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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原始祖 自 字 成 先祖의 齋室 陽岳齋 上梁文
- 小史 - 사진 : 11매
-. 일시 : 2014. 12. 19(금. 음력 10. 28) 11 : 40 ~ 12 : 20
-. 장소 :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설봉서원 위,
양악산 중턱 원시조 自 자 成 선조의 묘소 아래
-. 참석자 : 율정공파 도유사 이근수 외 37명
-. 경기도 이천시 날씨 : 맑음. 최고영하 11C도, 최저영하(낮기온) 2C도
양악재 상량문(陽岳齋 上梁文)
신라 17대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내신 廣州李씨 原始祖 自成公을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양악산 남쪽 금맥의 자리에 영원토록 모시었네.
신라시대의 관직도 소명하게 밝히고.
광주이씨를 현창(顯彰)했으니.
아! 높고 넓으신 음덕(陰德)이 내려졌고
위대한 자손이 오래도록 규범을 지켜서
성(姓)을 받아 천년이 지났으나
시조의 상징(象徵)이 남아있고
수많은 자손의 훌륭한 업적들이 화려하게 빛이 났으니.
이러한 조상이 있었기에
이런 자손이 있어서.
이 같은 단(壇)을 만들고 이 같은 집을 짓는다네.
조상의 영(靈)이 계신데 제사를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자손도 많이 번창했고 조상의 음덕도 한이 없구나.
공손하게 생각하니
자성공은 광주이씨 성을 받은 시조여서
만세를 이어갈 기틀을 만드시고
천추에 이 같은 업적을 남기시어
세상에 훌륭한 학자가 여러분 나시었고
높은 관직을 지내시고 위국충절과 효제(孝悌)의 인재가 대대로 이어졌네.
공손하게 생각하면
血食君子이신 율정공 휘 관의(栗亭公 諱 寬義)는
손수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으시고
많은 제자들에 경전을 가르치셨으며
이곳 관동(冠洞)에 묘역이 아직까지 보존이 되었고
또 설봉서원에 제향을 받으시니
백대에 맑은 기풍을 남기시고
한 시대에 높으신 학자여서
많은 후손들의 존경심이 지극하며
훌륭한 자손들의 뜻으로 재원을 마련하니
어찌 장하다고 하지 하겠는가?
당시 위인들에 의하면 둔촌공 휘 집(遁村公 諱 集)을 가리켜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성인의 도를 얻은 사람”이다.라고 했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는
“세속을 초월하여 고결한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 표현했으며,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호연의 기를 체득한 사람이다.” 라고 말했으며,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은
“의사(義士)로서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호정 하륜(浩亭 河崙)은 『둔촌 잡영(遁村 雜詠)』에서
그 머리말을 쓰면서 회상한 글을 보면,
“선생의 용모는 장중하고 강의(剛毅)해 보였으며
기품은 꽉 짜이면서 준수하였고
음성은 옥이 구르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하여
나는 내심 몹시 기이하게 느꼈었다.” 라고 그 인품을 말했다.
"당시에 왕실은 점차 기울어져 가고 사변은 자주 일고 있었는데도
충성과 효도를 다 이루었고 참고 참아 가면서
인정과 의리를 극진하게 이루었으니
그 뜻은 금석과도 같고 기백(氣魄)은 하늘에 닿을것 같다." 라고 牧隱이 評했듯이
지극한 효심과 혼란한 나라 정세에 걱정을 아끼지 않던 충정(忠情) 한이 없으셨다.
그의 3남 모두 문과 급제하여
장남 탄천 휘 지직(炭川 諱 之直)은,
태종조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며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차남 지강(之剛)은 우참찬 겸 대사헌, 3남 지유(之柔)는 성주목사를 역임하였고,
이른바 "삼자팔손구문과(三子八孫俱文科)"라고 하여
세 아들과 여덟명의 손자가 문과에 올라 판서를 지냈고,
아울러 그 후손이 나날이 번창하여동양의 명문가를 이루어
훌륭한 정훈(庭訓)을 남기시어 대대로 棟梁之材를 배출했다.
또한 고려조 문신 석탄공 휘 양중(石灘公 諱 養中),
그 아우 암탄공 휘 양몽(巖灘公 諱 養蒙)은
어린시절부터 芳遠(조선조 太宗)과 형제의 義를 맺었으나
고려 충신으로 역모와 거리를 두고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에 은거
72현으로 남아 節義를 끝까지 지킴으로 杜門不出이라는 말이 비롯되게 하였고,
역사의 인물로 두분의 음덕을 기려 재사명(齋舍名)을 고덕재(高德齋)라 銘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송백(松柏)같은 公의 높은 절의(節義)가 태산(泰山)같음을
후손에게 기리 깨우쳐 공경(恭敬)의 念을 갖게 하였다.
광릉부원군 우봉 휘 이극배 영상(廣陵府院君 牛峰 李克培 領相)
충희공 우의정 휘 인손의 5형제 중 장남으로
재간과 도량이 크고 깊고
뜻과 생각이 견고했으며 경학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행정재능도 겸비하고
사사로이 손님을 받지 않았고 가무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북방 야인정벌에 출전하였고, 영중추부사, 흉년에 진휼사로 활약하고,
관찰사를 두번, 이조, 예조, 병조, 형조판서를 두루 거치고,
병조판서를 네번이나 역임하였으며,
세종대왕으로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왕을 섬기면서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고 도덕정치를 실천하며
남에 얘기를 먼저 듣는 영상으로 유명하다.
충정공 동고 이준경 영상(忠政公 東皐 李浚慶 領相)
조선중기 명재상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광양군 세좌(廣陽君 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시며,
증조는 형조판서 좌익공신 광성군 문경공 극감(廣城君 文景公 克堪)이고,
우의정 충희공 인손(右議政 忠僖公 仁孫)의 현손(玄孫)으로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화(禍)를
당하시게 됨에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 崇德齊公, 兵曹判書)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는 고난을 겪으시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6세 때부터
재종형 탄수 이연경(灘叟 李延慶)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시고,
1531년(중종 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시어다.
공의 어짊과 관찰력이 탁월하여 수행한 공로 중에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1572년(선조 5년) 임종 전에 국가경영에 관한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차(遺箚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리시어
그 중 붕당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것이라는 내용이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李珥), 류성룡(柳成龍) 등 신진사류들이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으나,
이 예언은 몇년 후 동서분당으로 현실화되어
동고 영상의 관찰력이 옳았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시는 등
명재상으로 기록되었다.
한음 이덕형 상공(漢陰 李德馨 相公)은
충희공 우의정 이인손,
좌의정공 이극균(左議政公 李克均) 부자가 정승을 지냈는데,
공에게 5대조이신 이극균이 연산조 1504년(갑자년) 화(禍)를 입었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어
8세에 입학하여서는
어렵고 의심스러운 점을 지껄이는 짓이 어린이가 하는 짓이 아니었으며,
15세가 되기도 전에 뛰어나게 성취하였는데,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때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 이산해의 작은 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하며,
한음 상공은 선조대와 광해군대 두차례 영의정에 오르시어
국난을 당한 위중한 입장에서
외교, 정치, 군사, 사회 등등 분야에서 활약하신 혁혁한 공로는
역사의 인물로 그 위대한 업적을 어찌 다 이 자리에서 기록하랴만은
선조는 임진왜란을 평정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중흥의 대업을 회복하였는데,
뭇 사람들이 칭송하는 말을 들으니
덕을 같이한 이와 협심해서 위아래가 함께하여
오직 나라만을 위하고 일신을 바친분 중에
한음 이덕형 상공이 실은 제일이었다.라고하시었다.
더욱이 한음 상공의 부인 한산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자결하는 절의를 지키셨다.
광남군 충장공 광악(廣南君 忠壯公 光岳) 將軍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1차전 승리의 선봉을 필두로
영호남은 물론 그후 기외지역을 포함 100여 차례 전투에 참여하여
공로를 이룸에 따라
임진왜란 승전의 선무공신 18명중 한분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리고 전라병마절도사, 훈련원도정, 경기방어사의 직에서
나아가 함경도 병마절도사시에는
여진족 정벌에서 혁혁한 전승(戰勝) 등
일평생을 국난극복에 뛰어난 忠節을 다한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이시었다.
문익공 귀암 이원정 이조판서(文翼公 歸巖 李元禎. 刑曹, 戶曹, 吏曹判書)는
당대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약 40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고,
현재 종가에는 고문서 . 전적류 약 2500 점이 보관되어 있으니,
3대에 걸친 고신류(告身類 : 敎旨類)가 300장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재직시 도체부(都體府) 설치와 조세제도(租稅制度) 개설 및
인재양성(人材養成)에 힘쓰며 주장한 그 업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사간원 사간 이도장(李道長)이고,
문익공의 아들 이담명(李聃命)이
경상도 관찰사 재직시 기근에 처한 백성을 구한 일로
훗날 그를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운일은
지금까지 전해 져 내려오는 매우 유명한 일화로 이어지고 있다.
내첨사판관 이수완(內僉寺判官 李秀莞) 양진재공(養眞齋公)은
5대조 둔촌으로부터 고조 형조우참의공 청백리 휘 지직,
증조 우의정 충희공 휘 인손(仁孫), 조부 좌찬성 광원군 휘 극돈(克墩),
아버지 병조참의 휘 세정(諱 世貞), 아들 유창(維昌), 손자 등등
9대에 걸쳐 한번도 빠짐없이 문과에 급제를 한
조선역사에 보기드문 내력을 이루게 한
청렴강개한 성품과 효행으로 인망이 높았던
전라남도 보성(寶城)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충주. 해주 목사공 어은 이만형(忠州. 海州 牧使公 漁隱 李萬亨)은
광릉부원군 휘 극배(廣陵府院君 諱 克培)의 7대손으로
충후정직한 성품에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도덕문장이 당세에 칭송을 받았고,
함열 현감을 거쳐 충주. 해주목사 재임시에 흉년으로 기근이 왔을 때에
'동짓달에 보리 줄기 하나에서 두가지가 오르는 일이 생겼다.' 라고 하여
이에 백성들이 이르기를 어진 정치로 백성을 교화하고
크게 덕을 베푸시어 '양맥공', 청백리라 불렀다. 대전지역 入鄕祖이시다.
정암 이종훈(正菴 李鍾勳) 義士는
젊은 시절부터 동학농민운동, 갑진개혁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하며
1919. 3. 1 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최고령으로 참여하였으며,
천도교 혁신파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고려혁명위원회에 고문으로
죽는날까지 일제 압제하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자랑스런 義士였다.
일몽 이수택(一夢 李壽澤) 義士는
칠곡 출생으로 서울 普惠學校를 중퇴하고 1919. 3. 1운동참가 후,
만주로 망명 吉林省에서 金元鳳, 尹致衡, 韓鳳根, 李鍾岩, 尹世胄, 李成宇,
郭在驥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주요기관을 습격, 친일분자 암살 등 독립운동을 전개,
1924년 국내에 잠입 밀양폭탄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2년 6개월 옥고.
대통령 표창. 건국포장 애국장 추서받은 열혈 독립운동 의사이시다.
성제 이백래(省齊 李白來. 보성 출생) 義士는
韓末 和順双山 항일 의병활동시 도대장 이백래가 주축이 되어
湖南 倡義所에서 왜경에 대항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한 공적이 혁혁하였고,
창의소 자리는 호남의병뿐만이 아니라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문화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함께한 광주인은 위 창의소 독립운동 활약에 앞서
이병화. 이홍래. 이용래. 이용식. 이용태. 이용식. 이양재. 이경원. 이남재.
이정재. 이종학 등이었으며,
이들 독립의사 중 특히 광주인 3인조인 이홍래. 이용태. 이종학 등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척왜상소 상경하여 대종교 창시자
나철. 오기한. 임병찬. 최익현. 이훈 선생들과 함께
을사 5적에 대한 주살을 모의하고 군부대신 권중현을 암살하기 위해
寺洞 安家에 은신 저격하였으나 실패함에 체포되어 이종학은 교수형을 받았다.
이들은 이듬해 호남창의소 항일의병을 지휘하여
전남 일대 독립군 자금 준비, 왜병의 기관 습격, 친일파 제거 등
독립운동 의병활동을 계속 하였다.
기외에도
운암 이병택(雲唵 李秉澤. 충주 출생).
단암 이용태(丹菴 李容兌. 충주 출생.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여산 이용준(如山 李容俊. 충주 출생.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이종건(李鍾乾.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님 등이
조국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으로 목숨을 걸고 희생된 의사들이시다.
광주이씨의 수 많은 인재들이
그 시대마다 文.武에서 보여준 국난극복(國難克復)을 위해
뛰어난 충절을 다해 일생을 바친 이들을
어찌 다 열거 할 수 있을까만은 돌이켜보면,
조선의 학통을 이끄신
광안군 정효공 탄수 선생은 "典故方 3권"에 보면
유현연원도(儒賢淵源圖) 상에 성리학 창시자 圃隱 鄭夢周로부터
冶隱 吉再, 江湖 金淑滋,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靜庵 趙光祖로 이어지면서
탄수 휘 연경(灘叟 諱 延慶)의 문인(門人)으로는
花潭 徐敬德, 李之蘭, 李山甫, 養心堂 趙晟, 尹鼎淑,
蘇齋 盧守愼, 舟川 康有善, 重啓 沈鍵 등등의
인재를 배출한 자품이 높고 덕망과 지조가 있어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고 시종 불변한 사림의 스승이셨다.
영남 유림의 대가인 석담 휘 윤우(石潭 諱 潤雨),
예조참판 복암 휘 기양(伏菴 諱 基讓),
조선후기 정통 성리학자 묵헌 휘 만운(默軒 諱 萬運) 선조님이 계신가 하면,
청백리 가문을 이끄신 분들로서는
이조참판공 휘 지(吏曹參判公 諱 知),
려말조선초 문신 형조우참의공 탄천 지직(刑曹右參議公 炭川 諱 之直),
대사헌 및 이조참의공 휘 중경(吏曹參議公 諱 重慶),
대사헌 및 공조판서 휘 하원(工曹判書公 諱 夏源) 등이 계시며,
임진왜란 때
충장공 휘 광악 장군(忠壯公 諱 光岳 將軍)과
관서부원수 장렬공 휘 윤덕(關西副元帥 壯烈公 諱 潤德),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하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安州城)에서
전사한 충민공 휘 상안(忠愍公 諱 尙安) 등등,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1백88명, 무과 급제자 2백 74명을 내었고,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습니다.
위 선조님들 외에도
문. 무(文 . 武)와 예(藝)에 뛰어 나신
수많은 선조님과 종현님들이 계시기에
시대는 변해도 광주이씨 문중이 사회로 부터 존숭을 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학문 계열의 인문학 및 자연과학과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법조, 의학...,등등
어느분야를 막론하고 뛰어난 인재가 속출되어 있음을 어찌 다 기록하랴 만,
아래 이 시대에 걸출한 인재 세사람을 배출하였습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는 행정부 수반인
제29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신 이수성(李壽成) 종원은
전 서울대학교 총장.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민주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등과
특히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장시에는 효창원에 백범기념관을 신축 하는데
예산 확보 등 큰 역할도 하셨다.
사법부의 수장인
제14대 대법원장 이용훈(李容勳) 종원은
전 대법관을 역임하시고 전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등과
특히 대법원장 재임시에는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 신뢰 받는 공정한 재판,
미래를 준비하는 사법부를 만드는데 앞장을 섯답니다.
자수성가로 평생 모은 개인의 재산 대부분인 8,600억원을
30여년 동안 5,500여명에게 국외유학 및 국내장학금으로 제공한
(주)삼영화학 명예회장이시고 (재)관정교육장학재단 명예이사장 이종환
(冠廷敎育奬學財團 名譽理事長 李鍾煥, 94歲) 종원은
스위스가 특별한 자원없이 세계 최고의 부(富)를 일궈낸 비결이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데 자극을 받아 인생의 목표로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인재들이 없도록 돕는 사업을 실천하고 있는
아시아 최대규모의 개인 장학재단을 만들어 낸 자랑스런 문중의 별입니다.
더욱이 인권을 세우기 위해 도덕적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국가 발전에 기여한 광주이씨 종원이
혁혁한 공로를 세우는 일이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음은
모두가 훌륭하신 선조님의 음덕으로 이루어 짐이
하늘의 뜻을 스스로 알고 있음이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 8,000만 한민족의 숙원이요.
세계 자유인의 바람인 한반도의 자유평화통일성업에 큰 일꾼이
광주이씨 문중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광주이씨의 특별한 화수회의 정신도 매우 아름답구나.
이 일을 이룩하려고 논의가 정해졌고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마련되어서
주춧돌을 놓을 때부터
제사를 모시는 것을 생각해서 마음속으로 설계를 하고
커다란 집을 상상하면서
묘역 앞에 터를 잡고 갑오년에 시작 했으니
윗대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이 한량이 없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뜻도 끝이 없는 일이다.
잇달아 기술자를 불러서 건축의 책임을 주니,
주위에 아름다운 산들은 하례하는 기색이 더해지고
옥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소리
더욱 맑은 메아리로 들려오니 산수의 풍경은
공자(孔子)님 고향의 풍경과 흡사하고
묘역을 가꾼 나무들은 주자(朱子) 고향의 운치와 같네.
지형은 높은 것 같으면서 아늑하니
항상 무지개가 서린 풍경이고
산은 멀면서도 아름답고 선명하니
제비와 기러기 소리 수시로 들려오고.
사안석(謝安石)의 고향인 동산에 자손이 살아가는 것과 같이
이곳에 자손이 살고 허자춘(許子春)의 남쪽들과 같은 농지에
제사를 받들 곡식이 생산되고,
소나무 목재에 조각을 한 집은
요 임금님 때에 수편 같은 기술자가 시공을 하고
부연을 달아서 장식을 하니
맹자님 때 공수(公輸) 같은 솜씨 군이 완공을 하게 되었네.
사간장(斯干章)에서 말하는 대나무가 둘러선 모습을 칭송하고
높은 기둥에 날아 갈 것 같은 규모로 지어서 기와 덮고
흙 발라 준공하면 화려한 모습 이루어질 것이니
제사 올리는 날에는 장미 꽃 이슬에 손을 씻고 향 피우고
축 읽는 의식 다 이루어질 것이니
먼 조상 잊지 않고 받드는 것은
자양(紫陽) 선생의 훈계를 따른 것이고
해마다 제사 올리면서 재물을 준비하는 것은 箕子(기자)님의 풍속이라네.
경건하고 화목하게 줄지어 옛 모습 갖춘 분이어서.
폐옥소리 들리면서 좌우에서 정성으로 돕고
원로 분은 질서 있게 의젓한 모습 지으시니
신라왕의 능 같이 묘는 여천지무궁토록 존재할 것이고
자손들의 성념은 공자님의 묘 같이 이어갈 것이다.
집을 지어 조상을 모시는 자리 만들면
조상의 영이 강림할 것이다.
부족한 글 솜씨로 긴 대랑 올리는 노래를 지으면서
감히 무식한 소견으로 지은 글 졸렬하지만
육위의 글귀로 아랑곡(兒郞曲)을 한 장 쓴다.
동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금 까마귀가 들어있는 태양이 동창에 붉게 비치니
밝은 광채가 새 집에 먼저 들어오네.
선명한 하늘의 기운이 땅의 서기와 융합이 되고.
서쪽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금으로 생긴 산봉우리에 무지개 채색이 서려서
온 세상 놀빛이 묘역에 서리니
아침에는 봉황이 울고 저녁에는 란 새가 운다.
남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팔도의 중앙에 위치해서 모든 것을 다 구비했으니
금수강산이 아름답고 화려한데.
속리산에서 올라온 용이 돌아앉은 곳이라고 말을 하네.
북으로 향해 아랑곡 불러본다.
광주이씨 관향의 고을은 서울의 인근인데
한 넝쿨에 열린 많은 자손 팔도에 퍼져서
화려한 가문의 명성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다.
하늘로 향해서 아랑곡 불러본다.
저 푸른 하늘 한량없는 복을 내리시어
해마다 화수회가 번창하고
온 성씨가 영광이 생기고 위씨(韋氏)보다 더 장한 친목을 도모할 것이다.
아래쪽으로 향해서 아랑곡 불러본다.
산 아래 평평한 옥토가 있어서 모든 곡식들이 풍년이 들고
거기에 옥을 심어 자라나니
영원토록 폐옥을 울리는 자손 끝이지 않을 것이다.
엎드려 상량후에 바라는 것은
하늘의 정기가 서린 곳이라 복이 내리고
땅의 영기 모여서 상서로운 발복이 나니
어진사람 때를 지어 태어나서
세상을 바로잡는 기풍을 만들고 모두와 화합하여
백성에 은택이 되는 일을 해서
몇 십대의 오래된 조상에게도 향념을 가지게 되면
조상의 은덕이 만대 천대에 이르도록 보호를 받을 것이다.
2014.10.
국사편찬위원 안동인 권기갑 지음.
양악재 준공문 축문(陽岳齋 상량文 祝文)
유세차 갑오 시월 을해삭 이십팔 갑자일 오시
(維歲次 甲午 十月 乙亥朔 二十八 甲子日 午時)
양악재 감소고우 (陽岳齋 敢昭告于)
천지신명금위 길신택일 (天地神明金爲 吉辰擇日)하여 큰 기쁨으로
양악재의 상량을 하오니
천신. 지신. 수신이시어!
우리의 정성 하늘에 닿거들랑
공사 중 청명하게 하여주시고
우리의 정성 땅속에 닿거들랑
남은 공사 내내 무재해 되게 하여주시고
우리의 정성 물속에 닿거들랑
본 건물 초석 될 튼튼한 상량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근이 병과주구 경신 천지신명 상향(謹以 餠果酒口 敬神 天地神明 尙饗)
2014. 12. 19(금) 대전시 보문산 아래 청록실에서
휘 당 자(諱 唐 자) 선조의 22대 손
대전지역 종친회 수석부회장 겸 광친회장 명종
위 사진 설명 :
-. 광주이씨 상대계(廣州李氏 上代系譜)보입니다.
위 8매의 사진 설명 :
일시 : 2014. 12. 19(금. 음력 10. 28) 11 : 40 ~ 12 : 20
-. 장소 :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산 29번지
양악산 중턱 원시조 自 자 成 선조의 묘소 아래
-. 참석자 : 율정공파 도유사 이근수 외 37명
-. 경기도 이천시 날씨 : 맑음. 최고영하 11C도, 최저영하(낮기온) 2C도.
-.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올려 놓고
후손들이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원제를 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위 사진설명 :
-. 차가운 일기 속에 양악재 상량식에 참석하신 일동의 기념사진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양악재 상량식을 마치고
산 아랫 마을 한정식 뷔페 식당(주인 광주이씨 수자항렬)에서 중식을 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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