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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旅路歌(여로가), 望鄕歌(망향가)-f
慶尙道(경상도), 全羅道(전라도), 全國八道(전국팔도)를 그렇게 流浪(유랑)한지 數十年(수십년) 歲月(세월)이 흘렀습니다
走馬燈(주마등)처럼 흘러간 歲月(세월)이건만 떠돌이 身世(신세)는 면할길이 없습니다
얼핏 나귀목소리에 故鄕(고향)에대한 그리움을 달래봅니다
이노래를 듣고있자면 이효석의 小說(소설)<메밀꽃필 무렵>의 主人公(주인공) 허생원이 떠오릅니다
마치 허생원을 主人公(주인공)으로 하여 부른노래 같은 느낌을준다고 느끼는 옛노래 愛好家(애호가)들이 있으리라 믿어집니다
잘알다시피 <메밀꽃필무렵>도 비슷한 時期(시기) 作品(작품)이 었습니다
小說(소설)이나 大衆歌謠(대중가요)나 장르에 구별없이 流浪情緖(유랑정서)는 그시기 共通(공통)된 돈벌이 메뉴였습니다
定處(정처)없는 放浪(방랑)은 고달픈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故鄕(고향)에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집니다
放浪歌(방랑가)들이 大部分(대부분) 望鄕意識(망향의식)으로 連結(연결)되는 것은 그時期(시기)에 어쩌면 當然(당연)한 人間(인간)의 心思(심사)였을것입니다
집과 고향을 떠나면 의당 힘들고 외로운 삶을 이어가기에 고향에대한 그리움은 切實(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放浪意識(방랑의식)과 望鄕意識(의식)은 동전의 앞뒤처럼 함께 表出(표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望鄕歌(망향가)는 放浪歌(방랑가)와 함께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歌謠(가요)의 重要(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은 當然(당연)해보입니다
窓(창)밖에 귀뚜라미 슬피우는 밤
흘러간 옛생각에 잠못듭니다
외로운 벼개머리 맡에 눈물지우며
아아 故鄕(고향)의 가을밤이 그립습니다---------------------------------------------------------선우일선<望鄕(망향)의 가을밤>
上記歌謠(상기가요)에서는 귀뚜라미 슬피우는 가을밤 故鄕(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잠못든채 베개맡에눈물 흘리는 愛妻(애처)러운 모습이 그려집니다
기러기떼들은 자유롭게 북쪽하늘로 날아가지만 내몸은 他鄕(타향)에묻혀 살아갈수밖에 없습니다
고향에대한 그리움을 처량히 울고가는 기러기떼들 에게 맡겨 그리움을 달래봅니다----
평안도가 곻향인 선우일선이었던 만큼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가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비쳤는지도 모를일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고복수의<思鄕哀歌(사향애가)>는 노래題目(제목)처럼 고향에대한 哀切(애절)한 그리움을 담아낸 노래입니다
南(남)쪽하늘 바라보면 하늘 저멀리
흰구름 아롱아롱 흘러가는곳
꿈엔들 잊으리까 잔잔한 故鄕(고향)바다
떠돌아 십년만에 歎息(탄식)만 늘고
달빛마저 오늘밤도 남모른 눈물
歸蜀道(귀촉도) 슬피우네 고향 더욱그립네-------------------------------------------------------------------고복수<思鄕哀歌(사향애가)>
노래속 주인공은 고향을 떠난지도 어언 10여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채 타향을 떠돌고 있습니다
타향을 떠돌면서도 늘마음은 남쪽하늘 너머 고향땅에 머물러 있습니다
흰구름이 머무는곳 잔잔한 고향바다를 떠올리다 달빛어린 밤이되면 마침내 그리움에젖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맙니다
갈수없는 고향을 그리며 한마리 귀촉도가되어 그리움의 노래를 부를뿐입니다----
1202—旅路歌(여로가), 望鄕歌(망향가)-g
不滅(불멸)의 名曲(명곡) “他鄕(타향)”을 부르기도한 고복수의<思鄕哀歌(사향애가)>를 들으면”내 故鄕(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잔잔한 故鄕(고향)바다”
라고 노래한 노산 이은상의<가고파>가 떠오릅니다
두곡이 素材(소재)나 詩想(시상)에서 一致(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은 故鄕(고향)이 南(남)쪽바닷가 일것입니다
곡을작사한 趙鏞坤(조용곤)은 分明(분명) 이은상의<가고파>를 잘알고 있을것입니다
큰오빠는 싱가폴에 언니는 청도
뿔뿔이 헤져보는 他國(타국)달은 섧구나
故鄕(고향)을 부른다 코끼리 발장단에
허리를 꺽으면서 재주를 넘는다---------------------------------------------------------------------------朴響林(박향림)<故鄕郵便(고향우편)>
上記曲(상기곡)의 主人公(주인공)은 曲馬團(곡마단)에서 텀부린을 손에들고 재주를 부리는circus-girl-서커스걸-입니다
“텀부린 손에들고 코끼리 발장단에 맞추어 재주를부리”는 순간에도 고향에대한 그라움을 떨쳐낼수 없읍니다 ------
오직 그가 기다리는 것은 故鄕消息(고향소식)을 담은 便紙(편지)뿐입니다
그래서 노래 題目(제목)도<故鄕郵便(고향우편)>이라고 했습니다
노래에서 보았듯이 主人公(주인공)의 오라버니는 싱가폴에있고 언니는 中國(중국)땅 청도에 있습니다
그시기 우리민족이 그랬듯이 온가족이 이나라 저나라로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 의 陰凶(음흉)한 計䀩(계락) , 無慈悲(무자비)한 橫暴(횡포) 에 의하여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이노래는 그야말로 일제강점기에 極甚(극심)했던 日本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의 계략과 횡포에 의해서 어쩔수없이 발생했던 家族解體現像(가족해체현상)을 克明(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노래는 音樂史(음악사)를 떠나 社會史的 意味(사회사적 의미)를 갖고있음을 알게합니다
當時(당시) 武力(무력)을 動員(동원)한 强制(강제) 家族解體(가족해체)라는 社會現象(사회현상)을 잘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日帝强奪期(일제강탈기) 가요에는 여기저기 放浪(방랑)하는 노마드적 정서와 고향에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放浪歌(방랑가) 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確認(확인)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즈음 젊은 世代(세대)들이 그저 浪漫的(낭만적)인 보헤미안 노래로 着角(착각)하고있는 노래가아니라 日帝(일제)의 侵略(침략)으로 國權(국권)을 빼앗긴 結果(결과)로 타향사리로
轉轉(전전)해야했던 피눈물나고 피가꺼꾸로 솟구칠것 같은 憤怒(분노)가 同伴(동반)된 時代 狀況(시대상황)이 반영된----
日帝(일제)는 그간의 섬나라 根性(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1931년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켜 大陸侵略(대륙침략)의 野慾(야욕)을 드러내고 마침내 衛星國家(위성국가) 滿洲國(만주국)을 세워
朝鮮(조선)의 强制(강제) 植民地化(식민지화)에 滿足(만족)하지못하고 中國(중국)까지 植民地化(식민지화) 發販(발판)으로 삼았습니다
韓國(한국)에 이어 中國(중국)까지 軍國主義(군국주의), 帝國主義(제국주의)의 魔手(마수)를 뻗힌것입니다
허울좋은 大東亞共榮圈(대동아공영권)을 앞세워 차례 차례로 asia-아시아- 全地域(전지역)을 植民地(식민지)로 侵奪(침탈)하고 간탱이가 부을대로 부어서 1941년 미국과의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
을 일으켜 아시아를 넘어서 世界制覇(세계제패)의 野慾(야욕)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섬나라 日本(일본)의 原初的(원초적)인 大陸(대륙)志向(지향) 根性(근성)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이뿌리깊은 “大陸侵略根性(대륙침략근성)”은 결코 버리지 않았음을 잊지말아야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戰爭兵站基地(전쟁병참기지)가된 朝鮮(조선)은 남의나라 戰爭(전쟁)을 치루기위해 갖은 物的(물적) 人的被害(인적피해)를 勘收(감수)해야했습니다
歌手(가수)를 포함한 演藝人(연예인)들도 이러한 남의나라 戰時體制(전시체제)에 동원되어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전쟁을 격려하는 宣傳煽動(선전선동) 즉agipro의 喇叭手(나팔수)로
動員(동원)되어 平生(평생) 씻지못할 罪(죄)를 犯(범)하게됩니다
그것이 自意(자의)였던 他意(타의)였던 相關(상관)없이 親日行動(친일행동)을 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나면 그時期(시기) 이들의 行動(행동)의 反對的行動(반대적행동) 즉 獨立軍(독립군)에 加擔(가담)해 목숨까지 바친사람들이 많았기에 어쩄던 살기위해 喇叭手(나팔수)가 된 것은
그 正當性(정당성)을 그 不可避性(불가피성)을 認定(인정)받기 어럽읍니다
대동아공영권, 一視同仁(일시동인), 同祖同根(동조동근)등 소위 皇道藝術(황도예술), 銃後藝術(총후예술)의 任務(임무)를 좋건 싫건간에 떠맡아야 했습니다
특히 허울좋은 그누구에게도 贊成對答(찬성대답)을 받지도못한 鮮滿一體(선만일체), 五族協和(오족협화)라는 기치아래 전개되던 滿洲國(만주국) 植民政策(식민정책)을 擁護(옹호)하고
宣傳(선전)하는데 많은 演藝人(연예인)들이 動員(동원)되는-- 平生(평생) 씻지못할 親日行爲(친일행위)에 加擔(가담)해야 했읍니다.
1203—滿洲讚歌(만주찬가)와 親日歌謠(친일가요)-a
1940년부터는 그들의 예상대로 戰勢(전세) 가 돌아가지 않는때 아예 歌手(가수)나 演劇(연극) 映畵人(영화인)들은 아무도 權威(권위)를 認定(인정)하지않는 日帝(일제)로부터 公演藝術(공연예술)
許可證(허가증)인 技藝證(기예증)을 받아야했고 그만큼 철저한 監督(감독)과 統制(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戰勢(전세) 가 不利(불리)하게 돌아가자 日帝(일제)가 마지막 發惡(발악)을 하고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技藝證(기예증)은 歌謠(가요)뿐아니리 映畵(영화) 演劇(연극) 심지어는 國樂(국악) circus-團員(서커스단원)들까지 1년에 두번씩 資格審査(자격심사)를 거쳐 附與(부여)했습니다
演藝人(연예인)들에게는 가장 侮辱(모욕)적인 行爲(행위)일수밖에없는 學科試驗(학과시험)과 實技(실기)試驗(실기시험)으로 나누어 評價(평가)했으며 심지어는 思想試驗(사상시험)도
치러야했읍니다
主題(주제)는”戰時體制下 (전시체제하) 國民(국민)의 覺悟(각오)같은거 였습니다
여기서 思想不溫(사상불온)으로 烙印(낙인)찍히면 그자리에서 不合格(불합격)이었습니다
총독부에선 학과목이나 실기보다 思想(사상)이 더중요했던 것입니다
해서 朝鮮人(조선인)들을 전부 抑止春香(억지춘향)이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사상은 無條件-무조건- 順從(순종)하는 皇國臣民思想(황국신민사상) 이었을 것입니다
1941년에는 기존의 朝鮮演劇協會(조선연극협회) 와 朝鮮演藝協會(조선연예협회)를 강제로통합 朝鮮演劇文化協會(조선연극문화협회)로 單一化(단일화)하여 統制(통제)를 더
嚴格(엄격)하게 强化(강화)했습니다
매월 소속된 회원들을 집합시켜 思想敎育(사상교육)과 宮城遙拜(궁성요배) 行事(행사)를 擧行(거행)했습니다
여기서 宮城遙拜(궁성요배)는 천황이있는 동쪽을향해 90도로 경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天皇(천황)에대한 忠誠心(충성심)强要(강요)입니다
이들은 演藝部隊(연예부대) 혹은 移動演藝隊(이동연예대)를 결성하여 前後方(전후방)을 巡廻(순회)하면서 戰爭(전쟁)을 督勵(독려)하는 公演(공연)을 펼쳐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남의나라의 戰爭(전쟁)의 宣傳道具(선전도구), 喇叭手(나팔수)가 되어야 했습니다
初期(초기)에는 韓國語(한국어)로 노래했지만 후에는 完全(완전)히 日本軍歌(일본군가)나 日本歌謠(일본가요)만 불러야 했습니다
1937년에는 流行歌(유행가)라는 명칭이 頹廢的(퇴폐적)이고 世俗的(세속적)이라해서 國民歌謠(국민가요)로 부르도록 規制(규제)했습니다
결국 親日歌謠(친일가요), 國策歌謠(국책가요)로 가기위한 統制(통제)였습니다
Dance曲(댄스곡)인 jazz song-재즈송-도 이때부터 規制對象(규제대상)이됩니다
1943년 日帝(일제)가 벌여놓은 戰爭(전쟁)이 敗色(패색)이짙어가던 時期(시기) 敵國(적국)인 영국, 미국 등의 노래를 適性音樂(적성음악)으로 規定(규정) 禁止(금지)시키기도 합니다
물론 이태리, 독일은 같은 戰爭主軸國家(전쟁주축국가)였기에 除外(제외)시켰습니다
外國歌謠(외국가요)도 敵國(적국)과 我國(아국)을 가리는 陣營論(진영론)이 支配(지배)했습니다
이처럼 1940년전후는 韓國歌謠(한국가요)의 暗黑期(암흑기)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1931년 衛星國家(위성국가) 滿洲國(만주국)이 세워지고 1937년이후 歌謠(가요)들은 그야말로 滿洲天國(만주천국)을 노래하는 滿洲讚歌(만주찬가)가 主流(주류)를 이룹니다.
이미 일제는 만주사변을 치룬후 자기들 입맛대로 1933년 滿鮮一如(만선일여)를 標榜(표방)하고 1934년 본격적으로 꿈도야무지게 만주를 영원히 支配(지배)하기 위하여 허허벌판 만주를
開拓(개척)하기위해 朝鮮人(조선인)들의 滿洲移民政策(만주이민정책)을 施行(시행)하기 시작합니다
거짓인 것이 훤히 들려다 보이는 滿洲國(만주국)이 살기좋은 땅이라고 본격적인 政策弘報(정책홍보)에 나섰습니다
그弘報(홍보)에 動員(동원)된 것이 大衆歌謠(대중가요)였습니다
滿洲(만주)야말로 地上天國(지상천국)임을 거짓 宣傳(선전)하며 滿洲移民(만주이민)을 奬勵(장려)하는 宣傳煽動(선전선동)의 노래들을 創作(창작)케 협박 회유하기 시작합니다
일제는 만주국을 세웠으나 實質的(실질적)인 지배와 軍糧米(군량미) 備蓄(비축)을 위하여 조선인들의 强制移住(강제이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目的(목적)을 達成(달성)하기 위하여 滿洲讚歌(만주찬가)를 부를수밖에 없었기에 우리 歌謠人(가요인)들을 협박,회유했습니다
이러한 日帝(일제)의 懷柔脅迫(회유협박)에 의하여 創作(창작)된 親日歌謠(친일가요)들은 大體(대체)로 煽動的(선동적) 雰圍氣(분위기)를 造成(조성)키 위한 行進曲(행진곡) 및 軍歌風(군가풍)의
노래와 trot-트로트-新民謠(신민요)의노래로 大別(대별)됩니다
1204—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b
當代(당대) 最高歌手(최고가수)들인 백년설, 박향림, 남인수 가부른<血書志願(혈서지원)> 이화자의<決死隊(결사대)의 아내>등은 行進曲風(행진곡풍) march-이고 이화자의
<牧丹江(목단강) 便紙(편지)>백년설<정든땅>등은 trot風(트로트풍)입니다
그런데 興味(흥미)로운 것은 日帝末期(일제말기)인 1940년을 전후해서 親日歌謠(친일가요)가 아닌 一般歌謠(일반가요)에도 行進曲風(행진곡풍) 軍歌風(군가풍)의 長調(장조)노래가
急增(급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도많고 탈도많은 남인수의<感激時代(감격시대)> 김영춘<동트는 大地(대지)>는 완전히 행진곡풍 이고 백년설의 불후의명곡들이<나그네설움><番地(번지))없는酒幕(주막)> 최병호<아주까리 등불>
백난아<찔레꽃>등은 곡내용이 슬프지만 長調(장조)를 사용 건전가요 흉내를 내고있다고 설명하는 글도보입니다
短調一色(단조일색)인 trot-트로트-에서 일제말기에들어서 長調(장조)노래가 급증한다는 사실은 短調 trot-단조트로트-의 哀傷性(애상성)을 벗어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시대풍조가 반영된것입니다
물론 그希望(희망)과 勇氣(용기)는 日帝(일제)에의하여 强要(강요)된 皇國臣民(황국신민)을 위한것이고 우리民族(민족) 立場(입장)에서 抑止春香式(억지춘향식)입니다
代表的(대표적)인 곡이 百年雪(백년설) 이부른<福地萬里(복지만리)>입니다
이곡은 너무 잘알다시피 同名(동명)의 親日映畵(친일영화) 主題歌(주제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영화는解放後(해방후)에 이러한 親日行爲(친일행위)를 한마디 사과도 반성도없이 버젓이 작가로 활동하는 비양심적인 작가 김영수가 쓴 脚本(각본)을 토대로 전창근감독이 만든
國策映畵(국책영화) 라는 허울좋은 간판을단 친일영화입니다
이노래에 대한 좀더 자세한 說明(설명)은 백년설 대표곡 설명란 <종횡무진가요사 969>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興安領(흥안령) 마루에 瑞雪(서설)이 핀다
四天萬(사천만) 五族(오족)의 새로운 樂土(낙토)
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拓士(척사)
아리랑 滿洲(만주)가 아리랑 滿洲(만주)가
이땅 이라네----------------------------------------------------------------------------------백년설<아리랑 滿洲(만주)>
우리민족의 상징적인 민요 아리랑이 滿洲(만주)벌판에 浪浪(낭낭)히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題目(제목)부터 <아라랑 滿洲(만주)> 입니다
侵略者(침략자) 日本 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 立場(입장)에서 보면 滿洲(만주)를 가로지르는 興安領(흥안령)마루와 松花江千里(송화강 천리)에 새봄처럼 새 時代(시대)가 열린것입니다
그時代(시대)는 바로 노래에 登場(등장)하듯이 陰凶(음흉)한 凶計(흉계)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五族樂土(오족낙토)의 新時代(신시대)입니다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면서 펼친 五族協和(오족협화) 王道樂土(왕도낙토) 思想(사상)이 노래속에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그야말로 이노래는 滿洲國(만주국)을 讚揚(찬양)하는 官制歌謠(관제가요)요 國策歌謠(국책가요)입니다
이곡역시도 <종횡무진가요사 964> 를 보시면 더상세한 설명을 알수있습니다
그밖에”故鄕(고향)이 따로있나 정들면 故鄕(고향)이지”이라고 滿洲(만주)를 제의고향이라 노래한 백년설의<정든땅>, 滿洲(만주)의 牧丹江(목단강)으로 이주하여 성공한 오빠의 편지를 감격해서
잠을 못이룬다는 이화자의<牧丹江(목단강)便紙(편지)>, 만주로 이주해서 낮이면 農軍(농군)이되고 밤이면 책을 읽으며 성공의 길을 찾아가는 아들이 안심하라고 위로하는 남인수
<어머님 安心(안심)하소서>가 이러한 政策歌謠(정책가요)란 허울좋은 간판을 단 親日歌謠(찬일가요)의 代表曲(대표곡)입니다
후일 模作(모작)의 達人(달인) 한복남이<處女(처녀)뱃사공>로 剽竊(표절)해먹은<牧丹江便紙(목단강편지)>는 아예 蘭草(난초)피는 만주땅에 흙이 되소서 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만주땅에 一身(일신)을 바쳐 生(생)을 마감하라”는 뜻입니다
송달협의<滿洲新郞(만주신랑)>은 滿洲(만주)땅에서 새사랑 새 太陽(태양)의 新郞(신랑)이되어 새사주 새 歷史創造(역사창조)에 앞장서서 새살림 새나라 主人公(주인공)이 되라고
露骨的(노골적)으로 煽動(선동)하고 있습니다
1205—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c
박세환의<幸運(행운)의 밤차>는”흘러서 닿는곳이 우리들의 새故鄕(고향) 밤車(차) 어서가자 새고향 찾아서”라고 노래하여 滿洲(만주)땅을 希望(희망)에찬 새고향으로 讚揚(찬양)하고 있습니다
祖國(조국)땅이 落後(낙후)된 헌 故鄕(고향)이라면 만주땅은 우리가 定着(정착)해야할 paradise-파라다이스- 곧 새고향인것으로 誇張(과장) 하고있읍니다
그밖에 露骨的(노골적)인 滿洲讚歌(만주찬가)는 아니지만 만주를 떠도는 流浪(유랑)과 放浪歌(방랑가) 異國情緖(이국정서)와 鄕愁(향수)를 刺戟(자극)하는 노래들이 많이 發表(발표)되기를
强要(강요)당했습니다
후일 映畵(영화) <半島(반도)의봄>에 삽입곡으로 차용된 백난아의<望鄕草(망향초)사랑> 최초직업가수 채규엽<北國(북국) 5000km-오천키로><滿洲(만주)의 달> 이인권<鄕愁列車(향수열차)>
백년설<北方旅路(북방여로)> 남인수<오라의 눈썰매><北國(북국)의 외론손><울리는 滿洲線(만주선)> 이난영<할빈 茶房(다방)> 계수남< 牧丹江(목단강) 술집> 등이 滿洲讚歌(만주찬가)의
代表的(대표적)입니다
이들 歌謠(가요)는 露骨的(노골적)인 滿洲讚歌(만주찬가)는 아니지만 滿洲(만주)를 背景(배경)으로 靑春(청춘)과 사랑을 구가하는 浪漫(낭만)과 꿈을 노래하고 있다는점에서 廣義(광의)의
滿洲讚歌(만주찬가)라 볼수있습니다
全面的(전면적)인 親體制(친체제) 노래는 戰爭狂(전쟁광) 日帝(일제)의 露骨的(노골적)인 强要(강요)에 의하여 創作(창작)된 戰爭(전쟁)을 督勵(독려)하는 勝戰歌(승전가) 및 志願兵歌(지원병가)
形態(형태)로 나타납니다
특히 戰爭志願(전쟁지원)을 督勵(독려)하는 志願兵歌(지원병가)가 主流(주류)를 이룹니다
일제는 中日戰爭(중일전쟁)을 치루고 大陸侵略戰爭(대륙침략전쟁)이 本格化(본격화)되자 不足(부족)한 軍人(군인)을 朝鮮志願兵(조선지원병)으로 채웠습니다
말이 志願兵(지원병)이지 割當制(할당제)에 의한 强制動員(강제동원)이었습니다
조선의 피 같은 젊은이들이 아무 利害關係(이해관계)도 없는 남의나라 日本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 戰爭狂(전쟁광)들을 위해 沙地(사지)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도 모자라 전문대이상 高學歷者(고학력자)들은 學徒兵(학도병)이란 허울좋은 名目(명목)으로 4500여명이 動員(동원)되었다는 피가솟구치는 기록이 보입니다
전쟁이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으로 擴大(확대)되자 급기야는 陰凶(음흉)한 本色(본색)을 드러내기시작 1943년 8월부터 아예 형식적인 지원병제서 强制徵用制(강제징용제)로 바꾸어 20만명을
전쟁터 내몰아 2만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게만듭니다
이기록은 다른 主張(주장)도 보입니다
이들의 强制(강제)動員(강제동원)을 고무하고 合理化(합리화)하기 위하여 일제는 演藝人(연예인)들을 動員(동원)하여 영화,연극, 대중가요에 이용합니다
수많은 演藝人(연예인)들이 戰時體制(전시체제) 戰爭督勵(전쟁독려)에 動員(동원)되는 그들 一生(일생)에이ㅅ어서 가장 恥辱的(취욕적)인 行爲(행위)를 해야했습니다
母國(모국)의 젊은이들을 死地(사지)로 모는 戰爭(전쟁)督勵(전쟁독려)는 그들일생에 씻지못할 상처를 남겼을것입니다
1940년대 접어들어서 군국가요, 친일가요가 급증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습니다
이미 戰爭(전쟁)에 미쳐버린 日本軍國主義者(일본군국주의자)들의 奴隸(노예)가되어 母國(모국)의 젊은이들의 죽음을 强要(강요)하는 戰爭督勵(전쟁독려)를 위한 歌謠(가요)를 마치 앵무새처럼
노래불러야 했습니다
親日歌謠(친일가요)임이 분명한 軍國歌謠制定(군국가요제정) 은 1937년 中日戰爭(중일전쟁)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공식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정찬주의<銃後(총후)의 祈願(기원) , <勝戰(快報(승전쾌보)>같으노래는 앞서 언급한 목적에서 발표되었습니다
노래 題目(제목)부터 아예 銃後(총후), 勝戰(승전) 등 軍國主義(군국주의)를 讚揚(찬양)하는 內容(내용)입니다
먼저 天皇讚歌(일황찬가)를 볼까요
이몸이 죽고죽어 백번을죽은들
임향한 一片丹心(일편단심) 잊으오리까
봄밭에 피는꽃도 임의 은혜요
새벽에 뜨는별도 임의 은혤세
世上(세상)의 모든 것이 그사랑일세------------------------------------------------------------백년설<이몸이 죽고죽어>
1206--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D
백년설의<이몸이 죽고죽어>는 마치 우리 歷史(역사)속에서 勝者(승자)인 이방원에 가려져 잊혀짐을 强要(강요)당한 高麗(고려)의 萬古(만고)의 忠臣(충신)정몽주의 시조<丹心歌(단심가)>를
聯想(연상)케합니다
아니 어쩜 音盤企劃者(음반기획자)들이 無心(무심)결에 이러한 歷史(역사)속 忠臣(충신)까지 意圖的(의도적)으로 불러내서 親日(친일)歌謠(가요)에 使用(사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白骨(백골)이 塵土(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一片丹心(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라는 丹心歌(단심가)를 飜案(번안)한것으로 정몽주의
임은 高麗(고려)요 高麗(고려)의 君主(군주)였지만 백년설이 노래한 임은 불행하게도도 日本天皇(일본천황) 일수밖에없습니다
音盤企劃者(음반기획자)들의 진짜 속마음이야 그게아니길 바라지만----
이 親日歌謠(친일가요)에서 --총독부에의하여 그렇게 創作(창작)하도록 脅迫(협박)당했겠지만--- 天皇(천황) 은 거의 神的(신적)인 存在(존재)로 그려집니다
봄에피는 꽃도 새벽하늘에 뜬별도 모두 천황의 恩惠(은혜)로 創造(창조)된것입니다
그야말로 天(천)皇恩(황은) 天地創造(천지창조)의 神(신) 입니다
“새살림”과 “웃으며사는 것”도 다 天(천)황의 福(복)이니 그를위해서 만번죽어도 여한이없고 죽어서가는길도 임의길이라------
하여 이천오백만이 성수를 받들어 忠誠(충성)의 길에 나가야한다 고 强要(강요)당했습니다
어느 墮落(타락)한 盲信道(맹신도)의 사이비 敎主(교주)처럼--- 文明(문명)한 국가사람들이 들어면” 신을모욕한다” 비판을받을만한---그런짓거리를 그시기는 울며겨자 먹기로 받아드려야 했습니다
역사깊은 半島(반도)山川(산천) 忠誠(충성)이맺혀
榮光(영광)의 날이 왔다 光明(광명)이 왔다
나라님 부르심을 환히 받들어
힘차게 나아가자 二千五百萬(이천오백만)
아~感激(감격)의 깊을 二千五百萬(이천오백만)
아~感激(감격)의 깊을 二千五百萬(이천오백만)----------------------------------------------------------------------남인수, 이난영<二千五百萬(이천오백만) 感激-감격>
天皇(천황) 의 부르심을 받들어 戰爭(전쟁)에 뛰어드는 것이 恩惠(은혜)를 갚는길이요 榮光(영광)의 길이다
우리모두 동쪽하늘 우러러서 聖壽(성수)를빌고 한목숨 한마음을 임께바쳐 美英(미영) 無窮(무궁)怨讐(무궁원수) 擊滅(격멸)의 마당에 定義(정의)로 나가야한다---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原子爆彈(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찍소리 한번못하고 無條件降伏(무조건항복)을 한 그저 懦弱(나약)한 戰爭狂(전쟁광)에 불과한 天皇(천황) 이 우리民族(민족)에 배푼게
뭐있다고 恩惠(은혜)에 報答(보답)하는 길이니---, 뭐그리 尊敬(존경)할만 人間(인간)이라고 동쪽하늘 우러러 聖壽(성수)를 빈다하며 極尊稱(극존칭)을 쓰는지---???
지나가는 개가 다웃을 이러한 幼稚(유치)한 歌詞(가사)로된 親日歌謠(친일가요)를 부르게했으니----
지금생각해보면 어이없고 理解(이해)하기 힘든부분이 너무많습니다
戰爭督勵(전쟁독려)는 父母子息(부모자식) 男便(남편)등 家族愛(가족애) 애)에 呼訴(호소)하는 方法(방법)으로도 불려졌습니다
家族愛(가족애)만큼 切實(절실)하고 끈끈한정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呼訴力(호소력)이 클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보면 人間(인간)의 가장약한 부분을 볼모로 戰爭督勵(전쟁독려)를 强要(강요)함은 가장 野卑(야비)하고 水準(수준)낮는 行爲(행위)라에 批判(비판)받을수 밖에없습니다
살아서 돌아오는 네얼굴보다 죽어서 돌아오는 너를 반기며
勇敢(용감)한 내아들의 忠義(충의)忠誠(충성)을
志願兵(지원병)의 어머니는 자랑해주마-------------------------------------------------------------------------장세정<志願兵(지원병)의 어머니>
아들을 낳아키운것도 오로지 나라를위해 서였습니다
그러니 싸움터로 내보낼때는 눈물을 감추고 자랑스럽게 웃으며 보내야한다
“사나이 그목숨이 꽃이라면 피를 흘리고 기운차게 떨어지는 붉은 사쿠라, 이것이 半島男兒(반도남아) 本分(본분) 일것이라고 當付(당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植民地下(식민지하)에서 脅迫(협박)속에 創作(창작)된 作品(작품)이라 해도 어떻게 피를나눈 같은 同抱(동포)를 향해”살아서 돌아오는 네얼굴보다 죽어서 돌아오는 너를 반기며---“라고
極端的(극단적) 表現(표현)할수 있는지 이는 脅迫(협박)당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親日(친일)로 變質(변질)한 貌襲(모습)입니다
作詞者(작사자) 조명암의 變質(변질)이 憤怒(분노)를넘어 섬뜻하기 조차합니다
戰爭(전쟁)터에서 피를흘리며 꽃처럼 지라고 呼訴(호소)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꽃은 일본의 國花(국화)인 사쿠라 일것입니다
1207—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E
이어서”살아서 돌아오는 네얼굴보다 죽어서 돌아오는 너를 반기겠다는 必死(필사)의 覺悟(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남의나라를 위해 戰爭(전쟁)터에 개죽음을 당하려나가는 같은 同抱(동포)에게 半島男兒(반도남아)의 本分(본분)이라 하고있습니다
어느 父母(부모)가 子息(자식)이 죽기를 바랄까마는 이노래는 오히려 子息(자식)의죽음을 榮光(영광)으로 생각합니다
“子息(자식)보다는 나라를 于先(우선)으로 하겠다는 極端的(극단적) 愛國心(애국심)의 發露(발로)다”라고 說明(설명)하는 글이보이는데
子息(자식)보다 남의나라 日本(일본) 帝國主義(제국주의)를 于先(우선)시 하겠다는 조명암의 생각이 親日骨髓分子(친일골수분자) 답습니다
차홍련의<어머니의 祈願(기원)>도 戰爭(전쟁)터에 보낸 아들을 激勵(격려)하는 內容(내용)의 노래입니다
이처럼 母性愛(모성애)를 巧妙(교묘))하게 利用(이용)하여 軍國主義(군국주의)를 讚揚(찬양)했던 것입니다
장세정의<志願兵(지원병) 의어머니>가 어머니가 부른 노래라면 백년설의<아들의 血書(혈서)>는 이 에대한 아들의 答歌(답가)입니다
어머님전에 이 글월을 쓰옵나니
兵丁(병정)이 되는것도 어머님 恩惠(은혜)
나라에바친목숨 還故鄕(환고향)하올적에
쏟아지는 敵彈(적탄)아래 죽어서 가오리다----------------------------------------------------白年雪(백년설)<아들의 血書(혈서)>
朝鮮(조선)사람 그누구도 그렇게 生角(생각)치않는데 朝鮮(조선)사람이쓴 노래 歌詞(가사)에서---아예 죽어서 돌아갈것이니 어머니는”이얼굴 다시 보리라 生角(생각)마옵소서”하며 同抱(동포)들
에게 싸움터에나가 죽으라고 强要(강요)하고 있습니다
그어머니에 그아들입니다
헌데 이모든 것이 自發的(자발적)인 行爲(행위)가아닌 日本軍國主義者(일본군국주의자)들의 脅迫(협박)에 의한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같은동포에게 살아서 이얼굴 볼생각마라 그것도 어머니에게 그런말을 하라고 强要(강요)하는 作詞者(작사자) 조명암을 비롯한 音盤企劃者(음반기획자)들의 놀라운 親日(친일)로의
變身(변신)이 섬뜻할정도 입니다
겉으로 봐선 母子(모자) 모두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는 愛國者(애국자)가 되라고 强要(강요)당하고 있습니다
日本軍國主意者(일본군국주의자)들에겐 人間(인간)의 生命(생명)보다 天皇(천황)을 위한 죽음 아들보다도 나라를 더생각하는 殉國歌謠(순국가요) 愛國歌(애국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나라와 임은 朝鮮(조선)이아닌 日帝(일제)였고 元兇(원흉)은 無謨(무모)하기 짝없는 戰爭狂(전쟁광) 天皇(천황) 이었읍니다
이와 같이 人間關係(인간관계)에 가장親密(친밀)한 母子間(모자간)의 愛情(애정)까지도 戰爭督勵(전쟁독려)에 動員(동원)하여 죽음을 覺悟(각오)한 勝戰歌(승전가)를 부르게하는
天人共怒(천인공노) 한 漫行(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어머님의 便紙(편지)를 앙가슴에 품고가오
산을넘고 물을건너 進軍(진군)三千里(삼천리)
비가오면 비에젖고 눈이오면 눈에얼며
兵丁(병정)으로 죽는 것이 所願(소원) 이었소----------------------------------------------------------------이규남<軍事郵便(군사우편)>
이노래 亦是(역시) 아들과어머니의 가장 原初的(원초적)인 感情(감정) 인 사랑을 動員(동원)한 가장 卑劣(비열)하고 水準(수준)낮은 歌謠(가요)입니다
어머니의 편지에 답글형식으로 보낸노래입니다
그시기 親日歌謠(친일가요) 企劃者(기획자)들은 人間(인간)의 가장약한 부분을 野卑(야비)하게 파고들고 결코 건드려서는 안될 人間(인간)의 尊嚴(존엄)까지도 서슴없이 毁損(훼손)해가며
日帝(일제)의 走狗(주구)가 되어갔습니다
<晋州(진주)라 千里(천리)길>이란 不朽(불후)의 名曲(명곡)을 부르기도 한 聲樂家(성악가)出身(출신) 가수 이규남이 이노래를 發表(발표)함으로써 그간 쌓아올린 名譽(명예)를 하루밤사이
허물어버리는 結果(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곡은 전쟁터의 現場(현장)을 具體的(구체적)으로 描寫(묘사)하고있어서 實感(실감)을 느끼게한다는 歷史意識(역사의식)이 전혀없어 보이는 說明(설명)이 보입니다
산을넘고 물을건너 진군하다가 決死隊(결사대)로 差出(차출)되어 敵軍(적군)이있는 참대숲으로 뛰어들어 戰鬪(전투)를 하는 場面(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戰死(전사)한후 피에젖은 적삼을 보낼 테니 그걸 나라위한 愛國心(애국심)의 表象(표상)으로 자랑스럽게 받아달라는 내용입니다
“兵丁(병정)으로 죽는 것이 아들의 소원”이었으니”아들의 죽음을 어머니의 자랑”으로 삼아달라는 것입니다
허나 子息(자식)을둔 朝鮮(조선)의 父母(부모)들에겐 그저 목숨을 威脅(위협)하는 脅迫-협박-으로 밖에 받아드려 지지않는 도저히 共感(공감)할수없는 歌謠(가요)였습니다
이처럼 父母子息(부모자식)간의 애틋한 家族愛(가족애)를 戰爭(전쟁)의 犧牲(희생)으로 轉移(전이) 시키는 도저히 容恕(용서)하기 힘든 짓거리를 소재로한 가요창작을-----
日本軍國主義者(일본군국주의자)들의 企劃(기획)아래 우리 歌謠創作者(가요창작자)들이 범하고 있읍니다
허나 解放後(해방후) 이 天人共怒(천인공노) 할 漫行(만행)을 고백하고 容恕(용서)받으려한 歌謠人(가요인)들은 없습니다
이 歌謠(가요)는 後日(후일) 이러한 親日(친일)을 目的(목적)으로 창작된 歷史(역사)는 까마득히 모르는체 後排歌手(후배가수) 고대원에 의하여 一般歌謠化(일반가요화)되어 remake 됩니다
音盤企劃者(음반기획자)들의 歷史意識(역사의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나큰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音盤(음반)입니다
오스카레코드 發賣(발매) 10인치음반-옛노래여 永遠(영원)히-에 side b 맨밑에 고대원 목소리로 <어머님 便紙(편지)>라는 題目(제목)으로 改題(개제)되어 실려있습니다
1208— 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F
軍國主義者(군국주의자)들이요 戰爭狂(전쟁광)들인 日帝(일제)의 마지막 發惡期(발악기)인 1943년경 발표된 이화자의<決死隊(결사대)의아내>는 結成(결성)되는 그순간 죽음을 통보받은거나
다름없는 決死隊(결사대)에 投入(투입)되어 鐵條網(철조망)을 뚫고 한목숨을 바친 男便(남편)의 죽음을 讚揚(찬양)하는 지금들어보면 그저 헛웃음만 나오게하는 內容(내용)으로 되있습니다
한목숨넘어져서 千兵萬馬(천병만마) 길이되면
그목숨 애끼오리 용감한 님이시여
이안해는 웁니다 이안해는 웁니다
감개무량 웁니다-------------------------------------------------------------------------------------李花子(이화자)<決死隊(결사대)의 아내> 3절 歌詞(가사)
正常的(정상적)인 思考(사고)를 가진 女性(여성)이라면 도저히 할수없는 行爲(행위)를 우리朝鮮人(조선인)들에게 태연히 强要(강요)하는 日帝軍國主義者(일제군국주의자)들 下(하)
音盤(企劃者(음반기획자)들과 그에 協助(협조)한 韓國歌謠人(한국가요인)들 모두가 窮地(궁지)에 몰려 그시기 제정신이 아니었겠지만 두고두고 非難(비난)받아야할 가요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한목숨 넘어져서 千兵萬馬(천병만마) 길이되면 그목숨 애끼오리까 勇敢(용감)한 님이시여”라고 男便(남편)의 죽음을 讚美(찬미)하고 있습니다
“나랏님에 바친사랑 별같고 해같해, 이 안해는 우옵니다, 감개무량 웁니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子息(자식)도 버리고 男便(남편)까지 戰爭(전쟁)터에 잃게된 아내가 감개무량으로 울고있는 것입니다
나랏님은 달같고 해 같은 존재니 나라를 위해서 바치목숨은 영광인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죽음앞에 부인은 감개무량의 기쁨에차 우는것입니다
잘해여 이웃의 한낱 <戰爭狂水準(전쟁광수준>)인 天皇(천황)으로보고 나랏님이니--- 이세상 살아가는데 꼭필요한 귀중한 존재인 해와달 수준의 존재라 속이고 그걸믿으리 生角(생각)하고
그런노래를 만들기를 强要(강요)한 日本軍國主義者(일본군국주의자)들의 意識水準(의식수준)이 한심하다못해---- 그런취급을 받고산 祖上(조상)들이 寒心(한심)하기도 하고 憤怒(분노)가
치미는걸 참을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노래를만든 군국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일뿐 이러한 노래를듣고 행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걸------
봄까지 울어울어 꽃피는 아침에
당신이 보낸便紙(편지) 받았습니다
글장에 담은 충성범연하겠소
당신께 바라는건 빛나는 죽음이요-----------------------------------------------------------------옥잠화<봄날의 화신>
이노래 亦是(역시)도 日帝發惡期(일제발악기)에 발표된 노래처럼 朝鮮人(조선인)들의 죽음을 强要(강요)하고있습니다
戰勢(전세가) 점점 불리해지며 敗北(패배)를 거듭하며 窮地(궁지)에 몰리자 마지막 發惡(발악)을 하고있습니다
後方(후방)에있는 아내가 戰線(전선)에있는 男便(남편)에게 보내는 便紙型式(편지형식)의 親日歌謠(친일가요)입니다
이노래에선 두살배기 아들을 動員(동원)하여 男便(남편)의 忠誠心(충성심)을 鼓舞(고무)하고 있어서---이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애 했냐 비판을 면할수없습니다
두살배기 아들을찍은 寫眞(사진)을 同封(동봉)해서 아들과함께 응원할 테니 열심히 싸워달라는 脅迫(협박)아닌 脅迫(협박)입니다
夫婦間(부부간)의 情(정)으로도 모자라 갓난 아이까지 動員(동원)하고 있습니다
남인수, 백년설, 박향림 등 당시 okeh-record 소속 最高人氣歌手(최고인기가수)를 동원해 취입한<血書志願(혈서지원)>은 역시 일제발악기인 1943년 실시된 해군지원병에 응모한 지원자들의
포부와 각오를다지는 노래입니다
이노래는 앞선<종횡무진가요사>에 상세히 설명되있으니 참고바랍니다
大東亞(대동아) 共榮圈(공영권)은 동터 오르고
太平洋(태평양)의 太陽(태양)도 燦然(찬연)하구나
불붙은 聖火(성화)들고 가슴이 뛰는
亞細亞(아세아)의 십일억모든 民族(민족)아------------------------------------------------------------이규남<전승가>
上記曲(상기곡)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名分(명분)이던 소위 大東亞共榮圈(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주제로한 친일가요 입니다
大東亞共榮圈(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가 西歐列强(서구열강)의 支配下(지배하)에 奴隸(노예)로 살았던 만큼 이제는 힘을합쳐 서구열강을 물리치고 아시아인들끼리 共榮圈(공영권)의
連帶下(연대하)에 잘살아보자는 속이훤히 들여다보이는 詭辯(궤변)입니다
1209— 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g
말하자면 西歐列强(서구열강) 具體的(구체적)으로 美英(미영)帝國主義(제국주의)를 打倒(타도)하고 日本(일본)을 中心(중심)으로 大東亞國(대동아국)을 建設(건설)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아시아를 힘으로 强奪(강탈)한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 의 陰險(음험)한 野慾(야욕)을 드러낸 戰爭理念(전쟁이념) 인걸 훤히 알수있습니다
그밖에 김용환이 脅迫(협박)에 어쩔수없이 취입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추정된곡<半島義勇隊歌(반도 의용대가)><男兒(남아)의 日記(일기)> 남인수 이난영듀엣곡<二千五百萬(이천오백만) 感激(감격)>
“홍도야우지마라”의 히어로 김영춘<東亞(동아)의 黎明(여명)> 이인권의<戰線(전선)의달>도 親日歌謠(친일가요)입니다
그시기 朝鮮最高 最高歌手(조선최고가수)의 親日行爲 動員痕跡(친일행위 동원흔적)이요 두 歌手(가수)에게는 永遠(영원)히 잊지못할 屈辱(굴욕)이기도 한 노래<이천오백만 感激(감격)>에서
“동쪽하늘 우러러 聖壽(성수)를 빌고 한목숨, 한마음 임에바치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榮光(영광)의 날이 왔으니 이천오백만이 국민이 힘을합쳐 美英(미영)의 의 無窮怨讐(무궁원수) 擊滅(격멸)의 마당 正義(정의)로 나가자고 煽動(선동) 하고있습니다
日帝(일제)는<志願兵歌(지원병가)><勝戰歌(승전가)>등의 效率(효율)을 높이기위하여 당시 大衆(대중)들에게 人氣(인기)있던 조명암, 박시춘,백년설, 남인수,이화자, 장세정----등등 有名(유명)
音樂人(음악인)들을 脅迫(협박)을 同伴(동반)해 總動員(총동원)을 敢行(감행) 親日(친일)歌謠(친일가요) 創作(창작)을 劃策(획책)했습니다
文壇(문단)의 主要作家(주요작가)들 亦是(역시) “親日歌謠 作詞歌(친일가요작사가)” 로 大擧動員(대거동원)되었고 그과정에서 아예 親日骨髓分子(친일골수분자) 로 轉向(전향)한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원래 大衆歌謠歌詞(대중가요가사)는 歌謠黎明期(가요여명기)에는 專門家(전문가)없이 詩人(시인) 劇作家(극작가) 심지어는 新聞記者(신문기자)등이 참여했습니다
一般(일반)大衆(대중)作詞(작사)歌(가) 보다 比重(비중)있는 文人(문인)들의 動員(동원)이 大衆(대중)들의 呼應度(호응도)에 더큰 影響(영향)을 줄수 있으리라 믿어서 최남선, 김억, 이광수,이하윤
등 中進文人(중진문인)들이 親日(친일)歌謠(가요) 制作(제작)에 參與(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일이 生涯最高(생애최고) 就褥的(취욕적)인 行爲(행위)로 기억되겠지만 그누구도 公開的(공개적)인 反省(반성)은 없었습니다
일어 나거라 우리 임금이
분부받자와 一億一心(일억일심)이
넓은 天地(천지)에 八紘一宇(팔굉일우)의
새론 세계를 이룩하라고------------------------------------------------------------李光洙(이광수) 親日(친일)作(작)<希望(희망)의 아침> 홍난파작곡
이 歌謠亦是(가요역시) 大東亞共榮圈(대동아공영권)을 主題(주제)로한 親日歌謠(친일가요)입니다
“우리임금” 곧 天皇(천황) 의 분부 받잡아 八紘一宇(우) (팔굉일우)의 아시아 共榮國(공영국)을 建設(건설)하자고 煽動(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곳은”子子孫孫(자자손손) 만대가 복누릴수있는 國土(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우리 임금 우리 日章旗(일장기)”라는 表現(표현)에서 日本(일본)에 完全(완전)히 同和(동화)된 植民主義意識(식민주의의식) 엿 볼수있어서 크게 분노를 느낍니다
이하윤의<勝戰(승전)의 快報(쾌보)>는 從軍記者(종군기자)의 愛國心(애국심)을 呼訴(호소)하는 노래입니다
銃劍(총검)은 안가져도 戰線(전선)에나와
붓으로 敵(적)을치는 從軍記者(종군기자)다
敵陣(적진)을 바라보며 攻擊(공격)의 喇叭(나팔)
號外(호외)로 알려주는 從軍記者(종군기자)다-------------------------------------------------------이하윤 作詞(작사) <勝戰(승전)의 快報(쾌보)>
“승전의쾌보”는 銃劍代身(총검대신) 붓과 pen-펜-으로 적을대하는 종군기자의 覇氣(패기)와 勇氣(용기)를 讚揚(찬양)하고 있습니다
戰線記者(전선기자)는 戰場(전장)의 生生(생생)한 戰鬪紀錄(전투기록) 을 전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물론 후방의 지원자들에게 勝戰意慾(승전의욕)과 勝利感(승리감)을 鼓吹(고취)시키는
중요한 役割(역할)을 하는 人物(인물)들입니다
一般的(일반적)인 從軍記者(종군기자)등에 該當(해당)되는 말일진데---노래는 그러한 從軍記者(종군기자)들의 목숨을건 犧牲精神(희생정신)을 讚美(찬미)하고 있습니다
헌데 그戰爭(전쟁)이 누구를 위해 벌어지느냐에 따라 讚美與否(찬미여부)가 決定(결정)되는것인데 지금 노래속 從軍記者(종군기자)는 植民地化(식민지화))의 元兇(원흉) 天皇(천황)을 위해서
그것도 朝鮮(조선)젊은이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現場(현장)을 取材(취재) 하고 있으니 결코 讚美(찬미)의 對象(대상)이 결코될수 없음을 알아야하고 이러한 노래를 “異彩(이채)를 띠는가요”라 는
表現(표현)을 한 歌謠史冊(가요사사책)이 보이는바 이는 歷史意識(역사의식)많이 부족한 表現(표현)입니다
“목숨을건 결사적보도는 그야말로 전쟁의꽃인 것이다”라는 표현이 첨가되있는데 이는 一般的(일반적) 從軍記者(종군기자) 이야기고 노래속 기자처럼 同族(동족)이 남의 戰爭(전쟁)에서 죽어가는걸 取材(취재)하는 行爲(행위)는 “戰爭(전쟁)의꽃”云云(운운)할 對象(대상)이 결코아닙니다!!!
1210--滿洲讚歌(만주찬가) 親日歌謠(친일가요)-h
김억이 作詞(작사)로 親日歌謠創作(친일가요창작)에 參與(참여)한<從軍看護婦(종군간호부)의 노래>는 “晋州(진주)라 千里(천리)길”이란 不朽(불후)의 名曲(명곡)을 創作(창작)한 이면상이 작곡하고
歌謠界代父(가요계대부) 김용환의 친 여동생인 김안나가 노래 불렀습니다
김안나는 聲樂(성악)을 專攻(전공)한 專門音樂人(전문음악인)이고 대중가요<동무의 追憶(추억)>을 불러 사랑을 받았는데 결국에는 親日歌謠(친일가요)를 취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흰옷과 붉은 십자의 cap-캡-을 걸친 간호부가 負傷(부상)당한 兵士(병사)를 간호하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病院(병원)도 아닌 天幕(천막)을 둘러친 야전병원 인것을보면 戰線(전선)한가운데 임을 알수있습니다
간호부는”慈愛(자애)의피가 뛰는” 獻身(헌신)의 자세로 負傷兵(부상병)들을 간호하고 있습니다
戰線(전선)의 看護婦(간호부)지만 女性(여성)을 素材(소재)로한 노래라 抒情的(서정적)인 雰圍氣(분위기)도 감돌고있다는 說明(설명)이 보입니다
“大砲(대포)는 쾅 우레로 튀고 총알은 땅빗발로 날지만” 들판에는 들꽃이피고 해가지면 가을바람속에 둥근달이 떠오른다
잠시 疲勞(피로)를 잊고 故鄕生角(고향생각)에 젖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哀愁(애수)의 感情(감정)조차 浪漫的(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悲壯美(비장미) 悲劇美(비극미)를 더하기위한 感情移入(감정이입)으로 活用(활용)된것에 불과하다니----
곧 戰爭(전쟁)의 悲壯(비장)함 崇高(숭고)함을 高揚(고양)시키기 위한 感性的(감성적) 機制(기제)였던 것에 불과했다니--- 곡을 창작한자들의 徹底(철저)함,野卑(야비)함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어쩔수없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有名文人(유명문인)들까지 動員(동원)하여 전쟁을 독려하고 軍國主義(군국주의) 體制(체제)를 讚揚(찬양)하는 노래제작에 參與(참여)시켰습니다
‘文人(문인)들의 參與(참여)는 一般大衆(일반대중)에게 전쟁의 當爲性(당위성)을 弘報(홍보)하는데 큰效果(효과)를 거둘수있다 그들이역사를 이끌어가는 知性人(지성인)들 指導者(지도자)의
位置(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라는 主張(주장)이있는데 “나라가 이지경이 되도록 그들은 뭘했나??” 물으보면 그들의 對答(대답)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軍國主義者(군국주의자)들의 生角(생각)이 그래서 그들을 弘報效果(홍보효과)를 위하여 親日歌謠制作(친일가요제작)에 强制動員(강제동원)시켰다면----그들에대한 기대가 “당신들마저 그래??” 하며
憤怒(분노)로 바뀐 朝鮮(조선)의 一般(일반)大衆(일반대중)의 生角(생각)은 안했나요?? 弘報效果(홍보효과)보다는 그들에대한 失望(실망)으로 인한 憤怒(분노)가 더크다는걸-----!!!
親日歌謠(친일가요)의 對蹠點(대척점)에 서있는 것이 民族意識(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抗日歌謠(항일가요)라 할수있습니다
抗日歌謠(항일가요)는 이미 개화기에때 閭巷(여항)간에 불려지던 東學歌謠(동학가요) 義兵歌(의병가) 唱歌(창가)등에서 확인됩니다
노래의 性格上(성격상) 記錄文學(기록문학)으로 남기는 힘들었고 口碑傳承(구비전승) 형태로 民間人(민간인) 義兵(의병) 憂國之士(우국지사)들 사이에 불려진 노래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보로 채집되어 문헌으로 남기기도 힘들었고 더구나 음반으로 찍어내기는 더욱 불가능 했음으로 그자료를 찾기는 힘든일이었습니다
하지만 國權喪失(국권상실)의 危機(위기)에 처해 과감히 鬪爭先鋒(투쟁선봉)에선 우국지사, 의병, 東學農民(동학농민)의 氣槪(기개)와 鬪爭意志(투쟁의지)를 엿볼수있다는 점에서
貴-귀-한資料(자료)임이 틀림없습니다
해서 무엇보다도 資料(자료)採集(채집)과 發掘(발굴)이 시급한데---
日帝强占基(일제강점기) 民族意識(민족의식)을 바탕으로한 歌曲(가곡),歌謠(가요)들을 追跡(추적)해봅니다
한국가곡은 홍난파, 이상준, 김영환, 현제명, 안기영, 박태준, 김동진, 이흥렬, 채동선, 나운영-----등등의 선구자들에 의해서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음악학교에서 수업을받고 예술적인 차원에서 명곡을 빚어낸 것입니다
대중가요가 말그대로 大衆性(대중성) 商業性(상업성) 流行性(유행성)을 갖는다면 가곡은 專門性(전문성), 藝術性(예술성), 正統性(정통성)을 갖는 音樂樣式(음악양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活動(활동)하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였음으로 의당 知識人(지식인)으로서 時代(시대)에대한 責務(책무)와 歷史(역사)의 召命感(소명감)에서 결코 自由(자유)로울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歌曲(가곡)은 한국의 情緖(정서)와 正體性(정체성)에 기반을둔 음악인 것이 틀림없기에 이를 鼓吹(고취)하고 昻揚(앙양)함이 音樂人(음악인)으로서 使命(사명)을 다하는 길이었습니다
1211—民族(민족)의노래, 抗日(항일)의노래-a
音樂(음악)은 民衆(민중)들의 情緖涵養(정서함양) 은 물론 어떤 意識(의식)이나 理念(이념)을 傳播(전파)하기에 가장좋은 藝術樣式(예술양식)일수있습니다
노래한곡을 듣고 엳은 靈感(영감)과 感動(감동)은 그사람의 意識(의식)을 바꿔놓을수도 있는것입니다
마치 軍隊(군대)에서 軍歌(군가)를 濟唱(제창)함으로써 連帶感(연대감)과 團結力(단결력)을 高陽(고양)시키는 效果(효과)를 가져오는것과 비슷하다는 글이보입니다
노래를 통해서 國民(국민)들의 感情(감정)과 情緖(정서)를 움직이는 힘은 총칼과 같은 武力(무력)의 힘보다 강 한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音樂(음악)의 힘이고 技能(기능)인것입니다
한국 近代音樂(근대음악)의 先驅者(선구자)들도 이러한 음악의힘, 노래의 技能(기능)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嚴格(엄격)한 日帝(일제)의 統制下(통제하)에서도 民族意識(민족의식)을 鼓吹(고취)하고 民族(민족)의 正體性(정체성)을 昻揚(앙양)하는 民族歌曲(민족가곡)을 作曲(작곡)했던 것입니다
日帝(일제)의 監視(감시)를 피하기위해서 隱喩(은유)와 比喩(비유)를 同伴(동반)하여 노랫말 制作(제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가곡은 全面的(전면적)인 鬪爭意識(투쟁의식)을 鼓吹(고취)하는 義兵鬪爭歌(의병투쟁가)와는 다르게 抒情性(서정성)과 藝術性(예술성)을 內包(내포)하면서 民族意識(민족의식)을 高揚(고양)했습니다
歌曲(가곡)은 樂譜(악보)가 분명하고 音盤(음반)으로 出市(출시)되기 때문에 檢閱(검열)을 피하기위해 比喩(비유)化(화)된 象徵的(상징적)인 表現(표현)에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우리가 日帝(일제)强占(강점)期(기) 발표된 가곡을 들으며 敏感(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어야하는 부분이 바로이것입니다
“鳳仙花(봉선화)”를 노래하되 민족의 表象(표상)으로 隱喩化(은유화)된 봉선화의 참 意味(의미)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봉선화는 단지 봉선화라는 꽃의 아름다움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꽃의 image-이미지-속에 民族魂(민족혼)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바우고개>에서 기다리는 임은 單純(단순)한 사랑의 임이 아니라 우리 民族(민족)의 또다른 貌襲(모습)이고 숨결이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글이 보입니다
울밑에선 鳳仙花(봉선화)야
네모양이 凄凉(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반겨 놀았도다-------------------------------------------------------------------------------------------김형준시,홍난파곡<鳳仙花(봉선화)>
歌謠(가요)치곤 比較的(비교적) 初期(초기)인 1920년작곡 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처음 홍난파의 短篇小說(단편소설)<處女(처녀)의 魂(혼)>에<哀愁(애수)>라는 제목으로 가사없는 melody-멜로디-만 실려있었는데 그冊(책)으로본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봉선화>로불려지게 되었습니다
音樂史(음악사)的(적)으로 創作歌曲(창작가곡)의 효시로 評價(평가)받는 곡이라는 主張(주장)이보입니다
이곡에 대한건 따로란을 마련 詳細(상세)한설명을 드리기로 하고 여기서 줄입니다
歌曲(가곡)은 여기서 줄이고 후에 란을 다시만들어 說明(설명)드리기로 하고 大衆歌謠(대중가요)중 民族意識(민족의식)을 담은 곡을 살표보겠습니다
韓國大衆歌謠史(한국대중가요사) 黎明期(여명기) 歌謠(가요)의 礎石(초석)을 놓은사람은 매우 興味(흥미)롭게도 樂士出身-악사출신 김영환입니다
그에관한 설명은 앞서 여러 번 했으니 참고바랍니다
그가작곡한<봄노래부르자>는 抵抗(저항)的(적) 隱喩(은유)를 담은 民族意識(민족의식)을 담은 가요입니다
오너라 동무야 江山(강산)에 다시 때돌아 꽃이피고
새우는 이봄을 노래하자 江山(강산)에 동무들아
모두다 몰려라 춤을추며 봄노래부르자---------------------------------------------------------------------------김서정사,곡 채규엽노래<봄노래부르자>
우리대중가요 초기인 1930년경 最初職業歌手(최초직업가수)로 評價(평가)받는 蔡奎燁(채규엽)이 歌手debut –가수데뷔곡-으로 불렀읍니다
일찍이 聲樂(성악)을 전공한 채규엽이 vase 音域(베이스음역) 으로 불렀읍니다
빼앗긴 江山(강산)에 봄이오기를 기다리는 心情(심정)으로 創作(창작)된 곡입니다
그런 意味(의미)를 默示的(묵시적)으로 알아차려 當時(당시) 全國的(전국적)으로 어린이에서 靑壯年層(청장년층)에 이르기까지 愛唱(애창)했습니다
심지어 敎會(교회)의 主日學校(주일학교)에서 固定(고정) repertory-레파토리-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212--民族(민족)의노래, 抗日(항일)의노래-b
노래는 봄이와서 꽃이피고 새가우는 風景(풍경)을 抒情的(서정적)으로 그린 歌謠(가요)입니다
춤을추며 봄을 讚美(찬미)하자는 純粹(순수)하고 浪漫的(낭만적)인 봄의 禮讚曲(예찬곡)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봄을노래하는 서정적인 노래지만 찬양의 대상인 江山(강산)이 잃어버린 祖國(조국)이고 그곳에 찾아오는 봄은 곧 獨立(독립)이라는 比喩的(비유적)인 뜻을갖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았겼지만 無心(무심)한 季節(계절)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그봄을 다같이 讚揚(찬양)하자는 內容(내용)인것인데----
“다같이 讚美(찬미) 하자”는 봄은 결국”祖國(조국)의 봄”이요 解放(해방)을 意味(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祖國(조국)의봄 곧 獨立(독립)된 祖國(조국)을 꿈꾸는 노래인것입니다
그것이 이노래가 發賣禁止(발매금지)가된 背景(배경)이었습니다
허나 이곡이 發賣禁止(발매금지)되었다는 確實(확실)한 物證(물증)이 없습니다
고로 上記說明(설명) 들은 그저 推測(추측)일뿐입니다!!!
1933년 日帝(일제) 總督府訓令(총독부훈령)으로 레코드취체규칙 제정 첫번째로 치안방해,풍기문란 으로 “곡이발표된지 3년후 판매금지” 주장도보이나 물증이 부족합니다
民族意識(민족의식)이 뚜렷히 나타나는 가요로<荒城(황성)의 跡(적)>이 있습니다
荒城(황성)옛터에밤이되니 月色(월색)만 고요해
廢墟(폐허)에 설운 懷抱(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외로운 저나그네 홀로 잠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elegy의 達人(달인) 전수린 作曲(작곡) 王平(왕평) 作詞(작사) 이애리수 노래<荒城(황성)의 跡(적)>
이가요의 誕生背景(탄생배경)은 여러설이 존재하나 確認(확인) 할길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歌謠關係者(가요관계자)들이 전부 이 世上(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直接(직접) 노래를 취입한 이애리수씨가 얼마전까자 生存消息(생존소식)이 전해져 old-fan-들을 놀라게했으나 결국 他界(타계)하고 말았습니다
한때 榮華(영화)를 누렸던 開城(개성) 松嶽山(송악산) 滿月臺(만월대)의 성터는 雜草(잡초)가 우거진채 외로운 달빛을 받고있었고 그 쓸쓸한 風景(풍경)을 바라보며 전수린은 오래전에 망한
高麗(고려)성터와 現朝鮮(현조선)의 狀況(상황)을 비교하며 雜草(잡초)가 우거지고 廢墟(폐허)가 되버린 고려성터가 마치 지금의 主權(주권)잃은 조선의상황 같다고 여겨지자 평소 바이올린주자로
바이올린 旋律(선율)처럼 銳敏(예민)한 感覺(감각)을 몸에익힌 그가 이러한 elegy-엘레지- 雰圍氣(분위기)를 그냥놓일리 만무 그러한 분위기를 간직한채 머물던 여관에 도착하자
樂譜化(악보화) 하고 이러한 心情(심정)을 전수린으로 부터 전해들어 共有(공유)하게된 八方美人格(팔방미인격)으로 뛰어난 演藝人(연예인)이요 劇作(극작)에도 一家見(일가견)이있는
王平(왕평)이 具體的(구체적)으로 전수린의 그心情(심정)을 歌詞化(가사화)합니다
이 不朽(불후)의 名曲(명곡)은 回告調(회고조) esprit-에스프리-를 노래하고 있으나 단지 感性的(감성적)인 次元(차원)이 아니라 內面(내면)에 民族意識(민족의식)을 內包(내포)하고 있습니다
高麗(고려)의 荒城(황성)이 있던 옛터는 무너지고 月色(월색)만 고요한채 풀벌레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옵니다
마치 풀벌레도 나라잃은 슬픔을 아는듯 울고있는 것입니다
城(성) 은 허물어졌는데 芳草(방초)만 茂盛(무성)하게 자란 모습이 더 쓸쓸한 懷抱(회포)를 자아내게합니다
그 瞬間(순간) 銳敏(예민)한 性格(성격)의 所有者(소유자) 전수린은 世上(세상)의 虛無(허무)함을 깨닫고 사는것에 대한 懷疑(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노래에서 虛無(허무)함은 삶의허무함을 넘어서 歷史(역사)의 虛無(허무)함으로 昇華(승화)됩니다
나라를앓은 슬픔과 虛無(허무)를 느끼는 段階(단계)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나는 누구이고이고 내가 무엇을 해야하나 고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라잃은 國民(국민)들 그것은 雜草(잡초)만 우거진 성터의 나그네와 다를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滿月臺(만월대)의 荒城(황성)의터를 보고느낀 슬픔뿐만 아니라 民族(민족)의 슬픔과 恨(한)을 노래한 가요라는것까지-----
이가요도 <종횡무진가요사>에서 이미 상세한 說明(설명)이 있었습니다 나머지부분은 그란을 참조바랍니다
1213—日帝歌謠淸算(일제가요청산)과 解放讚歌(해방찬가)-a
그 殘酷(잔혹)했던 日本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者(자)들에 의한 植民地(식민지)에서 우리 民族(민족)의 解放(해방)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解放(해방)은 美蘇(미소) 强大(강대)국의 2차대전의 戰利品(전리품)으로 온것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亡命政府(망명정부), 獨立鬪士(독립투사)들의 노력을 無視(무시)할수없지만 型式上(형식상)으로 解放(해방)은 美蘇(미소) 聯合戰線(연합전선)에의한 日本(일본)敗亡(패망)의 産物(산물)이었음을
매우 自尊心(자존심)상하는 말이나 否認(부인)할수없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레 찾아온 解放(해방)이었기에 日帝(일제)殘在(잔재)淸算(청산)은 政治(정치) 社會(사회) 文化(문화) 모든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대중가요 역시 일제시대 불려지던 노래들 ,즉 trot-트로트-와 新民謠(신민요)등이 그대로 解放(해방)空間(공간)으로 이어지는 樣相(양상)을 보입니다
日帝時代(일제시대) 大衆歌謠(대중가요)서 좋은 歌詞(가사)를 創作(창작)한건 事實(사실)이나 결국에는 친일골수분자로 변신했던 조명암, 채규엽, 등과박영호, 강홍식등이 越北(월북)
해버렸고 박시춘, 손목인, 이재호, 반야월, 백년설, 남인수등 日帝强占期下(일제강점기하)에서 苦痛(고통)과 설움의 歲月(세월)을 보냈던 歌謠人(가요인)들은 올바른 判斷(판단)으로
南韓(남한)에 남아서 解放空間(해방공간)의 歌謠界(가요계)의 主軸(주축)이됩니다
解放後(해방후) 政局(정국)의 最大課題(최대과제) 는 日帝殘在淸算(일제잔재청산) 이었습니다
하지만 政治社會(정치사회)가 그랬듯이 歌謠界(가요계)도 소위 親日歌謠(친일가요)를 부른가수,작곡가,작사가들에 대한 嚴格(엄격)한 統制(통제)와 規制(규제)는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親日淸算意志(친일청산의지)도 없었고 그罪(죄)를 묻고나면 남은 歌謠人(가요인)이 없을정도로 거의모두가 該當(해당)이 되었습니다
일부 自進越北(자진월북)한 인사를 빼고는 대부분 그대로 解放空間(해방공간)의 音樂界(음악계)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民族(민족)의 限界(한계)였고 歌謠界水準(가요계수준)이었습니다
그시기 越北歌謠人(월북가요인)으로 禁止曲(금지곡)에 包含(포함)된 사람은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北韓(북한)의 人民軍(인민군)에 납치되가다가 爆擊(폭격)으로 死亡(사망)한
김해송,이면상, 박영호, 조명암 등이 있었고 反對(반대)로 越南(월남)한 歌謠人(가요인)은 한정무, 한복남, 전오승, 김동진 등이었습니다
가극협회외에 演藝人(연예인)들의 단체인 韓國舞臺藝術院(한국무대예술원) 이 結成(결성)되어 解放後(해방후) 混亂(혼란)했던 演藝活動(연예활동)의 秩序(질서)와 체계를 잡아갔습니다
1947년에는 jodk-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이 호출번호를 hlka-서울中央放送局(중앙방송방송국)로 바꾸고 專屬輕音樂團(전속경음악단)을 발족하고 專屬歌手制(전속가수제)를 둔것도
해방후 歌謠發展(가요발전)에 크게 其餘(기여)했읍니다
日帝(일제)軍國主義(군국주의)에 빼앗겼던 放送主權(방송주권)을 되찯아서 Hlka-radio-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電波(전파)를타고 全國坊坊曲曲(전국방방곡곡) 노래를 들을수 있었습니다
그시기 樂團指揮(악단지휘)는 日帝時代(일제시대)부터 大衆歌謠界(대중가요계) 有名作曲家(유명작곡가) 出身(출신) 박시춘,손목이 맡았고 專屬歌手(전속가수)로는 김백희,송민도
고대원, 금사향등 곧 大衆音樂界(대중음악계) 의 star 로 有名(유명)해지는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아~아~ 山(산)이막혀 못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다 같은 故鄕(고향)땅을 오고가건만
南北(남북)이 가로막혀 怨恨千里(원한천리)길
꿈마다 너를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三八線(삼팔선)을 헤맨다----------------------------------------------------------------------이부풍사 박시춘곡 남인수노래<가거라 三八線(삼팔선)>
이 時期(시기) 남인수씨는 無能(무능) 政府(정부)로인해 臨時(임시) 美蘇軍事分割線(군사분계선) 인 三八線(삼팔선)이 영원히 固着化(고착화)되어 또다시 우리민족이 南北(남북)으로
갈림을 猛非難(맹비난)하는 가요<가거라 三八線(삼팔선)>을 發表(발표)해서 民族(민족)의 가슴을 울렸고
달도하나 해도하나 사랑도하나
이나라에 바친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祖國(조국)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모두야 우리들은 檀君(단군)의 子孫(자손)-----------------------------------------------김건작사 이봉룡작곡 남인수노래<달도하나 해도하나>
民族(민족)의 分斷(분단)이 固着化(고착화)되어가는 政勢(정세)속에서 南北統一(남북통일)을 念願(염원)하는 또하나의노래인 <달도하나 해도하나>가 1949년발표되어 인기를 모았습니다
허나 결국 美軍政(미군정)의 安日(안일)한 歷史意識(역사의식)과 한 妄靈(망령))난 늙은이 이승만 의執權慾(집권욕)의 合作品(합작품)으로 남한만의 반쪽자리 政府樹立(정부수립)으로
南北(남북)의 分斷(분단)은 固着化(고착화)되고 맙니다
<달도하나 해도하나>는 이러한 반쪼가리 정부수립으로 민족이 남과북으로 갈라짐을 비판하고있습니다
남과북은 달과해가 하나이듯 우리민족은 하나인데 왜 남과북으로 갈라지는 정부를 세우느냐 그러면 우리민족은 영원히 갈라지고 말것이라고 비판학있습니다
1214--日帝歌謠淸算(일제가요청산)과 解放讚歌(해방찬가)-b
이처럼 解放後(해방후) 歌謠界(가요계)의 日帝殘滓淸算(일제잔재청산) 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일부는 左翼音樂團體(좌익음악단체)에 加入(가입)하거나 越北(월북)해버리도 했으나 大部分(대부분) 태연히 활동을을 지속하며 解放空間(해방공간) 및 解放後(해방후) 韓國歌謠界(한국가요계)의
主流(주류)로 變身(변신)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이었기에 歌手(가수)들을 키워낼 時間的餘裕(시간적여유)가 없었으므로 旣存歌謠界人物(기존가요계인물)들이 解放(해방)의 빈공간을 메꿀수밖에 없었던 것일것입니다
남인수, 박시춘 같은 傑出(걸출)한 人才(인재)없이는 解放空間(해방공간)의 歌謠界(가요계)를 이끌수없는 狀況(상황)이 作用(작용)했다고 自爲(자위)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들의 親日行爲(친일행위)가 無慈悲(무자비)한 日帝(일제)의 軍國主義(군국주의)에 의하여 恣行(자행)된 國策(국책)의 所産(소산)이었던 것 에 대한 (配慮(배려))도 作用(작용)한것으로 보인다
는 뒷맛이 씁쓰레한 글도보입니다
일제는 1941년 官制(관제) 御用團體(어용단체)인 朝鮮(조선)音樂會(음악회) 나 朝鮮演劇文化協會(조선연극문화협회) 등을 結成(결성)하여 음악인, 연극인들을 철저히 統制(통제)하고 規制(규제)했
던것이고 그들의 强要(강요)와 政策(정책)에 따를수밖에 없었던 것이 親日歌手(친일가수)들의 立場(입장)이었읍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天皇(천황)의 軍隊(군대)라는 美名(미명)뿐인 皇軍慰問團(황군위문단)을 결성하여 戰線(전선)의 황군들을 위무하고 강제로 끌려간 朝鮮(조선)의 學徒兵(학도병) 徵用(징용)당한
젊은이들을 鼓舞(고무)시키기 위하여 公演(공연)에 앞장서야 했습니다
심지어 일종의 公演(공연) 許可證(허가증)인 技藝證(기예증) 제도를 實施(실시)하여 當事者(당사자)들에 平生(평생)씻지못할 不名譽(불명예)를 안겨주었고 철저히 가수, 연극인, 배우들을 統制(통제)했고
報國藝術(보국예술)이라는 美名(미명)아래 宣傳煽動(선전선동)의 道具(도구)로 活用(활용)했습니다
그중에는 自進(자진)해서 親日行爲(친일행위)에 나선이도 없지 않았겠지만 太半(태반)이 이러한 國策(국책)에 따를수밖에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解放(해방)이 되었으나 이러한 行爲(행위)에대한 제대로된 反省(반성)이나 淸算作業(청산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歌手(가수)들 뿐아니라 심지어는 親日(친일)歌謠(친일가요)가 내용만 바꾸어서 그대로 불려지기도 한노래가 수를 헤아리기 힘듭니다
自由(자유)의 종이 울어 八一五(팔일오)는 왔건만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우느냐
멈춰라 驛馬車(역마차)야 普信閣(보신각)여기다
포장을 들고보니 종은 잠자네--------------------------------------------------이가실사 김해송곡 장세정<울어라 은방울> 2절
어느가요사책에 장새정의<울어라은방울> 一名(일명) 解放(해방)된 驛馬車(역마차)를 일제강점기 발표한 <驛馬車(역마차)>를 개사한노래 라는 설명이보이나 잘못된 정보입니다
두곡은 전혀다른 노래들입니다
어쩄던<울어라 은방울>은 解放政局(해방정국)의 極甚(극심)한 混亂(혼란)을 反映(반영)한가요로 解放前(해방전) 獨立鬪士(독립투사) 백범김구선생을 비롯 많은사람들이 三八線(삼팔선)의
固着化(고착화)를 惹起(야기)하는 南韓(남한)만의 總選擧(총선거)를 그렇게 反對(반대)했으나 결국 남한만의 반쪼가리 정부가 들어서고말아 祖國(조국)의 獨立(독립)이 불가해진 것을
非難(비난)하고 있습니다
歌詞(가사)에서 보듯이 ‘八一五解放(팔일오 해방)은 되었지만 獨立(독립)의 종소리는 울리지않는다” 고 하고있습니다
解放(해방)은 되었지만 南北(남북)으로 갈라져 完全(완전)한 解放(해방)이 되지못했다 고 非難(비난)하고 있습니다
解放空間(해방공간)의 極甚(극심)한 左右翼(좌우익)의 피터지는 다툼을 暗示(암시)하고 있습니다
表面積(표면적)으로는 輕快(경쾌)한fox-trot-rhythm해방의기쁜을 노래하고 있지만 이러한 어두운 이면을 지니고있는 노래입니다
歌謠(가요)가 “歷史(역사)의거울” 이라는 事實(사실)을 確認(확인) 시켜줍니다
그만큼 時代(시대)의 變化(변화) 政局(정국)의 變化(변화) 따라 노래의 運命(운명)도 달라질수 있습니다
1215—日帝歌謠淸算(일제가요청산) 解放讚歌(해방찬가)-c
1945년, 8월15일 日本軍國主義(일본군국주의)가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原子彈投下(원자탄투하)에 놀라 無條件(무조건) 항복하고 美蘇(미소)두 强大國(강대국)이 韓半島(한반도)를
分割(분할) 統治(통치)하기시작 8월28일 蘇聯軍(소련군)이 平壤入城(평양입성)에 이어 9월8일 美軍入城(미군입성)하자 解放軍(해방군)이 될거라 기대하고 臨時政府要人(정부임시요인)들을
歡迎(환영)키 위해<四大門(사대문)을 열어라>라는 解放後(해방후) 最初(최초)의 歌謠(가요)를 發表(발표)합니다
四大門(사대문)을 열어라 人境(인경)을 쳐라
三千里 曲曲(삼천리곡곡)마다 물결치는 이기쁨
民族(민족)의 꽃은 다시 피었네
榮光(영광)된 내 祖國(조국) 永遠無窮(영원무궁)하리라-----------------------------------------------------------김용환작곡 황문평편곡 혼성합창단
四大門(사대문)을 활짝열고 解放軍(해방군)인 美軍(미군)과 臨時政府(임시정부) 要人(요인)들을 歡迎(환영)하자는 뜻에서 불려진 歌謠(가요)입니다
解放(해방)이되어 民族(민족)의꽃 無窮花(무궁화)꽃이 활짝피어나길 바라는 念願(염원)을 담고있습니다
이외 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사 해당란을 참고바랍니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길더니
三千里(삼천리) 江山(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무여 자리차고 일어 나거라
아~아~ 自由(자유)의 自由(자유)의 鐘(종)이 울린다--------------------------------------------- 김성태작곡 <獨立(독립)行進曲(행진곡)>
解放後(해방후) 널리 불려진 이곡은”어둡고 괴로운 긴밤”은 사라지고 이제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에 먼동이 텄습니다
日帝(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드디어 解放(해방)이 온것입니다
希望(희망)의 종이 힘차게 울리니 두손잡고 解放(해방)의 깃발날리며 萬歲(만세)부르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무들 모두 힘차게 발맞추어 나가 悠久(유구)한 五千年(오천년)의 歷史(역사)를 더욱빛내자고 굳게 다짐합니다
김순남 作曲(작곡)의<獨立(독립)의노래>亦是(역시) 解放(해방)의 感激(감격)을 노래한 曲(곡)입니다
奸惡(간악)한 채쭉밑에 울던 四十年(사십년)
얼어진 이 江山(강산)에 새봄이 왔네
平和(평화)의 새꽃이 웃으며 핀다
높이들어라 自由(자유)의 깃발
크게 불러라 解放(해방)의노래----------------------------------------------------------김순남작곡<獨立(독립)의노래>
“奸惡(간악)한 채쭉밑에 울던 40년” 이 마침내 終止符(종지부)를 찍고”얼었던 이 江山(강산)” 에 드디어 새봄이오고 꽃이 활짝핀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健全歌謠風(건전가요풍)에 社會性(사회성)을 內在(내재)한 김순남작곡 “解放(해방)의노래” 나운영곡 “建國(건국)의노래” 도 보입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故國山川(고국산천)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無窮花(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太極(태극)깃발을
歸國船(귀국선) 뱃머리에 希望(희망)도 크다--------------------------------------------------------------신세영<歸國船(귀국선)>
그어떤노래보다 解放(해방)된 祖國(조국)의 現實(현실)을 實感(실감)있게 表現(표현)한곡은 이재호표 歸國船(귀국선)입니다
이 不朽(불후)의 名曲(명곡)이 그렇게 愛唱(애창)받는것은 36년간 나라를 빼앗기고 他國(타국)을 떠돌던 游移民(유이민)들의 哀切(애절) 亡國恨(망국한)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歌謠(가요)에는 이한목숨 草芥(초개)같이던져 祖國獨立(조국독립)을 위해 鬪爭(투쟁)한 獨立鬪士(독립투사)들의 懇切(간절)한 所望(소망)도 담겨있습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비록 解放(해방)이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으 이런저런 이유로 歸國(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歸國船(귀국선)이나 歸國列車(귀국열차)에 몸을실은 동포들의 기쁨과 感激(감격)은 벅찬것일수 밖에없었습니다
<歸國船(귀국선)>은”얼마나 그렸던가 無窮花(무궁화)꽃을” ”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解放(해방)을” 그렸던 亡國民(망국민) 한과 꿈을 절절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解放(해방)이되어 귀국선에 몸을실은 歡喜(환희)와 기대가 넘쳐납니다”몇번을 불렸던가 故鄕(고향)노래를”-----그 사무치는 향수와 그리움을 싣고오는 뱃머리에 갈매기도 웃고 도 빛났던 것입니다
1216—日帝歌謠淸算(일제가요청산), 解放(해방)讚歌(찬가)-d
일제ㅔ강점기 대중가요의 주류였던 trot-트로트-와 新民謠(신민요)의 特徵(특징)인 地名(지명)의 詩化樣相(시화양상)이 解放空間(해방공간)에도 비슷합니다
解放(해방)이되어 歸鄕(귀향)하여 비로소 故鄕(고향)의 아름다움과 安定(안정)을 되찾은 心情(심정)을 노래한 것 일것입니다
박재홍의 <울고넘는 박달재> 현인의<비나리는 姑母(고모)領(령)> 황정자의 <三多島消息(삼다도소식)>등이 그것인데 이노래들은 地名(지명)을 素材(소재)로해서 鄕土色(향토색)을 加味(가미)하여
鄕愁(향수)를 刺戟(자극)하고 있습니다
三多島(삼다도)라 濟州(제주)에는 돌멩이도 흔한데
발부리에 걷어채는 사랑은 없다더냐
달빛이 새어드는 연자방앗간
밤새워 들려오는 콧노래가 서럽구나
음~~ 콧노래가 서럽구나-
三多島(삼다도)라 濟州(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바닷물에 씻은살결 옥같이 귀엽구나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따라
비바리 하소연이 물결속에 꺼져간다
응~~물결에 꺼져가네----------------------------------------------------------------------------------- 유호사 박시춘곡 황정자노래<三多島消息(삼다도소식)>
이처럼 濟州島名物(제주도명물) 비바리-海女(해녀)-를 素材(소재)로하여 鄕土色(향토색)을 물씬풍기고 있습니다
미역과 소라를 따며 살아가는 海女(해녀)지만 眞情(진정)한 사랑을 이루지못한 설움을 民謠(민요)가락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현인의<新羅(신라)의 달밤> 박재홍<自鳴鼓(자명고)사랑> 도미<思悼世子(사도세자)> 허민<白馬江(백마강)>처럼 歷史的說話(역사적설화)를 바탕으로 回告的(회고적)esprit-에스프리-
를 刺戟(자극)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해방전 수만장판매의 奇籍(기적)을 남긴 朝鮮(조선)의 selrnade-세레나데-<荒城(황성)의 跡(적)>의 부활이라고 할수있을것입니다
아아~ 新羅(신라)의 밤이여
佛國寺(불국사)의 종소리가 들라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아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어린 金烏山(금오산)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노래를-------------------------------------------------------------박시춘곡 현인노래<新羅(신라)의 달밤>
이처럼 新羅(신라)의 古刹(고찰) 佛國寺(불국사)를 背景(배경)으로 千年社稷(천년사직)의 恨(한) 이서린 新羅(신라)의 歷史(역사)를 回告(회고)있습니다
新羅(신라)의 花郞徒 (화랑도) 宮女(궁녀)들을 召喚(소환)하여 歷史的(역사적) esprit-에스프리-를 換起(환기)하고 있습니다
이노래는 소위 “하하 唱法(창법)”으로 說明(설명)되는 歌手(가수) 玄仁(현인)의 韓國大衆歌謠(한국대중가요)계 登場(등장)을 알린노래로 有名(유명)하고 解放後(해방후) 歌謠界(가요계) 版圖(판도)가
바뀜을 豫告(예고)하기도 합니다
歌謠 fan-가요팬들은 野俗(야속)하게도 한star-스타-가 태어남에 歡呼(환호)하지만 그스타를 永遠(영원)히 좋아하지는 않읍니다
한편으로는 그스타에 싫증을내기도 하고 또다른 style-스타일-의 star誕生(스타탄생)을 期待(기대)하기도 하니깐요
南仁樹(남인수)라는 不世出(불세출)의 歌手(가수)를 좋아했던 歌謠fan-가요팬-이라고 이러한 性向(성향)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를 아직도 좋아하지만 그와는 또다른 style-스타일-의 歌手登場(가수등장)을 內心(내심) 期待(기대)하고 있었습니다
解放前歌謠(해방전가요) style-스타일-과 전혀다른 스타일의 歌謠(가요)가 國內流入(국내유입)되 었듯이 典型的(전형적) trot-트로트-풍과는 다른스타일의 노래를 불러줄 歌手(가수)의 登場(등장)을----
解放前(해방전) 부터 남인수등 歌手特徵(가수특징)을 잘파악에 그에맞는 명곡을많이 창작했던 작곡가 박시춘이 이러한 歌謠界(가요계) 흐름을 모를리만무 日帝時代(일재시대) 親日劇(친일극)에서
사용했으나 歌謠化 機會(가요화기회)를 갖지못했던 melody-멜로디- 에 未練(미련)이 남았던 그는 극작가 유호씨에게 “解放(해방)도되었으니 그에맞는 노래창작의 必要性(필요성) ”을 설명하고
改詞(개사)를 依賴(의뢰)해서 誕生(탄생)한곡이 <新羅(신라)의달밤>입니다
이러한 詳細(상세)한 事緣(사연)은 <종황무진가요사> 該當(해당)란을 참고바랍니다
1217--樂劇團(악극단)의 興行(흥행)과 歌謠 concours-大會(가요 콩쿨대회)--a
樂劇(악극)은 노래와, 춤 재담, 촌극으로 짜여진 一種(일종)의 綜合演戲樣式(종합연희양식)의 劇(극)---이라는 글이보입니다
말하자면 음악, 연극, 무용이 함께 어우러진 綜合藝術(종합예술)인 셈입니다
헌데 이글에서 “때로는 歌劇(가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主張(주장)이 있는데 이는 嚴密(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說明(설명)입니다
1937년 9월 本格的(본격적)인 opera- 公演舞臺-오페라무대-를 志向(지향)했던 <京城 opera studio- 경성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樂劇(악극)이라는 말을 使用(사용)했읍니다
從來(종래)의 歌劇(가극) 이라는 公演物(공연물)은 이름만 歌劇(가극)이지 音樂的(음악적)인 볼 때 創作性(창작성) 이나 伴奏音樂(반주음악)등의 樂團構成(악단구성)이 턱없이 短調(단조)로 왔습니다
그런뜻에서 從前(종전) 一般公演物(일반공연물)보다 音樂的(음악적)인 表現(표현)이나 構成(구성)등에 있어서 scale-스케일-이 크고 조금은 水準(수준)있는 內容物(내용물)을 表現(표현)할
때 樂劇(악극) 이라는 말을 使用(사용)했습니다
歌劇(가극)이란 명칭은 1928년 김소랑이 이끌던 취성좌에서 사용했습니다
결국 小規模(소규모)의 극을 歌劇(가극)이라 하고 스케일큰 극을 樂劇(악극)이라 통칭한다는 결론이 나오고 그런명칭을 처음으로 使用(사용)한 時期(시기)로보아 가극이먼저 탄생한것으로 보아야합니다
해서 韓國(한국)의 樂劇(악극)은 美國(미국) 등에서 盛行(성행)한 musical-뮤지컬-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樂劇(악극)은 오페라나 뮤지컬에 비하여 노래, 춤, 寸劇(촌극) 才談(재담)등 興行(흥행)을 위하여 다양한 요소가 加味(가미)된다는 점에서 차이가있다”는 글이보이는바 뮤지컬이나
오페라에도 그러한 요소가 加味(가미)된다는 것을 看過(간과)하고 있습니다
특히 樂劇(악극)은 劇(극)이로되 劇(극) 以外(이외)에 다른 要素(요소)들이 比重(비중)을 많이 차지한다는 것이 特徵(특징)이다
악극의 起源(기원)은 開化期(개화기)에 風味(풍미)하던 新派劇(신파극)에서 由來(유래)되었습니다
新派劇(신파극)의 幕間劇(막간극)으로 행해지던 것이 점차 인기가 높아지자 점차 獨立(독립)된樣式(양식)으로 發展(발전)한 것이 樂劇(악극)의 뿌리인것입니다
1930년대는 아예 record 會社(레코드회사) 直屬(직속)의 專門樂團(전문악단)-樂劇團(악극단)-으로 發展(발전)하면서 大衆藝術(대중예술)의 한갈래로 定着(정착)하게됩니다
이 樂劇舞臺(악극무대)서 揷入曲(삽입곡)으로 불리던곡들이 record化(레코드화)되기도 하고 市中(시중)에 流行(유행)되어 人氣曲(인기곡) 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중에서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말 약초극장에서 上演(상연)된 樂劇(악극) <춘향전>에서 이도령으로 扮裝(분장)한 남인수가 南原(남원)땅 五里亭(오리정)에서 春香(춘향)과 離別(이별)하는
場面(장면)서 春香(춘향)으로 扮裝(분장)한 이난영, 이화자등과 duet-듀엣-으로 부른곡으로<눈물의 五里亭(오리정)>이 있읍니다
春香(춘향)아 우지마라 우지마라 春香(춘향)아
가면은 아주가며 간다고 잊을소냐
紗窓(사창)에 달밝거든 나본듯이 보아다오
옥가락지 둥글듯이 우리사랑 변함없으리----------------------------------------------------------------- -김초량사 박시춘곡 박재홍 옥두옥듀엣<눈물의오리정>
또 1944년 라미라 歌劇團(가극단)에서 公演(공연)한<오동나무>舞臺(무대)에서 처음부른곡으로 故鄕草(고향초)가 있습니다
남쪽나라 바다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冬柏(동백)꽃도 곱게피는데
뽕을따던 아가씨들 성우로 가네
정든사람 情(정)든故鄕(고향) 잊었단 말인가---------------------------------------------------김다인사 박시춘곡 송민도노래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樂劇舞臺(악극무대)서 불린곡으로<꿈에본내 故鄕(고향)>이라는 樂劇揷入曲(악극삽입곡)이 또있습니다
처음 송달협이 부른곡으로 알려져있으나 record 化-레코드화-되지못했고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 우리 國軍(국군)이 平壤(평양)에 入城(입성)했을 때 平壤市民(평양시민)歡迎大會(환영대회)가
금천대좌서 열렸을 때 송달협 이곡을 烈唱(열창) 관객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후일 1,4후퇴시 平壤(평양)에서 越南-월남-한 歌手(가수) 한정무에 의하여 취입됩니다
故鄕(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身世(신세)
저하늘 저산아래 아득한 千里(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他鄕(타향)에서 우는몸
꿈에본 내 故鄕(고향)이 마냥그리워---------------------------------------------------------박두환사 김기태곡 송달협노래<꿈에본 내 故鄕(고향)>
1218--樂劇團(악극단)의 興行(흥행)과 歌謠concours- 大會(가요콩클대회) –b
1920년대 新派劇(신파극)이 興行(흥행)했지만 劇場施設(극장시설)이 특없이 부족하여 舞臺轉換(무대전환)에 오랜시간이 걸렸음으로해서 觀客(관객)들이 지루함을 느껴서 성질급한 관객들은
고함을지르기도 하며 運營陣(운영진) 에 큰부담으로 作用(작용)하고 이를 打開策(타개책) 幕間 show-막간쇼-를 企劃(기획)하기에 이릅니다
演劇(연극)主演俳優(주연배우)들이 登場(등장)하여 演技外(연기외) 각자 가진 長技(장기)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才談(재담)을 나누고 춤과 노래 간단한 circus-서커스-도 竝行(병행) 하고 결국 악극은 이러한 幕間劇(막간극)이 발전하면서 獨立劇形態(독립극형태)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劇形態(극형태)인 樂劇(악극)과 또다른 劇人(극인) 歌謠劇(가요극)이 있었읍니다
1930년대 후반 각 레코드사들은 經營(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生氣(생기)를 잃어갑니다
大部分(대부분)의 노래들이 悲歌風(비가풍)의 圖式(도식)벗어 나지못한 千篇一律的(천편일율적)인 歌謠(가요)라는 非難(비난)을 면치못합니다
이는 日帝總督府(일제총독부) 학무국에서 創作(창작)되는 가요에대해 事事件件(사사건건) 따지고들며 齷齪(악착)스럽게 檢閱(검열)하며 彈壓(탄압)했기 때문에 각레코드사 創作陣(창작진)들이
총독부서 원하는 無難(무난)한-그들의 입맛에 맞는-創作態度(창작태도)로 임할 수밖에 없었고 아예 總督府檢閱前(총독부검열전) 自家檢閱(자가검열)으로 자연스레 創作素材(창작소재)가
貧困(빈곤)해지고 해서 새로운 藝術的境地(예술적경지)를 開拓(개척)하여 生活(생활)과 마음의 벗이될만한 斬新(참신)한곡을 發表(발표)할수없었기에---- 이런 詳細(상세)한 內容(내용)을 모르는
大衆(대중)들은 점점 大衆歌謠(대중가요)에 興味(흥미)를 잃게되 이 時期(시기)에 제작된 record販賣量(레코드판매량)에 深刻(심각)한 打擊(타격)을 주어 會社(회사)마다 資金難(자금난)으로
아우성을 칩니다
이렇게 經營難(경영난)에 直面(직면)한 레코드사들은 몇몇가수들을 代表(대표)로하는 純粹record-순수레코드- 吹入(취입)만으로 도저히 會社運營(회사운영)이 어렵게됩니다
이에 舞臺公演(무대공연)과 레코드취입을 竝行(병행)하기 시작하면서 “實演(실연)의舞臺(무대)”을 기획하게되고 歌謠劇(가요극)이 試圖(시도)됩니다
기록에보면 1935년 2월27일, 28일이틀간 목포극장에서 이난영, 신일선, 강남향 김소군 임방울 나품심 김해송고복수등 okeh-record 所屬歌手陣(소속가수진)이 總出動(총출동)하는
”신춘음악과 實演(실연)의밤”이 열렸고 10월15일, 16일 양일간에는 조선일보 대강당에서 okeh 대연주회 가 개최되었습니다
1936년 2월에는 동아일보사 지사후원으로 在留朝鮮人(재류조선인) 同抱慰安(동포위안) okeh 대연주회 도쿄, 오사카 고베 교토, 나고야등 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헌데 이무렵의 歌謠界狀況(가요계상황)을 說明(설명)하는 또다른 글이보입니다
1937년경부터 무대공연단체에는 새로운형태의 공연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각레코드회사에서 자체선전을 겸한 <演奏會(연주회)>라는 이름으로 專屬歌手(전속가수)들의 實演舞臺(실연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公演團體中(공연단체중) 제일규모가 큰단체는 okeh-record 서 直營(직영)하는<ok 演奏團(연주단)> 이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출신이던 音樂徒(음악도) 李哲(이철)은 韓國的(한국적)인 show 興行業界(쇼 흥행업계) 의 代表的(대표적)인 企劃家(기획가) 였습니다
근 일본 제국축음기회사 서울지사격으로 한국판 레코드만은 okeh-record 商號(상호)를 달수있도록 협상에 성공합니다
이단체-ok-record-의 特徵(특징)은 또하나의 優秀(우수)한 輕音樂團(경음악단)을 가진거였습니다
樂團名稱(악단명칭)은 “c.m.c 악단” 이었습니다 “chosun music club”이니셜을 딴것입니다
이악단이 地方巡廻公演(지방순회공연)서 인기를 모으자 다음해인 1938년,10월 ok grand show-오케이그랜드쇼-라는 看板(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여기서 “實演(실연)의 舞臺(무대)”란 레코드를 吹入(취입)한 歌手(가수)가 레코드만이 아닌 實在(실재)로 舞臺(무대)서서 吹入(취입)한 노래를 實在(실재)로 들려주는 것을 말하고 歌謠劇(가요극)이란
劇的(극적)줄거리에 가요를 揷入(삽입)한 一種(일종)의 歌劇(가극)으로 形式美(형식미)에서 歌劇(가극)이라 하기 어려워 歌謠劇(가요극) 輕歌劇(경가극)이라 했습니다
각 레코드사들은 이러한 歌謠劇(가요극)을 創作(창작)하여 서울이 아닌 文化水準(문화수준)이 뒤지는 地方(지방)으로나가 巡廻公演(순회공연)을 하면서 獨唱(독창)競演大會(경연대회)도 열어서
새로운 歌手(가수)를 發掘(발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수의 record 吹入(레코드취입)하자면 어차피 小規模(소규모)나마 伴奏者(반주자)들이 필요했고 가수가 노래를 취입하지않는때는 반주자들은 할일이없으니 그시기 레코드販賣量(판매량)
이 크게 줄어버려 레코드販賣實積(판매실적)에서 얻은 收入金(수입금)만으로는 이들을 먹여살리기 없었읍니다
그런까닭에도 歌謠劇創作(가요극창작)은 必要(필요)했습니다
이렇게 資金難(자금난)을 打開(타개)키위해 歌謠劇(가요극)을 公演(공연)하게되니 가수들은 單純(단순)히 노래만 부를수 없어지고 演劇俳優(연극배우)들 처럼 演技(연기)도하고 本業(본업)인
노래도 불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大部分(대부분) 歌手(가수)들은 노래는 잘부르나 演技(연기)는 서투를수밖에 없었고 이에 演技(연기)가 서투른 歌手(가수)들은 簡單(간단)한 臺詞(대사)와 行動(행동)만의 演技(연기)를
하게할 수밖에 없었고 劇揷入曲(극삽입곡)를 부르는데 力點(역점)을 둘수밖에 없었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래 爲主(위주)의 歌謠劇(가요극)이라해도 演技(연기)가 서투른 歌手(가수)들만으로는 劇形式(극형식)의 作品(작품)을 公演(공연)할 수는 없었고 결국에는 話術俳優(화술배배우)들을
登場(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시기 창작된 가요극들은 희극과 정극, 비극으로 구분할수있는데 희극은 禮節(예절)없고 道德(도덕)없는자들에대한 嘲笑(조소)와 諷刺(풍자)를 配合(배합)한 輕歌劇(경가극)들 이었습니다
okeh-record 에서 무대에올린 ”이러지 맙시다”와 victor-record 사의 ”令監(영감)님 失手(실수)”등이 어한 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喜劇(희극)的(적)主題(주제)의 歌謠劇(가요극)들에서도 가요와 마찬가지로 總督府(총독부)의 惡辣(악랄)한 檢閱(검열)로인해 社會的(사회적)問題意識(문제의식)을 일깨우는 水準수준의)의
內容(내용)을 表現(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原初的(원초적)인 觀客(관객)들의 억지웃음이나 誘發(유발)시키는 卑俗(비속)한 作品(작품)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悲劇(비극)은 주로 그時期(시기) 우리民草(민초)들의 삶의 貌襲(모습)인 먹고살기위해 어쩔수없이他鄕客地(타향객지)에 나온사람들의 鄕愁(향수)를 달래주는 普遍的(보편적) 내용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Polydor-record 서 순회공연을 했던<追憶(추억)의 故鄕(고향)>이 그런작품의 하나였습니다
그밖에 okeh-record 서 만든 이시기 전속가수 였던 이인권과 고운봉의 노래를 代表曲(대표곡)으로한<버린 故鄕(고향)>란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가요극의 주제가로 taihei-record 서 고운봉이 가수데뷔곡 으로부른<아들의 하소>를 借用(차용)해서 불렀습니다
버린 고향이 그렇게도 그리워서
Guitar-기타-줄을 골라매고 한 曲調(곡조)타니
아버님 生角(생각) 어머님 生角(생각)
눈물줄기 흘러서 앞을가리니
꼬리 치면서 집에남은 얼룩이 잘있느나-------------------------------------------------- 유도순사 전기현곡 고운봉노래<아들의 하소>
1219--樂劇團(악극단)과 歌謠(가요)콩클大會(대회) –c
이렇듯 이시기에는 歌謠(가요)극이 發足(발족)하여 각레코드사는 積極的(적극적)인 公演活動(공연활동)을 벌였지만 規模(규모)가 매우 작을 수밖에 없어서 주로 地方(지방)에서 巡廻公演(순회공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說話(설화)와 노래가 配合(배합)된 說話劇型式(설화극형식)의 歌謠劇盜(가요극)도 創作(창작)되었는데 okeh-record 에서 창작된<춘향전>이 대표적 예입니다
지금은때도 봄이요 人生(인생)도봄 눈바람 사납던 이江山(강산)에 어느덧 꽃바람이 불어오고
교룡산성을 屛風(병풍)처럼 둘려치고 아담하게 자리잡은 南原(남원)땅에도 봄은 찾아왔습니다
봄은 靑春(청춘)이요 청춘은 꽃다운 時節(시절)이라 집집의 閨房(규방)아가씨들위 마을에도 꽃이 피나니
연산홍록 의 봄바람, 남원의 봄바람은 아가씨들의 숨결이요 마음의 노래로다
허나 春香傳(춘향전)의 揷入曲(삽입곡)들은 이미 레코드로 발매되어 유행하던 남인수, 이화자의 힛트곡을 가사만 바꿔부르는 水準(수준)이었기에 새로운 맛을 주지못했지만 專門的(전문적)인
修練(수련)있어야 歌唱(가창)할 수 있는 판소리의 春香傳(춘향전)보다는 부르기쉽고 이미 레코드로 들은 melody-멜로디- 이기에 通俗的(통속적)이어서 널리 불렸습니다
Okeh-record 에서는 정통의 歌劇(가극)을 試圖(시도)하였지만 演技(연기)에 서투른 몇 명의 歌手(가수)들만으로는 藝術的(예술적)인 公演(공연)을 不可(불가)했고 설사 가극에 출연할 배우들을
確保(확보)했다해도 많은 俳優(배우)들의 衣裳(의상)과 舞臺美術(무대미술) 其他備品(기타비품)들에 많은 資金(자금)이 所要(소요)되었기에 藝術的歌劇(예술적가극)은 慾望(욕망)뿐 이었지 도저히
實現不可能(실현불가능) 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출한 人員(인원)으로 說話(설화)와 노래가 配合(배합)된 歌謠劇(가요극) ”춘향전”을 舞臺(무대)에 올릴수밖에 없었고 이것을 record 化(레코드화)했습니다
이음반은 1942년,7월경 okeh-record 서 조명암 원작, 각색, 남인수 이화자노래로 <가요극 춘향전> 이란 제목으로 ok31116~31120 로 발매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마져도 잘팔리지 않아서 회사는 더욱 經營難(경영난)에 시달리게됩니다
이 歌謠劇(가요극) 음반은 한두장이 아닌 여러장이 한조로된 高價(고가)의 音盤(음반)이었기에 購買力(구매력)이 없었습니다
또한번의 施行錯誤(시행착오)였습니다
1937년경 元來(원래) 데이치쿠-제축- 京城支社(경성지사)격으로 運營(운영)되던 okeh-record 經營權(경영권)을 이철은 데이치쿠레코드에 넘길수밖에 없었고 오사카본사에서 이무라가
營業所長(영업소장)으로 오자 文藝部(문예부)長(문예부장)으로 밀려나고 이때부터 레코드기획, 취입 業務(업무)을 포기하고 舞臺公演(무대공연)에 주력하며 “ok 演奏團(연주단) ”을 結成(결성)
하고 1938년,Ok grand show- 오캐그랜드쇼-로 發展(발전)시켜 나가간후 日本公演(일본공연)을 구상했을시 日本(일본)의 宴會企劃社(연회기획사) 요시모토흥업이 名稱(명칭)을 바꾸기를
要求(요구)하자 1939년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으로 改稱(개칭)합니다
이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이 日本(일본)서 公演時(공연시) 김정구는 okeh-record 에서 1938년, 2월발표한<王書房戀書(왕서방연서)>를 불렀습니다
비단장사 王書房(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비단팔아 모은돈 퉁퉁털어서 다줬어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명월이하고 살아서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워디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김진문사 박시춘곡 김정구노래<王書房(왕서방) 戀書(연서)>
이곡을 노래시 이빨을 까맣게칠해서 이가빠진듯한 우스운 모습으로 분장했습니다
그가 조선악극단 일원으로 일본공연을 했을떄 그의 노래와 gesture-제스처-는 最高(최고)의 人氣(인기)를 얻었다는 紀錄(기록)이 보입니다
그가 무대에 登場(등장)하는 것 만으로도 관중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고 日本新聞(일본신문)에는---“나는새도 떨어뜨리는 김정구”라고 보도하며”그가 무대에서면 넓은공간도 어느새 그의몸보다
작아진다”라고 격찬했다 는 기록도 있습니다
演劇幕間(연극막간)에서 시작된 show-쇼- 즉 樂劇(악극)이 體系(체계)를 좀더갖추게 된 것은 1929년에 일본 아사쿠사 오페라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는 금성오페라 歌劇團(가극단)이 처음이라----
하는데 이로보아 樂劇(악극)은 歌劇(가극)과 混用(혼용)으로 使用(사용)된것으로 추정됩니다
허나 또다른 主張(주장)도 있습니다
韓國(한국)演劇(연극)의 開拓者(개척자)라 할수있는 林聖九(임성구) , 金陶山(김도산), 金小浪(김소랑) 등은 新派劇胎動期(신파극 태동기)인 1911년경 등장했습니다
이들이 公演(공연)했던 演劇舞臺(연극무대)에는 으레 幕間舞臺(막간무대)를 가졌습니다
이때 團員(단원)들이 벌이는 노래와 촌극 그리고 춤을곁들인 餘興舞臺(여흥무대)는 다분히 show的(쇼적)인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었습니다
1928년, 6월 서울 인사동 朝鮮劇場(조선극장)에서 김소랑이 주관하던 극단 聚星座(취성좌)는 가극<極樂鳥(극락조)> 를 상연했습니다 이때 처음 歌劇(가극)이란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같은해 8월에는 喜歌劇(희가극)<미인 포스타>가 상연되었는데 이애리수, 이경설등이 출연했습니다
신파극단 취성좌는 공연을 할때마다 3개의 극본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비극적인 작품, 또하나는 희극적인 작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춤과 노래에 음악반주를 곁들인 연극적요소가 짙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래,춤, 코미디가 그냥 나열되던 것을 드라마틱하게 각본을 구성했던것입니다
요즘용어로 바꾸어보자면 musical play-뮤지컬플레이- musical drama-뮤지컬드라마-, musical show-뮤지컬쇼-라 할수있습니다
금성오페라 가극단을 조직한 權三川(권삼천)은 이후 그후신으로 1930년 다카라즈카를 흉내낸 三川歌劇團(삼천가극단)을 創設(창설)해 獨自的(독자적)인 舞臺(무대)를 가지게됩니다
이극단은 드라마를 약간 가미한 歌謠劇(가요극) 輕演劇(경연극) 喜歌劇分野(희가극분야)를 開拓(개척)하여 훗날 樂劇團活動(악극단활동)의 先驅者(선구자)가 됩니다
결국 금성오페라 가극단이나 삼천가극단은 歌謠劇 水準(가요극수준의)의 公演(공연)을 했고 後日(후일) 樂劇團(악극단)으로 發展(발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권삼천은 일찍이 일본에서 일본 연예계 무수한 여성스타를 배출한 ”少女歌劇團(소녀가극단)”의 일원으로 활동한바 있습니다
이극단은 남성은 뽑지않아서 여성이 남장여배우가 담당하는 전통을 가진것으로 유명하고 권삼천도 남장여배우였습니다
그녀는 취성좌단장 김소랑의처 마호정의 친척으로 알려져있고 13년전통의 취성좌가 해산하고 삼천가극단이 탄생하는데 경제적인 상관관계가 있었던것으로 짐작된다는 글이 보입니다
삼천가극단의 公演(공연) repertory-레퍼토리-는 1부에서 희가극 이라고하는하는 comic touch-코믹터치-의 輕演劇(경연극)에 음악적 효과를 가미했고 2부에서 노래와 춤 특히 여성들의 라인댄스팀이
華麗(화려)한 幕(막)을 粧飾(장식)하곤 했습니다
음악은 김교성이 책임자였고 희극배우 林生員(임생원) 尹白丹(단) (윤백단)이 중심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가요극”, ”희가극”, ”경연극”은 같은말로 이미 각레코드사가 資金難(자금난) 打開策(타개책)으로 結成(결성)한것이라는 앞서 설명드렸습니다
1930년대 들어서 레코드사들은 會社自體的(회사자체적)으로 樂團(악단)을 結成(결성)하게되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목포에서 열린 okeh-recor 所屬歌手總出動(소속가수총출동) “실연밤” 朝鮮日報(조선일보) 대강당에서의 “okeh 대연주회” 1936년 일본서 재류조선인동포 위안 “okeh 대연주회”를
말하는것으로 이철은 이러한 公演(공연)에서 okeh 라는 會社名(회사명)을 사용했습니다
Okeh-record 에 자극을받아 自己會社(자기회사) 이름을붙인 樂團(악단)을 조직하여 演奏活動(연주활동) 을 전개하게됩니다
본래 朝鮮(조선)의 레코드사는 일본레코드사의 지사였다는 점도있고해서 그떄까지는 거의 自己會社樂團(자기회사악단)을 가지고있지 않았습니다
헌데 이때부터 “victor 대연주회”,” polydor 專屬藝術家(전속예술가) 總出演鑑賞會(총출연감상회”), “太平 演奏會(태평연주회)” 따위의 公演(공연)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樂劇團(악극단)을 조직하기 직전의 公演形態(공연형태)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악극단의 인기를 끌어올려 레코드판매를 促進(촉진)하기 위하여 自己會社歌手(자기회사가수)를 舞臺(무대)에 세웠습니다
결국 1930년대 악극은 레코드사 音盤販賣(음반판매)를 위한 手段(수단)으로 자리잡게됩니다
레코드사들의 樂劇團結成(악극단결성)은 樂劇(악극)이 重要(중요)한 劇樣式(극양식)으로 자리잡는 중요한 契機(계기)가 됩니다
1220—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大會(대회)-d
앞서 설명했듯이 1929년 <금성오페라 가극단>이 樂劇(가극)이란 公演形態(공연형태)의 첫번째로 名稱(명칭)을 使用(사용)한후 후속타로 이가극단의 운영자 권삼천이 삼천가극단을 창설하고
비슷한시기 舞踊家(무용가) 배구자가 조직한<배구자악단>이 뒤를 이었습니다
배구자는 1929년 光化門(광화문)밖 에 韓國最初(한국최초) 舞踊硏究所(무용연구소)를 차립니다
1930년 가진 배구자의 公演舞臺(공연무대)는 musical show -뮤지컬쇼- 형식이 大部分(대부분)이었습니다
그녀는 星泰三(성태삼)작, 演出(연출)로 悲歌劇(비가극)<무궁화>와 희가극<라 마르세이유>에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제작해온 무대의상과 조명기구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호화쇼 무대였습니다
이단체는 일본, 만주, 한국등을 巡廻公演(순회공연)에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오서 배구자는 1934년 西大門(서대문) 근처에 東洋劇場(동양극장)을 설립, 개관합니다
권삼천의 삼천가극단 설명은 앞선란을 참조바랍니다
허나 1928년 김소랑이 이끌던 聚星座(취성좌) 에서 처음사용했다는 主張(주장)도 있습니다
참고로 경성오페라스튜디오에서 1937년,9월 樂劇(악극)용어를 처음 사용했다는 主張(주장)도 존재합니다
1930년대들어서 단성사에서 조직한 화랑악극단 도원경악극단 등이 속속 결성되었습니다
1939년경 日本公演(일본공연)을 위하여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이 <ok grand show-오케이 그랜드 쇼-> 에서 看板(간판)을 바꿔달았고 라미라, 城寶(성보) 경성악극단, 반도가극단 등에다
각레코드사 에서도 會社名稱-회사명칭- 을 앞세운 樂劇團(악극단)을 創設(창설)하며 樂劇團(악극단)의 全盛期(전성기)를 구가합니다
半島樂劇座(반도악극좌)는 1940년,3월 歌謠界代父(가요계대부) 김용환 主管(주관)으로 組織(조직) 되었습니다
社交(사교)을 임서방이 文藝(문예),演出(연출)을 김성집이 담당하고 김정현, 손일평, 김원호, 북일남, 박단마,황금심, 송금령, 이은파, 황순자, 최영순, 강남월등 victor-record 전속가수를 중심으로
한 멤버에 김용환의 누이동생 김안나 가 속해있었고 주로 朝鮮(조선)의 古典野話(고전야화) 나 傳說(전설)을 歌劇化(가극화)했고 김성집이 각색하고 김용환이 작곡한<춘향전>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허나 김용환작곡의 춘향전 揷入曲(삽입곡)들중 傳(전)해지는곡이 없어서 매우 아쉽습니다
1942년 가을 서항석작<沈淸傳(심청전)>을 형석기작곡으로 공연 장치희, 이인근, 후일 백성희로 改名(개명)하는 李和子(이화자), 양석천등이 출연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薔花紅蓮傳(장화홍련전)>을 각색한 姉妹花(자매화), <에밀레종>등을 형석기가 작곡하여 상연했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허나 樂劇揷入曲(악극삽입곡)들이 傳(전)해지는 곡들이 없습니다
상기 김용환은 1941년 평양에서 제일규모가컸던 金川代座(금천대좌)극장서 가극 <沈淸傳(심청전)>을 첫공연해 큰호응을얻고 그여세를몰아 서울부민관서 공연을했는데----심학규역을맡았고
역을 너무잘해내 화재를 몰고왔습니다
당시 연극계에서 演技派(연기파)로 유명했던 徐一星(서일성)의 연기보다도 더 완숙하며 개성이있다는 평을받습니다
이극을 공연한 단체는 아세아악극단이었고 본격적인 뮤지컬드라마를 시도했던 작품으로 전편을 創作曲(창작곡)으로 통일했는데 이곡을 김용환자신이 작곡했습니다
이런점에서 그의 天才性(천재성)을 엿볼수있습니다
漫謠曲(만요곡)을 作曲(작곡) 直接(직접)부르고 아마추어 수준의 演劇(연극)부분에서 劇(극) 심청전서 심학규역을 연기해 好評(호평)을 이끌어내고 揷入曲(삽입곡)을 直接創作(직접창작)하고---한사람이
勘當(감당)하기에는 벅차기만한 役割(역할)을 그는 매우훌륭히 해내었기에 그에게 歌謠界(가요계)<八方美人(팔방미인)><代父(대부)> 稱號(칭호)가 부여됨은 너무도 自然(자연)스럽습니다
그의 八方美人(팔방미인) 格(격) 의 才質(재질)은 연극에서도 십분 發揮(발휘)가된것으로 그는 歌謠(가요)로할 수 있는 모든 分野(분야)서 卓越(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어서 歌謠界代父(가요계대부)라는
칭호을 부여받았습니다
Columbia 歌劇團(콜롬비아가극단) 은 1940년 에 극작가 서항석과 언론인 설의식에 의하여 朝鮮藝興社 (조선예흥사) 傘下(산하)에 조직되었고 명칭을 빌려준Columbia-record 는 運營(운영)에
關與(관여)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시기 한창 流行(유행)하던 jazz-재즈-를 배제하고 民族色(민족색) 이짙은 水準(수준)높은 악극을 목표로 삼았다합니다
최무성을 단장으로 안기영을 비롯하여 바리톤 박용구 테너 송진혁, 소프라노 성애라, 이성운, 정희자 그리고 황문평, 윤부길, 김형래, 이순옥, 민인식, 임천수, 정철등 음악학교출신들이 많이 결집했고
合唱團(합창단)과 舞踊團(무용단)을 追加(추가) 構成(구성)했습니다
Columbia-歌劇團(콜롬비아가극단)은 서항석작사 안기영작곡으로<콩쥐팥쥐><견우직녀> 등을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콜롬비아악극단서 는 본격적인 오페레타 운동 및 재래적인 악극단의 이미지를 不息(불식)하기위하여 단체이름을 羅美羅(라미라)가극단으로 改稱(개칭)합니다
改稱後(개칭후) 첫번째 작품은<콩쥐팥쥐>였고 종래의 악극형식보다 음악적으로 한단께 상위에 속했습니다
흥행성적도 나쁘지않았고 기획만 잘하면 가극운동도 성공할수있다는 는 자신을얻은 설의식과 서항석은 다음작품으로 본격적인 가극공연을 목표로 견우직녀를 가극대본으로 구상하고 음악학교
출신들로 출연진을 짰습니다
管絃樂編曲(관현악편곡)에는 가곡작가 김순남, 테너 송진혁, 권진원, 민인식, 윤부길, 김형래 소프라노 성애라 이성운 고향선, 전방일,계수남, 바리톤 박용구 등이 출연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11월 서울부민관에서 초연을 했습니다
이중에서 <牽牛織女(견우직녀)>의 주제가 “환우곡”과 “진주담의노래”가 傳(전)해집니다
팔담은 어드메뇨 물소리만 들려오네
내어이 갈거나 仙女(선녀)는 어디있나
바람소리 잦아있네
내어이 만나리 내어이 만나리
송풍은 거문고요 피리는 내련만은
이풍악 이장단에 춤출리 누구리-------------------------------------------------------------------------안기영작곡<환우곡>
옥경도 좋거니와 금강또한 좋을네라
맑은물 거울되니 이내몸 둘이로다
한몸은 물우에 또한몸은 물속에
옥경조 좋거니와 금강또한 좋을네라-------------------------------------------------------------------안기영작곡<진주담의노래>
1221--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大會(대회)-e
도쿄공연에서는 소프라노 한평숙, 마금희 베이스 신막등 朝鮮(조선)留學生(유학생)들이 贊助出演(찬조출연)도 있었습니다
<콩쥐팥쥐>를 오사카에서 공연시 朝鮮色(조선색)을 그대로 그대로 지니는것이 禁地(금지)되었기에 몽골이나 中國衣裳(중국의상)에 노래는 日本語(일본어)로 부르는 갓쓰고 자전거타는 격의
꼴보기 사나운 公演(공연)이 되고말았습니다
그래도 melody-멜로디-는 朝鮮的(조선적) 이었기 때문에 臨席警官(임석경관)이 호루라기를 불어서 幕(막)을 내리게하고는 “그런 조선노래를 부르지말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얼마후 전시체제로 바뀌면서 적성국노래조차 금지시키면서 명칭도 바꾸길 강요해 결국 라미라 가극단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경영은 오사카에서 고철상을 운영하던 조선인손으로 넘어가고 수준높은 악극 목표는 포기해야했고 내용을 대폭수정 통속적인악극, 대중화길로 나섰고 김용환, 전옥등을 끌여들었습니다
김용환이 춘사 나운규의 영화<아리랑>을 각색하여 直接演技(직접연기)를해 많은 호평을 받습니다
1943년 日帝發惡期(일제발악기) 地方(지방)巡廻公演(순회공연)을 했을 때 강원도 철원에서는 내용이 불온하다고 트집을잡혀 책임자가 1개월간 구속되었고 전라북도 이리에서는 주인공역의
강남춘이 1개월간 구속되 일이 발생했습니다
太平演奏團(태평연주단)의 경우에는 1940년, 2월부터 3월에걸친 北鮮 course-북선코스- 공연에서는 滿洲(만주)까지 진출했으며 牧丹江(목단강)에서 3일간 공연한 것이 특이합니다
이때멤버는 가수 백년설, 쵠남용, 이은파, 고운봉, 송낙천, 나성려, 금사향, 진방남, 손영옥, 맹예낭이 연기에는 전택이, 윤선애, 조경희등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지휘에는 전기현, 이재호 연출은 조경환과 천아토 담당했고
한영철, 이경주, 문호월, 김덕진, 이창옥, 진자성, 이윤우, 손중문, 김기학, 등이 <太平swing 樂團(태평 스윙악단)>을 구성 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 okeh-record서 “노들강변”등 주로 民謠風(민요풍)의 歌謠(가요)를 작곡하던 作曲家(작곡가) 문호월이 이연주단에 속해있음이 특이합니다
Polydor 樂劇團(폴리돌악극단)은 1940년 4월부터 폴리돌 “polydor實演團(폴리돌실연단)” 이라는 이름으로 노래에 채규엽, 윤건영, 현정남, 박혜옥, 임금순, 이은홍, 윤월심,
연기에 박제행, 왕평, 신카나리아, 최승이, 등이 참가 北部地方(북부지방)을 순회했습니다
이해 有名 舞臺人(유명무대인) < 荒城(황성)의 跡(적)>을 작사한 왕평이 강계지방에서 劇(극) <男妹(남매)>를 公演中(공연중) 무대에서 쓰러지자 再編成(재편성)되기도 했읍니다
헌데 이광경을 가수데뷔전의 박재홍이 지켜보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城寶樂劇團(성보악극단)은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이 일본공연시 관여하기도 했던 일본의 유명 演藝企劃社(연예기획사) 요시모토흥업의 뒷바침을 얻어 주로 日本語 show-일본어쇼-나
演劇(연극)을 上演(상연)했습니다
이 단체는 그간 잘알려지지 않았지만 친일극단 이었습니다
창작은 일본인이 담당하고 조선인 staff-스테프-로는 오로지 백은선이 연출에 참여했을뿐입니다
民謠調歌手(민요조가수)인 옥잠화와 코미디언 양훈 解放後(해방후) <신라의달밤>의 가요계 데뷔전의 현인등이 중요member-멤버-였습니다
현인의 숨겨진 親日行爲(친일행위)가 밝혀집니다
성보악극단 설명은 뒷면 <종횡무진가요사1223>에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樂劇全盛期(악극전성기) 1939년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 1기 公演(공연)서 고복수, 이은파 duet-듀엣-은<豊年頌(풍년송)>을 불렀습니다
이곡은 後日(후일) 황금심 고복수 夫婦duet-부부듀엣-이 remake 하기도 합니다
三四月(삼사월) 단비에 種子(종자)를 뿌려서
六七月(육칠월) 햇빛에 五穀(오곡)이 익었구나
얼시구 좋구나 豊年(풍년)이왔구나 豊年(풍년)이 왔네
앞집에 참봉님 지개를 지고요
兩班宅(양반댁) 아가씨 낫들고 나가네
얼시구 좋구나 豊年(풍년)이 왔네 豊年(풍년)이 왔어
豊年(풍년)이왔네 豊年(풍년)이왔어 豊年(풍년)이 왔네------------------------------------------김용호사 문호월곡 고복수, 이은파<豊年頌(풍년송)>
헌데 日本側(일본측)에서 “豊年(풍년)”을 日本發音(일본발음)인 “호넨”으로 부르기를 要求(요구)해 困辱(곤욕)을 치렀다 傳(전) 합니다
樂劇(악극)이 興行(흥행)한 것은 日帝(일제)의 壓制下(압제하)에서 시달리던 대중들의 苦痛(고통)과 긴장감을 解消(해소)시켜줄 慰安(위안)거리가 必要(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심한 總督府(총독부) 檢閱(검열)로 인하여 通俗的(통속적)인 水準(수준)의 악극이나마 大衆(대중)들에게 커다란 慰安(위안)거리가 되었을 것 입니다
허나 樂劇亦是(악극역시)도 日帝末(일제말) 不利(불리)해진 戰勢(전세)로 인한 發惡期(발악기) 强制(강제)로 親日團體(친일단체)인 조선연예협회에 편입되어 親日劇(친일극)에 참여하는 오점을 남깁니다
1222--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大會(대회)-f
解放後(해방후) 混亂期(혼란기)를 맞으면서 樂劇亦是(악극역시) 興行(흥행)一路(흥행일로)를 달립니다
악극은 社會混亂(사회혼란)의 어둠을 먹고자라는 버섯 같은 俗性(속성)을 지닌것일까요??
이는결국 사회가 혼란할수록 대중들은 그런 混亂相態(혼란상태)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잊고싶어서 慰安(위안)거리가 必要(필요)했고 거기에 呼應(호응)한것이 統屬(통속)樂劇(악극)이었습니다
좀더 쉽게 얘기해서 돈을벌기위해 이윤을 남기기위해 存在(존재)하는 興行團體(흥행단체)가 이러한 好機(호기)를 놓치지 만무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水準(수준)의 劇(극)을 만든것입니다
비록 意識(의식)있는 사람들로부터 通俗的(통속적)이고 低質劇(저질극)라는 酷評(혹평)을 받았지만 大衆(대중)들의 억눌린 心情(심정)을 풀어주는 catharsis-카타르시스- 役割(역할)을 한 것은 악극의
順機能(순기능)이라고 애써 辨明(변명)할수있습니다
同時(동시)에 樂劇(악극)을 통해서 大衆歌謠(대중가요)가 發展(발전)한것도 악극의 重要(중요)한 役割(역할)이기도 합니다
光復(광복)이되자 樂劇團(악극단)은 제2의 全盛期(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기존의 악극단과 함께 눈물의여왕 전옥이 이끈<白鳥(백조)樂劇團(악극단)>, 歌謠天才(가요천재) 김해송의<k.p.k 樂劇團(악극단)> <太平洋樂劇團(태평양악극단)>< 無窮花樂劇團(무궁화악극단)>---등이
登場(등장)했습니다
解放空間(해방공간)에 가장규모가 큰곳은 역시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 이었습니다
해방전 김해송, 박시춘, 이난영, 남인수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歌謠人(가요인)들로 구성되어 名聲(명성)을 떨친 이극단은 解放後(해방후) 뮤지컬을 표방하며 해방전 명성을 이어갑니다
<카츄사><假面舞蹈會(가면무도회)><椿姬(춘희)>등을 서구 오페라를 모방한 정통뮤지컬을 선보이며 흥행에도 성공합니다
1946년 正月初(정월초)하루 1934년 무용가 배구자가 서대문근처에 세웠던 東洋劇場(동양극장)무대에 本格的(본격적)인 musical-뮤지컬-이라할 수 있는<카츄사>의 막이 올랐습니다
모두잘아는 러시아문호 톨스토이의 원작을 극작가요 작사가이기도 했던 조명암이 자진월북전 각색을 하고 일제시대 短波放送(단파방송) 盜聽事件(도청사건)으로 유명한 아나운서 출신 송진근이
演出(연출)하고 뮤지컬속 삽입곡은 박시춘 손목인이 아닌 김형래가 맡았습니다
男子主人公(남자주인공)으로 당시 미남가수로 유명했던 송달협이 기용되고 女主人公(여주인공) 카츄사역에 ok 舞踊硏究所(무용연구소) 出身(출신) 金白姬(김백희)맡고 나머지 配役(배역)은
比較的(비교적) 新人層(신인층)을 大擧(登場(대거등장)시켰습니다
이뮤지컬은 크게 成功(성공)하여 prima donna-프리마돈나- 金白姬(김백희)를 誕生(탄생)시켰습니다
“카츄사역”을 맡기 以前(이전)까지의 김백희는 okeh-record 傘下(산하) ok 舞踊硏究所(무용연구소) 제1기생으로 그야말로 솜털이 보승보승한 新人中(신인중)의 新人(신인)이었습니다
바로전해 전 오케이 舞踊(무용)硏究所(연구소)의 音樂(음악)先生(음악선생)이었던 김형래가 뮤지컬<萬里長城(만리장성)>을 작곡,연구소 硏究生中心(연구생중심)으로 막을 올렸을 때 그때 이미 노래
實力(실력)을 認定(인정)받았습니다
이때의 김형래의 작품은 지금까지 있어온 樂劇(악극)과는 달리 藝術性(예술성)이 높은 水準級(수준급)이었습니다
김형래의<萬里長城(만리장성)>에서 가능성을 발견한---1944년 갑자기 ok이철이 세상을뜨자 문예부장을 있던 방예정이 운영을맡았고 해방이되자 이철의 미망인 현송자로부터 정식으로
조선악극단 운영권을 넘겨받습니다------방예정의<카츄사>의 기획은 적중했습니다
<카츄사>이후 김형래 김백희콤비는 이땅에 새로은 musical-뮤지컬-시대의 한 章(장)을 연셈입니다
1946년,5월 일제시대 성보극장이라고 불렸던 을지로4가극장이 國都劇場(국도극장)으로 개명하고 해방후 첫공연을 막을올리는데 이는 조선극장의<카츄사>에이은 <假面舞蹈會(가면무도회)>였습니다
이 作品亦是(작품역시) 김백희의 노래와 演技力(연기력)에 맞추어 만든작품으로 相對役(상대역)은 往年(왕년)의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 團員(단원) 김영필이었습니다
김백희의 노래와 발레를 곁들인 幻想的(환상적)인 舞踊處理(무용처리)가 一品(일품)이었습니다
김형래는 이작품의 主題歌(주제가)와 樂譜(악보)가실린 프로그램을 1매당 10원에 판매했는데 樂劇公演史上(악극공연사상) 最初(최초)의 일이였고 이악보는 날개돋친듯 팔려나가 노래가
大學生(대학생)들사이에 크게 流行(유행)하기도 했습니다
主題歌(주제가)또한 semiclassic-세미클래식-型式(형식)의 달콤한 敍情歌謠(서정가요)였습니다
그리운 薔薇花(장미화)는 꿈을안고 피었는가
흰비둘기 짝을지어 저언덕 날아가네
언덕을 넘어가면 어린 地平線(지평선)
젊은이 가슴에 향내어린 地平線(지평선)은
언제나 그리워----------------------------------------------------------------------------------조명암사 김형래작곡 김백희노래<그리운 薔薇花(장미화)>
1223-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大會(대회)-g
朝鮮樂劇團(조선악극단) 日本公演(일본공연)에도 관여하기도 하고 일본 관서지방의 演藝興業權(연예흥업권)을 左之右之(좌지우지)하던 요시모토 興行會社(흥행회사) 서울 을지로 4가에있던
黃金座(황금좌) 극장을 매입 城寶劇場(성보극장) 이라고 改名(개명)을 합니다
그리고 1941년가을 城寶劇場(성보극장) 直屬團體(직속단체)인 城寶樂劇團(성보악극단)을 만들었습니다
<春風(춘풍)一家(일가)>라는 作品(작품)을 日本語(일본어) 劇本(극본)으로 創立公演(창립공연) 레파토리로 삼았습니다
그시기는 日本總督府(일본총독부)가 日本語使用(일본어사용)을 强要(강요)하던때여서 大衆(대중)演藝(연예)를 통해 國策修行(국책수행)의 自然(자연)스런 現像(현상)으로 받아드려졌습니다
이 劇團創團member-극단창단멤버- 로 女歌手(여가수) 신카나리아, 박혜옥, 옥잠화 그리고 舞踊家(무용가) 이능화등 이었습니다
이로서 歌手(가수) 옥잠화의 演藝活動(연예활동)이 별로알려진게 별로없었는데 이렇게 親日團體(친일단체)에도 몸담고있었습니다
일본인 연기자 우라다 아사꼬와와 상갑이라는 主演給俳優(주연급배우)도 있었습니다
放浪歌(방랑가)를 remake 하기도한 김홍길, 코미디언 전방일도 창단멤버였습니다
作品構成(작품구성)과 演出(연출)은 일본인 에구찌가 전담했지만 한국인 연출가 백은선의 존재도 무시할수없었다 는 설명이보입니다
그래봤자 친일극이나 연출한것인데 그곳에서 존재가 무시할수없음 무엇합니까??
이단체의 性格(성격)은 어차피 日本人所有(일본인소유) 이므로 本格的(본격적)인 樂劇運動(악극운동)이리보다는 日本公演物(일본공연물)을 중심으로 다분히 時局的(시국적)인 啓蒙劇(계몽극)에
重點(중점)을 두고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전속무대와 막강한 전속무용팀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요시모토 직속단체이므로 일본의 modern dance-모던댄스-를 가르치기 위하여 우수한 舞踊手(무용수)들을 연수교육차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演藝人志望生(연예인지망생)들을 모집했고 1기생으로 황해, 심연, 서춘광 등이있었습니다
제2기생으로는 후일 코미디언이 되는 이영일 3기생으로는 양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音樂工夫(음악공부)를 하고돌아온 현인이 이단체에서 硏究生(연구생)들의 노래를 지도하는 선생으로발탁되 親日行爲(친일행위)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舞臺(무대)에서 特別出演(특별출연) 형식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때 그의 藝名(예명)은 고또 히로시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아예 日本武士(일본무사)가 登場(등장)하는 日本時代劇(일본시대극)까지 能熟(능숙)하게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런 公演物(공연물)을 韓國觀客(한국관객)들도 거리낌없이 보러오는 時代(시대)로 변해갔습니다
성보악극단에서는 日帝(일제)의 國策映畵(국책영화) <望樓(망루)의 決死隊(결사대)>를 시나리오 그대로 상연했습니다
日本人俳優(일본인배우) 간다가 主役(주역)이었고 배우 전택이 女俳優(여배우) 김령도 舞臺(무대)에 登場(등장)했습니다
여기서 望樓(망루) 주위의 動靜(동정)을 살피기위해서 높이세워놓은 다락집을 말합니다
이러한 망루를 소재로한 가요가 존재합니다
조명암사 김해송곡 백년설의 노래로 okeh-record 서 1943년 발표했습니다
三五夜(삼오야) 달빛아래 풀벌레운다
이슬이 찰랑찰랑 눈에 넙친다
00년 0봄이가고 00년 0봄이가고
望樓(망루)의 붉은기둥 빛이 날것소 -----------------------------------------------------------------------------<望樓(망루)의밤>
제2부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東京(동경)帝國音樂學校(제국음악학교) 出身(출신)이요 不朽(불후)의 名曲(명곡) <晋州(진주)라 千里(천리)길>의 이규남이 “미나미 구니오” 란 藝名(예명)으로
出演(출연)했습니다
이때 현인도 獨特(독특)한 唱法(창법)으로 出演(출연)했습니다
1224—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大會(대회)-h
樂劇(악극)은 대개1,2부로 나누어 공연되었는데 1부는 歌謠劇中心(가요극중심)이고 2부는 variety-show-버라이어티 쇼-등 多樣(다양)한 repertory-레파토리-로 進行(진행)되었읍니다
김백희, 박단마, 전옥, 심연옥, 백설희, 계수남, 송달협, 김정구씨등이 이시기 활약했습니다
樂劇人(악극인)들은 歌劇協會(가극협회)를 구성하고 樂劇競演大會(악극경연대회)를 열어 해방후 樂劇發展(악극발전)에 其餘(기여)했습니다
여기에 김화랑, 박노홍, 김형래, 김석민 등 專門作家(전문작가)도 참여하여 樂劇(악극)의 位相(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이時期(시기) 日帝 强占期(일제강점기) 天才作曲家(천재작곡가)로 이름높던 김해송이 주도한 “k.p.k 악단” 이 이 分野(분야)에서도 亦是(역시) 人氣(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김해송의 卓越(탁월)한
jazz感覺(재즈감각)을 살려 미8군쇼에 入城(입성)하면서 興行(흥행)에 成功(성공)합니다
音樂(음악)의 本(본)고장에서 水準(수준)높은 음악을 접한 미8군들을 상대로 공연을 할시 김해송의 絢爛(현란) 한 swing 조 演奏(연주)에 驚歎(경탄)을 자아내게해 그들로부터 起立拍手(기립박수)를
받을정도의 烈光的 歡呼(열광적환호) 를 받았습니다
이악단은 이난영, 장세정, 남인수들 豪華歌手團(호화가수단)을 이끌었을뿐아니라 韓國最初(한국최초) girl-group-걸그룹-으로 평가받는 저고리씨스터즈, 최초의 男性group-남성그룹-인
arirang boys-아리랑 보이즈- 등 vocal-group-보컬그룹-까지 動員(동원)하여 最高(최고)의 興行(흥행)을 일으킵니다
악극뿐만아니라 뮤지컬, peretta-경가극-오페레타-등 다양한 장르로 무대영역도 넓혀갔습니다
특히 여기서 활동하던 김해송, 이난영부부의 딸인 김숙자, 김애자 이난영의 친오라비 이봉룡의딸인 이민자가 kim sisters-김씨스터즈-를 결성하여 인기를 모은후음악본고장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 내엔 별로 알려지지 못했지만 미국서 爆發的人氣(폭발적인기)를 모으기도 합니다
이는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폭격으로 남편 김해송과 사별한 이난영이 혹독하리만치 음악을 수련시켜 노래뿐만 아니라 못다루는 악기가 없을정도로 탁월한 연예인으로 길러내 미국내에서
韓國(한국)이 地圖(지도) 어디쯤에 位置(위치)한곳인지도 알지못하는 그들에게 korea-woman 의 卓越(탁월)한 音樂性(음악성)을 선보여 수많은 방송서 出演要請(출연요청)이 殺到(쇄도)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k.p.k 樂團(악단)서 활동하던 윤부길은 따로 ”부길부길쇼단”을 결성하여 인기를 모았는데 그의 oneman-show-원맨쇼-는 독보적이었다는 평을받고 선구자가 됩니다
이후 1970년대를 풍미한 남보원, 백남봉 등이 원맨쇼의 대를 이었습니다
윤부길과 무용수로 활동하던 고향선 사이에낳은 자식들인 윤향기, 윤복희 가 대를이어 연예인의 길을 가고있습니다
윤부길은 작사에도 재능을보여 황금심<사람 八字(팔자) 몰라요> 심연옥<시골bus 女車掌(여차장)>황정자<처녀뱃사공>등을 썼습니다
해가지면 世上(세상)만 검은줄 알았드니
사귀어보니 당신도 마음이 검구려
한되술 이백환에 취하면 그만이지
때묻은 치마끈은 왜 풀읍니까
막걸리 사랑이란 싸면서 비싸다오
나도 정조가 있어요 사람 無視(무시)마세요
구름속에 달빛만 은근한줄 알았드니
지내보니 당신도 마음이 은근해
한되술 이백환에 취하면 그만이지
때묻은 치마끈은 왜풀읍니까
막걸리 사랑이란 싸면서 비싸다오
나도 巡靖(순정)이있어요 사람 八字(팔자)몰라요-----------------------------------------------------------------------윤부길사, 한복남곡 황금심노래<사람 八字(팔자)몰라요>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後(후)에도 樂劇(악극)은 繼續(계속) 興行(흥행)을 維持(유지)하며”신세계악극단” “신천지악극단” “서울가극단” “코리아가극단” “창공가극단” “대도화가극단” “프린스악극단”
“은향악극단” 등이 새로登場(등장)합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中半以後(중반이후) 映畵(영화) 및 tv 放送(방송)등 새로운 大衆文化(대중문화)가,興行物(흥행물)이 急激(급격)하게 浸透(침투)하며 斜陽(사양)길로 내몰립니다
1225—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 大會(대회)-i
악극은 1966년 공식적으로 악극협회주제로<北(북)에는 太陽(태양)이없다>를 끝으로 종적을 감춘다--------는 極端的 表現(극단적표현)이 보입니다
그리고 30여년간 沈默(침묵)을 지키다가 1990년대중반 미국 musical-뮤지컬-의 흥행과 맞물려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大衆(대중)들의 식어버린 呼應(호응)을 되돌리기엔 力不足(역부족) 이었습니다
樂劇代身(악극대신) 등장한 broadway 式(브로드웨이식)뮤지컬의 興行(흥행)에서 밀리고만것입니다
그만큼 大衆(대중)들이 즐기는 多樣(다양)한 大衆文化(대중문화)가 繁昌(번창)하며 이젠 舊式(구식)이 되버린 興行物(흥행물)인 악극에 關心(관심)을 가지기엔 때가 늦어버린---- 興味(흥미)거리가
되지못한 것입니다
樂劇(악극)의 下位 genre-하위장르-로 우리 傳統劇(전통극)을 變形(변형)한 唱劇(창극)이 있습니다
악극이 西洋音樂(서양음악)이나 管絃樂編成(관현악편성)으로 이루어졌다면 唱劇(창극)은 우리전통의 國樂(국악)으로 아루어집니다
臺本亦是(대본역시) 說話(설화)나, 傳說(전설), 歷史的野談(역사적야담)에서 素材(소재)를 가져옵니다
해서 창극을 “國劇(국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唱劇(창극)은 멀리 판소리에서 起源(기원)하였습니다
판소리는 鼓手(고수), 唱者(창자) 2인으로 구성된 唱(창)이었는데 협률사 원각사 등 劇場(극장)이 세워지는 開化期(개화기)에 들어서 主人公(주인공)의 役割(역할)을맡는 個人(개인)이 따로
唱(창)을하는 分唱(분창) 혹은 多唱(다창)으로 分化(분화)가 이루어집니다
예를들면<春香傳(춘향전)>의경우 전에는 唱者(창자)혼자서 모든役(역)을하던 것이 춘향, 방자, 이도령 등 각각 役(역)을 맡은 唱者(창자) 가 나누어 唱(창)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판소리의 너름새-동작-을 擴大(확대)하여 多樣(다양)한 演技(연기)까지 보여줍니다
開化期(개화기)에 日本(일본)서 들어온 歌舞伎-가부키- 中國(중국)의 京劇(경극)에 맞서 우리의 傳統(전통) 판소리를 새롭게 變形(변형)한것입니다
唱劇(창극)은 衰退(쇠퇴)해가는 판소리를 復興(부흥)시키고 大衆化(대중화)하여 우리의 傳統劇(전통극)으로 發展(발전)시키려는 傳統繼承(전통계승)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唱劇(창극)의 先驅者(선구자)로 신재효, 송만갑, 김세종, 이동백, 등이 앞장섰고 이들이 창립한 창극단체 김창환협률사 송만갑 협률사, 광주 협률사, 등이 큰공헌을 했습니다
劇場(극장)에서의 分唱形態(분창형태)인 唱劇(창극)은 初期(초기)에는 舞臺裝置(무대장치)없이 하얀포장막 앞에서 주로 對話(대화)를 노래로 부르는 對話唱(대화창)이 中心(중심)이었습니다
쉽게얘기해서 劇場(극장)이생겨 唱劇(창극)으로 變形(변형)되기전 野外(야외) 판소리 公演(공연)을 파트로나누어 野外公演時(야외공연시)처럼 하얀포장막앞에서 부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舞臺裝置(무대장치)가 多樣(다양)해지고 劇場舞臺(극장무대)까지 오릅니다
最初(최초)의 紀錄(기록)에의한 唱劇公演(창극공연)은 1908년 원각사에서 공연된 신소설<은세계>를 각색한<최병두 打令(타령)> 이었습니다
원각사에서 初期(초기) 舞臺(무대)에올린 唱劇(창극)은<천인봉>이 보입니다
新劇(신극)에밀려 고전하던 唱劇(창극)은 1933년 호남갑부 김종익의 財政的後援(재정적후원)으로 組織(조직)된 ”朝鮮聲樂硏究會(조선성악연구회) 로 새로운 轉機(전기)를 마련합니다
송만갑, 이동백, 박록주, 김여란등 當代(당대)의 最高名唱(최고명창)들이 集結(집결)하여 1935년<春香傳(춘향전)>을 공연 大成功(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日帝末期(일제말기)에도 1942년경 朝鮮唱劇團(조선창극단)이 結成(결성)되어<薔花紅蓮傳(장화홍련전)>을 舞臺(무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허지만 이 時期(시기) 後日(후일) 歌謠皇帝(가요황제)로 까지 推仰(추앙)받는 南仁樹(남인수)가 그의 歌謠人生(가요인생) 가장 恥辱的(취욕적)일 수밖에없는 親日歌謠(친일가요)를 부릅니다
-------------1절생략-----
그대는 半島男兒(반도남아) 이내몸은 야마토사쿠라
建設(건설)의 햇발솟는 地平線(지평선)에서 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 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
여기는 亞細亞(아세아)다 우리들의 希望(희망)은 빛난다
따뜻이 손을잡고 깃발아래서 忠誠(충성)을 盟誓(맹세)짓는
기미토보쿠 忠誠(충성)을 盟誓(맹세)짓는 기미토보쿠------------------------------------------------조명암사, 김해송곡 남인수, 장세정 親日映畵主題歌(친일영화주제가) <그대와나>
해방후에는 國樂院傘下(국악원산하)에 國劇社(국극사) 國劇協會(국극협회)가 結成(결성)되어 정부의 後援下(후원하)에 창극의 제2全盛期(전성기)를 맞게됩니다
이렇게 韓國(한국)의 판소리는 時流(시류)에따라 名稱(명칭)을 달리하며 團體(단체)를 結成(결성)하여 活動(활동)하였으나 唱團直後(창단직후) 반짝 인기를 누리다가는 곧시들해져 버리는 과정을
되풀이 했습니다
1226--樂劇團(악극단)과 콩쿠르大會(대회)-J
國樂院(국악원)傘下(산하) 國劇社(국극사) 는 창리공연으로 1946년<春香傳(춘향전)>을 시작으로<大沈淸傳(대 심청전)><선화낭자>등을 속속 무대에 올렸습니다
1942년 창설 朝鮮唱劇團(조선창극단)의<論介(논개)><好童王子(호동왕자)>등도 歡呼(환호)을 받습니다
解放後(해방후) 唱劇(창극)의 큰 變化(변화)는 여성들이 主軸(주축)이된 女性唱劇團(여성창극단) 의 登場(등장)입니다
소위 “女性國劇(여성국극)” 으로도 불리는 새로운 劇樣式(극양식)이 등장하여 창극의 大衆的關心(대중적관심)과 興行(흥행)을 觸發(촉발)시킵니다
1948년 결성된 女性國樂同好會(여성국악동호회)가 始發點(시발점)이었는데 1949년<햇님과달님>이 장안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어서 “임춘앵과 그일행”, “여성국극동지사”, “조금앵과 그집단”, “국극사”, “햇님창극단” 등이결성됩니다
그밖에”화랑”, ”낭자”등의 女性(여성)國劇(국극)團(여성국극단)이 결성되어 多樣(다양)한 레파토리를 무대에올려 本格的(본격적)으로 女性國劇時代(여성국극시대)를 열어갔습니다
하지만 완전하고 品格(품격)있는 舞臺劇(무대극)으로는 限界(한계)를 보일수밖에없었고 새로운 臺本(대본)없이 陳腐(진부)한 古典(고전)素材(소재)에 치우친점, 新派(신파)調(조) 의 殘影(잔영)으로
觀客(관객)들의 興味誘發(흥미유발)에 失敗(실패)하여 악극과같이 1950년대 중엽 斜陽(사양)길에 접어들고 맙니다
樂劇(악극)못지않게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를 發展(발전)시킨 動力中(동력중) 하나가 CONCOURS-大會(콩쿠르대회) 였습니다
CONCOURS-大會(콩쿠르 대회)는一種(일종)의 歌手選拔大會(가수선발대회)였는데 華麗(화려)한 貌襲(모습)으로인해 그時期(시기) 많은사람들의 憧憬(동경)의 對象(대상)으로 存在(존재)했던 것이
歌手(가수)였기에 自然(자연)스럽게 사람들의 關心(관심)과 興味(흥미)를 誘發(유발)함으로써 좋은 歌手發見(가수발견)으로 이어져 歌謠水準向上(가요수준향상)이란 結果(결과)를 낳고
歌謠發展(가요발전)의 原動力(원동력)이 됩니다
콩클대회는 解放前(해방전)에 이미 存在(존재) 주로 레코드회사가 新人歌手(신인가수) 發掘(발굴)을 目的(목적)으로 活用(활용)한 大衆歌謠大會(대중가요대회)입니다
新人歌手發掘(신인가수발굴)이 主(주)된 目的(목적)이지만 自己會社(자기회사)의 宣傳(선전)과 레코드販賣觸診(판매촉진)을 위한 꿩먹고 알먹기식의 多目的用(다목적용) 公演(공연)입니다
콩클대회는 Columbia-record 서 全國巡廻(순회)concours大會(전국순회콩쿠르대회)를 연 것이 代表的(대표적)이라 할수있습니다
1934년, 2월 最終大會(최종대회)를 개최했는데 jodk-경성방송국-이 實況公演(실황공연)을 할정도로 大衆的關心(대중적관심)이 컸습니다
아무래도 한국가요사 공식적으로 처음있는일이라 一般(일반)大衆(일반대중)은 물론 音樂關係者(음악관계자)들의 관심이 自然(자연)히 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실황중계였습니다 여기서 정일경, 조금자 고복수가 1~3위를 차지하며 가수가 되었으나 처음 고복수는 콜롬비아서 찬밥신세로 전락되고 결국 okeh-record 서 손목인의
大幅的 配慮(대폭적 배려)로 歌手(가수)로서 初期活動(초기활동) 은<他鄕(타향)>등 big-hit 곡을 發表(발표)하나 결국 남인수등의 뛰어난 音樂性(음악성)에 밀려 樂劇團活動(악극단활동)으로
밀려나듯이 轉向(전향)해야했고 정일경, 조금자의 活動度(활동)도 未備(미비) 結果的(결과적)으로 이콩클대회는 折半(절반)의 成功(성공)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대회서 1~2위흘 한 정일경, 조금자는 콜롬비아의 선배가수 채규엽과 함께 레코드를 吹入歌手(취입가수)로서의 機能性(기능성)을 시험받습니다
이때 “test用(테스트용)” 으로 취입한곡이 先輩歌手(선배가수)채규엽을 保險用(보험용)을 合流(합류)시켜 취입한곡이 <사랑의 yureiti-유레이티-> 입니다
김동진이 개사한 飜案曲(번안곡)으로 원곡은 lesiie sarony 작곡의 the alpine milkman입니다
不明確(불명확)하기는 하나 이곡을 韓國最初(한국최초) yodel song-요들송-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山(산)마을의 귀염둥이 유유집 總角(총각)이지
새벽부터 저녀까지 노래만 불러요
목장터는 넓고 넓고 노래는 맑고 고와
그 melody-멜로디-좋내 알프스의 사랑--------------------------------------------------------------------------채규엽, 정일경, 조금자<사랑의 yoreiti-유레이티->
이곡에대한 더상세한 것은 해당란을 참조바랍니다
保險用(보험용) 이란 두 新人(신인) 의 音盤(음반)이 이름이 알려지지않아 販賣價(판매)가 不振(부진)할 때 旣存歌手(기존가수)채규엽의 有名稅(유명세)로 이를 補充(보충)하기위해
같이부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혹은 lp음반일경우 같은음반에 같이 실리도합니다
<꽃마차>의진방남 <찔레꽃>의 백난아는 태평레코드사서 開催(개최)한 콩클대회서 當選(당선) 가수의길을 걸었습니다
이경우는 콩클대회를 통한 新人歌手選拔(신인가수선발)의 成功的(성공적) 例(예)라고 할수있을것입니다
1940년대중반 서울 中央劇場(중극장)서 열린 ok-record 主催(주최) 新人歌手選拔(신인가수선발) 서 당선되 옥두옥과 duet-듀엣-으로 <눈물의 五里亭(오리정)>으로 데뷔해<울고넘는박달재>
<有情千里(유정천리)><물방아도는내력><휘파람불며><마음의사랑><慶尙道(경상도)아가씨><北進列車(북진열차)><비나리는 三浪津(삼랑진)><鄕愁(향수)><野營(야영)의밤> 등등을 힛트시킨
박재홍도 亦是(역시) 그런評價(평가)가 가능합니다
解放後(해방후)에도 concurs大會(콩클대회)의 必要性(필요성)은 繼續(계속)됩니다
1946년개최된 cmp樂團(악단)의 全鮮男女新人歌手concurs大會(전선남녀신인가수 콩클대회), 1949년 三千里樂團(삼천리악단)에서 實施(실시)한 新人男女最高歌手 concurs 大會(신인남녀최고가수
콩클대회) 등 다양한 콩클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보여 眞僞與否(진위여부)가 궁금합니다
해방된지 1년만에 <전선남녀신인가수콩클대회>주장은 歌謠史的(가요사사적)으로 그간 밝혀지지 않은 秘史(비사)입니다
그시기 지방에서 小規模(소규모)의 신인발굴대회가<concurs-콩쿠르-> 이란 名稱(명칭)을 使用(사용)해열렸다는 사실은 old-fan 들이라면 기억하는 사실일것입니다
그러한 콩클대회를 통하여 숨은 人才(인재)를 發掘(발굴)하고 參與者立場(참여입장)에서는 靑雲(청운)의꿈을 實現(실현)하는 길이 활짝열린 편이었으므로 一擧兩得(일거양득)의 效果(효과)가
있었다 할수있습니다
또한 大衆(대중)들의 關心(관심)과 興行(흥행)에 成功(성공)하여 一般大衆(일반대중)들의 가요사랑에 寄與(기여)하는 바가컸습니다
결국 歌謠發展(가요발전)의 原動力(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大衆(대중)들의 사랑과 關心(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콩클대회가 큰혁할을 한셈이고 악극과 더불어 歌謠(가요)의 大衆化(대중화)를 이끈
雙頭馬車(쌍뚜마차)역할을 했습니다
1227—1950년대 戰時歌謠(전시가요)들-a
解放(해방)의 感激(감격)도 잠깐 아무런 政治哲學(정치철학)도 나라를위하는 愛國心(애국심)도 資格未達(자격미달) 인것도 不足(부족)해 妄靈(망령)나고 執權慾(집권욕)에 눈이뒤집혀 버린한 늙은
政治謀利輩(정치모리배)가 美國(미국)을속이고 國民(국민)을 속여 그렇게 愛國志士(애국지사)를비롯 많은 國民(국민)들이 反對(반대)했건만 기여히 반쪼가리 정부를 세운지 2년도체안되
그잘못된 選擇(선택)의 의 結果(결과)가 “六二五(육이오)民族同亂(민족동란)” 이라는 最惡(최악)의 形態(형태)로 ------그런 선택을한 우리를 비웃듯이 나타납니다
六二五(육이오)는 美蘇强大國儀(미소강대국의) 패권에 휘말려 우리민족끼리 싸운 代理戰爭(대리전쟁)이었습니다
가장큰 원인의 스탈린의 한국의 소련국토화 이겠지만-----
무엇보다도---- 數千年(수천년) 같은 民族(민족)이었던인 남과북이 韓日合邦(한일합방)때처럼 또다시 一般國民(일반국민)들의 意思(의사)와는 관계없이 强大國(강대국)들의 野慾(야욕)에 의하여
서로를 향해 총뿌리를 겨누었다는 悲劇的事實(비극적사실)입니다
戰爭(전쟁)의 悲劇(비극)은 곳곳에 어둠의 그림자와 傷處(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人名殺傷(인명살상)과 離散家族(이산가족)의 悲劇(비극)이 家難(가난)과 배고픔보다 더큰 傷處(상처)였습니다
分斷(분단)과 離別(이별) 失鄕(실향)과 彷徨(방황)이 1950년대를 지배했던 時代感情(시대감정) 이요 key-word-키워드-였습니다
大衆歌謠(대중가요)는 時代(시대)의 거울이자, 歷史(역사)의 證人(증인)입니다
그時代(시대)의 風景(풍경)을 그대로 그려내며 時代感情(시대감정)을 曲盡(곡진)하게 노래한다
195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 亦是(역시) 이러한 戰爭(전쟁)의 傷痕(상흔)과 어두운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그려냅니다
1948~9년나온 南仁壽(남인수)의 切創(절창) <가거라 三八線(삼팔선)> 은 이미 2년후 터질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을 豫感(예감)하고있다 는 主張(주장)이 보입니다
아~아~ 山(산)이 막혀 못오시나요
아~아~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다 같은 故鄕(고향)땅을 가고 오건마
南北(남북)이 가로막혀 怨恨(원한) 千里(천리)길
꿈마다 너를찾아 꿈마더 너를찾아
三八線(삼팔선) 헤맨다-----------------------------------------------------------------------------------------------------이부풍사 박시춘곡 남인수노래<가거라 三八線(삼팔선)
解放(해방)이 되면서 三八線(삼팔선)이 그어지고 우리민족의 意志(의지)와는 관계없이 强大國儀(강대국)의 軍事的便宜(편의) (군사적편리)에 의하여 그어지고 實際的(실제적)인 民族(민족)의
分斷(분단)이 固着化(고착화)되버린 悲劇(비극)이 始作(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미영소등 세계2차대전 戰勝國(전승국)의 얄타, 포츠담회담에 의하여 분단이 확정되고 三八線(삼팔선)이 그어졌습니다
이러한 一聯(일련)의 決定(결정)에 當事者(당사자)인 우리의 意見(의견)은 反映(반영)되지못했고 그들에겐 삼팔선이 그어진후 일어날 悲劇的結果(비극적결과)나 分斷(분단)으로 인한
우리 民族(민족)의 苦痛(고통)에 關心(관심)조차 없었습니다
三八線(삼팔선)이 그어졌다하나 그것은 强大國(강대국) 一方的(일방적)인 決定(결정)이었기에 초기에는 比較的(비교적) 子有(자유)로운 往來(왕래)가있었습니다
허지만 한 妄靈(망령)된 政治謀利輩(정치모리배)의 執權慾(집권욕)으로 반쪽짜리 정부가 들어서고 북에 北傀(북괴) 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왕래가 끊기고 맙니다
上記歌謠(상기가요) <가거라 三八線(삼팔선)>는 바로 이러한 當時(당시)의 狀況(상황)을 悽絶(처절))하게 表現(표현)하고 있습니다
三八線(삼팔선)이 그어지기전 먼저 남으로 내려왔으나 돌아오지 못하는 남은 家族(가족)들을 애타게 기다리고있는 心事(심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상기언급,-<가거라 三八線(삼팔선)>의 상세한것은 “종횡무진가요사 736”를 참조바랍니다
民族(민족)의 分斷(분단)이 굳어저가는 政勢(정세)속에서 南北統一(남북통일)을 念願(염원)하는 또하나의<달도하나 해도하나>도 1949년경발표됩니다
달도하나 해도하나 사랑도하나
이나라에 바친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祖國(조국)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모두야 우리들은 檀君(단군)의 子孫(자손)----------------------------------------------------------------김건사 이봉룡곡 남인수노래<달도하나 해도하나>
노래는 민족의통일을 渴望(갈망)하고있지만 결국은 韓半島(한반도)를 永遠(영원)히 分斷(분단)해버리는 결정인 1948년, 5월10일 남한만의 선거가 실시되고 8월15일 政府樹立(정부수립)이
宣布(선포)되어 民族(민족)의 統一(통일)은 물건너 가버립니다
이러한 民族分斷行爲(민족분단행위), 어리석은 判斷(판단)을 를 “달도하나 해도하나” 이듯 우리민족은 하나라며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서는 안된다고 表現(표현)하며 批判(비판)하고 있습니다
1228—戰時歌謠(전시가요)-b
남인수씨의<달도하나 해도하나는>1949년, 6월경 곡을취입한 남인수씨가 창설한 asia-record 서 발매한 가요입니다
그리고 1961년경 곡을 작곡한 이봉룡이 운영하던 l.k.l-record 서 박남포씨가 2절 “三千里(삼천리) 뻗친血脈(혈맥”) 를 “이나라에 뻗친血脈(혈맥)” 으로 개사해서remake 했습니다
달이하나고 해가하나이듯 우리민족도 하나라는 民族意識(민족의식)을 强調(강조)하고 있습니다
헌데----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 한민족인데 왜 섣불리 남한만의 선거로 정부를세워서 분단을 固着化(고착화)했느냐고 抗辯(항변)하고 있습니다
해방이되었지만 결국통일로까지 이어지지못하고 民族分斷(민족분단)의 悲劇(비극)이 招來(초래)된것입니다
이는결국 나라가 힘이약해서 우리스스로 自主的(자주적)인 解放(해방)을 이루지못하고 强大國(강대국)에 의하여 戰爭(전쟁)의 結果物(결과물)로서 갑자기 解放(해방)이 찾아온 그瞬間(순간)부터
三八線(삼팔선)의 悲劇(비극)은 움트고 있었습니다
이노래는 國土分斷(국토분단)은 되었지만 반드시 한민족, 한겨레인만큼 반드시 통일의 날이올것이라고 純眞(순진)하기만한 確信(확신)하고있습니다
허나 不幸(불행)하게도 그꿈을 산산히 조작내는 六二五民族相殘(육이오민족상잔)이 터지고 分斷(분단)은 固着化(고착화)되고 맙니다
强大國儀(강대국)의 軍事的便宜(군사적편의)에 의하여 그들입맛대로 三八線(삼팔선)이 그어지고 이젠 强大(강대)국의 征服慾(정복욕)에의하여 그들의 꼬두각시가되어 우리민족끼리 피흘리는
戰爭(전쟁)을 해야했습니다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이 勃發(발발)하자 가요인들은 國軍組織(국군조직)인 政訓工作隊(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軍部隊(군부대) 慰問公演(위문공연)과 軍歌制作(군가제작) 國民慰安(국민위안)
歌謠創作(가요창작)에 參與(참여)했니다
이들은 後方(후방)은 물론 銃彈(총탄)이 빗발치는 最前線(최전선)에도 投入(투입)되어 軍人(군인)들의 士氣(사기) 振作(진작)에 앞장섰습니다
“가수를 포함한 모든 演藝人(연예인)들은 소위”먹물도장”을찍고 참여하였는데 이것은 公演途中(공연도중)혹은 혹시죽더라도 國家(국가)에 報償(보상)을받지않겠다는 悲壯(비장)한각오를 다짐한
覺書(각서)였다”---------
는 紀錄(기록)이보이는데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남의나라를위하여 戰爭(전쟁)터에 끌려가는 것보다도 더凶惡(흉악)하고 無責任(무책임)한 그시기 執權勢力(집권세력)의 赤裸裸(적나라)한
貌襲(모습)이어서 지금도 憤怒(분노)가 치밉니다
六二五戰爭狀況(육이오전쟁상황)과 그로인한 避難(피난)살이를 노래한 歌謠(가요)로는 六二五中(육이오중) 一 四後退(일사후퇴) 興南撤收(흥남철수)를노래한 가요로 박시춘표 fox-trot-rhythm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있음을 記憶(기억)합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興南埠頭(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가고 길을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一 四以後(일사이후) 나홀로왔다-----------------------------------------------------------------------------강해인작사 박시춘작곡 현인노래<굳세어라 금순아>
이곡을 두고 “분단과 이별의 슬픔을 가장극적으로 노래하고있다”는 글이 보입니다
마치 1,4후퇴 興南撤收(흥남철수)를 그대로 再現(재현)해놓은듯하 느끼을 줄정도로 事實的(사실적)입니다
노래 主人公(주인공)은 撤收過程(철수과정)에서 누이동생 금순이를 잃고 釜山國際市場(부산국제시장)에서 장사치로 延命(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이동생 금순이와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話者(화자)는 영도다리 난간위에뜬 외로운 초생달신세가 되고말았습니다
撤收船(철수선)에 몸을싣거나 故鄕(고향)땅에 남은사람들은 대부분 影島(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막연한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影島(영도)다리는 만남의 場所(장소) 되었습니다
하지만 巨濟島(거제도)로 실려가거나 避難民(피난민) 분류과정에서 헤이지고 말았었습니다
이처럼 이노래는 興南撤收當時(흥남철수당시) 惹起(야기)된 離別(이별)과 離散(이산)의 苦痛(고통)을 切切(절절)하게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노래에대한 더자세한 내용을 해당란을 참조바랍니다
이해연의<斷腸(단장)의 미아리고개>도 亦是(역시) 戰爭(전쟁)의 慘狀(참상)을 生生(생생)하게 紀錄(기록)한 戰爭歌謠(전쟁가요)임이 分明(분명)합니다
北韓(북한) 人民軍(인민군)에 强制(강제)로 拉北(납북)된 한 家長(가장)과 그로인한 家族(가족)의 苦痛(고통)을 어린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表出(표출)하고있습니다
1229-戰時歌謠(전시가요)-c
미아리 눈물고개 남이넘던 離別(이별)고개
火藥煙氣(화약연기) 앞을가려 눈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鐵絲(철사)줄로 두손 꽁꽁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반야월사 이재호곡 이해연노래<斷腸(단장)의 미아리고개>
句句節節(구구절절) 家長(가장)의 拉北(납북)으로 인한 苦痛(고통)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손을 꽁꽁묶인채로 맨발을 절며 끌려가던 아버지, 철없이 그러한 가장을 그리다가 잠이든 어린아이, 동지섣달 가니긴밤 北風寒雪(북풍한설) 견뎌내며 살아가는 아내, 離散(이산)으로 인한
한가족의 慘狀(참상)을 이보다 더 曲盡(곡진)하게 그릴수는 없을정도로--- 이곡은 곡을쓴 반야월의 實在實話(실재실화)를 바탕으로 創作(창작)되었기에 더 實感(실감)나게 듣는이의 가슴을 울립니다
이곡도 해당<종횡무진가요사>에 상세한설명이있으니 참조바랍니다
“찔레꽃”을발표해 big-hit 시킨 백난아부른<고랑포 아낙네>는 實在(실재)로 전쟁으로 헤어지는 家族狀況(가족상황)을 生生(생생)하게 묘사하여 절실한 感動(감동)을 줍니다
아이와 아내를 먼저보내고 뒤에올 남편을 애타게기다리는 아내의심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눈오는 高浪浦(고랑포) 산마루에서
저하늘 하늘 南(남)쪽길로 먼저 가거라
가슴을 떠다밀고 소리 칠적에
당신도 오시겠소 울던벌판아-------------------------------------------------------------------------손로현사 이재호곡 백난아노래<高浪浦(고랑포)아낙네>
노래속 高浪浦(고랑포)는 京畿道(경기도) 臨津江邊(임진강변) 조그만 浦口(포구)입니다
그마을에서 平和(평화)롭게 살던사람들이 戰爭(전쟁)으로인하여 避難(피난)을 떠납니다
남편은 가재정리를 위해남고 아내와 아이는 먼저 避難(피난)길에 나섰습니다
눈은 쏟아지고 총소리가 앞길을 가로막아 피난길도 여의치 않습니다
“避難民(피난민) 보따리실은 馬車(마차)에 바퀴를 끌어잡고 목이메어 보채우는 우리아기” “아버지 오거든 한태들 가십시다 울던밤---“이
마치한편의 drama-드라마- 映畵(영화)를 보는것처럼 生生(생생)히 펼쳐집니다
피난의 現場狀況(현장상황)을 이처럼 具體的(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노래는 보기드물것입니다
그야말로 이노래는 戰爭實況(전쟁실황)을 實在(실재)로전해주는 實況中繼曲(실황중계곡)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애타게 아빠를 기다리던 아기는 과연 아빠를 만났을까? 어쩌면 大部分(대부분)의 離散家族(이산가족)처럼 永永(영영) 離別(이별)을했을것입니다
눈보라와 빗발치는 銃彈(총탄)속에서 아빠를 만나는건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離散家族(이산가족)의 恨(한) 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점에서 이노래는 이산가족을 代表(대표)하는 離散歌謠(이산가요)라 말할수있습니다
특히 이가요는----- 1950년대 초 일제강점기 taihei-record 서 명콤비로 활동했던 이재호를중심으로 왕년의 태평레코드를 부활시켜 예 라벨을 그대로 사용 레코드를 제작했습니다
이회사에서는 박재홍의<성황단 고개>금사향으<그리운목동> 백난아의<멕시코나이트><고랑포아낙네>등을 발매했습니다
천상률사, 백영호곡 현인노래<避難日記(피난일기)>는 釜山(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이 日記型式(일기형식)으로 부른가요입니다
定處(정처)없이 흘러온곳 낯선 港口(항구)에
갈매기떼 바라보며 단봇짐놓고
찬서리에 시달리어 살아온 3년
慶尙道(경상도)가 人心(인심)좋아 정이들었소-------------------------------------------------------------------------------------천상률사, 백영호곡, 현인노래<避難日記(피난일기)>
상기곡 <피난일기>의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사 324”를 참조바랍니다
1230—戰時歌謠(전시가요)-d
曲(곡)을 創作(창작)한 當事者(당사자)가 아니길래 확정지어 말할수없지만 이노래의 주인공도 亦是(역시) 一四後退(일사후퇴)때 원산에서 배를타고 내려온 북한 피난민일것입니다
歌詞(가사)속”낯선港口(항구) ”는 釜山港口(부산항구)이고 그곳에서 避難生活(피난생활) 3년을 버텨낸것입니다
그시기기 많은 避難民(피난민)들처럼 戰爭(전쟁)은빨리끝나 곧 歸鄕(귀향)할수 있어리라믿고 그저 준비없이 단봇짐 달랑메고 급히내려온 避難(피난)길이었습니다
찬서리 맞으며 갈매기노래소리에 위안을 받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부산의 훈훈한 인심에 정이들었습니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창살을치고 어린작식 잠못드는 베갯머리”로 밤을 지새지만 그래도 고향하늘이 그립기만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더라도 고향에 돌아갈 北進(북진)統一(북진통일) 그날을 꿈꾸고”있는것입니다
<Parting at pusan station-이별의부산정거장->은 戰時歌謠中(전시가요중) “代表的(대표적)”이라는 修飾語(수식어)를 붙일민한 歌謠(가요)입니다
보슬비가 소리도없이 離別(이별)슬픈 釜山停車場(부산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汽笛(기적)이운다
한많은 避難(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못할 板子(판자)집이여
慶尙道(경상도)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우네
離別(이별)의 釜山停車場(부산정거장)
서울가는 十二列車(십이열차)에 기대앉은 젊은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窓(창)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避難(피난)살이 지나고보니
그래도 끊지못할 純情(순정)때문에
汽笛(기적)도 목이메여 소리높이 우는구나
離別(이별)의 釜山停車場(부산정거장) <3절생략>---------------------------------------------------------------------호동아-유호-사, 박시춘곡 남인수노래<離別(이별)의 釜山停車場(부산정거장)>
이곡은 창작자 박시춘이 육이오공간에 부산에서 直接目擊(직접목격)한 避難民(피난민)들의 離別場面(이별장면)을 歌謠化(가요화) 해서 더욱 實感(실감)나는 가요입니다
노래에 등장하는 十二列車(십이열차)는 당시 운행되던 열차로 上行線(상행선)은 짝수 下行線(하행선)은 홀수로 表記(표기) 되었다 합니다
해서 노래속 十二列車(십이열차)는 부산에서 서울로가는 열차여서 심이열차로 表現(표현)한것입니다
이노래는 어떤곡이던가??
戰爭(전쟁)의 廢墟(폐허)속에서 주린배를 움켜쥐고하루 하루하루를 延命(연명)하던 釜山避難時節(부산피난시절) 그래도 靑春(청춘)은 있었고 고달프고 艱難(간난)한 避難(피난)살이
廢墟(폐허)속에서 피어난 한송이 사랑의꽃을 哀切(애절)한 汽笛(기적)소리에 담아 낸것입니다
그속에는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아픈 傷處(상처)가있고 避難(피난)살이의 고달픈삶이 녹아있고 애틋한 靑春男女(청춘남녀)의 사랑이 배어있습니다
“한많은 피난살이 설움도많아 그래도잊지못할 판자집이여”,”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보니 그래도 끊지못할 순정 때문에”, “汽笛(기적)도 목이메여 소리높이 우는구나”---를 들으며
힘든시절을 살던 수백만 피난민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냈을것인가
그리고 피난살이의 설움을 토해냈을것인가 진정 대중가요의 본질인”音樂(음악)은 人生(인생)이다”라는 깊은뜻을 떠올리게 해주는것입니다
자금도 이노래를 부르면 마치 1950년대 戰爭(전쟁)속으로 避難(피난)살이 속으로 쓸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silver세대들이 많을것입니다
“판잣집” “피난살이” “十二列車(십이열차)” “慶尙道(경상도)사투리” 등등 피난살이의 생생한 현장이 노래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곡은 1953년 서울還都(환도) 전후의 時代狀況 (시대상황)을 생생하게 再現(재현)한곡이라는 전에서 歷史的意味(역사적의미)가 있습니다
歌謠(가요)는 “時代(시대)의 거울이요” “歷史(역사)의 얼굴” 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證言(증언)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이런노래속에 登場(등장)하는 悲劇(비극)의 主人公(주인공) 금순이, 오빠, 아내, 아빠의 참상은 한가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시대를 살았던 우리民族(민족) 全體(전체)의
自畵像(자화상)이라는 점에서 더욱깊은 아픔을줍니다
곧 노래속 主人公(주인공)들은 바로 그時代(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貌襲(모습)인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노래속 주인공들은 代表的個人(대표적개인)이자 時代(시대)의 證人(증인)들입니다
상기곡<離別(이별)의 釜山(부산)停車場(정거장)>은 “종횡무진가요사 325”에 상세히 설명되잇습니다
1231-戰時歌謠(전시가요)-e
한편 戰爭中(전쟁중) 고단한 삶의 現場(현장)을 노래한 歌謠(가요)들도 많이 登場(등장)했는데 그代表的(대표적)인 曲(곡)이 박단마의 shoeshine-boy-슈사인보이-입니다
전쟁으로 많은 孤兒(고아)들이 생겨났고 父母(부모)없이 shoeshine-boy-슈사인보이-로 生計(생계)를 유지해야했던 삶의 고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산은 南韓政府(남한정부)의 최후의 보루로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든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구두통하나에 목숨을걸고 생계를 유지하던 수많은 슈사인보이들이 거리를 떠돌았습니다
戰爭孤兒(전쟁고아)들이 職業戰線(직업전선)에 나서 거리를 헤매는 貌襲(모습)이 日常(일상)이 되었습니다
Shoeshine-슈산- shoeshine-boy-슈산보이-shoeshine- 슈산-shoeshine-boy- 슈산보이-
Shoe shoe shoe shoe-슈슈슈슈- shoeshine-boy-슈산보이-shoe shoe shoe shoe-슈슈슈슈- shoeshine-boy-슈산보이-
Hello-헬로- shoeshine-슈사인- hello-헬로-shoeshine- 슈사인-
구두를닦으세요 구두를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무리 피난터에 허둥거려도
구두하나 깨끗하게 못닦으시는
주변없고 배짱없는 고림보 샌님은
요사이 아가씨는 no no no no good-노노노노굿-이래요----------------------------------------------이서구작사 손목인작곡 박단마노래<shoeshine-boy-슈사인보이->
이노래는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으로 인해 疲弊(피폐)해진 生活難(생활난)을 端的(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어를 곁들여가며 노래를 싣고있는rhythm-리듬-은 흥겹지만 내용은 生活苦(생활고)와 恨(한)을 담고있어서 좋은 對照(대조)를 이룹니다
避難(피난)살이는 힘들어도 希望(희망)을 잃지말고 살아가자는 意味(의미)를 輕快(경쾌)한 rhythm-리듬-으로 表出(표출)하고있다고 애써 변명하는 글이있어서 안쓰럽기만 합니다
노래를 부른 박단마는 해방전 톡톡튀는 가요로 인기를 모았고 해방전 이미 한국가수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진출한 경력이있습니다
그리고 해방후 pop-singer-팝가수-로 변신 미8군쇼 무대에서며 인기를 모았습니다
1950년대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 당시 유행했던 生活用語(생활용어)는”hello-헬로우-“ “give me-기브미-“ “찹찹” “츄잉검” “탱큐”-----같은 영어였습니다
자기들멋대로 삼팔선을 그어버린 결코 용서가힘든 대상이었지만 또 이렇게 우리민족은 屈辱的(굴욕적)인 삶을 영위해야했습니다
미군들과의 대화에서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를 해야했습니다 어찌되었던 그들의 우리민족의 밥줄이었으니깐요
美軍(미군)들이 駐屯(주둔)하면서 그들의 물자와함께 그들의언어인 영어가 日常用語(일상용어)로 자리잡게됩니다
이노래의 主人公(주인공) shoeshine-boy-슈산보이-도 지나가는 美軍兵士(미군병사)에게”hello shoeshine-헬로우 슈사인” 하고 외쳤을것입니다
美軍文化(미군문화) 곧 gl文化(문화)는 1950년대 韓國文化(한국문화)의 地形圖(지형도)를 바꾸어놓았습니다
美軍部隊(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美國製品(미국제품)은 물론 雜誌(잡지), 노래, 춤에 이르기까지 여러방면으로 영향을끼쳤습니다
그중에서 소위 “洋公主(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던 職業女性(직업여성)의 登場(등장)은 必然的(필연적)이었다는 글이보입니다
Shoeshine-boy-슈사인보이-가 少年(소년)들의 職業(직업)이었다면 洋公主(양공주)는 少女(소녀)들의 職業戰線(직업전선)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戰爭(전쟁)은 必然的(필연적)으로 戰爭孤兒(전쟁고아)를 量産(양산)했습니다
그래서 孤兒(고아)가된 아이들은 길거리를 헤매며 生計(생계)를 꾸려가야만 했습니다
슈사인보이 외에도 담배장사 新聞(신문)팔이 양키장사등 닥치는대로 職業戰線(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게 했습니다
1232-戰時歌謠(전시가요)-f
韓靑building-한청빌딩- 골목길 전봇대 옆에
나는야 구두닦이 shoeshine-boy-슈사인보이-
나이는 열네살 내故鄕(고향)은 黃海道(황해도)
避難(피난)올 때 父母(부모)잃은 身世(신세)이지만
구두닦아 苦學(고학)하는 學生(학생)이래요
明洞(명동)거리 茶房(다방)을 드나들면서
나는야 담배장사 少年(소년)입니다
비오고 눈오면 두손발을 불면서
외할머니 奉養(봉양)하며 살아가지만
만환짜리 판잣집의 主人(주인)이래요--------------3절생략---------
이노래는 한마디로 戰爭孤兒(전쟁고아)들의 悲慘(비참)한 生活相(생활상)을 노래한 이재호, 남인수콤비의 力作(역작)입니다
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은 黃海道(황해도)에서 살다가 避難(피난)을 떠나오는 과정에서 父母(부모)를 잃어버리고 졸지에 14살 어린나이에 戰爭孤兒(전쟁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少年(소년)입니다
그는 shoeshine-boy-슈산보이-. 담배장사 聞(신문)팔이로 삶을 延命(연명)하면서쓰러져가는 판잣집애서 외할머니를 奉養(봉양)하며 살아가는 奇特(기특)한 어린이입니다
헤어진 運動靴(운동화)를 끌고 눈비맞으며 苦生(고생)하지만 오직 배움이라는 希望(희망)의끈을 놓지않고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반드시 成功(성공)하겠다는 決心(결심) 그것이 이노래의 主題(주제)인”어린決心(결심)”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노래를 가창한 남인수의 부인 김은하씨는 釜山避難時節(부산피난시절) 國際市場(국제시장)에서 우유장사로 힘든삶을 견뎌내었다합니다
또한곡의 孤兒主題歌謠(고아주제가요) <生日(생일)없는少年(소년)>은 生日(생일)조차 잃어버린 孤兒(고아)들의 慘狀(참상)을 노래하는데 解放前 해방전) 김용환을 이은 마당발 歌手(가수)
김용만이 吹入(취입)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왜나를 버렸나요
恨(한)도많은 世上(세상)길에 눈물만 흘립니다
東西南北(동서남북) 坊坊曲曲(방방곡곡) 구름은 흘러가도
生日(생일)없는 어린넋은 어드메가 故鄕(고향)이요
臺詞(대사)---애 철아 너희들은 어떻게 지내느냐
罪(죄)도많은 이애미는 모진 風波(풍파)와 싸우다가 너희들을 버렸단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다시못올길을 떠났단다
어머니 아~ 또 꿈이였구나!!
어머니 아버지 왜말이 없읍니까
모진 것이 목숨이라 그러나 살겠어요
그리워라 우리父母(부모) 어드메 계시온지
꿈에라도 다시한번 그얼굴을 비쳐주오----------------------------------------------------------------------- 최치수사 김성근곡 왕숙랑대사 김용만노래<生日(생일)없는 少年(소년)>
상기 孤兒素材(고아소재) 歌謠(가요)는 句句節節(구구절절)히 生日(생일)조차 잃어버린채 살아가는 孤兒(고아)들의 悲慘(비참)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父母(부모)마저 잃고 아니 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고 한많은 世上(세상)에서 눈물만 흘리며 살아갑니다
나를 버린 父母(부모)이지만 ”꿈에라도 그얼굴을 비쳐주오”---라고 父母(부모)를 보고싶어하는
애틋한 그리운을 吐露(토로)하여 大衆(대중)들의 心琴(심금)을 울립니다
中間臺詞(중간대사)에서—“애 철아 너희들은 어떻게지내니 죄도많은 이애미는 너희들을 버렸단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물론 꿈속의 對話(대화)입니다
꿈일말정 어머니는 子息(자식)을버린 自身(자신)을 罪人(죄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노래의 더자세한 설명은<종횡무진가요사 571>을 참조바랍니다
1233—戰時歌謠(전시가요)--g
“黃昏(황혼)의elegy-엘레지-“原唱者(원창자) 白一姬(백일희)가 부른<눈물의 자장가>는 戰爭(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어린얘기를 키우며 살아가는 젊은 未亡人(미망인)의 슬픔과 삶의
意志(의지)를 노래한 곡입니다
아가야 울지마라 울지마라 아가야
거칠은 世上(세상)길에 너와나는 단둘이다
옥자동이 너와라면 금자동이 너와라면
銀金(은금)도 부럽지않고 가시길도 겁나지 않다-----------------------------------------------------------------------강사랑사 박춘석곡 백일희노래<눈물의자장가>
남편을 잃고 홀로 아기를키우며 살아가는 젊은여인의 삶을 描寫(묘사)해 庶民大衆(서민대중)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으며 후일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映畵(영화)속 主題歌(주제가)는
백일희가 아닌 권혜경이 불렀읍니다
비록 아빠는 없지만”비바람에 방패되고 太陽(태양)아래 굳세어서” 아이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戰爭未亡人(전쟁미망인)의 삶의 意志(의지)를 노래하고 있는것입니다
상기<눈물의자장가>는 “종횡무진가요사 331 “를 참조바랍니다
이처럼 1950년대는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통에 男便(남편)을잃은 未亡人(미망인)들이 넘쳐나던 時節(시절)이었읍니다
孤兒(고아)와 未亡人(미망인)은 戰爭(전쟁)이 낳은 슬픈 pierrot-삐에로-들 이였읍니다
당시 釜山(부산)避難民(피난민) 숫자가 580만이었다는 紀錄(기록)이 보입니다
그러하니 그사람들 속에서 孤兒(고아)와 未亡人(미망인)들은 얼마나 더 먹고살기 힘들었을까 斟酌(짐작)할수있습니다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발표된 <에레나가된 순희>도 路柳墻花(노류장화)로 직업전선에 뛰어든 cabaret-girl-카바레걸-의 슬픔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날밤 劇場(극장)앞에서 그驛前cabaret-역전캬바레-에서 보았다는 그所聞(소문)이 들리는 순이
石油(석유)불 燈盞(등잔)밑에 밤을새면서 실패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밤도 party-파티-에서 춤을 추더냐
그빛깔 dress-드레스-에다 그寶石(보석) 귀걸이에다 목이메어 港口(항구)에서 운다는 순희
시집갈 열아홉살 꿈을꾸면서 노래하던 순희가
避難(피난)왔던 순희가 말소리도 異常(이상)하게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밤도 洋(양)담배를 피고있더냐------------------------------------------------------------------------손로원사한복남곡 한정무노래<에레나가된 순희>
다홍치마 곱게입고 燈盞(등잔)불밑에서 실패감던 순희가 驛前cabaret-역전캬바레에서 춤을추며 몸을팔고있는 모습을 生生(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 순희 오늘밤도 洋(양)담배를 피고있드냐---: 에서 보듯이 그”이상한소리”는 영어일것이고 美軍(미군)들 양담배를 피는 洋公主(양공주)로 墮落(타락)한것입니다
이노래는 전쟁통에 몸을필아 생계를유지하던 基地村(기지촌)의 여성, cabaret-girl-캬바레걸-들의 貌襲(모습)을 象徵的(상징적)으로 代辨(대변)하고있습니다
“순희”에서”에레나”로의 變身(변신) 그리고 끝내 洋公主(양공주)로의 轉落(전락)은 1950년대를 살던 가난한여성들의 險難(험난)한 人生歷程(인생역정)이었습니다
이노래의 더자세한 설명은<종횡무진가요사 335>를 참조바랍니다
또한곡의 洋公主素材(양공주소재)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가 있습니다
“洋公主(양공주)아가씨”는 송민도가 불렀으며 몸을팔아 생존을 이어가는 洋公主(양공주)들의 哀歡(애환)을 哀切(애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香水(향수)냄새 빵긋웃는
뽀족구두 가는허리 껌을씹는
어여쁜 아가씨는 洋公主(양공주)아가씨는 멋쟁이야
i love you you lone me
그대는 나의사랑 yes honey
하루살이 가시덤불 헤쳐가는 속이고 속는 人生(인생)살이
세상을 제멋대로 멋대로 살아가는 멋쟁이 아가씨-------------------------------------------------------------------------------손목인사, 곡 송민도노래<洋公主(양공주)아가씨>
1234—戰時歌謠(전시가요)-h
상기<洋(양)公主(공주)아가씨>는 1958년 개봉된 영화 “地獄花(지옥화)” 主題歌(주제가)로 揷入(삽입)된 歌謠(가요)입니다
제목그대로 “지옥에핀꽃”이 바로 洋公主(양공주) 라는 存在(존재)입니다
人生(인생)의 낭떠러지 막장에 피어난 꽃인것입니다
노래에서도”하루살이 가시덤불 헤쳐가는, 속이고속는 人生(인생)살이”의 주인공으로 表象(표상)됩니다
허지만 겉모습은 明朗(명랑)하고 快活(쾌활)합니다
뾰족구두신고 香水(향수)를 뿌리고 가는허리에 방긋웃음을 띠는 상냥한 貌襲(모습)입니다
물론 男子(남자)를 誘惑(유혹)하기위한 pose-포즈-이지만 젊었기에 겉모습은 아름다워 보입니다
華麗(화려)한 겉모습이기에 더욱더 고달픈삶이 逆說的(역설적)으로 浮刻(부각)됩니다
華麗(화려)한 外貌(외모)에 슬픈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것입니다
當分間(당분간) 停車(정거)하는 시골언덕에
어머님 잠드셨나 불이꺼졌네
그港口(항구) cabaret-캬바레- 그언니처럼
담배와 술을배운 過去(과거)를 빌며
못생긴 딸子息(자식)은 떠나갑니다-------------------------------------------------- ---------------------------------------야인초사 허경구곡 박애경 노래<밤 列車(열차) 그女子(여자)>
마치 歌詞內容(가사내용)이 한정무의<에레나가된 순희>姉妹(자매) 편 같은 느낌을 줍니다
Cabaret-캬바레-에서 술과몸을팔던 순희가 결국 삶에 실패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비록 發表年度(발표년도)는 順序(순서)가 바뀌었으나 내용이 마치 續篇(속편)처럼 이어집니다
Cabaret-캬바레-에서 춤추며 지내던 순희가 3년간 주변을 정리하고 고향에 돌아가려니”될대로 되버린 갖고온짐은 새파란 3등차표 한장이라오---“뿐입니다
Cabaret 生活(생활)-캬바레생활-3년간 몸과마음은 망가지고 남은 것은 오직 故鄕(고향)으로 돌아가는 三等車票(3등차표) 뿐입니다
이러한 cabaret-girl-캬바레걸-들의 運命(운명)은 단지 이노래 主人公(주인공)만이 아니었을것입니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지만 大部分(대부분) 職業女性(직업여성)이 같은길을 걸었을것입니다
이처럼 六二五戰爭後(육이오전쟁후) 廢墟(폐허)속의 女人(여인)들은 삶을꾸려가기위해 險難(험난)한 人生(인생)길을 運命(운명)처럼 걸어가야했던것임을 잊지말아야합니다
日帝(일제)强占(강점)期(기) 農土(농토)를 빼앗기고 滿洲(만주)땅을 流浪(유랑)했듯이 또다시 南(남)과北(북)의 分斷(분단)으로 家族(가족)과 離別(이별)하고 他鄕(타향)땅을 떠도는 身世(신세)가
되었기에 失鄕(실향)과 鄕愁(향수)는 1950년대 普遍的(보편적) 時代感情(시대감정)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는 失鄕(실향)과 鄕愁(향수)를 노래하는 nomad song-노마드송-이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남인수의<故鄕(고향)의 그림자> 박재홍의<물방아도는 來歷(내력)><有情千里(유정천리)> 방운아<마음의 自由天地(자유천지)>가 대표적 가요입니다
또다른 가요로 박재홍의<慶尙道(경상도)아가씨> 亦是(역시) 避難(피난)살이와 望鄕(망향)을 素材(소재)로한 歌謠(가요)입니다
四十階段(사십계단) 層層臺(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
울지말고 속 시원히 말좀하세요
避難(피난)살이 凄凉(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자집에
慶尙道(경상도)아가씨가 愛妻(애처)로이 묻는구나
그래도 對答(대답)없이 슬피우는 以北故鄕(이북고향) 언제 가려나------------------------------------------------------손로원사 이재호곡 박재홍노래<慶尙道(경상도)아가씨>
1235—戰時(전시)歌謠(가요)-i
上記歌謠(상기가요) <慶尙道(경상도)아가씨>를 보면國際市場(국제시장) 거리에서 담배장사로 延命(연명)하며 판자집을 轉轉(전전)하는 避難民(피난민)들의 고달픈삶의 風景(풍경)이
赤裸裸(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그래도 以北故鄕(이북고향)에 돌아갈수있다는 希望(희망)으로 힘겨운 삶을 꾸려나갑니다
影島(영도)다리 난간위에 조각달이 뜬밤 안타까운 故鄕(고향)얘기를 들려주는 慶尙道(경상도)아가씨가 그나마 慰安(위안)이 됩니다----
“四十階段層層臺(사십계단층층대) ” “影島(영도)다리” 國際市場(국제시장)” “釜山港口(부산항구)”등 具體的(구체적)인 地名(지명)이 登場(등장)하여 釜山避難(부산피난)살이의 生生(생생)함을
事實的(사실적)으로 그려줍니다
노래를 부른 가수 박재홍도 釜山避難時節(부산피난시절) 전깃줄장사를 하며 근근이 生計(생계)를 꾸려갔다 전해집니다
노래속”四十階段(사십계단)”은 釜山市(부산시) 中區(중구) 에소재한 階段(계단)으로 바로앞에 항구가있어서 많은 피난민들이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살아가던 눈물어린 場所(장소)입니다
더득더득붙은 하꾸방-상자- 같은 판자집을 짓고살아가면서 港口(항구) 의 勞動者(노동자)가되어 목숨을 延命(연명)했었습니다
지금은 후손들에게 戰爭(전쟁)의 慘酷(참혹)함을 證言(증언)해주는 歷史的(역사적)場所(장소)로 지정되어 文化(문화)의거리로 造成(조성)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追憶(추억)의 名所(명소)가 되었읍니다만-----??
처음 樂劇舞臺(악극무대)서 美男歌手(미남가수) 송달협이부르고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 우리國軍(국군)이 平壤(평양)에 入城(입성)했을 때 평양의 금천대좌서 열린 平壤市民(평양시민)
위로의밤 公演(공연)에서 송달협이 이노래를 불러서 平壤市民(평양시민)들을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傳說(전설) 같은 이야기를 담고있는<꿈에본내 故鄕(고향)>은 북에 두고온
故鄕(고향)과 親知(친지)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思鄕曲(사향곡)이자 失鄕民(실향민)들이 가장 愛唱(애창)하는 曲中(곡중)의 한곡입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身世(신세)
저하늘 저산아래 아득한 千里(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他鄕(타향)에서 우는몸
꿈에본 내 故鄕(고향)이 마냥 그리워
臺詞(대사)---뜬구름아 물어보자 어머님의 問安(문안)을 달님아 비춰다오
인성이와 정숙이의 얼굴을 生時(생시)에 가지못할 恨(한)많은 運命(운명)
이라면 굼에라도 보내다오 어머님 무릎앞에 아! 어느때 바치려나 어머님께
孝道(효도)를 꿈에본 내 故鄕(고향)이 마냥그리워
노래를 부른 한정무는 실제로 一四後退(일사후퇴)때 故鄕(고향)땅 平壤(평양)을떠나 釜山(부산)으로 越南(월남)한 失鄕歌手(실향가수)였읍니다
해서 어쩌면 自身(자신)의 身世(신세)를 애틋하게 노래했기에 感動(감동)을 주었을것입니다
故鄕(고향)에두고온 어머니 인성이와 정숙이----를 그리며 他鄕(타향)땅을 떠도는 身世(신세)를 恨歎(한탄)하고있습니다
타관땅을 헤매며” 내부모 내형제를 그언제나 만나리----“라며 離散家族(이산가족)의 恨(한)을 토해내고있습니다
노래를 발매한 한복남은 釜山避難時節(부산피난시절) 劣惡(열악)한 環境(환경)에서 domido-record-도미도레코드-사를 운영했는데 이곡을 힛트시켰습니다
그만큼 離散家族(이산가족)들에게 慰安(위안)이되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곡입니다
“꿈에본내고향”은 <종횡무진가요사 326>을 참조바랍니다
그리워도 못가는 以北故鄕(이북고향) 大同江(대동강)아
이수일과 심순애가 散步(산보)하던 浮碧樓(부벽루)
牡丹峯(모란봉) 사랑가를 불러주던 사람아
南韓(남한)땅 千里他鄕(천리타향) 옛 追憶(추억)이 그리워
統一(통일)되면 나는가리 울지마라 大同江(대동강)아---------------------------------------------------------------------------이철수작사, 김민우작곡 황금심노래<울지마라 大同江(대동강)>
이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은 大同江(대동강)에서 사랑을나누던 追憶(추억)을 哀切(애절)하게 떠올리고 있습니다
大同江(대동강)의 名所(명소)인 浮碧樓(부벽루), 牡丹峯(모란봉), 練光亭(연광정)이 背景(배경)으로 펼쳐집니다
1236—戰時歌謠(전시가요)-j
上記曲(상기곡)은 황금심이부른<울지마라 大同江(대동강)> 입니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靑春(청춘)을보낸 大同江(대동강)이었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의 牡丹峯(모란봉) 사랑가도 어머님의 자장가도 들려오지않는 千里(천리)他鄕(타향) 南韓(남한)땅에 살고있습니다
하지만 統一(통일)이되면 다시 그리운 故鄕(고향)땅에서 정다운 사람들을 만날것을 굳게믿고있습니다
豊富(풍부)한 音量(음량)으로”꾀꼬리의 목소리”를 자랑하던 황금심의 목소리가 哀切(애절)한 心思(심사)를 북돋우고있습니다
특히조중환이 번안한 신소설”長恨夢(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 平壤妓生(평양기생) 옥단춘까지 登場(등장)시켜 小說的興味(소설적흥미)와 新派調(신파조) 가락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大同江(대동강)은 越南(월남)한 避難民(피난민)들의 鄕愁(향수)의 對象(대상)이었습니다
平壤(평양)의 名所(명소)이자 北韓(북한)땅의 名所(명소)였기에 두고온 故鄕(고향)땅의 代名詞(대명사)로 浮刻 (부각)되었습니다
황금심의<울지마라 大同江(대동강)> 손인호<恨(한)많은 大同江(대동강)> 박재홍<꿈에본 大同江(대동강)> 한정무<大同江(대동강)달밤>--등등 大同江(대동강)을 素材(소재)로한 가요가
속속 發表(발표)되어 避難民(피난민)들의 心琴(심금) 울렸습니다
故鄕(고향)을 눈물속에 두고왔건만
낯설은 他鄕(타향)에도 新羅際(신라제) 노래
南韓(남한)길 避難民(피난민)의 젊은가슴을
한없이 울려주는 한없이 울려주는
피리 북소리--------------------------------------------------------------------------------------------손로현사 이병주곡 백년설노래<新羅際(신라제) 길손>
낯설은 지붕밑에 떠돌건마는
내가 항상 그리던 마음의 故鄕(고향)에는
꽃구름인 산마루에 아롱거리고
물레방아 돌아가는 마을언덕엔
나물냄새풍긴다 양떼가논다
궂은비 맞고사는 신세이지만
내가항상 더듬는 마음의고향에는
녹두새가 노래하는 콩밭이있고
쌍돛대가 돌아드는 정든 浦口(포구)엔
모래같이 수많은 傳說(전설)이 있다---------------------------------------------------------------------------------김초향사 박시춘곡 백년설노래<마음의 故鄕(고향)>
상기2곡은 解放後(해방후) 歌手活動(가수활동)이 低調(저조)했던 백년설의 모처럼 發表曲(발표곡)들입니다
<신라제길손>은 新羅際祝祭(신라제축제)를보며 두고온 북한땅 故鄕(고향)의봄을 그리는 노래이고<마음의고향>은 ”꽃구름이산마루에 머물고 물레방아돌아가는 고향땅 녹두새노래하고
쌍돛대 돌아가는 정든 浦口(포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大部分(대부분) 鄕愁(향수)를 素材(소재)로하는 가요는 越南(월남)한 避難民(피난민)들이 두고온 북녘땅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많습니다
그런점에서 “鄕愁”素材歌謠(향수소재가요)는 一種(일종)의 離散歌謠(이산가요)라고 할수있습니다
그밖에 北韓(북한)땅을 그리워하는 가요로는 원방현의<한많은 北韓(북한)땅>은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떠나온 淸津港(청진항)과 元山港(원산항)을 그리워하고 있고
이해연의<鴨綠江(압록강) 七百里(칠백리)>는”봄이오면 뗏목을타고 풀피리에 구성진 노래를 부르던” 鴨綠江(압록강)의 追憶(추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1237—戰時歌謠(전시가요)-k
低音(저음)의 魔術師(마술사) 오기택의<비나리는 板門店(판문점)> 은 六二五(육이오)空間(공간)도 지나고 歲月(세월)이많이 흘렀지만 비가나리는 板門店(판문점)에서 두고온 北韓(북한)땅을
여전히 그리워하고있는 노래입니다
김광남의<두고온 故鄕山川(고향산천)>亦是(역시)”가고파도 보고파도 못가보는 내고향”이기에”별빛마다 그려보는 그려보고, 달빛마다 새겨보는”안타까운 心情(심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休戰線(휴전선)이 그어져서 가고싶어도 못가는 北韓(북한)땅에대한 그리움을 吐露(토로)한 노래들이 主流(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박재홍이 부른<鄕愁(향수)>亦是(역시) 낯설은 他鄕(타향)에서 故鄕(고향)과 父母(부모)님을 그리는 鄕愁歌(향수가) 입니다
父母兄弟(부모형제) 離別(이별)하고 낯설은 他官(타관)에서
어머님의 자장가를 노래하던 그時節(시절)이
슬픔속에 눈물속에 흘러갑니다
汽笛(기적)울적마다 汽笛(기적)소리 울적마다
그리운 내 故鄕(고향)-----------------------------------------------------------------------------------------------------------배석영사 이재호곡 박재홍노래<鄕愁(향수)>
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은 故鄕(고향)을떠나 배를타고 살아가는 matross-마도로스-입니다
汽笛(기적)소리가 울고 雙鼓動(쌍고동)이 울때마다 故鄕山川(고향산천)과 어머님이 떠오릅니다
어머님의 자장가를듣고 자라던 어린 時節(시절) 故鄕山川(고향산천)이 그립지만 돌아갈수없는 自身(자신)의 身世(신세)를 恨歎(한탄)하고있습니다
이노래 主人公(주인공)은 결국 모든 것을 抛棄(포기)하고 故鄕(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벼슬도 싫다마는 名譽(명예)도싫어
정든땅 언덕위에 草家(초가)집짓고
낮이면 밭에나가 길쌈을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꼬면서
새들이 우는속을 알아보련다
----------------2절생략----------------------------
사랑도 싫다마는 黃金(황금)도싫어
새파란 산기슭에 달이뜨면
바위밑 토끼들과이야기하고
마음의 燈盞(등잔)불을 바라보면서
뻐꾹새우는 曲折(곡절)알아보련다
박재홍이불러 big-hit-빅힛트- 한 이노래는 silver 들의 主視聽 (주시청) tv프로<歌謠舞臺(가요무대)>에 단골로 방송되는 명곡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벼슬도, 名譽(명예)도버리고 서울을 등진채 시골에가서 草家(초가)집짓고 農事(농사)지으며 平凡(평범)한 農夫(농부)로 살아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낮이면 새소리들으며 밭을갈고 밤이면 새끼꼬면서 소박한 農夫(농부)로 살아가겠다는 脫俗(탈속)의꿈을그리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陶淵明(도연명)의<歸去來辭(귀거래사)>에 비유할수 있을것입니다
온통 政治謀利輩(정치모리배)가 판을치고 不法(불법)이 마치 正義(정의)인듯 뒤집혀버린 世態(세태)에 극한 厭症(염증)을느낀 意識(의식)있는 사람들의 痛歎(통탄)스러운 心情(심정)을 노래한---
역겨운 서울바닥보다 차라리 시골로돌아가 살자고하고 있습니다
이곡은 한마디로 妄靈(망령)난 늙은 政治謀利輩(정치모리배)가 이끌던 自由黨(자유당)을 諷刺(풍자)했다고 지례짐작한 自由黨(자유당)의 앞잡이 警察(경찰)에 믿보여 곡을 作詞(작사)한
손로원은 强制(강제)로 끌려가 심한 毆打(구타)와 “思想檢閱(사상검열)”까지 당하는 屈辱(굴욕)을겪읍니다
이사실이 알려지자 노래는 더욱더 급속히 流行(유행)의 물결을타고 大衆(대중)들곁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상기곡에대한 더상세한 설명은<종횡무진가요사 341>를 참조바랍니다
1238—戰時歌謠(전시가요)-l
白金(백금)에 寶石(보석)놓은 王冠(왕관)을 준다해도
흙냄새 땀이젖은 베적삼만 못하드라
純情(순정)의샘이솟는 내젊은 가슴속엔
내맘대로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내노래 曲調(곡조)따라 산새도 운다
世上(세상)을 살수있는 黃金(황금)을 준다해도
보리밭 갈아주는 얼룩소만 못하더라
希望(희망)의싹이트는 내젊은 가슴속에
내맘대로 토끼들과 애기도하고
내담배 煙氣(연기)따라 歲月(세월)도 간다-----------------------------------------------------------------------------------------손로원사 백영호곡 방운나노래<마음의 自由天地(자유천지)>
방운아의 新歸去來辭(신귀거래사) <마음의 自由天地(자유천지)>는 1950년대 중반 발표되었으니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 즉 戰時歌謠(전시가요)입니다
허나 戰爭(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離散(이산)이나 越南(월남)으로 인한 望鄕(망향)을 노래하는 가요는 아닙니다
이말은 戰時(전시)에 發表(발표)된 歌謠(가요)라해서 全部(전부)”離散(이산)의 苦痛(고통)”을 素材(소재)로한 가요가 아니라는 말이됩니다
,<마음의 自由天地(자유천지)>는 亦是(역시)白金(백금),寶石(보석),王冠(왕관)보다는 흙냄새,베적삼이 더귀한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베적삼입고, 밭을갈며 새소리에 맞춰 버들피리부는 農事(농사)꾼의 기쁨을마음껏 구가하고 있습니다
장세정의 <그리운 故鄕(고향)>도 “종달새울고 버들가지 날리는” 故鄕(고향)길에 돌아갈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들노래는 索莫(삭막)한 都市生活(도시생활)에 지친나머지 물과흙이있는 시골로, 自然(자연)속으로 돌아가고싶은 當代(당대) 都市人(도시인)들의 內面心理(내면심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避難民(피난민)들이 모여사는 刻薄(각박)한 都市生活(도시생활)에 지쳐가는 1950년대 民衆(민중)들의 心理現象(심리현상)이 漫然(만연)했던 것입니다
故鄕(고향)으로, 農村(농촌)으로향하는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歌謠(가요)가 續出(속출)한 것은 이러한 背景(배경)에서입니다
“戰時歌謠(전시가요)”는 주로 戰爭(전쟁)으로 인해 發生(발생)한 離散家族(이산가족)의 슬픔과 避難(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했지만 戰爭中(전쟁중) 勝戰(승전)을 鼓舞(고무)시키기위한 勝戰歌(승전가),
愛國心(애국심)을 鼓吹(고취)시키기위한 愛國歌型式(에국가형식)으로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목숨바쳐 나라를 지키고 民族(민족)의 生存(생존)을 防禦(방어)해야할 愛國戰士(애국전사)의길을 걸어야하는 歷史的(역사적)責務(책무)와 當爲性(당위성)을 浮角(부각)시키는 노래들이 當然(당연)히
많이 登場(등장)했습니다
戰時體制下(전시체제하)에서 音樂人(음악인)들은 ”政訓工作隊(정훈공작대)”에 編入(편입)되어 勝戰歌(승전가) 戰爭督勵歌(전쟁독려가)를 부르며 慰問公演(위문공연)에 나섰습니다
주로 軍歌作曲(군가작곡)에 置重(치중)하였지만 大衆歌謠(대중가요)의 性格(성격)을 띤 戰線歌謠(전선가요)도 그들의 손에의해 作曲(작곡)되고 불려졌습니다
신세영의<戰線夜曲(전선야곡)> 고대원의<板門店(판문점)의달밤> 최갑석의<三八線(삼팔선)의봄> 김백희<아내의노래>금사향<님계신 戰線(전선)> 유춘산의<향기품은 군사우편>
박재홍<野營(야영)의밤> 같은노래가 그것입니다
이들노래는 거의 陣中歌謠(진중가요)에 가까울정도로 勝戰意識(승전의식)과 愛國心(애국심)을 鼓吹(고취)하고 있습니다
反共(반공) ideologie-이데올로기-에 바탕을둔 勝戰歌(승전가)가가 중심을 이룹니다
이時期(시기) 共産主義(공산주의)는 우리의 敵(적)일수밖에없고 打開(타개)해야할 對象(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理念戰爭(이념전쟁) 그것이바로 六二五(육이오)同族相殘(동족상잔)의 悲劇(비극)이었음을 잊어서는 결코안되는 理由(이유)입니다
1239—戰時歌謠(전시가요)-m
당신이 가신길은 가시밭 골짜기오나
기어코가신다면 내어이 잡으리까
가신뒤에 내갈곳도 님의길이요
까마귀가 울어도 떨리는 가슴속에
피눈물이 흐릅니다 피눈물이 흐릅니다-----------------------------------------------------------------------김다인사 손목인곡 김백희노래<아내의노래>
戰線歌謠(전선가요)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아내의노래>입니다
목숨을걸고 싸우는 戰線(전선)으로 男便(남편)을보낸 아내였건만 나라를위해 바친 목숨이니 그길은 愛國(애국)의길요 榮光(영광)의 길일것입니다
國家(국가)와 民族(민족)을위해 등불이 된것입니다
그길에 자기자신도 同參(동참)하여 榮光(영광)을함께 누리겠다는 다짐을 노래하고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슬픈눈물을 감추고 즐거운 마음으로”바람불고 비오는 어두운밤길”을 꿋꿋이 걸어가겠다는 意志(의지)를 表現(표현)하고 있는것입니다
이곡에대한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사 630> 참조---
허지만 이러한 意志表現(의지표현)도 그럴만한 價値(가치)가있는 國家(국가)인가하는 先決(선결)條件(조건)이 充足(충족)되어야 합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남의나라 天皇(천황)을 위해서나 이승만독재, 박정희 獨裁政權(독재정권)등 軍府政權(군부정권)을 위해 愛國心(애국심)을 發揮(발휘)하라 强要(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戰線歌謠(전선가요)는 軍人(군인)으로서 軍人(군인)의 아내와 父母(부모)로서 榮光(영광)의길을 함께가겠다는 意志(의지)와 勇氣(용기)를 鼓吹(고취)하고 있습니다
夫婦間(부부간)의 愛情(애정)을 바탕으로 부른 戰線歌謠(전선가요) <香氣(향기)품은 軍事郵便(군사우편)>도 있습니다
행주치마 씻은손에 받은 임消息(소식)은
稜線(능선)의 香氣(향기)품고 그대의 香氣(향기)품어
軍事郵便(군사우편)적혀있는 戰線便紙(전선편지)에
전해주던 配達夫(배달부)가 싸리문도 못가서
복받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박금호사, 나화랑곡 유춘산노래<香氣(향기)품은 軍事郵便(군사우편)>
이 曲亦是(곡역시) 後方(후방)에있는 아내가 戰線(전선)에나간 男便(남편)의 便紙(편지)를받고 기쁨에넘치는 感情(감정)을 노래한곡입니다
그런데 그便紙(편지)엔 그대의 香氣(향기)뿐만아니라 戰線(전선)의 香氣(향기)도 묻어있습니다
戰線(전선)의 火藥(화약)냄새를 그대의 香氣(향기)로 表現(표현)한 것이 그시기 檢閱水準(검열수준) 이었을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복받치는기쁨을 느낍니다 는 글이보입니다
그便紙(편지)에는”忠誠(충성)의 香氣(향기) ””高地(고지)의 香氣(향기) ””必勝(필승)의 香氣(향기) 가 배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대가있는곳이 목숨을건 戰鬪(전투)의 高地(고지)요 稜線(능선)이지만 必勝(필승)의 高地(고지)이기에 香氣(향기)로운 것이다—라는 글도보입니다
곧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를위하여 충성을다한 목숨이이기에 장하고 영광스럽다는 意味(의미)를담고있습니다
곧 이노래는 表面積(표면적)으로는 夫婦(부부)사이의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있지만 勝戰意識(승전의식)과 愛國心(애국심)을 高潮(고조시)시키고 있는것입니다
아니 巧妙(교묘)하게 强要(강요)하고 있는것입니다
夫婦間(부부간)의 愛情(애정)을 憑藉(빙자)하여 愛國心(애국심) 忠誠心(충성심)을 鼓吹(고취)하고있는것입니다
이승만 獨裁政權(독재정권) 이 그럴만한 價値(가치)도없는 政權(정권)인데도 말입니다---------------------이렇게 표현해애 옳지않지 않을까요??
때로는<戰線夜曲(전선야곡)>처럼 後方(후방)에계신 어머니를 대상으로 孝心(효심)과 母性愛(모성애)에 호소하며 戰勝(전승)의 鬪志(투지)를 노래하기도했습니다
좀더 眞實(진실)되게 表現(표현)하면 人間(인간)의 가장 原初的(원초적)인 感情(감정) 인 孝心(효심),母性愛(모성애)조차 無慈悲(무자비)하게 動員(동원)해 戰勝(전승)의 鬪志(투지)를 强要(강요)했읍니다
1240—戰時歌謠(전시가요)-n
가랑잎이 후날리는 戰線(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나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丈夫(장부)의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그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銃(총)소리를 자장가삼아
꿈길속에 달려간 내고향 내집에는
정안수떠놓고 이아들의 功(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아~쓸어안고 싶었소
방아쇠를 잡은손에 쌓이는 눈물
손등으로 씻으며 敵陣(적진)을 노려보니
銃(총)소리 멎어버린 高地(고지)위에 꽂히어
마음대로 나부끼는 太極旗(태극기)는 燦爛(찬란)해
아~아~다시한번 보았소---------------------------------------------------------------------------------------------------------유호사 박시춘곡 신세영노래<戰線夜曲(전선야곡)>
戰線(전선)의 아들은”정한수- 井華水(정화수)- 떠놓고서 이아들의 功(공)비는 어머니” “丈夫(장부)의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勝戰意志(승전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총소리가 멎어버린 高地(고지)위에 꽃히어 나부끼는 태극기는 燦爛(찬란)히” 빛날수있었던 것입니다
가랑잎이 휘날리고 이슬비 소리없이 내리는 戰線(전선)의달밤 風景(풍경)으로 抒情性(서정성)을 덧입혀 悲壯美(비장미)를 한결 高潮(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하는 대목으로 많은사람들의 心琴(심금)을 울렸습니다
이곡은 1951년 10월경 녹음을했는데 진방남이<불효자는 웁니다>을 녹음했을 때 처럼 신세영의 母親(모친)이 死亡(사망)을해 더욱 悲感(비감)을 더해주었다는 믿기지않는 後日談(후일담)이
存在(존재)하기도 합니다
1948년 kbs 專屬歌手出身(전속가수출신) 이예성의<戰線小夜曲(전선소야곡)>은 신세영의<戰線夜曲(전선야곡)>의 姉妹(자매)편으로 發表(발표)된 노래라는 글도 보입니다
砲聲(포성)도 잠들은 tochka-토치카- 속에서
바라보는 달그림자 어머님의 얼굴
떠날 때 하신말씀 떠날 때 하신말씀
잊을리 있으리까 滅敵(멸적)의 覺悟(각오)
내뿜는 花郞(화랑)담배 戰線小夜曲(전선소야곡)---------------------------------------------------------------------유호사 손목인곡 이예성노래<戰線小夜曲(전선소야곡)>
이노래 亦是(역시) <戰線夜曲(전선야곡)>처럼 어머님이 노래 對象(대상)입니다
주인공은 砲聲(포성)이 잠든 tochka-토치카-속에서 마침 떠오른 달을보며 어머님을 生角(생각)합니다
달처럼 둥글고 仁慈(인자)한 어머님의얼굴 그리고 戰線(전선)으로 떠날 때 하시던 당부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主人公(주인공)은”滅敵(멸적)의 覺悟(각오)” 싸워 반드시 이기고 돌아갈것을 다짐합니다
이처럼 戰線歌(전선가)는 父母子息間(부모자식간) 의 끈끈한정을 바탕으로 勝戰(승전)의 覺悟(각오)를 다짐하고 있는것입니다
허지만 그시기 우리 軍人(군인)들의 實在狀況(실재상황)은 결코 勝戰(승전)을 할수있는 形便(형편)이 못되었으니 이렇게 父母子息 間(부모자식간) 情(정)마저 動員(동원)하고 있는것입니다
1241—戰時歌謠(전시가요)-o
<홍콩아가씨>의 금사향이 發表(발표)한<님계신 戰線(전선)>은 太極旗(태극기)흔들며 戰線(전선)에 앞장선 임의 健康(건강)과 용감하게 싸워달라는 必勝(필승)의 信念(신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太極旗(태극기)흔들며 님을보낸 새벽 停車場(정거장)
汽笛(기적)이 울었소
萬歲(만세)소리 하늘높이 들려오던날
지금은 어느 戰線(전선) 어느곳에서
지금 어느 戰線(전선) 어느곳에서
勇敢(용감)하계 싸우시나
님이여 健康(건강)하소서
두손을 붙잡고 님의 祝福(축복)빌던 停車場(정거장)
깃발이 날렸소
洞里(동리)사람 人事(인사)마다 즐거움던날
지금은 어느 戰線(전선) 어느곳에서
지금은 어느 戰線(전선) 어느곳에서
勇敢(용감)하게 싸우시나
님이여 健康(건강)하소서
花郞(화랑)의몸이신 님이떠날 새벽 停車場(정거장)
햇빛도 밝았소
波濤(파도)치는 깃발아래 헤어지던 지던날
지금은 어느 戰線(전선) 어느곳에서
지금은 어느 戰線(전선) 어느곳에서
勇敢(용감)하게 싸우시나
님이여 健康(건강)하소서-------------------------------------------------------------------------------------손로현사 박시춘곡 금사향노래<님계신 戰線(전선)>
太極旗(태극기)흔들며 새벽停車場(정거장)에서 戰線(전선)으로 떠난님,지금은 戰線(전선)에 投入(투입)되어 敵(적)과 싸우고 있습니다
“파도치는 깃발처럼” 쏟아지는 銃彈(총탄)을 뚫고 敵(적)과 (對峙(대치))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한 님의 健康(건강)과 武運長久(무운장구)를 애타게 빌고있습니다
“지금은 어느戰線(전선) 어느곳에서 勇敢(용감)하게 싸우시나”를 反復(반복)함으로써 戰場(전장)의 生生(생생)한 現場感(현장감)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이곡은 戰爭(전쟁)이 한창 熾烈(치열)했던 1950년대초 發表(발표)되어 實在戰線(실재전선)에서 싸우는 軍人(군인)들뿐아니라 後方(후방)에있는 아내와 가족들에게 큰感銘(감명)을 주었습니다
戰線歌謠(전선가요)로서 現場感(현장감)과 感動力(감동력)을 크게높혀주었던 노래입니다
지금도 江原道(강원도) 禪源寺(선원사)에<님계신전선>노래비가 서있다는 紀錄(기록)이 보입니다
<戰線夜曲(전선야곡)>의 주인공 신세영이 발표한<바로그날밤> 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愛情(애정)을 바탕으로 戰線(전선)의 離別(이별)을 노래한 곡입니다
흰눈이 휘날리는 바로 그날밤
그대와나는 촛불을 밝히면서
戰線(전선)에 가는짐을 싸고있을적에
멀리서 들리는 聖堂(성당)의 종소리
밤하늘 그윽히 울렸지
반달이 西山(서산)에 걸려있는밤
그대와나는 홠불 둘러앉아
청춘설계를 꾸며보고 있을적에
눈보라 헤치며 벌판을 달리는
汽笛(기적)도 정답게 울었지
아~그때가 잊지못할 時節(시절)이었소-------------------------------------------------------------------유호사 박시춘곡 신세영노래<바로 그날밤>
“흰눈이 휘날리는 바로 그날밤 그대와나는 촛불을 밝혀놓고 戰線(전선)에가는 짐을싸고 있을적에 멀리서 들리던 聖堂(성당)의 종소리” 를 떠올리며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 하고있습니다
비록몸은 戰線(전선)에 있지만”반달이 西山(서산)에 걸쳐있던밤, 화롯불을헤치며 靑春設計(청춘설계)를 꾸미던” 아름다운 時節(시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더 眞實(진실)되게 이야기하자면 ‘아름다운 時節(시절)을 꿈꾸는듯이 表現(표현)해야 審議(심의)를 通過(통과)할수있었다” 가 맞겠지요??
1242—戰線歌謠(전선가요)-p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歌謠界(가요계) 八方美人(팔방미인) 이었던 김용환을 이어서 解放(해방)後(후) 歌謠界(가요계) 八方美人(팔방미인) 김용만이 부른<戰線便紙(전선편지)>도 있습니다
이노래는 sinsegy-record 발매 sp음반-유노완사, 전오승곡 김용만 노래-입니다
他面(타면)에는 명국환의<철갑거북선>이 보입니다
어머님께 一字上書(일자상서) 드리 옵나니
前方(전방)에 이아들은 無事(무사)합니다
晝夜長川(주야장천)念慮(염려)하신 恩德(은덕)을받아
오늘도 한결같이 守備(수비)하옵니다
얼음풀린 개울가에 봄철이 돌아
올해도 休戰線(휴전선)엔 꽃이핍니다
꿈에어린 故鄕生角(고향생각) 잊어버리고
굳세게 싸워가리 遐齡(하령)하소서
지난달에 보내주신 이백삼십환
또한번 세어보고 울었습니다
가로막힌 이땅위에 平和(평화)가오면
어머님의 크신 恩德(은덕) 報答(보답)하오리다------------------------------------------------------------------유노완사 전오승곡 김용만노래<戰線便紙(전선편지)>
이번엔 “便紙型式(편지형식)“을 빌어서 戰線素材歌謠(전선소재가요)를 創作(창작)했습니다
허나 歌謠內容(가요내용)은 앞선 <바로그날밤>과 大同小異(대동소이) 합니다
어차피 그시절 歌謠檢閱水準(가요검열수준)이 反共(반공)이데올레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으니 歌謠水準(가요수준)이나 內容(내용)도 多樣(다양)해 질수없었고 自由黨(자유당)의 입맛에 맞게
創作(창작)될수밖에 없었습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나 存在(존재)했던 無條件的(무조건적)인 忠誠强要(충성강요), 劃一化(획일화)된 素材(소재)에서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빅재홍의<南北統一(남북통일)>은 六二五 民族動亂(육이오 민족동란)으로 인하여 休戰線(휴전선)이 그어지며 分斷(분단)된 祖國(조국)을을 恨歎(한탄)한 노래입니다
三千萬(삼천만) 白衣民族(백의민족) 피눈물로 가로막힌
怨恨(원한)의 休戰線(휴전선)이 千秋(천추)의 恨(한)이로다
보고싶은 一家親戚(일가친척) 어느때나 만날려나
물러가라 休戰線(휴전선)아
南北統一(남북통일) 네글자를 죽기전에 전해다오--------------------------------------------------유노완사 이재현곡 박재홍노래<南北統一(남북통일)>
休戰線(휴전선)이 그어지며 보고싶은 父母兄弟(부모형제)一家親戚(일가친척)도 만날수없게 되었습니다
國土分斷(국토분단)으로 끝난게아니라 血緣(혈연)이 끊어진 것입니다
離散(이산)과 (斷絶(단절))이 한 家族(가족)이 아니라 우리民族(민족) 三 千萬民族(삼천만민족)의 現實(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休戰線(휴전선)이 사라지고 一家親戚(일가친척)을 만날수있는 길은 오직 “南北統一(남북통일)” 뿐입니다
家族(가족)을 만나고 三千萬民族(삼천만민족)이 自由(자유)롭게 往來(왕래)하기 위해선 分斷(분단)의 鐵條網(철조망)을 걷어내야 합니다
이렇게 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은 統一(통일)의 꿈을 애타게 念願(염원)하고 있습니다
죽기전에” 南北統一(남북통일) ” 네글자를 듣고싶어 하는것입니다
1243-戰時歌謠(전시가요)-q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이 休戰(휴전)되고 韓半島(한반도)에 休戰線(휴전선)이 그어진후 세월이 흐른후 “제2의 白年雪(백년설)” 불리던 남백이 吹入(취입)한<休戰線(휴전선) 나그네>가
發表(발표)되어 남백송도 戰時歌謠(전시가요) 吹入(취입)에 合流(합류)합니다
三百里(삼백리) 臨津江(임진강)에 울고가는 저 물새야
松嶽山(송악산)에 步哨兵(보초병)은 오늘도 서있더냐
서울도 故鄕(고향)이요 平壤(평양)도 故鄕(고향)인데
鐵條網(철조망)이 왠말이냐 休戰線(휴전선)아 가거라
달밝은 臨津江(임진강)에 노를젓는 뱃 沙工(사공)아
가로막힌 전 山脈(산맥)은 누구를 怨望(원망)하나
國境線(국경선)이 왠말이냐 休戰線(휴전선)아 가거라-----------------------------------------------------------------월견초사, 김성근곡 남백송 노래<休戰線(휴전선)나그네>
이노래는 그시기 歌謠審議(가요심의)에 敏感(민감)한 單語(단어)들 일수밖에 없는 ”서울도 故鄕(고향)이요 平壤(평양)도 故鄕(고향)인데”라고 表現(표현)하고있는데 이데올로기가 尖銳(첨예)한
對立(대립)을하던 時期(시기) 우리의 적으로 規定(규정)한 北韓(북한)의 平壤(평양)땅도 우리 故鄕(고향)이라 主張(주장)하고 있습니다
1948년발표 歌皇(가황) 南仁樹 (남인수)의 絶唱(절창)<가거라 三八線(삼팔선)>에서는”三八線(삼팔선)아 가거라”라고 표현하고있는데 이노래에서는”休戰線(휴전선)아 가거라”로 달리表現(표현)하고
있어서 똑같은 分斷線(분단선)인데도 그짧은 시간에 韓半島(한반도)에 急變(급변)이 있었음을 實感(실감)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이노래 역시도 南北(남북)分斷(분단)의 悲劇(비극)을 노래하며 平和(평화)를 追求(추구)한 노래입니다
임진강의 물새는 南北分斷(남북분단)을 알지못하는듯 自由(자유)롭게 南(남)과北(북)을 오고갑니다
이럴때는 차라리 도도히 흐르는 南北(남북)의 江(강)물이나 自由(자유)롭게 오갈수있는 물새들보다도 한수위의 智能(지능)을 가졌다고 뻐기는 人間(인간)의 뻔뻔함에 침뱉고싶습니다
허지만 鐵條網(철조망)을 사이에둔 南北(남북)의 步哨兵(보초병)들은 自己(자기)의 意志(의지)와는 相關(상관)없이 서로 銃(총)뿌리를 겨누고있습니다
서울도 평양도 다 같은 祖國(조국)일진데” 鐵條網(철조망)으로 갈라진 休戰線(휴전선)이 왠말이냐”라고 恨歎(한탄)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핏줄 다 같은 子孫(자손)”인데 國境線(국경선)이 되어버린, 休戰線(휴전선)으로 갈라진 分斷現實(분단현실)을 恨歎(한탄)하고 있는것입니다
“철조망아 가거라 휴전선아 가거라”라는 哀切(애절)한 呼訴(호소)는 民族統一(민족통일)의 念願(염원)을 意味(의미)합니다
박재란의<怨恨(원한)의 六二五(육이오)> 시민철<怨恨(원한)의 三八線(삼팔선)> 도 分斷(분단)의 슬픔을딛고 民族統一(민족통일)을 꿈꾸는 노래입니다
死線(사선)을밟고 끌려간지 애끓는 十餘年(십여년)
내 아버지, 내남편, 내아들, 내오빠 어느때나 돌아오려나
자나깨나 북쪽하늘 바라보다가 목메여 울며 불러봅니다
아~怨恨(원한)의 육이오 怨恨(원한)의 휴전선-----------------------------------------------------------------------------------이시우사, 곡 박재란<怨恨(원한)의 六二五(육이오)>
臺詞(대사)—어머니 달빛이 凄凉(처량)하옵니다
이렇게 달밝은 밤이면 내 故鄕(고향) 오막살이에서
자장가를 불러주시던 어머님 生角(생각)에 나도몰래 울었답니다-------
그리워도 보고파도 못가는 身世(신세)
가로막힌 三八線(삼팔선)이 怨讐(원수)로구나
밝은저달 내어머니 비치어보거든 이 子息(자식)의
이 子息(자식)의 消息(소식)이나 전해주구려--------------------------------------------------------------------------------허이랑 臺詞(대사) 강정문사, 곡 시민철<怨恨(원한)의 三八線(삼팔선)>
1244—戰時歌謠(전시가요)-r
앞서 紹介(소개)드린 가요들이 夫婦(부부), 戀人(연인), 父母兄弟(부모형제)의 사랑을 바탕으로 忠誠心(충성심)과 愛國心(애국심)을 呼訴(호소)한 아니 强要(강요)한 歌謠(가요)였다면
戰鬪現場(전투현장)에있는 戰友(전우)들의 士氣(사기)와 勇氣(용기)를 북돋우는 勝戰歌(승전가)들도 發表(발표)되었음을 아십니까??
말그대로 그 時期(시기) 勝戰(승전)을 强要(강요)하는 歌謠(가요)요 鬪爭歌(투쟁가) 인셈입니다
눈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鐵條網(철조망)은 녹슬고 銃(총)칼은 빛나
싸워서 공을세워 大將(대장)도싫소
歲月(세월)을 恨歎(한탄)하랴 三八線(삼팔선)의봄
싸워서 功(공)을세워 大將(대장)도싫소
二等兵(이등병)목숨바쳐 故鄕(고향)찾으리
눈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는데
雪寒(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길없어
꽃이피면 더욱슬퍼 三八線(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故鄕(고향)
그同抱(동포)웃는얼굴 보고싶구나
上記歌謠(상기가요)<三八線(삼팔선)의 봄>은 戰線(전선)의 現場(현장)에서 鬪爭意志(투쟁의지)를 다짐하는 勝戰歌(승전가)입니다
鐵條網(철조망)은 風雨(풍우)에 시달려 녹슬었지만 銃(총)칼은 빛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銃(총)칼은 勝戰(승전)을위한 鬪爭意志(투쟁의지)를 象徵(상징)한다 할수있습니다
그 鬪爭意志(투쟁의지) 鬪爭目的(투쟁목적)은 2절에 明示(명시)되 있듯이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땅을 되찾아 북녘 同抱(동포)들의 自由(자유)를 안겨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二等兵階級章(이등병계급장)”의 卒兵(졸병)이지만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 입니다
그목숨은 戰功(전공)을세우자는 것도아니요 大將(대장)처럼 높은 地位(지위)로 進級(진급)하자는것도 아닙니다
2절에서 보듯이 오직 共産黨治下(공산당치하)에서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땅을 解放(해방)시키는데 있을뿐입니다
그것이 戰鬪(전투)의 當爲性(당위성)이요 目的(목적)이라고 이歌(이가)謠(가요)는 强調(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노래는 이승만 獨裁時節(독재시절) 수없이 强要(강요)하던 反共意識(반공의식) 反共意志(반공의지)를 鮮明(선명)하게 보인 一種(일종)의 理念勝戰歌(이념승전가)라 할수있습니다
말하자면 反共ideologie- 반공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한 强要(강요)된 勝戰歌(승전가) 인것입니다
이승만 獨裁政權(독재정권)인 自由黨(자유당)이 國是(국시)로 내세워 强要(강요)하던 反共(반공)을 素材(소재)로한 ---- 獨裁政權(독재정권)의 입맛에 맞게 잘創作(창작)된 歌謠(가요)이기도 합니다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 뿐만아니라 지금까지도 陣中歌謠(진중가요)의 代表(대표)하는 名曲(명곡) 이라할 수 있는<戰友(전우)야 잘자라>가 1950년 발표됩니다
이곡은 特(특)히 歌皇(가황) 南仁樹氏(남인수씨)가 始唱(시창)을하기로 豫定(예정)되었다가 알수없는 이유로 公演(공연)에 지각하는바람에 錄音機會(녹음기회) 조차 놓쳐버린것으로
有名(유명)합니다
1950년, 12월2일부터 10일간 국도극장에서 歌協(가협) 創立披露公演時(창립피로공연시) 新作(신작)軍歌(신작군가)로 發表(발표)되었습니다
남인수씨대신 전속단원중의 한사람이 시창을했습니다
이에대한 상세한 설명은 해당란을 참고바랍니다
1245—戰時歌謠(전시가요)-s
戰友(전우)의 屍體(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洛東江(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들은 前進(전진)한다
怨恨(원한)이야 피에맺힌 敵軍(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戰友(전우)야 잘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秋風嶺(추풍령)아 잘있거라 우리는 突進(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먹던
花郞(화랑)담배 煙氣(연기)속에 사리진 戰友(전우)야
터지는 砲彈(포탄)을 무릎쓰고 앞으로 앞으로
漢江(한강)水(수) 잘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江邊(강변) 언덕위에 잠들은 戰友(전우)야
高地(고지)를 넘어서 물을건너 앞으로 앞으로
흙이묻은 鐵甲帽(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내얼굴이 꽃같이 별같이---------------------------------------------------------------------------1절가사 박시춘 2~4절가사 유호 박시춘작곡<戰友(전우)야잘자라>
이노래는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洛東江(낙동강)까지 後退(후퇴)한 國軍(국군)이 많은 犧牲(희생)을 치루고 마침내 北進(북진)을 거듭하여 서울 奪還(탈환)까지 이룬과정을 生(생)生(생생)하게
紀錄(기록)한 歌謠(가요)입니다
그야말로 北進統一(북진통일)의 旗手(기수)에선 勇士(용사)들의 외침이요 鬪爭歌(투쟁가) 입니다
軍歌調(군가조)의 씩씩한 rhythm-리듬-으로 凄切(처절)한 戰場(전장)의 血痕(혈흔),”꽃잋처럼, 花郞(화랑)담배 煙氣(연기)처럼, 꽃깥이 별같이” 쓰러져간 戰友(전우)들의 죽음을 哀悼(애도)하고
있습니다
“꽃잎지는 洛東江(낙동강), 달빛어린 고갯길, 들국화핀 노들강변”의 浪漫的(낭만적) image-이미지-가 重疊(중첩)되어 戰爭(전쟁)의 悲哀(비애)를 高調(고조)하는 悲劇的(비극적) 抒情性(서정성)이
돋보입니다
그래서 軍人(군인)들외에 後方(후방)의 民間人(민간인)들 사이에도 사랑을받고 널리 불려졌습니다
凄切(처절)한 軍人(군인)들의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大衆歌謠(대중가요)의 抒情性(서정성)을 덧입혀 1950년대 代表的(대표적)인 戰爭歌謠(전쟁가요)가 되었습니다
이 戰爭歌謠(전쟁가요)는”좋은노래는 大砲(대포)소리에도 지지않는 藝術的武器(예술적무기)”라고 말했던 작곡가 박시춘의 歌謠信念(가요신념)이 그대로 表出(표출)된 곡으로 볼수있습니다
그런 信念(신념)에서<戰友(전우)야잘자라><가거라 三八線(삼팔선)>같은 名曲(명곡)이 빚어질수 있었던것입니다
헌데<戰友(전우)야 잘자라>는 一四後退時(일사후퇴시) 禁止曲(금지곡)으로 指定(지정)되는 happening-해프닝-도 있었습니다
“花郞(화랑)담배 煙氣(연기)속에 사라진 戰友(전우)야”가 문제가 된것입니다
정확히 이승만의 自由黨人事(자유당인사)들의 입맞에 맞지않았을 것입니다
금지이유가”花郞(화랑)담배 煙氣(연기)속에 사라진 戰友(전우)야” “戰友(전우)의 屍體(시체)를 넘고넘어”가 敗北(패배)意識(의식)을 助長(조장)한다 였습니다
그것을 是非(시비) 건다면 ”꽃잎처럼 떨어져간 戰友(전우)야”도 같은 image-이미지-일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무릎쓰고 戰鬪(전투)에 임한다는 覺悟(각오)를 標榜(표방)한것이지만 戰友(전우)의죽음 이미지가 자주登場(등장) 함으로써 士氣(사기)를 떨어뜨릴수있다고 지례짐작을 한것입니다
허나 休戰後(휴전후) 다시復權(복권)되어 많은사랑을 받는 歌謠(가요)로 남았습니다
더상세한 설명은<종횡무진가요사 393> 참조
1246—戰時歌謠(전시가요)-t
우리의 勇士(용사) 勝利(승리)의 勇士(용사)
피로물든 山(산)과들 무덤을넘어
榮光(영광)의 옛江山(강산)을 다시 찾아온
歡喜(환희)의 새날이라 얼싸 춤추자
우리 勇士(용사) 勝利(승리)의 勇士(용사)
무쇠(帳幕(장막)) 地獄門(지옥문) 쳐부수고
怨恨(원한)의 내겨레를 다시 맞아온
自由(자유)의 새天地(천지)다 얼싸 즐겨라------------------------------------------------------------------------나정기사 박시춘곡<勝利(승리)의 勇士(용사)>
1950년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이서구가 編輯主幹(편집주간)을 맡고있던<勝利日報(승리일보)>에서 實施(실시)한 歌詞(가사)縣賞募集(현상모집)에 나정기가 지은 上記(상기) 歌詞(가사)가
1등으로 當選(당선)되었습니다
이 歌詞(가사)에 作曲家(작곡가) 박시춘이 曲(곡)을 붙인노래가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 初期(초기)에 널리 불리었습니다
좀더 詳細(상세)히 알아보면-----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okeh-record 에서 손목인과함께 專屬作曲家(전속작곡가)로 大活躍(대활약)을 하던 박시춘이 서울 收復後(수복후) 避難(피난)을갔던
京畿道(경기도) 광주에서 서울집으로 돌아오는길에 偶然(우연)히 집어든 新聞(신문)에서 이노랫말을 發見(발견)하고 집에오자마자 guitat-기타-를 튕겨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偶然(우연)히 집어든 新聞(신문)은 <勝利日報(승리일보)>였을것이며 노랫말은 나정기의”勝利(승리)의 勇士(용사)”였을 것입니다
“<勝利(승리)의 勇士(용사)>는 피로물든 鬪爭(투쟁)에서 勝利(승리)하여 잃어버린 國土(국토)를 다시찾은 歡喜(환희)를 노래하고있다”는 글이보이나 이노래가 육이오공간 초기에 반들어진
歌謠(가요)이기에 國土(국토)를 다시찾았다는 說明(설명)은 잘못된 설명입니다
박태환작곡의 <中共擊滅(중공격멸)의노래>는 구체적으로 육이오전쟁에 참여해 우리의 통일을 방해한 중국군인 중공군을 타도할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中共軍(중공군)을”소련 앞잡이 오랑캐떼, 굶주린 늑대”로 描寫(묘사)하여 敵愾心(적개심)을 불러일으키며”무찌르자 쳐부수자, 中共(중공)오랑캐 소련앞잡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敵愾心(적개심)으로 불타고 憤怒(분노)에 몸서리치는 凄切(처절)한 鬪爭歌(투쟁가)요 血戰歌(혈전가) 입니다
<中共擊滅(중공격멸)의노래>는------ 1951년 1월 一四後退後(일사후퇴후) 2월8일자 新聞(신문)에는 公報處(공보처)가 새로 참전한 中共軍(중공군)을 겨냥해 制定(제정)한 이헌구 作詞(작사)의
<中共擊滅(중공격멸)의노래>가 실렸습니다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 의 治熱(치열)했던 弘報戰(홍보전)의 한斷面(단면)입니다
統一獨立(통일독립)되려는 우리민국에
侵略者(침략자) 中共(중공)오랑캐떼가
징치고 피리불며 밀려내려왔네
아 대한의 아들딸들아 일어나거라
祖國(조국)의 한치땅도 더러운 발아래 짓밟힐까 보냐
무찌르자 쳐부수자 中共(중공) 오랑캐
自由平和(자유평화) 지켜온 錦繡江山(금수강산)에
소련 앞잡이 오랑캐 떼가
굶주린 늑대처럼 몰려 내려왔네
아 대한의 아들딸들아 暴惡(포악)한 창끝에 犧牲(희생)될까 보냐
무찌르자 쳐부수자 소련 앞잡이------------------------------------------------------------- 이헌구사 박태현곡<中共(중공)擊滅(격멸)의노)래.>
1247—戰時歌謠(전시가요)-u
勝戰歌(승전가)는 特殊(특수)目的(특수목적)을 위해 國策歌謠(국책가요)로 많이 創作(창작)되었습니다
國防部(국방부)가 中心(중심)이되고 “祖國統一救國會(조국통일구국회)”를 통하여 많은곡들이 發表(발표)되었습니다
<勝利(승리)의노래> <統一(통일)行進曲(행진곡)><戰友(전우)의노래>같은 곡이 그것입니다
바라보니 三千里(삼천리) 華麗(화려)한 江山(강산)
千萬年(천만년)을 지켜온 自由(자유)의 祖國(조국)
우렁찬 進軍(진군)으로 싸워나가는
우리들은 民族(민족)의 動脈(동맥)이로다
아 大韓(대한) 大韓(대한) 大韓(대한) 正義(정의)의 大韓(대한)
萬世界(만세계)에 빛나는 自由(자유)의 勝利(승리)
太極旗(태극기)는 하늘에 펄펄날린다-------------------------------------------------------------------------김광섭시 이흥령작곡<勝利(승리)의 노래>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의 戰勢(전세)는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이 仁川上陸作戰(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역전되었고 9월28일 서울을 收復(수복)했습니다
서울수복 1주일후 그간 休刊(휴간)하고있던 新聞(신문)이 다시 發行(발행)됩니다
이때 新聞紙面-신문지면-에 8월공보처에서 선정한 上記(상기) <勝利(승리)의노래> 노랫말이 실립니다
壓迫(압박)과 설움에서 解放(해방)된 民族(민족)
싸우고 싸워서 새운 이나라
共産(공산)오랑캐의 侵略(침략)을받아
自由(자유)의 人民(인민)들 피를 흘린다
同抱(동포)여 일어나자 나라를 위해
손잡고 白頭山(백두산)에 太極旗(태극기) 날리자-------------------------------------------------------------------김광섭사<統一行進曲(통일행진곡)>
이곡을 작사한 김광섭은 1948년에서 1953년까지 이승만의 秘書室長(비서실장)을 지낸 詩人(시인)이 었습니다
大統領(대통령)을 (補佐(보좌))하면서 反共政策(반공정책)에 基礎(기초)한 統一歌謠(통일가요)를 쓴것이라는 紀錄(기록)이 보입니다
그무렵 이노래는 국민학교 行事時(행사시)에 公式(공식)노래로 많이 불렸습니다
“共産(공산)오랑캐의 侵略(침략)을 받았으나 同抱(동포)들이 일어나 피를흘려 나라를 지키고 白頭山(백두산)에 太極旗(태극기) 휘날리자” 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反共(반공)이데올로기에 立脚(입각))한 戰時歌謠(전시가요)입니다
김광섭은 같은주제로<勝利(승리)의노래>도 남겼고 歌曲(가곡)<바우고개>를 작곡한 이흥렬이 곡을 붙였습니다
김희조작곡<戰友(전우)의노래> 김동진곡<勇進歌(용진가)>등도 같은주제의 反共歌謠(반공가요)입니다
< 싸워 이겨라 故國同抱(고국동포)>, 이씨스터즈<祖國(조국)의 讚歌(찬가)> 박재홍의,<北進(북진)馬車(마차)>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反共(반공)을 主題(주제)로한 이런노래들이<反共國民歌謠(반공국민가요)>으로 묶여나오기도 했습니다
六二五動亂(육이오동란) 勃發(발발) 1주년을 맞아서 마침내 김동진작곡의<六二五(육이오)의 노래>가 무슨자랑스런일 이라고 制定(제정)됩니다
아아 잊으라 어찌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날을
맨주먹 붉은피로 怨讐(원수)를 막아내어
발을굴려 땅을치며 의분에 떤날을----------------------------------------------------------박두진작사, 김동진곡<六二五(육이오)의노래>
詩人(시인)들과 歌曲作曲家(가곡작곡가)들이 强制(강제)動員(동원)되어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때처럼 그들의 意思(의사)와는 전혀關係(관계)없이 屈辱的(굴욕적)인 創作作業(창작작업)을
해야했습니다
이노래는 六二五紀念式場(육이오기념식장)의 공식가요로 제정되어 軍隊(군대)뿐만 아니라 學校(학교)職場(직장) 모든 社會團體(사회단체)에서 六二五行事(육이오행사)때 儀典歌謠(의전가요)
로 불리던 노래였습니다
儀典歌謠(의전가요)치고는 悲憤慷慨(비분강개)의 度(도)를넘어 鬪爭的(투쟁적)인 意志(의지) 鼓舞(고무)하는 激動性(격동성)이 두드러집니다
“怨讐(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흘려온 값진피의 怨恨(원한)을 풀으리” “하늘의 힘을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처럼 鬪爭意志(투쟁의지)를 鼓舞(고무)하고 있습니다
해서 勝戰歌(승전가), 鬪爭歌(투쟁가)의 모습을 確然(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1950년~60년대 學窓時節(학창시절)을 보낸사람들은 六二五(육이오)式場(식장)에서 이노래를 힘차게 불러야했던 씁스레한 기억이 있을터입니다
힘이없어 一方的(일방적)으로 당한 六二五(육이오) 同族相殘(동족상잔)이 그무슨 자랑스런 일이라고 記念行事(기념행사)를 했는지 이해할수없고 祈念(기념)노래까지 부르게했다는것도----
육이오가 끝난지 20여년이지난 1970년대중반 이러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을 되살리게하는 가요가또 나옵니다
그건 독재자 박정희가 애청했다는 허성희의<戰友(전우)가남긴 한마디> 입니다
戰友(전우)의 友情(우정)과 信念(신념)을 또한번 울겨먹은 가요로”총아리 빗발치는 戰爭(전쟁)터 정말 勇敢(용감)했던 戰友(전우)다 祖國(조국)을위해 목숨을 바친 正義(정의)의 사나이가
마지막 그한마디, 이몸은 죽어서도 祖國(조국)을 지키겠노라고”
한마디로 祖國(조국)을위해 목숨을 바친사나이가 正義(정의)의 사나이이니 한목숨 바치길 强要(강요)하는 官制(관제)歌謠(관재가요) 냄새가 나는 가요입니다
이노래가 육이오공간에 발표되었다면<戰友(전우)야잘자라>以上(이상)으로 사랑을 받았을것이라는 純眞無垢(순진무구)한 글도보입니다
이노래에대한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사 557>참조바랍니다
그만큼 六二五(육이오)民族相殘(민족상잔)은 오랜세월이지나도 가시지않는 민족의 생채기요 trauma-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1248—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a
解放後(해방후) 美軍(미군)이 韓國(한국)에 들어와 우리民族(민족)으로선 韓日合邦(한일합방)에 이은 屈辱的(굴욕적)인 美軍政(미군정)을 實施(실시)했고, 六二五(육이오)民族動亂(민족동란)을 치루면서
수많은 美軍(미군)이 한국에 駐屯(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美軍駐屯(미군주둔)은 韓國(한국)文化全般(문화전반)에 큰 影向(영향)을 줄수밖에 없었습니다
生角(생각)하기조차싫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亦是(역시) 그랬었는데----
美軍(미군)은 政治(정치)謀利輩(모리배) 이승만정권이 들어서며 잠시 退陣(퇴진)했으나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이 터지며 다시 駐屯軍(주둔군)으로 자리잡게됩니다
카터대통령의 撤收(철수)政策(정책)이 發表(발표)되기까지 많은 미군들이 한국에 駐屯(주둔)했습니다
이로인해 必然的(필연적)으로 美軍文化(미군문화) 즉 gi 文化(문화)가 急擊(급격)히 司會全般(사회전반)에 浸透(침투)하여 大衆歌謠(대중가요)亦是(역시) 美國式音樂(미국식음악)이 급격이 浮上(부상)
하기에 이르고맙니다
결국 憂慮(우려)했던대로 美軍駐屯(미군주둔)은 韓國社會(한국사회), 文化全般(문화전반)반에 결코 좋치못한 方向(방향)으로 큰變化(변화)를 가져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雜誌(잡지), 新聞(신문), 音盤(음반)등이 無批判的(무비판적)으로 길거리에 넘쳐나며 低質(저질)의 美國映畵(미국영화)가 團成社(단성사),大韓劇場(대한극장), 피카디리 등
開封館(개봉관)에서 버젓이 上暎(상영)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pop音樂(팝음악)의 流入(유입)은 그간의 哀歌爲主(애가위주)의 韓國歌謠(한국가요)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契機(계기)로 作用(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미군방송인 afkn 의전파를타고 American pop-아메리칸팝-이 거리를 넘쳐 흘렀습니다
또한 美國映畵(미국영화)가 上映(상영)되면서 그에 揷入(삽입)된 主題歌(주제가), 揷入曲(삽입곡)등이 색다른 맛으로 韓國大衆(한국대중)의 感性(감성)을 刺戟(자극)하기도 했습니다
미국문화, 미국음악의 어쩔수없는 受容(수용)은 六二五 前後(육이오전후) 疲弊(피폐)할대로 疲弊(피폐)해진 韓國社會(한국사회)에 새로운 慾望追求(욕망추구)라는 大衆心理(대중심리)를 刺戟(자극)
하는데 作用(작용)합니다
죽음과 絶望(절망) 家難(가난)과 苦痛(고통)을 벗어나려는 心理的(심리적)防禦機制(방어기제) 精神的慰安手段(정신적위안수단)으로 美國(미국)文化(문화)가 急擊(급격)히 浮上(부상)되는 irony-아이러니-한
現象(현상)이 생겨납니다
美國(미국)이라는 國家(국가) 美國文化(미국문화)는 當代(당대) 世界最高(세계최고)의 나라 最高文化(최고문화)라 여겼기에 그에 無條件的(무조건적)으로 批判(비판)없이 便乘(편승)하고 同行(동행)해야
時代(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大衆的(대중적) 流行心理(유행심리)가 彭排(팽배)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美國文化(미국문화), 美國飮食(미국음식)을 쫓아가는 群衆心理(군중심리), 大衆的慾望(대중적욕망)이 流行病(유행병)처럼 번져가는 只今生角(지금생각)해보면 낯뜨거운일이 그 時期(시기)
우리 水準(수준)이었습니다
‘希望(희망)이 絶望(절망)이던 고단한 現實(현실)을 잊게해주는 報償的(보상적) 心理機制(심리기제) 그것이 일종의 exoticism-이그조티시즘-<異國趣向(이국취향)>으로 表出(표출)되기에 이르렀다”는
글이 보입니다
엊저면 그것은 現實(현실)을 잊고자한 現實逃避(현실도피)의 手段(수단)이 된것인지 모를일입니다
戰爭(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緊張(긴장)과 苦痛(고통)을 풀고자 했던 大衆(대중)의 慾望(욕망)이 歌謠(가요)로 投射(투사)된것입니다
이러한 시대감정으로 인하여 1950년대가요는 西歐風(서구풍), 美國(미국)風(풍) 音樂genre-음악장르-와 異國情緖(이국정서)가 中心(중심)을 이룰수밖에 없었습니다
쉽게말하자면 西歐衝擊(서구충격), 좁게는American impact-미국충격-으로 인하여 文化的(문화적) 地殼變動(지각변동)이 일어날수밖에 없었습니다
美國衝擊(미국충격)으로 韓國(한국)歌謠界(가요계)에 나타난 변화는 于先(우선) 눈에 그슬리는 外來語濫用(외래어남용)이 두드러졌다는 점입니다
노래 題目(제목)이나 歌詞中(가사중)에 誇示用(과시용)의 英語式(영어식) 의 外來語使用(외래어사용)이 急增(급증)합니다
土俗的(토속적) 韓國語(한국어)로 表現(표현)해도 될내용을 구태여 英語(영어)로 바꿔놓는 誇示用(과시용) 노래가 大流行(대유행)합니다
1249-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b
Lucky morning-럭키모닝- morning-모닝- morning- 모닝- lucky morning-럭키모닝-
달콤한 바람속에 그대와 나
새파란 가슴속에 꿈을안고서
그대와같이 부르는 swing-melody-스윙 멜로디-
랄랄랄 라라라 랄라
단둘이 꽃이피는 lucky morning-럭키모닝------------------------------------------- ------------------------유광주사 전오승곡, 박재란노래<lucky-morning-럭키모닝->
오늘은 Sunday-선데이- 希望(희망)의 avec-아베크-
오늘은 Sunday-선데이- 幸福(행복)의 avec-아베크-
오늘은 Sunday-선데이- 그대와함께 산으로 바다로
젊은이 한쌍 다같이 노래하는 靑春(청춘)의 世界(세계)란다
오늘은 Sunday-선데이-그대와함께
오늘은 Sunday-선데이- 지는해가 野俗(야속)터라
靑春(청춘) avec-아베크--------------------------------------------------------------------------------------------------이철수사 이재현곡 윤일로, 차은희<靑春 avec-청춘아베크->
서울의 거리는 太陽(태양)의거리
太陽(태양)의거리에는 希望(희망)이솟네
Type-타이프-소리로 해가저무는
Building-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너도나도 부르자 希望(희망)의노래
다같이 부르자 seoul서울-의노래
Seoul seoul lucky seoul-럭키서울-----------------------------------------------------------------------------------------------유호사 박시춘곡 현인노래<lucky seoul-럭키서울->
박재란의<lucky morning-럭키모닝> 윤일로, 차은희 duet-듀엣-의<靑春avec-청춘 아베크-> 현인<lucky seoul-럭키서울->등 대부분노래가 題目(제목)은 물론이고 歌詞(가사)에 英語(영어)를
使用(사용)하고 있습니다
Lucky럭키- morning-모닝- swing-스윙- melody-멜로디- Sunday-선데이- avec-아베크- type-타이프- building-빌딩- seoul-서울------등이 그例(예)입니다
英語(영어)로된 歌詞(가사)를 넣어야만 멋지고 洗煉(세련)된 都市感覺(도시감각), 西歐感覺(서구감각)을 살릴수있다는 偏狹(편협)된 大衆心理(대중심리) 작용하고 있는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無分別(무분별)한 外來語濫用(외래어남용)은 이미 일제강점기에도 노래에도 엿보입니다
쿵짱짱 jazz-재즈-는 modern-모던-아가씨요
딩동댕동 거문고는 긴치마 아가씨라
연붉은 입술속 감춘사랑도
Gold-rush-골드러쉬-돈 慾心(욕심)에 동록만이 실었네---------------------------------------------------------------왕평작사, 김탄포작곡 全玉(전옥)<jazz-재즈- 의-melody-멜로디->
上記曲(상기곡)은 눈물의 女王(여왕) 全玉(전옥)이부른<jazz 의 melody-멜로디->입니다
노래속에 jazz-재즈-, modern-모던-, gold rush-골드러쉬-, wink-윙크-, heart-하트-같은 外來語(외래어)가 濫發(남발)되고 있습니다
노래한편에 무려 6개의 外來語(외래어)歌(가) 濫發(남발)되고 있습니다
1250-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c
<荒城(황성)의 跡(적)> 을 힛트시킨 이애리수가 부른 <café –카페-의노래>에도 dance-댄스- trump-트럼프, piano-피아노- kiss-키스-등의 外來語(외래어)가 쓰이고있습니다
Dance-댄스-나 추어볼까나
Trump-트럼프-나 뗴여볼까나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새빨간 술이나 먹어나 볼까나
Pinao-피아노-나 쳐볼까요
피리나 불어 볼까나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새빨간 달뜨기나 기다려 볼까나
馬場(마장)이나 하여 볼까나
留聲機(유성기)나 틀어볼가나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새빨간 입술에 kiss-키스-나 해볼까요
다마나 쳐볼까나
술내기 하여나 볼까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새빨간 心腸(심장)까지 취해볼까나
자 그만 돌아갈까요
또다시 마셔나 볼까나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어여쁜 그대같이 소리나 하여볼까나
이러한 現像(현상)은 1930년대 jazz-재즈-, blues-블루스-,tango-탱고- 등 西歐音樂(서구음악)이 受容(수용)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西歐音樂(서구음악)이다 보니까 거기에 걸맞게 外來語(외래어)도 自然(자연)스럽게 同伴(동반)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modern-boy-모던보이- modern—girl-모던걸- 등 當時(당시) 近代化(근대화)되어 가는 社會風潮(사회풍조)도 한몫을 하고있습니다
이런노래들은 日帝强占末期(일제강점말기) 英美(영미) 敵對國(적대국) 노래라해서 禁止曲(금지곡)으로 規定(규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外來風潮(외래풍조)가 150~60년대 美國文化受容(미국문화수용)과 함께 增幅(증폭)된것입니다
우리 歷史(역사)속 悲運(비운)의 詩仙(시선)김병연을 소재로한 가요<放浪詩人(방랑시인) 김삿갓>을 불러 힛트시킨 명국환의<내 故鄕(고향)으로 馬車(마차)는간다><arizona-아리조나-
Cowboy-카우보이->는 마치cowboy-카우보이-들이 benzoic벤조-를 울리며 故鄕(고향)으로 돌아가는 浪漫的(낭만적)雰圍氣(분위기)를 聯想(연상)시키는 노래입니다
Benzoic-벤조-를 울리며 馬車(마차)는간다 馬車(마차)는간다
저산골을 돌아가면 내 故鄕(고향)이다
이랴 어서가자 이랴 어서가자
구름이 둥실대는 고개를
구불 구불 구불 넘어간다
말방울 울리며 馬車(마차)는간다-----------------------------------------------------유노완사 전오승곡 명국환 노래<내 故鄕(고향)으로 馬車(마차)는 간다>
1251--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d
우리의 傳統慣習(전통관습)으로는 소달구지를 타고 移動(이동)을하는게 제격인데 上記曲(상기곡)에서는 말이끄는 馬車(마차)가 登場(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馬車(마차)가 있긴했지만 마치 西部映畵(서부영화)에서 나오는 말이끄는 驛馬車(역마차)를 聯想(연상)시킵니다
그 驛馬車(역마차)를타고 歸鄕(귀향)길에 오르면서 benzoic-벤조-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릅니다
이러한 雰圍氣(분위기)는 分明(분명) 韓國的(한국적)인 것이아닌 西歐的(서구적) aura-아우라-입니다
Cow-boy-카우보이- Arizona cow-boy-아리조나 카우보이-
曠野(광야)를 달려가는 Arizona cowboy-아리조나 카우보이-
말채찍을 말아들고 驛馬車(역마차)는 달려간다
저멀리 indian-인디안-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너머 酒幕(주막)집 아가씨가 그리워
달려라 驛馬(역마)야 arizona cowboy-아리조나 카우보이------------------------------------------------김부해사 전오승곡 명국환노래<Arizona cowboy-아리조나 카우보이->
마치 驛馬車(역마차)를타고 indian-인디언- 북소리가 들려오는 曠野(광야)를 질주하는 카우보이들의 風景(풍경)이 펼쳐집니다
Arizona-아리조나-의 廣漠(광막)한 平原(평원)을 背景(배경)으로 한 西部映畵(서부영화)의 한場面(장면)이 生生(생생)히 浮角(부각)됩니다
물론 故鄕(고향)으로 돌아가는 cowboy-카우보이-손에는 benzoic-벤조-가 들려있습니다
1950년대 流行(유행)하던 西部映畵 image-서부영화 이미지-를 音樂(음악)으로 그대로 再現(재현)해 놓은것입니다
이처럼 歌詞(가사)에 英語(영어)를 붙이는 次元(차원)에서 벗어나 아예 西部映畵(서부영화)의 情緖(정서)와 雰圍氣(분위기)를 그대로 노래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장세정의 <San Francisco-샌프란시스코->는 場所(장소)를 美國(미국) sanfrancisco-샌프란시스코-로 옮겨 美國 靑春男女(미국청춘남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Venus 銅像(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곤대는 별그림자
金門橋(금문교) 푸른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太平洋romance-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꾸는 나는야 꿈을꾸는 America-아메리카- 아가씨-----------------------------------------손로원사 박시춘곡 장세정노래<sanfrancisco-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아가씨가 金門橋(금문교) 다리밑에서 venus 銅像(비너스 동상)을 안고 戀人(연인)과 속삭이는 貌襲(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new York-뉴욕-으로 떠나게되어 離別(이별)노래가 되고 맙니다
말그대로 아메리칸 아가씨의 太平洋romance-태평양 로맨스-를 浪漫的(낭만적)으로 謳歌(구가)한 노래입니다
이노래에서도 venus-비너스-, sanfrancisco-샌프란시스코-, American-아메리칸-, romance-로맨스- 등의 外國語(외국어)가 登場(등장)합니다
상기가요<샌프란시스코>의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서 394” 를 참조하시기 버랍니다
처음<샌프란시스코>처럼 장세정에게 줄려고 作曲(작곡)한<ameria china-town-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은 백설희씨가 취입한바 미국에있는 Chinatown-차이나타운-의 中國(중국)아가씨가
胡弓(호궁)을 울리며 故鄕(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America-아메리카-他國(타국)땅에 china-차이나-거리
Lanthan-란탄-등불 밤은깊어 바람에 깜박깜박
라이라이 胡弓(호궁)이운다 라이라이 胡弓(호궁)이운다
검푸른 실눈썹에 故鄕(고향)꿈이 그리워
太平洋(태평양)바라보면 꽃구름도 바람에
깜박깜박 깜박깜박 깜박깜박 깜박깜박
아~애달픈 china-차이나-거리
America-아메리카-他國(타국)땅에 china-차이나-거리
귀걸이에 情(정)은깊어 노래에 깜박깜박
라이라이 꾸낭이운다 라이라이 꾸낭이운다
牧丹(목단)꽃 옷소매에 故鄕(고향)꿈이 그리워
저하늘 building-빌딩-위에 초생달도 노래에
깜박깜박 깜박깜박 깜박깜박 깜박깜박
아~애달픈 china-차이나-거리--------------------------------------------------------------------------------------손로원사, 박시춘곡 백설희<America Chinatown-아메리카 차이나타운->
牧丹(목단)꽃 옷소매를 날리며 胡弓(호궁)을켜는”꾸냥”의 愛妻(애처)러운 貌襲(모습)을 애잔한 가락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라이라이 胡弓(호궁)이운다”는 歌詞(가사)를 反復使用(반복사용)하여 中國少女(중국소녀)의 貌襲(모습)을 生生(생생)하게 再現(재현)하고 있습니다
상기곡<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은 “종횡무진가요사 630”에 상세히 설명되 있습니다
1252—異國趣向(이국취향)의 유행가-e
이러한 流行(유행)은 一種(일종)의 “異國趣向(이국취향)” 現像(현상)으로 솔직히 認定(인정)하기 싫지만 美國文化(미국문화)에대한 文化complex- 문화 콤플렉스-의 發露(발로)로 볼수밖에 없습니다
좀더 異國的(이국적)이고 美國的(미국적)인 情緖(정서)를 喚起(환기)시켜 무언가 高級(고급)스럽고 異色的(이색적)인 雰圍氣(분위기)를 演出(연출)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1950년대 美國文化(미국문화)의 衝擊(충격)과 模倣(모방)이 어쩔수없이 1950년대 韓國歌謠界(한국가요계)의 한흐름으로 자리잡았다고하는 主張(주장)에 反駁(반박)하기 쉽지않습니다
이러한 이국취향 흐름은 美國(미국)뿐만 아니라 asia-아시아- 및 西歐風(서구풍)으로 擴散(확산)됩니다
미국적인 분위기 연출이 비록 低質論難(저질논란)을 가져왔지만 決論的(결론적)으로 興行(흥행)에 成功(성공)하자 그地域(지역)을 asia-아시아-및 西歐(서구)로까지 확장시킵니다
홍콩, 印度(인도), persia-페르시아-, 그리고 Europe-유럽-으로까지 擴張(확장)시킵니다
금사향의<홍콩아가씨> 심연옥<홍콩의밤>현인<印度(인도)의향불> 허민의<Persia 王子(왕자)> 윤일로<내가울던 paris-파리-. 등이 이흐름의 代表曲(대표곡)입니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야 꿈을꾸며 꽃파는 아가씨
그꽃만 사가시니 그리운 英蘭(영란)꽃
아~꽃잋같이 多情(다정)스런 그사람이면
그가슴에안겨 가고싶어요------------------------------------------------------------------------------------------------손노현사 이재호곡 금사향노래<홍콩아가씨>
上記曲(상기곡)은 홍콩의 밤거리에서 꽃파는 아가씨의 애달픈 모습을 그린노래입니다
비록 밤거리에서 꽃을 팔고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純情(순정)만은 아름답다는 글이 보입니다
꽃파는 아가씨의 淸純(청순)한 愛情(애정)을 浮角(부각)시켜 大衆的(대중적) 呼訴力(호소력)을 刺戟(자극)하는 販賣戰術(판매전술)을 驅使(구사)하는 노래입니다
華麗(화려)한 홍콩의밤과 거리에서 꽃파는 아가씨를 對照(대조)시켜 共感帶(공감대)를 擴散(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노래의 興行(흥행)에 힘입어 홍콩노래의 姉妹編(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심연옥의<홍콩의밤>이 등장합니다 아니 등장시킵니다
태징소리 밤埠頭(부두)에 搖亂(요란)스런 홍콩의 밤
보내면서 來(라이) 來(라이) 來(라이) 떠나면서 라이라이 서러웁고나
Plattan-플라탄- 그늘아래 조각달이 비켰고나
아~ 음 외로이 저문날에 街路燈(가로등) 깜박깜박
누굴보고 비웃느냐-------------------------------------------------------------------------------------------------이향노사 나화랑곡 심연옥노래<홍콩의밤>
이노래는 홍콩埠頭(부두)를 背景(배경)으로 離別(이별)을 노래한 가요입니다
이향노씨가 손로원 作詞(작사)의<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의 노래 歌詞中(가사중) 中國語(중국어)인<라이 라이>를 차용해서 창작하고 있음이 特異(특이)합니다
“태징소리”가 울리면서 임과 헤어져야만 합니다
“보내면서 라이라이<또오세요> 떠나면서 라이라이”처럼 中國語句(중국어구)를 揷入(삽입)하여 홍콩의 異國的(이국적)인 雰圍氣(분위기)를 자아내려 하고있습니다
“라이- 來-“는 돌아오라는 뜻의 中國語(중국어)로 비록 지금 헤어 지더라도 반드시 돌아올것을 期約(기약)하는 人事(인사)말입니다
玄仁(현인)의<印度(인도)의 香(향)불>은 asia風(아시아풍)의 鄕愁(향수)를 刺戟(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노래는 beloro-볼레로-의 變形 rhythm-변형리듬-을 사용하여 異彩(이채)를 띠었고 그래서 더욱 大衆(대중)의 好奇心(호기심)을 도 이국적분위기를 刺戟(자극)했습니다
孔雀(공작)새 날개를 휘감는 念佛(염불)소리
Ganges- 江(간지스 강) 푸른물에 찰랑거린다
무릎꿇고 하늘에다 두손비는 indian 處女(인디안 처녀)
Pagoda-파고다-의 사랑이냐 향불의 노래냐
아~깊어가는 印度(인도)의 밤이여---------------------------------------------------------------------------손노원사 전오성곡, 현인노래<印度(인도)의 향불>
이노래는 indian 處女(인디안-처녀)가 벵갈寺院(사원)에서 念佛(염불)을 외며 所願(소원) 을 비는 內容(내용)입니다
1253—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f
椰子樹(야자수) 잎사귀 무더운 저녁바람
벵갈寺(사)의 종소리에 애달퍼진다
風角(풍각)소리 자르메라에 춤을추는 india處女-인디아 처녀-
Pagoda-파고다-의 사랑이냐 향불의 노래냐
아~깊어가는 印度(인도)의 밤이여----------------------------------------------------------------------------------------------<인도의향불> 2절
“孔雀(공작)새, gaanges 江(간디스 강), pagoda-파고다-, 椰子樹(야자수), 벵갈寺(사), 자르메라” 등 낯선 素材(소재)를 등장시켜 異國情緖(이국정서)를 물씬 풍기고 있읍니다
특히”자르메라”라는 管樂器(관악기)로 반주를 넣어 音律自體(음률자체)도 異色的(이색적)인 가락과 樂風(악풍)을 演出(연출)하고 있습니다
“자르메라”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韓國最初創作歌謠(한국최초창작요) “<落花流水(낙화유수)>”를 부르고 춘사 나운규의 영화<아리랑>이 開封(개봉)되었을 때 뮤직박스에서 “主題歌(주제가)”를
부르기도 한 이정숙이 上記題目(상기제목)으로 노래를 1929년 Columbia-record 에서發表(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노래는 一名(일명) <鍾路(종로)네거리>라고도 하고 채규엽이부른 同名異曲(동명이곡) 이존재하기도 합니다
“노래를 부른 玄仁(현인) 특유의 vibration-바이브레이션-唱法(창법)도 異國的(이국적)雰圍氣(분위기)를 演出(연출)하는데 成功(성공)하고있다”는 글도 보입니다
별을보고 占(점)을치는 페르사 王子(왕자)
눈감으면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
가슴에다 불을놓고 재를 뿌리는
Arabia 公主(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의 公主(공주)
오늘밤도 외로운밤 별빛이 흐리다--------------------------------------------------------------------손로원사 한복남곡 허민노래<페르샤 王子(왕자)>
이곡역시 異國情緖(이국정서)를 刺戟(자극)한것인데 페르샤왕자와 아라비아 공주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占(점)을치는 페르샤왕자와 魔法師(마법사)公主(공주)를 登場(등장)시켜 좀더 神秘(신비)하고 이국적인 정서를 聯想(연상)시키고 있읍니다
樂風(악풍)도 islam風(이슬람풍)의 노래로 作曲(작곡)하여 異彩(이채)를 띠고있읍니다
노래를 진행하는 主要(주요) rhythm-리듬-은 trot-트로트-이나 노래 導入部(도입부)나 間奏(간주)에 伴奏音(반주음)을 내기위해 使用(사용)한 樂器(악기)가 풍겨주는 雰圍氣(분위기)가
異國趣向(이국취향)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곡 亦是(역시)도 多樣(다양)한 樂器(악기)를 動員(동원)하여 페르시아의 분위기를 演出(연출)하는데 成功(성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時期(시기) domido-record 를 運營(운영)하던 한복남이 本人(본인)이 직접 發掘(발굴)한 가수 허민에게 이곡을 作曲(작곡)해 吹入(취입)시켰습니다
남쪽나라 十字星(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눈에익은 너의모양 꿈속에보면
꽃이피고 새도우는 바다 저편에
故鄕山川(고향산천) 가는길이 故鄕山川(고향산천)가는길이 절로보이네------------------------------------------------유호사 현인곡 현인노래<故鄕萬里(고향만리)>
상기곡 <故鄕萬里(고향만리)>는 앞선 “종횡무진가요사”에서 이미 설명했으니 해당란을 참고바랍니다
이노래는 發表當時(발표당시)와 1960년대 우리 軍人(군인)들의 越南派兵(월남파병)이 박정희 獨裁政權(독재정권)의 强制(강제)動員(강제동원)으로 이루어졌을떄 또다시 大衆(대중)들과
派兵(파병)된 軍人(군인)들 사이에 불려나옵니다
越南(월남)의 밤하늘에 뜬 南十字星(남십자성)을 보며 두고온 故國(고국)의 父母兄弟(부모형제)들을 그리워하며 불렀습니다
1254—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g
그리고 그렇게 그리던 故國(고국)의 父母兄弟(부모형제)를 끝내 다시만나지 못한체 越南(월남)땅에 뼈를묻은 수많은 軍人(군인)들이 발생합니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위해 그곳에서 개죽음을 당했는지요??
박정희의 獨裁政權(독재정권)의 延長(연장)을 위해서?? 아님 生前(생전) 往來(왕래)도없든 남의나라 越南(월남)의 허울좋은 平和守護(평화수호)을위해서?? 아님 몇푼의 돈을위해서?
어이없게도 派越韓國軍(파월한국군) 은 勇猛(용맹)을 떨쳤으며 그들이 목숨을 代價(대가)로 故國(고국)으로보낸 dollar-달러-는 韓國經濟振興(한국경제진흥)에 크게이바지했다는
無責任(무책임)한 글이보입니다
經濟發展(경제발전)도 좋지만 한나라의 새파란 젊은목숨을 犧牲(희생)시켜 가면서까지 해야한다고 國民(국민)들 그누구도 同意(동의)해주지 않았음을 알아야합니다
그時期(시기) 우리나라에선 勇猛(용맹)하다 치켜세웠으나 韓國軍(한국군) 은 베트남국민들에게는 그殘忍(잔인)함으로 인해 恐怖(공포)와 憎惡(증오)의 對象(대상)이었고 國際的(국제적)으로
反戰運動(반전운동)이 크게일어났을 때 美國(미국)에돈받고
代身(대신) 싸워주는 “美國(미국)의傭兵(용병)”이란 우리 民族(민족)으로선 恥辱的(치욕적)인 非難(비난)을 國際的(국제적)으로 받았으나 强力(강력)한 言論統制(언론통제)로
一般國民(일반국민)들은 알지못했습니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4월 남베트남정부가 그렇게 미국의 大幅的(대폭적)인 支援(지원)이있었으나 북베트남에 無條件(무조건) 降伏(항복)함으로써 남베트남의 平和(평화)를 守護(수호)한다는
名分(명분)으로 派越(파월)했던 한국의 정부는 아무런 소득없이 수많은 젊음목숨만 희생시켰다는 國內外(국내외) 非難(비난)에 고개숙여야했고 派兵(파병)을 一方的(일방적)으로 決定(결정)한
박정희 獨裁政權(독재정권)의 가장큰 汚點(오점)으로 남게됩니다
이전쟁으로 인하여 韓國軍(한국군) 은 명분없은 수많은 犧牲者(희생자)를 냈으며 參戰兵士(참전병사)들은 肉體的(육체적)으로나 精神的(정신적)으로 깊은 傷處(상처)를 입었고 베트콩을
全滅(전멸)시키려는 미군의 枯葉作戰(고엽작전)에 따라
無分別(무분별)하게 뿌려졌던 枯葉劑(고엽제)에서 나온 猛毒性(맹독성) 다이옥신 때문에 베트남의 大地(대지)와 農民(농민)들의 肉體(육체)가 汚染(오염)되었고 韓國軍(한국군)에게도
深刻(심각)한 被害(피해)를주어 參戰兵士(참전병사)들은 오랫동안 枯葉劑後遺症(고엽제후유증)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韓國士兵(한국사병)과 베트남 女性(여성) 사이에 생긴 私生兒(사생아) 이른바”라이따이한”문제도 深刻(심각)한 과제로 남겨졌습니다
좋게 表現(표현)해서 베트남여성과 사귄후 돌보지않아 생긴 私生兒(사생아)로 한국의 image-이미지-에 돌이킬수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내가울던 paris-파리- lilac-라일락-꽃은 피었건만
또다시 피었건만
Paris-파리-의 지붕밑에 거닐던 그대여
只今(지금) 어디 사라졌나
사랑의 Madonna-마돈나-여
내가울던 paris-파리- 내가울던 파리
눈물의 追憶(추억)만 남아 또다시 울던 paris-파리----------------------------------------------------------------------------손로원사, 하기송곡 윤일로노래<내가울던 paris-파리->
<내가울던 paris-파리->는 上記題目(상기제목) “異國趣向(이국취향)의 流行歌(유행가)”에 잘어울리는 歌謠(가요)입니다
國內歌謠(국내가요) 치고는 異國的(이국적)인 Skating waltz-스케이팅 왈츠-rhythm-리듬-으로 歌唱(가창)되는 大衆歌謠(대중가요)입니다
이가요는 特異(특이)하게도 파리로 空間(공간)을 設定(설정)하여 paris-파리-의 지붕밑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Madonna-마돈나-와의 追憶(추억)을 노래한 歌謠(가요)입니다
Lilac-라일락-꽃 香氣(향기) 날리는 파리의거리 高層building-고충빌딩- 지붕밑에서 속삭이던 마돈나와의 사랑등 素材自體(소재자체)가 異國的(이국적)입니다
Paris-파리-의 길거리가 映畵(영화)의 한 場面(장면)처럼 펼쳐집니다
이곡을 發表(발표)한 歌手(가수) 윤일로는<越南(월남)의달밤>을 노래하여 派越將兵(파월장병)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노래 亦是(역시) 異國情緖(이국정서)를 刺戟(자극)하는 노래입니다
南南(남남)쪽 섬의나라 越南(월남)의 달밤
十字星(십자성) 저별빛은 어머님 얼굴
그누가 불어주는 harmonica-하모니카-냐
아리랑 melody-멜로디-가 鄕愁(향수)에 젖네 가슴에졌네
熱帶魚(열대어) 꼬리치는 Saigon 埠頭(사이공 부두)
珊瑚燈(산호등) 아롱다롱 물에어리면
카누에 실어보는 그님의 노래
떠나온 水陸萬里(수륙만리) 아득한 故鄕(고향) 그리운 山川(산천)------------------------------------------------------반야월사, 김성근곡 윤일로노래<越南(월남)의달밤>
1966년경 발표된 이곡은 歌詞中(가사중) “섬의나라”句節(구절)이 베트남의 實定(실정)과 맞지않다는 指摘(지적)이 나오자”머나먼 나라”로 歌詞(가사)를 바꾸어 다시 音盤(음반)을 再(發賣(재발매)
하기도 했습니다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사 546> 참조바랍니다
1255--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과 變容(변용)-a
美國(미국)을 중심으로 한 西洋音樂(서양음악)은 이미 193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jazz-재즈-는 1930년대 俳優出身(배우출신) 복혜숙에 의해서 受容(수용)되었는데 ”그대그립다”등 4편의재즈를”時代要求(시대요구)의 재즈”라는 타이틀을걸고 出盤(출반) 된바 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이 아예 “cmc swing jazz band-스윙재즈 밴드-“ 를 결성하여 활동한 것을 보면 韓國大衆音樂史(한국대중음악사)에서 재즈의 受容(수용)은 1930년대에 일찍 자리 잡았음을 알수있읍니다
이난영이 최초 日本式 blues- 일본식 블루스-를 脫皮(탈피)한곡<茶房(다방)의 푸른꿈>, 채규엽이<花柳愛情(화류애정)>이 불려지고 1930년대 主流音樂(주류음악)이던 漫謠(만요)에 까지 재즈가
파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재즈는jazz-song-재즈송-이라는 樣式(양식)으로 1930년대 主流音樂(주류음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서양음악의 주류인 blues-블루스-역시 이인권의<seoul blues-서울 블루스->을 필두로 박향림의<鄕愁(향수)의 blues-블루스-> 이난영<알아 달라우요> 신카나리아<船艙(선창)blues-블루스->
처럼 아예”blues-블루스-“라는 genre 名稱(장르명칭)을 달정도로 普遍的(보편적)이었습니다
병아리 면두-볏-같이 연붉은 마음
가슴에 맺힌事緣(사연) 풀길이없어
옷고름 매만지며 가슴 태우네
어쩌면 고렇게도 몰라주나요 네
알아 달라우요
활짝핀 젊은가슴 달래 주구려
맘에난 간직하고 말을 못건네
눈웃음 지ㅡ면서 눈물 앞서네
어쩌면 고헣게도 몰라주나요 네
알아 주랑께---------------------------------------“3~4절 생략”----------------------------------------------------------------박영호사, 김송규곡 이난영노래<알아 달라우요>
tango-탱고-도 강홍식, 안명옥의<名物男女(명물남녀)> 김정구<울어라 saxophone-색스폰-> 황금심<追憶(추억)의tango-탱고-> 에서 보듯이 1930년대 大衆音樂(대중음악)의 한 흐름이었습니다
비록 1940년대전후 일본이 미국과의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敵性國家音樂(적성국가음악)이란 이유로 禁止曲(금지곡)으로 指定(지정)해 버렸지만 jazz-재즈- blues-블루스- tango-탱고-
등 美國中心(미국중심)의 西洋音樂(서양음악)이 일찍이 韓國大衆歌謠(한국대중가요)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西洋音樂(서양음악)의 流行(유행)은 1950년대 美軍駐屯(미군주둔)과 美軍文化(미군문화) 移入(이입)으로 本格化(본격화) 됩니다
서양음악, 미국음악은 實際(실제)로 genre-장르-rhythm-리듬- melody-멜로디-를 통해 本格的(본격적)으로 受容(수용)됩니다
블루스-blues- 재즈-jazz- 탱고-tango- 폴카-polk-= 는물론 부기우기-boogie woogie- 맘보-mambo-, 챠챠챠-cha cha cha- 등 當時(당시) 美國(미국)에서 유행하던 大衆音樂(대중음악)樣式(양식)들이
大擧(대거) 한국땅에 移入(이입)되기에 이릅니다
먼저 blues-블루스-를 살펴보면 블루스는 미국의 南北戰爭後(남북전쟁후) 미국 南部(남부)에서 불려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남부 黑人(흑인)들사이에서 사랑받던 노래였습니다
Africa-아프리카- gungle 地代(정글지대)에서 奴隸(노예)로 끌려오기전 그곳서 불렸던 것이 오리지널 입니다
黑人(흑인) 勞動謠(노동요)와 靈歌(영가), 敎會音樂(교회음악)등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黑人靈歌(흑인영가)가 直接的(직접적)입니다
美國南部(미국남부)의 農家(농가)에서 일하던 强制(강제)로 끌려온 黑人奴隸(흑인노예)들이 農場主人(농장주인)인 白人(백인)들의에 의하여 自行(자행)되던 無慈悲(무자비)한 勞動(노동)의
苦痛(고통)을 治癒(치유)하고 靈魂(영혼)을 달래기위하여 불렀던것입니다
처음에는 專門歌手(전문가수) 가 아닌 奴隸(노예)들의 고달프고 恨(한)서린 삶을 울부짓듯 노래하는 無伴奏(무반주) 노래였으나 차츰 banjo-밴조-나 guitar 伴奏(기타반주) 를 사용하게됩니다
紀錄(기록)으로보면 1912년 黑人band leader-흑인밴드리더-요 father of blues-블루스의 아버지-로 불라던 w.c 핸디의<Memphis blues-멤피스블루스->가 出盤(출반) 되면서 blues-블루스-란
名稱(명칭)이 普遍化(보편화)됩니다
1256—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과 變容(변용)-b
블루스는 단순하면서도 표현력이 풍부하여 1960년대 미국대중음악의 中心 genre-중심장르-로 자리잡게 됩니다
日帝時代(일제시대) 國內(국내)에 이입되어 流行(유행)한 blues-블루스-는 마침내 해방을거치면서 1950년대 韓國歌謠(한국가요)의 中心 genre-중심장르-로 자리잡습니다
비록 크게 hit-히트,-하지놈 못했지만 백설희<無情blues-무정 블루스-> 안정애의,daejun blues-대전블루스-> 나애심< missa-미사-의종> 옥두옥<靑春blues-청춘블루스->
이숙희<釜山blues-부산블루스-> 이남순<歎息의 blues-탄식의 블루스-> 등 아예 曲名(곡명)을 “blues-블루스-“라는 名稱(명칭)을 붙일정도로 普遍化(보편화)됩니다
일제시대 流行(유행)한 블루스는 1930년대후반 日本(일본)에 定着(정착)된 日本式blues-일본식 블루스- 소위 和製blues-화제블루스-의 影向(영향)이 컸습니다
解放後(해방후) 블루스는 美軍駐屯(미군주둔)과 맞물린 美國blues-미국블루스가 影向(영향)을 주었습니다
興味(흥미)로운 것은 블루스에는 地名(지명)을 붙인곡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전블루스> <목포블루스> <군산블루스> <대구블루스> <서울블루스> <인천블루스> <부산블루스> 등 全國大都市(전국대도시) 이름이 망라된 地域名(지역명) 이 붙어있습니다
이러한 現像(현상)은 各地域(각지역) 의 特性(특성)을 살려 人氣(인기)를 모으는 地方化(지방화) 戰略(전략)이기도 했지만 localism-지역성-의 特化(특화)라는 大衆歌謠(대중가요)의 順機能(순기능)을
發揮(발휘)한 側面(측면)도 있습니다
이중에서 “大田blues-대전블루스-“는 흥행에 크게성공하여 “blues 歌謠(블루스가요)의 代名詞(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이노래를 발표한 안정애는 이남순에 이어시 “queen of blues-블루스의 女王(여왕) ”이라는 榮光(영광)스런 呼稱(호칭)을 얻게되기도 했습니다
잘있거라 나는간다 離別(이별)의 말도없이
떠나가는 새벽列車(열차) 大田發(대전발) 零時(영시) 五十分(오십분)
世上(세상)은 잠이들고 고요한밤’나만이 소리치며 울줄이야
아~아~붙잡아도 뿌리치는 木浦行(목포행) 緩行列車(완행열차)----------------------------------------------------최치수사 김부해곡 안정애노래<大田blues-대전블루스>
이가요는 1950년대후반 당시 무명의 가수였던 안정애를 一躍(일약) 人氣star-인기스타- 班列(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새벽 0시 50분에 木浦(목포)로 향해 떠나는 緩行列車(완행열차),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뿌리치며 離別(이별)하는 아픔이 切切(절절)히 묻어납니다
노래의 人氣(인기)에 便乘(편승)하여 1963년경 노래 歌詞(가사)에서 題目(제목)을 따와<大田(대전)발 零時(영시)五十分(오십분)>이라는 映畵(영화)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99년 大田驛 廣場(대전역광장)에 노래비까지 세워진 것을 보면 이노래의 大衆的人氣(대중적인기)를 엿볼수있습니다
<missa-미사-의종>을 부른 나애심은 husky voice-허스키보이스-로 굵고 거친 音色(음색)을 소화하여 마치 黑人歌手(흑인가수) 노래부르는듯 着角(착각)을 주곤했습니다
이곡은 허스키보이스의 굵고거친 음색이 特色(특색)인데 黑人靈歌(흑인영가)와 blues rhythm-블루스리듬-을 混合(혼합)한 노래입니다
말하자면 black blues-블랙블루스-인셈입니다
이러한 나애심의 허스키한 blues 音色(블루스음색)은 1960년대 한명숙등으로 그계보가 이어졌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Mambo-맘보-는 1950년대를 춤바람시대로 轉落(전락)시킨 dance 曲(댄스곡)입니다
이리듬은 쿠바인들이 개발한 춤곡으로 1940년대 말 世界的(세계적)인 流行(유행)을 탔습니다
처음 음악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orestes-오레스테즈-와cacholopez-카초 로페즈-의 mambo-맘보-에 의해서 였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대 후반에perez prado-페레즈 프라도-에 의해서 dance 音樂(댄스-음악)으로 발전 하였습니다
이런 mambo音樂(맘보-음악)이 1950년대 춤바람의 流行(유행)과함께 韓國(한국)의 代表的(대표적)인 大衆音樂(대중음악)으로 떠올랐습니다
춤바람의 代名詞(대명사) 이름을 날린”自由夫人(자유부인)”이 추던춤도 바로 mambo-맘보-였습니다
“맘보바지”는 물론”맘보 caramel-캬라멜-”까지 流行(유행)했던 것을 보면 맘보춤의 偉力(위력)을 엿볼수있읍니다
그야말로 1950년대는 mambo 時代(맘보-시대)였던 것입니다
1257--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과 變容(변용)-c
서울의 거리를 맘보가락으로 흐르게한 張本人(장본인)은 페레즈 프라도악단의<cherry pink mambo-체리 핑크맘보->였습니다
King of mambo-맘보의왕- 페레즈 파라도는 latin dance 烈風(라틴댄스열풍)의 主人公(주인공) 이기도 합니다
黑人(흑인)들이 많이사는 쿠바의 마탄사스에서 태어나 latin 音樂(라틴음악)의 dance- 曲(댄스곡)의 先驅者(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곡을 歌手玄仁(가수현인)이 飜案曲(번안곡)으로 불러 1950년대 mambo boom-맘보붐-의 震央地(진앙지)가 됩니다
물론<바닷가에서><사랑이 메아리칠떄><悲劇(비극)은 없다>등을 힛트시킨 안다성씨도 <shoeshine-boy-슈사인보이-><아리랑 牧童(목동)>의 박단마씨도 飜案吹入(번안취입)에 合流(합류)했습니다
아름다운 복사꽃-桃花(도화)- 귀엽게 피어날적에
그대와 거닐던 그날에 rendezvous-랑데부-
아름답던 복사꽃 귀엽게 피어 날적에
그대와 거닐던 그날을 잊었나요
Cerisiers roses-세레사 롯사- cerisiers roses-세레사 롯사-
어여쁜 roses-롯사-그때를 잊었나요
Come back to me------------------------------------------------- 玄仁(현인) 改詞(개사), 노래 <cherry pink mambo-체리핑크맘보>
상기곡은Jacques larue-자크라루- 作詞(작사) pierre louiguy-피에르 루이기- 作曲(작곡)의<cerisiers roses et pommiers blancs> 이 原曲(원곡)입니다
이곡을 맥데이비드가 cherry pink mambo 로 이 英譯(영역), 改題(개제) 했습니다
처음 앙드레클라보가 불렀으나 한국에는 오히려 이베트지로 버전이 알려졌습니다
노래만 들어도 흥에겨워 춤동작을 일으키게하는 輕快(경쾌)한 rhythm-리듬-의 dance 曲(대스곡)입니다
현인이 곡을 發表(발표)할무렵 서울의거리는”어여쁜 롯사” “세레사소사”가 占領(점령)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종행무진가요사336~340>를 참조바랍니다
후에 제임스라스트악단의 연주로 더 유명해집니다
Mambo曲(맘보곡)으로는 전영주<아리랑 맘보> 김정애<닐리리맘보><아낙네맘보> 황금심<春香(춘향)이 맘보> 한복남<mambo 打令(맘보타령)> 김근자< 靑春(청춘)맘보>등이 있습니다
Tango-曲(탱고곡) 으로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황금심의 <追憶(추억)의탱고> 현인, 도미의<tango of rain-비의탱고-> 남일해<tango of autumn-낙엽의탱고> 한정무, 안다성의 臺詞(대사)가
哀切(애절), 華麗(화려)한 <에레나가 된 순희>, 안다성<bohemian tango-보헤미안 탱고><good-bye tango-굿바이 탱고>, 현인의<離別(이별)의 tango-탱고->등이 代表的(대표적)입니다
Mambo-boom-맘보붐-은 trot-트로트-나 dance 曲(댄스곡) 뿐만 아니라 傳統民謠(전통민요)까지 浸透(침투)하여”民謠mambo-민요맘보-“라는 fusion- 曲(퓨전곡) 까지 誕生(탄생)시킵니다
<아리랑 맘보><닐리리맘보><도라지맘보>< 太平歌(태평가)맘보><陽山道(양산도) 맘보>가 그것입니다
우리민요가락 mambo-rhythm-맘보리듬-을 接木(접목)시켜 獨特(독특)한 樣式(양식)의 춤곡이 등장하게 된것입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深深山川(심심산천)에 백도라지
도라지 캐러가세 hey mambo-헤이맘보-
바구니 옆에끼고 hey mambo-헤이맘보-
봄바람에 님도볼 겸 치맛자락 날리면서
도라지를 캐러가세 hey mambo-헤이맘보-
님보러가세 도라지 맘보
봄바람 불어오는 深深山川(심심산천)에
한두뿌리만 캐어도 hey mambo-헤이맘보-
대바구니 찬대요 hey mambo-헤이맘보-----------------후반부 생략-------------------------------------------------나화랑사,곡 심연옥노래<도라지 mambo-맘보->
1258—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과 變容(변용)-d
상기곡<도라지 mambo-맘보->는 民謠(민요)인 “도라지”가락과 mambo rhythm-맘보리듬-의 歌詞(가사)를 접목시켜 기묘한 rhythm 과 雰圍氣(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洋服(양복)쟁이 에서 가요를 定式(정식)으로 工夫(공부)하지 못하고 獨學(독학)으로 作曲法(작곡법)을 攄得(터득)한 한복남의 才致(재치)가 돋보이는 가요입니다
이러한 fusion音樂(퓨전음악) 의 試圖(시도)는 그만큼 맘보가 그시기 流行(유행)을 탔다는 證據(증거)일뿐 아니라 우리민요가락과 相互接木(상호접목)할 수 있는 樣式(양식)임을 立證(입증)
한것으로 意義(의의)가있습니다
어찌보면 民謠(민요)의 現代的變容(현대적변용) 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비록 mambo-맘보-가 dance曲(댄스곡)으로 頹廢的(퇴폐적)인 時流(시류)를 타고있지만 民謠(민요)가락의 새로운면을 찾았다는점에서 肯定的(긍정적)인 評價(평가)를 하는 專門家(전문가)도 있을것입니다
이처럼 맘보는 傳統的(전통적)인 민요가락이나 1930년대 漫謠(만요)의 技能(기능)까지 수용하는 可變性(가변성)과 包容性(포용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歌謠評論家(가요평론가) 누군가가 맘보는 “노래의 萬病通治藥(만병통치약)”이라고 批判(비판)했듯이--- 이뜻은 無分別(무분별)하게 맘보가 創作(창작)되고 그럼으로해서 低質(저질) 맘보가 量産(양산)되는 것을 警告(경고)한 말로 理解(이해) 해야합니다
좀더 詳細(상세)히 들여다보면 대중문화평론가 황문평씨는 이시기 發表(발표)된 탱고풍노래에 대해
Melody-멜로디-구성은 舊態依然(구태의연)하면서 rhythm-리듬-만 mambo-맘보-이면 되는듯 “노래의 萬病痛治藥(만병통치약)”같은 구실을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外國商品(외국상품)이 좋다고하면 無條件(무조건) 模倣(모방)하여 模造品(모조품)을 만들어내듯, disc-디스크-제작 또한 예외일수는없는 消費文化(소비문화)製品(제품)으로 包裝(포장) 되어
갔다고 評(평)했습니다
어느병에나 제대로된 處方(처방)도않고 無差別使用(무차별사용)되는 萬病通治藥(만병통치약)처럼 mambo-맘보- 流行(유행)에 便乘(편승)하여 대충만들어 한몫 잡아보려는 맘보의 低質化(저질화)를
念慮(염려)한 말입니다
어떤 한가지약을 藥效(약효)는 無視(무시)하고 이병저병에 無差別使用(무차별사용)하는 行爲(행위)를 ‘만병통치약처럼” 이란 表現(표현)을 하듯 맘보에 전혀 관련이없는 노래들도 맘보처럼 꾸며
마치 萬病通治藥(만병통치약) 使用(사용)하듯 音盤化(음반화)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것으로 解釋(해석)해야 합니다
맘보-MAMBO-가 大流行(대유행)하자 歌謠(가요)에 專門智識(전문지식) 많치않은 非專門家(비전문가)들이 그저 mambo名稱(맘보명칭)만 붙여서 國籍不明(국적불명) 完成度(완성도)낮은 맘보곡을
音盤化-음반화- 해서 韓國歌謠(한국가요)의 水準(수준)을 떨어뜨린 mambo 流行(맘보유행) 後遺症(후유증)이 있었음을 꼬집고 있는것입니다
“그만큼 可變性(가변성)과 多辯性(다변성)을 內在(내재)한 cross over music-크로스오브뮤직-으로서의 特徵(특징)을 드러낸 양식이었다”고 이 批判(비판)을다르게 解釋(해석)하는 글도보입니다
CHA CHA CHA-차차차-는 원래 latin ameria dance-라틴아메리카 댄스-에 속하는 춤입니다
“cha cha cha-차차차-란 명칭은 이춤을 출 때 연주하는 곤봉처럼 생긴 樂器(악기)이름이 “cha cha-차차-“였기 때문에 생긴것입니다
Cha cha 樂器(차차악기)는 carib 地域(카리브지역)에 자라나는 차차나무에서 만들어져 由來(유래)된것입니다
Cha cha cha-차차차-역시 맘보에 바탕을두고 있습니다
1940년대 쿠바에서 시작된 mambo rhythm-맘보리듬-을 쿠바의 작곡가 enrich jorrine-엔리크 조린-이 느리게 연주하면서 cha cha cha-차차차-라는 춤곡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가수이미자, 남백송의 데뷔곡을 작곡해준 김성근이 新民謠天才歌手(신민요천재가수) 황정자에게 취입시킨<노랫가락 cha cha cha-차차차->를 筆頭(필두)로 1950년대말 차차차는 대유행을 탔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
人生(인생)은一場春夢(일장춘몽)이요 아니놀지는 못하리라
노세노세 젊어서놀아 늙어지면은 못노나니
化無(화무)는 十日紅(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
얼시구 절시구 cha cha cha –차차차-지화자 좋구나
花爛春城(화란춘성) 萬化方暢(만화방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Cha cha cha-차차차- cha cha cha-차차차-------------------------------------------------------------------김영일 보사 김성근 편곡 황정자 노래<노랫가락 cha cha cha-차차차->
이곡은 新民謠風(신민요풍)에 cha cha cha-rhythm-차차차 리듬-을 混合(혼합)한 퓨전곡이고 吹入歌手(취입가수) 황정자는 新民謠歌手(신민요가수)로서 自身(자신)의 特技(특기)를 살려 먼저
口傳民謠(구전민요) <노랫가락>의 한대목을
口傳民謠風(구전민요풍)으로 부른뒤 김성근이 편곡한 cha cha cha- rhytm-차차차-리듬-으로 불러서 色(색)다른맛을 보였습니다
그밖에 김용만의<情熱(정열)의 차차차> 안정애<춤바람 차차차>가 代表的(대표적)입니다
1259—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과 變容(변용)-e
Boogie woogie-부기우기-도 1950년대 춤곡을 이끌던 代表的(대표적) dance 曲(댄스곡)입니다
부기우기는 piano-피아노-를 基盤(기반)으로 한 blues style-블루스스타일-의 음악이고 打樂器的(타악기적) 要素(요소)가 强調(강조)되는 特徵(특징)을 갖고있습니다
19세기말 texas 地方(텍사스지방)에서 由來(유래)되어 Chicago-시카코-등 미국으로 퍼진 양식입니다
윤일로의<guitar boogie-기타부기->가 代表的(대표적) 노래임은 많이들 아십니다
이곡의 대힛트에 힘입어 신카나리아의<勝利boogie-승리부기-> 박재란<도라지 boogie- 부기->김용만<대포집부기> 이갑돈<rmance boogie woogie-로맨스 부기우기>등이 널리 불려졌습니다
신나는 rhythm-리듬- 달콤한 melody-멜로디-
Boogie-부기-의 노래는 希望(희망)의 노래다-
못생긴 눈물을 걷어치고 웃으며 나갑시다
기막힌 表情(표정)을 그만두고 즐거운 이노래를 부릅시다
노래하자 boogie woogie-부기우기- 希望(희망)의 노래를
젊은이여 明朗(명랑)하게 너도나도 이노래를
希望(희망)의 boogie woogie-부기우기- 마음껏 부르면서 가잔다--------------------------------------------------------------유호사, 박시춘곡 신카나리아 노래<勝利boogie-승리부기->
輕快(경쾌)한 boogie woogie-부기우기- rhythm-리듬-으로 創作(창작)된 이가요는 2005년 開封(개봉)된 映畵(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사용되어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Tango-탱고-역시 195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中心 genre-중심장르-입니다
탱고는 latin音樂(라틴-음악)을 대표하는 dance 曲-댄스곡- 입니다
Tango-탱고-는 원래 아르헨티나의 港口(항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모여든 Europe 移民者(유럽 이민자)들, 港口勞動者(항구노동자)들의 哀歡(애환)을 달래기위한 庶民(서민)들의 춤곡 이었습니다
그들의 鄕愁(향수)와 苦痛(고통)을 激情的(격정적)인rhythm-리듬-과 춤사위로 表出(표출)했던 것입니다
Tango-탱고-는 어둡고 무거운 音色(음색)을 지닌 强烈(강렬)한 rhythm-리듬-으로 構成(구성)됩니다
4분의2 拍子旋律(박자선율)에 accent-엑센트-를 가미하고 1분간 30여소절의 tampo-템포-를 유지하면서 哀切(애절)하면서도 强烈(강렬)한 rhythm-리듬-을 연출합니다
“네다리의 藝術(예술)”이라 부르듯이 바닥에 그림을 그리듯 탱고는 柔軟(유연)하면서도 激動的(격동적)인 춤사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탱고는 몸으로추는 춤이아니라 마음으로 추는 춤인것입니다
그래서 탕게로-남-, 탕게라-여-의 交感(교감)과 和合(화합)이 重要(중요)합니다
이러한 춤사위를 leader-리드-하기 때문에에 탱고는 다소 어려운 音樂genre-음악장르-로 區分(구분)하기도 합니다
國內(국내)엔 解放前(해방전) 流入(유입)되어 日帝時代(일제시대)에 힛트한 탱고곡으로는 황금심의<追憶(추억)의 tango-탱고->가 있습니다
Singer 玄仁(현인)의< seoul 夜曲(서울 야곡)> 송민도<나의 tango-탱고-> 한정무<눈물의 tango-탱고->는 195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 tango boom-탱고붐-을 이끈 곡들입니다
<서울야곡>은 六二五直前(육이오직전) 歌手玄仁(가수현인)이 현동주라는 본명으로 直接創作(직접창작) 인기를 모은 tango 曲(탱고곡) 이나 tango風(탱고풍) 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3년 서울還都(환도) 以後(이후)할수있읍니다
현인 原唱(원창), 도미 remake 의<tango of rain-비의탱고> 진방남의<望鄕(망향)의 탱고>등도 流行(유행)했습니다
봄비를 맞으면서 忠武路(충무로)걸어갈 때
Show window-쇼윈도-glass-글라스-에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十字星(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유호사 현동주고 현인노래<seoul 夜曲(서울야곡)>
1260—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과 變容(변용)-f
普信閣(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때에
찢어버린 便紙(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담배는
내맘같이 그대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Neon-네온-도 꺼져가는 明洞(명동)의 밤거리에
어느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Raincoat-레인코트-깃을 올리며 오늘밤도 울어야 하나
Vagabond-베가본드- 맘이아픈 seoul elegy-서울엘레지------------------------------------------------------------------------------<서울夜曲(야곡)> 2~3절
Singer 玄仁(가수 현인)이 發表(발표)한<seoul 夜曲-서울야곡-> 입니다
지금도 silver-실버- 들의 主愛聽(주애청)프로”歌謠舞臺(가요무대)”의 固定(고정) 레파토리 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名曲(명곡)일수밖에 없습니다
六二五 勃發直前(육이오 발발직전) 發表(발표)되었다는 紀錄(기록)이 있습니다
그런가요로는 六二五(육이오)한달전 發表(발표)된 박재홍의<울고넘는 박달재>도 있습니다
Tango-탱고-는 退營的(퇴영적)이고 頹廢的(퇴폐적)인 그림자, 虛無(허무)와 無常(무상)의 雰圍氣(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音樂(음악)입니다
Rhythm 自體(리듬자체)가 陰鬱(음울)한 분위기여서 그런지 歌詞(가사)도 어둡고 쓸쓸한 image-이미지-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견디기 힘든狀況(상황)인 離別(이별)과 失戀(실연)의 아픔, 지나간 靑春(청춘)과 첫사랑에대한 그리움, 아련한 추억과 悲戀(비련)등의 主調音(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陰鬱(음울)한 情緖(정서)가 1950년대 前後(전후)의 時代感情(시대감정)과 調和(조화)를 이루어 tango boom-탱고붐-을 일으키는 要因(요인)으로 작용했읍니다
그밖에 swing-스윙-, polk-폴카-, chanson-샹송-등의 西洋音樂(서양음악)등도 國內(국내)에 流入(유입)되었습니다
1950년대 社會相(사회상)을 代辨(대변)하여 人氣(인기)를 모은<shoeshine-boy-슈샤인보이->는 日帝時代(일재시대) jazz-band-재즈밴드-를 이끌던 作曲家(작곡가) 손목인이 박단마에게
吹入(취입)시킨곡입니다
swing-rhythm-스윙리듬- 에 長技(장기)를 가진 손목인이 그長技(장기)를 살려 美國 musical show- 미국 뮤지컬쇼- 音樂(음악)를 聯想(연상)시키는 곡으로 창작했습니다
singer玄仁(가수현인)이 불러서 힛트시킨<lucky seoul-럭키서울->은 輕快(경쾌)한 rhythm-리듬-의 polk-폴카-였습니다
1950년 9월28일 의 서울修復(수복)의 기쁨과 歡喜(환희)를 밝고 明朗(명랑)한 polk曲(폴카곡)으로 丹粧(단장)했습니다
“Chanson-샹송-의 女神(여신)”으로 推仰(추앙)받는 에디뜨피아프가 부른<薔薇(장미)빛 人生(인생)> 이브몽땅이부른<落葉(낙엽)>을 현인이 飜案(번안)해불러서 힛트시켜 1950년대
Chanson boom-샹송붐-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1950년대 대중음악은 미국 및 서양음악의 rhythm-리듬-을 받아들여 樂器編成(악기편성), 編曲(편곡) 演奏(연주)에 큰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야말로 서양음악, 美國(미국)大衆音樂(대중음악)의 꽃이 한국땅에 활짝꽃핀것입니다 그 低質論難(저질논란) 은 제껴두고라도-------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의 trot-트로트-는 時代現實(시대현실)의 苦痛(고통)을 受容(수용)했다면 新民謠(신민요)는 快樂的技能(쾌락적 기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와서 트로트는 같은역할을 계속맡고 新民謠(신민요)가 맡았던 快樂的技能(쾌락적기능)은 美國音樂(미국음악)이 代替(대체)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말하자면 日帝(일제) 植民時節(식민시절) 總督府(총독부)로부터 가해지는 苦痛(고통),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으로 인한 傷處(상처)의 治癒役割(치유역할)은 trot-트로트-가맡고 快樂的(쾌락적)
娛樂的技能(오락적기능)은 新民謠(신민요) 美國式音樂(미국식음악)이 分擔(분담)했다 할수있습니다
결국 1950년대 西洋音樂(서양음악)은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 前後(전후)에 한국땅을 휩쓴 춤바람문화와 密接(밀접)한 相關關係(상관관계)를 갖고있다고 할수있습니다
1261—dance 音樂(댄스음악)과 춤文化(문화)-a
돌아오는 土曜日(토요일)은 그대와 함께
단둘이서 만나기로 約束(약속)한날 이라나
그리운님 다시만날 生角(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이는 avec아베크-의 土曜日(토요일)
즐거운 土曜日(토요일) 젊은날의 土曜日(토요일)
돌아오는 土曜日(토요일)은 비가내려도
남몰래 만나기로 約束(약속)한 날이라나
아무말도 아니하고 눈짓을 하면은
그이도 벙글우는 avec-아베크-의 土曜日(토요일)
즐거운 土曜日(토요일) 젊은날의 土曜日(토요일)
돌아오는 土曜日(토요일)은 분홍치마에
꽃丹粧(단장)을 고이하고 속삭일 날이라나
그이보기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면
사랑이 타오르는 avec-아베크-의 土曜日(토요일)
즐거운 土曜日(토요일) 젊은날의 土曜日(토요일) ------------------------------------------------------------------------------------------김문응사, 박시춘곡 백설희노래<avec 土曜日(아베크 토요일)>
上記(상기)란의 “춤 文化(문화)”의 象徵(상징) <自由夫人(자유부인)>이 演劇(연극)으로으로도 상연되고 1956년 映畵化(영화화) 되었을 때 直接出演(직접출연)해서 백설희씨가 부른 노래입니다
이노래의 歌詞(가사)를 吟味(음미)해보면 분홍치마입고 꽃丹粧(단장)한 自由夫人(자유부인)이 密會(밀회)를 즐기는 貌襲(모습)이 鮮明(선명)히 떠오릅니다
“사랑이 타오르는”는 情熱(정열)의 romance-로맨스-가 펼쳐지고 있는것입니다
이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이 바로 自由(자유)夫人(부인) 일테니깐요
1954년 發表(발표)된 小說家(소설가) 정비석의<自由夫人(자유부인)>은 아직 朝鮮時代(조선시대) 삶의 哲學(철학) 儒敎(유교)가 韓半島(한반도)를 支配(지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물경
14만부가 팔려나간 韓國出版 史上最初(한국출판사상 최초)의 Best seller-베스트셀러-를 기록한것도 놀라운일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best seller-베스트셀러- 였던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의<無情(무정)>을 凌駕(능가)한 人氣作(인기작)이었습니다
정비석은 1937년 東亞日報(동아일보) 新春文藝(신춘문예)에<졸곡제>로 登壇(등단)하여<城隍堂(성황당)>으로 크게注目(주목)을 받은 純粹文學(순수문학) 作家(작가)였습니다
“城隍堂(성황당)”에서 서낭신을 崇拜(숭배)하는 主人公(주인공)을 登場(등장)시켜 土俗神(토속신)과localism-로칼리즘-을 접목시켰고<제신제>에서는 基督敎敎理(기독교교리)와 人間慾望(인간욕망)
의 葛藤問題(갈등문제)를 尖銳(첨예)하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自由夫人(자유부인)>을 發表(발표)하면서 一躍(일약) 大衆(대중), 通俗作家(통속작가)로 浮上(부상)하기에 이릅니다 갑자기 돈을 벌고싶어졌을까요??
“自由夫人(자유부인)”은 1954년, 1월1일<seoul news paper-서울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8월6일로 끝난 총215회의 長篇小說(장편소설)입니다
連載中(연재중) 急擊(급격)히 서울新聞(신문) 發行部數(발행부수)가 오르다가 連載(연재)가끝나자 무려 5만2천부가 急減(급감)했던 事實(사실)은 自由夫人(자유부인) 의 人氣(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斟酌(짐작)할수 있게합니다
이는 마치 이광수의<無情(무정)>이 揭載(게재)된 每日申報(매일신보)의 發行部數(발행부수)가 치솟았던 現像(현상)과 비슷합니다
1917년의”無情現像(무정현상)” 이 1950년대”自由夫人現像(자유부인현상)으로 再現(재현)된 것 이라 할수있습니다
이소설은 無分別(무분별)한 男女(남녀)의 愛情問題(애정문제)를 다룬 通俗愛情物(통속애정물)로 볼수도 있지만 內面的(내면적)으로는 戰後時代(전후시대)의 社會斷層(사회단층)을 파헤친
問題作(문제작) 이라 할수있습니다
1950년대 戰後社會(전후사회)의 斷面(단면)은 3가지”바람”으로 象徵(상징)됩니다
‘춤바람”, “치마바람”, “곗바람” 이 그것입니다
解放後(해방후) 밀려들어온 西歐(서구) 自由主義風潮(자유주의풍조)에 휩쓸려 黃金萬能主義(황금만능주의)와 物質的慾望(물질적욕망), 自由(자유)로운 eroticism-에로티시즘-의 追求(추구)가
춤바람, 치맛바람, 곗바람으로 表出(표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現像(현상)은 이 小說(소설)이 發表(발표)되던해 터진 박인수사건이 克明(극명)하게 보여줍니다
海軍憲兵大尉(해군헌병대위)를 詐稱(사칭)한 박인수가 70여명의 女性(여성)들을 籠絡(농락)한 稀代(희대)의 性醜行(성추행)으로 社會的波長(사회적파장)을 일으켰읍니다
그리고” 法(법)은 貞淑(정숙)한 女人(여인)의 健全(건전)하고 純潔(순결)한 情操(정조)만 保護(보호)할수있다”는 그有名(유명)한 判決(판결)을 내리고 婚姻憑藉姦淫-혼인빙자간음- 罪(죄)에 대해
無罪(무죄)를 宣言(선언) 또한번의 波瀾(파란)을 일으켰읍니다
1262--dance音樂(댄스음악)과 춤文化(문화)-b
小說(소설) ”自由夫人(자유부인)”은 頹廢的(퇴폐적)이고 淫亂(음란)하다는 酷評(혹평)으로 筆禍事件(필화사건)에 휩싸이면서 오히려 世間(세간)의 關心(관심)을 끌어모아 best seller-베스트셀러-에
班列(반열)에 오르는 웃지못할 結果(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서울 法大敎授(법대교수) 황산덕과 정비석과의 論爭(논쟁)이 人氣(인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황신덕이 大學敎授(대학교수)의 名譽(명예)를 冒瀆(모독)했다는 批判(비판)글을 發表(발표)하자 정비석이 당연히 反論(반론)에 나선것입니다
황산덕은”文化, 文學破壞者(문화, 문학 파괴자)는 中共軍(중공군) 50만명에 해당된다”는 다소 根據(근거)없고 誇張(과장)된 말을 남겨서 世間(세간)의 注目(주목)을 끌었습니다
이러한 世間(세간)의 注目(주목)에 便乘(편승)하여 女性團體(여성단체)에서는 全體女性(전체여성)을 侮辱(모욕)했다는 理由(이유)로 작가를 警察(경찰)에 告發(고발)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警察調査(경찰조사)에서 “北韓(북한)의 指令金(지령금)을 받고 南韓社會(남한사회)의 腐敗(부패)한 모습을 誇張(과장)해서 드러낸것”이라는 嫌疑(혐의)까지 받았습니다
해서 한때 “自由夫人(자유부인)”은 禁書(금서)로 指定(지정)되었다는 글도 보입니다
이러한 社會的論難(사회적논란)으로 自然(자연)스럽게”자유부인”은 世間(세간)의 關心集中(관심집중)이 이루어지고 作家(작가)의 意志(의지)와 關係(관계)없이 화제의 중심에 서게됩니다
이 作品(작품)으로 1950년대는 그야말로 ”自由夫人時代(자유부인시대)”가 됐다 는 다소 誇張(과장)된 主張(주장)도 있어서 씁쓰레합니다
어쩄던 이러한 主張(주장)을 뒷밭침 할만한 노래까지 發表(발표)되어 다소 誇張(과장)되긴했어도 전혀 根據(근거)가없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어서 어서 오십시오 마음대로 골라 보세요
nylon-나이롱- 洋緞-양단- 호박단 新聞(신문)네 들여 왔어요
아주머니 나이에는 밤색빛깔 number one-넘버 원-
쑥갈색도 어울립니다 빛깔좋고 무늬좋지요
요새는 이빛깔이 流行(유행)입니다
“自由夫人(자유부인) 되지말고” 玉童子(옥동자)를 많이 낳아서
軍門(군문)으로 入隊(입대)시키시오 日曜日(일요일) 날 또오세요
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 정말 좋대요----------------------------------------------------------------김동민사 한복남곡 황정자노래<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 1절
“自由夫人(자유부인)”이라는 單語(단어)는 “바람난女子(여자)”의 代名詞(대명사)가 되어버리고 소설속에서 춤꾼 신춘호가 師母(사모)님을 誘惑(유혹)하며 부르던”madame-마담-“이라는 呼稱(호칭)은
“有閑madame-유한마담”-의 同義語(동의어)로 轉落(전락)해버립니다
詐欺(사기)꾼으로 登場(등장)한 백광진의 말”最高級品(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 라는 말은 退廢(퇴폐)와 虛榮(허영)의 流行語(유행어)로 時代(시대)를 風味(풍미)합니다
大學(대학) 國文科敎授(국문과교수)였던 男便(남편)은 美貌(미모) typist-타이피스트-와 不適切(부적절)한 關係(관계)를갖고 夫人(부인) 이웃에사는 男子(남자)와 춤바람에 휩쓸린다는 小說內容(소설내용)은
劃一化(획일화)되고 잘못解釋(해석)된 儒敎(유교)가 朝鮮時代(조선시대)부터 錦繡江山(금수강산)을 支配(지배)하는 삶의哲學(철학)이었고 自由黨獨裁時節(자유당 독재시절)에도 여전히
韓半島(한반도)를 얽매고있던 時期(시기)들에는 매우 衝擊的(충격적)이었을것입니다
小說(소설)이 發表(발표)되던 1954년은 1953년 六二五(육이오) 同族相殘(동족상잔)의 休戰直後(휴전직후)였기에 아직은 社會(사회)가 大混亂(대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시기였기에 그渦中(와중)에
수많은 戰爭未亡人(전쟁미망인)들이 社會(사회)에 진출하여 큰變化(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宜當(의당) 유교의 純潔(强要(순결강요) 價値觀(가치관)에도 崩壞兆朕(붕괴조짐)이 感知(감지)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女性(여성)의 正體性(정체성)의 混亂(혼란)에 起因(기인)한 性倫理(성윤리)의 破綻(파탄)이 社會的(사회적) issue-이슈-로 떠올랐던바 이를 銳利(예리)하게 捕捉(포착)한 作品(작품)이
바로 정비석표 <自由(夫人(자유부인)> 이었고 황산덕교수의 “中共軍五十萬(중공군50만)” 云云(운운)은 이미 그러한 主張(주장)을할만한 資格(자격)을 喪失(상실)한 時期(시기)였고 같은 女性(여성)들을 너무모르는 純眞(순진)한 貌襲(모습)이라고 할수밖에없습니다
황산덕교수가 生角(생각)하는 것 以上(이상)으로 이미 같은女性(여성)들의 性倫理(성윤리)에대한 價値觀(가치관)의 變化(변화)는 그剛度(강도)가 높았습니다
“自由夫人(자유부인)”의 “自由(자유)”라는 槪念自體(개념자체) 旣存(기존)의 性倫理(성윤리)에 얶매인 女性性(여성성)을 超越(초월)하는 用語(용어)였습니다
Ibsen-입센-의<人形(인형)의집>의 主人公(주인공) “노라”처럼 집이라는 울타리에 束縛(속박)된 奴隸狀態(노예상태)를 벗어나 自由(자유)롭게 자신의 個性(개성)과 正體性(정체성) 謳歌(구가)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의 實踐的道具(실천적도구)가 바로 춤이었습니다
1263--dance音樂(댄스음악) 과 춤 文化(문화)-c
“자유부인”은 이러한 突發的(돌발적)인 事態(사태)로인해 人氣(인기)가 上乘(상승)하자 이번에는 映畵界(영화계) 가만히 두지않습니다
이러한 好機(호기)를 놓힐리 萬無(만무)합니다
이러한 人氣(인기)를 弘報(홍보)에 利用(이용)코자 발빠르게 映畵化(영화화)합니다
허나 開封(개봉) 하루전날까지도 自由黨獨裁時期(자유당독재시기) 世上(세상) 變(변)한줄모르던 官僚(관료)들이 朝鮮時代(조선시대) 의 一方的(일방적) 儒敎的價値觀(유교적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視角(시각)으로 審議(심의)를 한결과 지나친 愛情描寫(애정묘사)라 트집을잡아 許可(허가)를 내주지않았으나 빗발치는 여론을 無視(무시)하지 못해 마침내 개봉후 수도극장은 나운규의<아리랑>
때처럼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人山人海(인산인해) 의 爆發的(폭발적)人氣(인기)를 이번에도 映畵(영화)界(영화계)에서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興行(흥행)의 鬼才(귀재)한형모 監督(감독)의 “自由夫人(자유부인)”이 開封(개봉)다음해 1957년 김화랑감독이 메카폰을잡고 開封(개봉)때 熱氣(열기)가 채 식기도전에 續篇(속편)이 나오고 1969년 김지미를 내세운 영화가, 이어서 최무룡 윤정희 주연의 1981년판, 최무룡 이수진 주연 1986년판, 1990년 고두심, 강석우 주연으로 續篇(속편)이 이어졌습니다
아마도 한편의 소설이 6편의 영화로 만들어진건 매우 稀貴(희귀)한 事例(사례)일것이고 文學史(문학사)뿐만아니라 映畵史(영화사)에서도 하나의 傳說(전설)을 만든작품이라 할만합니다
그만큼 결코 반길만한 일은 못될지라도 자유부인은 1950년대를 風味(풍미)한 社會的(사회적) key word-사회적키워드- 였습니다
1950년대 들어서 “自由夫人(자유부인)”은 단지 小說(소설)이나 映畵title-영화타이틀-로 끝나는 用語(용어)가 아니라 女性解放(여성해방) 女權伸張(여권신장)의 代名詞(대명사) 로까지 자리매김 하게됩니다
말하자면 女性解放(여성해방)의 icon-아이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자유부인”은 韓國 社會史(한국사회사), 女性史(여성사)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온 epoch-making-획시기적인- 작품 일수밖에 없습니다
허지만 世俗(세속)에물든 墮落(타락)한 女人(여인)의 代名詞(대명사)로 쓰이기도 했읍니다
新民謠天才歌手(신민요천재가수) 황정자가 부른<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을 들어보면 上記說明(상기설명)을 反證(반증)합니다
어서 어서 오십시오 마음대로 골라보세요
Veludo-비로도- 洋緞(양단) nylon-나이론-新聞(신문)네 들여왔어요
아주머니 나이에느 닷돈이면 number one-넘버원-
白金斑指(백금반지) parasol-파라솔- omega-오메가-냐 純金(순금) 팔찌요
요새는 그것만이 流行(유행)입니다
自由夫人(자유부인)되지말고 入隊(입대)시키시요 日曜日(일요일)날 또오세요
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 정말 좋대요-----------------------------------------------------------------------------------------------------------<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 >2절
황정자의<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은 Nylon-나이론-, 洋緞(양단), 호박단, veludo-비로도- 를 걸치고 白金斑指(백금반지), 純金(순금)팔찌를 두른 자유부인의 肖像畵(초상화)를 懸欄(현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두 國際市場(국제시장)을 통해서 들어온 外來品(외래품)들입니다
자유부인들은 옷차림만 華奢(화사)한 것이 아니라 兵役忌避(병역기피)에 앞장선 特權層(특권층)이기도 했습니다
노래에서 逆說的(역설적)으로 아들낳아 軍隊入隊(군대입대) 시키라는 말이 나옵니다
子女(자녀)들의 兵役(병역)을 勸力(권력)을 利用(이용)해 忌避(기피)시켰던 特權層(특권층)대한 야유와 憤怒(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政治軍人(정치군인)들이 特權層(특권층)에 속했던 當代現實(당대현실)도 反映(반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時節(시절)이나 分斷國家(분단국가)에서 가장 切實(절실)했던 子女(자녀)들의 兵役忌避 問題(병역기피문제)가 노래 歌詞(가사)로까지 動員(동원)되었음은 그만큼 兵役非理(병역비리)가
漫然(만연)되있다는 反證(반증)이어서 憤怒(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낍니다
이노래를 들어보면 자유부인은 그야말로 1950년대를 代表(대표)하는 特權層(특권층)의 奢侈(사치) 와 虛榮(허영)을 代辨(대변)하는 代名詞(대명사) 였음을 알수있습니다
女性解放(여성해방) 人權保護(인권보호)라는 肯定的意味(긍정적의미)외에 特權層女性(특권층여성)들의 腐敗(부패)와 虛榮(허영)을 同時(동시)에 보여주는 janus-야누스-적인 二重性(이중성)을가진 것이 自由夫人(자유부인) 이었습니다
1264--dance音樂(댄스음악)과 춤文化(문화)-d
問題(문제)는 그作品(작품)이 1950년대 颱風(태풍)처럼 불던 춤바람유행에 促進劑(촉진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더 거칠게 表現(표현)하자면 춤바람이라는 불구덩이에 기름을 쏟아부은 것이”자유부인”이라는 것입니다
自由夫人(자유부인)이 추던춤은 1950년대를 휘쓸었던 masmbo-맘보-였습니다
戰爭(전쟁)은 切望(절망)과 慾望(욕망)이라는 兩面性(양면성)의 얼굴을 빚어냅니다
모든 것을 잃었고 希望(희망)마저 무너졌다는 絶望感(절망감), 挫折感(좌절감)에 휩싸이면서 同時(동시)에 어차피 그럴바에야 瞬間(순간)瞬間(순간) 人生(인생)을 즐기자는 慾望(욕망)과
慾求(욕구)가 噴出(분출)되기 마련입니다
춤바람은 이러한 切望(절망)에서 비롯한 頹廢的慾望(퇴폐적욕망)의 噴出口(분출구)였습니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춤바람에 휩쓸렸던 것입니다
거기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西洋(서양)의 dance music-댄스뮤직- 相乘作用(상승작용) 일으켰습니다
마하자면 1950년대 韓國(한국)大衆音樂(대중음악)의 큰흐름이된 dance 音樂(댄스음악)은 戰後(전후)의 時代狀況(시대상황) (시대상)황과 西洋音樂(서양음악)의 受容(수용)이 맞물
相互作用(상호작용)을 일으킨 樣式(양식) 이었습니다
거기에 美國文化文明(미국문화문명)에대한 complex-콤플렉스-도 함께 作用(작용)했을것입니다
미국문화는 西歐文化(서구문화)의 象徵(상징)이고 高級文化(고급문화)이기에 이를追從(추종)해야한다는 大衆心理(대중심리)가 cabaret文化(카바레문화), 춤文化(문화) 를 先導(선도)했던것이라는
偏狹(편협)된 主張(주장)이 보입니다
美國文化(미국문화)가 高級文化(고급문화)라는 主張(주장)은 美國文化(미국문화)를 깊히 硏究(연구)한 說明(설명)은 결코아닙니다 겉모습의 華麗(화려)함만 본것입니다!!!
그리하여 춤바람은 1950년대의 流行病(유행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뒤질세라 너도나도 춤바람에 끼여들었던 것이라는 說明(설명)도 보입니다
그중에도 mambo-맘보-바람은 1950년대 問題作(문제작) “自由夫人(자유부인)”을 孕胎(잉태)한 代表的(대표적)인 dance 曲(댄스곡)입니다
앞서 <종횡무진가요사 1257>에서 說明(설명)했듯이 歌手玄仁(가수현인)이 飜案(번안)해부른”<체리핑크맘보>가 온통 거리를 맘보 mamnbo天國(맘보천국)으로 만들었다”는 다소 誇張(과장)된
說明(설명)이 可能(가능)합니다
현인은 이곡외도 純粹土種 mambo曲(순수토종맘보곡) <Napoli mambo-나포리 맘보->도 불러 맘보가 韓國(한국)땅에 定着(정착)하는데 其餘(기여)합니다
명실공히 Singer 玄仁(현인)은 mambo-맘보-가 韓國(한국)定着(정착)에 其餘(기여)한 先驅者(선구자)라는 說明(설명)이 보이기도 합니다
Mambo-맘보- Napoli-mambo-냐포리맘보-
그리운 Napoli-나포리- 薔薇(장미)꽃 피는 南(남)쪽港口(항구) Napoli-나포리-
아~沙工(사공)의 뱃노래도 사라진밤에
窓門(창문)의 그아가씨 누구를 기다리나
Mambo-맘보- napoli-mambo-나포리 맘보-
꿈꾸는 銀河水(은하수) 波濤(파도)도 잠든 南(남)쪽港口(항구) Napoli-나포리-
Mambo-맘보- Napoli –mambo-나포리 맘보-
고요한 Napoli 그림과 같은 南(남)쪽港口(항구) Napoli-나포리-
아~ venice-베니스-의 gondola곤도라- 노를 저으며
그대와 노래하는 Napoli-나포리-의노래
Mambo-맘보- Napoli-mambo-나포리 맘보-
화산도 잠들고 별들도 잠든 南(남)쪽 港口(항구) napol-나포리-----------------------------------------------------------고명기사 박춘석곡 현인노래<napol-mambo-나포리맘보->
1265-dance音樂(댄스음악)과 춤文化(문화)-e
Mambo boom-맘보붐-은 傳統民謠(전통민요)에까지 浸透(침투)하여 우리민요가락과 mambo rhythm-맘보리듬-이 混合(혼합)된 fusion樣式(퓨전양식)까지 産出(산출)하기에 이릅니다
구전민요 닐리리 도라지, 太平歌(태평가)에 mambo-맘보-가락이 덧붙혀져 奇妙(기묘)한 fusion dance 曲(퓨전댄스곡)이 태어난것입니다
mambo열풍이 韓國傳統民謠(한국전통민요)를 蠶食(잠식)하는 정도였으니 그威勢(위세)가 어느정도인지 充分(충분)히 斟酌(짐작)이갑니다
1960년대 以後(이후)에도 mambo boom-맘보붐-식지않고 김용만의 fry-mambo-후라이 맘보-> 백야성<matross-mambo-마도로스맘보-> 권혜경<明洞mambo-명동맘보->
송해<老總角mambo-노총각맘보-> 백일희< china mambo-차이나 맘보->로 이어집니다
논무를 댈때나 밭김을 맬때나 아낙네 맘보가 들린다
치마에 감기는 도라지打令(타령)이 아낙네 맘보냐
할아버지 담뱃대가 건들건들 이가빠진 할머니도
Hey-헤이- mambo-맘보- 아낙네 mambo-맘보-다 mambo時代(맘보시대)다----------------------------------------------------------반야월사 전오승곡 김정애노래<아낙네 mambo-맘보-
<닐리리 mambo-맘보->< 앵두나무 處女(처녀)>를 힛트시킨 김정애의<아낙네 mambo-맘보->입니다
都市(도시), 農村(농촌), 아주머니, 할머니 가릴것없어 온통 mambo-맘보-춤 에취한 그야말로 mambo時代(맘보시대) 가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밭김을매다가, 논모를 낼때도 mambo-맘보-춤 가락에 맞춰 일을 합니다
할아버지 담뱃도, 이빠진 할머니도 mambo-맘보-가락에 춤을춥니다
그야말로 mambo 天國(맘보천국)이 열린것입니다
男女老少(남녀노소), 都市農村(도시농촌), 地域(지역)과 階層(계층)을 超越(초월)하여 mambo-맘보-춤이 社會(사회)구석구석 독버섯처럼 피어났습니다
호미자루 내던지고 빠진이를 흔들며 맘보춤을 추는 남녀노소들의 風景(풍경)이 도처에서 懸欄(현란)하게 펼쳐집니다
맘모춤이 流行(유행)하다보니 거기에 걸맞는 “mamb 바지”가 덩달아 유행했고 mamb caramel-맘보-캬라멜-까지 登場(등장)하는 웃지못할 寸劇(촌극)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는 1930년대 유행하던 社會諷刺歌(사회풍자가) 인 漫謠樣式(만요양식)을 닮은 諷刺mambo-풍자맘보-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값비싼 brand-브랜디-에 酒酊(주정)하거나
대포집 막걸리에 酒酊(주정)하거나
검은머리 白髮(백발)되긴 다 같은 사람
무엇이달라 돈하나 많고 적은 것 그것뿐이다
너도 mambo-맘보- 나도 mambo-맘보- Korean-mambo-코리안 맘보-
값비싼 洋食(양식)으로 배부르거나
보리밥 짠지쪽에 배부르거나
沐浴湯(목욕탕)에 옷을벗긴 다 같은 親舊(친구)
무엇이 달라 돈하나 많고 적은 그것뿐이다
너도 mambo-맘보- 나도 mambo-맘보- Korean –mambo-코리안 맘보----------------------------------------------손로원사, 한복남곡 김정구노래<Korean mambo-코리안 맘보->
<눈물젖은 豆滿江(두만강)>의 김정구가 부른<Korean mambo-코리안맘보->입니다
洋食(양식)을 먹는사람이나 보리밥을 먹는사람이나 沐浴湯(목욕탕)에서 옷을벗긴 다 마찬가지고, necktie-넥타이-를 매는사람이나 고무신 신는사람도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살아있는동안 신나게 mambo-맘보-춤이나 추자는 노래입니다
Brand-브랜디-대폿잔, 洋食(양식)-보리밥, necktie-넥타이-勞動服(노동복)을 對比(대비)시키면서 富裕層(부유층)과 庶民層(서민층)의 階層意識(계층의식)을 隱然中浮刻(은연중부각) 시키고 있습니다
1950年代(년대)는 富益富(부익부) 貧益貧(빈익빈)의 階層葛藤(계층갈등)이 深化(심화)된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社會現象(사회현상)을 꼬집으면서 그階層(계층)간의 葛藤(갈등)을 맘보춤으로 풀어보려는 諷刺性(풍자성)이 돋보입니다
1266-dance 音樂(댄스음악)과 춤文化(문화)-f
김용만의 <Fry-mambo-후라이맘보><-월급날 mambo-맘보->도 諧謔(해학)과 諷刺(풍자)가 넘치는 맘보입니다
月給(월급)날 받은 봉투 한푼도없어
親舊(친구)좋아 한잔술에 mambo-맘보- mambo-맘보-
젓가락 長短(장단)에 맞춰 어깨춤이 절로나네
얼씨구나 mambo-맘보- 절씨구나 mambo-맘보-
술이깨니 큰일났네 mambo-맘보-가 골치야
바가지 박박긁는 마누라 야단치는 mambo-맘보- mambo-맘보
月給(월급)날 벼락감투 내가 쓰는지
큰딸년 작은놈도 mambo-맘보- mambo-맘보-
아버지 nylon-나이론- 치마 나는야 洋服(양복)한벌
얼씨구 mambo-맘보- 절씨구 mam,bo-맘보-
큰소리 쳤지마는 mambo-맘보-가 골치아파
바가지 박박긁는 마누라 야단치는 mambo-맘보- mambo-맘보-
月給(월급)날 빚쟁이한테 쪼리지마는
社長(사장)자리 꿈을꾸는 mambo-맘보- mambo-맘보-
앞에는 양재기처럼 앞으로 쑥내밀고
얼씨구 mambo-맘보- 절씨구 mambo-맘보-
그렇게도면 좋게 mambo-맘보-가 골치야
바가지 박박긁는 마누라 야단치는 mambo-맘보- mambo-맘보---------------------------------------------------------- 손노원작사, 손목인작곡 김용만노래<月給(월급)날 mambo-맘보->
“木浦(목포)의눈물” ”他鄕(타향)”을 創作(창작)한 손목인표< mambo맘보->입니다
“바가지 박박긁는 마누라, 야단쳐도” 月給(월급)날 술마시고 mambo-맘보-춤에 들썩이는 閑良(한량)이 등장합니다
큰딸이 nylon-나이론-치마, 작은놈이 洋服(양복)한벌 사달라고 조르지만 mambo-맘보-춤에 빠져 나몰라하고 月給(월급)날 빚쟁이한테 쫓기지만”양재기처럼 배를내밀고” 맘보춤을 춥니다
노래가락도 mambo-rhythm-맘보리듬-으로 進行(진행)됩니다
이러한 漫謠風(만요풍) 가락은 1930년대 강홍식, 안명옥의<名物男女(명물남녀)>를 聯想(연상)시킵니다
墮落(타락)한 남녀가cabaret-카바레-에서tang-탱고-가락에 맞춰 춤을추듯이”月給(월급)날 mambo-맘보-“ 亦是(역시) 맘보가락에 맞춰 社會(사회)風俗圖(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1930년대 風俗(풍속)이 1950년대로 그대로 옮겨온 것 입니다
특히 김용만은 才致(재치)넘치는 諧謔(해학)으로 社會諷刺歌(사회풍자가)를 많이부른 가수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人生(인생)이란 무엇인지 靑春(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못필 내 靑春(청춘)
마시고 또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밤이 새기전에 춤을춥시다
Boogie부기- boogie-부기- boogie woogie-부기우기-
boogie-부기- boogie-부기- boogie woogie-부기우기-
guitar-boogie-기타부기---------------------------------------------------------------------------------------------------------------------이재현사,곡 윤일로 노래<guitar-boogie-기타부기->
상기곡 윤일로의<guitar-boogie-기타부기->는 享樂(향락)의 極致(극치)를 보여줍니다
밤새도록 술마시고 춤을추는 cabaret-캬바레-문화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人生(인생)이란 무엇인지 靑春(청춘)은 즐거워”처럼 청춘을 술과춤으로 태워버리자는 hedonism-히도니즘-<快樂主義(쾌락주의)>의 熱情(열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취하고 또취해서” 밤새도록 춤을추는 젊은이들의 享樂文化(향락문화)가 어느정도였는지 이노래는 證言(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享樂主義(향락주의), 逃避主義(도피주의)의 極致(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267—映畵 放送劇(영화 방송극)의 盛行(성행)-a
韓國(한국)에서 映畵(영화)는 1910년대 일찍이 선보였습니다
kino-drama-키노드라마-가 그것인데 演劇公演中(연극공연중) 演劇(연극)으로 表現(표현)하기 힘든場面(장면)을 舞臺代身(무대대신) 映像(영상)으로 代替(대체)했던 것 小品映畵(소품영화)였습니다
당시 舞臺技術(무대기술)이 發達(발달)되지못해 중요한부분을 演劇(연극)代身(대신)에 영상으로 찍은영화를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連鎖劇(연쇄극)이라고 불렀습니다
演劇(연극)과 映畵(영화)가 連續的(연속적)으로 묶여져있는 樣式(양식)이란 뜻입니다
물론 映畵(영화)는 映像(영상)만 있는 無聲映畵(무성영화) 곧 活動寫眞(활동사진)이었습니다
아무튼 連鎖劇(연쇄극)은 演劇(연극)과 映畵(영화)가 登場(등장)하던 草創期(초창기) 獨特(독특)한 fusion-樣式(퓨전양식)이었습니다
한국 連鎖劇(연쇄극) 嚆矢(효시)는 團成社(단성사)에서 신극좌가 올린 김도산 脚本(각본) 監督(감독) 主演(주연)의<義理(의리)的(적) 仇鬪(구투)>였습니다
이연쇄극은 開封後(개봉후) 大大的(대대적)인 興行成功(흥행성공)을 거두어 1924년경까지 連鎖劇全盛期(연쇄극전성기) 를 이루는 契機(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극이 공연된 1919년, 10월27일을 기념하여 1966년부터 이날을 “映畵(영화)의날”로 制定(제정)하였습니다
같은해 演劇(연극)의 先驅者(선구자)요 레코드사 文藝部長(문예부장)으로 윤심덕을 說得(설득)하여 일본으로 보내 遺作(유작)이된<死義(사의)讚美(찬미)>를 취입케한 이기셰가 중심이된 朝鮮文藝團
(조선문예단)이 공연한<知己(지기)>도 連鎖劇(연쇄극)이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서 映畵(영화)가 演劇(연극)에서 分離(분리)되었는데 最初(최초)로 登場(등장)한 영화는 윤백남의<月下(월하)義의盟誓(맹세)>였습니다
京城hotel-경성호텔-에서 政府高官(정부고관) 言論(언론), 文化界人士(문화계인사)를 招待(초대)하여 試寫會(시사회)를 가짐으로써 無聲映畵(무성영화)時代(시대)의 華麗(화려)한幕(막)을
올린 作品(작품)입니다
하지만 1920년대 映畵(영화)의 repertory-레파토리-는 大部分(대부분) 外國映畵飜案物(외국영화번안물)이거나 新派(신파)通俗物(통속물)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民族映畵(민족영화)의 嚆矢(효시)를 이룬 춘사 나운규의<아리랑>이 1926년 開封(개봉)을 합니다
나운규가 監督(감독)하고 直接出演(직접출연)까지한 이영화는 民族(민족)의 獨立意識(독립의식)을 鼓吹(고취) 했을뿐아니라 그시기 주흐름이었던 新派劇次元(신파극차원)을 넘어선
本格 藝術映畵(본격예술영화)로서 새로운 里程標(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이영화주제가는 開封當時(개봉당시) 映畵(영화) <落花流水(낙화유수)>主題歌(주제가)를 취입하기도한 이정숙이 無聲映畵(무성영화)로 개봉시 映畵管內(영화관내)에 特別設置(특별설치)된
뮤직박스에서 live 불렀다는 紀錄(기록)있습니다
영화주제가<아리랑> melody-멜로디-는 나운규가 고향 회령서 소학생때 철로길뚝을 닦던 노동자들이 부르는 멜로디를 외었다가 단성사 음악대에 편곡을 의뢰해 완성했고 가사는 나운규가
관여해 개사했을 가능성이 크보입니다
印刷(인쇄)된 아리랑 가사는 1928년 박문서관에서 발행한<아리랑 映畵小說(영화소설)>에 그전문이 실려있고 처음 음반에 실린 것은 1929년 Columbia-record 발매 영화설명”아리랑”에
유경이의 목소리로 部分的(부분적)으로 揷入曲形態(삽입곡형태)로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主題歌(주제가)로 獨立(독립)된노래로 실린 것은 1930년 Columbia-record 발매 채동원목소리 victor-record 발매 김연실 목소리로 吹入(취입)된 것이 보입니다
이들 音原歌詞(음원가사) 가 이정숙이 映畵開封時(영화개봉시)불렀던 歌詞(가사)와 同一(동일)한지는 確認(확인)이 어렵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豊年(풍년)이 와요 豊年(풍년)이 와요
이 江山(강산) 三千里(삼천리) 豊年(풍년)이 와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山川(산천)의 椒木(초목)은 젊어가고
人間(인간)義(의)靑春(청춘)은 늙어가네------------------------------------------------ 映畵(영화)主題歌(주제가) 노래 채동원<아리랑>
“아리랑”의 더 詳細(상세)한 說明(설명)은<종횡무진가요사 991>에 있으니 참조바랍니다
1268--映畵放送劇(영화, 방송극)의 盛行(성행)-b
비록 日本曲(일본곡) “빈천조”飜案(번안)이지만 韓國最初(한국최초)의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로<쌍옥루> 이남사 목소리로 발표되었읍니다
더 詳細(상세)한 說明(설명)은 <종횡무진가요사 989>에 있으니 參考(참고)바랍니다
헌데 最初(최초)의 劇映畵(극영화)로 評價(평가)받는 윤백남의”月下(월하)(의)盟誓(맹세)”가 開封(개봉)되고 主題歌(주제가) <月下(월하)의 歎息(탄식)>이 불려졌다는 기록이 存在(존재)합니다
韓國人 直接創作(한국인직접창작)의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1호<落花流水(낙화유수)>는 “종횡무진가요사 583, 1148”를 참조바랍니다
“落花流水(낙화유수)”는映畵(영화)와 歌謠(가요)의 만남이라는 新紀元(신기원)을 磨鍊(마련)한 作品(작품)이었다 는 主張(주장)이보입니다
이주장에다 “大衆歌謠(대중가요)의 또다른 活用(활용)” 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영화와 가요 두樣式(양식)이 서로 結合(결합)함으로써 結果的(결과적)으로 相乘效果(상승효과)를 거둔것입니다
이러한 現像(현상)은 藝術界(예술계)의 하나의 흐름으로 定着(정착)되었는데 이는 親日映畵(친일영화)라는 批判(비판)에서 自由(자유)로울수없는<福地萬里(복지만리)>와 主題歌(주제가)로
백년설이 吹入(취입)한<福地萬里(복지만리)>라는 歌謠(가요)의 相好結合(상호결합)에서 確認(확인) 할수있습니다
親日映畵(친일영화)임에도 불구하고 映畵德分(영화덕분)에 백년설의 노래는 그시기로서는 엄청난 五萬(오만)장이나 팔려나간 興行(흥행)을 거뒀다는 씁쓰레한뒷맛을 느끼게하는 글이보입니다
달실은 馬車(마차)다 해실은 馬車(마차)다
청대콩 벌판우에 휘파람을 불며불며
저언덕을 넘어가면 새 世上(세상)에 문이있다
黃色(황색)氣層(기층) 大陸(대륙)길에 어서가자 방울소리 울리며------------------------------------------------------------------김영수사, 이재호곡 백년설노래<福地萬里(복지만리)>
放送劇(방송극)과 主題歌(주제가)도 相互作用(상호작용)을 가져오지만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는 波及效果(파급효과)가 未洽(미흡)했습니다
原因(원인)은 그시기 唯一(유일)한 放送(방송)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이 1926년, 11월 개국되어 1927년, 2월 첫 電波(전파)를 送信(송신)했지만 周波數(주파수)나 送出時間制限(송출시간제한)으로
歌謠(가요)에미친 영향이 微微(미미)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放送(방송)을 聽取(청취)할 機器(기기)인 radio 普及數(라디오 보급수) 가 1920년대는 겨우 一萬五千(일만오천)대에 불과했고 1930년대가 되서야 20만대로 늘어났습니다
1930년대는 戰爭狂(전쟁광) 日本(일본)의 軍國主義(군국주의)가 復活(부활)하여 만주, 중국 侵略戰爭(침략전쟁)으로 이어졌기에 라디오는 宣傳(선전)煽動(선동)의 道具(도구)로 轉落(전락)되고 맙니다
解放(해방)이 되서야 비로소 映畵(영화)나 放送(방송)도 제자리를 잡을수 있었읍니다
放送(방송)이나 映畵(영화)를 만드는 主體(주체)가 韓國人(한국인)으로 바꾸었으니 當然(당연)한 일입니다
허나 解放直後(해방직후)에는 社會的混亂期(사회적혼란기)였기에 모든 것이 不充分(불충분)한 狀態(상태)였습니다
해서 年平均(연평균) 10여편으로 映畵製作(영화제작)이 不振(부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비린내가 錦繡江山(금수강산)을 뒤덮었던 六二五同族相殘(육이오동족상잔)이 休戰(휴전)된 1950년대 중반부터 映畵製作(영화제작)이 本格化(본격화)되었습니다
특히 1959년에는 백여편에 가까운 쏟아져나와 映畵全盛期(영화전성기) 貌襲(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다보니 自然(자연)스럽게 映畵(영화)의 主題歌(주제가)도 活潑(활발)하게 作曲(작곡)됩니다
radio連續劇(라디오연속극)<청실홍실>에서 主題歌(주제가)로 삽입된 송민도-안다성듀엣의 同名曲(동명곡) 이 big-hit 를 하며 連續劇(연속극)에 主題歌(주제가)가 불려지는 流行(유행)에
불이붙습니다
그餘波(여파)로 連續劇(연속극)이 곧 映畵化(영화화) 되었기에 映畵(영화)에도 主題歌(주제가)를 잘만들어야 영화가 힛트할수있다는 意識(의식)이 映畵製作者(영화제작자)들 사이에 깊숙히
浸透(침투)했습니다
映畵(영화)에 노래가 揷入(삽입)됨으로써 映畵(영화)의 劇的(극적)效果(효과)가 倍加(배가)되는 結果(결과)를 낳았습니다
또 映畵(영화)의 人氣(인기)에 便乘(편승)하여 노래도 大衆(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이처럼 영화와 가요는 相好(상호)密接(밀접)한 相關關係(상관관계)는 synergy-시너지-效果(효과)를 갖고있는것입니다
Radio 放送劇(방송극)이나 tv drama-드라마-도 마찬가지 입니다
drama-드라마- 에 ost가 必須的(필수적)으로 同伴(동반)되는것도 이러한 相互作用(상호작용) 때문입니다
1269—映畵放送劇(영화방송극)의 盛行(성행)-c
1950년대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製作(제작)의 先鋒(선봉)에선 사람은<哀愁(애수)의 小夜曲(소야곡)>의 창작자 박시춘 이었습니다
그는 監督(감독) 俳優(배우) 作曲(작곡) 등 三位一體的(삼위일체적) 활동으로 1950년대 映畵(영화)發展(영화발전), 歌謠發展(가요발전)에 크게 其餘(기여)했습니다
그는映畵(영화) <靑春雙曲線(청춘쌍곡선)<에서 病院長(병원장)역으로 出演(출연)하고 五響映畵社(오향영화사)를 직접 차려<三等hotel-삼등호텔-> <딸 七兄弟(칠형제)>과 같은 작품을 감독겸,
製作(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慶尙道(경상도) 사나이><薔薇(장미)의曲(곡)> 제작했으나 四一九 義擧(사일구의거)의 餘波(여파)로 興行(흥행)에 失敗(실패) 영화제작에 손을뗴고맙니다
하지만 1950년대 映畵史(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業績(업적)을 남긴 分野(분야)는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입니다
韓國最高(최고) 興行作曲家 (흥행작곡가)인 박시춘은 이미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歸着地(귀착지)”, <妻(처)의 面影(면영)>같은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를 作曲(작곡)하여 그方面(방면)의
先驅者(선구자) 가 되었습니다
보내는 가슴 시원하랴 부디 부디 잘가오
인제가면 언제오나 언제나 오나
定處(정처)없이 보내는 설움의 길
떠나는 몸도 쓰라려요 부디 부디 잘있소
인제가면 오지못할 永遠(영원)의길
이몸에도 쓰라린 傷處(상처)만 나요--------------------------------------------------------------------------------------------이창근사, 박시춘編曲(편곡) 南仁樹(남인수) 노래<처의면영>
어한 潛在(잠재)된 能力(능력)이 1950년대 映畵全盛時代(영화전성시대)를 맞아 활짝 꽃폈던 것입니다
그는<아리랑> <찔레꽃> <가거라 슬픔이여> <나그네설움> <五父子(오부자)> <아름다운 惡女(악녀)> 가는봄 오는봄> 등 大部分(대부분) 1950년대 영화의 주제가를 작곡하였습니다
그중에서<가는봄 어는봄> <나그네설움> <오부자> <물새우는 강언덕>는 主題歌(주제가)로 크게 成功(성공)한 작품입니다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를 歌謠主要樣式(가요주요양식)으로 자리잡게한 張本人(장본인)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점에서 박시춘은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의 先驅者(선구자)로 評價(평가)받을만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1960년대도 持續(지속)되어 많은 映畵主題曲(영화주제곡)이 創作(창작)되고 人氣(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時期(시기)에 특히 쟈니브라더스의<뺠간마후라>, 정훈희의 立身作(입신작)<안개>등 同名(동명)의 映畵(영화)主題歌(주제가)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素材(소재) 映畵(영화)가 1960년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영화들에 同伴(동반)된 主題歌(주제가)가 大衆(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봉봉 四重唱團(사중창단)의<兵士(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안다성<老兵(노병)은 사라지고> 김화용<두고온 山河(산하)> 문정숙<七人(칠인) 의 捕虜(여포로)> 전승애<臨津江(임진강)><軍番(군번)
없는 戰士(전사)> 최희준<8240 k.l.o-켈로-> 이미자<山川(산천)도 울었다> 시민철<怨恨(원한)의 休戰線(휴전선)> 등등이 그것입니다
1950년대 중반 개봉된 영화<(久遠(구원))의 愛情(애정)>의 主題歌(주제가)인”물새우는 강언덕”은 영화에 直接出演(직접출연)한 나애심이 screen-스크린속에서 직접불렀으나 音盤(음반)으로
出市(출시)할때는 백설희 목소리로 취입했습니다
물새우는 고요한 강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
흘러가는 저강물 가는곳이 그어데뇨
조각배에 사랑싣고 幸福(행복)찾아 가자요
물새우는 고요한 강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손석우사 박시춘곡 나애심노래<물새우는 江(강)언덕>
상기곡의 더상세한 설명은 <종횡무진가요사 662>을 참조바랍니다
1270-映畵(영화), 放送劇(방송극)의 盛行(성행)-d
나애심이 screen 속에서 原唱(원창)하고 백설희가 음반으로 remake 한<물새우는 江(강)언덕>은 그당시로는 稀貴(희귀)한 rhythm-리듬-인 서인도제도 프랑스령 마르티크섬의 民俗(민속)춤과
Rhythm- 리듬-인 beguine-비긴-으로 創作(창작)된 歌謠(가요)로 작곡가 박시춘의 항상 한발앞서가는 作曲性向(작곡성향)을 잘보여주는 例(예) 입니다
사랑하는 두사람이 강언덕에서 물새처럼 노래부르며 사랑을 속삭이는 romantic-로맨틱-한 雰圍氣(분위기)를 演出(연출)한 노래입니다
“조각배에 사랑싣고 幸福(행복)찾아가는” 素朴(소박)하고 아름다운 연인들의꿈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애틋하고 아련한 旋律(선율)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박시춘이 直接監督(직접감독)까지한<딸 七兄弟(칠형제)>도 백설희가 노래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시기 박시춘의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는 大部分(대부분) 解放後(해방후) 愛弟子(애제자)가된 백설희가 불렀고 보란듯이 히트했습니다
1959년경 박시춘이 五響映畵社(영화사) 에서 製作(제작)한<가는봄 오는봄> 主題歌(주제가)도 백설희에다 최숙자를 영입 duo-듀오-로 발표했습니다
비둘기가 우는 그밤에 눈보라가 치는 그밤에
어린몸 갈곳없어 낯선거리 헤매이네
꽃집마다 찾아봐도 목메이게 불러봐도
차가운 별빛만이 홀로새우네 울면서 새우네---------------------------------------반야월사 박시춘곡 최숙자 백설희노래<가는봄 오는봄>
이영화는 1967년 장일호감독이<그리움은 가슴마다>로 remake 하기도 합니다
“그리움은 가슴마다”는 남진, 이미자가 부른 노래제목으로 使用(사용)하기전 백설희가 먼저 노래제목으로 사용불렀습니다
영화<가는봄 오는봄>에 최숙자 백설희 duo-듀오-로부른 同名主題歌(동명주제가)와 함께 揷入曲(삽입곡)으로 백설희노래 <그리움은 가슴마다>가 실려있습니다
이영화를 remake 하며 노래 題目(제목)을 映畵題目(영화제목)으로 借用(차용)한것입니다
哀切(애절)하고 구슬픈 최숙자 백설희의 목소리가 雰圍氣(분위기)를 돋우는 전형적인 trot-rhythm –트로트리듬-의 悲唱(비창) 입니다
어머니와 딸 옥이의 만날수없는 離別(이별)을 主題(주제)로한 영화였기에 노래도 亦是(역시) 大衆(대중)의 心琴(심금)을 울릴수 있었습니다
映畵(영화)의 aura-아우라-와 노래의 雰圍氣(분위기)가 相互作用(상호작용)하여 劇的效果(극적효과)를 이뤄냈습니다
이외에도 1950년대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로 사랑을 받은 노래는 歌曲作曲家(가곡작곡가) 김동진이 過感(과감)하게 大衆歌手(대중가수) 나애심에게 門戶(문호)를 開放(개방)
創作(창작)해준<白痴(백치) 아다다>, 영화”山有花(산유화)”주제가<여옥의노래> 영화”나그네설움”주제가<人生(인생)은 나그네> 영화”五父子(오부자)” 주제가<오부자의 노래>등이 있습니다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볼에 스칠 때
검은머리 큰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
꽃가마에 미소짓는 말못하는 아다다야
차라리 모를것을 짧은날의 그幸福(행복)
가슴에 못박고서 떠나버린 님그리워
별아래 울며새는 검은눈의 아다다야-----------------------------------------------홍은원사 김동진곡 나애심 노래<白痴(백치)아다다>
곡을 作詞(작사)한 홍은원은 박남옥에이은 한국두번째 女性(여성)映畵監督(영화감독) 입니다
“백치아다다”의 더상세한 설명은 <종횡무진가요사 658>을 참조바랍니다
1950년대 말 개봉한 현인의<꿈이여 다시한번> 나애심의<過去(과거)를 묻지마세요> 박재홍<有情千里(유정천리)>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주제가입니다
조남사가 가사를 이인권이 곡을붙인 이곡은 그무렵 현인이 聲帶(성대)에 異常(이상)이생겨 正常的(정상적)인 發聲(발성)을 하기힘든상태로 吹入(취입)했음이 알려진곡입니다
평소 先輩歌手(선배가수) 玄仁(현인)을 尊敬(존경)해온 안다성은 현인의 노래를 여러곡 remake해왔는데 이곡역시 再吹入(재취입)했습니다
1271—映畵(영화)放送劇(방송극)의 盛行(성행-e
꿈이여 다시한번 백합꽃 마음속에
그리움 여울지어 하늘에 속삭이니
일곱빛깔 무지개가 목메어우네
꿈이여 다시한번 내가슴에 피어라------------------------------------------------------------------------------------------조남사사 이인권곡 현인노래<꿈이여 다시한번>
詩的(시적)인 歌詞(가사)에 애달픈 曲調(곡조)가 感動(감동)을 주는 歌謠(가요)이나 잘부르기가 힘든曲(곡)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melo-drama-멜로드라마-적인 영화의 story-스토리-와 絶妙(절묘)한 調和(조화)를 이루면서 劇的(극적)인 效果(효과)를 끌어낸 것입니다
<물방아도는내력>, <울고넘는 박달재>와 함께 singer 박재홍의big-hit 曲(곡)중의 한곡인”有情千里(유정천리)”도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입니다
영화는 1950년대 民族(민족)의 分斷(분단)으로 인한 離散家族(이산가족)의 아픔과 避難(피난)살이로 疲弊(피폐)해진 都市(도시)의 삶을 등지고 落鄕(낙향)하는 나그네의 人生(인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有情千里(유정천리) 영화 主題歌(주제가)는모든 것을 잊고 고향의 품에안겨 素朴(소박)한삶을 살아가겠다는 鄕愁心(향수심)을 刺戟(자극)한 노래입니다
이곡은 처음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로 불려졌지만 그당시 無能(무능)하기만 했던 이승만 自由黨政權(자유당정권)의 政治諷刺歌(정치풍자가) 로 parody-패로디-되기도 했습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아들 손을잡고
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메산골 내고향에
못살아도 나는좋아 외로워도 나는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黃昏(황혼)빛이 젖어드네----------------------------------------------반야월사, 김부해곡 박재홍노래<有情千里(유정천리)>
이곡의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 가요사 342>참조
지금도 格調(격조)높은 가요로 記憶(기억)되고 애창되는곡 송민도의<카츄사의노래>도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입니다402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밤을 못잊어
얼어붙은 마음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실날을 기다리는 가없어라 카츄사
찬바람은 내가슴에 흰눈은 쌓이는데
離別(이별)의 슬픔안고 카츄사는 흘러간다---------------------------------------------------------------------------유호사 이인권곡 송민도노래<카츄사의 노래>
시골 富者(부자)집 에서 시중드는 옥이는 相續者(상속자)인 원일사이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悲劇的(비극적)사랑을 다룬 영화입니다
두사람 사이에 아기까지 생겼지만 끝내 “김지미-옥이-“는 버림받고 맙니다
“카츄사”라는 이름으로 cabaret-카바레-에서 일하다 殺人未遂嫌疑(살인미수혐의)를 받고 원일의 품에안겨 숨을거두고 맙니다
카츄사는 잘알다시피 러시아 文豪(문호) 톨스토이의<復活(부활)>을 原作(원작)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신파극으로 공연되 日本歌謠最初(일본가요최초) 韓國流行紀錄(한국유행기록)을 세운
女裝男優(여장남우) 고수철이부른 演劇主題歌(연극주제가)가 存在(존재)하고 그것이 영화로 부활하고 영화주제가로 새롭게 誕生(탄생)한것입니다
신파극의 母胎(모태)답게 melo-drama-멜로드라마-的(적) 要素(요소)가 강하게 풍기는 영화였습니다
이곡이 big-hit 하자 1970년대 김부자가 remake 하기도 했습니다
이노래에대한 더상세한 것은 <종횡무진가요사 402>를 참조바랍니다
1272-映畵(영화), 放送劇(방송극)의 盛行(성행)-f
상기곡<카츄사의노래>와 反對(반대)로 노래가 大衆(대중)의사랑을 받아서 이를 바탕으로 映畵界(영화계) 부름을 받아서 映畵化(영화화)의 길을걷는 경우도 있습니다
先(선) 歌謠(가요) 後 映畵(후영화) 現像(현상)인 것입니다
솜사탕 같은 音色(음색)의 所有者(소유자) 손시향의”검은장갑” ”離別(이별)의 終着驛(종착역)” 한명숙”노란셔츠의사나이” 안정애”daejun blues-대전블루스-“ 등은 노래가 힛트하자 그흥행을 안고서
영화계의 注目(주목)을받아서 영화로제작된 것입니다
“故鄕草(고향초)”, 飜案曲(번안곡) ”눈물의 waltz-왈츠-“ 의 主人公(주인공) 송민도의 “나하나의사랑”이 商業的 recording-상업적 레코딩- 전 放送歌謠(방송가요) 로 전파를 타자 이곡이 은근히
인기를 누리자 小說家(소설가) 박계주가 노래 歌詞導入部(가사도입부)—나혼자만이 그대를 알고싶소—에서 小說題目(소설제목)으로 借用(차용)<나혼만이>라는 題目(제목)으로 小說(소설)을 쓰고 그소설이 인기를끌자 <나혼자만이>라는 題目(제목)으로 映畵化(영화화)되기까지 합니다
김진규, 조미령,이 출연해 만들어진 이영화는 허나 송민도가 아닌 권혜경의 목소리로 主題歌(주제가)를 삽입해서 原唱者(원창자) 송민도의 抗議(항의)를 받았다는 後日談(후일담)이 존재합니다
나혼자만이 그대를 알고싶소
나혼자만이 그대를 갖고싶소
나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永遠(영원)히 永遠(영원)히 幸福(행복)하게 살고싶소
나혼자만을 그대여 生角(생각)해주
나혼자만을 그대여 사랑해주
나혼자만을 그대여 믿어주고
永遠(영원)히 永遠(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주---------------------------------------------------------------------------------------------손석우사, 곡 송민도 노래<나하나의 사랑>
한편 소설제목<나혼자만이>를 사용한 블루벨즈노래가 存在(존재)하기도 합니다
앞서 言及(언급)한 안정애의<大田blues-대전블루스>도 노래가 big-hit 하자 이를바탕으로<大田發零時五十分(대전발영시오십분)>이란 노래가사서 題目(제목)을 따서 映畵化(영화화)합니다
이 映畵(영화)가 開封(개봉)된 後(후) 노래題目(제목)을 ”大田發(대전발) 영시오십분”으로 表記(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大衆歌謠(대중가요) 映畵化(영화화) 雰圍氣(분위기)에 便乘(편승)하여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크게유행했던 노래들도 映畵化(영화화)에 불려나오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이는한 映畵(영화)가 힛트하면 수많은 不良品水準(불량품수준의) 亞流作(아류작)이 만들어지던 관행을 떨쳐버리지못한 일부 한탕주의 映畵製作者(영화제작자)들 때문입니다
어쩄던<황성옛터> <목포의눈물><타향살이><울며헤진 釜山港(부산항)> <나그네 설움> 남인수의 “낙화유수” 도입부가사---이강산 낙화유수 흐르는봄에—에서 따온
<이 江山(강산) 落花流水(낙화유수)>등등이 映畵(영화)로 불려나왔고 大衆(대중)들에게
사랑받고 해서 익숙했던 노래인만큼 映畵(영화)로도 人氣(인기)를 받을수 있으리라는 安逸(안일) 한 生角(생각)의 結果物(결과물)입니다
이 江山(강산) 落花流水(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얽어 지은 盟誓(맹세)야
歲月(세월)에 꿈을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人生(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江山(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春三月(춘삼월)이냐
幸福(행복)의 물새우는 浦口(포구)로 가자----------------------------------------------------------------------김다인사 이봉룡곡 南仁樹(남인수) 노래<落花流水(낙화유수)>
1273—映畵(영화) 放送劇(방송극)의 盛行(성행)-g
한편 放送劇(방송극)이 人氣(인기)를끌어 映畵(영화)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론 두樣式(양식)의 媒介(매개)고리는 當然(당연)히 主題歌(주제가)였습니다
1956년 kba-radio-케이비에스 라디오-drama-드라마-로 인기를 모은<청실홍실>의 손석우작곡의 主題歌(주제가)를 放送局(방송국) 專屬歌手(전속가수)였던 송민도와 안다성이 duet-듀엣-으로
불러 크게힛트시켰읍니다
이동일이 단장이던 40인조 zinsung-시온스- 合唱團(합창단)이 함께했습니다
이노래는 singer 안다성씨의 歌手debut-가수데뷔곡 이기도 합니다
이 連續劇(연속극)과 主題歌(주제가)가 힛트하자 곧 映畵(영화)로 製作(제작)했고 현인과 백일희가 drama-드라마- 原唱(원창) 버전에서 改詞(개사)된 歌詞(가사)로 主題歌(주제가)를 취입했습니다
방송극-주제가-영화-음반출시 라는 相互過程(상호과정) 거친것입니다
이곡에대 상세한한것은 <종횡무진가요사 432> 참조바랍니다
1958년 kbs-radio 連續劇(연속극)”꿈은사라지고”도 ‘청실홍실”과 같은 course-코스-를 밟습니다
Drama 人氣(드라마인기에 힘입어 영화로 開封(개봉)되고 영화속의 主人公(주인공) 최무룡이<꿈은사라지고> 音盤(음반)을 出市(출시)하여 興行(흥행)에 成功(성공)했습니다
이는 映畵製作者(영화제작작자)가 “出演俳優(출연배우)가 主題歌(주제가)를 불렀다”는 映畵弘報(영화홍보)에 利用(이용)코자 企劃(기획)한것으로 以後(이후)부터는 “영화가 힛트하려면
좋은 主題歌(주제가)가 있어야한다” 意識(의식)이 映畵祭(영화제)作者(작자)들 사이에 彭排(팽배)하게 됩니다
이영화에서는 또 副主題歌 格(부주제가가 격)인<나는가야지>를 出演女俳優(출연여배우) 문정숙이 부른후 豫想(예상)보다 呼應(호응)이좋아 그후 문정숙은 出演映畵(출연영화)마다
主題歌吹入(주제가취입)을 强要(강요)받아 그稀貴性(희귀성)을 떨어뜨렸습니다
상기언급 문정숙의<나는가야지>는 “종회무진가요사 419”를 참조바랍니다
이곡은 radio-drama-라디오드라마-로 放時(방송시)에는 “청실홍실”에 이어서 또 안다성이 kbs 合唱團(합창단)과 처음 불렀습니다
나뭇잎이 푸르던날 밤에
뭉게구름 피어나듯 사랑이 일고
끝없이 퍼져나간 젊은꾼이 아름다워
귀뚜라미 지새울고 落葉(낙엽)흩어지는 가을에
아~ 꿈은 사라지고 꿈은 사라지고
그옛날 아쉬움에 한없이 웁니다-----------------------------------------------------------------김석야사 손석우곡 안다성과 kbs 合唱團(합창단)<꿈은사라지고>
이노래는 후일 조영남이 remake 하기도 했습니다
상기곡<꿈은사라지고>는 “종횡무진가요사 421”를 참조바랍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로 이어져 kbs 連續劇主題歌(연속극주제가)인 김용만의 <回轉椅子(회전의자)> 박재란의<江華 道令(강화도령)> 김상국<여기 이사람들이> 등도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1962년경에는 영화주제가 <꿈은사라지고>힛트에 힘입어 영화”외나무다리”에서도 俳優(배우)로 出演(출연)은 물론 主題歌(주제가)까지 또부릅니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故鄕(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사랑아 지금은 어데
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
못잊을 歲月(세월)속에 날려보내리-----------------------------------------------------------------------------------------반야월사, 이인권곡 최무룡노래<외나무다리>
이곡은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고향마을에서 사랑을 約束(약속)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은 노래한 곡입니다
꽃피는 산골의 抒情的風景(서정적풍경)에 失戀(실연)의 아픔을 덧입혀 大衆(대중)들의 心琴(심금)을 울렸다는 글이 보입니다
放送劇(방송극) 同心草(동심초)도 人氣(인기)몰이에 成功(성공)하여 映畵同心草(영화동심초)로 부활합니다
그 中間(중간)에 映畵(영화)에서 부른 권혜경 version-버전-이 影向(영향)을 주었습니다
이곡은 classic-클래식- 作家(클래식작가) 김동진이 大衆歌手(대중가수) 나애심에게 영화주제가<白痴(백치) 아다다>를 창작해주어 classic-클래식-과 大衆歌謠(대중가요) 壁(벽)을 허문후
이번에는 歌曲作家(가곡작가) 김성태가 1945년 창작한 自己作品(자기작품) ”同心草(동심초)”를 1959년경 권혜경에개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로 吹入(취입)시켜 壁(벽) 허물기를 이어갑니다
史劇史上(사극사상) 더물게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kbs-radio 의<張禧嬪(장희빈)>이 크게인기를 모았을때 主題歌(주제가)를 이서구사, 전오승곡으로 황금심이 불러 big-hit 했고 곧
映畵化(영화화)됩니다
이처럼 드라마-가요-영화가 三位一體(삼위일체)가 되어 綜合藝術(종합예술)의 境地(경지)를 이뤄갔습니다
Radio-drama 로 放送(방송)된 內容(내용)을 音盤(음반)으로 옮겨 發賣(발매)하는데 1930년대 劇說明(극설명) 레코드를 1950년대에 再現(재현)했습니다
1274-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a
1960년대는 참다참다못한 學生(학생)들의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으로 이승만 獨裁政權(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박정희의 五一六(오일육) 軍士coup d’ etat -군사 쿠테타-, 한일회담,
越南派兵(월남파병) 등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못지않은 政治社會的(정치사회적) 激浪(격랑)이 일던 激動(격동)의 時代(시대)였습니다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으로 自由黨政權(자유당정권)의 腐敗淸算作業(부패청산작업)이 本格化(본격화)되었고 박정희 軍士coup d’etat-군사쿠테타-결과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이어서 국민들의
自由(자유)가 또다시 統制(통제)되는 獨裁(독재)가 始作(시작)되었습니다
그와중에 일제강점기 보상을 제대로 요구할 수 있는 마지막기회 한일회담이 열렸으나 屈的(굴욕적)인 자세로 회담에임해 아무것도 제재로 해결못한체 끝나고 말았습니다
經濟開發(경제개발)에 보탬이되는 일이라는 名分(명분)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아무런 연고도없는 낯선땅 越南(월남)으로 强制(動員(강제동원)으로 派兵(파병) 수많은 死傷者(사상자)가 발생
그목숨값으로 박정희정권은 政權(정권)을 維持(유지)하는 天人共怒(천인공노)할 漫行(만행)을 저질렀고----經濟開發(경제개발)도 좋치만 수많은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하자고 同意(동의)해준
국민들은 없었습니다
이시기 獨裁政府(독재정부)야 뭐라하던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의 傷痕(상흔)을 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없었고 새로유입되는 西歐(서구)文物(문물)과 流行(유행)에는
敏感(민감)한 反應(반응)을 보이는 部類(부류)도 存在(존재)했습니다
이러한 激動期(격동기)에 副應(부응)하여 대중가요도 時代(시대)와 時流(시류)를 反映(반영)하는 노래들이 등장했음은 當然(당연)한일입니다 그래서 流行歌(유행가)라는 명칭이 붙었지 않습니까??
태어나지 말아야했던 私生兒(사생아) 같은 이승만 自由黨政權(자유당정권)의 腐敗(부패)와 無能(무능)에이은 不正選擧(부정선거)를 糾彈(규탄)하는<有情千里(유정천리)> 같은
政治諷刺歌(정치풍자가)가 등장하고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을 讚揚(찬양)하는<四月(사월)의깃발>같은 革命歌(혁명가)도 발표되었고 創作意圖(창작의도)를 결코 贊成(찬성)할 수 없는
<겨레의 榮光(영광)>같은 五一六coup d’ etat-오일육쿠테타- 讚歌(찬가)도 존재했습니다
비슷한시기인 일제강점기 歌謠生活(가요생활)을 시작한 박시춘과 나화랑은 전혀다른 性格(성격)의 讚歌(찬가)를 創作(창작)하는바 박시춘은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을 나화랑은
五日六(오일육) 軍士coup d’eat-군사쿠테타를 素材(소재)로 했읍니다
四月(사월)의 깃발이여 잊지못할 그날이여
하늘이 무너져라 외치던 民主主權(민주주권)
그 主權(주권) 찾은날에 그대들은 가셨나니
壬子(임자)없는 冊(책)가방을 가슴에 고이안고
흘리는 눈물속에 어린넋을 잠재우리
四月(사월)의 불길이여 피에젖은 꽃송이여
빈주먹 빈손으로 쏟아져나온 校門(교문)
어른이 못한일을 그대들은 하였으니
民主大韓(민주대한) 새터전에 礎石(초석)된 어린 英雄(영웅)
祖國(조국)의 품안에서 고이고이 잠드소서-----------------------------------------------------------------------반야월사 박시춘곡 남인수,합창단 노래<四月(사월)의 깃발>
이노래는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으로 피를흘리며 쓰러진 革命烈士(혁명열사)에게 바치는 獻歌(헌가)입니다
한몸犧牲(희생)으로 民主主權(민주주권)을 찾았건만 임자잃은 책가방에 눈물이 쏟아진다는 悲感(비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월의 불길이여 피에젖은 꽃송이여” “사월의 太陽(태양)이여 뭉쳐진 대열이여”처럼 꽃송이와 대열이모두”祖國(조국)의 별이되어 燦爛(찬란)히 빛날 것”을 念願(염원)하고 있습니다
참아오다 참아오다 더못참아
보아오다 보아오다 더못보아
나라와 겨례위해 일어선 그날새벽
아~ 5월16일 5월16일
잠을깨라 외치며 악의씨를 뽑았네
거룩한 큰뜻을 讚揚(찬양)하며
우리모두 감사의꽃다발을 바치자------------------------------------------------------------------------------------반야월사, 나화랑곡<겨레의 榮光(영광)>
피흘리며 어렵게 이승만獨裁政權(독재정권)으로 부터 되찾은 自由(자유)를--- 自己本分(자기본분)인 나라를 지키는 軍人身分(군인신분)을 妄却(망각)하고 自己(자기)가 몸받쳐 지켜내야할
對象(대상)인 國民(국민)을 향해 탱크를 照準(조준)하며 Coup d’etat-쿠테타-를 일으켜 또다시 自由(자유)가 구속된 暗黑(암흑)의 時代(시대)를연 五一六主犯(오일육주범)들에게 “감사의꽃다발을
바치자”고 하고 있습니다
쿠테타를 “겨레의 榮光(영광)”이라 表記(표기)한 題目(제목)은 할말을 잊게합니다
더구나 반야월은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을 讚揚(찬양)하는 歌詞(가사)를쓴지 얼마나되었다고 時流(시류)가 바뀌니 小信(소신)도없이 이번엔 또 쿠테타 勢力(세력)을 위해 가사를 짓고있습니다
마치 貞操(정조)라는 槪念(개념)조차 알지못하는 娼女(창녀)처럼-----
1275--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b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 “富益富(부익부) 貧益貧(빈익빈)”을 招來(초래)한 經濟不均衡(경제불균형)----등등 수많은 問題點(문제점)을 露出(노출)시키고 “쿠테타정권의 政權延長(정권연장)을위해
名分(명분)쌓기용” 이라는 深恨批判(심한비판)을 惹起(야기)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하여 推進(추진)된 産業化(산업화)물결에 맞추어 그 後遺症(후유증)으로 急速(급속)히 進行(진행)
될수밖에 없었던 都市化(도시화) 결과 너도나도 서울로 都市(도시)로 몰려드는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을 諷刺(풍자)하는 가요도 流行(유행)합니다
그곡은 바로 口傳民謠(구전민요)에다 mambo-rhythm –맘보리듬-을 接木(접목)시킨 <닐리리mambo-맘보->와함께 가수김정애의 대표곡인<앵두나무 處女(처녀)>와 처음 양복쟁이출신
작곡가 한복남이 그시기 流行(유행)하던 tangorhythm탱고리듬- 곡으로 野心(야심)차게 創作(창작)해 큰기대를걸고<꿈에본내고향>의 한정무에게 취입시켰으나 別無反應(별무반응)
이에 평소 조금은 品格(품격)있는歌謠(가요)를 부르던 안다성에게 어울지않을듯한 가요를 부르게하는 逆發想(역발상)으로 歌謠愛好家(가요애호가)들의 注目(주목)을 받는데 成功(성공)
끝내는 힛트로 이어지는<에레나가된 순희>입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處女(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몰래 내던지고
말만들은 서울로 누굴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石油燈盞(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네總角(총각) 맥풀렸네
올가을 豊年歌(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여것만
新婦(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대니
복돌이도 삼용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妖術(요술)쟁이 찾아갈곳 못되더라
새빨간 그입술에 웃음파는 에레나야
헛苦生(고생)하지말고 故鄕(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천봉사한복남곡 김정애노래<앵두나무 處女(처녀)>
상기곡 “앵두나무처녀” 좀더 상세한 설명은 <종횡무진가요사338> 참조바랍니다
그날밤 劇場(극장)앞에 그驛前(역전) cabaret-카바레-에서
보았다는 그所聞(소문) 들리는 순희
石油燈(석유등) 燈盞(등잔)밑에 밤을새면서
실패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밤도 party-파티-에서 춤을 추더라
그빛깔 dress-드레스-에다 그寶石(보석) 귀거리에다
목이메여 港口(항구)에서 운다는 순희
시집갈 열아홉살 꿈을꾸면서 노래하던 순희가
避難(피난)왔던 순희가 말소리도 異常(이상)하게 달라진 순희
오늘밤도 洋(양)담배를 피고 있더냐-----------------------------------------------------------------손로원사 한복남곡 한정무노래<에레나가된 순희>
박정희 쿠테타세력의 輿論(收斂(여론수렴))없는 軍事作戰(군사작전)하듯 몰아부친 都市化(도시화) 産業化(산업화)는 肯定的(긍정적)얼굴보다는 急擊(급격)히 추진된 도시화, 산업화로 서울과시골의
經濟的乖離(경제적괴리)가 加一層深化(가일층심화)된 結果(결과) 富益富(부익부)貧益貧(빈익빈)을 초래한 經濟的不均衡(경제적불균형)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어두운 그늘이 社會全般(사회전반)에
독버섯처럼 번져갔습니다
말하자면 急速(급속)히 進行(진행)된 都市化(도시화), 産業化(산업화)로 인한 그否定的(부정적)얼굴이라 할수있는 서울과시골의 經濟的乖離(경제적괴리), 經濟不均衡(경제불균형) 등과
그後遺症(후유증)이라 할수있는 어두운 그늘이 社會(사회)全般(전반)에 길게 뻗어나갔던 것입니다
1276--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c
1960년대 歌手(가수) 裵湖(배호)는 박정희의 我執(아집)으로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인해 急擊(급격)하게 進行(진행)된 産業化(산업화)로인해--- 그後遺症(후유증)인 시골을 疲弊(피폐)시키고
都市化(도시화)로 치달은--- 都市(도시)의 어두운얼굴 陰鬱(음울)한 風景(풍경)을 어두운목소리 elegy-엘레지-로 읊조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身分上昇(신분상승), 慾望(욕망)의 噴出(분출)과 挫折(좌절)에서 오는 絶望感(절망감)을 落鄕(낙향)의 쓸쓸한 情緖(정서)로 풀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두운 도시풍경과 다르게 세련된 도시생활과 감각을 노래한 도시낭만가 도 등장했습니다
이씨스터즈의<서울의 아가씨> 김상희<대머리 總角(총각)>이 代表的歌謠(대표적가요)라는 主張(주장)이보이나------ 각자의 想像(상상)에 맡길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强要(강요)된 肯定的(긍정적)이고 樂觀的(낙관적)인노래는 政府(정부)에의하여 主導(주도)된 健全歌謠(건전가요)부르기, 義務的(의무적)으로 健全歌謠(건전가요) 음반에싣기로 나타납니다
肯定的(긍정적) 이고 樂觀的(낙관적)인 노래는 政府主導(정부주도)의 健全歌謠(건전가요) 부르기 運動(운동)으로 點火(점화)되어 한명숙의<우리마을> patti kim의<서울의 讚歌(찬가)><잘살아보세>
로 이어집니다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바람을타고 하늘하늘
물동이이고 가는處女(처녀) 치맛자락 하늘하늘
푸른호박이 주렁주렁 草家(초가)지붕에 주렁주렁
일하는 總角(총각)이마에는 땀방울이 주렁주렁
우리마을 살기좋은곳 景致(경치)좋고 人心(인심)좋아
봄가을엔 오곡이 豊盛(풍성) 주렁주렁 너울너울 무르익어요
밤이 깊으면 소근소근 저마다 별이 소근소근
앞집處女(처녀)와 뒷집 總角(총각) 냇가에에서 소근소근--------------------------------------------------------손석우사, 곡 한명숙노래<우리마을>
上記(상기) “우리마을”은 <종횡무진가요사 415>를 참조바랍니다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한번 잘살아 보세
錦繡-금수-나 江山(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꾸어 가면
알뜰한 살림 재미가 절로
富貴榮華(부귀영화)도 우리것이다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한번 잘살이보세 잘살아보세--------------------------------------------------------------------한운사사, 김희조곡 블루벨즈노래<잘살아보세>
産業化(산업화)와 同時(동시)에 進行(진행)된 새마을운동은 健全歌謠運動(건전가요운동)의 中心地(중심지)였습니다
허지만 어차피 군사쿠테타 정부의 一方的(일방적) 强要(강요)에의하여 始作(시작)된 運動(운동)이였기에 國民(국민)들의 外面(외면)으로 그들만의 잔치였을뿐입니다
이로인하여 官制歌謠(관제가요) 일수밖에없는 <새마을노래>뿐만 아니라 다수의 새마을 讚歌(찬가)들이 classic作家(클래식작가)들의 一方的 動員(일방적동원)으로 創作(창작)되었습니다
물론 1960년대는 六二五動亂(육이오동란)의 傷痕(상흔)이 완전히 가신 것은 결코아닙니다
戰爭未亡人(전쟁미망인), 戰爭孤兒(전쟁고아)들의 疲弊(피폐)한 삶은 1960년대도 여전히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고달픈 삶역시 歌謠(가요)에 反映(반영)되어 戰爭未亡人(전쟁미망인)과 孤兒(고아)가된 아이의 슬픔을 노래한 歌謠(가요)도 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1960년대 歌謠(가요)에서 눈에띄는 風景(풍경)은 1964년 1월 쿠테타세력의 一方的(일방적) 强制動員(강제동원)에 의한 名分(명분)없는 越南派兵(월남파병)에 따른 越南派兵歌(월남파병가) 가 洪水(홍수)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獨裁政權(독재정권)에 의하여 정권연장을위해 强制派遣(강제파견)한 군인들의 士氣振作(사기진작)을 위한다는 强要(강요)에의한 혹은 레코드사의 政府(정부)눈치보기에 의하여 義務的(의무적)으로 越南派兵歌(월남파병가)를 發賣(발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數十萬(수십만)의 젊은이들이 머나먼 越南(월남)땅으로 戰爭(전쟁)을 치루러가것은 近代史(근대사)에 처음있는 일이었고 自發的(자발적)으로 外國(외국)에 派兵(파병)된 것은 처음이었다”
는 憤怒(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치게하는 글이보입니다
쿠테타정권이 우리젊은이들을 美國傭兵(미국용병)으로 돈을받고 그것도 强制(강제)動員(강제동원)해서 파견했지 自發的派兵(자발적파병)이 결코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돈으로 박정희정권은 政權維持(정권유지)에 그돈을 使用(사용)했음을 알아야합니다
더러는 “越南派兵(월남파병)으로 名分(명분)없이 싸우다 그렇게 그리던 祖國(조국)땅을 다시는 밟지못하고 개죽음한 목숨값으로 받은 dollar-달러-가 經濟復興(경제부흥)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문이
막히게하는 글도보입니다
누구를위한 經濟復興(경제부흥)이며 우리국민중 누가 그런犧牲(희생)을 치르면서까지 經濟復興(경제부흥)하자고 同意(동의)해주었는가요”??
國民(국민)들의 同意(동의)도없이 쿠테타세력의 一方的決定(일방적결정)으로 아무런명분없이 목숨을건 전쟁터에 美國傭兵(미국용병)으로 강제로 끌려갔기에 越南派兵家族(월남파병가족)들의
억울함과 이별의 슬픔은 軍府生角(군부생각)보다 훨씬큰것이었기에 이를 동정하는 “全國民(전국민)들의 關心(관심)이 越南派兵(월남파병)에 執中(집중)될수밖에없었고 이에 副應(부응)하여 많은
越南派兵歌(월남파병가) 가 불려졌다”는 너무나 歷史意識(역사의식)이 不足(부족)하고 純眞(순진)한 글이보입니다
關心(관심)이 執中(집중)되었기에 이에 副應(부응)한게 아니라 軍事政府(군사정부)가 강제로 派兵歌(파병가)를 創作(창작) 부르게하고 放送局(방송국)을 이미 그들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수없이
派兵歌(파병가)를 放送(방송)케 해서 눈에띄게 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
1277-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d
월남 파병가는 최정자가 취입한<越南(월남)에서 보내온 오빠의 便紙(편지)>로부터 俳優(배우) 수애 主演(주연)으로 映畵化(영화화)되기도한 “담배는청자 노래는추자”로 회자되던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金上士(김상사) >있습니다 이러한 越南(월남)素材(소재)歌謠(가요)는 곧 따로란을 마련 상세한 설명을 드리고 여기서서 줄입니다
“월남에돌아온김상사” 는 <종횡무진가요사548>를 참조바랍니다
1961년 文化放送(문화방송), 1963년 東亞放送(동아방송), 1964년 東洋放送(동양방송) 등 radio-放送局(라디오 방송국)이 차례로 開局(개국)하여 大衆歌謠(대중가요)가 라디오전파를타고
全國(전국)坊坊曲曲(방방곡곡)을 누빈 것은 1960년대 大衆歌謠史(대중가요사) 의 큰 地殼變動(지각변동) 이었습니다
單純(단순)히 音盤(음반)이나 錄音器(녹음기) 公演場(공연장)에서 듣는 音樂(음악)은 普及(보급)과 受容(수용)에 限界(한계)가 있기 때문에 radio 放送電波(라디오방송전파)는 全國(전국)에서 널리,
쉽게 들을수 있다는점에서 그 波及效果(파급효과)은 매우큽니다
거기에다 tv時代(시대)가 활짝문을열어서 大衆音樂(대중음악)의 普及(보급)과 享受(향수)는 급물살을 탑니다
1961년 마치 軍事作戰(군사작전)하듯 쿠테타세력들이 서둘러 開局(개국)한 kbs-tv 이어서 1964년東洋(동양) tv 1969년mbc-tv 가 연달아 開局(개국)합니다.tv 브라운관을 통하여 안방에서 歌手(가수)
들의 노래와 공연을 볼수있은 시대가 된것입니다
Radio 放送(방송)擴大(확대), tv局(국)開設(개설)은 그야말로 韓國大衆歌謠史(한국대중사)에서 큰劃(획)을긋는 事件(사건)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tv放送開局(방송개국)으로 어쩔수없이 萎縮(위축)될수밖에 없었지만 연간 200여편의 映畵製作(영화제작)도 大衆音樂(대중음악)의 大衆化(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앞서 言及(언급)했듯이 kbs-radio 連續劇(연속극)으로 放送(방송)된<꿈은사라지고>가 안다성과합창단 의 主題歌(주제가)와더불어 人氣(인기)를끌자 곧 映畵化(영화화)되고 이영화 製作者(제작자)는
“ 주연배우가 주제가를 불렀다”는 映畵弘報(영화홍보)에 利用(이용)코자 男女主演俳優(남녀주연배우) 최무룡, 문정숙에게 각각 主題歌(주제가) <꿈은사라지고> 부주제가<나는 가야지>를
吹入(취입)시켜서 이 企劃(기획)이 보기좋게 成功(성공) 이후부터 영화가 成功(성공)하려면 좋은 主題歌(주제가)가 必須(필수)라는 認識(인식)이 映畵界(영화계)에 크게 流行(유행)합니다
이리하여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가 大量發表(대량발표)되어 結果的(결과적)으로 映畵製作(영화제작)이 大衆音樂發展(대중음악발전)에 크게기여합니다
이로서 映畵音樂(영화음악)의 renaissance-르네상스-가 열립니다
世上事(세상사)는 恒常(항상) 陰(음)과) 陽(양) 이 존재하는이치 tv 放送(방송)이 開局(개국)하고 繁盛(번성)함에따라 같은 흥행물인 樂劇團show-악극단 쇼-같은 傳統(전통) 公演樣式(공연양식)이
萎縮(위축)되다 끝내 復活(부활)을위해 몸부림치다 死滅(사멸)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간 韓國大衆歌謠(한국대중가요)는 各種(각종) 樂劇團(악극단)과 함께 發展(발전)해온 것이 事實(사실)입니다
樂劇團(악극단)에 揷入曲(삽입곡)으로 創作(창작)되고 舞臺(무대)서 불린곡이 곧 大衆(대중)들속에서 流行(유행)하곤 했으니까요
韓國歌手(한국가수)의 出發(출발)도 결국은 幕間歌手(막간가수)에서 始作(시작)되었음을 잊을수없습니다
그러한 樂劇團(악극단)의 萎縮(위축)과 死滅(사멸)은 大衆歌謠生産(대중가요생산) system-시스템-이 바뀌는 중요한 轉機(전기) 가 됩니다
樂劇團(악극단)에서 供給(공급)되던 大衆歌謠(대중가요)가 放送局(방송국)에서 drama 主題歌(드라마주제가)등으로 創作(창작)되어 供給(공급)되기 시작한것입니다
또하나 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에서 눈에띄는 懸象(현상)은 高學歷(고학력)의 歌手(가수), 學士歌手(학사가수)들의 大擧登場(대거등장)입니다
實在的(실재적)인 우리 大衆歌手(대중가수)들의 出發點(출발점)인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는 新民謠(신민요)경우처럼 妓生歌手(기생가수)들이 중심이었고 一般歌手(일반가수)들도 比較的(비교적)
低學歷(저학력)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시기는 學歷(학력)보다는 歌唱能力爲主(가창능력위주) 歌手燈用(가수등용)이었지만 윤심덕, 안기영, 이규남, 채규엽등 高學歷(고학력)의 가수들도 例外的(예외적)으로 있었습니다
어차피 시기가 시기인만큼 대부분 저학력, 무학력의 歌手(가수)들 中心(중심)이었음이 분명합니다
1960년대들어서 박춘석, 김상희, 최희준, 길옥윤, 위키리, 안다성, 유주용, 박형준, 박경원등 고학력의 가요인들이 大擧登場(대거등장)했습니다
특히 최희준, 김상희는 “學士歌手(학사가수)”라는 稱號(칭호)로 대중들의 期待(기대)와 人氣(인기)를 듬뿍받았습니다
끝없는 廣野(광야) 오늘도 하루 소와말을 동무삼는 나는
외로운 牧童(목동) 흐러흐러서 가는곳어데 東西南北(동서남북)
바람부는대로 그리운 故鄕(고향)은 언제 언제 가보나
無情(무정)한 歲月(세월)오늘도흘러 푸른하늘 지붕삼는 나는
외로운 牧童(목동) 눈을 부치고 꿈이나 꾸리
부모형제 정든 마을사람 그리운사람과는 언제언제 만나나----------------------------------------------------------------------------손석우사,곡 최희준 debut-曲(데뷔곡)<牧童(목동)의 노래.
이는 그만큼 大衆音樂(대중음악)에 대한 認識變化(인식변화)의 契機(계기)가 됩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을”딴따라_라는 卑俗語(비속어)로 貶下(폄하)하던 認識(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原來(원래)”딴따라”라는 나팔, 트럼펫 등 악기소리의 擬聲語(의성어)인 “tantara”에서 나온말입니다
대중음악이 고학력자들도 즐기는 고급예술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1278--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e
1960년대는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비록 1961년 박정희 아집으로 企劃(기획)된 軍士coup d”etat-군사 쿠테타-로 그빛을 잃었지만 四一九(사일구)는 1948년 반쪽짜리 政府樹立(정부수립)후 12년간 지속된 政治謀利輩(정치모리배)
이승만의 腐敗(부패)한 自由黨(자유당)을 淸算(청산)하는 歷史的(역사적) 事件(사건)이었습니다
수많은 學生(학생)들과 市民(시민)들이 피를 뿌리고서 거두어낸 民主主義(민주주의)의 勝利(승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革命(혁명)의 불길을 당긴 主體(주체)가 學生(학생)들었다는 것이 衝擊的(충격적)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學校(학교)에서 배운 正義(정의)와 自由(자유)의 精神(정신)을 몸소 政治鬪爭(정치투쟁)으로 實踐(실천)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그야말로 세계사적으로 젊은이들이 개혁의 선봉에선 student power-스튜던트파워-時代(시대)였던 것입니다
그改革(개혁)의 물결이 한국에도 밀려들어와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의 導火線(도화선)이 된것입니다
東學革命(동학혁명), 三一運動(삼일운동)精神(정신)을 繼承(계승)한 眞情(진정)한 民衆革命(민중혁명)”밑으로부터의 革命(혁명)” 四一九(사일구)였던 것입니다
이승만 腐敗政權(부패정권)밑에서 신음하던 庶民(서민)들의 實狀(실상)을 김용만의 漫謠(만요)에서 찾아볼수있습니다
돈이 떨어져 back-빽-이 떨어져 愛人(애인)마져 떨어져
이것참 야단났네 큰탈이 났네
대포한잠 生角(생각)나네 갈비한대 뜯고싶네
落鐵(낙철)이야 빈털터리야 三等人生(삼등인생)이라
신떨어져 洋服(양복)떨어져 담배꽁초 떨어져
요것참 기막히네 脈(맥)이풀렸네
하늘에서 돈벼락이 씽씽불어 떨어져라
落鐵(낙철)지갑 먼지만 난다 三等人生(삼등인생) 이라-------------------------------------------------------반야월사,김교성곡 김용만노래<三 等人生(산등인생)>
이노래가 유행하던 이승만정권말기 그렇게 한반도의 분단의 고착화를 염려해 열혈지사들과 국민들이 반대했건만 오로지 집권욕과 역사의식 부족의 미군의 합작으로 반쪽짜리 정부가수립되고
나름대로 야심차게? 출발한 제1共和國(공화국) 자유당정권은 육이오전쟁후 극심한 不淨腐敗(부정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자유당에 빌붙은 집권층과 있는자들은 떵떵거리며 잘살고
힘없는 庶民(서민)들은 가난의 桎梏(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富益富貧益貧(부익부 빈익빈)의 社會構造(사회구조)가 深化(심화)되었습니다
그러한 당시의 社會現象(사회현상)을 赤裸裸(적나라)하게 告發(고발)한 것이 上記曲(상기곡) <三等人生(삼등인생)의 實體(실체)입니다
노래 題目(제목)처럼 그 當時(당시) 大衆(대중)들은 大部分(대부분) 三等人生(삼등인생)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더 正確(정확)히 表現(표현)하면 腐敗(부패)하고 無能 (무능)한 自由黨政權(자유정권)으로 인하여 이러한 三等人生(삼등인생)에서 벗어날수있는 機會(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돈떨어 지니 마치 當然(당연)한것처럼 愛人(애인)도 떨어지고 대포한잔, 부잣집 개도먹는 갈비한대 뜯을수도 없습니다
신떨어지고 담배꽁마져 떨어져 삼등인생으로 살아갈수 밖에없는 것이 當代(당대)나 지금이나 庶民(서민)들의 形便(형편) 입니다
노래가사중”落鐵(낙철)”은 落鐵主事(낙철주사) 라는말로 立身出世(입신출세)에 失敗(실패)하여 落鄕(낙향)에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곧 落鐵(낙철)은 “三等人生(삼등인생)” 의 또다른 表現(표현)입니다
“삼등인생”은 <종횡무진가요사 695>를 참조바랍니다
이렇게 自由黨政權下意(자유당정권하) 庶民(서민)들은 밑바닥 人生(인생)을 벗어나지못한 삼등인생, 落鐵人生(낙철인생)으로 延命(연명)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歲月(세월)이 흐른 지금은 形便(형편)이 좀 나아졌읍니까??
이러한 社會的(사회적) 不條理(부조리), 不均衡懸象(불균형현상)이 결국 民衆革命(민중혁명)의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기에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이 결국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점에서 삼등인생은 流行歌(유행가)이면서 革命歌謠(혁명가요)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된것입니다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의 具體的徵候(구체적징후)는 作曲意圖(작곡의도)와는 相關(상관)없이 “政治諷刺歌(정치풍자가)” 가 되어버린 박춘석, 손인호콤비의<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에서 드러납니다
1279--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f
목이메인 離別歌(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湖南線(호남선)에
헤어지던 그人事(인사)가 野俗(야속)도 하더란다
다시못올 그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罪(죄)도많은 靑春(청춘)이냐
바나리는 湖南線(호남선)에 떠나가는 列車(열차)마다
怨讐(원수)와 같더란다-----------------------------------------------------------------------------------------------------손로원작사 박춘석곡 손인호노래<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
가수 白一姬(백일희)가 歌手生活(가수생활) 草創期(초창기) 藝名(예명)을 pop-singer-팝가수-peggy lee 에 따와서 “페기리”로 使用時(사용시) 그녀에게 作曲(작곡)해준 <mambo 아리랑>으로
作曲debut-작곡데뷔-를 한것으로 알려진 作曲家(작곡가) 박춘석의 實在的(실재적) 첫힛트곡 이기도 한<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은 사실 政治諷刺歌(정치풍자가)와는 전혀 相關(상관)없는
歌謠(가요)입니다
작곡가 박춘석은 1955년 <shoeshine-boy슈사인보이><아리랑 牧童(목동)><나는 열일곱살이예요><이이고나 요맹꽁>등을 힛트시킨 박단마쇼단 악단장으로 활동시 목포공연을 위해서
湖南線列車(호남선열차)에 몸을실었을 때 때마침 차장에는 부슬비가 휘날렸고 번뜩이는 作曲才能(작곡재능)이 뛰어난 그는 湖南線列車(호남선열차)에서 이와 연관된 想念(상념)에 젖었습니다
“비나리는 삼랑진” “비내리는 경부선”등 京釜線(경부선) 노래는 있는데 왜 湖南線(호남선)노래는 듣기힘든가??”
그러고는 노레제목을<비내리는 호남선>으로 정해놓고 가락을 반복하여 흥얼거리며 서울로올라와 손로원에게 melody-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의뢰합니다
1956년 2월경 만들어진 이노래가 그당시 自由黨(자유당)의 獨裁(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에게”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슬로건으로 이승만독재에 도전하여 이승만 독재를 끝내줄것으로 기대하는
國民(국민)들로부터 旋風的(선풍적) 人氣(인기)를 얻고있던 民主黨(민주당) 大統領候補(대통령후보) 신익희박사가 遊說(유세)를위해 이동하던 도중 마치 運命(운명)처럼 湖南線列車(호남선열차)
안에서 急逝(급서) 하자 巷間(항간)에는 逝去場所(서거장소)와 同一(동일)의 場所(장소)인 湖南線(호남선)을 노래한<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을 召喚(소환)하여 신익희박사의 未亡人(미망인)이
작사했다는 헛所聞(소문)이 流布(유포)되기도 하여 마치 追悼歌(추도가),. 民主黨歌(민주당가) 처럼 불렸습니다
곡을 취입한 손인호는 곡을 창작한 박춘석으로부터 악보를 넘겨받았으나 吹入消息(취입소식)이없자 일주일후 그에게악보를 가지고가자 영화음악을 녹음중이던 그가 짬을내어 그간 손인호에게
주었던 신곡들을 녹음했는데 “1주일전 악보를준 비나리는 호남선도 같이 취입” 을요구 녹음을했고 녹음중 oasis-record 管絃樂團(관현악단) guitar奏者(키타주자)가 반주중 마지막음 하나를
틀렸는데도 그냥녹음을 할정도로 oasis-record 나 박춘석도 별關心(관심)도 期待(기대)도 하지않은 노래였습니다
樂譜(악보)를 넘겨주고도 吹入通報(취입통보)도 안할정도로 創作者(창작자) 본인도 오아시스레코드사도 별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신익희를 追從(추종)하는 大衆(대중)들은 이노래를
熱唱(열창)하며 流行(유행)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노래가 심상찮게 大流行(대유행) 하자 박춘석은 내무부 치안국으로 强制召喚(강제소환)되 “신익희의 <追慕歌(추모가)> 로 만든 것이 아니냐,” “신익희선생의 未亡人(미망인)이 가사를
쓴게맞느냐”며 問招(문초)를 당했으나 當時發行新聞(당시 발행신문)등 證憑資料(증빙자료)를 제출하여 嫌疑(혐의)를 벗고 풀려났으나 작사를 한 손로원은 오랫동안 불려다니며 고초를
당했다합니다
앞서 언급한 <mambo아리랑> 1953년 lucky-record 서 박춘석사, 곡 peggy lee-페기리-라는가수가 불렀고 이면에는 <추라도사랑>이 실려있습니다
여기서 페기리는 백일희의 또다른 藝名(예명)입니다
1960년대 政治諷刺歌(정치풍자가) 2탄은 반야월사, 김부해곡, 박재홍의<有情千里(유정천리)입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아들 손을잡고
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메산골 내고향에
못살아도 나는좋아 외로워도 나는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이노래는 原來(원래) 同名映畵主題歌(동명영화주제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政治諷刺歌(정치풍자가)로 parody-패러디-되면서 一躍(일약) 國民歌謠(국민가요)로 浮上(부상)했습니다
大邱(대구)에서시작된 parody歌詞(패러디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따라서
장면박사 홀로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가도가도 끝이없는 當選(당선)길은 몇굽이냐
自由黨(자유당)에 꽃이피네 民主黨(민주당)에 비가오네
世上(세상)을 怨望(원망)하랴 自由黨(자유당)을 怨望(원망)하랴
춘삼월 15일에 早期選擧(조기선거) 웬말이냐
千里萬里(천리만리) 他國(타국)땅에 博士(박사)죽음 웬말이냐
설움 어린신문들고 百姓(백성)들이 울고있네
1280--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g
上記(상기)曲(곡) 첫句節(구절)에 나오는”---해공선생 뒤를따라---“나오는 海公(해공)은 신익희박사의 호이며 앞서설명드린<비나리는 호남선>을 정치풍자가로 만든 주인공입니다
둘째줄의”—장면박사 홀로두고---“의 장면은 사일구혁명으로 이승만독재정권이 무너진후 치러진선거에서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윤보선정부의 부대통령을 지냈습니다
하지만<有情千里(유정천리)>의 主人公(주인공)은 조병옥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도산안창호선생과 함께 興士團(흥사단)을 조직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했고 1960년 民主黨(민주당) 大統領候補(대통령후보)로 나섰으나 신익희 후보처럼 또다시 갑작스레 사망했습니다
1960년, 1월 開腹手術(개복수술)차 미국 육군병원에 入院中(입원중) 갑자기 逝去(서거)했습니다
選擧(선거)를 한달앞두고 作故(작고)한 갑작스런 죽음에대해 많은 疑惑(의혹)들이 뒤따랐습니다
이로서 李承晩獨裁(이승만독재)를 早期(조기)에 끝낼 기회를 두번이나놓치는 不運(불운)에 땅을쳐야했습니다
强力(강력)한 野黨候補者(야당후보자) 조병옥의 逝去後(서거후) 輿論(여론)이 惡化(악화)될대로 惡化(악화)되었음을 皮膚(피부)로 느낀 自由黨政權(자유당정권)은 스스로 終末(종말)로 치다를수밖에 없는
三一五不正選擧(삼일오부정선거)를 劃策(획책)하여 그들의 死亡宣告(사망선고)인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을 招來(초래)하고 맙니다
결국 조병옥의 疑問(의문)스런 죽음은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의 導火線(도화선)이 되고맙니다
이처럼 “有情千里(유정천리)”는 그렇게 緊迫(긴박)하게 돌아가던 1960년전후의 政治狀況(정치상황)을 銳利(예리)하게 諷刺(풍자)하고 있습니다
결국 不正選擧(부정선거)로”自由黨(자유당)에 꽃이피고 民主黨(민주당)에 비가왔지만” 한달만에 破局(파국)을 맞고맙니다
이노래를 들으면 민중들은 자유당, 이승만정권의 沒落(몰락)을 豫感(예감)했으며 결국 四一九(사일구)를 推動(추동)하는 힘이된것입니다
大邱(대구)의 패러디 가사를 보면---조병옥박사 신익희박사의 죽음으로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국민들이 원하는 大統領當選(대통령당선)이 번번히 霧散(무산) 되자—“가도가도 當選(당선)길은
몇구비냐” 며 恨歎(한탄)하고 있습니다
신익희씨에 이은 조병옥박사마저 急逝(급서)해 選擧(선거)가 自由黨(자유당)에 有利(유리)해지자 “自由黨(자유당)에 꽃이피네 民主黨(민주당)에 痛恨(통한)의 눈물 같은 비가 내린다” 고
諷刺(풍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래한곡이 끼치는 大衆的(대중적) 波及效果(파급효과)는 결코 한낱 流行歌(유행가)라 無視(무시)하지 못할정도로 엄청났던 것입니다
이가요는 마치 東學革命(동학혁명)때 民衆(민중)들사이에 널리 불려진 革命歌謠(혁명가요) “파랑새요”를 聯想(연상)시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
앞서 여러 번 설명드렸듯이 그時期(시기) 民衆(민중)들은 이노래를 부르면서 녹두꽃으로 表象(표상)된 녹두장군 전봉준의 革命(혁명)意志(의지)와 熱氣(열기)를 高 調(고조) 시켰던 것입니다
녹두꽃으로 표상된 민중의힘, 그것이 동학혁명의 힘이요 源泉(원천)이 된것입니다
上記說明(상기설명) “파랑새요”는 <종횡무진가요사 648>에 상세히 설명되있으니 참조바랍니다
그힘이 다시 六十餘年(육십여년)만에 回生(회생)하여 學生(학생)들의 힘으로 噴出(분출)된것입니다
이를볼 때 노래한곡이 가져오는 政治的波及效果(정치적파급효과)가 얼마나 큰것인가를 斟酌(짐작)할수 있습니다
東學革命(동학혁명)에<파랑새요>가 있었다면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에는<有情千里(유정천리)>가 있었습니다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當時(당시) 學生(학생)들이 scrum-스크럼- 짜고 國會議事堂(국회의사당)으로, 景武臺(경무대)로 몰려가면서 부르던노래가”戰友歌(전우가)”였습니다
여기서”전우가”는 六二五動亂時(육이오동란시) 鴨綠江戰鬪(압록강전투)에서 불려지던 勝戰歌(승전가)인<戰友(전우)야잘자라>에서 parody-패러디-한 노래였습니다
이노래는 박시춘과 유호가 guitar-기타-를 튕겨가며 만든노래입니다
“戰友(전우)의 屍體(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내용을 담은노래는 삽시간에 유행하여 국민가요로 사랑받았습니다
군인들의 士氣振作(사기진작)을 위해만든곡이 이렇게 用途變更(용도변경)되어 獨裁政權打倒(독재정권타도)에 쓰일줄 누가 알았을까요??
개사가된 가사는”學友(학우)의 屍體(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催淚彈(최루탄) 煙氣(연기)속에 사라진 學友(학우)여—“였습니다
총탄과 최루탄연기속에 쓰러진 학우들의 시체를 넘어 국회의사당, 경무대로 떼를지어 몰려갔던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만의 降伏(항복)을 받아내고 獨裁政權(독재정권)을 崩壞(붕괴)시켰습니다
어른들이 눈치보느라 못한일을 햇병아리 취급받던 學生(학생)들이 이뤄낸것입니다
헌데 獨裁淸算過程(독재청산과정)서 致命的(치명적)失手(실수)를 합니다
그것은 獨裁政權(독재정권)의 首魁(수괴) 이승만을 逮捕(체포)해 應當(응당)의 罪(죄)값을 받게해야했는데 끝까지 責任(책임)지지않고 비겁하게 도망가는걸 放置(방치)한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軍事政府(군사정부)의 名分(명분)없는 coup d’etat-쿠테타-로 淸算作業(청산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습니다
1281—1960년대 大衆歌謠(대중가요)의 흐름-h
앞서 說明(설명)드린 “비나리는 湖南線(호남선)”을 부르기도 한 손인호의< 南原(남원)땅에 잠들었녜>는 四月革命(사월혁명)의 分水嶺(분수령)이된 馬山(마산) 金朱烈(김주열)烈士(열사)의 죽음을
노래한 悲歌(비가)입니다
馬山(마산) 金朱烈(김주열) 事態(사태)를 銳意注視(예의주시)하던 音盤製作者(음반제작자) 한복남은 이러한 好機(호기)를 놓힐리없었습니다
곧 作詞(작사)家(작사가) 차경철을 찾아가 가사를 의뢰하고 曲雰圍氣(곡분위기)를 高調(고조) 시키고자 愛國歌(애국가)까지 動員(동원), 往年(왕년)의 歌手出身(가수출신) 왕숙랑씨에게 臺詞(대사)를
吹入(취입)시켜 한곡의 金朱烈追募歌(김주열추모가)를 完成(완성)합니다
허나 이곡은 쿠테타정부시절” 騷擾(소요)를 惹起(야기)시킬수있다”는 理由(이유)로 臺詞(대사)를 除去(제거) 流行(유행)시켰으나 곧 잊혀지고 맙니다
寃痛(원통)하게 죽었구나 抑鬱(억울)하게 죽었구나
몸부림친 三一五(삼일오)는 그누가 만들었나
馬山市民(마산시민) 興奮(흥분)되어 銃(총)칼앞에 싸울적에
學徒(학도)겨레 장하도다 잊지못할 金朱烈(김주열)
無窮花(무궁화)꽃을안고 南原(남원)땅에 잠들었네
臺詞(대사)-왕숙랑----朱烈(주열) !! 南原(남원)땅을 떠나 馬山(마산)에서 工夫(공부)하여
成功(성공)한다더니 네가 죽다니 웬일이냐 그러나 내아들 장하다 지금은 슬퍼지도 않다
네가 원하고 원하던 우리民族(민족)의 自由(자유)는 學生(학생)들의 힘으로 찾고말았단다
아! 주열아 아! 주열아!!—------------------------愛國歌伴奏(애국가반주)---------
南原(남원)땅을 떠날적에 成功(성공)빌던 어머니 애처러운
주검안고 목메여 울적에 三千(삼천)겨레 興奮(흥분)되어
自由民族(자유민족) 찾으려고 學徒(학도)겨레 장하도다
잊지못할 金朱烈(김주열) 無窮花(무궁화)꽃을안고
南原(남원)땅에 잠들었네----------------------------------------------------------------------------------------------------차경철사 한복남곡 손인호노래<南原(남원)땅에 잠들었네>
1960년 3월15일 이승만의 자유당은 最大野黨(최대야당) rival-候補(라이벌후보) 조병옥박사가 逝去(서거)했는데도 選擧(선거)에 이길 自信(자신)이없자 마지막 終末(종말)로 가는길인 不正選擧(부정선거)
를 恣行(자행) 하던날 馬山市民(마산시민)들은 不義(불의)에맞서 決然(결연)히 일어날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80여명의 死傷者(사상자)가 續出(속출)했는데 이노래의 주인공 김주열은 처음 行方不明者(행방불명자) 가 되었다가 4월11일에야 마산앞바다에서 催淚彈(최루탄)이 눈에박힌채로 떠오르는
最惡(최악)의 狀況(상황)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당시 겨우17살 마산상고입학을 앞둔 꽃다운 靑年(청년)이었기에 이사실을 접한 국민들의 憤怒(분노)는 극에달해 마산서 2차시위가일어나고 事態(사태)는 自由黨(자유당)의 앞잡이 警察(경찰)로서도
어찌해볼수없는 狀況(상황)으로 치달았읍니다
김주열은 故鄕(고향)이 南原(남원)이었기에 그곳에 安葬(안장)되었고 이로인해 四一九革命(사일구혁명)의 導火線(도화선)에 불이붙었읍니다
노래에서는”寃痛(원통)하게죽은 김주열을 追募(추모)하며 그의넋이 나라를 지켜줄 無窮花(무궁화)꽃으로 永遠(영원)히 피어날것”을 祈願(기원)하고 있습니다
황금심의<어머니는 안울련다> 亦是(역시) 革命隊列(혁명대열)에 參與(참여)했습니다
銃彈(총탄)에 쓰러진 아들을 追募(추모)하는노래입니다
쥐면은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눈구비 얼음구비 길러낸 아들하나
이나라위한 洛花松(낙화송)이 내아들 장하였다
이 애미는 안울련다------------------------------------------------------------------------------------------------반야월사 박시춘곡 황금심노래<어머니는 안울련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어갈까” “눈구비 얼음구비” 살펴가며 愛之重之(애지중지)키운 아들이 獨裁(독재)의 銃彈(총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四月(사월) 봄이왔건만 子息(자식)은 永永(영영) 돌아올수없습니다
가슴이 미여지는 아픔이건만 어머니는 依然(의연)한 姿勢(자세)로 눈물을 머금고 아들의 죽음을 敬拜(경배)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殉國(순국) 했기때문입니다
이렇게 民主主義(민주주의)는 피를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子息(자식)무덤에 꽃을심고 冥福(명복)을 빌고있습니다
이노래는 한복남을 비롯한 音盤製作者(음반제작자)들이 金朱烈(김주열)의 어머니입장으로 돌아가 그心情(심정)을 最大限(최대한) 담으려 노력했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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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흔적남기기에 인색들 하시구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