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강록사(姜鹿史)와 인사동 사동집
3천 식객을 거느렸다던 전국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객사(客舍)에는 별별 식객이 다 몰려들었다. 그 중에 재주라야 겨우 계명구도(鷄鳴狗盜)한 자도 있었다. 남의 집 담을 넘어 개나 훔쳐내는 도둑이나 수탉 울음 흉내나 내는 게 뭔 재주냐고 비아냥을 받았는데 맹상군 왈 “다 쓸모가 있는 법이여.”하고 밥상에 인색하지 않았다. ㅡ 史記 孟嘗君列傳에서
1954년의 남루하던 젊은 날, 그 허기진 끼니를 채워준 객주(客主)로 당시 홍익대학 미술학부 1년생인 강록사를 꼽을만하다. 그는 마포 공덕동의 너른 기와집에서 살았는데 그가 기거하는 별채에는 조석으로 식객이 끊이지 않았다. 록사(본명 永財)의 어머니는 끼니마다 별채 툇돌에 놓인 신발 수에 맞춰 밥상을 차리게 하였는데 어쩌다 새 신발을 얻어 신은 나는 (그때만 해도 귀한)신발을 잘 챙긴다고 마루 문 안쪽에다 넣어 두었던 것인데 이를 알리없는 그 집 식모가 한 그릇을 빠뜨리고 밥상을 내와 강록사의 뼈있는 농담을 들어야 했다.
“신발이 밥보다 귀한 것이여?”
부모가 기거하는 본채에도 식객이 끊이지 않아 한 달에 이천 쌀 6가마씩을 먹어 치웠다. 이천이 원 고향인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허기 때문이었는지 꿀맛이었다. 식객 동무로는 화가 문우식, 박서보, 김종휘, 정문규, 하종현 등이 기억 되는데 조각의 최기원, 시를 쓰는 강민, 송혁, 김춘배도 가끔 이 맛깔스런 식탁의 객원(客員)이기도 했다. 나와 같은 서라벌예대의 김춘배와 고교 동창인 강록사, 그리고 나와 고교 동창인 송혁과 동국대학 동창인 강민 ㅡ, 그렇게 얽히고설킨 사연을 따라 8촌만 뻗어보면 동포치고 안 걸리는 사이가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 패들은 당시 명동을 휩쓸고 다닌 주당(酒黨) 클럽의 동무들이었다. 그렇더라도 근 2년이나 식객의 대열에 낀 박서보, 김종휘를 돌아보면 록사 집안의 널널한 인심을 미루어 살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문우식은 재주가 남다르고 윗자리 앉기를 좋아했다. 홍대 2년생인데도 강민에게도 자기가 선배라고 우쭐대다가 “공사(空士) 댕긴 건 안치냐?”소리에 머쓱해진 적도 있었지만 좌우간 재기 발랄했다.
강록사의 재주도 문우식 못지않았다. 그림은 본업이니까 그렇다 치고 카메라는 프로의 경지, 등산 버너의 수집 취미, 공예에도 일가견을 지녀 신봉승의 감탄을 자아낸 쌍학 칠보 펜던트도 그의 수제품이다. 남다른 공예의 솜씨는 영등포 자기 땅에 ‘가구 공장’으로까지 발전하여 50여 명의 공원을 두기까지 하고 그의 용트림 의자 세트는 쿠웨이트 왕실까지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국내는 미도파 백화점에 단독 납품하여 성가를 드높였던 것인데 ‘의장특허’를 내어 누가 함부로 그 모양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거기까진 그렇다 치고 당시의 거금인 25만 불의 미수금은 수출을 대행하던 ‘율산’이라는 재벌이 망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말았다.
어디 바람에 날린 게 돈만이랴. 애간장을 태우다가 어찌 어찌하여 성사된 기막히게 고운 여인과의 낭만 가득한 사랑도 아차 하는 사이에 마포백사장의 밀려나간 모래알처럼 되고 말았다. 우리의 명동 친구 중에 대단히 현학적이고 또 하는 일마다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던 하재기라는 철학도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경구(警句) 가운데 “여자하고 버스는 기다려 주지 않어.”라는 말이 있었는데, 강록사는 뒤늦게 정장을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타고 떠나고 말았다.
그는 1960년에, 박서보, 문우식, 정문규, 하종현, 김서봉, 황용엽 등과 함께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에 참여하여 실험적인 작업으로 주목을 끄는가 하면, 한양대에 출강하여 그 유별난 입담을 뽐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장안회(長安會; 황용엽, 박광진, 김한, 김숙진, 김종휘, 전뢰진, 정문규, 윤영자, 배형식, 최기원 등 홍대 초창기 멤버)>와 중견화가들의 모임인 시현회(始現會; 송대현, 김영덕, 이수현, 김영환, 이동표, 맹인재, 유시원 등)의 전시를 해마다 이끌고 있다.
그의 최근의 평가할만한 화업(畵業)으로는 <불화재현전(佛畵再現展)>(프레스 센터 서울 갤러리 2003년 4월 29일~5월 5일 / 통도사 성보 박물관 2003년 12월에서 6개월 / 백담사 만해 기념관 2004년 6월에서 2개월 / 이후 진부령 미술관에서 상설 전시)을 들 수 있는데 고려 불화를 유화 페인팅 재료를 써서 재현해 낸 것으로 한국 불교계를 떠들썩하게 했음은 물론 고려 불화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일본 사찰도 흥미를 끌어 내한 관람하는 바람을 일으켰다
ㅡ고려인들이 이 그림을 보면 의관을 추스리고 황망히 삼배를 올린 후,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다. 그리고서 물러나 황홀하게 그림을 떠올리며 그 감회를 글로 적었을 것이다. ‘이렇게 진실한 그림이 어찌 인간의 것이리오. 천공(天工) 일시 분명하다.’ㅡ 김영재(철학박사. 미술사학)
글씨 쓰기의 놀라운 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독서량도 어지간하고 <현대문학>의 정기구독자이기도 해서 웬만한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미술에도 관여하여 그의 이름이 흑백필름에 별처럼 빛나게 하였으니, 놀랠밖에 없다. 한마디로 그는 다재다능의 재사다.
맹상군의 명망이 자자하자, 당시의 강대국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불러(B.C 298경) 재상의 위에 앉히려 하자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 그러자 왕은 살려서 돌려 보내니 차라리 죽여 후환거리를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작심 했다. 소양왕의 애첩을 통해 용케 죽음을 면한 맹상군은 필사적으로 탈출 작전을 감행 했다. 겨우 국경의 함곡관(涵谷關)에 이르렀으나 한밤중이었다. 관문을 열리기는 첫닭이 울어야 했다. 난감한 중에 계명(鷄鳴)이 인가로 내려가자 얼마 안 있어 온 동네 수탉이 울어 젖혔다. 맹상군이 죽음의 고비를 넘긴 건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공밥 얻어먹기가 민망하여 한 가지 계명 같은 꾀를 냈으니 <희망> 잡지 펜팔 투고란에 강록사의 집주소에다가 ‘강영자’란 가명으로 s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데 ‘외로운 길에 같이 걸어갈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 어쩌고’라고 투고하여 장안의 수탉이 모여 들었는데 하루에 50여 통씩 편지가 날아올 정도였다. 개중에 간 큰 사내는 직접 마포집을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과연 계명의 잔꾀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맹상군의 계명은 목숨을 구했지만 록사의 계명은 숱한 총각의 애간장만 녹였으니 사기도 사기 나름이겠다.
그게 밥값이 되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바 없는데, 하루는 록사의 정다운 할아버지 왈, “웬 젊은이가 영자를 찾는데 영의는 있어도 영자란 누구여?” 영의는 록사의 귀여운 여동생으로 여고 재학생이었다. 참 별난 짓도 다 많았던 식객 시절의 우화다.
70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인사동 화랑거리를 맴돌고 있다. ‘순풍에 돛을 달고’라는 화방 겸 카페가 그의 아지트인데 점심은 인사 5거리 골목 안에 있는 사동집에서 한다. 얼굴이 젊은 날처럼 아직도 반반한 ‘사동집’의 아주머니(성점순)가 반겨주는 이 집의 음식은 언제나 입안 가득히 고향 냄새가 배어난다. 주인이 평안도 태생이어서 그런지 음식이 큼직큼직하고 기름지다. 지짐이(빈대떡)도 그렇고 소고기장국도 푸짐하다. 초창기에는 도가니탕이 근처 월급쟁이의 입맛을 잡아끌어 늘 몇 십 미터나 줄을 서야 했다.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는 올드 팬들이 찾아와 더러는 정감 넘치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지금도 옛날처럼 곱수다레.”
사동집은 이곳에서 문을 연지 벌써 35년이나 된다. 젊은 날, 남편과 둘이서 맨 몸으로 일궈낸 판잣집이 오늘날에는 인사동 안에 제2지점까지 두고 있다. 록사가 즐겨 먹는 것은 설렁탕이다. 록사에게 지금도 배울 것은 근검절약이다. 그는 부잣집 자식답지 않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나이에 겸심(점심)으로 6천원 넘는 건 무리여. 사서 먹건 얻어먹건.”(소설가 김승환)
첫댓글 보시중에 제일 보시는 대중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맹상군의 계명 이야기와 전쟁후의 가난하던 학창시절
강록사의 집에 식객이 몰렸다는 것,
명동친구분들의 이야기,
<희망>잡지 투고란에 강록사님의 집주소에
'강영자'란 여성의 가명을 올려서, 뭇남성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
강록사의 고려불화를
유화 페인팅해서 재현한 기법으로
불교계를 떠들석하게 했다는 것,
그리고 사동집,
정리해 보면, 어렵지 않은 글인데
너무 이름이 많아 그런지?
한창 때의 젊은 시절,
석촌님을 비롯한 강록사님 주변의 이야기가
적혀 있네요.
한두가지 사연으로 적혔으면 좋겠습니다.
강륵사님의 이야기만 들어도
머리 속에 넣기가 힘들거던요.
죄송합니다.
글을 올렸으니 여러 사람이 댓글도
올려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야기를 얻어 들을 선배들이 모두 사라져서 참 아쉬워요
그런 중에 강록사 화백은 아직 건강하셔서 다행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