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교실의 아름다운 굴레
- 황선미 글, 권사우 그림, "나쁜 어린이표"와 박기범의 "문제아"를 중심으로
대구효신초등학교 6학년 4반 담임교사
1.
막막한 두려움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지 4년이 되어 가는 선생님으로서 이 동화를 읽고,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160여명의 아이들이었다. 돌아보니 한껏 꿈에 부풀어 얽매이지 않는 나만의 교육관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내 지금의 젊음을 다 하겠다던 생각이 실재 능력의 모자람, 피곤이 동반된 안일한 사고,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막연했던 동경에 갈등하면서 무척 힘들어했던 시간이었구나 싶다. 이 한 편의 동화 속에 부끄러운 내 모습이 비추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나만 믿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개선장군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항상 아이들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모든 아이들을 내 좁은 마음과 일치의 오차도 없이 맞추어야만이 속이 편했던 나의 지난 모습을 이 동화 속의 건우가 '무섭고 슬픈 눈물'을 흘리며 깨우쳐 주는 듯 했다.
지금까지의 교육현실이 다분히 교사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음은 굳이 이 동화의 주인공 건우의 눈을 통하지 않더라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사 중심의 교육을 받아온 나로서도 자꾸만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주관과 사회적 규범의 틀 안에서 아이들을 해석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나 역시도 예전의 교실을 지키던 여느 선생님과 다를 바 없는 선생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적인 내 모습이었다.
2.
이러한 나처럼 규범적인 선생님의 모습이 {나쁜 어린이 표}에 이름 없이 등장하는 건우와 정식이의 선생님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교육적인 선생님인지도 모르겠다. 학생처벌이 인간 존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배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매를 들지 않는 대신 "나쁜 어린이 표"라는 노란색 스티커로 아이들의 마음을 콕콕 찍어 매에 버금가는 상처를 주는 현명한 선생님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나로서는 아직 어느 것이 더 교육적인지 잘 모른다. 다만, 교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 시대적 배경이,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의 기대 좌표가 대응하지 못하는 부조화가 나를 주눅들게 할뿐이다.
건우의 선생님이 선택한 노란 스티커의 "나쁜 어린이 표"라는 교육 기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잠깐 위에서 이야기했던 사회적 관점과 또 다른 하나는 대다수의 아이들을 대변하는 건우의 관점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나쁜 어린이 표" 딱지는 그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한다. 그 뒤에는 현실의 교육 분위기가 지원사격을 하고, 그러한 분위기 쇄신을 위한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이 암암리에 기습사격을 해준다. 학생들이 교사체벌에 대해서 법적 투쟁을 불사하는 현실적 분위기에서 교사는 소모 기제의 전환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학원교육과의 차별화 되는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인성교육도 무방비 상태로 해체되었다. 학교는 이제 아이들로부터도 학부모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공격의 대상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당하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의 모면을 위해서 내세운 것이 "나쁜 어린이 표"라는 방어 전략이다. 외적 흔적도 없이도 내적 상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작은 딱지의 무시무시한 힘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건우의 관점에서 보는 "나쁜 어린이 표" 딱지는 공포와 불안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나쁜 어린이 표"가 쌓여 갈수록 정말로 나쁜 어린이가 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마음속에 심어서 자신의 자신다움을 잃게 한다.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가리게 하고 그로 인해 끝내는 자유로울 수 없는 억압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건우가 바라본 "나쁜 어린이 표"이다. 결국 내가 예전에 경험했었던 "어른들은 몰라요!"나 "나를 제발 그냥 놔두세요.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요?"와도 맞닿은 반항의 징표처럼 건우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또 건우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싸워나가야 하는 대상이 "나쁜 어린이 표"인 것이다.
3.
그러나 동화 {나쁜 어린이 표}는 이 두 관점을 극과 극으로 첨예하게 대치시켜 놓지 않았다는 데서 작품성이 빛난다고 볼 수 있다. 동화의 처음에는 일방적인 건우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교실의 중심으로 완전히 편입하지 못한 소외된 건우의 눈을 통해서 선생님의 불공평한 잘못들이 낱낱이 고발되고 있다. 처음 건우의 눈에 비친 선생님은 일반 사람들에게 원망을 사기에 충분했으리라. 나 역시 이런 초반 분위기에서는 이 동화를 신뢰할 수 없었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교사를 너무 몰아세우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왕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입장과 당위성을 감동이 넘실거리도록 이야기해주길 바랬다. 나의 바램과는 다르게 우리의 선생님은 동화 속에서 나쁜 선생님으로 자꾸만 전락해 갔다. 이러한 선생님의 모습을 더욱 구체화시켜 주는 증거물이 건우의 수첩이다. 선생님이 주는 "나쁜 어린이 표"보다 건우가 선생님에게 주는 "나쁜 선생님 표"가 더 사실적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아마 독자들은 이 증거물을 통해 건우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 반발하는 호소력 짙은 외침을 듣게 될 것이다. 불쌍한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몰래 숨을 죽이며 자신이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나쁜 어린이 표를 고스란히 여덟 장의 "나쁜 선생님 표"로 바꾸어 선생님에게 되돌려 주는 위험한 곡예를 하면서 건우는 하나의 돌파구를 찾게 된다.
'나는 수첩을 꺼내서 또 몰래 적었어요. 이나마도 안 하면 난 정말 선생님이 싫어서 학교에 오고 싶지 않을 거예요.'(본문 42쪽)
"나쁜 어린이 표"가 주는 위압감으로 인해 학교에 가기조차 싫어하게 된 건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는 식으로 수첩에 선생님께 주는 "나쁜 선생님 표"를 남기면서 자신만의 도피처를 만든 것이다. 비록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방법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요즘 아이들은 일기장을 두 권 이상 가지고 있다. 한 권은 선생님 보여주기용, 또 한 권은 진짜용. 혹은 소위 교환일기라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보여주는 일기장은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지만, 자신만의 일기장이나 교환일기장에는 할 이야기, 안 할 이야기 다 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수첩"의 의미도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수첩"의 역할은 선생님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것과 건우의 숨죽이는 도피처로서 그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수첩의 더 중요한 역할은 선생님과의 화해를 유도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건우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어린이 표"를 순간적인 당황스러움에 처해 안절부절못하다가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 버린다. 이 때 건우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감보다는 닥쳐올 두려움에 '쉴 사이 없는 눈물'을 흘리며 불안해한다. 건우의 순수한 아이다움-'난 이제 학교에 못 다니겠구나.'-을 이해하고 섬세한 필치로 사실처럼 그려낸 작가의 심리묘사가 샘이 날 정도로 놀라운 부분이다. 그리고 웬걸? 거기다가 자신의 비밀스러운 수첩이 선생님에게 발각되고 만다. 공포에 공포가 아득하게 겹쳐지면서 건우는 물론 이 동화를 읽는 독자들까지도 숨막히는 불안으로 몰고 간다. 작가의 극적 구성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건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 상황에서 내가 선생님이었다면 어떡해 했을까'라는 가슴 졸이는 상상을 하며 동화를 읽었다. 결과는 지금까지 읽으면서 느꼈던 나의 직업에 대한 미심쩍었던 부분을 유쾌하게 해소해 주었다. 결국 작가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만 선생님을 몰아 부치려는 인정사정 없는 언론인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내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건우에게 분명 무슨 난리라도 났을 것만 같은데, 우리의 작품 속 선생님은 상한 자존심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건우의 이름을 부르면서 건우가 만들었던 수첩 속 "나쁜 선생님 표"를 선생님의 수첩에 끼운다. 이러한 선생님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면 지금까지 교실의 모든 주변까지 자신의 마음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성을 계기로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각오의 징표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는지.
"네가 나쁜 어린이 표 다 가져간 거랑 내가 너한테 받은 거,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네 덕분에 애들을 가르치기가 더 힘들겠구나."(본문 92쪽)
한껏 뻣뻣한 자존심에 고개를 숙이기 꺼려하는 젊은 선생님으로 일관했었다면 건우는 정말 학교에 다시는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한 명의 반 아이 건우를 통해 어쩌면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했었던 "나쁜 어린이 표"라는 토큰제도의 비인간성을 깨닫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참교육을 위해 끊임없이 방법적 모색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실로 선생님의 존재감이 우러러 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말 구성은 개인적인 수첩의 비밀이 선생님과 인간적으로 교감을 이루면서 따뜻한 화해를 이루고 동시에 "나쁜 어린이 표"에 대한 건우의 관점과 사회적 관점이 지니고 있는 의미 차이를 극복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4.
"나쁜 어린이 표"라는 상징과 "수첩"의 역할 이외에도 이 동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읽을 꺼리는 건우의 순수하고 깨끗한 아이다움이다. 작가는 건우의 마음에서 건우의 입을 통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갔기 때문에 건우의 내밀한 마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나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들의 심리를 작가는 절묘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건우의 아이다움을 더욱 절실하게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하고, 친구를 좋아하면서도 경쟁의식을 느끼고, 계속 "나쁜 어린이 표"를 받는 자신을 반성하고, 선생님을 미워하면서도 선생님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보이고 싶어하는 건우의 아이다운 마음을 작가는 마치 작가 자신이 건우가 된 듯이 매끄럽게 이야기한다.
건우가 마음속으로 '찜'해놓은 은지랑 싸워서 자신은 '나쁜 어린이 표'를 받았지만, 은지가 욕을 한 사실을 선생님에게 고자질하지 않은 것에서 건우의 착하고 여린 마음을 볼 수 있었고, 과학 경진 대회에 나가기 위해 "저요!"라고 외치는 부분에서는 건우의 당당한 모습과 선생님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볼수 있었으며, 과학 상자를 사기 위해 용돈을 다 투자한 아빠의 걱정 때문에 늦은 밤 아빠의 구두를 닦는 모습에서 성장해 가는 아이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건우와 대립 관계에 있는 정식이와 비오는 날의 싸움을 하면서 끝내 정식이의 마음이 받은 상처를 이해하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팔을 잡는 건우의 모습은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인간적으인 모습으로로 비추어 진다. 하물며 불안과 공포에 떠는 모습은 요령에 익숙한 어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노릇이 아닌가.
이렇듯 작가 황선미는 아이들의 세계와 그 속에 담긴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3학년으로 했을까? 하긴, 동화에서는 건우가 지금 몇학년인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단지 삽화 21쪽, 29쪽을 통해서 건우가 3학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작년과 올해 내가 맡은 아이들이 열 두 살 5학년이다. 5학년인데도 내가 잘 모르는 탓도 있겠지만 이 동화 속의 아이들처럼 활발한 생각과 표현, 진지함의 의지 같은 것을 살펴보기 어렵다. 특히 75쪽부터 나오는 은지와 건우의 대화는 나름대로 생각하건데 열 살 3학년의 대화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공포와 불안에 절박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우의 모습은 정말 3학년일 수밖에 없어 보였다.
이 점에서 볼 때, 동화가 더욱 확고하게 아이들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발달 수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동화의 세계와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줄 수 있어야 함은 동화를 읽는 아이들을 위한 아동문학의 의무일 것이다. '동화니까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식의 허무맹랑한 동화는 현란한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없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여겨진다.
5.
마지막으로 {나쁜 어린이 표}의 주인공 건우를 {문제아}(박기범, 창작과 비평사)의 주인공 하창수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 싶다. 이것은 사회적 낙인론의 위험성에 대한 교사로서의 책임에 관한 스스로의 확인인지도 모르겠다.
{문제아}의 하창수는 주변의 무관심한 시선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철저하게 문제아로 전락한다. 창수의 속 깊은 사정에 관해서는 교실의 그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눈에 비춰지는 결과에 따라서 창수를 문제아로 판정했을 뿐이다. 할머니의 약값을 지키기 위한 창수의 따뜻한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결코 창수가 의자로 규석이를 내리찍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나쁜 어린이 표}의 은지였거나, 아니면 선생님이었거나 말이다.
문제아라는 딱지가 붙은 이후로 창수는 일사천리로 중심에서 벗어나 떠도는 주변으로 편입되게 된다. "한 번 찍히면 끝이다!" 혹은 "한 번 문제아는 영원한 문제아이다."는 사회적 인식이 그 착한 창수를 사회적 문제아로 내 몬 것이다. {문제아}에서의 선생님은 너무나 멀리있는 방관자였을 뿐, 창수의 '중심으로의 편입'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너무나 냉혹한 작가적 해석이지만 어쩌면 너무나도 현실적인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나를 문제아로 보는 사람한테는 영원히 문제아로만 있게 될 거다. 아무도 그걸 모른다. 내가 왜 문제아가 되었는지, 나를 보통 아이들처럼 대해 주면 나도 아주 평범한 보통 애라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딱 한 명 있다. 봉수형이다." ({문제아}, 89쪽)
주변에서 떠도는 창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봉수형뿐이다. 그러나 봉수형은 창수의 '중심으로의 편입'을 도와 줄 수 있는 사회적 힘이 없다. 인간적인 이해로 그나마 살기 힘든 창수를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제도권 안에 있는 선생님의 시선이 봉수형만 했었더라면 흔들리는 창수를 꼬옥 붙잡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선생님들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창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문제아로 전락해 버렸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나쁜 어린이 표"의 건우의 모습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건우도 하마터면 끝까지 문제아로 낙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당한 선생님의 모습을 찾고 또 자신의 특기를 살려 자신의 존재감을 선생님에게 심어 주었다. 그러나 창수는 그러하지 못했다. 창수 역시 {나쁜 어린이 표}의 건우가 "나쁜 선생님 표"를 사용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선생님에게 문제제기를 하고, 자신의 존재를 실감시켜 줄 수 있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중심으로의 편입'에 대한 건우의 성공과 창수의 실패를 보면서, 선생님으로서 내가 해야 될 일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한 순간의 내 무관심이 아이들에게 깊고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 순간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절실함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6.
한 아이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 지난 3년 동안 선생님으로서의 내 모습을 부끄럽게 반성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쁜 어린이 표}는 나를 가르친 스승의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하고 올바른 삶을 지향하게 하는 문학적 힘을 여과없이 보여준 동화이다.
매끄러운 이야기 전개와 섬세하고 사실적인 아이들의 심리 묘사 등이 훌륭한 문학적 작품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내 오늘의 삶에 목덜미를 움켜쥔 작가의 주제 의식은 삶과 문학의 연결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작은 교실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선생님의 "나쁜 어린이 표"는 인성 교육의 파괴에 대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인간적 바램이 깃들여져 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범위를 지키면서도 기본이 바로 선 아이들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진정한 선생님의 모습이 바로 "작은 교실의 아름다운 굴레"로 반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 그들의 순수한 꿈에 상처를 주지 않는 교실 속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이제는 우리 모두 무너져 가는 교실을 재건하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할 때임을 곱씹어 생각해 본다.
첫댓글 선생님, 긴글 잘 읽었습니다. '작은 교실의 아름다운 굴레' 참 좋습니다. 종종 찾아주세요.
선생님 반갑습니다. 자주 오셔서 글 남겨주세요.....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