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바다/김길녀-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창문으로 흘러드는
미루나무에 온몸을 기대고 앉으면
바다로 떠나간 지난여름
상처들이 붉은 부표가 되어 발바닥을 적셔옵니다
두꺼운 아픔이 해일이 되어 덮쳐와도 울 수 없는
갯메꽃 넝쿨을 따라가다 보면 하루 종일 바다를
베고 누워 있던 햇살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저린
걸음을 옮기는 낯익은 풍경이 다가옵니다
오랫동안 내 몸속에 세 들어 살았던 늙은
세포의 잎사귀들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저물녘 바다의 등에 업혀 흘러 흘러만 갑니다
-백야의 바다/김길녀-
바다에 와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
내가 가진 뭍의 기억은 밤이 길어질수록
더 먼 전설이 되어 물고기 전망실 창틀
담배꽁초 더미에 묻혀져 간다
다시 칠월이 시작되었다
새벽 3시의 박명 따라 남빙양 바다는
백야를 거느리고 느리게 시간의 발바닥을 딛고 있는 중
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나의 바다로
깊은 잠에 빠진 나의 여자가 오고 있다
그녀의 흩날리는 머릿결에서 배롱나무꽃 긴 여름 향기
가 난다
백파로 얼룩진 스커틀을 두드리는 그녀, 그녀 등 뒤로
백야 속에서 몸이 야위어 가는 물고기들의 외침이
물고기 전망실 계단을 필사적으로 튀어 오르고 있다
나의 바다에 나의 여자가 오고 있다
천천히 천천히 스크루 발자국에 힘주어 가며
백야를 헤치고 나의 여자가 부푼 바다를
데리고 나의 바다를 찾아오고 있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최광임-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바다 책장/강문숙-
겨울 채석강, 어둠이 몰려오고 책장 넘기는 소리 분분하다. 파도는 행간을 자꾸 지우는데 무언가 읽어보고야 말리라 각
오한 듯 일몰에 이미 젖었던 옷자락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젖은 책장 겨우 떼어내며 해풍에 내어 말리는 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다발처럼 너무 말라서 바삭거리거나 해감이 달
라붙은 몇 페이지는 얼룩이 져서 맥이 뚝, 끊긴 읽다만 책이 빼곡하다.
반생의 쓰다만 책 한 권, 여기 또 있다. 끈질긴 투병의 시간 더듬어 보면 온통 멍투성이였지. 언젠가는 그 상처 위에 꽃
피울 날 있을 거라 믿었지. 덜컹거리며 반나절을 달려와서야 엑스레이 찍히듯 내 늑골까지 환하게 읽히고 마는,
걸어온 길을 지우고 새로 쓰라는 건지, 앞으로 써야할 문장들 저 짠 바닷물이라도 찍어서 쓰라는 건지 어느새 발목가지
밀려드는 차가운 물결.
책으로 가득 찬 저 검은 바다 앞에 나는, 일몰처럼 붉어지는 간절함으로 무릎 꿇고 싶다.
-바다의 눈―생명의 환(幻)/김추인-
어미가 심어준 유전자는 오차 없이 수행됩니다
아무도 가르쳐 준 적 없지만
전갱이 무리들이 거대 공으로 일사불란 구르며
서로를 둥글게 엮어 전진합니다
안전지대와 위험지구의 경계를 넘어
포화 속으로 돌진해야 합니다
먹구름처럼 흩어지다 모이다 뺑뺑이를 도는
생의 제의祭儀
체취가 남기는 발자국을 좇아
포식의 상어 떼 뒤를 밟고 옵니다
삶은 어디서나 구름속의 행군
구름 갈피마다 피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도 펄럭이고 살아야 합니다
찢기고 먹히며 살아남는다는 것은 산 것들의
장엄한 번제燔祭
생의 순환은 계속됩니다
한 생이 다른 생으로 다시 오기까지
바다는 다 보고 있겠지만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젖을 물릴 뿐
-바다/김성춘-
그녀는 눈부신 열 일곱 살
온 몸이 성감대다
갯바람이 살짝 볼을 스치기만해도
몸의 구석구석
관능의 흰 파도가
부끄럽게 부끄럽게 부서지는
그녀는 눈부신 열 일곱 살.
-바다에서 나온 말/강 정-
달을 희롱하며 바다에서 나온
말[馬]은 창 앞에서 기다린다
—김구용, 「유월」에서
누가 창가에 서 있다
여자라고도 남자라고도 말 못하겠다
남자의 성기 끝에 여자의 입을 달았다고나 말해야겠다
사람이라고도 사람 아니라고도 말 못하겠다
짐승의 몸으로 사람이 풀을 뜯는 것이라고나 말해야겠다
누가 창가에 서 있다
바람일까
낮에 본 나무의 그림자가 뿌리를 일으켰을까
이 집엔 없는 몸들을 일으켜
밤새 집 안을 서성이게 하는 것으론
바람이라고 믿는다
풀 하나 없는 방 안에 묵은 시간의 綠藻를 풍기면서
뚝뚝 천장의 누수를 도발하는 것으론
나무라 믿는다
그림자는 무슨 구덩이나 우물 같다
그 둘레로 풀들이 맵게 자란다
나는 잠들었는지 깨어 있는지 모르게
부들부들 움직인다
다리를 움직이는지 머리를 궁글리는지 분별할 만한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나는 창 밖에 선 채로
방 안을 서성거린다
구덩이 근처로 큰 나무가 움직인다
집 전체가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진다
알고 있던 모든 길들이
커다란 수풀로 변한다
허공에 뜬 들창에서
누군가 계속 이곳을 내려다본다
구덩이 위엔 먹다 버린 비스킷처럼 달이 떠 있다
수풀에서 나무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와
기다란 혀로 달을 건져 먹는다
바람이 몰아친다
부푸는 수풀이 광목천처럼 푸다닥 내달리며
바람 속에서 기다란 말 한 마리 오려낸다
나는 말의 목을 쳐 지나온 미래의 풍경들을 엿본다
잘려 나간 목덜미 안에 더 큰 말들이 바다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모든 밤을 달려온 바다가
첫 몽정의 당혹처럼 꼿꼿하게 일어선다
-바느질하는 바다/문정희-
바다는 서 있고
내가 흐르고 있었나 봐
검은 씨앗을 받으려고
태양 앞에 보자기를 펼친 바다
천 번의 대결과
만 번의 패배로 늠름한
바다는 서 있고
내가 흐르고 있었나 봐
바느질하는 여자처럼 등을 구부리고
꿰매어도 꿰매어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시시각각 일몰이 다가드는 시간
바늘귀보다 작은 내 사랑은
네가 꿰어준 은빛 실을 달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바다는 서 있고
내가 흐르고 있었나 봐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정윤천-
1
먼 훗날이 흐르도록 변하지 않을 일이 있었다며
너는 오늘도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그사이에, 서로 지치도록 쳐다보았을 것이니
그것이, 무엇으로 맺어진 언약의 벌이었을까
너는 그렇게도 서서, 서 있는다는,
바라본다는
간절함에 대해 말하는 대신 제 귀를 한번 만져주기도 한다
그 귓불의 모서리에 피던 청색의 풍경소리 몇 닢,
2
그보다 훨씬 덜한 것을 두고 왔어도 그럴 것인데
하물며 어디선가 영원을 입에 올렸던 마음의 파도소리가
난간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켜본 적 있었노라면,
그 말 한마디 지나가는 눈비에 젖어 떨게 되거나
파랑의 이빨에 물려 상처가 나게 되더라도
이 저녁의 물결처럼은 꿈틀대거나 고요해도 봐야 하리라며
자꾸만 너는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3
김제 바닷가 눈썹 고운 절집의 이름 하나는
문득, 망해사.
-바다에서/권기호-
바다에는
늘 쓰지 못한 시간이 떠돌고 있다.
가파른 비지너스의 삶을
증기 기관차처럼
헉헉거리며 온 사나이에게는
젊은 한때
맨발인 그녀와 함께
쏟아질 은하를 바라보고
겨누어 본 그 화살의 시간이
지금은 수취 불명의 주소되어
블랙홀 같기도 하고
백지 답안지 같기도 한 그 시간이
-바다여인숙에서/박숙이-
나를 바다여인숙까지 끌고 간 것은, 그래, 그건 순전히 몰락이었다 내가 몰락을 순순히 수락한 것도 바로 그 바다여인숙
의 첫 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몰락과 한 몸이 된 셈이다 수락하고 보니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걸, 내 자신을 왜? 짐승
처럼 피해 다니기만 했을까 허름한 불빛이 허름한 생을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천날만날 물안개에 싸여 나처럼 글썽이
는 바다여인숙, 썰물에 쓸려쓸려 눈치 하나는 빨랐다 무었보다 나는 늙으마한 숙박계의 뱃고동 같은 퉁명한 친절이 덥썩,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된다 귀가 늙은 숙박계는귀신 같이 갈매기들의 몸부림을 손바닥보듯이 훤히 다 들여다 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바다는 대충 몇 시부터 잠에 곯아 떨어지는가에 대하여, 몇 시쯤이면 동해가 해를 머리에 이고 일어서는
가를? 그리고 나는 열쇠 없이도 드나들 수 있는 창이 있는 바다 한 칸을 부탁하기도 했다 내가 바다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동안은 몰락은 잠시 나를 피해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렸다 새벽까지도 내 가슴에, 등대처럼 환히 불이 켜져있었던 걸 보
면, 밤새도록 파도소리가 나의 살갗을 파먹도록 다만 나는 몰락하는 달빛만이 아름답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랬으
면 하고, 바다여인숙처럼 홀랑 벗은 채.
-강진 바다에 물어 보다/송재학-
당신에 대한 질문의 하나로 강진의 밤 바다를 택합니다 기역자로 놓여진 방파제가 갈라놓은 바다의 밖과 안은 파도의 흐
느낌이 다릅니다 바깥 바다의 너울은 낙시꾼들의 칸델라와 가게 유리창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과 섞여 우우, 후퇴하는 병
사들 처럼 보입니다 손돌이추위 탓으로 오금이 저리지만 바다를 피할 수 없습니다 놀치는 파도의 빠르거나 느린 움직임
에 마음의 형편을 실어 갑니다 안쪽 바다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다를 유리와 너울로 갈라놓은 강진의 방파제이지만 내가 가로지른 빗장은 낚시꾼들의 물음표 같은 낚싯바늘이 가득
널린 바닷속 어둠과 몇 걸음 못 미친 술집의 네온 사인과 소란에 대한 겁니다 어둠과 네온 사인 사이란 그 지척에도 불구
하고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그 세상 사이의 통로를 거쳐 당신이 다가왔지요 아마 당신은 그 두 세상을 하나로 생각한 듯
싶습니다 오늘 밤 공복을 못 이긴 강성돔 몇 마리는 죽음의 한 방식으로 불빛과 미끼를 덥석 물고 체념 속으로 자신을 떠
밀어 버립니다 고요와 해초가 엮은 수맥(水脈)이 바닷고기의 길이었는데 술꾼의 넓은 회 접시로 올라간 그 공복의 정체는
무얼까요 강진 포구의 어수선한 밤, 노래와 취기와 폐차의 휘발유 냄새를 통해 내 싸움을 말하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바다
이야기로 치레하고 마는군요 당신의 거처에 며칠 내내 장대비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비로 받아 보는 하루하루는 수하물처
럼 무겁습니다
갓밝이 무렵이면 바다를 덮고 있던 두꺼운 어둠은 막 걷어 내기 시작하는 장판지처럼 금방 뜯겨 나가고 내가 세워 놓은
밝음과 어둠의 빗금도 씻은 듯 사라지고 말 겁니다 당신, 당신...... 입 속의 구슬처럼 되풀이 속삭여 보지만 비밀보다 더
먼 곳에 있을 당신
-바다가 없는 섬/김옥경-
마지막 버스를 떠나보낸 정류장
바다가 없는 고요한 섬이다
물빛 하나 보이지 않는
그런 섬이 되어오는 순간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번진 바닥에
검은 박쥐처럼 펼쳐진 그림자로
어둠의 블랙홀 속에 빠져
나는 허우적거린다
구름과 바다의 풍경이 그려진 창가
섬이 아닌 섬에서
새들의 투명한 울음소리를
환한 불빛에 어두워지는 서글픔을
바다의 아침에 반짝이는 물살을
불빛 끝에서 보고 있는 섬
모든 배가 떠나버린 섬에서
울고 있는 바람
-바다로 가는 귀/김정경-
두 귀를 접어 가방 속에 넣는다
여관방에 눈발이 도착했다
잠결에 파도 소리 배꼽 아래까지 밀려왔지만
내려야 할 역을 어딘가에 흘리고 왔으므로
바다로 가는 길 보이지 않고
수술대에서 따귀를 맞으며 깨어나
약 기운 사라질 때까지 죽은 아이 이름 짓다가
핏물이 흐르는 소고기 볶아 미역국 끓이다가
개수대에 흘려보냈다 소리 죽여,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다
몸이 먼저 알아챈 것이다 거짓말처럼
얼굴이 붓고 귀가 울었다
바람이 구름의 명치끝을 비트는 소리
쓰러지지 않으려고 나무들이 생가지 끊어내는 소리
돌아누우면 두 팔로 몸을 껴안아 오는 소리들
누군가 부르는 신호 같아
지도 위에 귀를 올려둔다
두 귀는 발자국 찍으며 깜깜한 바다로 가고
끊어졌던 길이 새벽녘 다시 물속에서 걸어 나올 때까지
빈 가방 속으로 밤새 폭설이 내린다
-뭉크의 바다/나문석-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비굴한 날
우리는 장생포항으로 갔네
지금은 고래가 잡히지 않는 그곳
항구의 고래고기집
러시안 귀신고래, 장생포 밍크고래
시를 말하려다 인간을 말하고 인간의 말들은
우왕좌왕, 말 폭탄 되어 핵을 만든다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고래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뒤틀린 틈 사이
등이 터져버린 새우, 벌떡 일어나
깡소주 한 잔 냅다 들이키고
바다를 향해 소리친다
니들이 내 깡을 알아!
아무런 힘이 없는 자의 깡다구
절규가 되어 바다로 뛰어든다
[돎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