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씀에 있어서..
올림픽 종목에서는 야구의 입지가 좁아졌다기보다는 입지가 사라졌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아이오씨 위원회에서 퇴출이 된 것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국내외 프로야구의 모습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여전히 하기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야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9회말 투스트라이크 쓰리볼 카운터에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책을 읽다보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의 하이데거의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에 대한 것과 현대신학적 입장에 대한 것에 비교되어지는 정황에 대하여 글을 씁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1, 니체사상의 특징에 대한 개관
니체의 사상의 특징은 부정형의 보편이라는 점에서 어떤 해설적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단편적인 것으로써의 모습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니체의 사상적 입장을 묘사한다는 것은 한정한다는 것은 니체의 사상을 제대로 못읽는다는 것의 기본적인 논란과 시비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니체의 해석의 문제를 놓고 독일의 하이데거를 비롯한 쪽의 사람들과 프랑스의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자들의 입장과 레비나스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화목을 말하는 허바마스의 모습들 그리고 잘 알려진 가톨릭계의 인물로써 막스 밀러의 사상적 입장들의 연관성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규범에 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자유라는 개념을 임의적으로 해방적으로 생각하려는 사람들 공산주의와 전쟁애호가들 그리고 새로운 창조라는 개념의 인위적 사람들 무위적 개념에서 탈피하려는 사람들 예술의 임의적 정당함을 호소하려는 사람들 기독교의 가르침의 사실을 확신이 없는 것이며 임의적으로 극단적이고 전제주의라고 말하려는 사람들은 이 니체의 사상적 채계와 해석학적 입장이 아주 매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매력적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임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개념은 항상 정당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개념에 그들은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의적으로 이런 질문도 규정되어지지 않는 사실이라는 억측만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상대적인 말의 규범적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 인데 그것은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핑계치 못하는 것으로써 아직 답변하지 못하는 그리고 영원히 답변하지 못하는 자리에 그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2. 니체사상에 대하여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신은 죽었다는 개념에 대한 언급에 피해의식적 발로인가라는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부당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안티적 개념에서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니체의 부당한 합리성의 범주에서 하나님에 대한 비판의 당위성이 없는 가운데서의 그러한 말하는 것의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기만함에 대한 것과 그것에서 무슨 어떤 합리적 기술의 당위성과 그 자유를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체와 니체의 해석과 그에 따른 전반적인 해석학적 동향에서는 버틀란트 러셀의 그의 서양철학적 입장에서 수학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함에 대한 지적함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버틀란트 러셀의 불가지론적 입장이라는 개념의 판단이 거짓임과 잘못임에 대한 것을 전제로 말하면서 그의 수학적 입장의 것을 제고할 수 있다고 할 때에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집합적 개념에서도 되어지는 보편의식을 독일과 프랑스 사람들이 100년이나 헛된 공방을 하고 있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니체의 전집들은 도서관에 기본적으로 있는 것을 볼 때에 참 답답한 이성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연수의 집합과 유리수의 집합을 기억할 때에 둘다 무한 집합의 개념이며 그 경계선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집합은 대소가 비교되어지고 또한 둘다 한정되어지는 한마디로 부분집합이라는 규범적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좀더 수학적인 입장을 생각하면 무한집합이라고하는 것에서도 대소가 비교되어지는 집합적인 개념에서의 부분집합이라는 한정적인 가운데서의 규범이 가능한 것으로써 경계선을 말하지 못하는 무한집합이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니체의 사상적 입장이 부정형의 음악언어를 철학로고스 언어로 바꾸는 가운데서의 무정형의 보편을 말한다고 하여서 한정되어지지 않는 자유라고 해석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연수의 집합에서 연산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그 안에 포함되어지는 자연수적인 숫자를 가지게 되어지는 정황에 놓이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물론 연산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개념에서 달리 이야기할 수 있는 수학적 개념이 있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정되어짐에 대한 사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것의 실제적 기준이 있다고 하면 니체의 사상을 필요이상으로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어리석음의 100년 논쟁은 이미 종결되어진 논쟁의 의미없는 나열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수학과 철학적개념의 인식의 차이의 불연속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기우적인 개념만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우의 수라는 개념으로 해석의 경우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진행적 개념과 그에 따른 수학적 개념의 비교적 입장은 통계적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경험철학적 입장에서 실생활과 인식적 상관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차라 투스트라이크 아웃~~ the Game is over, it is not right in Christ our Lord
우리말에 '그만두어라'는 말이 '치워라'라는 말로 사용되어지는데 그런 것이 경상도 표현으로 하면 '챠라'라는 말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해석적인 의미로 일관하고 있는 현대신학적 현대철학적 개념의 당위성에서 출발하는 그러한 말들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 투스트라이크'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의 부정을 말하는 것으로 니체의 사상을 한정시키고 있는데 사실 그 사실의 실재로서이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의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어떤 개연적인 합리성의 당연성이라는 점에서 인정도 부정도 못하는 어쩡쩡한 판단을 받고 일방적으로 극단주의라는 개념의 판단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사상적 입장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이 믿는 자존적 하나님의 정당함에 따른 사실 구별로서 하이데거를 읽어 낸다면 가톨릭적인 개념의 분별없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못하는 경향에서 떠나 자유롭게 니체의 한정되어진 신이해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써..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의 주제를 주목해보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것의 해석적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의 주제는 '초인사상'과 '영원회귀'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의 사상적 입장을 분별해서 주목한다면 니체는 시간에 따라 존재를 해석하였다는 것은 바르게 해석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정오 사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순환적 시간관에서 존재인식과 존재의 부정으로써의 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플라톤적개념의 사상적 입장의 신을 부인하면서도 그러한 과정은 이해하는 신화창조를 말하는 니체의 사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Karl Albert는 플라톤의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그 유출적개념의 시작을 니체의 사상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관조라는 개념에서 부터 에온이 유출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규정되어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관조가 관조의 사실에 충실할 수 없음으로 해석되어지는 죄에 비교되어지는 것으로 묘사하며 유출이 되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의 이해, 한양대학교출판부, 관조에 대한 이해를 언급하는 부분들에서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에 대한 것은 서론적 앞부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신이 없는 신학 사신신학의 기본적인 과정적 입장이요 부정형의 신을 말한다는 개념에서 신앙의 착색으로서의 과정철학적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정철학자 스베덴보리의 철학적 신관도 이에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고 헤르만 바빙크도 그의 합당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철학적 개념은 현대적 개념에서 시간관의 주관과 즉 니체의 정오사상적인 입장에서의 순환적 시간과 직선적 시산이라고 함의 변증법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의 기본으로써의 철학과 신학적 인식과 지식관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차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개념에서 나타나는 초인사상과 영원회귀라는 개념의 신플라톤적 신관또는 그것을 배제한 과정신학으로 해석한 모든 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할 수 있는 개념만 생각하고 처음부터 필로에게서 받아들였을 분이지 그것은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중세에 있었던 유출설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을 함부로 말하려고 하고 있고 담력을 얻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함부로 니케아 신앙에서 고백한 신인양성으로 증거하는 주님에 대하여서 사벨레우스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양태론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고 그것으로 양태론이 아닌 것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참 답답합니다.
차라투스트라에서의 니체의 주장에서 삶과 고통과 초인의 자리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의 고통에서 삶의 규정적인 입장을 부인하는 그러한 변증법적(dialective)가운데서의 자유와 그 어떤 단계로서의 이르는 인간의 초월적 인식과 상승이라는 것에서 나타나는 서스펜스.. 그것은 과히 야구에서 말하는 9회말 투스트라이크 쓰리볼에서 기대해볼만한 쾌감으로서의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지금에 논의 되어지고 있는 모든 대화의 글의 전제적 개념을 보면 모두 중세의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고 영원회귀적 개념에서의 성화를 말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합리성만 알고 있고 어떻게 부인되어진 것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답답합니다.
야구의 백미와 같이 보수와 진보라는 두 세력의 격돌과 같이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9회말 투스트라이크 쓰리볼에서 기대해볼만한 쾌감으로서의 합리성의 정당함에서 누가 이기느냐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챠라 투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엉뚱한 과정철학의 계시라는 스베덴보리의 사상적 인식에서 존재유출적 개념과 성화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미 부정되어진 합리성의 범주로 모르고 합리성만 겨루고 있으니.. 그만두어야 할 변론밖에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제가 합리성의 정체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합리성을 겨루는 그러한 것을 패쇄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영실력 뽐낸다고 수영금지구역에서 수영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변론으로 연약한 믿음의 형제들이 담대함을 얻어 삼위하나님을 분별없이 논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중심에서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먹을 수 있지만 연약한 자가 분별없이 먹는다면 차라리 먹지 않겠다고 하였던 것과 같이 이렇게 합리성의 분별이 없는 가운데서 대화하는 것을 볼 때에 이제는 차라리 그만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참고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첫댓글 즉석으로 글쓰는 중이어서 접속이 끊어지는 경우를 생각해서 조금씩 올리니 양해바라겠습니다
이명신님 전 니체에 근접도 못했지만 또 이 글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지만 제가 읽어 내려 가면서 한가지 키~포인트를 잡았네요..제가 갱산도 아닙니까..챠~라 ㅎㅎㅎ 제가 발견한 것이 있다면 글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함으로 사절하고 ...이명신님께서는 참 많은 지식을 쌓아음에도 철철넘치는유머가
<물론 매력적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임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개념은 항상 정당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개념에 그들은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표현방법에 아주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본질에 본질을 추구하고, 정답에 가까운 해석을 내리는 이명신님의 지혜에 놀라고 있습니다...
제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역쉬 보통분이 아님을 느낍니다..그리고 매력을 느낍니다. 제가 다시 배우는 입장에서 많은 지식을 쌓도록 도전도 해 볼 생각입니다..이제야 눈을 뜨니 감사하기도 하구요.. 여러모로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제 자신에 대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어떠한 것을 추구하느냐가 매우 중요한것 같습니다..많은 지식과 경륜을 쌓을 때 저는 병석에서 헤매며 있었는지 모릅니다..지성방에서 새로운 도전 새로운 느낌... 모든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였음을요..버릴건 버리고 쌓을건 쌓고....
휴.. 이제 글을 다썼습니다.
합리성의 범주라는 개념의 당위성이 설때만이 그 합리성의 분별적 입장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도그마라는 개념도 바로 해석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보인다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조심하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또 하나 복사를 해 가야 겠습니다. 이것도 저작권에 걸리는 건가요? 저 혼자 볼거니까 괞잖겠지요? 보고 나서 독후감(?)을 한 줄 정도 올리겠습니다. 에벤에셀1님 처럼 저도 실력이 실력인지라. 수고하시는 명신님! 주 안에서 늘 평안하십시요.
산판절옹님 무슨 말씀을요..님께서도 대단한 문장 실력가 이시더군요..제가 무슨 심판하려 온사람 같습니다 ㅎㅎ.. 그건 아니고 정말입니다...늘 바른 진리로 함께 하신 님을 알게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늘 평안 하십시요.
아닌데.....전 그냥 에벤에셀님의 말씀을 따라 했을 뿐인데....괜히 찔리셔 가지고서는 .... 정말 주안에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늘 승리하십시요.
이명신님! 이제 신학에 입문해 볼까 하는 사람에게 철학까지 감당해야하는 수고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명신님의 글을 다 이해할수 없으나 이런 취지로 받아들이겠습니다..어느 한분에게 매어달려 시간을 허비 하느니,그 수고로움을 다른데로 돌려,더 유익한데로 쓰임이 마땅하지 않겠는가!..그렇게 한번 해 보도록
하는것이 바람직 하지 않겠는냐?...지당하신 말씀 이십니다...그렇게 한번 해보죠!..그래도 그가 마음에 드는것은 그의 변함없는 소신과 뚝심!...고것 하나는 배울만 합니다!..그 분을 예수안에서 사랑합니다!...
웬 철학 저는 영어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단어들에 영어를 함께 씁니다. 저의 글을 읽으면서 영어공부도 하라고 .....아시다시피 깊이 들어가면 영어나 원어를 배워야 합니다. 상식적이고 누구나 알수 있는 것이 진리인데....신학과 철학이 기독교계를 어둡고 혼돈스럽게 만드는 군요.
No ball up..!!
ㅎㅎㅎ...캬~아
자주 말하지만 요즘에 웬만한 사람들 원어시디를 다 가지고 있고 변역본 시디를 다 가지고 있고 다 읽고 연구합니다. 시중에 나가면 기본교재는 다 있습니다. 자기들만 원어 공부하고 영어공부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말하면서 성경에 충실한 것같이 말씀하심은
요즘의 성도들의 입장과 교역자들의 중심을 너무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만든 하나님을 말한다면서 아무 형상도 말하지 말자는 그러한 신론적 입장에서 성경원어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경향은
참 그렇게 말하게 하는 자들의 신학과 철학을 기만적으로 가리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생각지 않으시는 것같아 답답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내놓으면 왠 생뚱맞는 소리하노~ 그리 넘어가고.. 줄넘기를 잘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우째 참 답답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어지지 않습니다. 진보는 보수의 한편을 전제한다는 개념에서 보편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서스펜스적인 모습들.. 이미 합리성의 범주적인 개념은 변론의 사실을 말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 그것이 니체의 변증법적인 신화창조의 개념일뿐이라는 것과 그것의 인식의 기본인 시간관이 주관적으로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