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봄호 2024년
유종인, 박성우, 탁경자, 김홍희, 이원형
그러니까 만세
유종인
어깨 염증을 오래 참았더니
어느 날부터 팔을 돌리기가 어렵다
팔을 앞으로 돌릴 때도 그렇지만
팔을 뒤로 젖혀 돌릴 때는 더 아파온다
팔이 너무 아프니까
팔이 내 팔 같지가 않다
아픔이 이제 팔의 주인 같다
아플 때마다 참아온 팔이
안 아플 때조차 견뎌온 팔이
아플 때마다 따로 떼어논 팔이
아픔을 모르는 나를 만들어온 것같이
언제부터인가 앓아온 나라를
그래도 이게 내 나라인가
묻는 이들이 좌로 우로 북적일 때마다
하나같이 그들은
어떻게든 만세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
만세를 못 불러서
오히려 팔이 아파온 사람들
못나도 가만 불러주고
잘나도 만세를 불러주길 오래 참았더니
아픈 팔만 남은 몸뚱이같이
그 아픈 자식들만 남은 나라 같이
팔이 나으려면 아파도 돌리세요
그러면서, 동네 의사는 때로 義士나 烈士처럼
내 팔을 그윽이 대신 들어주진 않는다
그래도 아픔 몰래 팔을 살살 돌리다
경계 삼엄한 아픔한테 걸려 팔을 도로 내릴 때
내 몸은 내 마음한테 그런다
언제까지 아픈 팔을 데리고 살 거냐
언제까지 아픈 나라를 고개 숙이고 살거냐
그 때에 이르러 당신이 한 말씀
아픔을 가만히 참고
먼저 팔이 어디까지 올려지나 올려 보세요
통증이 잡아끄는 팔을
조금씩 또 조금씩 들어 천장을 향해 하늘에 올릴 때
아 나 같은 어깨 병신 팔 병신도
뭔가 한 것만 같은 으쓱함이여
그러니까 만세
그러니까 만세
말을 닫고 그저 입만 꽃처럼 벌리고
아픈 팔이 안 아픈 팔까지 거들어 올리고
서로 좀 즐거이 아파보자구
서로 좀 살 떨리게 기쁜 아픔 찾아보자구
벌써 가로수와 정원수와 죽어가는 나무들까지
언제부턴가 두 팔 들어 올린 지 오래고
하늘 높이 기다린 지 오래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인간은 참으로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을 때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리석음이 악화되고 나서야 겨우 자기 자신이 크게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무심코 저지르고 본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가 그렇고, 몸이 조금쯤은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병을 키웠을 때가 그렇다. “어깨 염증을 오래 참았더니/ 어느 날부터 팔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렇고, “팔을 앞으로 돌릴 때도 그렇지만/ 팔을 뒤로 젖혀 돌릴 때는 더 아파온다”는 것이 그렇다. “팔이 너무 아프니까/ 팔이 내 팔 같지가 않”고, “아픔이 이제 팔의 주인 같”게 된 것이다. “안 아플 때조차 견뎌온 팔”은 건강했던 팔을 뜻하고, “아플 때마다 따로 떼어논 팔”은 팔의 아픔을 참고 견디며 그 병을 키워왔다는 것을 뜻한다.
유종인 시인처럼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은 바보’가 또 있는데,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앓아온 나라를/ 그래도 이게 내 나라인가”라고 생각해 보면, 나라는 남북으로 쫘악 갈라져 있고, 동서의 지역갈등과 좌우의 이념대결로 사시사철 사색당쟁과 자중지란으로 그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만세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만세를 못 불러서” 팔이 아픈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처럼 잘 낫고 인물 좋고 명문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양어장의 미꾸라지처럼 득시글거리고 있으면서도 외세의 전면적인 감시와 탄압 밑에서 “아픈 팔만 남은 몸뚱이같이” ‘대한민국만세’를 부르지도 못한다.
유종인 시인의 [그러니까 만세]는 대단히 뛰어난 역사 철학적인 성찰의 시이며, 자기 자신의 팔의 아픔과 대한민국의 아픔을 동일시 하고, 그 ‘치유의 기쁨’, 그 ‘환희의 기쁨’을 [그러니까 만세]로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만세’란 어떤 일을 경축하거나 기뻐하는 뜻으로 두 손을 높이 드는 일을 말하지만, ‘그러니까’라는 부사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영웅정신’을 뜻한다. 몸이 아픈 시인과 대한민국은 국민(원주민)이 되고, “경계 삼엄한 아픔”은 대한민국을 강제 점령한 외세가 되고, “언제까지 아픈 팔을 데리고 살 거냐/ 언제까지 아픈 나라를 고개 숙이고 살 거냐”는 너무나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외세와 맞서 싸우며, 몸의 건강과 대한민국의 주권을 회복하라는 “義士나 烈士”와도 같은 인물들의 영웅정신을 말하게 된다. 시적 주제는 건강회복과 대한독립만세가 되고, 이 시적인 꿈을 위하여 보조인물, 즉, 전인류의 영웅들의 도움 아래 모든 병원균과 외부의 침략자와 단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된다. “조금씩 또 조금씩 들어 천장을 향해 하늘에 올릴 때/ 아 나 같은 어깨 병신 팔 병신도/ 뭔가 한 것만 같은 으쓱함”을 느끼게 되고, “말을 닫고 그저 입만 꽃처럼 벌리고/ 아픈 팔이 안 아픈 팔까지 거들어 올리고/ 서로 좀 즐거이 아파보자구/ 서로 좀 살 떨리게 기쁜 아픔 찾아보자구”, “그러니까 만세/ 그러니까 만세”를 그토록 열창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고, 안 되면 될 때까지 전진하고, 또 전진하는 것이 ‘그러니까 만세’의 주인공이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거나 어떤 강자에게는 무조건 복종부터 하는 자는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은 바보에 불과하지만, 그 어떤 병균과도 싸우고 그 어떤 침략자와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역발산기개세의 영웅정신’으로 [그러니까 만세]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몸이 아픈 자와 몸이 안 아픈 자가 하나가되면 “벌써 가로수와 정원수와 죽어가는 나무들까지”도 두 팔을 들어올리고, 건강한 국민과 건강하지 못한 국민이 하나가 되어 그 병을 치유하고 함께 나아가면 ‘동해물과 백두산’까지도 영원한 제국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게 된다.
유종인 시인은 역사 철학의 근본문제를 ‘최고의 선’, 즉, ‘영원한 제국’으로 정하고, ‘역발산기개세의 영웅정신’으로 우리 한국인들 모두가 살 떨리게 기쁘고 행복하게 할 날들을 찾아나선다.
대한민국만세! 대한민국만세!
그러니까, 그러니까 대한민국 시인 유종인 만세인 것이다.
은행나무 길목
박성우
초저녁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두 정거장 더 가서 하차해야 하지만
나는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내려 걷는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정육점에 들러 삼겹살 한 근 산다
결혼을 하면서부터 17년을 살아온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서른 중반에 신혼살림을 차려
딸애 하나 낳아 그냥저냥 잘 살다가
쉰 살을 넘겨 떠나려 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아빠, 해가 꼭 사과 같아!
뜨겁고 달콤한 것들만 품고 이곳을 떠나야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
주말부부를 하던 신혼 때 들르던 빵집이며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이며
언제 찾아가든 문이 열려있던 집 앞 세탁소까지
저녁 식탁 위에 도란도란 꺼내놓고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굽는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은행나무는 고생대부터 존재해온 ‘살아 있는 화석’과도 같은 나무이며, 암수가 다른 나무로서 병충해에 강하고, 보기 드물게 정자精子를 생산해낸다고 한다. 은행나무 목재는 결이 곱고 광택이 있어 고급가구의 목재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열매는 식용으로 쓰이고, 가을단풍과 그 모습이 아름다워 가로수와 녹음수로도 많이 심는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산책길 중에서 은행나무 단풍길은 가장 아름답고 좋은 길이 되고, 그야말로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과도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것도 그렇지만, 샛노란 은행나무잎은 돈과 명예와 권력 등, 그 모든 것을 다 초월한 황금의 색과도 같다. 사랑도, 미움도, 질투와 시기도 다 사라지고, 모든 더럽고 추악한 죄와 음모도 다 씻어지고, 순수함이 순수함 자체로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은행나무 단풍길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이며, 너와 내가 자아를 잃어버리고 ‘우리 모두’로서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그 어디에다가 둥지를 틀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의 꿈과 희망이 다 이루어지고, 무한한 행복이 자라는 곳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박성우 시인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고,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중앙일보 신문문예로 등단한 바가 있다. 시집으로는 {거미}와 {가뜬한 잠}과 {웃는 연습} 등이 있고, 윤동주문학상 젊은신인상, 신동엽창작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박성우 시인의 [은행나무 길목]은 그의 신혼의 꿈과 시인의 꿈이 자라나던 둥지이며, 그는 그곳에서 “딸애 하나”를 낳고, 중견시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전라도 출신의 시골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이제는 지난 17년이 너무나도 크나큰 축복과도 같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은행나무 길목]의 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떡집도, 은행나무반찬집도 안녕”이고, “겨울엔 붕어빵을 팔기도 하던 분식집”도 그렇고, 언제, 어느 때나 찾았던 “미용실”과 “집 앞 세탁소”도 안녕이다. “17년을 오갔으니 정이 안 들면 이상한 일/
한결같이 다니던 미용실로도 자꾸 눈길이 간다”라는 시구와 “쉬는 날 오후면 세 식구가 함께 다녀오던/ 은행나무시장을 뒤돌아보니, 불빛 환하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지금은 사라진 가게들이 왜 자꾸 떠오르지?”라는 시구와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시구들과 시구들은 작별의 시간에 마주하는 회상의 무늬와 그 색깔들이며, 이때에 ‘안녕’이란 슬픔의 그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정겹고 그리운, 차마 발걸움이 떨어지지 않는 ‘안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삶이 상승곡선을 타고 있을 때는 그가 살고 있는 장소와 시기와 그의 삶이 일치하고, 삶이 하강곡선을 그릴 때에는 그 모든 것이 어긋나고 일그러지며 불협화음을 내게 된다. 추억은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소위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시인에게는 그 추억은 샛노란 황금빛 정원과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울울창창한 은행나무 길목에서 샛노란 황금빛 주단綢緞이 떨어지고, 마치 ‘최고의 선과 신들의 경지’와도 같은 황홀함으로 그 대관식의 길(시인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박성우 시인의 [은행나무 길목]은 그의 신혼생활부터 제일급의 시인이 되기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는 장소이며, 박성우가 박성우 시인으로서 우뚝서기까지의 수많은 명시들이 탄생했던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라는 말이 있듯이, 장소와 기후와 무대배경은 한 인간의 성장신화의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길목----. 추억은 사과같은 아침 해를 떠오르게 하고, 이별은 아름답고 달콤한 추억을 안고 떠나가게 만든다. 과거는 추억 속에 보존되고, 현재는 그 추억의 힘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해 내고, 미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은행나무가 박성우 시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은행나무는 우리 인간들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보호해 주는 세계수이자 영원불멸의 삶을 보장해 준다. “이 길을 걷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라고 안녕을 고하지만, 그러나 그 ‘안녕’은 이별과 망각의 안녕이 아니라, 영원한 ‘은행나무 길목의 행복’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어디에다가 그 둥지를 틀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전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은행나무 길목]이다.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자라나고, 삼천리 금수강산이 전인류의 지상낙원이 될 수 있는 곳----, 바로 그런 곳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과 천재가 손을 잡고, 천재와 시인이 손을 잡으며, 우리 한국어의 영광과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이 무한히 울려 퍼지고 자라날 수 있는 그런 천하제일의 명당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초장*
탁경자
달이 섬진강
은어 떼를 몰고 오면
강가에서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다
그 별 손바닥에 올려
心자를 심으면
만장의 문장들이
서정의 잎새로 그늘 쳐 오고
민초들의 노래가 돌고 돌아
뻐꾹새 피울음으로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지필묵 잃은 어초장
언제쯤 벗어 놓고 갔나
섬돌 위 밑창 닳은 신발 위로
솔바람 타고 온 새들이
한 그림자를 스치며 간다
*송수권 시인의 집필실
---탁경자 시집 {어초장}에서
섬진강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그리고 경상남도에 걸쳐 있는 강이며, 고대 가야문화와 백제문화가 서로 섞여들며 만나던 장소라고 할 수가 있다.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침입경로였으며, 조선시대의 말기에는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섬진강이 왜, 섬진강이냐 하면 1385년(우왕 11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 때문에 그때부터 ‘두꺼비 섬蟾’자 붙어 섬진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수권 시인(1940-2016)은 그의 출세작이 [산문에 기대어]이듯이, 지리산의 시인이자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도 송수권 시인이 순천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그와 함께 섬진강에서 수영을 하고 ‘어초장’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지만, 어초장에서 바라보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풍광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관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을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강의 밤이 일어서던 것을”이라는 그의 [산문에 기대어]의 아픔과 함께 오늘도 그 유장한 흐름을 멈추지 않고 있는 섬진강을 생각하면, 아직도 송수권 시인의 ‘어초장’의 추억이 새록 새록 떠오른다.
탁경자 시인의 [어초장]은 그의 ‘사부곡師父曲’이며, “달이 섬진강/ 은어 떼를 몰고 오면/ 강가에서/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다”라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뛰어난 시구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아름다움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송수권 시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처럼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쳐서 대자연의 금은보석으로 솟아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훌륭한 스승 밑에 못난 제자 없고, 훌륭한 제자 뒤에 못난 스승 없다.
“달이 섬진강/ 은어 떼를 몰고 오면/ 강가에서/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다”는 것, “그 별 손바닥에 올려/ 心자를 심으면/ 만장의 문장들이/ 서정의 잎새로 그늘 쳐” 온다는 것, “민초들의 노래가 돌고 돌아/ 뻐꾹새 피울음으로/ 능선을 타고 넘어”온다는 “지필묵 잃은 어초장”은 언어의 금은보석과도 같은 시구들이며, 탁경자 시인의 언어가 천하제일의 ‘언어의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꽃피어 난다. “언제쯤 벗어 놓고 갔나/ 섬돌 위 밑창 닳은 신발 위로/ 솔바람 타고 온 새들이/ 한 그림자를 스치며 간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인간은 유한하지만, 언어는 영원하고, 이것이 탁경자 시인의 [어초장]의 영속성인 것이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이 세계의 그 모든 것들은 ‘언어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송수권 시인과 탁경자 시인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아름다운 언어의 꽃밭, 이 [어초장]을 구경이나 할 수가 있었겠는가!
부산
김홍희
나는 부산이 좋다.
수도 없이 많은 나라를 떠돌아다닌 나에게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는데, 어디가 가장 좋습디까?”
나는 두말없이 대답한다.
“내 고향, 부산.”
난리통에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오신 부모님. 여기서 아들 셋, 딸 하나를 줄줄이 낳으셨다. 그리고 고향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 이 땅에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당신들과 함께하신 긴 세월의 기억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차례로 부산땅에 묻으셨다. 그리고 나는 내 딸과 아들을 부산에서 낳았다.
나에게 부산은 개인의 애증사이지만, 크게는 민족의 시련을 송두리째 받아들이고 넉넉히 채워준 가마솥이다. 전쟁으로 밀어닥친 피난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안아준 넉넉한 터이자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열사를 낳은 곳이다.
바깥으로는 물건을 내다 파는 관문으로, 안으로는 민족의 주린 배를 채우는 입의 역할을 건강하게 해온 불 밝힌 항구다. 정치적 멸시와 천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야당으로 살기를 수십 년. 그래도 꿋꿋하기만 하고 뒤끝 없는 사내들의 바다이자 억척스런 삶을 시장바닥에서 보낼지언정 자식만은 당당히 키워낸 어머니들의 땅이다.
사람들은 또 묻는다.
“아, 부산 말고 진짜 어디가 그래 좋습디까?”
“사랑에 빠졌던 곳.”
사람들은 수긍을 하는 눈치다.
그러나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다. 애증으로 내가 나고, 애증으로 내가 크고, 또다시 애증으로 내 아이들이 커가는 이 땅.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 부산이 정말로 좋다는 뜻이다.
“내 사랑 부산, 앙글나?”
----김홍희 시집 {부산}(근간)에서
고향이란 무엇인가? 고향이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말하며, 더 넓게는 그의 조상과 부모형제들이 대대로 무리를 지으며 살아온 곳을 말한다. 고향이란 최초의 우주이고 세계이며, 이 고향을 통해서 그의 인생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니, 고향이란 그야말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신이란 아버지가 성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고향이란 ‘상류 중의 상류’, 즉, 그의 존재의 원천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고향이란 모든 종교의 발상지인데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이란 모든 학문과 도덕의 발상지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의 지혜와 예의범절이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고향이란 문학 예술의 발상지인데 왜냐하면 고향에 대한 삶을 미화하고 찬양함으로써 문학 예술의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뿌리와 마을의 뿌리도 고향이고, 중, 소도시와 대도시의 뿌리도 고향이고, 국가와 민족의 뿌리도 고향이다. 요컨대 그의 고향의 전통과 풍습과 예절이 전인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의 고향과 마을은 이 세상에서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지상낙원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김홍희 시인은 존재의 뿌리는 고향이고, 그의 고향인 ‘부산’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적인 존재의 무근거 상태(황홀함)를 이룬다. “사람들은 또 묻는다./ “아, 부산 말고 진짜 어디가 그래 좋습디까?”/ “사랑에 빠졌던 곳.” 첫째도 부산이고, 둘째도 부산이고, 이 세상에서 눈을 감고 떠날 때에도 부산이다. “나는 부산이 좋다./ 수도 없이 많은 나라를 떠돌아다닌 나에게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는데, 어디가 가장 좋습디까?/ 나는 두말없이 대답한다./ 내 고향, 부산.” 출신성분이란 혈연, 지연, 학연의 근본 토대가 되고, 이 출신성분의 꼬리표(탯줄)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나라를 떠돌아다녔거나 우주왕복선을 타고 머나먼 북극성을 다녀왔거나, 또는 교통사고로 저승으로 떠났다가 돌아왔거나 머나먼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갔거나, 그의 출신성분의 꼬리표는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 우리가 있고 세계가 있다. 나와 우리는 자연의 법칙의 원동력이며,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나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이 자기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존재의 드라마는 그 엄청난 오류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모든 역사 철학과 미학의 중심 주제가 되고,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신성시 하고, 그가 태어난 고향을 신성시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신성시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또한, 모든 영화와 드라마와 대중가요와 축제가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미화하고 신성시 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소용과 존재의 정당성을 얻을 수가 있단 말인가?
고향이란 종교와 학문과 예술의 성지이고, 고향이란 사랑과 열정과 믿음의 뿌리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믿음을 갖게 하는 곳도 고향이고,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그 지친 날개를 접고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도 고향이다. 고향이란 종교의 꽃다발, 학문의 꽃다발, 예술의 꽃다발, 사랑의 꽃다발, 열정의 꽃다발, 믿음의 꽃다발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자 그 반대방향에서 배신의 불꽃, 증오의 불꽃, 절망의 불꽃, 슬픔의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에게 부산은 개인의 애증사이지만, 크게는 민족의 시련을 송두리째 받아”준 곳이자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부산”이다. 한국 전쟁의 난리통에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오신 부모님, 부산에서 아들 셋, 딸 하나를 줄줄이 낳고 고향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와 살았던 부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차례로 부산땅에 묻고, 나 역시도 내 딸과 아들을 부산에서 낳았다.
이에 반하여, 한국전쟁으로 밀어닥친 피난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주고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한 수많은 열사들을 낳은 부산, 앞으로는 민족의 주린 배를 채우는 입의 역할을 담당하고 밖으로는 수출입의 관문 역할을 해온 부산, 따라서 대한민국의 사내들의 힘찬 삶의 터전이자 그토록 어렵고 굳센 어머니들의 삶으로 우리들을 더없이 당당하고 훌륭하게 키워냈던 부산----. “애증으로 내가 나고, 애증으로 내가 크고, 또다시 애증으로 내 아이들이 커가는 이 땅/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부산”----.
김홍희 시인의 첫 시집 {부산]은 2008년, 일본 니콘 선정의 세계적인 사진 작가가 ‘언어로 찍은 사진이자 사진으로 쓴 언어의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시와 사진이 하나가 되고, 사진과 영혼이 하나가 된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부산’을 노래한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록
이원형
우산과 양산이 되어준 허공 세 평
직박구리 지지고 볶는 소리 서너 되
바람의 한숨 여섯 근
불면의 밤 한 말 가웃
숫기가 없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그늘 반 마지기
산까치가 주워 나른 뜬소문 한 아름
다녀간 빗소리 아홉 다발
오디 갔다 이제 왔나
고라니똥 같은 오디 닷 양푼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는
덤이라 했다
산뽕나무 한 채 헐리기 전
열흘 하고도 반나절의 기념비적
가족사는 이러하였다
일가를 이루었던 세간이며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덩그러니만 남았다
--이원형 시집 {당신은 꽃을 쓰세요 나는 시를 쓸테니}(근간)에서
실록實錄이란 무엇인가? 실록이란 첫 번째로 한 임금의 재위기간 동안 일어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을 말하고, 두 번째로는 어떤 사건이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기록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는 실제로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음직한 사건들을 인간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낸 실록소설을 말한다.
하지만, 그러나 모든 역사나 전기, 또는 신화와 종교마저도 실록소설에 지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실 그대로의 사건이나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나 전기작가, 또는 시인이나 종교학자도 어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 들은 바가 없으며, 그들이 쓴 그들의 책마저도 그들의 상상력과 거짓으로 쓴 가공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나 전기, 또는 신화와 종교에서의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모든 이야기들은 후세의 작가와 역사가들이 조작해낸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이나 사실은 존재해야 하지만, 그러나 진실이나 사실은 존재하지 않은 채로 존재하며 모든 이야기꾼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어제의 진실과 오늘의 진실이 다르다. 이 사실과 이 진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의 조명에 따라 그 작품의 가치와 품격이 달라지듯이, 어떤 사실과 진실은 글쓴이의 역사관과 그 위치와 입장과 심리적인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변주될 수가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성인군자와 범죄자, 천재와 바보, 장군과 병사, 적과 동지 등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인간들은 그때 그때의 시대와 위치와 입장에 따라 살아가는 ‘천의 얼굴’을 지닌 배우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고, 우리 인간들은 선천적인 사기꾼이자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원형 시인의 [실록]은 산뽕나무 한 그루의 일대기이며, 이 산뽕나무의 일대기를 시로 쓴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실록]은 산뽕나무의 무덤이자 기념비이며, 그 가족들이 영원히 살아가는 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산뽕나무는 우산과 양산이 되어준 허공 세 평의 집을 짓고 살고 있고, 직박구리의 지지고 볶는 소리는 서너 되가 된다. 바람의 한숨은 여섯 근이 되고, 불면의 밤은 한 말 가웃이 된다. 숫기가 없는 그늘은 반 마지기가 되고, 산까치가 주워 나른 뜬소문은 한아름이나 된다. 다녀간 빗소리는 아홉 다발이 되고, 고리니똥 같은 오디는 닷 양푼이 되고,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는 덤이 된다.
이원형 시인의 [실록]은 “산뽕나무 한 채 헐리기 전/ 열흘 하고도 반나절의 기념비적/ 가족사는 이러하였다”라는 시구가 말해주고 있듯이, 그가 열흘 동안 관찰한 산뽕나무의 가족사를 시로 쓴 소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야수 중의 야수이며,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는 악마라고 할 수가 있다. 산을 깎고 강을 막는 것, 집을 짓고 도로를 내는 것, 농지를 개발하고 무차별적으로 불로초를 심거나 벌목을 하는 것----, 우리 인간들은 주관적인 편견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그가 필요하면 무엇이든지 다 저지르고 본다. 산뽕나무 일가를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오디만큼 달았던 방귀”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모든 신화와 종교와 역사와 전통들을 다 파괴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뽕나무는 큰산과도 같고, 큰산은 성인군자의 넉넉한 품과도 같다. 그 넓은 가슴과 옷자락에 만물을 다 품어 기르고, 그의 오디만큼 달콤한 말과 사상으로 모든 만물들을 다 먹여 살린다. “시 삼백 편에는 사악한 생각이 하나도 없다”라는 공자의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산뽕나무는 천세불변의 성인군자와도 같다. 이원형 시인의 [실록]은 성인군자의 실록이며, 산뽕나무 한 그루의 이야기로 만인들을 심금을 울린다.
거짓말에도 이로운 거짓말과 해로운 거짓말, 또는 아름다운 거짓말과 더럽고 추한 거짓말이 있듯이, 우리 인간들은 진실만큼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음과 양, 남과 녀가 이음동의어에 불과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거짓말 속에서 태어나 거짓말의 젖을 먹고 자라나고 거짓말을 생산해내면서 살아간다. 부처와 예수와 알라와 제우스와 호머 등, 이 신화적 인물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조작해낸 가공의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의 진신사리는 히말라야의 설산보다도 더 많고(크고), 전지전능한 예수는 천년, 만년이 지나도 되살아나지 못한다. 호머는 최초의 서사시인이자 최후의 서사시인이기는 커녕, 눈 뜬 장님이자 인간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의 세계는 거짓말의 세계이고, 우리 인간들은 이 거짓말의 역사와 전통을 창출해내면서 더욱더 아름다운 ‘산뽕나무(성인군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모든 시는 거짓말이고, 이 거짓말이 실록으로 정체를 드러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을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미화시켜 나간다. 이원형 시인의 산뽕나무의 일대기, 그 아름다운 소우주는 그러나 너무나도 슬프고 허무하게 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아, 이 디지털 인공지능의 시대에, 그 어디 가서 산뽕나무(성인군자)의 소우주를 찾아볼 수가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