피렌체에서 알게 된 알바니 백작 부인에게 필생의 애정을 바쳤다. 그는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고, 여기에 동경을 품는 것이 이탈리아인의 의식을 드높이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작품에도 이와 같은 의도가 나타나 있다. 자유를 위한 싸움, 자유로운 인간의 찬미, 이러한 인간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 비극 작품의 지배적인 모티브이다. 주저는 희곡 《사울 Saul》(1782) 《미르라 Mirra》(1784∼1787) 등이고 또 파란만장한 방랑의 생애를 회상한 《자서전》(1804)이 있다. /naver
피친니 [Piccinni, Niccolò, 1728.1.16∼1800.5.7] 나폴리 악파의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 희가극과 정가극을 모두 작곡했는데 죽은 뒤에는 주로 글루크의 라이벌이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여러 편의 오페라를 제작했다. 초기의 걸작품은 리처드슨의 소설 〈파멜라 Pamela〉에 근거하여 골도니가 쓴 대본을 갖고 작곡한 오페라 부파 〈철학 아가씨 La buona figliuola〉(〈체키나 La cecchina〉라고도 함)이다. 이 작품은 후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완성된 새로운 양식으로 되어있어, 진지하고 감상적인 주제를 소극풍(笑劇風)의 옛 오페라 부파의 융통성 있는 음악양식 속에 담았다. 1776년 그는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을 반대하고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초청으로 파리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파와 프랑스 오페라파 사이에 벌어진 '뷔퐁 논쟁'(Guerre des Buffons)에 휘말리게 되었다. 피친니는 개인적으로는 글루크의 오페라에 감탄하여 자신의 파를 형성하기를 계속 거절했지만, 적대적인 두 세력은 끊임없이 서로 견제했다. 그들은 피친니나 글루크가 추구하는 양식이 서로 다른데도 둘을 비교할 때면 상대방의 작품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했다. 글루크는 오페라 개혁의 기초를 세우고 있던 반면 피친니는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라는 전통적인 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글루크-피친니 논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두 작곡가 모두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énie en Tauride〉라는 주제로 오페라를 쓰도록 의뢰받았다. 글루크의 유명한 오페라는 1779년에, 피친니의 것은 1781년에 완성되었다. 1779년 글루크가 파리를 떠난 뒤에도 피친니는 계속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1789년 혁명 때 왕립 음악원에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후 나폴리로 돌아왔는데 1798년 다시 파리로 갔고 은퇴한 뒤에는 파시에서 살았다. /브리태니커
1675 - 프랑스의 작가, 정치가 생 시몽(Saint-Simon, Louise de Rouvroy) 출생 생 시몽 [Saint-Simon, Louise de Rouvroy, 1675.1.16~1755.3.2] 프랑스의 군인·작가. 회고록 집필자로 유명하며, 그의 저서 〈회고록 Mémoires〉은 그가 살던 시대의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아버지 클로드 드 루브루아(1607~93)는 1635년 루이 13세 치하에서 귀족이 되었다. 어린 생 시몽은 명예로운 군복무(1691~1702)로 사회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기간에 단편적인 일기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귀족의 권리를 축소시키려는 루이 14세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왕의 총애를 잃었다. 생 시몽은 1711년 왕세자가 된 부르고뉴 공작 루이(1712 죽음)와 잠시 교제했다. 이후 생 시몽은 1715년에 루이 15세의 섭정이 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게 의지했다. 필리프 2세는 생 시몽을 그의 섭정위원회 위원(1715~18)에 임명했고 1721년에는 그를 스페인의 외교사절로 파견했다. 1723년 필리프 2세가 죽자 생 시몽은 궁정에서 물러났다. 1729~38년 생 시몽은 당조 후작 필리프 드 쿠르시용의 〈일기 Journal〉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 작품은 10년쯤 뒤에 쓰기 시작한 그 자신의 회고록의 골격이 되었다. 생 시몽은 자신의 기억과 문서들, 동료 궁정인들의 구술 또는 기록된 증언들, 그리고 다른 사료에 근거해 궁정생활을 복합적으로 기술했다. 궁정생활에서 비롯된 제한된 시각으로 그의 회고록은 여러 인물들과 소소한 음모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루이 14세의 마지막 몇 년과 섭정시대를 생생히 그리고 있다. 〈회고록〉 최종판은 본문 41권, 일람표 2권으로 완성되었으며(1879~1928) 플레야드 도서관에 7권짜리 판이 있다(1947~61). W. H. 루이스가 〈생 시몽 공작의 회고록 Memoirs of the Duc de Saint-Simon〉(1964)이라는 발췌 번역본을 출간했다. /브리태니커
《라 만차의 돈 키호테》(Don Quixote de La Mancha, [doŋkiˈxoteð̞elaˈmantʃa])는 스페인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지은 소설이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된다. 1605년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재치있는 이달고 라 만차의 돈 키호테》)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은 1615년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v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스페인 황금기의 대표적인 문학일 뿐 아니라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줄거리 주인공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는 시골에 있는 신사(이달고)이다. 그는 기사에 대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점차 상상 속에 빠져들게 되며 그가 방랑 기사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돈 키호테 데 라 만차"라 칭하며, 그의 하인(원래는 농부) 산초 판사와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된다. 기사로서 마땅히 기사도를 발휘해야 할 연인은 둘시네아 델 토보소인데 사실은 이웃에 있는 농부의 딸로 이름은 알론사 로렌소이다. 이후 그는 스페인을 돌아다니며 많은 모험을 만난다. 특히 전편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마을의 신부, 이발사, 도로테아와 돈 페르난도, 루신다, 카르데니오, 판사 부녀, 포로 사나이와 소라이다와 함께 머무는 주막에서 유명한 모험을 펼치며, 후편에서는 바로셀로나까지 갔다가 기사로 분장한 마을의 학사에게 패하여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전편보다 많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모험을 펼친다. /위키백과
- 'Count Olivares', by Diego Velazquez 올리바레스 [Olivares, Gaspar de Guzmán conde-duque de, 1587.1.16∼1645.7.22]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의 총신. 로마 출생. 로마교황청 소속의 대사, 시칠리아 부왕(副王), 나폴리 부왕을 지냈던 올리바레스 백작 엔리케 데 구스만의 셋째 아들이다. 1601년 이탈리아를 떠나 에스파냐에 있는 살라망카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604년 요절한 맏형의 뒤를 이은 둘째형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대를 잇게 된 올리바레스는 성직자의 길을 버리고, 1607년 국왕 펠리페 3세의 왕비 마르가리타의 여관(女官)과 결혼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실로 진출하였다. 국왕의 총신 D. 레르마공은 권력을 향한 올리바레스의 야망을 눈치채고 방해하였으나, 올리바레스는 이를 교묘히 물리쳤고, 1615년에 황태자 펠리페(뒤에 펠리페 4세, 그 무렵 10살)와 프랑스 왕인 고(故)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계기로 이루어진 황태자집안의 시종 6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뒤 레르마공과 우세다공(父子)을 실각시키고 1621년 펠리페 3세가 죽자 새로운 국왕 펠리페 4세로부터 국정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오만하고 권력욕이 강한 올리바레스는 강권으로 국사를 운영하였고, 그 결과 네덜란드 독립군과 12년간의 휴전협정이 갱신되지 않아 1621년 전투가 재개되었으며(1648년 종결), 영국왕 제임스 1세의 황태자 찰스(뒤의 찰스 1세)와 펠리페 4세의 여동생 마리아와의 혼담이 깨져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만토바공령(公領)의 상속을 둘러싸고 프랑스의 리슐리외와 싸웠으며, 1640년에는 카탈루냐와 포르투갈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국왕의 신뢰도 잃고 1643년에 실각되었다. /yahoo
-한국, 5000원 (지폐) 율곡 이이
이이 [李珥, 1536~1584] [오늘의 역사]율곡 이이 타계 1584년 오늘 율곡 이이는 병을 얻어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09.01.15 20: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913
이반 4세 [Ivan IV, 1530.8.25~1584.3.18] 러시아의 황제(재위:1533∼1584).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시행하여 이반뇌제(雷帝)라고도 한다. 모스크바 대공(大公)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1533년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것 때문에 1547년 차르라고 칭하며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나서는,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들로 선발회의를 구성하여 정치를 하였다. 또한 전국회의의 소집과 봉토(封土)의 하사 등으로 지방 귀족층의 지지를 굳혀, 1550년대에는 행정 ·사법 ·군제 ·교회제도 등의 면에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 카잔한국(汗國) ·아스트라한한국을 정복하고 볼가강의 전체 수로를 제압하여, 북빙양(北永洋)의 내해인 백해(白海)에도 개항장(開港場)을 설치함으로써, 러시아의 경제적 발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발트해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선발회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리보니아전쟁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T.에르마크가 서시베리아를 정복함으로써 동방진출이 시작되었다. 귀족의 세력을 타파할 것을 기도하였던 그는 1565년 극단적인 공포정치체제를 시행하여 뇌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공포정치는 중앙집궝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 타도에는 성과를 얻었지만, 이것의 피해는 농민과 시민에게도 파급되었다. 행정의 혼란과 경제의 쇠퇴를 초래하여, 농민이 새 농토를 찾아 이동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므로, 그의 만년에는 농민의 이동을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군주권의 신적(神的) 기원을 확신하였고, 크루프스키공(公)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 등에서 그 사상을 전개하였지만, 좀 광신적인 면도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의심하는 버릇이 강해졌다. 이런 까닭에 만년에 자기 장남을 말다툼 끝에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naver
- Germany, 1000 Mark (Banknote) (Schöner, Dom zu Limbourg an der Lahn)
1477 -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쇠너(Schöner, Johannes) 출생 쇠너(쉐너) [Schöner, Johannes, 1477.1.16~1547.1.16] 요하네스 쇠너(Johannes Schöner; 1477년 ~ 1547년)는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및 지리학자이다. 1526년 뉘른베르크에서 수학 교사가 되었다. 그는 최초로 지구본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한데, 1523년에 만든 지구본에 처음으로 세계를 일주한 마젤란의 발자취가 그려져 있다. /위키백과
Johannes Schöner (January 16, 1477 in Karlstadt am Main – January 16, 1547 in Nürnberg) (aka, Johann Schönner, Jean Schönner, Joan Schoenerus) was a renowned and respected German polymath. It is best to refer to him using the usual 16th century Latin term "mathematicus", as the areas of study to which he devoted his life were very different from those now considered to be the domain of the mathematician. He was a priest, astronomer, astrologer, geographer, cosmographer, cartographer, mathematician, globe and scientific instrument maker and editor and publisher of scientific tests. In his own time he enjoyed a European wide reputation as an innovative and influential globe maker and cosmographer and as one of the continents leading and most authoritative astrologers. Today he is remembered as an influential pioneer in the history of globe making and as a man wh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events that led up to the publishing of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in Nürnberg in 1543. Life http://en.wikipedia.org/wiki/Johannes_Sch%C3%B6ner
Johannes Schöner (January 16, 1477 – January 16, 1547) was a German astronomer and cartographer. http://www.sosantikvarium.hu/engraver_cartographer34.html
BC 27 - 로마 원로원,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호 바쳐 [오늘속으로(1월16일)]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 1월16일 로마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존호를 바쳤다. 이로써 로마에 실질적으로 제정이 시작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뒤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아니라 프린켑스(제1인자)를 자임했지만, 그의 통치 아래서공화정의 요소는 거의 사라져 그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 기록되고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01-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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