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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3편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기록들을 다룹니다.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 국보 76호
7년의 긴 전쟁기간 동안 이순신 장군께서 기록한 당시의 일기와, 서신들, 장계들을 모은 자료입니다. 특히 난중일기는 그 당시 전쟁의 전황과 시대상,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은 유물' 이면서 수식없는 간결하고 담백한 필체의 '문학적 가치' 로 인정받은 기록이기도 하지요. 나라를 지키는 장수로서 꼼꼼했던 이순신 장군 개인의 성격은 물론이고, 가정적이고 효심 깊었던 '인간 이순신' 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라 하겠습니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난중일기와 그 부록의 성격인 서간첩, 임진장초의 기록들 모두 충청남도 아산의 현충사(顯忠祠)에서 보관중입니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7년의 전쟁기간 동안 치뤘던 모든 전투들의 준비과정, 전투 진행 양상,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인 행보와 감정들도 가감없이 솔직하게 적었다는 점에서 사료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습니다. 현대에도 늘 시기를 가리지 않는 권장도서로 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에 대해 가장 비판적으로 서술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 서간첩(書簡帖) ]
『난중일기』 의 부록성격으로, 이순신 장군께서 작성한 서신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 위 사진에서 나온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쪽과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매양 슬픔과 아픔이 더하더니, 지금 조카 온을 보고, 또 너(이순신의 조카, 방금 전에 언급한 '이온' 과 형제 사이로 추정되는 인물)의 편지를 보니 슬픔이 더욱 지극하구나. 너의 형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느냐? 내 비록 숨가쁘지만 명나라 장수들(진린과 그 휘하의 명 수군 장수들)이 연이어 도착하여 요구하는 게 번다하니, 하나 하나 응하여 들어줄 수가 없구나. 어쩌겠느냐... 너는 고향에 있으면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마땅히 속히 내려오는 게 좋겠구나. 탈 만한 말이 없으면 회(이회-李薈, 이순신 장군과 상주 방씨의 맏아들)에게 있는 말을 상의하여 타고 오는 게 좋겠다. 이 편지를 회에게 보여주어라. 나머지는 다 쓰지 않는다."
- 8월 6일, 숙부 -
[ 임진장초(壬辰狀草) ]
전란 당시 조정에 올린 이순신 장군의 보고문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 역시 당시의 조선 수군이 치뤘던 해전들의 진행 양상과,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조선 수군의 진중 실태들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기록유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순신 관련 고문서 일괄 - 보물 1564호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거쳐오면서 발급된 각종 공문서들과, 이순신 장군의 사후 조선 왕실의 공신대우를 증명하는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특히 장군 사후의 기록들을 통하여 당대에도 역사의 성웅으로 인식되어 온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물 1564호라 일괄 지정된 이순신 장군 관련 문서들 중 조선을 지켜는 무관으로서 살아온 장군의 행적을 파악하기 쉬우며, 장군에 대한 사후 역사의 평가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 문서들로 선정했습니다.
[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 ]
조정이 공식적으로 임진왜란의 극복에 공헌한 18인의 선무공신을 선정한 기록입니다.
왼편에 선무공신 1등으로 선정된 장군의 성함, 이순신[李舜臣]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순신무과홍패(李舜臣武科紅牌) ]
(음력)만력 4년[1576] O월 O일, 이순신 장군의 무과 합격을 증명하는 공식 합격증입니다.
역사를 구한 역대 최고의 성웅이 이 문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 이순신유서(李舜臣諭書) ]
(음력)만력 19년[1591] 2월 15일,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입니다.
[ 사부유서(賜符諭書) ]
(음력)만력 25년[1597]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입니다.
저 명령을 내린 시점은 '그' 가 말아먹은 칠천량 해전 직후라 한반도 남부가 쑥대밭이 된 시점이었죠...
그리고 이후 (음력)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다시 한번 조선을 구해내는 해전사의 기적을 연출합니다.
[ 선무공신좌의정증직교지(宣武功臣左議政贈職敎旨) ]
(음력)만력 32년[1604] 7월 12일, 장군의 사후 좌의정 벼슬을 추증한다는 선조의 교지입니다.
[ 충무공증시교지(忠武公贈諡敎旨) ]
계미[1643] 3월 28일, 장군의 사후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추증한다는 인조의 교지입니다.
* 병자호란 이후의 교지에는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간지를 밝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충무공영의정증직교지(忠武公領議政贈職敎旨) ]
계축[1793] 7월 21일, 장군의 사후 영의정 벼슬을 추증한다는 정조의 교지입니다.
※ 부록 ※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 에 실린 「전진도첩(戰陣圖帖)」 입니다. 명령을 받을 때의 진형인 청발방(廳發放)에서부터 좌우찰(左右札), 이로행(二路行), 첨자찰(尖字札), 곡진(曲陣), 원진(圓陣), 직진(直陣), 예진(銳陣)과 두 가지 모양의 학익진(鶴翼陣) 등 10여 가지의 진형(陣形)의 형태가 수록되었습니다. 원래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의 충무사(忠武祠)에 소장되어 있는 『우수영전진도첩(右水營戰陣圖帖)』 을 누군가 필사하여 「충무이공전진도첩(忠武李公戰陣圖帖)」이라 이름붙인 것으로 전합니다. 임진왜란부터 조선 후기의 수군이 이용한 다양한 진법(陣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 두피디아 등 -
* 시리즈의 마지막 글인만큼 반응도 좋았음 좋겠습니다. ㅎㅎ
* 그동안 글 잘 봐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첫댓글 만약 정조가 이순신 덕후가 아니었다면...
근데 숙종도 현충사 현판 친필로 작성해서 헌사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은 왕실 차원에서도 극진히 대접했어야 할 성웅이었음이 확실했죠. 정조대가 아니었더라도 어느때든 재평가 받았을 겁니다.
@서초패왕 항우 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고위 무관을 이순신의 가문이 지냈다고 하니까요 ㅋㅋㅋ
너무 재밌어요 ><
감사합니다.
조금있다 볼것!
고맙습니다.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성웅이 괜히 성웅이 아니죠. ㅎㅎ
난중일기는 10대, 20대,30대 다 다르게 느껴지더라구요. '애끊다' 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름
정유년의 일기들은 볼 때마다 가슴 아파요...ㅠㅠ
노량 보고 와서 이순신 장군 관련 글 쭉 보고 있는데 정리 너무 잘해주셔서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