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는 내게 "당신은 글을 쓰기 위해 암에 걸린 거야"라고 말했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가 옳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이 사진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마치 사진에 대한 글이 암에 대해 쓰는 것을 허락한 것처럼.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틀렸다.
나는 삶이 글의 '소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위한 '미지의 기획'을 원한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이 생각은 형식조차도 실제 내 삶에 의해 부여된 텍스트를 의미한다.
나는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절대 예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나왔다.
다수의 조각들로 이뤄진 - 그것 자체도 아직은 알 수 없는 M의 글의 조각들에 의해 부서지게 되겠지만 - 사진으로 쓴 글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무엇보다 이 현실을 담은 '최소한의 이야기를 만드는' 기회를 내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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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진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과거 속에서 노래는 확장되어 나가고, 사진은 멈춘다.
노래는 시간의 행복한 감정이며, 사진은 시간의 비극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한평생을 노래와 사진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과 연관된 어떤 노래를 떠올릴 수 있을까?
열심히 찾아봤지만 기억을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빈 옷장'이나 '단순한 열정'을 쓸 때였다, 라고 말할 만한 노래는 전혀 없다.
내게 글쓰기란 모든 감각의 정지 상태다.
다만 그것을 탄생시키고,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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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들의 구성은 어떤 것도 서로 비슷한 것이 없다.
매번 하나밖에 없는 구조인데(너무도 당연하다) 이유와 법칙은 우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연이란 사라진 신의 욕망, 그의 거대한 오르가슴, 분열된 빅뱅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근원에는 생명체들이 서로 끊임없이 반목한다는 같은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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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시체라는 물리적인 형태, 얼음처럼 차갑고 침묵하며, 후에 부패되는 것, 그런 것들은 내게 의미도, 소용도 없다.
확실한 것은 결국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나의 부재를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냉혹하게 말해 나는 시간 안에 있는 육체다.
나 자신이 시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생각할 재간이 없다.
우리를 기다리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림은 없다.
기억도 없다.
(2년 전에 지하철에 이런 광 고가 있었다. '우리가 자신의 노화를 기억하는 일은 드물다’)
이제 나는 과학적, 철학적, 예술적인 모든 연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無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임을, 그리고 無의 그림자가 어떤 형태로든 글을 따라 배회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무용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페드르, 고백 6, 보바리 부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구토, 바흐, 모차르트, 와토와 실레 그림 속의 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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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가능성에 모든 것이 달린 순간을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퀴리 연구소 병원에서 보낸 행복한 나날들을 기록한 이 사진들이 내게 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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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의 언어를 '믿으면서' 사용할 줄을 모른다.
시도를 해봤지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것은 사물의 언어, 물질적인 흔적의 언어, 가시적인 언어다.
(그 언어들을 단어로, 추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멈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진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라, 명백한 것들 앞에서, 사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증거 앞에서, 내가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는 ‘그는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을 피하는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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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일이라는 상품이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의 가치하락과 사물, 보수가 매우 좋지 않은 일에 대한 모독으로 이뤄진 매혹적인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특징 없는 옷들과는 거리가 먼, 사랑을 나눈 후 버려진 우리들의 옷들의 작품들을 다정하게 생각했다.
이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 내게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에게 존엄성을 돌려주는 것이자,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의 '신성한 제복'을 만들려는 시도로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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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곧 서로의 글을 교환할 것이다.
나는 그가 쓴 글을 보는 것이 두렵다.
그의 이 타성을, 욕망과 함께 나눈 일상이 감춘 관점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글을 통해 그것이 단번에 밝혀지는 것이 두렵다.
글은 우리를 갈라놓을까, 혹은 더 가깝게 만들까?
나는 그가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글을 쓴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와 상관없이 세상을 향하기를.
내 경우는, 그가 내 것을 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를 고려하여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단순히 사진에서 그리고 현재의 구체적인 흔적에서 내가 이중으로 매료되었던 것들을 탐색하여 하나의 텍스트 안에 모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트루빌에서의 우리 모습을 떠올린다.
수술을 받고 15일이 지난, 2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침대에 머물렀다.
매섭게 추웠고 빛이 밝았으며, 저녁이 오자 옅은 보라색이 됐다.
나는 M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치 그가 내 뱃속에서 나온 것처럼, 그의 머리가 내 허벅지 사이에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탄생, 제목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