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을 해봅니다.
"뭐를?"
어떤 것의 갈림길 내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찌할 것인가란.
이런 경우는
일단 원치 않는 존재의 개입여부를 따져보아야겠죠.
모든 것을 영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면서 바라볼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전혀 없다~식으로 여기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여깁니다.
마귀가 얼마나 교활한지 정확하게 다 알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은 압니다.
제 생각 능력의 범위란 책을 통한 간접 경험 포함
저의 인지 및 이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갑자기 왜 그랴? "
이 내용을 적다가
어느 자료의 내용이 일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어졌어요.
거기에서 중세의 이단에 대해 언급하며
아낙수나문, 아브라카다브라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아브라카다브라가 마법 주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맞으나
아낙수나문은 '미이라'란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 ㅠㅠ
실존인물이 모델이었긴 하나
실존했던 사람의 이름은 아낙~이 아닌 안케 세나멘.
그녀는 공주로 태어났고
첫 남편은 황금가면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투탕카멘.
자료를 찾아보면
당시 이집트는 다신교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안케 세나멘의 아버지였던 왕이
종교개혁으로 유일신 체계를 세웠다고 해요.
다만 유일신이라 함은
하나님이 아닌 태양신 아톤.
그가 죽자 아톤 신앙이 쇠퇴하면서
다시금 다신교로 돌아갔다고 하고요.
돌아가서요~~~
수천년 동안 사람의 모습을 고찰하고
영향을 주면서 계속 관여한 자들과 싸워야 하는지라.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악힌 자들에게 이리저리 채이고 터지며
노예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음에 대해 알겠습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푯대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만 할 것인데요.
우리의 푯대는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주님을 향해 나아간다'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간다'
"당연한거잖여~~~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줄 알았네~~~~"
그러게요~~
저는 특별한 비법을 알지 못하는지라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공유 좀~
그러기 위해선
주님이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가능하지
그렇지 않다면 생각과 실제의 행동이 따로 노는 상태가 될걸요.
그렇지 않은지요?
어제 넷플릭스의 드라마 한 편을 보았어요.
천재 과학자가 만든 복제 인간에 대한 것이었는데
'사람의 존재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는 듯 했습니다.
작가는 '그 사람의 존재적 기억'이
바로 그 사람이다~ 식으로 풀어가던데,
제 생각에는
마귀가 수시로 사용하는 그럴싸한 미혹이라 여겨지네요.
"내 이름이 무엇이고, 몇 살이며~를 포함하여
과거의 여러 기억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 아닌감?"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맞으나
그러한 주장이 온전히 맞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까지도 맞다고 해야하는지요?
왜곡되고 변형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기억이기에
잔혹한 연쇄범을 데려다가
"너는 선한 사람이다~
네 기억은 단지 꿈에 불과한 악몽이었을 뿐이다."라고
계속 주입시키는 세뇌 과정을 통해
조작된 것을 진실로 믿기 시작한다면
그는 어떠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인가요?
기억이란 것은
자신이 스스로 조작하기도 하고,
타인에 의해 조작되기도 하고,
심지어 마귀도 이리저리 조작을 할걸요.
뇌에 문제가 생기면 성격, 목소리, 기억, 언어체계
운동신경 글고 감각 등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본 것을 자신의 기억이나 상황으로 여기는 등
예전에 미스테리하다고 여겼던 현상 중 하나가
전생에 대한 기억을 지닌 이들의 존재였어요.
그 정보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처럼 마귀는
기억만 왜곡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슬픔이나 아릿함 부끄러움 같은 감정까지도 얼마든
던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마귀에게 생각과 감정을 내주고는
휘둘리지 말아야겠죠.
그러나 역시도 쉽다고는 못합니다.
제 경우를 보아도 한동안은 질질 끌려다녔어요.
모든 영역에서 그랬던 것이 아닌, 약점에 해당되는 영역에서.
지금도 전혀 아니다~는 아니지만
이전에 비하면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불신으로 힘들어하고 있을런지도.
"헐~~~불신이라고?"
넵~~~
순간 불신의 생각이 스치고 가서
'불신이네~~~' 하며 황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라서 회개를 혔어?"
아닌데요.
어떠한 것을 계기로
생각 형태로서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이지
그 생각을 잡은 바가 없는디요~
제것이 아닌
그 생각을 잡았다면 어찌 되겠는지요?
뻔히 보이고 알아지는 그 길을 어찌 가겠는지요.
"그라믄 당신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아는겨?"
알죠.
그것에 대해 알려주시는 분이 계신데요.
만일 이 부분에 대한 자각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란 존재는 무엇을 기준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혼란이 오기 쉬울듯요.
중세 유럽의 평민계층이
어찌 살았는가의 자료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낙수나문~을 접했던 것이라는 ㅎ
과거의 귀족이나 수도사들은 글을 알았기에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지만 평민들은 그렇지 못해
자료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어느 수도사가
이단을 가리기 위해 적은 자료에 묘사된 내용을 바탕으로,
중세시대의 평민들은
돼지, 닭 등을 집안에서 같이 기거하도록 하면서 키웠고
(다른 이들이 훔쳐가면 안되는지라~)
씻는 것에 인색했던지라
가족들이나 이웃 등이 모여
서로의 이를 잡아주는 것이 다반사였다고(헐~~~ㅜㅜ)
중세시절 유럽에서 귀족이 아닌,
평민 층의 하루 품삸이
겨우 하루 식량을 사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고
사냥은 귀족의 것이어서
함부로 산토끼 등의 동물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농작물 근처에 덫을 놓아 포획하는 것은 처벌하지 않았기에
그런 식으로 작은 동물들을 먹거리로 사냥했다고 합니다.
스튜라는 음식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이나 다 넣고 끓여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나눠먹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릇이 귀하여
이스트를 넣지 않은 그릇 모양을 빵을 만들어
며칠 말리는 방식으로 딱딱하게 만들어
그릇 겸 식량으로 먹었다던데,
빵 안에 수프같은 음식을 담는 요리가
바로 그것에서 나왔구나~싶네요.
전세계에 식민지를 두고
르네상스니 뭐니 하던 유럽이 저럴 정도였다면
휴~~~~
우리 조상님들은 어땠을까 싶어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사는 것이 힘들었던 중세시대 평민들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지면
이단이든, 미신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를 보건대 생존의 시대로 들어가면
당장 눈 앞의 것에만 매달리기 쉬운가보다~ 합니다.
그러니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유리걸식까지 감수하던 이들의 믿음을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겁니다.
전후에 태어나~
편안한 시간대를 살아온 나약한 자에 불과해서요.
"한디, 이런 내용을 왜 적는겨?"
주님이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삶이란 것은 이리저리 비루하고, 비참하기 쉬운 것 같아서요.
그러한 모습이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좀비마약인 펜타닐의 경우
국내에도 이미 많이 퍼져 있다고 압니다.
학교까지도 파고들어갔다고도 하고요.
“친구따라 호기심에”… 학교까지 파고든 ‘좀비 마약’ [인천, 신종마약 판친다] (naver.com)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마약의 유행성과 위험성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인데요.
아무리 삶의 질이 개선되어지고
경제적으로 부요해진들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피폐하고 비루한 삶을 사는 듯 합니다.
꼭 가난해서만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이 얼마나 귀하시고
감사하신 분인가를 깨닫고, 또 깨닫습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의 가치를 모르면
그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수준의 넘쳐나는 또는
사람의 선택의 영역에 있는 가벼운 은혜 정도로 여기는듯요.
그리여긴다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겠죠.
복음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에게 믿음을 얼마나 주실 것이며
주신들 얼마나 유지를 시킬 수 있겠나 합니다.
하여 복음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거라사 지역에 살던
돼지떼를 키우던 이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돼지를 키우던 이들은
돼지가 가족인지, 가족이 돼지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오늘 하루 굶지 않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했을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가족을 노예로 파는 일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으니
찾아오신 주님을 직접 뵈옵고도
돼지 떼를 택하는 어리석음을 선택했을 것이고요.
그들이 죽은 다음,
얼마나 후회하면서 가슴을 쳤을까 싶습니다.
후대를 사는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어리석다고 하지만
그러나 만일 그 시간대, 그곳에 살았다면
마찬가지로 동일한 선택을 했을 수 있습니다.
당장 눈 앞의 생존과 배고픔이란 고통이
더 크게 다가왔을테니까요.
당시의 사람들만 그랬고,
지금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란 부분에서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돼지몰이마냥 살고 있겠죠.
자신을 즐겁게 하는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따라 살거나,
주님보다 그것들을 더 원하면서요.
"그라믄 당신은 어떤디?
혹시 돼지몰이가 아닌줄 착각하는 돼지몰이는 아닌가~~~~"
'나'가 어쩌면 돼지몰이~~~~?
아닌디욧~~
계속 돼지몰이는 필히 지양하려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