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 시인의 시집 읽기와 개딲이를 위해
‘지상의 말들’의 씻김을 기다린다
박종호
시는 원형이 푸가일까. 우리들이 사는 세상 내가 사는 섬과 바다는 절반의 물과 미세 프라스틱으로 교체되고 있다. 삶이라는 언어가 파도를 치기도 하고 우습게도 나를 옭아쥐며 떠나라 떠나라 하며 또 다른 말들을 씻어내놓는다. 시를 말하는 시대는 불우하거나 짐짓 초연한 불화를 내세우기도 한다. 나는 씻김굿의 나라 진도에서 태어났다. 모든 언어들은 싯김을 통해 시어로 다시 태어난다. 쓰기의 괴로움을 끄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ㅎ사늘의 별을 훔치기도 한다. 자상의 말들은 당신들의 시인부락이거나 동백숲으로 내려앉은 별자리의 순환이기도 하다. 김완 시인의 시집 ‘지상의 맏들’을 가장 고통스러운 육신에 대한 쐐기질에 혼성상태에서 안간힘을 다해 읽어내렸다.
하늘을 보면 아직도 별이 많다. 상징과 페러독스 양자역학의 파동과 입자가 욕망으로 교차하는 세 번쩨 밀레니엄 하늘을 본다.
시인의 말을 듣고 옮긴다.
세상은 달아날 수 없는 곳이네
자신을 달래며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네
지상에 낡은 무용한 것들과
늙어 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것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기다리며
견딜 수 없는 세계에 기대
제 스스로 답답한 맘이 들 때
누에보 다리로 간 헤밍웨이같이,
밤을 새워도 보편화되지 않는
감정의 잔여물을 만나 흔들릴 때
불안정한 다른 사람의 고백을 듣거나
자신을 위태롭게 할 시를 읽을 것
세상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
말이 살아 있는 한 혼도 살아 있다네
궁리한 그대가 파도칠 때
지상의 말들이 가루로 부서져 내리네.
잠언이다. 우리의 땅들은 하늘과 바다를 이어지는 다리 위에는 그렇게 무용해서 무용의 그릇을 벗어나온 말들이 사람의 이름들로 치환되기도 한다. 늙는다는 것은 그렇게 별이 된다는 것에 그 빛남의 순결과 순간성에 ‘지상의 궁리’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처절함이 눈부신다. 팽목항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가면 독거도라는 섬에 닿는다. 미역의 섬이다. 신우대가 많은 섬이다. 지금도 이른 봄이면 섬사람들은 바위에 달라부어 갯딱이를 한다. 이 또한 ‘싯김’이다. ‘감정의 잔여물을 만나 흔들리’면 하얀 동백꽃이 되어 떠나가야 한다. 싯김굿 지청의 아쟁소리 사니위가 왜 그렇게 길닦음 속에 빙의를 품는지 새벽까지 따라가 본 이들은 심혈관의 청소가 고풀이와 세례임을 간파하기도 한다. 진도아리랑은 한술 더 뜬다. 청결성은 시의 본질이 아니다. 시인의 덕목일지는 모르지만. 거울을 닦는 이와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자는 선문염송은 독거도에서 비석이 앞뒤로 바꿔 세워진다.
김현은 이미 말했다. ‘재능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리고. 너무 앞서가면, 결국 고독해지고, 자기가 본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회의하게 되며 그것을 견디어 내야 살아 남는데, “어쩌랴, 그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혼자 버려져 있다가 겨우 다시 발견된 것이 아닌가. 그때 생기는 것은 환희일까 아니면 회한일까? (박상륭의 산문집「산해기」에서) 요즘의 박관서의 과웆의 푸가는 직정이다. 언어의 정치한 배열 따위보다 어쩌면 장만옥의 화양연화의 그 시절이 언제였든지 김완시인의 말들의 유효성은 어떤 별자리의 예언을 떠올리게 하여 서먹하기도 한다. 세월호도 그럴 것일까. 시는 풍속이다. 진도에서는 적어도 닻배노래 술비소리로 엮어진다. 처음부터 사경을 했다. 자꾸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기억, 모래물 다라니경 지상의 말들은 누구도 변주가 가능하지만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 미역줄기에 어디로 흔들리는지 늘 그렇듯이 “평탄한 삶에서는 걸작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부족함, 그리고 고난과 역경은 신이 내린 최고의 축복이다.” 이 또한 얼마나 세속적인가. 다시 고구마와 국수공양의 시대와 수행이 시를 말을 별이 아닌 밥알로 우리들의 밥상에 앉아야 한다.
수선화와 개나리 진돨래는 밙드시 추위를 거쳐야만 꽃망울을 맺히며 아름다운 색과 향을 얻는다. 이를 깨닫기까지 다양한 경험과 체험과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운림산방에서는 수많은 사연과 인연 그리고 명작의 산실로 200 여 년의 문화의 숨결이 숨쉬고 있단다. 때로 호매천이 찾아아ㅘ 시대의 준엄한 절명의 시가 배회하며 발길을 돌리게 하고 나대경의 산거(山居)로 운림각도를 가득 채운다.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韩愈)의 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學海無涯苦作舟(학해무애고작주) 배움의바다는 끝이 없으니 고난을 견디며 배를 만들어라.“ 모르것다. 엉덩이에 살이 좀 붙으면 아내가 진료소장 완장을 찼던 모래물 짝지몰에서 별을 바라보고 싶다.
시인을 찾아서 검은 입을 벌려보고 안개의 너덜강 지나, 소문의 끝에는 살구나무가 서 있지 않았다. 다시 몇 개의 샛강을 건너고 물고기에 꺾인 갈대를 따라 참숯나무 황토가마문을 부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생에서 제대로 내가 사는 섬에 홀리고 미친 적이 있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일 때마다 나도 온 몸이 일렁거렸다. 진도는 바다 갯벌이 둑을 이룬 밭이었다. 고기잡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하기야 사타구니 앞까지 들물이 오는 개옹에는 늘 숭어가 뛰고 가라지와 깡다리가 거름장이 될 정도였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미쳐서 산다. 그림에 미치고 글씨에 미치고 나락과 콩과 보리와 귀리 기장에 미쳐 농사를 짓는다. 해마다 ”인자 때려쳐야지“ 하면서 다시 씨앗을 품는 농사꾼이 정말 옳은지 나는 지금도 장담하지 못한다. 예전이야 농약값이 밀려 농약을 먹고 세상을 버린 농민들이 동네마다 있었다. 내 외삼촌도 두 갈래 길에서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 아무도 죄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인도 그러할까. 다시래기 명인들은 내지르고 새벽을 훔쳤다. 시가 둥둥 떠다녔지만 아리랑 개옹으로 흘려보냈다. 나는 언제쯤이나 “농부가 옳았다”라고 기쁘게 말할 수 있을까. 농사꾼이 농토를 신전으로 삼아 씨앗의 말씀들을 심어 나누는 아 위대한 순환에 앞장선 분들을 떠올린다. 무위당 장일순선생은 어느 날 시장 나들이가서 원주 어느 장터에서 고구마를 파는 장사꾼의 글씨에 넋이 홀린다. 골판지에 쓴 ‘고구마’라는 글자. “나는 평생 저런 글씨를 스지 못할거야” 그 어떤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보다 그 농부장사꾼의 글씨에는 대지의 위대한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털석 그자리에서 주저 앉았다고 한다.
세상이 쓸쓸하고 가난할 때 오히려 빛나는 이들에게, 고구마같은 삶을 줄기줄기 살아온 그들에게 삶을 물었다. 그들은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그들의 화두는 시보다 늘 뜨거웠다. 세상에는 순발력도 쓸모도 비틀어진 나이테로 고무어뚫린 섬마다 유폐한 팽나무가 자라고 호미 끝에서 가을햇살이 영근다. 올 해 안에 완이 선배와 진도싯김굿을 날새며 보고싶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빈 집 중에서)
나를 태우고 많은 말들이 사라진 바닷가에 가 봅시다. 밤하늘의 내 별들은 다정하게 속삭인다. 나는 길가에 앉아 그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이 아름다운 9월의 밤, 나는 이슬방울을 느낀다. 활명수 같은 포도주가 내 이마에 샘같이 솟아나는 것을 환상적인 어두움 속에서 음률을 맞추며 한 발을 내 가슴에 대고 리라를 켜듯 내 해어진 구두를 잡아당기면서(김현 옮김) 금갑진료소에서도 무동 길가집에서도 우리는 시가 없는 하늘을 읽는 시늉을 했다. 진도씻김굿은 삶과 죽음을 초월해 축제로 승화한 우리 민족만의 자랑스런 장례의식이다. 가장 서정적인 서사노래가 씻김이다. 슬픔과 해학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 둘은 삶과 죽음을 넘어 징하게도 ㅁ삭신을 쑤시는 예술로 승화한다. 씻김굿은 죽은 자의 혼령을 부르며 굿의 시작을 알리는 '안당'을 서두로 하늘님을 모시는 '제석굿'과 망자의 넋을 불러 극락으로 인도하는 '지전춤'에 이어 '넋올리기'와 '고풀이'로 이어진다. 굿은 망자의 육신을 대신한 영돈을 물로 씻어내며 절정에 달한다.
"아버지, 이제 모든 근심, 걱정 훌훌 버리고 극락왕생 하옵시오, 아버지" 망자의 혼을 씻으며 당골을 맡은 박병천씨의 딸 미옥씨는 서럽게 울었다. 씻김 굿은 혼을 극락왕생으로 인도하는 '길닦음'과 혼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종천'으로 6시간 만에 막을 내린다.
각시투구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