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무엇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주지하다시피, 한국교회는 교단분열, 물량주의, 기회주의, 교권주의, 권위주의, 개인주의, 무책임, 치리회 질서 위반, 부정선거, 경쟁주의, 반목질시, 도덕 불감증 등의 질병에 걸려 있다. 각종 범죄, 대형사고, 사건 배후에는 항상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교인수의 증가에 비례하여 범죄자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교회당이 세워진 수만큼 교도소의 수가 줄지 않는 현상을 보이면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어떤 현상에는 그것이 도래하게 된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가는 곳마다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 한다. 한국에서도 그러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193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는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영향과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무능과 열방의 틈바구니에서 상하고 지친 민족에게 빛과 소망과 도덕의 거울이 되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된 원인으로 저질의 신학교육과 자격미달의 교역자 양산, 교역자의 책임의식의 빈곤, 기복신앙이 언급된다. 윤리의식의 부재,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된 성장주의, 기복주의 신앙, 내세주의, 세대주의적 이원론, 종교의식화된 신앙(주일성수, 헌금강조, 전도, 기도회 참석이 신앙의 전부라고 하는 생각), 기독교 세계관 훈련과 무장의 부재, ‘예수─천당’식의 발상, 무속신앙의 교회 침투, 자본주의적 물량주의, 자기비판의 결여, 개교회주의, 교파지상주의 등이 원인으로 언급된다. 한국교회의 부조리한 현 상태가 이 같은 요소들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언론협회 회장 강춘오 목사는 제1회 기독교언론포럼 초대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현 상태의 원인을 일제말기에 한국교회가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청산의 실패로 본다. “한국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오늘날처럼 신앙적 정체성과 도덕성을 상실하고 나약한 분열주의로 전락한 것은 그 원인이 일제하 친일행위와 신사참배에 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그 이유는 해방 후에도 이 같은 한국교회의 배교적, 반민족적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봉책과 합리화로 일관해 왔기 때문입니다”(2005.5.2.)고 한다. 한국교회의 현 상태의 배후에 과거사 청신의 실패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 이 같은 시각은 필자의 견해(『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2000)와 일치한다.
한 공동체의 기질과 전통은 과거와 직결되어 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지고, 현재는 과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체질과 성격에는 그것을 결정지은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다. 우리의 어제에는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百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들이 있었다. 그것들에 대한 진정한 참회고백이나 역사청산이 없었다. 역사 단절에 실패한 한국교회의 혈관에는 불순한 전통이 유전(遺傳)되고 있다. 신앙정기와 민족정기가 회복되지 않고 가치관이 뒤틀린 채로 흘러가고 있다. 교회의 권징 질서가 무너져 버렸다. 그릇된 신앙의 좌표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신앙정기와 민족 정체성을 가진 양심의 교사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게 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대한판 가룟 유다’라는 비난을 받은 자들이 참회나 자숙 없이 한국교회를 주도해 오는 동안 친일파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국교회의 현재의 질병, 부조리, 악습이 주로 일제 말기 행각에 대한 역사 청산의 부재와 친일파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주장이나 논리의 비약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반세기를 넘긴 지금까지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공적인 회개가 없었다. 친일파 청산이 모호한 당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참회 표명이나 공적 자숙 없이 얼버무리고 지내왔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는 온갖 질병을 유발했다. 일본도의 위협 아래에서 생존의 슬기를 터득해 온 친일파 습성은 그대로 온존하고 있다. 이 습성은 교회 폐습의 ‘첫 단추’가 되었다. 오염된 신앙을 정화하지 않고, 비성경적 태도를 도리어 정당한 것으로 여겨 왔다. 교회는 과거사 청산과 참회고백의 필요성을 말하는 자들을 축출하고, 옥중에서 5-6년 동안 순결한 한국교회의 불꽃을 유지해 온 성도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어 왔다.
한국교회가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재출발하자면 우상숭배의 죄와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이교(異敎) 정치권력과 야합하며 악의 전쟁에 열성적으로 협조한 것에 대한 공적 참회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기독교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불순한 ‘친일파 전통’을 단절해야 한다. 공적인 자숙과 통회 정화를 통한 내적인 갈등 요인 해소가 신앙정기를 회복할 수 있는 첩경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교회의 친일행각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과거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신사참배만을 주로 거론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참회과제는 우상숭배의 죄 만이 아니다. 배교, 이교개종, 신도침례, 백귀난행-친일행각,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각 등을 청산해야 한다. 광복 후 반세기가 넘도록 과거사를 참회고백하지 않은 것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용납하고 친일파 전통을 고착시킨 것에 대해서도 참회해야 한다.
본고는 한국기독교언론인협회 포럼 주제발표를 위해 쓴 것으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과 근간예정인 『한국교회 역사왜곡』과 『신사참배거부운동』 등에서 발췌한 것이다. 전거(典據)는 위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광복 전 과거사 10가지와 이와 관련된 광복 후 문제 10가지를 소개한다. 한국교회사가들의 편향된 당파적 시각이 과거사 청산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과거사 청산 방법을 간단히 언급한다.
필자는 일본도의 위협 아래서 험곡을 지난 신앙선배들의 실패를 지탄하고 싶지 않다. 그들을 대신하여 참회고백하는 심정으로, 양심의 교사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을 하는 심정으로 한국교회의 일제말기의 과거사를 되돌아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가 질병을 치료하고 과거사를 청산하고 성경에 충실한 교회로 거듭나면 세계선교와 복음전파에 큰 역할을 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과거사에 대한 논의에 임한다.
독재정권, 군사정권 하의 기독교회의 이웃사랑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고백의 의무는 다른 마당에서 논할 것이다.
가. 과거사,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1. 신사참배, 우상숭배, 황거요배, 신도예배
한국교회는 1938년 말부터 1945년 여름까지 신사참배, 곧 우상숭배를 했다. 교회 대표자들과 총회원 노회원들이 열을 지어 신사에 가서 참배를 했다. ‘가미나다‘라고 하는 우상단지를 교회당 안 동편에 두고 신도들이 그것을 향해서 예배했다. 제1부 예배로 신도예배를 드렸다. 이 의식은 기도, 소원간구, 찬양-손뼉, 예물 바치기, 황국신민서사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해석했다. 일제는 신도교를 국교로 삼은 종교국가였다. 국가가 종교적 제의와 사제를 관장했다. 일제는 신도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였지만 그것은 일본민족주의에 토대를 종교국가의 국민의례, 제의, 곧 우상숭배였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와 주한 선교사들과 일본의 종교인들은 신사참배의 제의성(cultic nature), 우상숭배 성격을 간파했다. 일본인 학자들도 그것이 종교 행위이며 우상숭배라는 것을 규정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그것이 우상숭배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사참배 행위는 제1계명과 제2계명과 제3계명에 저촉되는 이교의식이었다.
황거요배, 동방요배도 신사참배에 버금가는 일종의 예배 행위이다. 주일 예배시간 신자들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2시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 사이에 그것이 “살아 있는 임금”을 향한 신하와 백성의 예(禮)인가 아니면 우상숭배인가 하는 견해 불일치가 있었다. 당시의 일왕은 ‘천황’이라고 하여 신격화 되고 있었다. ‘천’(天)은 종교성을 가진 단어이다. 일왕을 향해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행위이다. 로마제국이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한 것과 같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이지 종교[제의]가 아니라는 일제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교회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이지 종교[의식]이 아니라고 ‘국가의 신학해석’을 수용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국가의 기만적 신학해석을 수용한 것은 국가권력에 무작정 굴종하는 전례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광복 후 한국교회가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와 군사정권 하의 철권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한 저항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1) 우상숭배, (2) 종교제의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여 교인들을 기만한 것, (3) 일제의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것, (4) 국가의 교회간섭을 허용한 것 등을 참회해야 한다.
2. 신도침례, 계(契)
한국교회의 대부분 목사들은 ‘목사연성회’라는 이름의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서울의 한강, 부산의 송도 등 전국의 강과 바다와 호수에서 신도교의 결례의식인 미소기바라이(神道淸淨)를 행했다. 이것은 신도의 신주(神主)가 더러운 옛 것, 기독교적인 것, 비일본적인 것, 비신도적인 것을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의식이었다. 신도 사제가 집행했다. ‘천도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하는 고백한 사람에게 베풀었다. 불교와 신도교에서 계를 받는다는 것을 개종을 의미한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목사들이 일본귀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신도침례를 받았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은 기독교 신자가 신사참배 하는 목사, 신도침례를 받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광복 후 재건교회 일부 신자들이 이들이 베푼 세례의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3.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 밀고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을 전개했다. 신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곧 신사참배를 하도록 권유했다. 노회 단위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사람을 경찰에 밀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상숭배와 부일협력이 마지 못해, 억지로 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경남노회 임원들은 1939년경 거창을 방문하여 신사참배를 권유했다. 김길창 목사와 김ㅇ일 목사가 주남선을 찾아가 신사참배에 적극 협력할 것을 권했다. 부산과 거창은 그 시대의 교통형편상 머나먼 곳이었다. 주남선이 거절하자 함께 강변에 나가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한 제안했다. 주남선은 “그 일이라면 더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일로는 대화가 되겠지만,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고 답했다.
장로교 총회는 1942년 2월에 대동아 전쟁의 목적을 관철시키고 기독교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5개 반으로 편성한 연사를 파견하고 지방 시국 강연회를 개최했다. 신사참배거부 동역자들을 찾아다니며 참배를 권고하고, ‘애국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나중에는 목사들이 경찰을 대동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동료 교역자와 신도들을 찾아다녔다. 발견 즉시 “이 자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자이다”라고 고발하여 형무소로 끌려가게 했다. 총회 산하 노회들은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제명, 파면시켰다.
최훈 목사는 한국교회의 솔선수범 저지른 “신인공노할 무서운 범죄’를 일부 소개한다. 어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고향산천을 등지고, 저 멀리 북만 땅으로 이거(移居)한 신자들을 일본의 경찰을 앞세우고 와서 “이 사람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자”라고 고발한 것을 예(그 때 붙잡혀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은기호 집사 증언)로 든다.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을 왜경에 고발하여 붙잡아 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신인공로(神人共怒)할 무시무시한 죄악상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일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광주 시대의 어느 큰 교회의 담임목사는 자기 교회에 속해 있는 장로 한 명을 일경에 고발했다. 일경에 끌려간 그 장로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사연인즉 그 장로가 교회가 시행하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가 시작한 30분 후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40년 동안 목회한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 교회를 관할하는 왜경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틈을 이용해 주일예배를 신사참배 없이 끝마쳤다. 동방요배도 하지 않고 황국신민서사도 외우지 않은 채 예배를 ‘은혜롭게’ 끝냈다. 이것을 지켜본 다른 목사가 예배 직후 관할경찰서 고등계 주임을 찾아 고발했다. 담임목사는 그날 서산에 해가 채 저물기 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며칠간 구금되었다. 해당 노회는 그 목사를 파직시키고 강제로 축출했다. “순정일본적기독교”로 개종한 목사들은 물 찬 제비처럼 일제통치를 좋아했다. 경쟁적으로 친일행각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4. 배교, 이단화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배교(背敎)했다. ‘굴절,’ ‘훼절,’ ‘변절’한 정도가 아니다. 고대 이단 마르시온주의에 버금가는 이단성을 갖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 하는 질문에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하는 문건에 서명을 해서 관청에 제출했다. 신학을 변개(變改)했다.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개편했다. 성경을 편집하여 구약성경과 요한계시록을 제거했다. 찬송가 중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찬송과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등을 삭제하게 하고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장로교 총회장은 ‘전향성명서’라는 배교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군소교단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진 폐쇄했다. 일제의 강압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주께서 피흘려 산 교회를 두드러진 저항 없이 폐쇄하거나 ‘일본기독교’라는 이단집단에 개편시킨 것은 참으로 불충이다. 이러한 역사는 교리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친일파 목사들은 광복 후에 “우리는 교회를 지켰다,” “경찰통치 아래서도 한국교회는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과연 그들이 지킨 ‘교회’는 무엇인가? 그 당시의 한국교회는 ‘천조대신의 교회’였다.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도성, 보편성, 단일성, 거룩성을 상실했다. 유서 깊은 기독교의 교리, 신앙고백을 버렸다. 배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마르시온주의보다 더 이단화 된 집단을 교회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통일교회, 바하이교회, 천부교회(박태선)처럼 이름만 교회였지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했을 때 주한 장로교선교회들(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등)은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협력-자매 관계를 철회하고 총회에서 탈퇴했다. 그 당시의 한국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볼 수 없다고 하는 판단 때문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이 배교하는 교회에 저항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 노회를 세우고자 한 것은 종교개혁자들과 일치하는 참교회관의 결과였다. 신사참배거운동을 3세기와 그 이후의 노바투스주의, 도나투스주의와 동일시하고 분리주의 교회관을 재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5. 백귀난행, 부일협력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부일행위, 백귀난행을 저질렀다.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악의 전쟁에 협조했다. 신의주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교회조직을 전쟁보조 기구로 개편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간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천원을 걷었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 열린 제42회 총회 보고를 보면, 교회 종 1540개, 유기 2165점을 모아 12만여 원을 마련해 일제에 바쳤다.
경북노회는 노회장 송창근 목사는 산하 교회들에 명령하여 교회의 종과 철제 물건과 유기(鍮器)를 관청에 갖다 바치고 그 보고서를 노회에 올리도록 했다. 이러한 ‘애국’ 활동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이러한 친일 부역이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愛國機) 헌납 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를 비롯한 일부 친일파 목회자만의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감리교는 1944년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세 대 값인 21만원을 헌납했다. 모금은 ‘선도의 헌금 전액과 본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을 택하고,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광주지역에서는 세 교회만이 사용되고 나머지는 교회 지도자들이 폐쇄하고 매각하여 일제에 바쳐졌다. 금정교회는 교구장의 사무실과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예배를 드린 곳은 광주 시내의 양림교회당과 중앙교회당 뿐이었다. 향사리교회, 구장정교회, 일곡동교회, 유안동교회는 폐쇄되고 재산은 매각되어 일제의 군수물자구입비로 상납되었다. 밀려난 목사들은 농사를 짓는 등의 일로 소일했다. 광주지방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총 책임자는 정경옥 목사(전 감리교신학교 교수)였다. 장로교 성갑식, 백영흠, 조아라 목사가 그 아래에서 지역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다. 교회는 연맹회비를 한 사람당 20원씩 받았다. 당시의 동아일보 평기자의 월급이 2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거액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받은 회비, 헌금 등을 가지고 일제의 병기구입에 사용하도록 헌납했다. 병기구입 헌납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연맹회비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교인을 제명시킨 것이다. 교인명부에서 삭제시켰다. 예컨대 광주 송정제일교회 당회록은 “당회로서는 전 교인에게 교회의 의무 실행과 국만의 직무에 열성을 다하여 국방헌금과 연맹원의 의무에 충성을 다하게 하되 불이행 시에는 교인의 명부에서 제명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솔선수범 친일행각이 어느 정도로 열성적이었는가를 입증한다.
광주시내의 어느 교회에 왜경이 종을 떼려고 사람들을 데리고 왔으나, 종이 종각에 단단히 붙어 있는 탓으로 분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경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때 그 교회 담임목사는 시내에서 산소 용접기를 빌려가지고 와서 종을 강제 분해하여 관청에 갖다 바쳤다. 솔선수범 일제에 충성을 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앞 다투어 전승축하기도회를 가졌고, 위문품을 보냈다. 기독교 인사들은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김활란, 백낙준 등은 이곳저곳에 강연하러 다니면서 조선의 젊은 남녀들이 일제의 전선에 나가 그 애국적 정열을 나라를 위해 바치라고 외쳤다. 『동양지광』(발행인 박희도) 같은 친일 잡지에 글을 써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친일 부역을 하도록 부추겼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발행하는 『청년』은 이 단체가 민족배신 친일행각에 어느 정도로 광분했는가를 말해 준다.
채필근신학교(평양신학교, 1940년 설립)는 한 달간 황민화를 위한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제교화기관으로 충실했다. `1941년 『장로회보』에 보면 졸업반 학생들은 10월 22일부터 11월 2일까지 ‘성지참배’와 내지견학이라는 명목을 일본을 방문하고 신사참배를 하도록 시킨 것을 알 수 있다. 1941년 12월 24일자 “내지견학기”가 실려 있다. 김관식 목사가 학생들을 인솔했다. 그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초대 통리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전신인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 무렵 노회들이 총회에 올린 보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중에 잘 지냈사오며…” 하는 따위의 내용으로 일관한다. 평북노회는 “관내 각 교회의 교인 수는 증가하지 못하였으나 신앙생활은 질적으로 향상하였사오며… 관내 각 교회 지도자를 시국에 적절한 지도자를 양성코자 하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노회의 보고는 특히 인상적이다. 위문편지, 위문품, 상이장병 위문금, 유기헌납, 국방헌금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하여 국가에 성의를 표했고, “조선신학교와 연합하여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 및 신도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일본 건설 등을 인식시켰으며”라고 보고한다.
이교정치권력에 충성을 바치는 이러한 종교행위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출세와 영달을 위해 한 것이다. 친일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한 것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 앞서 ‘모범’을 보였고… 경쟁적으로 그들이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신사참배를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교회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이런 일들을 ‘솔선려행’(率先勵行)했다. 일제가 신사참배에 대한 굴복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부일협력을 요구하고 교회의 ‘창부화’를 강요할 때 한국교회는 일제의 작부(酌婦)다운 기고만장한 행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반민족 배교집단으로, 일제와 신도교의 창기로 변해 있었다. 억지로, 마지 못해 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6. 면직, 제명, 사임압력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을 파직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읍교회 목사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부터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경남노회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교회 위임목사 해제 통보”를 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측은 그 가족에게 사택을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장로교는 주기철 목사를 면직시키고, 이기선 목사를 제명하고, 한상동 목사 등에게 압력을 가하여 사면을 하게 했다. 자의로 사표를 낸 것처럼 보이지만 강압적으로 축출한 것과 다르지 않다.
7. 비인도적 행각, 사회참여의 실패, 민족배신
평양노회(노회장 최지화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사표를 종용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면직시키고, 그의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냈다. 사택 문에다가 못을 박아 봉쇄했다. 평양신학교 교수 고려위 목사가 거주하다가 동네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떠났다.
최훈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가족을 끌어내던 바로 그 목사가 광복 후에 “한국장로교회에서 유력한 목사로 추대 받는가 하면 현 ㅇㅇㅇ 목사는 얼마 전에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와 같은 신앙양심이 마비되면 못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가 저지른 이 같은 비인도적 행각은 비일비재하다. 목사에게는 그가 책임져야 할 식솔이 있다. 목사 가족이 오갈 데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걸인이 되었어도 교회는 이웃사랑 실천과 사회적 책임을 하기는커녕 그들을 박해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재산을 침탈당하는 동족을 돌보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항일자들, 신사참배거부자들을 박해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그 시대의 거대한 사회참여운동이었다.
교회는 그 교회가 속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이웃사랑, 사회참여, 문화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일본민족주의 제례(祭禮)인 신사참배에 적극성을 보이고 친일행각에 솔선수범한 것은 그 교회가 속한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8. 에큐메니칼 운동, 교단통합
한국교회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출범한 1924년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해 오다가 일본도의 권위 아래서 한국개신교회를 단일화하는 데 성공했다. 일제말기에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이교화와 배교와 우상숭배에 이바지했다. 신도이데올로기를 ‘고백’하도록하도록 했고, 각 교파를 해체하고 에큐메니칼적으로 단일화하여 일본기독교단에 종속시켰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광복 뒤에 ‘하나의 한국교회’의 대명사인 ‘조선기독교단’이라는 교단을 조직하는데 기여했다. 친일전력자들은 친일잔재 교단을 만들어 교회권력을 계속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감리교 측의 탈퇴로 실패하자 이 “교단은 해산되고 그 대신 일정 때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재건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1946년 9월 3일에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창립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국내의 각 선교부와 교회 기관들이 가입했다.’” 이때의 주동 인물들은 친일전력의 인사들이었다. 친일파 거두 김관식 목사가 오늘날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 단체가 이단과 오설(誤說)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침묵하는 전통을 가진 것은 이러한 친일전력과 궤를 같이한다.
9. 황국(皇國)의 교역자 양성소
한국교회는 번쩍이는 일본도와 펄럭이는 일장기 아래서 독자적인 신학교를 설립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를 설립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서울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를 설립했다. 정통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들을 일본민족주의 정신으로 개종시킬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운 것이다.
조선신학교는 그 태생적 성격에서부터 황국(皇國)을 위한 학교였다. 신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종교국가인 일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신학교가 민족이나 민족적 자주성이나 민족 독립의 의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일제의 황민화 기관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총회록에 실린 “조선신학원 설립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다. “복음적 신앙에 기(基)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目的)으로 한다.” 펄럭이는 일장기와 번쩍이는 일본도의 권위로 개교한 학교들은 일본 민족주의의 시녀가 아니고서는 설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당시 총독부는 신설되는 학교에 재정지원을 다소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신학교는 설립목적에 걸 맞는 여러 가지 황민화 활동을 했다. 경성노회와 더불어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와 신도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신일본(內鮮一體新日本)의 건설들을 인식”시켰다. 황국신민 학교로서 충성을 다했다. 1944년 졸업생 김종삼(1912-, 목사, 통합 대흥교회 담임)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학교는 황국의 충량유위한 신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까닭으로 졸업을 보류했다. 그 일로 말미 맘아 학생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 그 무렵 감리교신학교는 “구약을 읽었다는 이유로 김진철 등 신학생을 퇴학 처분했다.” 이 점은 조선신학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의 친일행각이 일제의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거나, 조선신학교가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라는 설립목적을 단지 형식적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김종삼은 일제 시대에 많은 목사들이 일제의 주구가 되어 전국을 누비면서 미영격멸(米英擊滅) 황군승리(皇軍勝利)를 위해 기도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을 보았으며, 광복하던 날 정오에도 ‘천황폐하 만세’를 청중과 더불어 삼창(三唱)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10. 솔선수범, 자의적 행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고 부일협력을 한 것이 일제의 강압 하에서 억지로, 마지못해, 죽지 못해, 불가피하게, 한계상황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때 좋아서 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 교단 총회를 주도하는 친일파 목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의 열매였다. 유호준, 정인과, 김응순 목사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이 일본에 ‘성지순례’와 신사참배를 하러 간 것은 “자의로” 간 것이며, 솔선수범한 것이다. 유호준은 그것이 “부득이한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자의로 했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친일행각이 삼엄한 공기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의로” 한 것임을 입증한다. 처음에는 강압 아래서 마지못해 움직이다가 점차 솔선수범 했고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열성을 다했다. 한국교회의 우상숭배, 배교, 친일행각, 민족배신, 백귀난행, 비인도적 광란은 일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삼엄한 공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 광복 후, 무엇을 잘못했는가?
1. 과거사 청산 거부, 참회고백 거부
한국교회사가 김양선 목사는 장로교 총회가 세 차례난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손명걸은 총회가 신사참배 취소를 세 번씩이나 결정하고 참회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신계 인사들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거듭 시비를 거는 것은 독존적 자기 영광에 도취된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제33회(1947) 총회가 신사참배결의에 대한 취소 결의를 했고, 진정한 참회가 없다고 하여 제34회(1948)가 다시 취소 결정을 했고, 참회의 날까지 정하여 선언했으나, 그래도 만족하지 않은 탓으로 제38회[sic.] 총회(1954)에서 세 번째로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반복적인 취소에도 ‘순결주의자들’은 만족하지 않고 결국 비극적인 분열을 초래했다”고 한다. 이 주장에는 옳은 게 단 한 가지도 없다. 첫 두 번의 “취소 결정”이 있었다는 것과 “참회의 날”을 선포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다. 장로교 제33회, 제34회 총회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로 결정한 바 없다. 참회의 날을 갖기로 결의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선포하지도, 시행한 바도 없다.
박형룡 박사는 평북노회 교역자 수양회에서 출옥성도들이 생각하는 두 달 간의 자숙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홍택기 목사는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해방 후 출옥교인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친일전력자 목사들로서 반민행위조사특별위원회에 연행된 목사는 장로교의 정인과 전필순 김길창 김동만 전인선, 감리교의 양주삼 정춘수 등, 친일 부역한 목사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마저도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친일파 목사 가운데 교회의 질서에 따라 공적으로 과거사를 참회고백한 사람은 없다. 한국교회는 광복 후 친일파 인사들이 교회를 장악하도록 허용한 거소가 참회고백을 하지 않는 것을 용인한 것과 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 재판석에 앉아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용서해 버리는 것을 묵과한 것을 공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광복 후 한국교회는 개혁교회관에 따라 교회를 재건하지 않고 조직기구 재건에 열성을 다했다. 신앙고백공동체를 재건한 것이 아니라 외형적 조직체를 재건했다. 이 때부터 외형적 기구를 교회의 전부로 보는 한국교회의 발상이 고착되었다.
2. 고려신학교 추천 불허
출옥성도들이 세운 고려신학교(1946)는 장로교가 유지해 온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천명하고 출범했다. 이 그룹에 대한 친일파 인사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고, 그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다. 총회가 목사후보생을 고려신학교에 추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노회가 신학생을 그 학교에 추천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광복 후에도 참회고백은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쥔 친일파 인사들은 신속히 장로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교단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인준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동북신학교, 고베중앙신학교, 일본기독신학교 등 일본의 여러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각각 목사로 안수해 왔다. 신학생 졸업창구 일원화나 단일 신학교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려신학교가 교단 직영신학교는 아니지만 과거사와 관련하여 설립된 기존의 학교인 만큼, 노회가 그 학교에 신학생을 추천하는 것을 금한 것은 출옥성도들, 신앙승리자들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다.
3. 한부선 선교사 해벌
장로교 총회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명시킨 한부선 목사를 해벌(解罰)한다는 결정을 했다. 1950년에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선출한 위원회를 통해 결정했고, 또 해벌 통문(通文)을 보냈다. 신사참배를 시행키로 한 총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평양노회가 결의했고, 총회가 그 보고를 받음으로써 확정했던 제명처분을 해벌한다고 통고했다.
한부선은 신사참배거운동을 펼치다가 투옥되어 포로 교환의 일원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7년에 한국에 귀환하여 고려신학교 실천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그가 제33회 총회(1947, 제2차 남부총회)에 참석하자 서기가 그를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 때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고 답했다. “나는 치리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한부선이 총회에 참석한 것이나 총회원석에 승석한 것은 새로 조직된 총회 의 존재를 거부하거나 그 총회에 소속되는 것을 불긍(不肯)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왜정시대의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봉천노회가 정식으로 한부선 선교사의 제명처분을 단행했고, 총회는 노회의 보고에 의하여 그의 이름을 회원명부에서 삭제했던 것이니 만큼 그의 이름을 총대 명부에 재록(再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절차를 밟았어야”했다. 교회가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는 하지 않고 오히려 해벌을 통보한 것은 언어도단이다. 친일파 역사인식과 교권주의적 발상이 낳은 해프닝이었다.
4. 메이첸파 매도
한국장로교회는 “아메리카장로교”라고 일컬어지는 ‘메이첸파’와 공적인 연관을 가졌다. 1937년에 이를 결의하고 노회 수의를 거쳐 1938년에 보고를 받음으로써 공적으로 체결되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던 한부선은 메이첸파 선교사였다. 광복 후에 재조직된 한국장로교회는 1943년에 해체된 교단을 계승한다고 천명했다. 그렇다면 이 교단과 메이첸파와의 선교협력과 공적 관계는 유효하다. 이러한 이후로 ‘메이첸파’ 한부선 선교사는 광복 후에 재조직된 장로교 총회 임원회 등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인사들은 고려신학교가 한부선을 실천신학 교수로 초빙한 것과 관련하여 고려신학교와 함께 메이첸파를 분리주의와 동일시하고 폄하했다. 한국교회 친일파 인사들은 장로교회가 고백하던 정통신앙과 출옥성도들의 신앙노선에 대한 극단의 시기와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적대감은 급기야 출옥성도들 중심의 고신파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롱필드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늘날 미국장로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잃은 원인이 당시의 미국교회가 메이첸을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5. 경남노회 제거, 제1차 장로교 분열
장로교 제1차 분열인 고신교단의 태동은 장로교 중앙 친일파가 경남 친일파의 손을 들어준 결과이다. 출옥성도들에 대한 친일파의 극심한 배타적 발상과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장로교 총회(1951)는 기존의 경남노회를 제쳐두고 경남의 친일파 중심으로 만들어진 불법단체인 ‘경남노회’를 총회에 받아들였다. 장로교 원리상 기존하는 합법적인 노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거나 분할, 합병하는 것은 모두 불법인데도 합법적인 기존의 노회가 동의하지 않는 불법단체를 받아들인 반면에 약 150개 교회로 구성된 합법적인 단체는 제거했다. 이 정치폭력은 장로교회의 치리회 질서를 위반한 것이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중심으로 일어난 우리 사회의 역사청산 움직임은 ‘기독교 정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실패한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는 신앙의 정통, 민족적 정통성을 가진 고신파를 제거한 바, 이 사건은 한국장로교회가 친일파 정체성을 가진 것을 뜻하며, 교회가 사회보다 더 사악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총회는 경남노회를 제거한 뒤에 지역마다 개체교회 분열을 조장했다. 파당을 만들어 기존의 경남노회의 발전을 방해했다. 교회당 명도 소송을 세상 법정에 제기하고, 성도들을 이간질 했다. 송상석 목사는 이에 항의하여 응소(應訴)했고, 교회 재산은 “교인 총유”(總有)라는 판결을 받았다. 교인총유인 고신파 교회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강자의 논리를 가진 친일파계의 인사들과 한국교회사가들은 한국장로교회 제1차 분열의 책임을 고신파에 돌린다. 그러나 이 분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가 주도하는 총회파에 있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통념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고려신학파(고신파) 출옥성도들은 교회의 과거사를 공적으로 참회하고 함께 하나의 장로교회로 재출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를 심판하고 정죄하거나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승리의 영광을 과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사가들은 출옥성도들이 참회고백을 해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를 ‘독선적’인 생각을 가지고 형제를 ‘정죄’한 것으로 단정했다. 자기 의를 높이고, 자기를 뽐내기 위해 형제를 정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김양선은 “출옥성도의 독선주의와 교권주의자의 세속적 야망”이 장로교 제1차 분열을 가져온 것으로 기술한다. 김광수는 “출옥성도들의 독선적 신앙 고조”란 제목 아래 제36회 속회총회는 “출옥성도들을 여지없이 정죄하였다. 그러나 고신계열의 출옥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선신앙을 과시하면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였다”고 기술한다. 이러한 역사 기술은 모두 날조에 가까운 왜곡이다.
‘독선적’이라는 용어는 신도군국주의 일제와 친일파 인사들이 순수 신앙인들을 향해 즐겨 사용하던 용어이다. 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에 대한 일제 기록이나 취조문 등은 한결 같이 이들이 ‘독선적 신앙’을 가졌고, 성경을 ‘독선적’으로 해석하면서 국체변혁(國體變革)을 도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지방법원 검사가 작성한 신사참배거부운동자 “21명 예심종결서”는 이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한상동, 이기선, 주남선을 비롯한 수진수난자들의 신앙이 독선적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사가들과 친일파 인사들은 광복 후에도 일제의 이 같은 시각을 자신들의 것으로 유지해 왔다. 정당하고 타당한 외침을 그릇된 것으로 보는 일제의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죄,’ ‘독선,’ ‘심판권 행사,’ ‘율법주의,’ ‘바리새주의’ 따위는 모두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가치판단에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교회는 과거사 문제, 고신파 행보에 대한 역사평가를 진리성, 성경, 신앙고백, 교회규범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친일파의 당파적 시각으로, 힘의 논리로 파악했다. 그 결과로 출옥성도들의 과거사 청산, 참회고백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을 ‘독선신앙’을 가지고 형제를 ‘정죄’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오류는 재판을 받아야 할 자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실패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왜곡을 가져왔다.
6. ‘최소성명서’ 사건
장로교 총회(1954)가 과거사 청산 문제를 다루었지만 총회의 상층부를 차지한 친일파 인사들이 “누가 누구를 시벌하랴?”고 말하면서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과거의 결의를 취소한다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 하나를 채택하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신사참배만 언급했지 일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친일에 열성적이었던 일과 천인공노할 범죄와 행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총회가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한다고 하는 성명서를 채택한 것은 과거사를 단지 행정 절차의 실수(mistake)로만 여긴 결과이다. 성경적으로, 신앙고백적으로, 치리회적으로, 양심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해결했다. 한국교회가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범죄와 행악은 행정상의 실수가 아니다. 참회고백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과거의 결의를 단지 취소하기로 한 것은 죄상가죄(罪上加罪)이다. 다수보다 진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판단이다.
‘취소성명서’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한 것이 강압에 의해 행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성명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법리적으로 말하자면 강압에 의한 범죄는 그 책임이 가해자에게만 있다. 이러한 시각은 친일파교회사관을 가진 한국교회사가들이 한계상황론, 삼엄한 공기론, 불가피론을 내세우면서 한국교회가 강압 정치의 피해자였을 뿐이고, 강압을 이기지 못해 한 것이며, 따라서 참회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취소성명서’는 일본기독교단이 1967년 부활절에 발표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과 흡사하다. 이 고백문은 과거의 잘못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로 돌림으로써 고백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섭리란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명제이다. 우리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자가 자기의 행위를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는 것은 사악한 일이다. 일본기독교단이 자신의 행악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린 것은 자신의 황도기독교 정체성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9
7.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서울동노회가 주도한 ‘주기철 목사 복권’ 행사는 과거사 청산의 실패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며, 한국교회가 친일파 전통에 충실하다고 하는 극명한 증거이다. 그것은 주기철을 중세기적 미신과 교권주의의 꼭두각시로 이용한 행사였고, 그를 떠받들고 있던 교회사적 의의의 버팀목을 빼 버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1) 죽은 자에 대한 치리(직분임명, 성자추대 등)의 대상으로 삼는 로마가톨릭교회관을 반영했다. (2) 목사직을 작위로 보는 시각을 반영했다. (3) 복권은 과거의 면직이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상숭배를 거부한다고 면직당한 것이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여긴 것은 언어도단이다. (4) 평양노회가 면직시킨 것을 서울동노회가 복권시키는 것은 치리회의 질서를 위반한 것이다. (5) 순교자를 상품화 하여 자파의 정통성 확보와 위상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그 무렵 프랑스가톨릭교회는 나치치하의 침묵했던 죄를 참회했고, 일본의 여러 교단들과 기독교 학교들은 과거사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 2000).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은 철면피한 한국교회의 역사인식의 부재와 양심불량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건이다.
8.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날조
한국장로교 권의 많은 교단들이 총회 회수를 1912년 제1회로부터 시작하여 계산한다. 1912년에 설립된 한국 장로교단은 1943년에 해산했다. 광복 뒤 재건된 교단의 총회는 “후기 제1회”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된다. 고신교단은 첫 총회를 제1회로 시작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개신대학원대학교는 2002년에 다채로운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음악회, 학술강연회, 동문회, 100년사를 출간기념회 등을 한 해 내내 가졌다.
그러나 이 학교들이 100년의 역사를 가졌는가는 따져봐야 한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학생들 절반가량을 데리고 가서 남산의 조선신궁 건물에서 시작한 장로회신학교(1948)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장로교회신학교(평양)는 1938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그 학교와 1940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서로 무관한 학교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개신대학원대학교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학교라고 하는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 이사회, (2) 교수회, (3) 교사(校舍), (4) 학생회, (5) 운영하는 주체 중 어느 하나라도 동일하면, 일제의 강압과 민족적인 수난기를 넘기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를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위 학교들이 설립 연대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관련시키는 것은 총회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총회가 1948년에 설립된 신학교의 역사를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장로회신학교(평양)는 장로교 총회가 운영한 학교가 아니다. 선교연합공의회가 운영했다. 장로교 총회가 최초로 직영한 신학교는 1940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일명 채필근신학교)이다. 그 학교를 운영하던 총회는 1943년에 해체되었다.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와 개신대학원대학교 등은 광복 후에 재조직된 남한의 장로교 총회가 운영하는 학교이다.
총회가 학교의 설립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교권주의적인 발상이다. 설립연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총회가 학교의 설립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은 교권주의의 발상 바로 그것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자신의 역사를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와 연계시킨다. 이 학교는 1950년에 폐교되었다. 이 학교를 운영하던 장로교단은 1943년에 해체되었다. 이 교단과 1946년에 남한에서 새롭게 조직된 장로교단 사이에 공동체적 관련성은 있으나 법적인 연속성이 없다. 과거에 장로교회였던 교회들이 지역 노회를 재조직하고, 그 노회들이 다시 남부총회라는 가설(假說) 총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관련성만으로는 학교라고 하는 법적기구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못한다. 아무리 이족침략,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삶의 상황을 고려해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와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연결시켜 100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주장할 근거는 없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역사날조를 한 것이다. 이러한 날조가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장신대학70년사』와 『장로회신학대학교100년사』를 학교 설립에 관한 서술과 졸업생 차수 등을 대조하면 알 수 있다.
『총신대학교100년사』(2002)는 여기에서 한 술 더 뜬다.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다채롭게 하고 또 『총신대학교100년사』라는 방대한 책을 편찬해 냈다. 그런데 이 책은 평양신학교(채필근신학교)와 총신대학교가 무관하다고 적고 있다. 총신대학교가 장로회신학교(평양)에서 출발했지만, 그 역사에 친일, 우상숭배를 하던 채필근신학교의 역사를 포함시킬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학교는 2002년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것은 모순이다. 책 제목은 『총신대학교100년사』인데, 그 내용에서는 자신이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사 청산 부재가 낳은 모순이며 해프닝이다.
9. 주기철 복적 결의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졸업생으로 간주한다. 교정에 주기철 순교기념비 세워놓고 그가 이 학교의 졸업생인 것처럼 내세운다. 주기철 목사가 졸업한 학교는 평양에 소재했고, 1938년에 폐교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주기철 목사의 복적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바 있다. 이것은 10가지 모순을 내포한 결정이다. 순교자를 자교의 위상향상과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결정으로 보인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있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 기념비의 비문은 이종성 박사가 썼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저항을 가능하게 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신바리새주의’로 비난해 왔다. 근본주의라고 매도해 왔다. 전면에서는 순교자를 상품화 하고 뒷 편에서는 그의 순교를 가능케 한 신념체계를 근본주의, 바리새주의로 폄하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10. 한신대학교의 역사날조
한신대학교(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정하은 교수는 1960년대에 일제시대의 순교자와 출옥성도들을 폄하하여 그들이 피안적 신앙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라고 지탄했다. 사회참여 신학을 알아서 일제에 대항하여 투쟁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통신학이라는 덧없는 신념체계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며, 불나비가 불을 향해 겁도 없이 달려 들 듯이 쓸모없는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다. 나치독일 치하의 고백교회의 저항은 순교적 영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한국교회의 저항과 신앙투쟁에는 극도로 폄하했다. 신앙승리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신대학교는 다섯 가지로 역사를 ‘날조’한다. 첫째, 조선신학원의 설립 목적이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함”이었다고 한다. 둘째, “본교의 설립취지와 교육이상은 한국민족과 한국교회가 새 역사를 맞을 준비 작업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설립취지와 교육이상은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회사(敎會師)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셋째, 한신대학교는 이사장 명단에서 진정률 장로(1948-1953)를 초대 이사장으로 내세운다. 문헌에 따르면 초대 이사장은 함태영 목사였고, 그 다음은 일본인 마쯔모토 다따오(松本卓夫)였다. 1943년경의 이사장은 일본인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였다. 초대 이사장 다음으로, 2대에 걸쳐서 일본인들이 이사장을 역임했다. 넷째, 전직 교수 명단에서 일본인 교수들의 이름은 삭제해 버린다. 일본인 교수 미야우찌 아끼라(宮內彰), 전임강사 하나무라 요시오(花村芳夫), 무라기시 세이유(村岸淸洙), 야먀구찌 다로(山口太郞), 그리고 이사장이며 신약학 교수였던 마쯔모토 다따오(松本卓夫),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의 이름을 싣지 않고 있다. 미야유찌 아키라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전임 교수들의 이름을 빼버렸다. 미국인, 캐나다인 교수들의 이름은 포함시키면서 일본인들의 이름을 빼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다섯째, 이사진 구성에 대한 기술도 사실과 다르다. 1943년경에는 일본인 3명, 곧 무라야마 키요히꼬(이사장), 하나무라(花村美樹), 가나이에이 사부로(金井英三郞)와 한국인 4명(김영철, 조희염, 김종대, 함태영)이 이사였는데, 이사 명단에서 일본인들을 삭제했다.
한신대학교가 과거사를 솔직히 시인하고 참회하며 통절히 반성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장을 열어가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은폐하고 날조한 것은 주기철을 비롯한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거부자들이 정통주의 신학의 희생이었다고 비난한 김재준, 정하은 교수의 궤변과 궤를 같이한다. 출옥성도들을 향하여 메이첸파니, 독선주의니, 독존적인 자기 영광을 과시한다느니 하면서 우물에 독 뿌리기식 독설을 토한 것과도 일치한다. 한신대학이 자신의 역사에서 일본인들을 모조리 삭제하는 대신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출범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정조를 일제에게 갖다 바친 “창녀의 구차한 변명”이다.
다. 무엇이 가장 큰 걸림돌인가?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배후에는 그릇된 역사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강자의 시각, 우상숭배자, 친일전력자들의 당파적이며 자기변호적인 시각으로, 친일파교회사관이 있다. 그 시대에 신사참배를 좋아서 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억지로, 마지 못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했다고 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민경배 교수(연세대학교)는 과거사를 신학적인 관점으로 파악하지 않고,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당파적, 친일파적 시각으로 평가하고 기술한다. '친일파교회사관'에 따른 그의 편향된 역사관은 세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 홍택기 목사 류의 과거사 청산 방법 예찬이다. 홍택기는 신사참배 결의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총회장이었다. 광복 후에 “해외로 도피했던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나섰던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고 언명하고,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각인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다”고 단언했다.
민경배는 홍택기의 “말에는 반박 못할 정연한 논리와 신학이 있었다”고 예찬한다. 반면에 공적인 참회고백과 자숙의 필요성을 말한 출옥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윤리적 정결(교회의 순결성)과 신앙적 영광(옥중에서 승리했다는 영예)을 더 앞세운다고 비난한다. 출옥성도들의 “자책과 통회의 요청은 심판의 인상이 짙었고, 그것은 자기의 무한한 의와 결백을 전제하면서 신의(神意) 대행을 자처했던 이단 심문의 중세기를 상기케 했다”고 한다. 또 “은총의 객관성의 모체인 교회의 힘에 윤리적 정결과 신앙적 영광을 앞세웠다고 하는 모순을 가졌다…. 그 당사자의 심령에 겸손과 공동체 의식이 없고, 은총의 편만과 교회의 신비, 약한 세정에 함께 목메 우는 참여의 사랑이 없을 때, 영광의 수난이 자랑과 정죄의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고 말한다.
민경배는 출옥성도들이 과거사 청산(참회고백, 공개적인 자숙)을 주장한 것이 “장로교 신앙의 근본적인 전제에 대한 위협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자신들을 “‘출옥성도’(出獄聖徒)로 자처했다”고 빈정댄다. “열정과 신앙의 예민으로 해서 전혀 상상도 못하는 곳으로 경건과 순교의 영광을 다짐하게 된다…. 은총(恩寵)의 개념이 막연해진 채, 도덕적 순결과 신앙이 의지적 보수라는 인효론적(人效論的) 화살로 그 참회의 상징을 요구했다. 교회는 우선 양심의 숙연한 비판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과거사 청산, 양심회복, 회개의 표가 있어야 한다고 본 출옥성도들이 은총의 신비를 망각한 채 형제를 정죄했다는 것이다.
둘째, ‘불가피론,’ ‘한계상황론’을 내세운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한계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응”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일제치하에서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을 한 것은 “강요에 못 이겨” 했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수모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저지른 죄악과 책임을 당시의 불가피한 상황으로 돌리며, 친일파로 불리 울 사람은 “불과 두세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교회가 자원하여 저지른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한 것이라고 한다. 고초를 이겨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강압이 있었지만 그 강압에서 시작한 한국교회의 배교와 친일행각은 일제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정도”였다.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상처를 받고 범과(犯過: mistake)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행각을 솔선수범, 경쟁적으로 연출했다. “그 즈음해서 교직자들 간에는 이상한 심리가 전염병처럼 돌아… 당국자도 깜짝 놀랄 조처를 서슴없이 솔선하는 혼탁한 공기가 나돌았다.”
셋째, 친일 지도자들이 일제와 한국교회 사이에서 조절의 역할을 하느라고 수고한 것으로 본다. 친일파 인사들이 살신성인 정신으로 교회를 지킨 것으로 본다. 민경배는 “연약한 자들의 신앙보존양식”을 논하면서 친일자들도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한 세대가 허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교회를 맡아 나간 슬기로운 신앙인”이었다고 한다. 일제에 항쟁한 자들처럼 행동하지 않은 것은 다만 신앙의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와 한국교회 사이에서 조절의 역할을 하느라고 최선을 다한 자들이므로 그들의 “조절의 신학”을 우리의 “민족신학”으로 삼을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가롯 유다는 민경배와 같은 역사시각을 가지고 자기변호적인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주를 배신한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군병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삼엄한 공기,” “한계상황,” “불가피성”을 되씹고 있을 것이다.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은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를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낸 영웅으로 추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범들을 국가신사에 ‘모셔’놓고 수상이 매년 그 앞에 참배를 하고 있다. 민경배의 친일파교회사관은 게르만민족주의자, 일본 극우파, 가롯 유다의 역사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한국교회사가들 다수는 민경배의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대개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며, 진리를 비진리로 간주하고 비진리를 진리로 판단한다. 친일파의 어용 지식인답게 교회사를 당파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기술한다.
한국교회의 과거사 청산과 질병 치유는 한국교회사가들의 참회고백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를 힘의 논리, 강자의 시각으로 파악해 온 것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가장 먼저 참회해야 할 자들은 교회사가들이다. 친일파 교권주의에 아부해 온 지식인들이다. 교회사를 성경이나 진리성의 관점에서 해석, 기술하지 않고 강자의 논리, 힘의 관점, 기득권자의 입장, 친일파의 시각으로 기술한 것부터 참회해야 한다.
라.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만주지역 봉천노회는 1946년경에 참회고백 행사를 가졌다. 통절한 참회문을 담은 문건을 발표했다. 장로교 총회에서 축출된 경남노회(법통)를 모태로 하여 태동한 고신교단(1952)은 출범과 더불어 대제사장적인 참회행사를 가졌다. 불가피하게 독자적인 교단을 조직하면서 한국교회를 향한 “대제사장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 배교한 한국교회를 대신하여 참회고백 행사를 가졌다. 신사참배에 대한 일정기간의 공적참회를 결정했고, 모든 교회와 목사, 장로, 전도사들이 그것을 시행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 우상숭배자들을 대신하여 참회고백 행사를 가진 역사는 전무후무하다.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려면 우상숭배의 심각성과 참회고백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한 규례에 따라 참회고백을 하고 일련의 절차를 밟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조롱당하지 않게 하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신자가 말이나 행위로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부인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거나, 복음의 일부 혹은 전부를 부인하는 행위는 그의 몸인 교회 안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죄를 범하고도 공적 참회권징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참회권징 시행을 소홀히 하는 일은 교회를 손상시킨다. “그리스도의 축복이 멈추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교회가 주님의 역동적인 현존과 영적인 힘을 잃은 채 단지 사교적인 모임이 되도록 만든다.” “가정, 클럽, 팀, 사회 등 어느 집단에서도 권징은 필수적인 것인 바, 하물며 우리의 거룩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설립하신 신성한 사회이겠는가”(『기독교강요』,IV.12.1.). 교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 참회권징은 그리스도의 몸의 “근육”을 “서로 결합시키고 각각 자신의 위치에 있게 한다.” 참회권징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성과 신실성을 지키는 열쇠이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다.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르던 자들이 광복이 되었다고 해서 아무런 참회의 표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이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불러 물어보라. 6-7년 간 매 주일 우상숭배를 하고 민족을 배신하고 백귀난행을 저지른 교회와 교역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스스로 단정한 것은 오만이다. 출옥성도들이 2개월, 또는 6개월 정도의 공적 참회권징(자숙)을 시행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본 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조건이다. 나치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교회 목회자들이 3년 간 목회를 중단하고 스스로 참회권징을 시행한 바 있다.
장로교 『권징조례』는 공적인 참회고백과 시벌과 해벌의 절차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담고 있다. 공적 참회고백을 위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한다. 공적인 참회고백의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 과거사 청산과 참회고백과 자숙권징의 시행 방법은 교회의 규례에 입각하여 설정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지나치게 목사중심으로, 노회나 총회나 연회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의 과거사 청산, 참회고백은 총회장이 성명서 하나를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 될 수 없다. 과거사 청산은 성경의 원리와 교회의 규례에 부합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
참회고백은 일정 기간 동안 전 교단적 행사로 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연합단체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과제이므로, 연합단체는 교회들이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다. 한국교회는 한 달 정도의 기간을 설정하고, 주일예배 때마다 무엇을, 왜 참회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공동의 참회고백문을 만들어 함께 고백하고, 지역별로 미스바의 대 참회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참회운동은 한국교회의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라 회개운동, 영성회복, 교회의 본질 회복, 공동체의 성결성 회복을 위해서도 좋은 행사이다. 참회고백 과정이 끝나면 교단 간의 화해사절단을 서로 파송하고, 신앙고백이 같은 교회들끼리 적극적인 교단통합을 위한 대화를 개시할 수 있다.
한국교회 전체가 공감하는 참회고백 안을 마련하는 데는 세 가지가 선결되어야 한다. (1) 교회사가들이 무엇을 참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정리를 하고, (2) 신학자들이 어떻게 참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중지(衆智)를 모으고, (3) 교회 당국자들이 교회법(권징조례)에 따른 일련의 합당한 참회고백 절차를 모색하고, 세 그룹이 함께 모여 종합하는 다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 고신교단의 신학자와 역사신학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조상의 범죄에 대한 자손의 참회고백의 의무를 가르친다. 구성원은 바뀌어도 신앙공동체는 중단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사 청산에는 시효가 없다. 교회는 무치공동체가 아니다. 공적인 참회고백은 교단 분열 해결과 화해의 밑거름이다.
광복과 더불어 신앙과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으나 이 자유는 일제라는 이족의 물리적인 힘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방치하는 자유로 변모했다. 우상숭배를 행하고 비인도적 행위와 민족배신을 행한 전력을 참회하지 않아도 그것을 탓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 자유로 탈바꿈했다. 친일분자들이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자유로 바뀌었다. 참회를 부르짖는 자들을 추방하는 자유로, 일제 치하에서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자들이 신속히 기회주의적으로 변신하는 자유로 바뀌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불의한 정치권력에 유착하는 자유로, 과거사 청산 부재를 일체 문제 삼지 않는 자유로 전락했다. 교회의 역사를 친일파 시각으로 기술, 편찬하고 친일파 인사들의 과거사를 강변하는 역사 기술의 자유로 탈바꿈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는 간혹 용서를 받아야 할 자가 용서하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용서하는 모순을 연출하는 경우가 있다. 용서를 베풀어야 할 자가 도리어 용서를 받는 자리에 서는 수가 있다. 광복 후의 한국교회가 그러했다. 우상숭배를 비롯한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도리어 재판석에 앉았다. 스스로 반성하고 자숙을 해야 할 자들이 자신들을 향하여 참회고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독선, 분리주의, 신성파라고 비난하고 폄하(貶下)했다. 조국 해방과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자신에 대한 면죄부로 삼았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과거사 청산 방법을 논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용서했다. 남들도 자기처럼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가 자기를 용서한 것처럼 타인도 자기를 용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한 것같이 남도 나의 죄를 문제 삼지 말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참회고백, 과거사 청산, 참회자숙을 거부한 것은 성경, 교회규례, 정결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거부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와 부일협력 사건으로 인해 개혁교회의 3대 표지 중의 하나인 권징을 상실했다. 친일파 인사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각인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당한 참회고백, 공적 참회권징 시행을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는 동안 한국교회는 근육이 풀어져 버린 몸처럼 거룩성과 통일성을 상실하고 도덕적 영향력을 잃었다.
과거사 청산, 참회고백, 참회권징은 그리스도의 몸의 질서와 실천적인 거룩성과 성결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근육’을 서로 결합시키고 각각 자신의 위치에 있게 한다. 방향을 바로 잡고 좌초를 방지한다. 가정이나 사회나 세상 조직에도 권징은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신앙공동체이겠는가.
일제 말기에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범죄한 주체는 극성스런 소수의 친일파 인사들만이 아니었다. 친일파 기독교 인사들이 주도하던 한국교회가 범죄했다. 한국교회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을 공동체적으로, 공개적으로, 자의적으로 솔선수범했다. 이러한 죄악들을 단지 각자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라고 하거나 그러한 주장에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격찬한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한국교회-신앙고백공동체가 험곡(險谷)을 통과하면서 겪은 아픔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일제의 강압이라는 구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죽지 못해, 한계상황에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친일파 인사들의 주도로 한국교회는 우상숭배, 배교, 백귀난행, 비인도적 행각, 민족배신 행각에 솔선수범했다. 자의적으로 열성을 다했다.
우리가 크게 탓하고 자책해야 할 것은 실패한 일제말기 보다는 광복 후에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점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의 순결성을 회복하지 못한 점이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는 나침반이 고장 나면 방향 감각을 잃고 좌초하게 된다. 기준이 잘못 설정되면 흑을 백이라고 하고 백을 흑이라고 하며,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은 신앙의 좌표가 잘못 설정되어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언론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