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본체는 무너지지 않아 / 원담 스님
법은 가고 옴이 없고 움직이고 바뀜이 없다.
온갖 법이 다 한 곳에 또렷또렷한 형상이 있을 것이요,
온갖 법이 날 때에 비고비어 항상 적적하니라.
주장일타(株杖一打)
일법원무만법공(一法元無萬法空)
개중오도상한정(箇中悟道尙閑情)
십자가두박수소(十字街頭拍手笑)
만허기풍운월경(滿虛起風雲月驚)
한 법도 없는데 만법인들 있겠는가
이 가운데에는 깨달음도 부질없는 생각이라.
네거리에서 손뼉치고 웃으니
허공가득 이는 바람에 구름과 달이 놀라겠네.
한 납자(納子)가 혜월선사(慧月 禪師)에게
“견성한 사람이 나고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여쭈니
혜월 선사께서 반문하시되
“저 허공을 보라! 생(生)하고 멸(滅)함이 있더냐 없더냐?”하셨다.
이에 납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만공 선사(滿空 禪師)를 찾아 뵙고
이런 사실을 이야기 하니 선사께서는
“왜 대답을 않고 돌아왔느냐?”고 하셨다.
이에 납자(納子)가 “뭐라고 대답하여야 합니까?” 하고 여쭈니
선사(禪師)께서 이르시되
“대답이나 하라는데 무슨 잔소린고!” 하시니
납자(納子)가 잠시 멍 하다가 문득 말하기를
“스님! 참 그렇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선사께서 이르시길
“이것이 바로 선지식의 머리가 깨지는 대목이니라” 하셨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대중들은 일러보라,
납자(納子)의 생사(生死)와,
저 허공이 생(生)하고 멸(滅)함이 어떠한가!
양구(良久) 하신 후 납자(納子)의 생사(生死)는 그렇거니와,
허공은 제 자리를 여의지 않고 항상 조용하나
찾으려면 끝끝내 볼 수 없는데,
어찌 허공에 눈을 붙이게 하는가!
허공에다 눈길을 돌리면 지견(知見)과 알음알이를 일으키니라.
대중들이여!
옛도 없고 지금도 없는 묘한 본체는, 청정하고 공적(空寂)해서
온 세계가 모두 무너지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몸이 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부처님은 사라쌍수 아래서 특별히 두발을 보이셨고,
달마조사는 웅이산 마루에 외짝신만 남기신 것이 이것이니라.
이로써 반토막의 뼈는 모두 흩어져도,
묘한 본체는 영원히 신령하여
하늘과 땅을 덮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알겠는가!
주장일타(柱杖一打)
덕숭서목무근체(德崇瑞木無根蔕)
송괘편월생야량(松掛片月生夜凉)
덕숭산 상서로운 나무는 뿌리도 꼭지도 없고
소나무에 걸린 조각달에서 써늘함 생겨나네.
-본 법문은 불기 2549(2005)년 동안거 결제일을 맞아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이 내린 결제 법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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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圓潭) 진성(眞性) 대종사 행장
원담진성 대종사의 본관은 부안(김씨)이며,
모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은 몽술(夢述)이요,
법명은 진성(眞性)이고, 법호는 원담(圓潭)이다.
1932년 신동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장남인 형이 일찍 죽자 수명장수 기도차
이모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 절에 오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승려생활이 무척 고상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서
집에 돌아와 부모를 졸라 출가하였고,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였다.
수계한 후 천장사에서 다각 소임을 하던 중 방선시간에
대중들이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에
담소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노스님, 저도 참선을 해볼 랍니다."
노스님께서 '참선을 어떻게 할래?'하고 물으시니
"아까 어떤 수좌가 와서 노스님한테 법문을 묻는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는 하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고…."
이렇게 불언불어(不言不語)하며 일구월심 지어감에
정혜사에서 채공을 하던 중 만공 노스님이
거두절미하고 머리통을 내리치시면서 "알겠느냐?" 하고 물어서
얼떨결에 "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만공 노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들어 올리면서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그쳤고,
"딱 때리니까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실은 잘 모르면서도 또 맞을까 겁이 나서 뱉어버린 말이었기 때문에
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장자로 얻어맞고
아팠던 놈이 어떤 놈인가 열심히 참구를 했다.
하루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만공 노스님이 역시 머리를 딱 때리면서 "알았느냐?" 하고 또 물으셨다.
거기서는 "예, 몰랐습니다"하고 대답을 하니
노스님께서 "그러면 알아야지.
내가 닷새 동안 기한을 줄 테니 알아봐.
모르면 여기에 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해놓고는
닷새 동안 잠도 안 자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만공 노스님이 금선대(金仙臺)에 계실 때 심부름을 내려갔더니
역시 주장자를 가지고 달려들어 딱 때리기에
"아직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제야 "됐다.
짚신을 삼아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시봉을 하게 되었고 노스님의 법을 신뢰하게 되었다.
만공 노스님이 주장자로 머리를 때린 것과,
세존이 꽃가지를 잡아든 것과,
달마 스님이 불안한 놈 잡아오라고 한 것과
육조 스님의 한 물건이라는 법문과
임제 선사가 두들겨 맞고서도 모르다가
황벽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하는 그 말과
너무나도 일사분란하게 맞는 법문이라
비로소 이렇게 오도송을 읊었다.
一片虛明本妙圓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有心無心能不知 유심무심으로는 능히 알 수 없네.
鏡中無形是心卽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廓如虛空不掛毛 확연히 허공 같아 티끌만치라도 걸리지 않네.
이것이 1943년 17세 때의 일이다.
이에 만공 노스님은 비로소 사미 진성(眞性)에게 글을 써주었다.
眞性本無性 참 성품에는 본래 성품이 없고
眞我元非我 참 나는 원래 내가 아닐세.
無性非我法 성품도 없고 나도 아닌 법이
總攝一切行 총히 일체행을 섭했느니라.
이후 대종사의 임운등등(任運騰騰)하고 활발발(活潑潑)한
선기(禪機)는 하늘을 끌어내리고 땅을 뽑아 올렸다.
대종사의 허광방달(虛曠放達)한 선지(禪旨)는 산꼭대기에서
파도가 일고 우물에서 먼지가 솟았으니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였다.
경허, 만공 스님의 법을 이은 화상의 가풍은 언답(자갈논)을 일구고
땔나무를 나르는 중에도 평상심의 도를 내보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불법을 체현한 행화를 보이고 사라짐이
변화무쌍하여 그 향방을 가릴 수 없었다.
적경회심(適竟會心)한 경계는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이었으며,
언제나 자신의 흉금과 감흥이 분출하는 마음을
주인공으로 한 심지(心地)였다.
오가(五家)의 종풍을 두루 갖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기봉(機鋒)은
당대 선장(禪匠)들을 뛰어넘어 홀로 보배롭게 빛났고,
방광불피조속(放狂不避粗俗)한 화상의 해탈문은
불조(佛祖)의 정법을 이은 여법한 본분납승(本分衲僧)의 면목이었다.
수물부형(隨物賦形)의 창신성(創新性)과
당기살활(當機殺活)의 수물응기(隨物應機)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조사문(祖師門)의 가풍이었으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체(體)로 하고
촉처개진(觸處皆眞)을 용(用)으로 한
쌍인검(雙刃劍)은 마음도 부처도 아닌 자리에 머물면서
더러움을 버리지 않고 깨끗함을 취했고
형식주의적인 것은 거부하고 조신(調身)보다는
조심(調心)으로 장양성태(長養聖胎)를 삼았다.
또한 천부적인 미적 감각으로 예술, 문화, 서화에서도
전문인을 능가할 정도여서,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비공(非空) 장욱진(張旭鎭),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 화백과
교류하면서 각자의 작품을 서로 평하고 취사(取捨) 선정(選定)하였으니,
이는 세속(世俗)과 청산(靑山)이 다름 아닌 경계였다.
남산(南山)에 구름이 일면 북산(北山)에 비가 오는
화상(和尙)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일생동안 덕숭산(德崇山)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아침마다 달마(達磨)의 소림굴(少林窟)을
드나들고 저녁마다 육조(六祖)의 조계(曹溪)에서 발을 씻었다.
1958년 불교정화 당시 구례 화엄사 주지를 잠시 역임하고,
1964년 중앙종회 의원에 피선됐으며, 1967년 '만공어록'을 간행하고,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하여 범종을 주조하고
범종각, 법고각, 청연당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다.
1980년 통도사 극락암에 안거할 때 글씨 쓰는 것을 보고
경봉 스님이 "자네 글씨가 내 글씨보다 낫네!"라고 할 정도로
대종사는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다.
1982년에 쓴 수덕사 대웅전 현판을 비롯하여
1984년에는 속리산 법주사의 주련들을 썼으며
1986년에는 '일본산업경제신문'이 주최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을 열어 전액을 회사한 바 있다.
1986년에 덕숭총림 제3대 방장으로 취임하며
보임정수(保任精修)하게 되었고,
1994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2003년 '원담법향집'을 출간하였고,
2004년 대종사(大宗師) 법계(法戒)를 품수(品受)했다.
또한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용인 법륜사 조실,
금산 금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보현선원 조실을 역임했다.
30여 년간의 결제·해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보면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
납자(衲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조도(助道)에 도움이 되는
지남(指南)이 되었다.
2007년 12월 '원담대종사선묵집'을 간행하였으니,
그동안 일필(一筆)을 들어 먹으로 선계(禪界)의 풍류 속에서
개오(開悟)로 이루어진 서예의 예술은 많은 감화와 감동을 남겼다.
지난 결제 때에도 대중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지만,
육신이 가을 낙엽 마르듯이 쇠잔해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문도들이 마지막 한 말씀을 청하니
"그 일은 언구(言句)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이로다!" 하고
來無一物來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원담 스님은 2008년 3월 18일 밤 9시에 원적에 드셨으며
다음의 임종게를 남기셨다.
來無一物來
去無一物去
去來本無事
靑山草自靑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출처] 나홀로 절로 | 작성자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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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指南)
가르쳐 인도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