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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면 주는 대로 패면 패는 대로
약속을 잘 지키는 섬처자가 육지-것!
*수악한 인간하고 족두리 틀어 올렸다.
순진한 비바리가 서울이라는 쟝글에
던져 졌다. 신랑은 승산을 안 따지고
마구, 마구 덤비다 실패만 거듭했다.
전세 돈 까지 뽑아 도전한 와이셔츠 ,
주문 판매업이 결국 쪽박 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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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행 비행기 표를 일단 끊어두고
이제 우리들의 인연도 이별이라는 이름으로
대단원이 그려지려나?
속으로는 피눈물을 머금고 있다.
밤에 무드도 없이 불도 안끄고 손만 꼭
잡고 눈만 멀뚱멀뚱한다.
이튼 날 김포 공항까지 나가 아내를
배웅하는데, 우아하고 처연한 기본폼 잡고
“내가 성공하면 꼭 다시 보자”했다.
여인은 탑승구로 들어가며 어깨 들먹이며
홀짝 홀짝 울어 재꼈다.
“저렇게 집에 가면 장인 잠모님 맘은 어떨까”
나는 은인에게 등짝을 찍은듯 배반자 기분이
되었다.
문주란의 만고강산, 삐약삐약 클라씩
“공항의 이별”이 *빽뮤지꾸로 슬슬 기어 나올 법도
하다. (무경험자는 겪어봐야 한다, 흑흑흑 된다)
한마디 말 못하고 돌아서는 당신을^^
붙잡아도 애원해도 소용없는 님인데-
아 ! 앗싸라비야!
비행기는 슈루룩 --- 떠나갔다.
그날 이후 땟거리 문제로 *노가다 판에 뛰어
들었다. 총각 때 건축 회사 직원 경험이 있지만 ,
만약에 헛디뎌 꼬박았다 하면 영영 골로가는
*아시바 작업 *디모도에 *개잡부 꼬라지 되었다.
보름 정도 지나고 간조를 보았다.
노임 받은 것 들고 비행기표 끊어 제주로 갔다.
천상천하 배짱과 담력이라면 절대 밀리지 않지만,
처가에서 날 보면 죽일 놈 하겠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두렵기도 했다.
돌담으로 된 집, 마당에 들어서니 마누라가 방에서
급히 뛰어 나와 날 꼭 안았다.
그것도 좋아서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고----,
아이코! 요 무슨 변고인고? 희한하네여^^
(살긴 살았다 휴—유)
이튼날부터 처가집 소유 밀감농장에나,
기억도 없는 깜부기 뽑으러 산으로 들로
끌려 나가 강제 노역을 당해야만 했다.
둘은 밤이면 바닷가를 손잡고 걸었다.
(이런 때, 돈만 좀 받혀주면 기똥찬
에로작품 되는데-- 돈이 철천지 *웬수였다)
서광의 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 될 대로
되라고, 허무해졌다.
그래도 밭에서 해거름쯤 돌아 올 때는 초짜배기
연인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거의 보름이 지나면서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한다는 깅상도 짜라 빠진
속담이 이 신삥 농사꾼을 더욱 옥죄고 괴롭혔다.
딱 1달이 되는 날, 아침!
저 갑니다, 하며 처갓집을 박차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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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하고도 3일 토요일 10시경 오늘
그 때의 풋풋한 여자는 쭈그럭 *할마시되어 있다.
그 할마시가 주면 주는 대로 패면 패는 대로 산다.
진짜다.
밥 차려 주면서도 간혹 유세를 한다.
“요즘 신랑 밥 차려 주는 여자 없다.
나는 순진해서 그렇지, 뭐“
첫댓글 거서리/선생님
오래간 만입니다. 작가님과 같이 음악과 같이
솔직하게 써내리신 말씀 너무나 재미났읍니다.
특히:[그때의 풋풋한 여자는 할마시가 되어 있다 또한 그
할마시가 주면 주는 대로 패면 패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이부분이 글 내용의 압귄입니다,
자주뵙어요.
거서리/님
건강하이소..^&^
하모 하모요,
행여 후일에
안동에서 단양 넘어가면
막걸리 합시다요,
영탁이 막걸리로 5-6병 싣고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강지처가 뭐라는 건지를 알 수 있는 글입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처억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냥 저냥 삽니다, 고맙습니다.
거서리님요
착하디착한 마나님 자랑 하시는거지요?
더늙어서 찬밥신세 안될라만 ㅎㅎ 알아서 하이소 ~*
자랑 아니라
찬밥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 입니다.
그러구러 사는 게 이 나이에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지요
그러면 처가집에서 저 갑니다 하고 도망 나오셨다가 다시 복귀하신게 몇년 정도 되신 건가요?
도망이 아니라 웃어른께 인사하는 거지요,
예의를 갖추어 인사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후 마누라가 돌아와 합류하여 ---
시골에서 우리 소유 가게에서 잡화점을 열었지요,
그뒤 곧 상경 도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서리 그러면 중간에 헤어짐 없이 잘 사신다는 말씀이시네요
저는 98년도에 저와 제 처 같이 회사 그만 두고 집에서 쉴때 장모님께서 장인, 장모, 사위, 딸 4사람이 청담동에서 곰탕집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는데
1. 그러면 나보고 뜨거운 화덕을 옮기는 화덕맨이 되란 얘기냐?
2. 급여는 한달에 얼마 줄건지 명확하게 얘기해라 사위는 백년 손님이다 아들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여 거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거절을 안 했으면 한 집안의 중추적인 일손으로 이혼은 안 했겠지요 이혼을 한게 잘한 건지 못 한건지는 잘 판단이 안 서네요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지난날과 현재를 잘 표현해 주셨군요
저역쉬 먹고살기 힘들어서 함께 애쓰며 살다보니 오늘까지 한집에서
살고있습니다 어느때는 내가 염치없이 너무 늙어버렸다는 미안함도 있긴 함니다
누구나 아픔 안고 살지요,
"어디 상처 받지 않은 영혼 있으랴"
생각납니다.
꼭 행복하십시요^^
거서리님 행복한 모습이 눈에 그려 짐니다ㅡ
늘 평안 하십시요
언제나 사려 깊은 코멘트입니다.
고맙습니다.
그할마시잘모시고 즐겁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네, 마누라와 소순도순 잘 살고 있습니다.
님도 할마시하고 잘 사시기 바랍니다.
전 한ㄷ마시입니다,
ㅎㅎㅎ~~~재미있고 진솔한 글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