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은 크게 3가지 이유로 까인다지요.
1.일본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성곽수리와 군사훈련 중단을 주장했다.
3.일본군 침입 당시 일본군의 수준을 과소평가하여 보고했다.
김성일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존재했었고 그의 행적에서 비판할 부분은 없지 않습니다.그런데 부관참시 운운할 정도로 잘못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존경할 위인에 더 가깝습니다. 김성일을 이해하려면 김성일이 까이는 이유를 역순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3.김성일은 개전 당시 일본군의 침략규모를 배 400척에 군사 1만 정도라고 보고합니다. 물론 임진왜란의 전개를 잘 아는 우리는 이후 20만에 달하는 병력이 쏟아진 것을 알지만, 개전 당시에 조선 측이 확인 가능한 일본군은 고니시의 선봉대 1~2만 명뿐이었습니다. 또한 전란을 예측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일본이 수십만 대군을 투입한 것이라고 예측한 이들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이후 일본과의 국가적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 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규모였던 황산 전투도 일본군은 김성일이 예측한 규모인 1만명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김성일은 당대의 상식으로 일본을 판단한 것 뿐입니다.
2.김성일은 통신사 임무를 수행한 이후, 성곽수축과 군사훈련을 반대했습니다.유성룡도 반대했다고 하지만 결국 남부지역 특히 경상도 전역에서 경상감사 김수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성곽 건축이 강행되었습니다. 이는 요즘으로 치면 4대강 사업이나 고속도로 건설사업 수준의 엄청난 힘을 기울인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난중잡록이나 곽재우의 글에서 전쟁준비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전쟁이 터졌을 때 일본군을 환영하거나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다는 비판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군사훈련의 경우 농민개병제인 조선이 전쟁준비를 하는 것은 지금의 한국이 400만 예비군을 총동원하는 것과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직장인과 학생들 모두 군사훈련 시키며 전쟁 대비하는 것과 같은데 정확한 개전시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엄청난 군비 소모는 물론 국가경제를 파탄낼 수도 있었습니다. 김성일은 1583년 황해도 순무어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군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폐해를 보고했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전쟁준비가 백성들에게 미칠 피해를 잘 아는 그가 과연 쉽사리 전쟁 준비를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1.김성일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했기 때문에 개전 당시 거짓보고 죄가 성립되어 압송되었습니다.그런데 김성일이 거짓보고를 한 것과 임진년 초반의 패전은 연관이 없습니다. 개전 직전까지 경상감사 김수는 성을 쌓고 군영의 방비태세를 점검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이 침입하자 울산과 대구로 제승방략 체제가 가동되어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하지만 울산에선 지휘관 이각이 겁먹고 도망하여 군대가 무너졌고, 대구의 군대는 경장이나 경상감사가 오지 않아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그 이후 경상도는 완전히 무너졌지요. 임진년 초반의 패전은 지휘관 재질 문제로 인한 전략적 패배였지, 김성일의 거짓보고로 인해 조선이 안일해져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조선의 어지러워진 군역 체제를 미리 시정 못한 잘못을 묻는다면 관료 중 하나인 김성일도 잘못이겠으나 그것은 김성일만의 잘못이 아니라 16세기 조선 자체의 문제이고, 조선의 잘못보다는 오랜 평화로 인한 만성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김성일을 패전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재밌는 것은 임진왜란 때 가장 큰 피해를 입고 가장 왜적과 많이 싸워야 했던 경상도 사람들은 전쟁준비를 했던 김수보다 전쟁준비를 반대한 김성일을 존경했습니다. 전쟁을 예측한 황윤길은 은둔하고, 전쟁을 준비한 김수는 일본군과 맞서싸우지 못했지만, 초유사 김성일은 경상도 전장을 오가며 경상도의 관군과 의병들을 지휘하였습니다.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분리된 지휘체제와 연락망을 회복하고, 의병장들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고 지원하여 경상도 전역을 유리하게 만드는데 공헌을 했습니다. 김수의 모함으로 죽을 뻔했던 곽재우를 김성일이 중재했었고, 박진과 권응수의 갈등을 중재하여 경상좌도의 지휘통제를 바로잡기도 한 인물이 김성일이었으며, 일본군이 장악한 낙동강을 직접 넘어 경상좌도로 가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통합지휘체제와 연락망을 회복시킨 인물도 김성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의병장들 기록들을 보면 초유사 김성일에 대한 존경이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후 김성일은 2차 진주성 전투를 대비하여 포루를 설치하려고 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죠.
결론으로 김성일은 함부로 깔 인물이 아닙니다. 임진왜란사를 알수록 학봉 김성일은 이상적인 지사이자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첫댓글 몸을 사리지 않은 초유사 활동과 마지막 진주성에서의 병사까지 그야말로 충군애국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 할 만한 인물인데, 구태의연한 당쟁의 관점에서 바라본 짤막한 기술 덕에 충신이 역적으로 기억되고 말았죠..
그래도 조선시대에는 김성일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았는데 20세기에 당쟁과 엮이면서 오해를 받는 인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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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 많은 사람들을 재조명하기에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이 너무 많지요....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가장 크고 치열한 전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 사람이지요. 그에 비해 현실의 평가는 너무 박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론 오판였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노력한 몇 안되는 인물.. 지금 필요한데..
데미르 카라한은 오판하지 않고 노력하는 인물이 되셔야 합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당시 조선의 희생양(?)이란 생각이 드는 군요.
당대에도 비판받긴 했지만 희생양 수준으로 비판 받진 않았지요.
@제국의명장 역사에서의 희생양이란 뜻이었습니다 ㅎ(표현이 서툴러서 죄송). 그래도 조선조정이 나름 이성적이었나 보군요. 지금이라면 완전히 역적취급에 책임떠넘기기가 상당했을것이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활약(?)하시다 돌아가신 걸 보면..... 근데 ost가 뭐죠????
@배달민족 임진록2 조선의 반격 ost 중 하나입니다.
전쟁을 준비한 자보다는 전쟁을 잘하는 자가 존경받는게 이상할건 없지만....
김성일이 강력하게 전쟁을 대비해야한다고 의견을 개진했다면 조선조정에서 뭔가 다른 행동이 나왔을까요?
이미 전쟁준비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뭔가 큰 변화가 있었을거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대단위 전투를 대비해서 제승방략체제로 이행하고, 여러 지휘관들을 인사이동 조치했는데 그 두개가 삑사리가 난 거라서;;;;; 두 문제 다 직접 전쟁에 돌입해보지 않는 이상으 검증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죠;;
안보동화식 역사서술로 "당파싸움으로 전쟁준비가 안 돼서 임진왜란에 당함"이라는 속설이 널리 퍼져있고 회의적이었던 김성일이 희생양이 되었지만, 정작 김성일과 같은 당파인 유성룡을 위시한 조정 중심부는 전쟁준비에 열심이었고, 수만 단위의 약탈전일 것이라는 예측 실패-사실 히데요시가 미쳤다(...)는걸 고려하지 못했을 뿐이지만-로 그에 맞춘 전쟁준비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 하나만으로도 조정의 전쟁준비가 승리에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죠. 김성일 역시 통신사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을 뿐 아니라 전쟁 동안에도 초유사로 동분서주하며 의무 이상을 다했죠. 전체적으로 부당한 비난이 너무 많다고 봅니다.
한양이 일본군에 의해서 점령당하기 이전에 제일 먼저 왜군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받친 인물이 학봉 김성일인가요?
정확한 시점이 달라서 가장 먼저 수급을 바친 사람이 김성일일 수도 있고, 이일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실순할수잇지만 그 과오를 인정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한점은 옳바르게 평가받아야함
하지만 김성일의 잘못에 너무 엄격한 경우가 많더군요...,
@제국의명장 누구나 실수는 하죠...
하지만 전란중 최선을 다한것도 진실
좋은 선택을 여러 번 했다가 한 번 판단잘못한 것이 3재격으로 터져서 너무 큰 반대급부로 돌아온 경우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