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똥풀
흠…. 달큼한 냄새. 유치원 버스가 아파트 마당을 막 돌아나갈 때 웃음소리에 겹쳐 전해오는 젖 내음이 달다. 낮은 바람이 가리키는 한쪽이 노랗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돌아가도 여전히 조잘거리는 노랑들. 햇살이 눈부시다.
오월이 싱그럽게 핀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희귀함을 앞세우며 고고함을 돋보이며, 서로 경쟁하듯 발돋움하는 곳에서 잠깐 눈을 돌리면 정겨운 눈인사를 보내는 곳도 있다. 볼수록 새록새록 사랑스러운 꽃. 맑디맑은 노랑이 고개 든 연두와 어울리면서 귀여움을 고조시킨다. 마음만 열면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애기똥풀꽃. 봄꽃이려니 싶지만, 끊임없이 피고 지기를 계속하는 끈질긴 모습은 여름까지 이어진다. 여린 힘으로 피워내서일까 감동은 배가된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 같지만 의지해 버티어내는 민초들이다.
애써 꽃을 피워놓아도 이름은 고작 애기똥풀. ‘꽃’이라는 그 짧은 음절마저 인색했을까. 그래도 항변하지 않고 하얀 솜털에 싸여 빼꼼 내미는 얼굴. 방긋 문을 열고 나온 노랑에 잎에 앉았던 청개구리가 펄쩍 뛴다. 풀벌레가 뚝 소리를 그친다. 마냥 아이인, 어른이 되지 않는 풀. 꽃울 피워 수정을 거쳐도 끝까지 아기다. 동안(童顔) 열풍인 이즈음 영원히 아이인 것은 어쩌면 행운일까.
누구나 한때 아기였다. 나도 한 포기 애기똥풀. 처네포대기에 싸여 하루가 뜨고 또 지었다. 엄마와 누나의 등에서 한 호흡이 되었다. 시장으로, 논밭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쉬도 응가도 그 품에서 해결했다. 근심과 걱정은 내 몫이 아니었다. 푸른 똥을 지릴 땐, 엄마의 얼굴도 따라 파래졌지만 노란 똥이면 ‘장한 것’ 흐뭇한 표정에 천진함을 맞댔다. 노란 젖을 게웠던 엄마의 등에서도 달큼한 젖 냄새가 났을까. 어린 누나의 등은 나를 온전히 받아주기엔 너무 작지 않았을까.
애기똥풀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밭을 탐하지 않고도 의연히 자라는 것은 열정이나 절망 같은 극단이 없는 때문이다. 숲 가장자리도,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 길가에도 마다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이유다. 제도화된 밭에서 자라지 않았으므로 눈총 받을 일 없다. 다 제 자리가 있다지만 당당한 풀, 아니 꽃이다. 좌판도 없는 난전에 앉았던 그 그리운 이처럼 스스로 피어난 꽃이다. 그 등에 업혀 유독 큰 눈망울을 되록거린 나는 그의 애기였다.
아무런 걱정도 거리낌도 없이 젖내 폴폴 나는 노란 똥을 지렸을 때 환해지던 엄마의 모습을 그려본다. 누비처네에서 빠져나온 손이 얼어도 노란 똥을 눌라치면 용한 놈, 용한 놈, 난리 통에 용케 살아난 나를 다독이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언제 한번 포근히 안아보았던가. 오월 속으로 사리진 지극한 사랑을 지울 수 없어 오래 묵은 사진첩을 꺼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