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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1993년 2월 11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지만 경북 봉화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TV를 보면 누가 꼬집어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한 몇 년이 흘러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지금은 안다니는 교회를 다녔었고,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한 3개월 다녔지만 소질이 없던 나에게 선생님은 피아노에 소질이 없다면서 다른 것을 하라는 의견과 함께 피아노를 그만 두게 되었지만 그 때 귀여운 내 동생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1년간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나는 친구들과 잘 지내곤 있었지만, 어떤 친구가 날 때리고 괴롭히는 것 땜에 부모님이 맞지만 말라는 꾸중을 많이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런 스트레스를 풀어 주시기 위해서 부모님은 여행을 자주 다니시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셨다. 어느 날 날 괴롭히던 친구가 나를 살이 떨어져 나갈 만큼 깨문 일로 인해 5살 때 남들 보다 일찍 유치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일찍 그만 둔 만큼 한글을 많이 알지 못하여 내가 다니던 교회목사님과 이모께서 공부를 가르쳐 주셨지만, 노는걸. 너무 좋아하는 성격이라 한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유치원 같은 일은 없었지만, 낯선 사람에겐 쉽게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라서 친구들을 사귀는 것과 남들보다 한글을 많이 배우지 못하여 공부 땜에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가끔 남자아이들이랑 축구를 하는 게 유일한 휴식 이였고, 내가 알던 친구의 권유로 태권도를 동안 접하게 되었지만 부모님께서 공부를 어느 정도로 하자는 이유로 끝까지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직업 특정상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군부대가 있는 평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평택에 이사를 왔을 때는 먼저 다가와주는 친구들 땜에 내가 전보다는 훨씬 사교적으로 변하였고 나의 부주의로 인해 교통사고와 턱 밑이 깨지는 사고를 당해 한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학업성적이 좋아 내가 하고 싶었던 태권도도 접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하고 싶었던 거라 학교를 다니면서 태권도를 열심히 했다. 태권도에 빠지게 되니 운동실력도 늘어가게 되면서 점점 운동에 대한 자신감이 커졌다. 자신감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태권도를 잘하게 되었고 남들보다 4개월 빨리 단/품 심사를 보러가게 되었다. 또 심사를 보러갔을 때는 상을 타 올 정도로 소질을 내보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태권도 사범님이 겨루기 대회에 나가라고 권유하면서 겨루기 대회를 접하게 되었다. 그런 큰 경기에 나간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몰라도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 대회를 통해 좀 더 나은 실력을 갖게 되었고 또, 대회로 운동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자 사범님께서 같이 스키를 타자고 하셔서 성우리조트에가서 스키를 배웠었다. 스키에 관심이 없었지만, 막상 활강하는 자세랑 방향 전환하는 것을 배우고 타니까 점점 흥미가 생기면서 겨울방학 내내 스키를 타고 싶어 했지만, 돈이 많지 않은 관계로 많이 타질 못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논술을 잠깐 배우면서 글 쓰는 능력이 향상 되면서 학교서 열리던 백일장에서 상을 탔었고 또, 평택시에서 열리는 초등학교 체전으로 인해 육상을 접하게 된 나는 생활이 운동으로 변하였고 육상 연습으로 인해 성적도 떨어졌지만 체전에서 나의 주 종목인 멀리뛰기랑 400M 계주에서 각각 2위를 하여 학교에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육상선수의 꿈을 가지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6학년 때 아버지의 직업으로 인해 다시 충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육상 부는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아 육상부를 못했었다. 그래도 체육 실기 시범은 남자들보다 여자인 내가 주로 맡았었다. 또, 6학년 때 초등학교에서 항상 하던 ‘통일교육’이라는 활동에서 남자애들 2명과 같이 태권도 시험을 보였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탄금 중학교’라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는 내가 치마를 입는 것을 싫어해서 바지교복을 입고 다녔었고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지냈고 성격이 남자 같은 성향이라 수업시간에 연극을 하게 되면 항상 ‘아빠, 오빠’ 역할을 맡으며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학교에선 소연, 은지라는 친구와 함께 항상 학교를 뛰다니면서 숨바꼭질 놀이를 했고, 체육시간엔 초등학교 때처럼 시범을 보였고, 체육선생님의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한번은 체육시간에 축구에서 볼을 다루는 리프팅을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선생님께선 나보고 축구선수를 할 생각이 없냐면서 제의를 하신 적이 있으셨다. 물론, 운동선수를 하고 싶었던 나한텐 정말 놓치고 싶지 않던 기회였지만, 부모님과 상의한 결과 여자축구는 활성화 되지 않아서 여자축구선수로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씀에 ‘축구선수’라는 꿈을 접어뒀다. 하지만 그 땐 내 장래희망이 운동선수만을 원한 게 아니라 ‘국사선생님’도 하고 싶어서 그 제의를 쉽게 접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2학년 때는 체력검사 때 남자들보다 좋은 기록을 세우면서 학교 내에서 체육을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학업성적이 좋지 않아 미래에 대해 많이 고민 했던 적이 있었고 3학년 때는 실업계로 가고 싶었던 나와 인문계로 가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의견이 달라 많이 싸웠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먹을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살이 70kg까지 육박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모님과 많은 얘기를 하면서 일단 인문계를 가기로 맘을 먹고 그 때서부터 공부를 조금씩 하기 시작하면서 성적을 인문계로 갈 수 있는 성적으로 올리고, 겨울방학기간인 한 2개월 동안 죽어라 살을 빼면서 내 생에 최하의 몸무게인 53kg을 만들었다. 덕분에 내 얼굴엔 팔자주름이 생겼고 라면을 자주 먹던 습관을 버리게 됐다. 그 후로 고등학교 지망을 할 시기에 체육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면서 ‘조정선수’를 할 생각이 없으시냐고 물으셨다. 조정선수를 하면 충주에서 가장 잘 알아주는 ‘충주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 할 수도 있으시다면서 얘기를 하셨지만, 그 때 난 이미 운동이 아닌 다른 길로 미래를 걸어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며, ‘충주 예성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선 처음으로 내 관심을 끈 것은 충북에서 유일하게 있는 ‘여자 축구부’와 대통령배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가져왔던 ‘테니스 부’였다. 하지만 난 ‘국사선생님’을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해갔다. ‘야자’라는 것을 하면서 공부시간을 늘려 나갔다. ‘국사선생님’이 하고 싶어 국사는 시험에서 항상 1~2등급을 넘겨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예전부터 운동하는 것이 익숙한 나에겐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엔 항상 친구들과 함께 농구나 축구나 배드민턴을 즐겨했다. 특별활동도 항상 운동과 관련 된 부서에 들었다. ‘배드민턴 부’에 들고 싶었지만, 원하는 인원이 많아 ‘트래킹 부’라는 산책하는 부서에 들어 몸에 활동성을 키워 나가며, 체력이 떨어지지 않게 끔 하면서 1학년 때 하던 체육대회는 종목이 피구, 단체줄넘기, 줄다리기 3종목 최고점수를 얻으며 우리 반이 우승을 차지했었다. 또, 1학년 땐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와 달리 좀 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싶어서 ‘선도부’라는 학생회 부서에 들면서 좀 더 적극적이며 많은 선배님들을 알아가면서 지냈다. 이 선도부를 하면서 다른 학생들과 선배님들에게 욕을 먹긴 했지만 이 일을 하면서 나를 많이 변화시켜나갔고, ‘지선’이라는 친구와 서로 사귀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서로 챙겨주는 친구로서 친하게 지내면서 지냈지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가게 되었을 때 한번 크게 싸웠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내가 지선이의 짜증과 화를 받아주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서로 얘기하면서 풀어 없어서 안 될 존재로 남아있고, 이 시기 겨울엔 이모와 이모부랑 같이 휘닉스파크를 가서 보드를 배웠다. 정말 스키보다 재미있었다. 보드를 처음으로 타서 ‘몽블랑’이라는 최상의 코스에서 중심 잡는 것부터 엣지를 배우는데 처음엔 무서웠지만, 배우면서 흥미를 느끼다보니 무섭다기보단 스릴있고 매력 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중심 잡는 거랑 엣지를 배우다보니 엉덩이와 무릎부분에 피멍이 들어서 한동안 잘 걸어 다니지를 못했었다. 2학년 때는 신종 플루에 걸리는 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학업에 증진 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특히 경제에 흥미가 생기면서 경영 쪽의 직업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유독 한 선배랑 친하게 지냈다. 친구들보다 많은 교류를 하고 고민도 나누면서 편지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계기를 확실히 해줘서 나에겐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고, 또 수영을 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나의 운동신경을 보고 체육쪽을 하는 게 어떠겠냐는 제의를 해서 내 실력이 어는 정도인지 알고 싶어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가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 더 좋은 말들을 들어 한 번 더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학년 때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니도 대학에 가 있는 상태고 아빠 직업상 월급이 많으셨던 것도 아니라서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었다. 그래도 나는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다니게 되었다. 처음엔 주 4번 2시간 운동을 하는 게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 믿고 밀어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3학년이 되고 서로의 속마음을 편지로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서 갑자기 급 친해진 ‘예림’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그 힘든 운동시간을 잘 버텨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서, 나는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아 운동을 줄이고 학업에 몰두했지만, 모의고사 성적은 내가 한 만큼 정도로 나오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수시’이었다. 그래서 방학동안 시간 틈틈이 수시를 볼 수 있는 대학을 찾으면서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왔다. 그리하여 쓰게 된 대학은 ‘순천향대학교’이다. 원래 수시는 여러 곳을 쓰는 거지만 체능 계는 수시원서 값도 부담이 돼서 이 곳 한 곳만 쓰게 되었다. 그렇게 원서를 집어넣고 수시를 준비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힘든 운동을 해봤다. 10/2 이 되자 나는 수시 실기를 보러 순천향대로 가서 절차를 밟으며 순서를 기다리면서 실기를 보았다. 윗몸은 53개, 20M 왕복은 15초대, 제·멀은 228cm 가 나왔다. 처음 실기를 치르는 거 치곤 잘 나온 성적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내심 불안해왔지만, 11/11 날 나에게 합격이라는 기쁨을 주었다. 수시에 붙은 나는 정시를 보지 않았고 겨울방학 내내 강원도 휘닉스파크 스키장이 있는 할머니 식당에서 일을 하며 내 등록금을 조금이나마 모으면서 보드를 익혔고, 매번 겨울에 낙엽자세밖에 못했었는데, 남들이 턴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습을 하니 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방학이 지나 개학을 하고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순천향대학교 스포츠과학과 11학번으로 이광수 교수님의 과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제를 하면서 나는 내가 여태 어떻게 자라왔고 지내왔으며, 학교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학교생활 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 스스로 회상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대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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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아 수시 때 붙은거였어? 부럽다ㅠㅠ 어렸을 때부터 쭉 운동만 하고ㅋㅋㅋ 진짜 운동이 체질인가보다
93이네 힘들었겟다ㅋㅋ
아 ㅋㅋㅋ 93이네 ㅋㅋ대학생인데 93불쌍하다 ㅋㅋ
93이면 내가 오빠네 ㅋㅋㅋㅋㅋㅋ오 이십미랑 제멀 잘하네 오오오오오오!!
앞으로 1학기동안 야외교육론 같은 조로서 열심히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