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이래도 제 맵시다
—최룡관의 시집《반쪽은 다른 얼굴이다》를 읽고서
정몽호(시인, 평론가)
최룡관의 시집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는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두가지 고고성을 울리고 두가지 얼굴을 보여주어서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반쪽은 현대파시였다. 기쁜것은 반쪽이래도 제 맵시라는 그 점이다. 이런 창작실천은 오늘 우리 시인들이 모대기고있는 창작사유의 보편성과 현실성을 반영하는것으로서 그의 창작사유의 전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작업은 오늘 우리 시창작의 질적제고에 일정한 도움이 되리라믿는다.
1. 조롱을 벗어나려는 새
세상에 《1》자만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단조롭고 따분할것인가. 그리고 또 얼마나 허무할것인가. 허나 세상은 《1》자를 기초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수자를 낳았다. 이렇듯 세상은 모순속에서 다양하게 발전하고있는것이다. 기실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장 쉽게 말해서 《1》자의 질적규정성중에 《1》자의 질적비규정성도 내포되여있기때문이다.
창작사유방법도 한가지 도리다. 세상에 한가지 창작사유방법만 있다면 문예계는 얼마나 단조롭고 얼마나 구속스럽고 얼마나 몽매하겠는가. 허나 우리는 한때 하나의 창작사유방법에 얽매워서 고통스럽게 글을 썼다.
최룡관시인은 시 《나의 시》에서 시의 선언을 썼다. 그는 사실주의창작방법을 《노오란 조롱》으로 상징했고 자기를 조롱속에 갇힌 《하얀새》로 상징했다. 그는 《하얀새》는 《물방울도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는걸》 믿으면서 사유의 드넓은 하늘로 자유로히 나래칠것을 토로했다.
허나 다짐은 현실이 아니다. 고질된 창작방법에서 다른 한가지 창작방법으로 전환된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주의창작방법은 현실을 파악하고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작용을 하지만 다른 한 측면에서는 시인들이 머리에 규정된 조롱을 들씌우고 시인들을 구속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적지않은 시인들이 그 조롱속에서 뛰쳐나오려고 모지름을 치지만 제대로 뛰쳐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최룡관시인도 반쪽이 다를 얼굴로 변하기까지 먼 길을 걸으면서 끈질긴 탐구를 경주했다. 그 탐구의 궤적을 규명하면 사실주의의 질적규정중에 부정을 긍정하는 길이였다.
모든 사물은 태여날 때부터 자기의 질적규정중에 부정을 내포한다. 질적규정과 부정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촉매로 되여 그 자체를 발전시키며 추동한다. 사실주의도 례외가 아니다. 사실주의가 직면한 문제는 오늘에 와서야 우연하게 발생된 모순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아주 부정상적인것으로 여기며 일종 잠시적인 병적상태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라 사실주의창작방법자체의 내부모순운동의 정상적인 발로이다. 다시 말하면 필연적인 현상이다. 사실주의의 질적규정은 엄격하게 현실에 충실하여 예술적으로 진실하게 현실을 반영하는것이다. 이 질적규정중에 긍정과 부정이 내포되여있는바 아래와 같은 모순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째, 내용방면에서는 현실과 리성과의 모순, 광명과 암흑과의 모순, 인성과 정치와의 모순, 자각성과 자발성과의 모순 등등이다. 이런 모순들이 착잡하게 서로 엉키면서 복잡다단한 양상들을 초래한다.
둘째, 반영형태에서는 객관화와 주관화, 단일화와 다원화, 찬송과 비판과 모순 등등이다. 이런 모순들이 서료 제약하고 서로 촉진하면서 천태만상을 이룬다.
사실주의의 창작방법내부의 이런 질적규정과 그의 부정을 시인이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는가에 따라서 창작사유의 부동한 개성을 이룬다. 최룡관시인의 시적인식을 개괄하면 아래와 같다. 현실과 리성과의 모순에서 그는 경화된 리성이 생기있는 생활에 동맥경화증을 초래한다는것을 간파하고 리성과 비리성의 통일은 생신한 생활자체를 표현할수 있다고 믿었다.
인성과 정치성과의 모순에서는 문학은 정치성을 떠날수 없으나 정치성을 멀리하면서 인간의 내심세계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현형태에서는 시인의 주관화와 다원화를 주장하면서 대응물의 발견에 초점을 두고 미의 찬송과 추악의 비판을 중히 여겼다.
여기에 시인이 같은 제재로 어머니를 대상화한 《어머니》, 《엄마야》, 《배꽃》등 세수를 비교하기로 한다.
《한쌍의 윤기가 흐르는 가마/ 가마목은 하냥 따스해/ 앉으면 포근하고/ 누우면 허리 쭈욱 펴진다/ 소르르 오는 잠결에/ 칠색무지개/ 휘우듬히 자란다》
시《어머니》의 전문
이 시는 가마목이란 작은 공간에서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을 재현한 사실주의시다. 마무리 두행을 제외하고는 생신하지 않은 정감과 표현이다. 귀중한것은 상징수법을 쓴 마지막 두행이다. 어머니의 꿈이나 나의 꿈이 자란다고 쓴것이 아니라 간접화한 칠색무지개를 매개물로 꿈과 희망 등을 암시하였다. 최룡관씨는 다른 사실주의시에서도 상징성의상과 활유성의상들을 많이 창출했는바 이런 의상의 창출은 현대파시로 전환할수 있는 조건으로 되였다.
시 《엄마야》를 읽고보면 시 《어머니》에 비해서 감정이 더 진지하고 다각적이다. 사실주의시로서는 《어머니》에 비해 좋은 작품이다. 청산골에 살면서 청산뒤에 청산을 모르고 하늘우에 하늘을 모르는 어머니, 세상에 색갈이 많은데도 붉은 색갈만 아는 비극적인 력사환경, 유복자만 믿고 저조를 지키면서 한생을 살아오는 불쌍한 어머니, 이런 어머니를 눈물겹도록 가련하게 여기면서도 아들에게 넓은 세상 다양한 삶을 가르쳐주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하고… 감정의 흐름은 락차가 크고 여울에 담긴 의경은 심각하다. 이것은 력사가 남긴 어머니들의 상처다. 시인은 정치로써 정치를 비판한것이 아니라 인정으로써 정치를 나무렸기에 감정의 파문을 일으킨다. 이 시에서 최룡관씨는 제2련을 상징법으로 썼다. 앞에서 시 《어머니》는 두행을 상징법으로 썼지만 《엄마야》에서는 옹근 한련을 상징법으로 썼다. 이것은 발전이다. 제1련에서도 몇글자만 고치면 완전히 상징으로 쓸수 있는데 작자는 그렇게 쓰지 못했다. 《엄마야/ 내 마음 왜 요리도 좁나/ 앞남산 뒤강물만 있대/ 산너머엔 넓은 벌이 있고/ 구름 너머엔 망망한 바다 있단데》. 이 련에서 《왜 요리도 좁나》를 빼고《엄마야—/ 내 마음엔 왜 앞남산 뒤강물만 있나》로 고친다면 이 련도 완전한 상징으로 되지 않을가고 생각해본다. 이것은 시인의 사유가 아직까지도 상징화하지 못했으며 또 상징에서 서툴다는것을 설명한다.
시 《배꽃》을 읽어보면 시인의 사유는 상당히 발전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지난밤 밤을 새며/ 논두렁서 가슴 허비는/ 물방치소리가 서성거렸다/ 신새벽부터 어머니는/ 빨래를 널어놓으셨다》, 《언녕 서산에 가시여/ 잠 드셨건만/ 이맘때면 늘 잊지를 않고/ 빨래하러 찾아오시는/ 어머니》, 《불쑥 한송이 땅구름속에서/ 어머님이 부를것만 같아/ 나는 진작/ 연두빛이 찍힌 바람으로 마음 헹군다/ 가을엔 잘 익은 사과배 한짐 지고/ 어머님 찾아 말씀 올려야지/ 이젠 내 손으로 빨래를 하니 / 신고를 무지르며 오시지 말라고.》
—《배꽃》의 전문
앞의 두수와 비교해보면 이 시는 시의 중심에 상징적인 대응물이 서있다. 의상의 흐름도 기본상에서는 상징성의사를 중심에 두고 흐른다. 이 시가 남다른 인기를 끄는것은 이 시가 대응물의 발견이 독특하기때문이다. 시인은 배꽃이 피는 과원을 먼 시점에서 관찰한다. 배꽃이 하얀 빨래처럼 보인다. 여기에 바로 시인의 눈이 있다. 그 누가 배꽃을 하얀 빨래를 넌것으로 봤던가. 그러면 빨래는 누가 널어놓았는가? 자연히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그래서 어머니가 널어놓은 하얀 빨래는 배꽃의 대응물로 된다. 이것이 시인이 대응물을 발견하는 심리과정이다. 시인은 대응물을 발견하고 시적구상에 들어가는데 빨래라는 상징성의상이 파생하는 새로운 의상들을 조직하는 작업을 하게된다. 통감의상 《서성거리는 물방치소리》는 《빨래》에서 파생했으나 자연스럽게 앞에다 안배했다. 제2련에서는 시간성을 강조하면서 《이맘때면 늘 잊지를 않고/ 빨래 하러 찾아오시는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제2련까지는 의상의 흐름이 발산성결구를 이루는듯하다. 허나 제3련에서는 빨래라는 대응물을 초점으로 한것이 아니라 가석하게도 《땅구름》이 불쑥 뛰여나온다. 《땅구름》은 안개의 은유성의상이지 대응물에서 파생된 상징성의상은 아니다. 제4련에서는 첫 두행이 랑만적인 직설이다. 3, 4행은 직설에서 다시금 상징으로 전이된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사유는 상징주의에 기울어졌으나 아직까지도 사실주의의 사유가 간섭한다는것을 알수있다. 상징주의의 완벽한 사유로 말하면 대응물 《빨래》를 둘라싸고 가난의 때국을 씻어주는 상징성의상과 근심걱정을 바래우며 봄바람에 여울지는 의상들을 창조해야 할것이였다.
이 시집에는 이런 류형의 시들이 많다. 사실주의의 흔적이 있으나 기본상에서는 상징주의에 기울어진 시들이다. 《저수지의 밤》, 《가을아, 인간속으로》 등등이다. 최룡관시인은 이런 시편들을 쓰기까지 먼 로정을 걸었다. 모대김의 밤은 많기도 했고 깊기도 했다. 그는 끝내 재현성사유를 돌파하고 표현적인 창조적사유로넘어갔다. 시적대상의 객관화에서 주관화에로 주관화의 기초상에서 다시금 객관화의 사색의 길을 걸었다. 이것은 창작사유 부정의 부정으로 바람직한 돌파이다.
2. 조롱에서 벗어난 새
조롱에서 벗어난 새는 자아와 객체와의 드넓은 사유의 공간을 자유로이 날아치게 된다. 최룡관은 끝없는 상징의 삼림에서 독특한 안광으로 열성스럽게 대응물을 찾으며 자기 자신의 시창작에서 새로운 돌파를 기도했다.
그가 사실주의 조롱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현실정신을 버린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정신에 더 깊이 밀착하면서 창조적인 련상을 발휘했다.
그가 사실주의 조롱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현실정신을 버린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정신에 더 깊이 밀착하면서 창조적인 련상을 발휘했다. 현실정신은 그에게 창조적인 련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상징주의시에서 관건성적인 고리는 시인자신의 느낌과 시적대상—객체와의 련계성을 찾는것인데 이 관건성적인 고리의 주요한 담당자는 대응물이다. 파운트는 《정감 + X = 상징주의시》라는 공식을 내왔는데 그 X가 바로 대응물이다. 때문에 대웅물을 어떤 련계속에서 찾는가하는 문제는 상징주의시의 주요한 방법문제다.
최룡관씨는 련계성의 다양한 측면에서 대응물을 찾았다.
첫째는 외부형태의 새로운 련계성에서 대응물을 찾았다. 고금에 시인들이 진달래를 많이 노래했기에 새롭게 쓰기는 정말 어렵다. 최룡관시인은 이 바쁜 소재를 외부형태의 새로운 련계속에서 찾았다. 시 《진달래(1)》에서 진달래는 참회하는 바람의 대응물이다.
《장장 기인 겨울/ 헐벗은것들을 울리고 간/ 그 부끄러움을/ 바람은/ 음달의 여기저기/ 빨갛게 걸어놓았다》《돌같은 맹서였건만 바람은/ 한여름 불볕에 얇아지고/ 찬비에 씻기다가/ 가을에 락엽으로 뒹굴다가/ 번져누웠던 몸을/ 다시 번진 흐트러진 웃음》《그래도 산은/ 입 한번 삐쭉하지 않고/ 빨간 기발을 날려준다》.
이 시에서 바람은 기세를 부리다가 참회하는 인간, 기세가 꺾이고 참답게 살려 했으나 연약해진 인간이 다시금 웃으며 일어서는 형상이다. 이 시에서 《빨간기발》은 참회의 기발이며 새 삶의 기발이다.
둘째, 본질적인 련계속에서 대응물을 찾았다. 쓰기 어려운 진달래를 쓴 다른 한수를 읽어보자.
《들립니까/ 빠알간 궁전속에서/ 경음악연주가 한창입니다/ 바이올린의 미묘 한 소리/ 깡마른 가지에/ 파아란 움을 틔워줍니다/ 몸부림 꼬드기는/ 피아노의 경의로운 선률/ 빨간 풍선에/ 노오란 꿈을 가득 채웠습니다/ 감동의 보라를 날리는 쌕스폰쏠로/ 마음도 후줄근히 젖어/ 방울방울 물에 떨어집니다/ 문득 한마리 백조가 빙—빙 취한 날개를 휘젓다가/ 지휘앞에/ 뚝/ 떨어집니다》.
—《나의 두견화》의 전문
이 시를 처음 접할 때는 시인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쳤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곰곰히 음미해보면 이 시에는 본질적인 련계가 있다는것을 감안하기 어렵지 않을것이다. 사람의 감각은 미묘하다. 사진을 보면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쟁쟁 울릴 때가 있다. 이것은 시각이 청각으로의 전화다. 이런 통감은 흔히 시적착상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꽃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 아름다움에는 노래가 있다. 두견화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두견화속에서 소리가 나온다고 느끼는것은 시각이 청각으로의 전화다. 그렇다면 두견화를 궁전으로 느끼며 궁전속에서 경음악연주소리가 들린다는것은 꽃의 본질적인 련계다. 이것은 뚱딴지같은 소리인것이 아니라 뭇시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련상의 소산이다.
이 시는 시 《배꽃》처럼 상징성의상의 흐름이 중단되고 흩어진것이 아니라 의상의 파생에 따라서 아주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 흐름의 곬은 다음과 같다. 두견화꽃속은 궁전이요, 궁전속에는 경음악이 있다. 경음악은 꿈을 불러 감정의 물결을 이룬다. 취할듯한 물결우에는 항상 새들이 날기 마련이다. 이러고보면 이 시는 몽롱하지만 몽롱속에 명랑한 줄기가 섰다. 쓰기 어려운 두견화를 이렇듯 새롭게 이렇듯 신비하게 썼다는것은 최룡관시인이 성숙되여간다는것을 설명한다.
이런 류형의 시작품들속에서 시 《그리움》도 좋은 작품이다. 이 시는 제나름으로 가고있는 자연과 복잡하고 몽롱한 인간의 길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신념을 쓰고있다.
이 시에서 특히 정채로운것은 마무리함축이다. 시 《어찌하여 자꾸 짚어볼가/ 모르면 새가 되고/ 알면 락엽이 되는데》. 이것은 철리깊은 격언식 마무리로서 명언이라 하겠다.
셋째, 발전의 련계속에서 대응물을 찾았다.
모든 사물은 련계속에서 발전한다. 발전은 련계의 한개 환절이다. 발전은 부정을 전제로 하므로 사물의 자체내부의 부정을 감안하고 그 전화를 촉진하는 과정은 시감의 주요한 내용이다. 시 《자화상. 2》를 읽어보자.
《새 가방을 메고/ 소학교 일학년에 가/ 가갸거겨를 다시 배운다》《세여진 귀밑머리/ 안개를 뿜어/ 동서남북이 아리숭하다》. 《품었던 꿈은/ 천길벼랑에서 떨어지는 내물인가/ 부서져 산산이 부서져/ 그림자였던 자신을/ 슬프게 감정한다》. 《썩은 락엽밑에서/ 움트는 새싹/ 바싹 목이 말라/ 한줄금 비를 애타게 기다린다》.
시인의 자화상은 《썩은 락엽밑에서/ 움트는 새싹》이다. 귀밑머리 세여지면 인생물정을 안다지만 세여진 귀밑머리 되려 안개를 뿜어서 향방이 알리지 않는다. 꿈도 산산이 부서지면서 남을 따라 살면서 남의 그림자로 된 안타까움이 슬프게 들린다. 한때는 새싹이였으나 어느덧 락엽이 되고 락엽은 썩어가고 그밑 에서 또 새로운 싹이 돋아나며 새것을 흡수하는 갈망, 이것이 바로 부정의 길을 걷는 인간이다.
이 시에서 활유성의상은 아주 생신하다. 《귀밑머리 안개를 뿜어라》든지 《품었던 꿈은/ 천길벼랑에서 떨어지는 내물이》라든지 모두 다 깊은 사색을 안겨준다.
시《겨울땅》, 《가을 백양나무》등도 이 류형에 속하는 작품이다.
조롱에서 벗어난 새는 새로운 탐구의 길에서 자기로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 시의 령역에서 돌파작들을 창출했다. 그 주요한 사유방식을 귀납하면 아래와 같다.
1. 사실주의가 련계형태에서 직접성을 가진다면 상징주의는 상대적으로 간접성을 가진다. 상징주의의 간접성은 끝없는 공간에서 무한한 대응물을 필수로 하는바 시인은 다층차, 다각도에서 중매물— 대응물을 찾음으로써 다양속에서 자기의 개성을 형성할수 있다.
2. 시인이 선정한 대응물은 그 시속에서 상대적으로 질의 온정서을 갖고 그 질의 범주에서 의상을 파생하므로 의상의 흐름은 자기의 곬을 이룬다. 때문에 시인은 대응물의 질적온정성을 존중하면서 그 의상의 흐름을 재치있게 여울지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의상과 의상의 조합이 혼란상태를 조성한다.
3. 대응물자체가 의상을 파생한다고 해서 저절로 새로운 의상이 창조되는것은 아니다. 시인들은 창조적련상과 환상을 발휘하여 새로운 의상을 창조하는데 알힘을 들여야 한다. 최룡관 시인은 의상창조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