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백제본기-근초고왕 편]"한수(한강) 변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이 때 노랑깃발(황제국)이 사용되었다."
대체로 근검 검소한 일본인들은
열도로 이주해 간 백제인들이고
일본의 황가는 백제 황족이다!
따라서 단군한국 정신으로
근검 검소했던 백제정신에
비추어 보면 동아시아 해양강국
백제의 수도성 규모가 열등감
반영식으로 클 필요가 없는
것이며, 중요한건 해양무역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며,
내용성인 것이다! 그러한
지역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례성 위치를 기록한
내용에 가장 부합한
서울 한강지역이다!
백제의 수도성의 규모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풍납토성을 동아시아 해양강국 백제가 바다로 이어진 수도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지나땅만 고집하는 재야사학도 땅덩이 열등감에 사로 잡힌 소중화사관에서 탈피하기를 바란다! 한반도는 지구촌의 수도다
동진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근초고대왕 시기에 동진관련 유물들이 최다로 출토된 서울 풍납토성
동아시아 최대규모의 마한의 토성을 증축한 서울 풍납토성은 백제 근초고대왕이 수도성으로 삼은 성이다.
부여족인 온조가 쌓은 위례성은 천안의 직산이며, 백제건국태조는 동명성왕 고두막 후손인 부여왕
구태로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이며 백제왕 계보에서는 4국 시대에서 가장 먼저 중앙집권화를 실현한
고이왕이다! 요동태수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이 위나라가 요동반도를 침략할 때 남하하여 황해도에
대방군을 만들고 왕이라 칭하니 이 대방군 태수들 중의 딸이였던 보화가 백제 책계왕의 왕후가 된다.
고구려가 대방군을 정벌하고 차지하자, 백제가 장인의 땅이라며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되고, 백제 근초고 대왕 때 차지하여 서백제 건설의 기반이 된다.
근초고 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거대고분
[풍납토성 발굴자료]
풍납토성 발굴연구관련 문의는 발굴을 담당했던 한신대 역사박물관으로!
[삼국사기/백제본기]"백제 위례성은 북으로 한수가 흐르고 남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고
서로는 바다가 막혀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으로 둘러 싸인 천혜의 요새다."바로 한강지역이다!
무수한 왕궁 기와들이 출토된 풍납토성 기와에
새긴 원(O) 문양자체가 중심성을 의미한다
고대사회에서 제사의식은 국가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사 관련 기록이 묘사돼 있다. 구수왕 14년 기사를 보면 4월에 가뭄이 들어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더니 곧 비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고, 비류왕 10년 조에는 왕이 몸소 희생물을 베었다고 되어 있다.
이종욱 교수 / 서강대 사학과
"동명성왕 묘를 세우고 공모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천지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그랬는데, 그 외에도 여러 제사가 있었고, 그런데 이러한 제사는 왕국이 형성되고 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런 제사가 되겠습니다. 경당 유적의 경우에는 여러 제사 중에 어떤 제사하고 연결이 됐는지는 몰라도 그런 정도의 제사 터라면 왕국의 제사 터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기우제를 올렸던 백제의 제사 터. 풍납토성 경당지구, 이곳은 백제 위례성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제의공간이었고 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토기 수장고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있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쪽은 기와류고, 이쪽서부터는 토기입니다. 저희가 조사한 풍납토성 경당지구는 1천 평이 채 안 되는, 넓은 지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확인된 2만여 점 이상, 굉장히 많습니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출토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토기류다. 백제 토기로는 항아리와 단지 류가 주를 이루었다. 눈에 확연히 띄는 백제 토기의 특징은 장식성 보다 실용성을 강조한 형식이다. 토기에 남아 있는 ‘두드름무늬’ 역시 오랫동안 이어진 백제 토기 양식이다. 그런데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선 백제 양식이 아닌 토기들이 상당수 출토됐다. 영산강유역의 토기들, 그리고 암갈색의 토기조각들은 이 토기 조각들은 색상과 형태로 보아, 소가야 지역에서 제작된 토기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제의 심장부, 풍납토성에서 무슨 까닭으로 소가야 토기가 나오는 것일까?
권오영 교수
"대개 소가야 소기는 5세기 단계의 것으로 보입니다. 5세기 단계에 분명히 서부 경남지역에 소가야 혹은 소가야 주변세력과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지만 한성백제의 중앙세력과 소가야 세력이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경남 산청군 묵곡리는 5세기경에 조성된 소가야 무덤 군이 발굴된 유적이다. 당시 소가야의 외곽지역에 속했던 이곳에는 80여기의 무덤이 떼 지어 발굴됐고 그런데 이들 무덤에서도 백제 토기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묵곡리 무덤군을 발굴한 경상대학교 박물관 팀은 묵곡리 유적에서 백제토기들이 출토된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이상길 교수
"토기에는 이런 게 거의 있습니다."
묵곡리에서 나온 백제 토기는 20여 점. 소가야 외곽지역에 해당하는 산청지역까지, 백제의 중앙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상길 교수 / 경남대 사학과
"백제 토기들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처음엔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백제 토기들이 출토되는 걸로 봐서 백제세력도 일정 시기 동안은 산청이나 함양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교류가 있었다고 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서부경남의 작은 소가야와 교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작은 토기조각으로 그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토기조각을 복원하면 3세기부터 왜의 무덤에 등장하는 장식품인 식륜과 비슷하다. 이는 백제가 왜와 해상무역을 실시한 흔적이다.
권오영 교수
"일본열도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좋은 항구를 확보한다는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소가야 토기가 백제에서 나오는 이유도 역시 교통로와 연결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한강변에 위치했던 백제, 소가야를 중간기지로 삼아 바다 건너 왜와 해상무역을 실시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백제와 중국의 국제교역을 알려주는 유물도 있다. 특이하게 동전문양을 새겨 넣은 이 도기는 완형으로는 처음 출토된 것이다. 이 전문도기는 중국 진나라의 전형적인 도기로 알려져 있다.
권오영 교수
"모양은 조금 조금씩 다르고 기본적으로 이게 다 시유도기인데 시기도기중에서 이렇게 동전무늬를... 중국에서 나오는 전문도기도 동전 자체가 계속 바뀌어 나가니까 이런 동전 문양도 바뀝니다. 그래서 제일 빠른 단계의 동호 때 나온 전문도기들은 동호 때에..."
이것은 중국 동진과 백제가 교류를 했던 증거인 것이다. 백제는 언제부터 중국과 교역한 것일까? 3세기 말 동진의 수도였던 중국의 난징시.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양직공도. 6세기 중국에 모여든 각국의 사신들을 묘사한 그림엔 백제사신의 모습도 보인다. 이는 당시의 백제가 이 곳 동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취재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이른 시기에 이곳과 백제가 교류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세기 안휘성 절도사를 지낸 주연 가족묘 박물관.
전문도기는 3세기 초 중국의 삼국시대에 유행하다 4세기 동진 대에 점차 없어진 도자기로 밝혀졌다. 특정시기에만 유통된 전문도기는 중국에서도 흔치 않은 귀한 유물이다. 동전문양은 풍납토성 출토품과 비슷한 것으로 백제와의 교류시점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전시실의 전문도기가 출토된 주연 가족묘는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조성된 유적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중국과 교역한 시점은 이 범위 안에 들어온다. 전문도기를 연구해온 남경대의 하운고 교수는 보다 정확한 시기를 제시한다. 그 동안 두 나라의 교역한 시점은 4세기 말로 알려져 왔지만, 그 교류시점이 3세기 초로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운고 교수 / 남경대학교 역사세 고고학연구실
"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면 백제와 중국 남쪽 정부가 직접 교류한 시기는 동진시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진 말기 정도로 되어 있죠. 그런데 한국에서 전문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봐서 백제와 중국의 교류는 늦어도 동진 초나 중기쯤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동오 시기 등 더 일찍 교류가 시작됐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3세기 초 한성백제가 중국과 교류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당시 어떻게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한 한 것일까?
하운고 교수
"동해 황해를 거쳐서 교류하는 루트지요. 배를 타고 오면 중국의 산둥, 강소성이 가깝고, 장강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이 노선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중국 진나라 관복허리띠인 금동과대금구. 이것은 당시 한, 중, 일, 동아시아 국제교류에서 백제의 역할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동안 일본 학계에선 이 금동과대금구로 야마토 정권이 중국과 직접 교역했다는 증거로 삼아왔다. 하지만 몽촌토성에 이어 풍납토성에서도 중국제 금동과대금구가 출토 돼, 우리 학계에선 중국과 왜를 연결하는 중심에 백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권오영 교수
"4세기에 일본에 야마토 정권이 중국과 직접 교류를 한 것이지 중간에 백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풍납토성에서 이미 오래 전에 그 금동대금구의 장식 하나가 출토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유물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몽촌토성에서도 역시 한 점 나온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4세기에 중국의 동진과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직접적으로 교류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백제가 개제가 돼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은 4세기 동아시아에 국제교류 관계에 있어서 백제가 중심축으로 작용했었다라는 셈이 되는 것이죠."
뱃길을 이용한 백제의 교역로는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백제는 동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당시 한강 변의 풍납토성은 동아시아 국제해상무역의 중심 무대이자 물류 기지였다. 위례성 500년의 역사 속에서 한강은 왜로 중국으로 오가는 즐비한 무역선으로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한강은 국제교류의 동맥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지구촌 교역 현황을 보여주는 유물을 불러볼까요? 이 유리잔은 중국의 ‘동진’ 유적지에서 발견된 로마제입니다. 2세기경에는 로마 황제의 사절단이 직접 중국에 파견될 정도로, 동서양의 문명교류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동서 문명의 융합이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은 인도입니다. 이 불상은 인도에서 발견된 간다라 불상입니다. 불상의 얼굴을 자세히 봐 주세요. 인도사람 얼굴은 아닌 것 같죠? 바로 로마인의 얼굴을 담은 불상입니다. 동서양 문명 융합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간다라 문명이었죠.
화려한 아치로 장식한 콜로세움 경기장은 로마번영을 상징하는 유적입니다. 로마는, 백제가 건국한 기원전 18년에, 공화제를 마감하고 제국의 첫발을 내딛었는데요, 당시 획기적인 기술로 동서 교역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에서 발굴된 이 벽화엔 외과의사가 토로이의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 이미 외과수술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죠. 문명 교류가 활발해지자 전 세계적으로 기술개발을 촉진시켰는데요, 이 그림을 보세요. 상품의 무게를 재고 있는 저울이 보이죠. 저울은 고대 이집트인의 발명품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발굴된 유물인데요, 지진의 진원지를 알려주는 지진계입니다. 용이 물고 있는 청동구슬이 두꺼비의 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진 발생과 진원지를 알아냈다고 하니,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건 로마에서 개발한 콘크리트 제작기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이 시기 콘크리트로 도로까지 포장했다고 하니,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고대인이 다 만들어 놓은 셈입니다. 그런데 풍납토성에서도, 콘크리트 공법에 버금가는 성벽 축조기술이 확인됐는데요, 그 속엔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복원할 엄청난 비밀이 들어 있었습니다.
현재 풍납토성 성벽은 2.2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허물어져 나간 곳까지 계산하면 3.5k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된 동벽은 폭이 20m이고 높이는 9m 정도. 흙으로 쌓은 토성이 1500년 이상을 지탱해온 비결은 무엇일까? 지난 1999년, 성벽 축조법을 확인하기 위해 문화재연구소에서 두 부분을 절개했다. 그 중의 한 곳이 동벽구간의 이 지점이다. 그때 절개했던 성벽 부분은 원래의 성벽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이형구 교수
"발굴이 끝나고 나서 여기를 보축했는데, 보축할 때 많이 다졌죠. 많이 다져도 여기 평면으로 비가 오고 세월이 지나니까 가라앉지요. 이것은 판축수법이 아니고 그냥 흙을 부은 상태에서 매립한 것입니다. 이것은 판축으로 돼 있고요. 이것은 놔두면 앞으로 더 들어가겠죠."
성벽을 절개하는 순간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벽은 단순히 흙을 쌓은 게 아니었다. 벽돌처럼 한층한층 쌓아올린 판축기법이 확인된 것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틀을 대고, 그 안에 고운 흙을 반죽해 부은 후 마치 벽돌을 찍듯이 한층한층 다져서 쌓아올린 중심토루와 그 옆으로 네 겹의 점토를 덧대서 완성한 판축토성. 이러한 판축토성은 전체적으로 콘크리트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 중간지점의 갯벌 층에서도 성 축조에 이용된 과학적인 공법이 확인됐다. 지반이 약한 갯벌층사이사이에 식물유기체를 10cm 정도로 깔아 성벽의 접착강도를 높인 것이었다.
신희권 연구원 / 국립문화재 연구소
"당시 그 구간의 토질이 어떤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완하기 위해 완충제로써 식물유기체 갯벌 흙 식물유기체 갯벌 흙을 교대로 깔아서 토층자체의 유동성과 견고성을 확보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강돌을 가지고 1단, 2단, 3단, 4단으로 쌓고..."
성벽 내부의 마무리 지점에선 석축이 드러났다. 3단으로 쌓아올린 석축의 단면을 보면 일정한 골을 남겨둔 것이 확인된다. 판축한 성벽이 한강의 범람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배수를 고려했다.
윤근일 소장 / 경주 국립문화재연구소
"돌과 돌 사이에는 물이 잘 흐르게끔 점토를 발라놓고 그 사이로, 골을 내어 물이 잘 흐를 수 있게끔 그런 처리를 한 것이 확인된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풍납토성을 축조할 때 아마도 미리 어떤 설계가 되어 있어서, 설계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되어 집니다."
성벽의 바닥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었다. 그 규모는 발굴 팀의 예상을 초월했다. 가장 밑면의 폭은 43m, 높이 15m. 사다리꼴로 중심을 쌓은 다음, 좌우로 판축한 거대한 토성이었다. 그렇다면 풍납토성 축조에 들어간 노동력과 물자는 어느 정도일까? 현대공학의 수치해석 프로그램으로 계산한 흙은 양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김영묵 교수 / 한밭대 토목공학과
"전체 길이가 밝혀진 게 3.500m. 토목공학으로 따져 80만 입방평방미터인데요, 무게로 환산하면 150만 톤, 10톤 트럭으로 15만대 분량. 그 정도의 양이라면 현대적인 장비로 해도 대단히 큰 공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풍납토성은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적인 대역사였을 것이다. 따라서 풍납토성 축성 시기는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한 시점을 가늠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권오영 교수
"풍납토성조사로 인해 그 정도의 대규모 성벽을 과연 언제 쌓았느냐, 물론 시기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백제가 그 정도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국가적인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졌다라는 것은 우리 삼국시대의 국가형성 내지 국가발전사에 대한 연구를 다시 한 번 재구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세기의 한반도를 잘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지위지동이전. 이 시기 백제는 변변한 성곽도 없는 부족국가로 묘사돼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기록을 기초삼아 초기백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백제는 기원전부터 주변국들을 병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3세기에 이르면 백제는 이미 충청권까지 신라는 경북일대를 통합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위지동이전과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두 역사서에 묘사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이종욱 교수 / 서강대 사학과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의 경우는 삼한지역의 제도, 산물, 습속, 다음에 낙랑, 대방과의 원거리 교역관계... 이런 걸 주로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걸 가지고 백제의 정치사를 재구성하다 보니까, 백제의 정치사는 말살되고 왜곡되고 축소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결국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를 가지고 정치사를 그려낸 결과, 백제 역사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풍납토성 축성 연대만 밝혀진다면, 백제가 일찍부터 고대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전하는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도 검증받을 수 있다. 풍납토성 성벽에서 발굴한 목재의 탄소 연대 측정이 실시됐다. 탄소연대 측정은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해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연대 폭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늦어도 2세기경에, 백제는 풍납토성을 축성할 만큼 고대국가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때, 이미 남으론 금강일대와 북쪽으론 예성강까지 그 세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종욱 교수
"한반도의 정치적인 상황이라든지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보면 백제는 일찍부터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을 했고 기원전후한 시기는 경기도 일대를 지배하는 왕국으로 성장했던 증거가 바로 풍납토성의 축조고 풍납토성의 연대 측정치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최몽룡 교수
"이제는 좀 차원을 넓혀서 시각을 넓히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시공에 걸친 역사로 우리의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나타나게 되겠죠."
풍납토성은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풍납토성의 전체 면적은 22만 5천평. 그 동안 발굴된 면적은 극히 일부다. 그러므로 풍납토성 발굴이 계속 진행될수록 우리 고대사는 그 동안 잃어버렸던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 나갈 것이다.
풍납토성, 백제사 최대의 미스터리를 푼다
서기 475년, 장수왕의 3만 고구려 대군이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공격했다. 위례성을 포위한 고구려군은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했다. 결국 위례성은 폐허가 됐다. 그리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위례성은 백제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았다.
1.
HD 역사스페셜의 고두심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백제의 수도하면 어디를 생각하십니까? 아마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는 분들 많으시겠지요. 백제는 7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데 공주와 부여를 수도로 삼았던 시기는 185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500년 백제역사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동안 잿더미로 사라진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을 찾지 못해 이 시기는 백제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1500여 년이 흘렀습니다.
자, 이 토성을 한번 봐 주십시오.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입니다. 이곳이 사라진 백제 위례성을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97년, 풍납토성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백제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신호탄으로, 우리 역사학계 최대의 발견으로 비유될 만큼, 엄청난 양의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학계에서 그 동안 출토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풍납토성은 백제 500년의 미스터리는 물론, 우리 고대사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간직해 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올 해로 풍납토성 발굴을 시작한 지 8년째 접어들었는데요, 지금도 문화재연구소에선 풍납토성 발굴에 매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풍남토성에서는 어떤 유물이 나오고 있는지... 먼저 발굴현장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지금 한창 발굴 중은 곳은, 풍납토성 중심부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미래마을연립이 있던 구역이다. 현재 발굴지역에서 유물이 나오고 있는 곳은 지하 1m에서 4m까지의 지층, 모습을 드러내는 유물은 거의 완형에 가까웠다.
김기옥 학예사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런 호우 종류는 백제에만 나타나는 건 아닌데요, 백제호우의 특징은 가지고 있습니다. 경부가 발달해 있거나, 평저기미가 있다는 이런 건 백제호우의 특징입니다."
바로 옆에선 목탄이 쏟아져 나왔다. 목탄은 건물기둥이 불에 타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것으로 보이는 백제 초기 집 자리로 확인됐다. 발굴 팀의 관심을 끈 것은 바로 기와무지였다.
기와 발굴지 현장, 이은석 연구원 / 국립문화재연구소
"지금 현재 이 기와는 연대를 볼 때는 AD 4세기, 300년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전부 다 이 기와가 패몰이 돼서 쓸려 내려온 상태입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쓸려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막대한 분량의 기와들, 과연 이곳에 어떤 건물이 있었던 것일까?
풍납토성 유물수장고, 국립 문화재 연구소
"지금 여기 보이는 게 풍납토성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여기가다."
그동안 ‘미래마을 터’에서 발굴한 기와는 총 500상자 분량, 발굴된 기와들은 여러 종류의 색상과 모양을 보여줘 그 제작방법 또한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전부 기와인가요? 예. 이게 작년에 기와무지에서 나온 것들이다. 현재 기와를 보면 서로 다양한 기와들이 한꺼번에 발굴된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와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다양한 기와막새들, 기하학적 문양을 한 이 막새들은 풍납토성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기와무지에서 함께 출토된 전돌, 전돌은 도로포장이나 건물의 하부구조에 쓰이는 일반 주거지에선 찾아보기 힘든 유물이다. 비록 깨어진 상태였지만 분명 이 곳 풍납토성에 고급스런 전돌을 사용한 특별한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증명해주는 유물이 추가적으로 발굴됐다. 발굴 팀이 조심스럽게 꺼낸 유물은 범상치 않은 초석이었다.
"십각형은 특이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안쪽으로는 둥글게 기둥을 끼워 넣을 수 있는데 현재 파편만 남아 있는 상태죠."
대형건물지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사용했던 초석, 그 위로 기둥을 올리고 막대한 양의 기와를 사용해 지붕을 올린 건물. 막새로 장식까지 한 이 건물은 대체 무엇을 하던 곳일까?
박순발 교수 / 충남대 고고학
"그러한 초석들이 쓰여지고 있다는 것 역시 기와를 이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대단히 격조 있는 건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특히 이 당시에 벽돌이라고 하는 것은 기와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고급건축 재료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전반적으로 볼 때 기와라든지, 그리고 초석 기초 부분을 장식한 그러한 유물이라든지 벽돌 같은 것은 이 건물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는데 총체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기와건물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유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기와건물의 처마 밑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운 강자갈도 처음 발견됐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처리하고 조경효과를 내는 일종의 산수석이었다.
지난 5월 중순. 드디어 산수석으로 조경까지 한 기와건물의 용도를 밝혀줄 단서가 포착됐다. 불가마 유적이 그것이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이것은 쇳물의 흔적이다. 철 제련에 사용된 풍로 흔적도 역력하다. 불 가마터 주변에는 제련작업 중에 나오는 철 찌꺼기인 슬래그가 널려 있었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의 미래마을 터는 어떤 곳이었을까? 중국도성 연구를 통해 우리 고대성 체계를 연구해 온 이형구 교수는 미래마을 터가 왕궁 내에서 특별한 기능을 담당했다고 보고 있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 역사학과
"왕도에 공급하는 물품을 제작하는 공방으로 추정된다. 왕성의 서남쪽, 한강변에 있는 쪽에서 많이 보이는 걸 보면 그 유적들은 왕실에 공급하기 위한 공방지역들이 있었다는 거고..."
이곳이 위례성의 공방지역이라면, 기와건물은 공방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풍납토성은 지금도 위례성의 실체를 하나 둘 보여주며 백제사를 다시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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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기와건물은 풍납토성 미래마을 터에서 발굴한 건축자재로 복원한 것입니다. 그 동안 풍납토성 발굴과정에서 기와가 출토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하게 대형기와건물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한 곳에서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은, 처음으로 확인된 새로운 사실입니다. 고대국가에서 기와집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최고급건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보시는 것처럼 이런 고운 강자갈로 정성들여 조경까지 한 대형기와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풍납토성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위례성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 있었는데도, 그 동안 왜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일까요? 자, 이 기록을 주목해 주십시오.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을 묘사해 놓은 삼국사기 기록인데요, “북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론 비옥한 뜰을 바라보고, 서쪽으론 큰 바다에 접해 있는 곳”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한 고려시대에도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는 얘깁니다. 그러다보니 그 동안 위례성 후보지로 거론된 지역이 한 두 곳이 아닌데요, 바로 이런 논란의 와중에 풍납토성 발굴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보게 된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자난 1999년,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은 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대체 경당지구에서는 무엇이 나온 것일까? 발굴 당시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유물. 그것은 말뼈였다. 한 구덩이에서 출토된 말뼈는 무려 아홉 개체. 이상한 점은 모든 말뼈가 다른 부위는 없고, 머리뼈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당시 말머리 뼈를 출토했던 권오영 교수는 의도적인 폐기로 추정하고 있다.
권오영 교수 / 한신대 국사학과
"여기가 오른쪽 턱뼈, 여기가 왼쪽 턱뼈... 구덩이 하나에서 말머리가 9개, 그리고 소가 1개, 모두 10개가 나왔는데, 특징은 몸의 다른 부분은 없고 머리만 보이는 걸로 봐서, 목적을 가지고 말을 죽여서 몸통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고, 구덩이 안에는 머리만 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은 고대사회에서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것도 말머리만 골라서 한곳에 묻어둔 것일까?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이 말머리는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의문을 풀어줄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확인됐다. 오사카의 시조나와데시 박물관. 이곳 조사과장이 진열장에서 꺼내 보여준 유물은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것과 흡사한 백제계 유물이었다. 이런 백제계 토기들이 출토된 곳은 대체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한성백제 몰락 바로 이후다.
타나카 키요미 조사과장 / 오사카시 문화재협회
"475년 백제의 한성이 함락됐을 때 그리고 그 때에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죠. 그런 시기, 문헌에 나오는 475년이라고 하는 시기와 지금 일본의 시조나와데시 근처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의 시기는 대체로 같을 겁니다."
그 중에는 말머리 뼈도 들어 있었다. 일본 고고학계에선 말머리 뼈는 위례성이 함락된 후 시조나와데시로 건너온 백제 인들이 특별한 제의를 올릴 때 바친 제사용 희생물로 추정했다. 백제 인들이 시조나와데시에 남긴 유물을 통해, 당시 백제 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후, 특별한 제의와 풍습을 전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제의의 성격은 무엇이었을까?
타나카 키요미
"말의 희생을 수반하는 특수한 제사도 행해졌다고 하는 것이 실제 개천이라든가 혹은 우물 안에서 그런 제사에 수반하는 것 같은 유물이 나온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러니까 농경제사면서 희생을 수반하는 무엇인가, 기우제와 관계되는 것 같은 제사였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말머리 뼈가 출토된 풍납토성 경당지구, 이곳에선 백제 인들이 말머리 뼈를 희생물로 바친 기후제와 같은 제의가 행해졌던 것이다. 발굴이 진행되자 제사 터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확인됐다. 말머리 뼈가 출토된 9호 구덩이 바로 옆, 한문의 ‘여’자와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된 대형건물지가 확인됐다. 일반건물지에선 볼 수 없는 1.5m의 도랑이 여자형 건물지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안은 숯으로 채워져 이곳을 신성시하고 보호했던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출입 또한 엄격히 통제한 흔적이 분명하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여자형 건물지를 복원해 보자, 건물주변으로 도랑을 파고, 전돌을 깐 후 숯을 채운다. 특별한 권위와 위험을 갖추도록 설계한 이 건물은 백제의 제사 터였다.
권오영 교수
"여자형 건물지와 말머리 뼈 9개와 소모리 뼈가 함께 나온 후 9호 구덩이.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것이지만 또 하나의 제사용 구덩이. 그래서 이 일대가 계속해서 3~5세기 까지 제사가 이루어지는 그런 공간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건물 자체의 방위가 정남북 방향입니다. 조사를 더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분명히 이것은 계획적으로 남북방향에 맞추어서 계획적으로 어떤 한 공간을 이용해서 제사행위가 이루어지던 그러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당터 유적에서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또 하나의 유물은 바로 ‘대부(大夫)’자가 새겨진 토기. 그런데 최근 같은 모양의 토기에 ‘정’자가 새겨진 것이 발견됐다. 우물 ‘정(井)’자가 새겨진 위치는 대부가 새겨진 곳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대부’와 ‘정’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구려 아차산 유적을 발굴했던 서울대 박물관. 이곳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토기를 만날 수 있었다.
"이게 대부정대부정 토기입니다."
토기에는 뚜렷하게 대부정(大夫井)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토기들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접시에 공통적으로 새겨진 ‘형’자는 고구려 관직명으로 추정된다. 대부정도 처음에는 관직명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에 새겨진 고구려와 똑같은 ‘대부’와 ‘정’자가 나온 것으로 보와 괸직명은 아닌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대부’와 ‘정’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권오영 교수
"양국에 공통적으로 사상적인 문화적인 그런 측면이 아닌가,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이라고 하는 글자는 어떻게 보면 글자도 되지만 같은 기호도 됩니다. 저런 기호는 고구려에도 있었고, 백제에도 있었고 신라, 가야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글자가 아니라 사악한 기운을 멀리하고 나쁜 기운이 오지 못하게 하는 벽사의 의미가 있는 그런 부호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능을 가졌을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제사의식은 국가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사 관련 기록이 묘사돼 있다. 구수왕 14년 기사를 보면 4월에 가뭄이 들어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더니 곧 비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고, 비류왕 10년 조에는 왕이 몸소 희생물을 베었다고 되어 있다.
이종욱 교수 / 서강대 사학과
"동명성왕 묘를 세우고 공모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천지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그랬는데, 그 외에도 여러 제사가 있었고, 그런데 이러한 제사는 왕국이 형성되고 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런 제사가 되겠습니다. 경당 유적의 경우에는 여러 제사 중에 어떤 제사하고 연결이 됐는지는 몰라도 그런 정도의 제사 터라면 왕국의 제사 터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기우제를 올렸던 백제의 제사 터. 풍납토성 경당지구, 이곳은 백제 위례성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제의공간이었고 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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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납토성에서 백제의 국가 제사 터가 발굴되면서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이 마침내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가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것이 기원전 18년, 그때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불타버린 서기 475년까지 백제의 500년 역사가 바로 이 풍납토성에서 이뤄졌던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가장 성벽이 잘 보존된 풍납토성 동벽 구간입니다. 물론 이 동벽 역시 길고 긴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헐리고 깎여 나갔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숨결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동벽 바깥쪽에는 또 다른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성벽을 방어하는 물길인 해자를 찾던 중 예상치 못한 유물이 발굴됐다. 풍납토성 동벽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재건축 공사가 한창인 이곳에서 백제의 목조우물이 나온 것이다. 당시 목조우물이 발견된 곳은 지하 4m.
"동벽 밖에서 우물이 나왔는데, 목조우물이. 우물 정자로 잘 짜여진..."
우물은 나무로 정교하게 엮어 만든 목조우물이었다. 순수하게 나무로만 제작된 목조우물이 발굴된 것은 국내에선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 인들은 무슨 이유로 풍납토성 성 밖에 이런 목조우물을 만들어 둔 것일까?
이은석 연구원 / 국립 문화재 연구소
"우물이 성 밖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성 안만이 아니라 성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렇게 한성백제기에 이렇게 제대로 된 우물이 출토됐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즉, 당시 목재우물을 제작하는 방법이라든가, 어떤 두레박을 사용했던지...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라고 볼 수 있죠."
발굴 직후 우물은 해체돼 보존처리중이다. 1500년이 넘는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던 우물의 복원을 위해서다. 목재의 변형을 막고 영구 보존하려면, 특수약품을 섞은 물에서 깨끗이 세척한 다음 형태가 변하지 않도록 경화 처리작업을 거친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백제인들이 나무로 우물을 만든 이유가 밝혀졌다. 우물목재에 끼여 있는 뻘에 그 해답이 있었다. 풍납토성 일대의 지반은 뻘층이었고, 나무는 뻘층을 잘 지탱하는 소재였던 것이다.
배영선 건조물 연구실장 / 국립문화재연구소
"석조로 만들 경우엔 집안이 잘못되면 주저앉게 되면 석조의 벽이 무너져 내릴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하부구조가 단단한 석재들을 큰 석재를 넣어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조금 힘들었던 것 같고, 아마 오히려 우물을 목재로 만들면 그러한 지질의 구조에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무의 수종은 무엇일까? 샘플을 채취해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해 보았다. 검사결과 수종은 상수니 나무였다. 상수리나무는 조직이 치밀해 단단한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김익주 소장 / 경담문화재연구소
"상수리나무는 보통 참나무라고 알려진 그런 나무입니다. 우리산하에서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흔하게 볼 수 있는 많은 나무 중의 하나고,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들 때에도 많이 쓰였고 상수리나무는 물 속 환경에 잘 견디는 나무다. 그래서 유럽에선 오크통이라고 하는 술통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한다."
보존처리중인 목재에는 내구성을 고려한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무의 양쪽 끝은 암수로 다듬었다. 우물 정자로 결합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것이다. 나무의 양쪽 끝을 암수로 엮어, 우물 정자 형태로 한 단 한 단 정교하게 짜 올린 목조우물, 목재와 목재의 이음새에는 진흙을 발라 이물질의 침투를 막았다. 그렇게 엮어 올린 우물 정자형의 나무단은 무려 14단. 우물 높이는 2.5m에 이르렀다.
최몽룡 교수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백제꺼라고 확신하는데 이제 앞으로 목조가구들은 그것도 결구수법이다. 결구수법은 우리 가 백제의 석탑들 미륵사의 석조라든가, 왕궁리 석탑이라든가 하는 결구수법하고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것이 분명히 백제꺼일 거라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된 양식의 구조에서도 보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고건축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우물목재를 분석하던 중 특이한 홈들이 목재에서 발견됐다. 그것은 건축에 사용한 나무를 재활용한 흔적이었다.
배영석 건조물연구실장
"현재 부재들을 보면 작은 홈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홈은 목조건축에서 사용됐던 그런 것들이고 그런 것들을 재활용해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아마도 주변에는 이런 참나무로 만든 고상주거나 귀틀집 같은 것들이 주변에 있어 그런 것들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우물 목재에는 건물을 지을 때 생긴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우물 목재로 재활용할 정도로 당시 풍납토성 밖에도 상당한 수준의 목조건물이 분포해 있었다는 뜻이다. 백제인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유물도 나왔다. 목조우물 안에서 사용됐던 다양한 유물이 나온 것이다.
"아 이건 특이하네요. 네 보시면 가지부분을 그대로 살려서 절취를 했는데, 끈으로 묶었던 흔적인 홈이 파여져 있고, 우물 안에 빠진 걸 건질 때 사용한 도구로 추정됩니다."
두레박 걸이용으로 추정되는 목제품과 반원형의 나무두레박, 물동이를 일 때 사용한 똬리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풀로 엮은 똬리는 직경이 10cm정도로 지금도 우리가 물건을 일 때 사용하는 똬리와 모양까지 비슷하다. 우물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물동이용으로 보이는 항아리다. 풍납토성 성 밖에 거주한 백제 인들의 삶의 한가운데 있었던 우물가 풍경. 풍납토성 동벽 밖에서 출토된 목조우물로 그들의 생활상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