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숭배의 형식과 내용 우상 숭배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돌이나 쇠붙이로 만든 형상에 숭배를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러한 형상에 어떤 숭배의 행위를 하는 자체가 왜 좋지 않은 것일까? 누가 숭배의 행위를 강요할 때, 그 강요를 거부한다면 자기에게 오게 될 불이익 때문에, 어쩔수 없이 복종하게 된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또는 그녀)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명시된 유일신 숭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라빔 같은 종류의 민습에 의한 우상숭배는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더욱이 신명기에 보면 레위인인 제사장이 집에 우상을 모시고 있었던 이야기도 있다. 이와 같이 명시된 유일신 숭배 외에 관습적 우상 숭배가 만연했다는 사실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정신에 유일신 숭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여호와 유일신 숭배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의 높은 도덕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특정 행위만을 하거나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 정의하였다. 탐심이 없다는 것은 도덕적 청결을 의미한다. 탐심은 단지 우상숭배의 한 형태가 아니라,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탐심을 그저 바울이 정의한 또다른 우상숭배의 형태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우상숭배와 탐심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 연유한다. 탐심은 우상숭배의 본질이며, 돌이나 쇠붙이로 만든 형상에 섬김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은 형식일 뿐이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하는 것은 일본문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실천하겠다는 표현 형식이다. 만일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서 '요놈들 두고 보자'라 마음먹은 사람이 과연 일본 문화를 인정하고 전수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형식만을 취했지 사실상 우상숭배의 내용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우상숭배의 내용, 곧 본질은 탐심이라 바울은 정의하였다. 로마 황제에 분향하는 것은 로마의 정치적이고 상업적 행위들을 받아들여 누리겠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탐심이 내재되어 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생각하고 그의 정신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의 탐욕적인 정치나 상업적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황제 분향 거부를 통해 공개적으로 표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세기 당시에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분향은 하여도 그 내용인 로마 문화의 전적 수용을 거부한 자들, 둘은 분향도 로마문화의 전적 수용도 거절한 부류, 셋은 분향은 거절하였으나 로마문화는 전적으로 수용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로마문화의 전적수용이란 바로 탐심을 의미한다. 특히 상업적 제도에는 왕과 음녀의 비유에서 알려주듯, 사악함이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부적절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이루어지는 상업행위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업적 행위들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들은 비록 숭배 행위 자체는 기피할지 모르지만 우상숭배의 본질인 탐심이 가득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은 탐심이 채워져 있다는 것이고, 마음이 비워 있는 사람은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