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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협력갈등관리포럼# 보수의 세기, 주자학의 광기(狂氣)
익명추천 0조회 022.09.25 12:27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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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우암 송시열과 백호 윤휴 - 조선의 주자 vs 사문난적 # 보수의 세기, 주자학의 광기(狂氣) 조선의 유학사를 말할 때, 대개 율곡 이이의 학통은 사계(沙溪) 김장생 → 신독재(愼獨齋) 김집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 우암(尤庵) 송시열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율곡은 ‘경장(更張)’과 ‘안민(安民)’을 정치의 최우선적 가치로 여긴 개혁적 성향의 성리학자였던 반면, 김장생 이후 김집과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서인(특히 노론 계열) 세력은 ‘신분 질서’와 ‘춘추의리(春秋義理,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정치와 사상의 최고 가치로 삼은 보수적 성향의 주자학자였다. 율곡의 성리학 사상과 정치 철학이 집약되어 있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살펴보면, 그는 시무(時務)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땅히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큰 요체는 창업(創業)과 수성(守城)과 경장(更張)의 세 가지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을 지은 지 이미 오래되어 재목이 낡아 곧 썩어 무너지려 하는 집에 비유하면서, 폐정(弊政)과 낡은 인습, 그리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는 경장, 곧 ‘개혁’이 그 시대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왕도정치(王道政治)란 곧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생업을 하늘로 삼으니, 만약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잃게 되면, 나라는 의지할 데를 잃게 되므로, ‘安民’이야말로 왕도정치의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율곡에게 정치란 백성의 노역(勞役)을 덜어주고, 백성의 생업을 충족해주어서, 백성을 편안하고 이롭게 해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율곡의 수제자라 자처한 김장생은 율곡의 개혁적 성향과 민본주의를 전승하기 보다는, 성리학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학(禮學)’을 일생 동안 연구하고 후학들에게 전해준 예학의 대가였다. 더욱이 김장생은 율곡이 아닌 구봉(龜峯)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웠다. 그는 20세 때 율곡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을 받았는데, 이보다 7년 전인 13세 때 이미 송익필에게 나아가 종학(從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율곡을 스승으로 모시기 훨씬 전부터 송익필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얘기다. 송익필은 율곡과 우계 성혼 등과 교우한 사림의 인사였는데, 성리학 중에서도 특히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신분상 서출(庶出)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송익필은 신분은 물론이고, 사상에 있어서도 적통(嫡統)을 중요시했던 서인이 종조로 삼을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김장생 이하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서인 노론 계열은 송익필의 보수적 성향을 전승했으면서도, 율곡의 권위를 빌어 자신들의 권력에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입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송익필과 김장생에 의해 일가를 형성한 예학이란, 신분 질서에 따라 지켜야 할 예법과 예절, 혹은 규범과 관습 일체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을 말한다. 조선의 신분질서는 왕을 정점으로 한 사(士) → 농(農) → 공(工) → 상(商)의 위계에 더해, 인간이 아닌 재물로 취급당한 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예학은 제왕은 제왕답게, 사대부는 사대부답게, 농민은 농민답게, 공인은 공인답게, 상인은 상인답게, 노비는 노비답게 살아야 한다는 학설일 따름이다. 율곡이 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삼고, 安民을 ‘바뀌지 않는 진리’라고 보았던 것처럼, 김장생은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하늘이 부여한 진리’로 여겨, 조선이 개국 초기부터 유지해온 기존 체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송시열은 예(禮)를 정치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임금이 해야 할 일이란 오직 하늘이 부여한 (신분) 질서와 명령을 이행하는 데 불과하다.”라는 극단적인 언사까지 서슴없이 했다. 김장생과 그를 이은 후학인 김집과 송시열 등이, 종주(宗主)로 섬긴 율곡의 철학이나 사상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가에 대해서는 ‘대동법 논쟁’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대동법은 방납의 폐단을 없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공납(세금)을 현물이나 토산물이 아닌 쌀로 통일해 거두자고 주장한, 율곡의 수미법(收米法)을 차용한 개혁 정책이다. 그런데 대동법을 둘러싸고 서인 세력이 대동법 실시를 적극 주장하는 한당(漢黨)과 대동법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산당(山黨)으로 갈라섰을 때, 산당을 이끈 이들이 다름 아닌 김집과 송시열, 그리고 송준길이었다. 자신들이 종조로 추앙한 율곡의 뜻을 정면으로 위반한 정치 행보였다. 당시 이들은 대동법을 반대하면서, 공납(세금)의 부담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빈민이나 유랑민 심지어 도둑의 신세로 전락한 백성들을 신분 질서로 더욱 강하게 옥죄어 단속해야 한다면서,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했다. 송시열의 정치적 보수성도 문제였지만, 정작 심각한 보수성은 주자학을 유일무이한 사상으로 삼아, 주자(朱子)의 학설 이외의 모든 학문과 사상을 배척하고 탄압한 ‘학문적·사상적 보수성’에 있었다. 송시열은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유학의 경전인 사서(四書)보다도, 주자가 여기에 해석과 설명을 덧붙인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오히려 더 숭배했다. 송시열은 주자의 경전 해석이나 학설에 모든 학문과 사상을 끼워 맞추고, 여기에서 단 한 글자라도 어긋나거나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핍박하고, 심지어 사상적인 사형(死刑)을 가했다. 송시열이 정치하던 시대에 유독 사문난적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쓴 사상범들이 속출했는데, 윤선도, 윤휴, 허목, 윤증, 박세당 등이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조선판 ‘매카시즘(극단적이고 초보수적인 반공주의 선풍)’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문난적의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송시열의 정치적·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윤휴였다. # 우암(尤庵) : 주자학의 수호신, 송자(宋子)로 살다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에 사망했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 중 유일하게 공자나 맹자 그리고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宋子)’라는 극존칭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평생 자신이 주자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면서, 주자학의 수호신으로 살았다. 나이 24세(1628년) 때 김장생에게 취학해, 10년 동안 주자학과 예학을 배운 송시열은, 김장생 사후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김장생과 김집의 학통과 당파를 이은, 서인 노론 계열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일생을 보냈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北伐)을 국시(國是)로 내건 효종이 즉위하면서, 반청척화론(反淸斥和論)을 주창한 송시열은 조정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다.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갚고, 중화의 뿌리인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는 요지의 반청척화론은, 주자학의 정통성과 권위를 지키고자 한 송시열의 학문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송시열에게 명나라는 사대(事大)의 예(禮)로 섬겨야 할 나라였고, 사상의 조국(祖國)이었다. 그런 명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의 청나라는, 성인의 도통(道統)을 끊어버리고 사상의 조국을 짓밟은 야만적인 오랑캐에 불과했다. 송시열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공자와 주자의 도통과 정통성은 조선의 주자학으로 넘어왔다고 여겼다. 그의 문하였던 서인 노론 세력은 그 도통과 정통성의 최고 정점에 조선의 주자인 송자(宋子), 곧 송시열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유학과 성리학의 도통을 공자 → 주자 → 송자로 여길 정도였다. 송시열의 반청척화론과 북벌사상은 공자와 주자의 나라인 명나라에 대한 춘추의리를 지키는 것이자, 명나라의 멸망으로 위기에 내몰린 주자학의 도통과 정통성을 지켜 나가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사고의 산물이었다. 송시열이 보기에 자신과 다른 학설을 주장하고 경전 해석을 하는 유학자들은 모두 사문난적일 뿐이었다. 사서삼경(四書三經)과 같은 유학의 원(原) 경전에 주자와 다른 학설과 의견을 내세우면, 학문을 더럽힌 도적이나 역적으로 몰아, 벽지로 내쫓거나 귀양 보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우암(尤庵)’이라는 송시열의 호 역시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었던 사상 논쟁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우(尤)’라는 한자는 ‘잘못 혹은 허물’을 뜻한다. 이 호를 얻게 된 사연이 『송자대전(宋子大典)』 「연보」에 자세하게 나온다. 창주가 장난삼아 농담하기를 ‘그대가 이처럼 말이 많으니, 말에 허물[尤]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내가 마땅히 그대의 서실(書室)에 우(尤)라고 이름 붙여야겠다.’라고 하였다. 선생(송시열)은 웃으면서 ‘그대가 좋은 말로 내 서실의 이름을 지어준다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좋지 않은 말로 이름을 지어주니, 별호(別號)는 비록 신재(愼齋, 김집)께서 경계하신 것이지만,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라고 답했다. 그 뒤로 창주는 선생에게 편지를 보낼 때 항상 ‘우암(尤庵)’이라고 썼다. 여기에서 송시열에게 ‘우암(尤庵)’이라는 호를 지어준 창주(滄洲) 김공(金公)은 김익희를 말한다. 그는 송시열의 큰 스승인 감장생의 손자로, 성균관 대사성과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사였다. 송시열 보다는 3년 연하였다. 김익희가 송시열과 논쟁을 하다가, 워낙 고집이 세어 한 치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려고 하지 않는 송시열에게 희롱삼아 지어준 호가 다른 아닌 ‘우암(尤庵)’이다.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이었던 송시열의 성정(性情) 때문에, 농담 삼아 지어 부른 호가 진짜 호가 되어버렸다. 송시열은 이 고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유배지로 보내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고, 종국에는 자신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아야 했다. 송시열의 나이 82세가 되는 1688년 10월 28일, 숙종은 그토록 바라던 첫 아들을 얻었다. 장희빈의 소생으로 훗날 경종이 되는 이다. 당시 송시열은 낙향해 남간정사(南澗精舍)에 은거한 채, ‘조선의 주자’로 군림하면서, 임금에 버금가는 권위와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 세력도 송시열의 문하생이자 추종자들인 서인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서인의 집권 세력이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주지 않고, 남인의 비호를 받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定號)하고, 종묘(宗廟)에 고하는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해버렸다. 송시열은 ‘원자의 작위와 정호’ 그리고 ‘종묘 고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를 사, 집권 세력이 다시 남인으로 바뀌는 기사한국(己巳換局)을 불렀다. 숙종은 기사환국 직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당사자라는 죄목을 물어, 송시열을 제주도 유배형에 처했다. 1689년 2월 11일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송시열은 스승 김장생의 묘소가 있던 고정(高井,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이르러 한 편의 글을 적어 스승의 묘소에 바쳤다. 송시열이 제주도에 도착해 귀양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문하생과 추종자인 서인 세력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대거 관직에 중용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그리고 숙종은 국문(鞠問)을 해 죄의 실상을 낱낱이 묻겠다면서, 송시열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양으로 발길을 재촉하던 송시열은 1689년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 당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뜻밖에도 사약이 도착했다. 결국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그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조선의 17세기를 ‘보수의 세기’로 장식하며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노정객(老政客)이자 사상적 거두였던 송시열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그러나 송시열이 죽음으로 다져놓은 서인(노론) 세력의 정치적 명분과 사상적 권위는, 이후 그들이 조선의 정치권력을 다시 장악하고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는 초석(礎石)으로 작용했다. 그는 양대 전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예학(禮學)을 근본으로 삼아 기존의 신분 질서와 지배 체제를 더 공고히 다지는 방식으로 타개하려고 한 정치적 보수주의자였고, 춘추의리와 주자학의 절대 권위를 앞세워,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통제하려고 한 보수적인 이데올로그였다. 그러나 노론 세력의 장기 집권은 훗날 조선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의 즉위와 함께 노론 세력은 장기간의 권력 독점을 통해 조정을 부정과 부패로 곪게 만들었고, 피의 숙청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나 비판세력의 씨를 말려버렸고, 주자학의 권위와 정통성에 도전하는 그 어떤 사상적 학문적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정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송시열에게 성현(聖賢)의 반열에 올라야 허락되는 ‘송자(宋子)’라는 극존칭을 부여한 그의 후학들은, ‘주자와 송자’의 도통과 권위를 명분삼아 숱한 정치적 탄압과 사상적 박해를 저질렀다. 그 영향으로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정치가나 학자들은, 미처 자신의 뜻을 다 펴보기도 전에 말살당해야 했다. # 백호(白湖) : “천하의 이치(진리)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윤휴는 경주(아버지 윤효전이 경주 부윤으로 재임하던 때)에서 태어났고, 송시열보다 10년 연하이다. 윤휴의 나이 20세(또는 21세) 때인 병자호란 중에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 앞에서 송시열을 만났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손을 부여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때 윤휴를 만나고 온 송시열은 동문(同門)의 대학자인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삼산에 가서 윤휴를 만나, 그와 더불어 3일 동안 학문을 논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30년 독서한 것이 진실로 가소로웠다.”라고 하며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속리산 복천사 앞에서 송시열을 만나, 청나라에 항복한 나라의 운명 앞에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크게 통곡하고 집으로 돌아온 윤휴는,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은 채 독서에만 몰두했다. 윤휴는 일찍부터 당시 성리학자(주자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성리대전(性理大典)』·『주자대전(朱子大典)』·『근사록(近思錄)』·『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주자 이전 시대의 원 유학(原儒學) 즉 선진(先秦)과 진(秦)·한(漢)·당(唐) 시대의 경서와 주석을 널리 읽고 참고해, 주자의 학문 및 사상적 권위를 스스로 넘어섰다. 윤휴는 특별히 스승을 따로 모시지 않고, 오로지 자득(自得)과 체득(體得)의 방법으로 높은 학문적 경지에 올랐다. 주자의 권위를 넘어서 독자적인 경전 해석과 저술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스스로 탐구하고 사색하면서 얻은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는 나이 25세가 되는 1641년, 자신의 이름을 고치고 ‘개명설(改名說)’을 지어 그 뜻을 밝힌 적이 있다. 윤휴의 원래 이름은 정( )이었다. 그런데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해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라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상소한 이정(李挺)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윤휴의 아버지는 정( )과 정(挺)의 소리가 같다고 해서 항상 “우리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그러한 자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하며 고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개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선친이 남겨준 이름을 쉽게 고칠 수 없었던 윤휴는 오랫동안 고심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휴(鑴)로 고쳤다. 휴(鑴)란 글자는 대개 ‘큰 종’이나 ‘솥’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그 무겁고 강하고 웅장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성질과, 그 속이 텅 비어 환히 볼 수 있고, 또한 포용할 수 있는 덕(德)을 취택하려고 한다는 뜻을 밝혔다. 공주 유천에서 6년여의 세월을 보낸 윤휴는, 1644년 나이 28세 때 마침내 아버지와 조상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여주(驪州)로 이사해 백호(白湖) 가에 거주지를 정하였다. 백호는 여주군 금사리에 있었는데, 이곳에 제방을 쌓기 전 금사천에 있던 호수였다고 한다. 백호 가에 자리를 잡고 거처한 윤휴는 여기에서 일생을 마칠 계획을 정하고, 자신의 호까지 ‘백호’로 삼았다. 여주는 경강(京江)에서 가까워 뱃길로도 쉽게 올 수 있고, 육로로도 오기가 편해 윤휴의 명성을 따라 수많은 명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효종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1656년(나이 40세)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이 즉위해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중용하고, 십여 차례에 걸친 사직 상소에도 불구하고 계속 벼슬을 하사하자, 마침내 윤휴는 출사를 결심하고, 가묘(家廟)에 나아가 뒤늦게 조정에 나아가게 된 이유를 고했다. 이때 윤휴의 나이 59세였다. 윤휴와 송시열의 관계는, 윤휴가 포의(布衣) 신분이었을 때에도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특히 윤휴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에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독창적인 주석(註釋)을 담은 저술을 잇달아 내놓자, ‘주자학의 수호신’임을 자처한 송시열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젊은 시절부터 윤휴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서,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공연하게 ‘반주자학’의 입장을 피력했다. 이에 송시열은 본격적으로 윤휴를 두고 성인인 주자의 사상과 학문을 그릇되게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공격했다. 윤휴는 1667년(나이 51세)과 1668년(나이 52세)에 연이어 『대학설(大學說)』과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를 저술해 세상에 내놓았다. 윤휴의 확고한 견해와 끊임없는 저술 활동은 송시열의 분노와 윤휴에 대한 증오심을 가중시켰다. 성인(聖人)인 주자가 이미 모든 학문의 이치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놓았는데, 감히 윤휴 따위가 주자학을 더럽히고 모욕하고 있다는 게 송시열의 생각이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 가던 마지막 순간에도, 스승인 김장생의 묘소 앞에 나아가, 마치 자기 일생의 최대 업적이자 중대사가 윤휴를 배척하고 죽인 일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고하기까지 했다. 송시열의 입장에서 윤휴는 학문적으로는 주자학의 법도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도적이고, 정치적으로는 자기당파(서인)의 권력을 위협하는 역적이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적 사상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오던 송시열과 윤휴의 갈등과 대립은, 1674년(현종 15, 나이 58세) 벌어진 제2차 예손 논쟁에서 윤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송시열이 파면·유배당하고, 서인 세력이 대거 실각하게 되자,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서인 세력의 윤휴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은, 결국 숙종 6년인 1680년 남인 세력을 조정에서 대거 축출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권력을 거머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했다. 5월 20일 오후, 유배지인 갑산으로 향하던 중 서대문 밖 여염집에 머물며 혹독한 국문 탓에 얻은 장독(杖毒)으로 신음하고 있던 윤휴 앞에 한 사발의 사약이 내려왔다. 그때 윤휴의 나이 64세였다. 송시열보다 10년 늦게 세상에 나왔지만, 그보다 9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 한때 소위 고명(高明)하다는 사람들이 그에게 중독되었는데,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가 특히 심했습니다. ··· 윤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고, 윤선거는 당여(黨與)로 주자를 배반한 사람입니다. ··· - 『숙종실록』 13년 2월 4일 주자학의 광기(狂氣)가 지식 사회를 휩쓴 조선의 17세기에 윤휴만큼 ‘사상계의 혁신’을 당당하고 용감하게 외친 선비는 없었다. “윤휴의 기상이 맹자의 기상과 같다. 이 때문에 우리 주자학도들이 매우 걱정하는 것이다.”(황세충) 윤휴의 죽음 이후, 오늘날 ‘실학’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사상과 지식 경향이 재야 지식인들 사이에서 출현하기 이전까지, 조선의 지식 사회는 주자학의 공포 정치에 굴복한 나약한 존재였을 뿐이다. ‘침묵’과 ‘굴종’으로 얼룩진 오욕의 시대였다. ================= 백호 윤휴를 옹호함 評하고 論하다 2010. 12. 19. 21:38 복사https://blog.naver.com/hymen119/30099080252 백호 윤휴를 옹호함 역사와 후세에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으로 낙인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白湖 윤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유학(儒學)을 어지럽힌 도적’이라는 뜻이다. 우암(尤庵) 송시열이 이단을 넘어 난적으로 몰아붙여 버린 후 지금까지 신원되지 않고 역사에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말이다. 사문(斯文)은 우암이 그토록 신봉해마지않는 주자학의 모든 것을 이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설에는 우암이 주자처럼 피부병을 앓아도 주자를 닮아 좋아 했다고 하며, 손녀딸이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을 때도 주자와 처지가 같다고 스스로 위안을 얻었을 정도로 뼈 속까지 주자와 동일시했다고 한다. 1787년 정조 11년에 간행된 우암의 문집인 송자대전은 주자대전의 편차와 똑같은 방식으로 편찬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주자와 상통하기를 바란 사람이다. 또한 주자 이후에는 일리(一理), 일자(一字)도 밝혀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주자를 맹신했다. 우암은 사서보다 주자가 해석해 놓은 사서를 중시했다. 논어나 중용보다 주자가 주석을 달아놓은 논어집주, 중용집주를 경전으로 섬긴 것이다. 그러나 백호(白湖)는 주자와 달리 독창적인 경전해석을 하고자 했다. 백호가 집필한 '중용설' 등 에서 자신의 견해로 주석을 달아 책을 펴내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이에 놀란 우암이 직접 찾아가거나 서신으로 개작을 요구하였다. ] 백호가 고치기를 거부하자 우암은 그 유명한 사문난적이라는 말로 발끈하고 나섰다. 우암이 백호를 얼마나 두고두고 미워했는가는 제자(권상하)와 문답에서도 알수가 있다. 우암이 “윤휴의 죄 중 무슨일이 가장 큰가?”하고 물었는데, 제자는 모역죄라고 답하자 공부가 깊지 못하다고 꾸짖고, 주자를 모욕한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되짚어 주었다. 다시 말해 국가 모역보다 주자 모욕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우암에게 주자는 일국(一國)이상인 것이다. 또한 시를 지어 주자를 높이고 윤휴를 심하게 조롱하는데, 대학자로 추앙받는 우암의 소인배 같은 처신이랄 수밖에 없겠다. 高明廣大煥巍然(고명광대환외연) 고명하고 광대하여 눈부시게 높으니 晦父文章浩浩天(회부문장호호천) 회옹(晦翁주자)의 문장은 넓고 넓은 하늘일세 楚楚蜉蝣休撼樹(초초부유휴감수) 하찮은 한 마리 하루살이야 나무는 건드리지 말라 淵源自是仲尼傳(연원자시중니전) 그 연원 중니(공자)로부터 전해 온 것이란다 이 시에서 우암은 주자(회옹)를 종교 이상의 하늘로 떠받들고 있으며, 윤휴는 한 마리 하루살이로 폄하하고 있다. 제자 이경수가 "저들이(남인) 이 시를 들으면 그 감정이 반드시 극심하지 않을까 두렵다" 고 하자, 우암은 “나는 주자를 위하여 깃발을 세운 것이니, 비록 남의 화풀이를 받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우암에게는 ‘오직 주자’만이 하늘이고 모든 학문의 근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주자 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즉 마땅히 죽어도 순교라고 믿는 도그마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백호는 너무나 유명한 말로 우암을 반박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이제 주자는 그만 덮어 두고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할 것이다.” 이 말은 백호 자신도 주자 못지않게 경전을 해석할 수 있다는 의연함에서 나온 말이다. 직접 경전을 연구하여 주자에 의해 편협해진 사상을 더 확장하려는 자유로운 학문적 열망이기도 했다. 효종(봉림대군) 붕어(崩御) 때부터 상복을 입는 기간을 1년이냐, 3년이냐를 두고 장장 15년을 끌었던 예송논쟁과 사문난적 논란으로 우암과 백호는 돌이킬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예송논쟁이 당리당략에 따른 불필요한 소모전이었다고 본다면, 사문난적의 논란은 학문의 자유를 말살하는 탄압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진보와 평화통일을 말하면 색깔론으로 몰고 가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 때 우암은 백호의 탁월한 학문을 일러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前人)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낸다.”고 칭찬을 했다. 또한 백호보다 10살 연상인 우암이 21살이던 백호를 직접 찾아와 교유를 청하고 사흘 동안 동숙(同宿)을 하며 학문을 토론할 때 자신의 30년 공부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영민하다고 탄복했다고 한다. 우암이 백호와 틀어진 후 부터 ‘윤휴가 총명하고 민첩해서 내가 깊이 혹했다’고 교유했던 날들을 회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백호처럼 똑똑한 사람이 자기와 주자를 同學 하지 않고 대척점에 선 것을 통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암의 제자들도 백호 윤휴를 일러 성(姓)까지 지우며 ‘적휴(賊鑴)’라고 멸칭(蔑稱)을 하는데, 명분을 앞세운 사대부의 배포가 그 정도인가 하고 경악할 따름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라는 박종채의 책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읽었다. 연암 박지원이 왕명으로 송자대전을 편수할 때 책을 교정하는데 참여했던 일화였다. 연암은 송자대전에 수록된 편지글 중 윤휴에 관한 칭호가 비속함에도 불구하고 바로잡지 아니한 게 있어 주자가 정자(程子)의 문집을 교정할 때 비속한 표현과 칭호를 고쳤던 예를 들어 삭제하자고 간청을 했으나 묵살을 당했다고 한다. 연암은 늘 걱정하며 “이 책은 얼마나 정대(正大)한 저술인가. 처음 어쩌다가 잘못해 몇 글자 바로잡지 못한 걸 갖고 이제 와서 그대로 고수하려 들다니! 이들 글자 있고 없는 게 훗날 대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연암은 분명 적휴(賊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우암이 그토록 신봉해마지않는 주자도 비속한 칭호를 고쳤다는데, 송자대전은 이점을 간과하여 우암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현으로 존숭되는 송자라는 칭호가 무색할 따름이다. 우암은 백호와 학문적으로 교유하는 서인학자들을 협박하여 절교하게 하고, 같은 당파인 미촌(美村) 윤선거가 백호를 ‘주자와 달리 해석한 것은 그가 고명하기 때문이다’고 두둔하며 절교하지 않자 우암은 미촌이 죽어서까지 미워하게 된다. 오직했으면 ‘윤선거라는 성명만 들으면 몸서리친다.’고 까지 했겠는가. 미촌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천도하여 강도(江都)라고 했음) 에서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풀러난 적이 있는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망하는 것을 그대로 바라만 보다가 혼자만 살아 돌아 왔다고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라고 미촌(美村)의 허물을 물고 늘어진데는 백호와 절교하지 않은 점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미촌이 피난민에 불과했다고 항변하면 우암은 ‘원래 죽을 만한 의리가 없다.’고 일축해 버렸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강화도에서 아내를 남겨두고 홀로 피신한 것은 미촌에게는 큰 흠점이었다. 미촌의 아내는 포로가 되면 적군에게 험한 꼴을 당할까봐 의연하게 자결을 했던터라 사대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미촌은 평생 벼슬은 물론 재취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고 하니 심적 부담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암이 오점이 많은 미촌과 '살아있을 때는 왜 벗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왜 배척하는가'라는 의혹을 일소하기 위해 우암은 두 가지로 말로 변론한다. '같은 문하(김집)에서 공부했으므로 벗했으며, 사문난적임에도 윤휴를 두둔했으니 같은 이단이므로 배척했다'는 것이다. 미촌의 강화도의 일보다 백호를 두둔한 것을 더 크게 불온하게 생각한 것이다. 甘心莝荳不知羞(감심좌두부지수 ) 수치를 모르고서 말꼴을 먹고는 靦面重來躡儁遊(전면중래섭준유) 뻔뻔스레 다시 와서 호탕하게 노니누나 莫向淸流涴衣袂(막향청류완의몌) 청류를 향하여 옷소매 빨지 마소 却恐衣袂涴淸流(각공의몌완청류) 때 묻은 옷소매에 청류 더럽혀질까 두렵소 주자(朱子)의 매계관시(梅溪館詩)라는 시인데 美村 윤선거를 조롱하기 위해서 우암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럽게 다시 호탕하게 논다’는 것은 강화도에서 적군의 포로가 되어 죽지 않고 살아 돌아 온 것을 조롱하고 있으며, ‘청류’는 주자의 학문세계를 말하고, 때 묻은 옷소매’는 당연히 윤휴와 교유하여 같이 더럽혀 졌다는 것이다. 미촌은 우암과 백호의 사문난적을 밤새워 난상토론 할 적에도 윤휴를 끝까지 옹호한 사람이다. 우암이 토론의 결말이 나지 않자 ‘주자냐? 윤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최후통첩을 했을 때도 미촌은 주자와 백호를 음양과 흑백으로 비유하며 부정의 말을 피했다. 미촌은 음양과 흑백은 배척관계가 아닌 조화의 대상으로 생각한듯하나 우암은 미촌이 백호를 음과 흑이라고 한 이상 절교하라고 재차 종용하자 즉답을 회피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백호의 학문을 지지하였다. 백호가 미촌에게 준 헌시(獻詩)는 이 일이 있은 후에 쓴 것이 아닌가 한다. 霜露稽山晩(상로계산만) / 늦가을 계산에 서리와 이슬 내리고 煙波漢水深(연파한수심) / 깊은 한강수에 연파가 이는데 逢君三夜話(봉군삼야화) / 그대 만나 사흘 밤 얘기가 慰我百年心(위아백년심) / 해묵은 내 마음에 위로가 됐네 서리와 찬이슬은 백호가 겪고 있는 현실일 것이며, 연파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수면을 말하는데,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정국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 때 미촌이 먼 길을 찾아와서 사흘 밤을 얘기 나누었다는 것은 얼마나 친교가 돈독했는가를 말해준다. 미촌이 사문난적으로 몰린 백호를 찾아가 진심으로 위로하자 화답한 것으로 보인다. 우암이 미촌을 사후에 더욱 미워한 것은 백호와 절교한 것으로 믿었던 터에 미촌의 장례에 백호가 조문을 하고 제문을 지어 치전(致奠 애도를 표하는 제식)을 한 점이다. 미촌의 아들(명재 윤증)이 이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을 안 우암이 미촌의 父子가 백호와의 관계가 청산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더욱 분개한 것이다. 우암이 명재의 부탁으로 아버지 미촌의 제문(祭文)과 묘문(墓文) 지어 주었는데 여기에 우암이 서운한 감정을 실어 작성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미촌의 아들 명재는 우암에게 다시 고쳐줄 것을 부탁하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하여 그 유명한 기유의서와 회니문답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유의서(1669)란 미촌이 생전에 우암에게 백호등 남인과 화해를 할 것을 종용하는 편지를 썼다가 오히려 화가 될까봐 보내지 않은 것을 미촌의 아들 명재가 아버지의 투명성을 고려해 우암에게 보여 줬다가 화근이 된 사건이다. 회니문답은 회덕에 살던 우암과 이성(논산)에 살던 명재가 미촌의 묘갈명을 수정을 위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벌인 논쟁으로 서인은 우암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명재를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라졌으며, 이 논쟁의 중심에는 백호가 결부되어 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우암과 백호는 사문난적 논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당쟁을 떠나 학문적으로나 국론적(國論的으)로 함께했다. 둘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비분강개하며 훗날을 기약한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배우는 국사책은 우암을 일러 북벌론자의 태두(泰斗)로 각인되어 있지만 백호가 오히려 우암보다 진취적인 북벌론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 였는데, 백호만큼은 거병을 위하여 구체적인 준비사항까지 건의하였는데 당시 집권층인 노론은 물론 같은 당색인 남인들까지 무모하다고 배척했다고 한다. 백호의 밀소 중에 ‘때가 이르렀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는 다면 도리어 어려움에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는 다면 오히려 재앙을 당한다.’는 말로 무력해진 청나라를 호기로 삼아 무찔러야 한다고 했다. 吾廬東郭隱如壺(오려동곽은여호) 내가 사는 동곽이 은은하기 병 속 같아 山有喬松水有蒲(산유교송수유포) 산에는 소나무 있고 물에는 부들 있지 獨夜病中成小夢(독야병중성소몽) 병중에 홀로 자며 꿈을 하나 꾸었는데 乘秋欲繫北單于(승추욕계북단우) 가을 들면 북녘의 오랑캐놈 잡아매야지 효종(봉림대군) 사후(死後) 북벌의지가 약해졌고, 왕과 사대부들은 큰 위험 부담을 안고 북벌을 감행할 수 없는 일로 여겼을 때도 백호는 이 한편의 시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말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이 시는 백호의 북벌의지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진정한 북벌론자 백호의 면면을 알 수 있는 시일 것이다. 혹자들은 당시 ‘주자(성리학)의 나라’에서 백호의 주장은 당연히 배척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암을 영수로 한 노론의 집권은 200년 동안 이어졌으므로 역사기록은 당연히 우암을 중심으로 편집되고, 지금도 그들의 영향력이 상당한 가운데 백호는 ‘사문의 난적’이고 이단이며, ‘적휴(賊鑴)’라는 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내 천학(淺學)을 동원하여 백호 윤휴를 옹호해야겠다고 벼렸지만 역시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소통하지 않는 주류(主流)세력, 모든 것을 수성(守成)하려는 기득권이 득세하는 한 우암과 백호의 논쟁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본다. 주자의 나라, 교조주의에 빠져버린 사회에 당차게 일성한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백호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는 [출처] 백호 윤휴를 옹호함|작성자 목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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