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마이산 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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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사 일주문
탑사로 가기위해서는 길목에 위치한 금당사를 거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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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원 약사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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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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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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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는 수박크기의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버티고 서있는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상단부분에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하나의 신비가 있다.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위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1년에 약 1백 20여만명이 넘게 마이산 탑사를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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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탑사의 불가사이)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
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픈이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겉든 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 마이봉과 수 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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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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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축조자 이갑룡 처사 ▶자 : 갑룡 호 : 석정 (본명: 이경의, 자: 갑룡, 호: 석정)
1860년 임실군 둔덕면 둔기리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던 석정의 본명은 이 경의 호는 이 갑룡이라 한다.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 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이므로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읽혀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바닦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
아주 어릴적에 갓 돐을 넘기시고 제사날에 조상 제사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 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 경의를 이길자가 없었다 한다.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 하실 때
이 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달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짖고 3년동안 시묘 살이를 하시다
인생의 삶과 죽음의 인생 허무무상을 탄식 하시다가
19세때 시묘 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 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 의 산과의 대화요,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 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해 젊음을 이곳에 묻으라 하신다.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산이란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어느곳에 비 할 수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 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2기, 쉬지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 등진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 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층씩
30여년동안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 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 놓으면서
뭇 중생이 짖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 하며 탑을 완성될 동안에는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 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영의 힘에 의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임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 할때 산항에 기도하고
돌아올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예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 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 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 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때 쿳숀 역할을 하고 자연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은 역학적 인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 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 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 부터
유연히 뻗어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 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더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 하는듯 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선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고 체감율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중생은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 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양의 이치르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와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 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감각이 뛰어 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이 작품으로 형상화 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속에 고달품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 (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 이라고 까지 말 했으며
고려를거쳐 이조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러 졌으나
이조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 지지 안했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여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 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을때 마이산 탑과 같은 년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을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보면 매우 흥미롭다,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 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프랑의 거액을 드려 300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중에서......)
그러나 마이산 석탑은 단돈 백원의 예산도 없이 적수공권으로 이 만불탑을 이룬 것이다.
갑룡은 유,불,선 선 주장으로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의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의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한다.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기도 갔다가 어느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탑군에 와서 정수물을 뜨고 혼례식을 올렸다 한다.
그후 자식 3형제를두고 얼마안되 최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다시 50후반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 3형제중 생계가 어렵고하니 아들이 없는 남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고
차남 이 도생씨가 갑룡의 후에를 맞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남은 장성해서 완주로 가서 터를 잡고 후손을 내렸고 차남인 이도생씨가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옛 어른말로는 암마이산과 숫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쓰고 천을 타곤 했다 한다.
낮에는 돌을 구분 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층식 올렸다 한다.
천지탑과같은 타원형탑은 둥근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인 조금씩 튀어 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 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높이로 차곤히 올려서 그위에 널판돌을 올렸다고 한다.
상단부위에 잔돌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벼게 만들고 돌을 오렸다 한다
맨꼭대기 부처님 머리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돌을 올렸다고 한다.
95세때 일이다 갑룡은 아무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관을짜고 초상을 치루는데 36시간만에(일일반)다시 일어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 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때부터 단식에 들어가 일년동안 용궁의 물만을 마시며 몸속에 있는 이세상의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들은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원했지만 갑룡은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때를
씻고 몸속에 똥 오줌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 하고 싶고 내몸이 정화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수도
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다.
묘자리에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묻을까 걱정 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찰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잠든 갑룡은 지나가는 너희를 돌바주고 행인을 돌바 주겠노라고 했다.
가파른 정상위에 자리한 묘소는 산을 3고개를 넘어야 오를수 있다.
멀리서 보고푸면 암 마이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갑룡의 묘소가 보인다.
오로지 인간의 구제와 짖는 죄를 대신 속죄 하고자 기원과 기도로 일관 하시다 가신 갑룡은
30여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만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 하면서 계시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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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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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안에 있는 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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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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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순례후기
진안 마이산 탑사
왕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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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1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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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 다녀 오셨을까? 부지런 하기도 하시지!! 제가 갔다 온것 처럼 구경 잘하고 갑니다...
지난 1월에 다녀 왔습니다. 게을러서 이제야 사진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