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이후 대학, 연구소, 정부 기관에는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면서 월급을 받는 직장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기에 과학자들은 어떻게 연구를 했을까? 물론 중세 시기에 대학에서 수학이나 천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직이 생겼고, 17세기 이후에는 학회 월급을 받으며 연구를 하는 큐레이터 자리도 만들어졌지만, 문제는 그 수가 극히 적었다. 나머지 과학자들은 크게 두 부류였는데, 하나는 재산이 많아서 돈을 버는 데 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거나, 다른 하나는 돈과 권력이 많은 왕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었다. 과학혁명기를 돌아보면,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 같은 사람은 전형적인 돈 많은 귀족에 속한 사람이었고,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와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 같은 천문학자는 왕궁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었다.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평가 받는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역시 후원을 받는 쪽이었다. 그는 원래 피사 대학과 파두아 대학의 수학교수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궁정의 후원을 받는 학자의 길을 택했다. 갈릴레오의 유명한 저작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를 통해 갈릴레오와 그의 후원자, 메디치가의 관계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자신의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갈릴레오와 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1610년 3월에 출판된 갈릴레오의 책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별의 소식, 혹은 별의 메신저라는 뜻)는 갈릴레오를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로 만들었던 저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를 관찰해서 얻은 놀라운 결과를 상세히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달의 표면에 울퉁불퉁한 산과 분화구가 있다는 사실, 뿌옇게 보이던 은하수가 사실은 수많은 별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 지구에 달이 있듯이 목성에도 4개의 위성(달)이 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가지고 관찰한 달 표면 스케치와 목성의 4개 위성 스케치. 갈릴레오는 1609년 11월 30일부터 12월 18일까지 달을 관찰했고, 1610년 1월 7일부터 1월 24일까지 목성의 위성을 관찰했다.1월 15일이 되면 갈릴레오는 자신이 본 것이 목성을 도는 4개의 위성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중 울퉁불퉁한 달의 표면과 목성의 위성은 당시 지구중심적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BC384~BC322)-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85?~165?)의 우주관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다. 전통적인 우주관에 의하면 달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가르는 경계로서 수정구처럼 매끈해야만 했고, 달(위성)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에만 하나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우주관을 비판하고 근대적 우주관의 토대를 놓았다는 이유에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근대 천문학을 출범시킨 역사적인 저술로 평가된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표지.
표지에 적힌 전 제목의 내용.
그렇지만 이 책의 서문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천체 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대신에, 당시 황제와 같은 권력을 누리던 메디치(Medici) 가문의 코시모 2세(Cosimo II de'Medici, 1590~1621)에 대한 찬사와 아부만을 늘어놓고 있다.갈릴레오는 “거의 신성하리만큼 눈부신 위업을 이룬 사람들”은 별에 이름을 달아서 그 업적을 기린다고 하면서,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별(Medician stars)”로 명명해 대공에게 헌정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제 우리는 고귀하신 전하를 위하여 그보다 더욱 참되고 더욱 경사스러운 징조를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멸의 영혼인 전하의 은총이 지상을 밝히기 시작하자, 전하의 더 없이 훌륭한 미덕을 기리기 위해 하늘에서 밝은 새 별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찬란한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여기 4개의 별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 별들은 너무 흔해서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되는 평범한 붙박이별(항성)이 아니라, 참으로 빛나는 떠돌이별인데, 이 별은 그중에서 가장 우아한 목성 둘레를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이 별들은 한 집안의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궤도운동을 하며 목성 둘레를 도는데, 한편으로는 상호조화 속에서, 목성과 더불어 12년에 한 번씩 세상의 중심, 곧 태양 둘레를 크게 공전합니다. 실은 이 별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별들의 창조주께서 저에게 새로운 이 별들을 다른 모든 이들 앞에서 전하의 찬란한 이름을 따서 명명하라고 명백히 충고하는 듯 했습니다.(갈릴레오, [세데레우스 눈치우스] 64-65쪽)
이어 갈릴레오는 코시모 대공에 대한 찬사를 풀어놓고, 그의 품성이 목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목성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전하의 부드럽고 온화한 영혼, 호감을 주는 태도, 빛나는 왕의 혈통, 위엄 있는 행동,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폭넓은 권능을 한 눈에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전하의 내면에는 절로 고귀한 이 모든 품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모든 선의 원천인 창조주를 본받아 더없이 자애로운 주피터의 별(목성)에서 이 모든 품성이 유래했음을 모르는 자 누가 있겠습니까? 전하가 탄생하셨을 때, 지평선의 어두운 안개를 뚫고 중천으로 솟아올라 왕실의 동편을 비춘 별이 바로 목성이었습니다. 갈릴레오, [세데레우스 눈치우스] 65-66쪽)
이어 갈릴레오는 이 별을 메디치 가문에 헌사하고, 별의 이름을 “메디치 별”로 붙여서, 코시모 대공의 업적을 기리는 불멸의 상징물로 만들겠다고 서약한다.
이제까지 모든 천문학자들에게 감추어져 있던 별들을 제가 코시모 전하의 후원을 받아 발견하였기에, 저는 당연한 권리로서 전하 가문의 존귀한 이름으로 이 별들을 명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처음 발견하였기에 마땅히 그 이름을 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별들에 붙여진 다른 영웅들의 이름처럼 이 별들에 더욱 큰 영광이 더해지기를 바라 마지않으며, 제가 이 별들을 ‘메디치 별’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아무도 이 권리를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그러므로 더없이 자비로우신 전하께옵서는 이 별들이 예비한 특별한 영광을 받아 주시고, 이 별들뿐만 아니라 별들의 창조자이고 지배자인 하느님께서 전하께 내려 주신 신성한 축복을 오랫동안 누리옵소서. 갈릴레오, [세데레우스 눈치우스] 67쪽)
코시모 2세는 ‘메디치 별’을 받아들이고, 갈릴레오를 메디치 가문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했다. 이 때 갈릴레오는 파두아(Padua) 대학교의 수학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메디치 가문의 궁정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고는 곧 바로 파두아를 떠나서 메디치 궁정이 있던 플로렌스(피렌체)에 정착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는 지역 대학의 수학자에서 전 이탈리아의 모든 직장인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1609년 5월경,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에 대한 소문1)을 듣고 이를 직접 제작했다. 그는 안경에 사용되는 렌즈를 조립해서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고, 이후 계속 노력을 해서 8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다. 갈릴레오는 이 8배율의 망원경을 파두아를 통치하는 베네치아의 총독과 의원들에게 보여주었으며, 이것이 군사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총독에게 망원경을 사용해서 14 킬로미터 밖에 있는 물체를 1.5 킬로미터 안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고 적을 2시간 먼저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결과를 총독에게 바치고 대신 자신은 더 좋은 도구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고 간청했다. 이 편지를 총독에게 쓰고 난 직후에 갈릴레오는 자신의 교수 직위가 종신직이 되고 월급이 2배 오를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지만, 정작 대학 당국은 1609/1610년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월급의 인상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그에게 통보했다. 1609년의 여름에는 간단한 망원경이 넘쳐 나고 있었고, 갈릴레오는 자신이 정치권에 팔 수 있는 군사적 이점이 곧 소멸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플로렌스의 과학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갈릴레오의 망원경. 오른쪽은 그가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망원경의 원리를 광학을 이용해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망원경이라는 새로운 관측 기기가 낳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여름이 지나고 갈릴레오는 11월 무렵에 20배율의 망원경을 개발했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지상의 물체를 관측하는 대신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관찰한 것은 달이었다. 망원경을 이용한 갈릴레오의 관찰은 달이 울툴불퉁한 존재이며, 따라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자 도전이었다.
갈릴레오는 행성과 항성(붙박이별)도 관찰했다. 수성, 금성과 같은 행성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대략 원반형으로 그 크기가 분명하게 보인 데 반해서, 우리가 별이라고 부르는 항성은 망원경으로 보아도 육안으로 보았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관찰은 행성에 비해서 항성이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시사했는데, 이는 지구가 아닌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더 유리한 증거2)였다. 또한, 갈릴레오는 은하수를 관찰해서 이것이 수많은 별의 무리임을 보일 수 있었다.
메디치가의 코시모 2세. 1609년에 아버지 코시모 1세의 사망에 따라 투스카니의 대공(Grand Duke of Tuscany)이 되었다. 그는 대공이 되기 전에 갈릴레오에게 수학을 잠깐 배운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가장 흥미로운 발견은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의 발견이었다. 1610년 1월에 목성은 지구에 매우 근접했고 저녁에 또렷하게 관찰되었다. 갈릴레오는 1월 7일에 목성을 관찰하고 목성의 뒤에 있는 3개의 별을 추가로 관찰해서 목성의 위치를 점찍어 두었다. 그런데 다음 날 목성을 관찰하니, (점찍어 둔 3개의 별을 기준으로 볼 때) 목성이 동에서 서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움직인 것으로 나왔다. 게다가 1월 10일에는 3개의 별 중에 2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이 흥미로운 현상을 며칠 동안 계속 관찰하다가, 자신이 별이라고 생각한 것이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달)이며, 그 수가 4개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4개의 위성은 목성의 주위를 도는 주기가 달랐고, 따라서 매일 다른 위치에서 관찰되면서 보였다가 안 보였다 했던 것이다.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태양 주위를 지구나 목성 같은 행성이 돌듯이, 목성 주위에는 4개의 달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Pisa)는 토스카나 지역에 속한 도시였고, 당시 그 지역은 메디치 가문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축적한 가문이었고 혈통으로 봐서는 왕족이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1605년 여름에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인 코시모 데 메디치(1609년에 코시모 대공 2세가 된 인물)에게 수학을 잠깐 가르쳤고, 1608년에는 메디치 가문에게 구형 모양의 자석을 가문의 상징물로 삼으라는 청원을 하기도 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을 만들어 가는 도중에 코시모 1세의 천궁도가 목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1610년 1월에 목성 주변의 달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발견을 메디치 가문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1월 30일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메디치 가문에 알렸고, 메디치 가문의 비서는 코시모 대공과 그의 세 형제들이 이를 듣고 크게 놀랐다는 얘기를 갈릴레오에게 전했다. 갈릴레오는 바로 비서에게 답신을 했다.
저는 새로 관측한 것을 모든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에게 발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대공 전하의 허가를 받고자 합니다. 신께서는 그러한 특별한 징조를 통해, 코시모 대공 전하의 영광스러운 존함이 별들과 영원토록 더불어 하고자 하는 저의 소망을 이루고 전하께 헌신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행성의 최초 발견자로서 저는 그 별들에 이름을 붙일 권리가 있으므로, 저는 당대에 가장 위대한 영웅들의 이름을 별에 붙여 준 현인들의 관습에 따라 그 행성들에 코시모 대공 전하의 이름을 붙이고자 하온데, 다만 이 별들은 모두 대공 전하의 이름을 따서 ‘코시모 별’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별들이 정확히 네 개이므로 이들을 네 형제께 나누어 드려서 ‘메디치 별’이라고 부를 것인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릴레오, [세데레우스 눈치우스] 43쪽)
비서는 대공이 ‘메디치 별’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고 알려 주었다. 이후 바로 갈릴레오의 책 [시데레우스 눈치우스]가 출판되었고,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되었다. 갈릴레오는 이렇게 해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궁정에 의해서 후원을 받는 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갈릴레오의 후원을 연구했던 마리오 비아지올리(Mario Biagioli) 전 하버드 대학교 교수는 후원의 동역학이 상당히 미묘한 것임을 보이고 있다. 후원은 후원을 해 주는 후원인과 후원을 받는 피후원인 사이의 사회적 관계인데, 여기에서 후자는 전자가 필요로 하는 점성술, 자연철학, 예술, 문학 등을 제공하고, 전자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관계는 자본주의적인 교환관계라기보다는, 전자본주의적인 ‘선물 주기’(gift-giving)와 비슷하다는 것이 비아지올리의 주장이었다. 우리도 타인에게 준 선물과 같은 선물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을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듯이, 후원인-피후원인과의 관계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학자와 예술가들은 권력과 재력이 풍부한 후원인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어서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을 계속해서 제공하지만, 이러한 선물 하나하나에 답례가 오는 것은 아니다. 대신 학자나 예술가가 준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을 때에는, 후원인이 이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언질과 함께 큰 보상을 내려준다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1608년에 둥그런 자석을 메디치가의 상징으로 삼자고 제안한 것은 메디치 가문을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가 발견한 목성의 4개의 새 별은 메디치 가문, 특히 코시모 대공의 마음을 깊게 움직였다.
메디치 가문이 갈릴레오에게 부여한 공식 직위는 “수학자 겸 철학자”였다. 파두아 대학교의 수학자가 궁정에서는 이제 철학자가 되었고, 세상의 운동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도 철학자들과 동등하게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왜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관심을 끌고 후원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을까? 그가 베네치아 의회와 총독에 접근한 것을 보면, 그는 망원경을 이용해서 더 많은 보수, 더 큰 명성을 바랬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메디치 가문의 궁정은 그에게 베네치아 총독은 제공할 수 없었던 다른 매력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그것은 파두아 대학교의 수학교수인 갈릴레오가 메디치 궁정에서는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된 점이다. 당시에는 수학자와 철학자의 구분이 매우 엄격했다. 예를 들어, ‘자연이 실제로 이렇다’는 식의 얘기는 (자연)철학자들의 몫이었다.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논할 때에도, (자연)철학자들만이 ‘실제 물체의 운동이 이렇고 저렇게 이러난다’고 논할 수 있었고, 수학자들의 분석은 실제 세상이 아니라 단지 수학을 사용한 가설이나 모델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갈릴레오는 1590년대와 1600년대 초엽의 연구를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의 대부분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수학과 실험을 통해서 자유낙하 운동법칙과 같은 자신만의 독특한 운동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그가 수학 교수였기 때문에, 당시 자연철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이론이 실제 세상이 아닌 추상적인 수학적 세상에서나 가능한 이론적 논의라고 생각하고, 이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갈릴레오는 세상이 수학의 언어로 씌어졌고, 물체의 운동은 수학을 통해서만 가장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믿음은 소수의 수학자들 사이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지, 수학자들의 집단 밖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이 갈릴레오에게 부여한 공식 직위는 “수학자 겸 철학자”였다. 파두아 대학교의 수학자가 궁정에서는 이제 철학자가 되었고, 세상의 운동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도 철학자들과 동등하게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과학사학자 비아지올리의 용어를 빌자면, 갈릴레오는 메디치 궁정에서 수학자와 철학자라는 두 개의 ‘잡종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 내에서는 수학의 언어로 모델이 이닌 실제 자연 세계에 대해서 논할 자격을 부여 받았다. 궁정에서 수학은 단지 자연에 대한 가설적 모델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과 운행 그 자체를 드러내는 좋은 언어가 되었다.
1610년 이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수학을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막강하고 영향력있는 궁정에서 갈릴레오가 철학자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의 급격한 지위 상승은 1633년에 벌어진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는데, 이 주제는 이 자리가 아니라 “갈릴레오의 재판”에 대한 항목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참고문헌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음, 알버트 반 헬덴 해설, [갈릴레오가 들려주는 별 이야기 -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승산, 2009; Mario Biagioli, Galileo, [Courtier: The Practice of Science in the Culture of Absolut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1) 망원경의 발명: 렌즈는 중세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고, 안경은 1500년이 되면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렌즈 2개를 거리를 두고 결합시켜서 만든 망원경은 1608년이 되어야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그 첫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있지만, 당시 한스 리페르세이, 야코프 메티우스, 사카리아스 얀센 등 세 명의 네덜란드인이 망원경에 특허를 신청하려고 경합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다. 결국 망원경에 대한 특허는 누구에게도 인가되지 않았고, 망원경은 곧바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2)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유리한 증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의 1년 공전 때문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정 반대편에 있을 때 태양-별-지구 사이에 작은 각도가 관찰되어야 했다. 이것이 연주 시차(parallax)인데, 당시에는 이 시차가 관찰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그 이유를 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20배율의 망원경으로 보아도 별의 크기를 관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한 가지 증거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