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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땅-검제 학봉 종택
이장희 추천 0 조회 47 14.10.28 17: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땅- 검제 학봉 종택


지난 겨울방학 때 직원 연수로 전라도 강진과 해남을 다녀왔더니 반응이 좋았다.

올 여름 방학은 경북 북부지방의 선비 문화를 체험하자는 요구가 많아 사전 답사 겸 날을 잡아 다녀왔다.

답사의 순서는 부산을 출발, 신대구고속도로 경유- 중앙고속도로-서안동IC를 나와서 학봉종택- 봉정사- 제비원 석불 - 삼태사묘 - 신세동 칠층전탑 및 임청각 - 긍구당 고택 - 국학진흥원과 오천 군자리 - 농암 종택 - 청량산과 청량사 - 퇴계 태실 - 퇴계 종택 - 도산서원 - 조지훈 생가 - 서석지 - 봉감모전석탑의 순서로 정했다.


학봉종택은 수 차례 지나가면서도 겉모습만 보고 지나친 곳이다.

올 1월에도 종택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이유인즉 종손님이 마루에 앉아 햇빛을 쪼이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하도 근엄하시어 차마 들어가서 구경 한 번 하자고 청할 용기가 나지를 않아 그냥 집 주위만 서성이다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담보로 꼭 한 번 내부를 구경하기로 마음으로 작정을 하고 출발을 하였다.

종택 앞 논에는 모내기를 끝낸 모들이 흙냄새를 맡고 제법 빳빳하게 힘을 내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운 좋게도 종택 대문 앞을 쓸고 있는 종택 관리인 김용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찾아온 연유를 말씀 드리니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셔서 두루 구경을 하고 자료도 많이 받았다.

 학봉 종택

 

학봉종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보관하는 운장각(雲章閣)을 전부 합쳐 90여 칸이 2천평의 대지 위에 당당하면서도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7월 16일 직원 연수 때는 보물 제905호로 지정된 운장각 소장 전적 일괄을 다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약속도 받았다. 이는 민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규모로는 국내 최대라고 한다.

특히 주목해서 볼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봉이 쓰던 거북껍질테 안경과 퇴계선생으로부터 받은 병명(屛銘,병풍 병, 새길 명)이다.

 운장각


안동에 가니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이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많이 보였다.

안동시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배경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선생이 있기 때문이다.

퇴계선생의 양대 제자는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 선생과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선생이다.

학봉 종택의 주인공인 김성일 선생은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나라 4대 길지 중 하나라고 말한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천전마을, 의성 김씨 집단촌인 일명 내앞〔川前〕에서 태어났다. 의성 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아들로 고려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가 어머니인 의성공 김석(金錫)이 시조다.


학봉의 부친은 청계(靑溪)공 김진(金璡, 1500-1580)이시다.

청계공의 아들 다섯이 과거에 합격하여 내앞 종택은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고도 불린다. 이 중 선생은 넷째 아들이다.

천전리에 있는 내앞종택 건물은 학봉선생이 건립했다고 한다.

학봉은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나주목사를 거쳐 경상우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시다. 의병과 관군을 지휘하던 중 진주공관에서 1593년 56세로 순국하셨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신출기몰한 병법으로 게릴라전의 명수이지만 남의 통제를 받는 것은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홍의장군이 학봉에게만큼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할 것인가. 나도 또한 그의 통제를 받아야지!”라고 했다는 일화는 학봉의 인품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상좌도는 퇴계선생, 우도는 남명 조식선생이 터줏대감인데 두 분은 쌍벽이자 라이벌이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남명의 수제자고, 학봉선생은 퇴계의 수제자다. 남명의 수제자가 퇴계의 수제자에게 고개를 숙인 일화는 두 분 다 대단한 분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국사 교과서에는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 통신사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파견되었는데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必有兵禍)”이라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그러한 정세를 보지 못했다(不見如許情形)라고 잘못 말해 학봉은 역사의 죄인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학봉이 그때 불침론을 주장한 것은 정사 황윤길이 동래에 도착하자마자 곧 전쟁이 날 것처럼 말하여 민심을 뒤흔드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학교 국사선생님에게 요즘도 이런 내용이 교과서에 나오는가 물어 보니 그러한 내용은 없다고 하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모두 ‘요순 같은 성군’이라고 대답하자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고명하시니 요순 되기가 어렵지 않으나,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거부하는 폐단이 있으니 걸주(桀紂)같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걸주란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을 일컫는 것으로 나라를 망친 폭군의 대명사다. 이 일화로 인해 ‘임금 위에 있는 호랑이’라는 뜻인 ‘전상호(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선생의 성품은 이처럼 강직했다.

 학봉종택 마당에서


학봉종택의 대문 앞에는 기념식수를 한 주목나무가 있다. 기념식수를 한 사람은 고경명의 후손으로 육군준장이다.

학봉집안과 고경명집안과는 남다른 사연이 숨어 있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금산전투에서 3부자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분이다. 고경명은 첫째아들, 둘째아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면서 막내아들 고용후를 불러 “우리가 전쟁에 나가면 너는 안동의 학봉가문으로 피신을 해라. 그 집안은 의리가 있는 집안으로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막내아들은 가솔 50여 명을 데리고 학봉가문의 도움으로 4년간 피신하여 무사히 가문을 보전했다.

고경명이 학봉에 대한 신뢰가 어떠한가를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그 후 고용후는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학봉의 부인과 큰아들을 관아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고 울먹이면서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1608년에 권기(權紀)가 편찬한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학봉종택이 있는 검제는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천 년동안 패하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또한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로 알려져 있다. 전쟁, 기근, 전염병이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는 의미다.

주변에 있는 산을 보니 산세가 거칠지 않고 둥글고 부드럽다. 마을 가운데에는 내가 흐르는데 물이 천천히 곡선으로 흘러 마르지 않게 되어 있다. 이곳은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늑하고 고요하다.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다. 이처럼 아늑함을 주는 곳이 명당이다.


안동 권씨인 선생의 처가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장인 장모를 모시기 위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선생은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도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의 장인 장모에 대해 외손봉사로 묘재를 지낸다.


학봉집안에서는 퇴계학통의 정맥을 두 번이나 받았다.

학봉이 처음 받았고 두 번째는 학봉의 11대 종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이 받았다.

퇴계학통의 정맥이란

퇴계가 66세(1566)에 요 . 순 . 우 . 탕 . 문왕 . 무왕 . 주공 . 공자 . 주자에 이르는 학문의 요체를 정리한 병명(屛銘,병풍 병, 새길 명)을 학봉에게 손수 써서 준 것을 말한다.

이는 적전제자(嫡傳弟子, 수제자)에게 주는 증표인 셈이다.

불가에서는 의발(衣鉢, 옷과 주발)을, 도가에서는 보검을 주로 증표로 전한다.

병명은 모두 80자로 4자 대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 연원정맥(博約兩至 淵源正脈, 박문에서 약례까지 양쪽 모두 지극히 하여, 연원 정통 이어 받은 분은 주자셨다네)’ 인데 이 구절로 인해 후일 학봉 종가는 물론 유림사회에서 학통을 수제자에게 전한 스승 퇴계의 증표라고 인식했다.

 

퇴계학통의 정맥은

학봉 - 장흥효 - 이현일 - 이재 - 이상정 - 남한조 - 유치명로 이어지다가 다시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흥락에게로 이어진다.

서산 김흥락은 구한말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안동부사가 새로 부임해온 후 세금 및 폭정이 심하여 민란이 일어나자 이에 겁을 먹은 부사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관리들에게 묻자 하나같이

‘이 일은 서산선생이 나서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사가 서산을 방문하자 서산은 부사를 꾸짖어 앞으로는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은 후 백성들에게도 자제할 것을 당부하자 민란을 일으켰던 백성들은 서산의 말 한마디에 모두 물러갔다고 한다.

당시의 서산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이런 서산이 일본 경찰에게 무릎을 굻리는 치욕을 당했다.

일본군이 민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단행하자 안동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서산의 사촌동생인 의병대장 김희락이 일본군에 패전해 간신히 도망쳐 학봉종택 안방 다락에 숨었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화가 난 일본 경찰이 김흥락과 평소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 어른 10여 명을 포박하여 종가의 큰 마당에 꿇어 앉히고 쓸만한 물건은 가져가거나 부수어 종가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에 의병대장 김희락은 끌려가 총살을 당하면서 가족들에게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報?, 갑을 보, 원수 수)를 가르쳐라!”고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이런 사건들을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당시 나이 10세인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1887-1946)이다.

김용환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의 투사 김남수와 함께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꼽았을 정도로 당시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났었다. 집안사람들조차도 김용환이 진짜 노름꾼인줄 알고 원망을 했다.

근래에 와서 만주 독립군에게 전 재산인 전답 700 두락, 18만 평을 군자금으로  보낸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서 나타났다.

그의 파락호로서의 행적은 모두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철저한 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에게조차도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가 1995년 김용환선생이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자,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전략)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여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 동안 살아오면서 감동적인 글을 많이 봤지만 이 글을 처음 봤을 때만큼 눈물을 흘려본 적은 기억 속에 별로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시집 보내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처절하게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이 느껴져 지금 이 글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난다.


서산 김흥락 선생의 제자 중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해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고, 의성 김씨 천전문중에서만 훈장을 받은 이는 32명이고, 학봉의 직계 후손만 15명이다. 우리나라에서 훈장 받은 가문으로서는 최다이다. 우리나라가 오천 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환에게는 자손이 외동딸(김후웅 여사) 하나뿐이라 양자를 종손으로 모셔 오기 위해 1945년 정월, 임천서원에서 전체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지례에 살고 있는 김시인이 종손으로 적합하다는 문중의 결정이 내렸다. 이 때 김용환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시인의 생가에서는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종가가 이미 살림도 바닥이 났고 종손의 책임과 의무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문중사람들이 교대로 조를 짜 당시 김시인옹의 백부에게 석고대죄를 하듯 자리를 깔고 앉아 7개월을 매일 간청을 들인 끝에 학봉 종가의 종손으로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올 초에 종택 구경을 하고 싶어도 하도 근엄하신 표정이어서 도저히 집구경하겠다고 간청을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그분이 바로 올해 91세이신 종손 김시인옹이다.


이집 종부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안동 시내는 물론 대구 시내에 있는 꽃가게의 꽃이 모두 바닥이 났다. 졸업, 입학 시즌도 아니고 국경일도 아닌 그저 평일인데 안동뿐만 아니라 대도시인 대구까지 꽃이 바닥이 나서 모 신문사 기자가 조사를 해 보니 학봉종부가 죽어서 조화를 보내느라고 대구 시내까지 꽃집의 꽃이 동이 났다는 것이다.

칠일장을 했는데 집으로 찾아온 문상객만 4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대단한 위세다.

학봉종택을 다시 일으킨 김시인옹의 부인인 조필남 종부는 조지훈 시인의 고향인 영양 주실 마을의 한양 조씨가 친정이다. 차종손인 김종길씨는 삼보컴퓨터 부회장이고, 차종부는 퇴계 종가의 종녀다.


7월 16일 직원연수 때 오면 운장각의 병명과 거북껍질테 안경를 직접 볼 기대감에 아쉬움을 접고 종택을 나왔다.

종택 마당에는 이르게 핀 참나리, 자주달개비가 정갈하게 가꾸어져 종택 마당에 피어 있으니 더 품위가 있어 보였다. 닭장 옆에 많이 핀다는 달개비조차 이곳에 피어 있으니 그 정신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자주달개비

 참나리

 

 

102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Colors changing hue: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soothed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refrain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And when no hope was left inside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Starry, starry night: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a bloody rose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별이 많은 밤입니다.
파렛트에 파란색과 회색을 칠하세요.
내 영혼에 깃들인 어둠을 알고 있는 눈으로
여름 날에 바깥을 바라보아요.
언덕 위의 그림자들
나무와 수선화를 그리세요
미풍과 겨울의 찬 공기도 화폭에 담으세요.
눈처럼 하얀 캔버스 위에 색을 입히세요.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광기로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로와지려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그들은 이제는 듣고 있을 거예요.

별이 많은 밤입니다.
이글거리는 듯한 꽃들의 색이 불꽃같이 여겨집니다.
보랏빛 연무 속에 소용돌이 치는 구름들은
빈센트의 푸른 눈빛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색조를 바꾸는 빛깔들
황금색의 아침 평야
고통 속에 찌든 얼굴은
예술가의 사랑스런 손길로 달래지네요.

*후렴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아직도 당신의 사랑은 진실합니다.
내부에는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던
별이 빛나던 그 밤
당신은 연인들이 종종 그러듯 자살을 택했죠.
하지만 빈센트, 당신에게 해야할 말이 있어요.
어떤 세상도 당신만큼 아름답진 않았다고


별이 아름다운 밤
당신의 초상이 빈 벽에 걸려있습니다.
틀도 없이 이름도 없는 벽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당신이 만나왔던 이방인처럼
누추한 옷을 입은 초라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순백의 눈에 부서지고 상처받은 새빨간 장미의 은빛 가시
이런것들을 절대 잊지 않으면서요.

당신이 이제 무얼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해합니다.
당신의 광기로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유로와지려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들으려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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