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어민의 생활사
20170800 이희경
Ⅰ. 들어가며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옛적부터 하천과 바닷가의 주민들은 주로 어로노동을 통해서 생활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농업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어민의 존재는 늘 중앙정부의 관심 밖이었다. 어민의 생활을 알려주는 기록 또한 많이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어로노동에 종사한 사람들이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지리 특성상 인구의 상당수가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중심 사회였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우다 보면 어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조선시대 어민들의 삶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저자 소개
『우리 민중의 생활사』의 저자 이종하는 191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뒤 영남대학교 교수, 경성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조선왕조의 노동법제』, 『신고 노동법』, 『우리 민중의 노동사』 등이 있다. 저자는 중학시절 무정부주의자로서 신채호 선생과는 동지적 교분을 가졌던 숙부 이규옥의 훈도를 받으면서 1913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통해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 민중의 생활사』의 머리말에서 해방 이후 남한에서 민중의 역사가 북한만큼 연구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관점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Ⅲ. 어촌공동체 (어촌계)
어로노동은 집단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어로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협조 정신이다. 모든 어로노동은 거친 바다를 상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배 안에서 어부들은 생사의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생사의 문제와 관련되었던 만큼 촌락공동체와 농민 사이의 유대보다는 어촌공동체와 어민의 유대가 훨씬 더 긴밀하였으며, 지역적인 폐쇄성은 적었다. 마을의 구성원과 어촌계의 계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2개 이상의 마을을 포괄하는 어촌계도 있었다.
집단 노동인 어로노동에서는 법률적 근거를 갖는 어촌계가 형성되기 전부터 협동조직이 형성되어 ‘계’를 이루었다. 어로생산의 대장인 어장은 전답과는 달리 분할점유가 어려운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총유(總有)되었다. 여기서 어촌이 어장을 총유한다는 것은 어장의 사용어장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은 어촌의 성원 개인에게 속하지만, 어장의 관리 또는 처분권은 어촌 전체에게 있는 것을 말한다.
박지순의 『한국어로연사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어촌공동체의 전형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 좋은 예가 흑산도의 ‘미역공동채조제(綵組制’)이다. 공동체성원은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가택과 초원을 포함한 약간의 경지 및 어선, 어구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기본적 수요를 총유어장의 공동경영에서 충족시켰다.
이러한 어촌계는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 (이하 수협법)이 수산업협동조합 (이하 수협)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시작으로 개편이 꾸준하게 이루어졌으나 1979년에 이르러 이러한 개편작업은 중단되었다. 2010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1,993의 어촌계가 설립되어져 있으며 전국의 어촌계원은 150,174명이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촌계는 전통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조직문화이다. 공동체성과 합리성의 이중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어촌계는 공동체적 유산이면서 동시에 오늘 날 어가와 어촌 마을의 생존과 번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경제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Ⅳ. 어로신앙
어로노동은 풍랑이 사나운 바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부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배의 안전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어촌마을에서는 바다에 나간 가족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배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어로신앙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어로신앙은 다양한 의례의식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배고사와 용왕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ⅰ) 배고사
배서낭고사, 배성주고사라고도 불리며 배의 안전과 풍어를 위해 배를 관장하는 배서낭에게 지내는 고사이다.
배고사는 배를 새로 건조하거나 샀을 때 배를 가진 선주가 개인적으로 지내기도 하고 마을제의인 풍어제와 당제의 일부로 행해지기도 한다. 섣달그믐날, 설, 정월대보름, 삼월삼짇날, 추석 등의 명절에 지내며, 출어할 때, 흉어가 계속될 때, 물 때, 선주가 부정이 끼어 우환이 있을 때에도 지낸다.
보통 배고사는 선주가 주관하지만 선주에게 부정이 끼었을 경우에는 선장이나 선원이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흉어가 계속되거나 사고가 잦은 경우에는 무당을 데려와서 지내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가정에 상이나 출산이 없고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 주관한다.
제사상에는 첫 출어 때 잡은 크고 귀한 것을 올린다. 제사상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갈치와 장어와 같이 몸체가 긴 것들은 뱀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기피한다. 제주가 제사상의 음식을 바다에 뿌리면서 용왕에게 헌식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때 사고 없이 잘 지내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배고사는 간단한 의례이지만 정기부정기적으로 자주 행해지고 있어 전승이 활발하다.
(ⅱ) 용왕제
용왕제는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바다의 용왕신에게 올리는 마을공동제의이다. 지역과 마을에 따라 용신제, 해신제, 풍어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지역에 따라 연행방식이나 시기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신라시대의 사해제(四海祭)와 사독제(四瀆祭), 고려시대의 사해사독제와 해신제, 조선시대의 용신제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용왕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제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영조 47년에 인행(印行)한 『고사신서(攷事新書)』 권6의 국조축전(國朝祝典)을 보면 “동해의 양양, 남해 나주, 서해 풍천, 북해 경성에서 중사(中祀)인 해신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용왕제는 전국에 일반적으로 분포하던 제의였지만 현재는 어로를 생업으로 삼는 마을, 해산물에 대한 산업적 의존도가 높은 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용왕제를 지내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월 열나흗날이나 대보름날이다. 1년에 한 번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집 안에 우환이 생기는 등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에 날을 받아 지내는 경우도 있고 일 년에 여러 차례 지내는 경우도 있다.
용왕제는 마을제사인 동제에 부수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고, 당제와는 별도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용왕제는 대체로 당제(堂祭)와 결합된 제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용왕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당제와 용왕제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기능이나 연행방식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당집이나 마을 뒷산에서 이루어지는 당제와는 다르게 용왕제는 물을 관장하는 신인 용왕을 위하는 제의이므로 바다나 강, 우물, 샘 등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이루어질 수 있으나 대개 마을마다 정해진 몇 개의 장소가 있다.
용왕제의 주목적은 풍어와 우물이 마르지 않는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액막이, 수재 예방, 아이의 점지 및 무병장수 등을 기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용왕제를 ‘용왕액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왕제를 지내는 목적에 따라서 ‘삼신받이’, ‘용궁칠성’ 등의 다양한 명칭이 사용된다.
대게 용왕제는 부녀자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남자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제수로는 일반적으로 메, 편, 미역, 명태, 삼색실과, 초, 소지 등을 마련한다. 먼저 용왕제를 지내는 곳에 짚을 갈고 제수를 진설한다. 그런 후에 절을 하고 안과태평을 기운하며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릴 때에는 반드시 용왕소지를 먼저 올리고 그 다음으로 대주, 아들, 딸 등의 소지를 올린다. 소지 대신에 용왕에 대한 헌물로 한지나 김에 밥을 싸서 만든 쌈을 물에 던지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쌈이 가라앉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여겨서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 쌈을 던진다.
소지를 올린 후에는 상을 거두고 제물의 일부를 바가지에 담고 촛불과 함께 물에 띄워 보내거나 진설하기 위해 깔아두었던 짚으로 배를 만들어 띄어 보낸다. 이는 이 배가 액운과 함께 떠내려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이종하, 『우리 민중의 생활사』, 주류성, 2003
하효길, 『한국의 풍어제』, 대원사, 1998년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경인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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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어민의 생활사.pdf
첫댓글 조선시대 어민은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주제인데, 이번 기회에 이렇게 접하게 돼서 정말 흥미롭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