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관한 시모음 22)
외로워서 피는 꽃 /이생진
-마라도 33/
꽃은 고독의 슬픔에서
아니면 고독의 분노에서
아니면 소리 대신에
아니면 자폭의 불씨로
누구를 유혹하기엔
이 섬은 너무 먼 데 있다
할머니도
며느리도
그 며느리의 딸도
꽃을 들여다보는 이 없다
그러나 잔디밭을 가마니 들여다보면
마라도는 꽃 천지다
외로움 천지다
종다리가 하늘 높이 날며
지지고 복고하는 소리도
외로워서 꽃이 핀다는 이야기 같다
꽃이 경계를 넘는다 /정한용
목숨은 길마다 몸을 풀어 놓는다, 콩새들이 허공에 금을 긋는 것이 묵은 유언을 집행하기 위함이듯, 망초풀이 봄마다 강둑을 물들이는 것도 천근 바람을 새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 사이가 기억조차 아득해졌다, 다시, 몸을 포갤 만큼 가까워졌다, 다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돌아섰다, 이제, 소용없다, 그곳 주소까지
만년 전 씨앗이 오늘 새로 움을 틔웠다, 곧, 그렁그렁 눈물 같은 흰 꽃 매달 것이다, 우리가 다졌던 서원들도, 어김없이 반역이 되어 흔(痕)을 남길 것이고, 그것은 DNA에 적힌 밀지가 되어, 다시 만년 뒤로 넘어갈 것이다, 가슴 미어지지만, 향기까지 적셔 훗날을 기약한다면 나, 미욱해도 좋다, 당신 있던 자리, 그대로
꽃의 고요 /황동규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꽃 /고미경
입술을 열어
저렇듯
간절한
농아의 한 마디
비밀을 머금은
돌의 고요
심장의 웅얼거림
어렴풋이
두 손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이번 생은
무릎 꿇겠어요
꽃의 안 쪽 /송종규
새벽의 공기가 출렁일 때
몇 개의 강이 은하를 건너오고 있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상처투성이 얼굴로 몇 개의 사랑이 저무는 것을 지켜봤다
몇 개의 강과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
강의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수관의 입술에는 경첩 하나 달리지 않았지만
꽃은 이미 여러 겹의 새벽과 몇 겹의 강을 통과해 왔다
히아신스가 꽃대를 밀어올리는 것은
새벽이라는 두꺼운 책을 견뎠기 때문이다
꽃이 더러 흐느끼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만
더 이상 새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는다
사랑이, 문장의 피투성이 속으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히아신스가 조금 기울어져 있다 그 쪽이, 뜨거운 꽃의 안 쪽이다
꽃을 켜다 /한세정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것은
이곳의 일이 아니다
손바닥을 마주 대고
맹세를 하는 것도
더 이상 이곳의 일이 아니다
오늘부터 꽃은 꽃이 아니며
꽃들은 모든 꽃말을
잃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언 손바닥 위에서
가장 뜨겁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감싸 안는 꽃받침이
되기로 한다
두 손에서 두 손으로
어둠을 밝히며
하나의 꽃이 켜질 때
온몸이 입술인 채로
새롭게 써질 꽃말을
호명한다
꽃 지는 오후 /정진권
길을 걷다가 문득
그대가 그리울 때가 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면
가끔은 하얀 구름 속에
그대가 숨어 있을 때가 있다.
봄바람 소리 그 속에
그대의 노래 소리가 잠들어 있다.
옥매화 켜켜이
늘어진 신록의 오후에도
아카시아 수수꽃다리
향그러운 봄날에도
언제나 그대는 내 맘에
꽃잎처럼 떨고 있다.
그리운 사람들이여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모든 그리움의 이들이여
사랑이 소리쳐 부르면
망설이지 마라
달려가 마음껏 손내밀어라.
꽃지는 오후 되면
그리움도 꽃이 핀단다.
슬픈 꽃 /정해영
웃어야 한다
태어나면서 갚아야 할
슬픔이 있다
근심을 녹이는 일은
활짝 피어나
웃음을 버는 일
저마다의 憂水에
발 담그고 웃고 있다
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슬픔을 봉헌하고 있는
선량한 채무자들
꽃 /조경진
주검에서 꽃이 핀다
주검 위에 피는 저 꽃
배행(陪行)을 위한 경건한 의식인가
생의 마지막 축제인가
혼불의 환생인가
깊게 파 놓은 무덤
관위에
한 줌씩 뿌려지는 꽃송이
손 모으고 고개 숙인 슬픔 앞에
주검이 미륵불의 미소로 환하다
저 꽃 시들면
어디서 또 피어날 것만 같아
훗날 내게도 필 것만 같아
처연해지는데
슬픔이 마르고
인연이 하얗게 지워지는 날
저 꽃잎들
어둠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리라
꽃을 업다 /이해원
길가에 초록 포대기를 두른 어미들
가로등의 허리에 붉은 페튜니아가 핀다
쌀쌀한 밤
귀가 따가운 거리
오가는 시선이 만개한 꽃을 쓰다듬는지
업힌 꽃들이 선잠을 깨서 울어댄다
밤새 뜬눈으로 꽃을 돌보는 가로등
가로등은 꽃을 붙잡고
꽃은 가로등의 키를 넘지 않는다
봄을 볼모로 잡은 벼랑 끝의 삶이 화려하다
회색기둥에 뿌리를 박고 거리를 밝히는
불빛보다 밝은 꽃
봄은 몇 볼트인가
한철 업어 키우는 잠깐의 입양
짧은 만남이 눈부시다
이른 봄
침침한 도시의 촉수가 올라간다
꽃 1 /오연희
예배당 꽃 담당자와 함께
꽃 시장에 갔다
꽃 속을 노닐다 보면
꽃이 될까
꽃향기 폴폴 날리는
아침을 기대하며
따라나선 길
꽃꽂이의 주제를 생각하며
한 주를 보냈다는 그녀의 첫 마디가
저음의 첼로 곡조가 되어
들뜬 내 가슴을 내려 앉힌다
'꽃꽂이는 꽃의 표정을 살리는 일이에요'
소프라노의 절절함으로 울리는
둘째 마디
표정을 살려내지 못하면
꽃은 그냥 꽃
사람도 그냥 사람
매일 새벽 무릎으로 걸러낸
그녀의 표정이
온통 꽃이다
그 꽃 /윤 효
어스름 마중하는 산책길에서 산딸나무 꽃을 만났습니다.
네 장 꽃잎이 꼭 여학교 배지 같습니다.
그 봉긋한 가슴께 부끄러이 반짝이던 그 배지 같습니다.
아내와 손잡고 걷는 내내 칼라가 유난히 희었던 단발머리 그 얼굴을 또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꽃 진다는 것은 /나영애
봄의 전령사
어여쁘다 순결하다 칭송받던
목련꽃, 축 늘어졌다
한 때 탱탱한 꽃이었을
팔순 할머니
유명상표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고목 밑동처럼 거칠고 마른 몸
곱사등 같이 솟은 어깨, 좌우 기우뚱 하지만
목련처럼 웃으신다
늘 기다려 줘야 하는 걸음
뛰어도 뒤뚱뛰뚱 신호등 독촉받는다
할머니 쓸쓸하지 않으세요?
그런 거 몰라
혼자라 편해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자유롭게 나가 댕기고---
다만 빨리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
웃으며 잠자리 들고
꿈꾸다 숨 멎는 것
할일 없고
있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삶을 버렸어!
누런 치아 사이로 미소가 씨익
꽃 진다는 건
누구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각
봄빛을 먹어 버린 주름진 얼굴
검게 뭉개진 목련꽃
꽃 /오봉옥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한때는 자랑이었다.
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 불러모아
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
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
이제 내가 부른 꽃들
모두 졌다.
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꽁꽁 얼어붙은
내 몸의 수만개 이파리들
누가 와서 불러도
죽다가도 살아나는 내 안의 생기가
무섭게 흔들어도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꽃 피고 지는 /이 령
A.
꽃 핀 자리
가지가 휘었다 꽃차례로 화분에 칼자국이 늘었다 여자는 엄마의 손가락을 잘라 흙속에 묻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달빛 창을 넘는 사이 썩은 손가락에서 별 빛 새순이 돋았다 여자는 양철지붕
에 비드는 날이면 피 냄새에 놀라 꽃잎을 뚝 뚝 뜯었다
꽃 핀 자린
무한, 유한, 복합
어긋나기, 돌려나기, 마주나기
꽃 핀 자린
비밀, 어둠, 잘린 손가락 속에 숨어있던 기억들의 아우라
꽃을 오래 보기위해 여자는 화분을 음지로 옮겼다 핏기 없는 엄마는 침대에 누워 파라미타를 꿈
꾸었다 아상, 인상, 중생상 너머 보살이 되려 했지만 되려 화분에 새겨진 빗금 하나 지워내지 못
했다
B.
꽃 진 자리
빛이 사라졌다 화분에 칼자국이 지워지고 있었다 여자는 흙속에 묻어둔 손가락을 까맣게 잊었다
그림자 없는 창으로 화분을 돌렸다
꽃 지고 잎 피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은 까마득 사라졌다 사이 나무는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구름에 앉았다 느닷없이 동인(動因) 하는 꿈, 새 화분을 들였지만 더
이상 꽃 필 기미 없었다
꽃 진 자린
자웅동주, 자웅이주 할 것 없이
진물이 흐르고
꽃부리, 꽃덮이
그 흔적마저 거두었지만
꽃 진 자린
소멸, 침묵, 환생,
한때 스스로 빛나던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오랜 기다림 이란 걸
여자는 깨진 화분 파편을 가슴으로 모으고 있다 화분과 여자는 동숙이다 기꺼이 잘린 손가락을 지
탄(指彈)하지 않던 엄마,
꽃 진 자리는 새로 필 꽃을 위해 휘어지도록 우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