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숨은 이야기 (초등 중학교 때)
1945년 8월에 우리 조국이 해방되었습니다. 무정부 상태에서 사회질서는 말로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가운데 남과 북이 좌와 우로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북쪽은 구소련의 지원을 받아 좌파 공산주의 세상을,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파 민주주의 세상이 탄생하며, 북은 김일성, 남쪽은 이승만이 대표하는 정부를 수립하고 지금까지 79년간 조국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서로 미워하고 위협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1943년부터 배워 오든 일본식 교육을 해방 후에도 이어가기가 힘들었으며, 가난한 농촌에서 만만찮은 금액의 공납금을 지불하고 학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아 망설이는데, 세 살 때 시집오신 큰 형수씨가 결심하고 남자는 배워야 한다며 시골장에 무거운 빵틀을 이고 가서 붕어빵 만들어 팔아 남긴 돈으로 공납금을 마련해 주어 초등 중학교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운 좋게 초등학교는 오전 반에 배치되어 60여 명의 교실에서 2년간을 일본 학교에서 배워 한글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방되어 일본 선생들이 죄다 귀국하여 선생님 부족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음악을 즐겨하고 소질이 뛰어났습니다. 테너 부문에 전문적인 재질이 있어 3학년 아직 어린 우리를 “켄터키 옛집” 같은 서양 노래를 가르치며 외국 노래 부르는 것을 자랑하게 해 주었습니다. 팔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노래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선생님 부족으로 음악과 체육 같은 대체 공부 시간이 많아, 운동장 도는 수업, 축구공도 없어 헝겊으로 엮어 공을 만들고 돌로 만든 골대를 향하여 한 골이라도 더 넣고 이기려 힘차게 달리던 시절이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교과서가 유일한 볼거리 책이어서 신문도 배달되지 않았고 볼만한 잡지나 책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읽을거리만 눈에 띄면 주워다 읽곤 하는 소질은 있었던가 봅니다.
음악이나 운동장 뛰는 것 외에 배운 것 별로 없이 1950년 2월에 초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들고 교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렵게, 정말 어렵게 큰 형수씨가 마련해준 공납금을 내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석 달을 재밌게 배웠습니다. 중학교 역시 선생님이 부족하여 국어와 수학 외엔 체육이나 음악 미술 등은 대체 수업으로 배워 왔는데, 그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와 군대는 탱크로 중무장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북한군을 당하질 못하고 남으로 밀리고 밀리다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맞서 싸우는 석
달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서른 두 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로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하여 남침한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니 밀려난 석 달 만에 정부와 국군이 서울 수도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인민군이 주둔하든 석 달 동안, 우리 육 형제 중 형님 네 분 들은 군과 경찰에서 싸웠으며 나와 내 위의 형은 아직 나이가 어려 북한군이 오라는 인민군 학교로 불러가 북을 찬양하는 노래와 군가와 헌법을 배웠습니다. 불응하면 총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며 목숨을 유지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우리 육 형제 모두 운 좋게 부상하나 없이 살아서 귀가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큰형님은 미국 시카고서, 둘째는 고향 울진에서, 셋째는 군산에서 70세, 93세 94세의 일생을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내 기억에 뚜렷하게 떠오른 중요한 것 하나, 2005년 퇴직 후 캐나다를 여행 하면서 미국 시카고 한 노인요양원에 누워 계신다는 내 어릴 적 키워주고 중학교까지 보내주신 큰 형수씨를 보려 미국 시카고로 날아간 적이 있는데, 시카고 공항에서 911 사태 직후 신발까지 벗어 보라는 심한 입국 심사를 통과하며 형수씨가 누워계시는 요양원을 찾아가, 아내가 형수씨의 손을 꼭 잡고 “형님 제가 왔습니다. 제가 누구예요” 하고 물으니, 형수씨 한참을 눈을 크게 뜨고 또렷하게 지켜본 후 “조 연 자” 하고 똑똑하게 이름을 불러, 우리를 슬프게 눈물짓도록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 나누든 가운데 형수씨 하신 말씀, “내가 대련 님 (도련님) 세 살 때 시집와서 씻기고 돌보며 키우며 중학교까지 보냈든 그 보답을 오늘 이 순간에 다 갚았다” 고 말씀하여 또 한 번 우리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든 일이 아직도 기억에 또렸합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