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0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지구 곁으로 '아찔'…소행성 2개 지구 스쳤다
/뉴스한국 2010-09-09 19:43:35
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fs=1&news_idx=20100909194335n6872&ss=7
-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
2009 - 겸재 정선 250주기 테마전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 (9.8~11.22)
진경 대가 겸재, 풍속화에도 능했다
ㆍ국립중앙박물관 서거 250돌전 풍속화 ‘북원수회도첩’ 첫 공개
2009년은 겸재 정선(1676~1759년)이 서거한 지 꼭 250주년이 되는 해다.국립중앙박물관은 겸재 서거 250주년을 맞아 오는 9일부터 11월22일까지 ‘겸재 정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를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연다. 박물관의 미술관 회화실에서 열리는 이번 테마전에는 그의 초기 화풍을 짐작할 수 있는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과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을 비롯해 30건, 142점이 출품된다.금강산 화첩인 ‘신묘년풍악도첩’(1711년 작)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36살 때 그린 것. 초기 진경산수화풍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탐승의 경유지를 따라 장소의 현장성과 감동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담겨 있다.또한 개인소장가 손창근씨가 갖고 있던 ‘북원수회도첩’(사진)은 일반인에게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41살 때인 1716년 제작된 이 작품은 공조판서 이광적(1628~1717년)의 과거급제 60주년을 맞아 북악산 및 인왕산 기슭에 살던 70살 이상 노인들과 그 자손들이 모여 장수를 자축했던 것을 그렸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정선이 산수화의 창안자 일 뿐 아니라 풍속화 분야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1925년 독일인 신부 노르베르 베버가 독일로 가져갔던 ‘겸재 정선 화첩’도 10월13일부터 선보인다. 이 화첩은 그동안 독일의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돼 있다가 2006년 반환된 바 있다. 이 작품은 현재 왜관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 당나라 시인 사공도(司空圖·837~908년)의 시론을 그림 22장으로 제작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은 74살 때의 작품으로, 미학적 이론을 회화로 형상화한 신선한 상상력과 세련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청풍계도’와 ‘금강내산총람도’도 전시되며 개인소장 ‘비로봉도’도 최초로 공개된다.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닷컴 2009-09-01 17:41: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011741475&code=960202
2007 - 潘 총장, 카다피 다르푸르사태 해결노력 강력 지지
"카다피 모두 협상장에 나오게 모든 노력" 약속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8일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로부터 다르푸르 폭력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강력한 지지 약속을 얻어냈다고 말했다.반 총장은 다르푸르 폭력사태 해결을 위한 아프리카 순방의 세 번째 기착지인 리비아의 시르테 시(市)에서 "카다피에게 모든 대표들이 (평화회담에) 참석할 수 있도록 모든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모두 협상장에 나오게 하기 위해 노력을 다하겠다고 답했다"며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와 회담한 결과를 이 같이 밝혔다.반 총장은 "나는 앞으로 있을 정치적 협상은 다르푸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최종단계여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고 우리는 이에 동의했다"면서 "카다피도 우리가 이번 협상을 최종단계로 만들고 최종적인 해결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지지를 표시했다"고 말했다.반 총장은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가 그러한 지도력을 발휘할지 자신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확신한다"며 고무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유엔의 한 고위관계자는 최종적인 해결이라는 것은 반군집단들과 정부간에 권력 배분과 부의 분배, 다르푸르 지역의 치안에 대해 서로 의견일치를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앞서 반 총장은 리비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와 회담을 갖는 목적은 내달 27일 리비아에서 열릴 예정인 다르푸르 평화협상의 성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반 총장은 이와 관련,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는 다르푸르 평화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어 최종 평화협상이 되게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그는 이어 평화 노력은 리비아와 이집트, 에리트리아, 차드 등 모든 지역 관계자들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면서 "우리는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를 포함, 모든 필요한 자원들을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반 총장과 카다피가 회담을 개최한 시르테 시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약 500㎞ 떨어진 지역으로 카다피의 고향이다.(시르테<리비아> AFP.AP=연합뉴스) jaehong@yna.co.kr 2007/09/09 01:27 http://www.2006un.org/?mid=n_highlevel_report_2&page=12&document_srl=86114
1981 -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사망
유카와 히데키 [湯川秀樹, Yukawa Hideki, 1907.1.23~1981.9.8]
일본의 이론물리학자.
1907년 1월 23일 도쿄[東京]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 교토[京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 다마기[玉城]연구실에서 이론물리학, 특히 원자핵론 및 장(場)의 양자론(量子論)을 연구하였으며, 1940년 교토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8년 도미하여 프린스턴대학 객원교수로 있었고, 1953년 귀국하여 교토대학 기초물리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였다.1933년경부터 β붕괴 문제와 핵내 전자의 문제 등을 연구하고 보존(보스입자)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유카와 상호작용)을 고찰하였는데, 1934년 핵력을 매개하는 장으로서 중간자(中間子) 문제에 도달하여 그 질량을 산출하였다. 1949년 중간자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1980 - 미국의 화학자 윌러드 리비(Libby, Willard) 사망
리비 [Libby, Willard Frank, 1908.12.17~1980.9.8]
미국의 화학자.
1960년 고고학·인류학·지구과학을 연구하는 데 매우 값진 수단이 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33~45년 그곳의 교수로 있었다. 1941~45년 맨해튼 계획에 참여해 원자폭탄 제조 필수공정의 하나인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법을 개발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뒤 시카고대학교의 핵연구소에서 일했다(1945~59). 1946년 그는 수소의 동위원소 중에 가장 무거운 삼중수소가 우주복사(宇宙輻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다음해 그는 학생들과 함께 탄소14연대측정법을 개발했다. 그는 1955~59년 미국원자력 위원회에서 일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교 화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Radiocarbon Dating〉(1952, 2판 1955)이 있다. /브리태니커
1975 - 한국의 축구선수 이을용(李乙容) 출생
이을용 [李乙容, 1975.9.8~ ]
이을용(李乙容, 1975년 9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서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현재 강원 FC 소속으로 뛰고 있다.
개요
강원도 태백시 출생으로 황지중앙초등학교, 강릉중학교, 강릉상업고등학교, 단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도드라진 광대뼈와 투박한 외모 때문에 '인민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향이 '강원도'인 점에 착안하여 '감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축구인 생활
그 외
2003년 12월 7일, 중국과의 경기에서 리이가 이을용에게 거친 반칙을 하자 이에 분노하여 오른손으로 머리를 가격하고 곧바로 퇴장당하였다. 축구팬들은 이 사건을 '을용타'라는 인터넷 신조어로 만들었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2007년 4월 2일, 이을용은 영국 스포츠 브랜드 리복과 2008년까지 2년간 후원 계약을 맺었다.
기록 /위키백과
1974 - 포드 미 대통령, 닉슨 전 대통령을 무조건 사면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으로 말미암은 정치 스캔들이었다. 사건의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 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처음 닉슨과 백악관 측은 ‘침입사건과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닉슨은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써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사건 경과 /위키백과
[닉슨 대통령 탄핵 일지]
1974.07.27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조사방해 관련탄핵결의안 1항 채택
1974.07.29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권력 오용 및 취임선서 위반 관련탄핵결의안 2항 채택
1974.07.30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하원 소환명령 거부 관련 탄핵결의안 3항 채택
1974.08.09 - 닉슨 대통령 사임
1974.09.08 -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닉선 전 대통령 사면
1973 - 영국 앤 공주, 경마 출전
1973년 오늘 소련 남부도시 케이프의 한 경마장! 세계적 경마 선수인 영국의 앤 공주도 참가했다. 그러나 앤 공주는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만다. 앤 공주는 소련 선수와 선두다툼을 벌이다 장애물을 넘는 순간 말의 뒷다리가 걸리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앤 공주는 1년 전 이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이번 해에는 소련 선수에게 영예를 빼앗겼다. /YTN
1961 -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발생
샤를르 드골 프랑스 대통령, 프랑스 극우단체 OAS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 등에 불만을 품고 자주 드골 암살 시도. 프랑스 정보기관과 대통령 경호실, 경찰 등의 노력으로 실패로 돌아감.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90919§ion=sc1
Organization de l'Arme Secrète [군사비밀조직]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알제리 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우익 집단.
프랑스 장성급이 영도한 이들은 1961년 9월 8일 밤 파리에서 120마일 떨어진 콜롱베의 별장으로 가던 드골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집단이기도 한 이들은 6∼60명의 피라미드식(式)으로 편성된 세포조직으로, 프랑스 경찰에서도 이들의 전체 세력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후에 이 조직의 지도자는 알제리 주둔군의 총사령관인 장군 살랭으로 밝혀졌으며, 프랑스 당국의 철저한 소탕으로 마침내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 단체는 알제리 독립과 더불어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naver
1955 - 아데나워 서독 총리, 2차대전 후 처음으로 소련 방문
1955년 6월 7일 서독 정부는 소련 크렘린에서 온 암호 전문을 수신했다. 암호 해독결과, 외교관계 수립을 교섭하기 위해 서독 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서독 정부는 고민했지만 모스크바 행을 결정했다. 소련에 남아있는 독일군 포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로 문제는 당시 서독인들의 심경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때까지도 독일은 소련 땅에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생존해 있는지 확인조차 못하고 있었다. 단지 수십만명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이 전후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것은 1955년 9월 8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모스크바 인근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하자 독일 국가가 전후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회담에 임한 서독과 소련은 시작부터 충돌했다. 소련은 우선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요구했고, 독일은 전쟁포로 석방을 전제로 내걸었다. "소련에는 독일군 포로가 없다"는 소련 국무장관 불가닌의 반복되는 주장에 회담은 거의 결렬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양측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과 양보 끝에 회담은 결국 전쟁포로 석방과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회담결과 1955년 10월 9일, 10여년 이상이나 소련에 억류돼 있던 마지막 독일군 포로들이 풀려나 독일에 도착할 수 있었고,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조선
- 10th Anniv. of SEATO
1954 - 동남아 반공군사동맹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발족
1954년 9월 8일 마닐라의 필리핀 상원의사당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를 비롯, 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타이·파키스탄·필리핀 등 8개국 대표들이 동남아시아집단방위조약에 조인,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SEATO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지자 '도미노 이론'을 배경으로 공산세력의 확대저지를 주장한 덜레스의 주도로 반공군사동맹으로 탄생한 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지역적 집단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했다.
조약구역은 동남아시아의 일반구역으로 아시아 가맹 제국의 전영역을 포함하며, 북위 21°30' 이북의 태평양지역을 제외하는 서태평양의 일반구역이다. 따라서 타이완·일본·한국은 조약구역에서 제외되지만 베트남·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조약구역에 포함되며, 부속 의정서에서 이 3국을 조약구역으로 지정했다. 1960년대 이후 이 조약을 근거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서 개입여부로 내부분란이 발생해 사실상 소멸상태가 됐다. /조선
- 'Rosencavalier' - 50th Death Anniv.
1949 -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Strauss, Richard) 사망
슈트라우스 [Strauss, Richard Georg, 1864.6.11~1949.9.8]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
뮌헨 출생. 아버지 F.슈트라우스도 뛰어난 음악가로서 뮌헨 궁정관현악단의 제1호른 주자 겸 왕립음악학교 교사를 지냈다.
부모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는 11~16세 때까지 그곳 궁정악장(宮廷樂長) 마이어에게 사사하여 12세 때 《축제행진곡》(작품 1)을 작곡하고 13세 때는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바흐의 평균율(平均律)을 연주하였다 한다.
1882년~83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쇼펜하우어에 심취하였다. 또 그 사이 자기의 작품을 가지고 빈 ·베를린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뷰로와 사귀는 등 그의 재능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84년 《교향곡》(작품번호 12)이 뉴욕필하모니에서 초연되고, 같은해 뷰로의 뒤를 이어 마이닌겐관현악단의 악장에 취임,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브람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슈트라우스는 철저한 반(反)바그너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감화로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후 점차 리스트와 바그너에 심취, 마침내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페라에서는 바그너보다 감미로우면서도 관능적인 선율로, 교향시(交響詩)에서는 리스트보다 자유로우면서도 광범한 내용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87년에는 소프라노가수이자 자신의 가곡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가 된 파울리네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빈 등지의 각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또 베를린필하모니와 빈필하모니의 지휘도 맡고, 잘츠부르크음악제를 비롯한 유명한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1908년 뮌헨 근교에 산장을 짓고 때때로 연주여행을 하는 이외에는 주로 그곳에서 음악 창작에 몰두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생애에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은, 만년에 그가 나치스정권에 협력한 결과가 된 몇몇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서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주요작품으로는 《살로메:Salome》(1905) 《엘렉트라:Elektra》(1909) 《장미의 기사(騎士):Der Rosenkavalier》(11) 등 15개의 오페라, 《돈 후안 Don Juan》(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키호테 Don Quixote》(98)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99) 등을 비롯한 10곡의 교향시, 그리고 수많은 가곡과 약간의 실내악곡 등이 있다. /naver
1946 - 불가리아, 왕정을 폐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의 압력으로 추축국측에 가담하였다가 전세의 불리를 깨닫고 1944년 8월 영세중립국을 선언하였다. 1944년 9월 소련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영내로 침입하여 파시즘 정권은 쓰러지고 공산 정권이 개혁에 착수하였다.
1946년 3월 토지개혁, 9월 8일 왕제(王制) 폐지에 이어, 9월 15일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0월 G.디미트로프가 총리로 선출되고 1947년 12월 공산당식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계속되었으나, 1989년 11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있은 후 1당독재를 포기하였다. 1990년 11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으며, 1992년 10월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젤류 젤레프가 취임하였다. /naver
- Hermann J. Oberth and Werner von Braun
1944 - 독일 V2 로켓 런던 공격
[어제의 오늘]1944년 독일 V2 로켓 런던 공격
ㆍ인류 최초의 탄도미사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가던 1944년 9월8일. 영국 런던은 거대한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공중 폭격은 폭격기들이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이 전부였다. 폭발이 일어났으나 런던 상공에는 단 한 대의 폭격기도 보이지 않았다. 런던 시민들과 영국 방공당국은 경악했다. 영국인들이 ‘악마의 사자’라고 부른 독일군의 로켓 V2였다. V2는 인류가 만든 최초의 탄도미사일이자, 미국의 우주 개척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하다.‘V’라는 명칭은 보복무기(Vergeltungswaffe)라는 독일어 머리글자에서 따왔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만든 무기라는 의미다. 길이 14m, 무게 13t에 최대 속도가 음속의 4배 가까운 시속 5760㎞, 항속거리는 330㎞에 달했다. 탄두에 1t 가까운 폭탄을 실을 수 있었다.V2는 에탄올과 물의 혼합연료와 액체산소로 추진되는 1단 로켓이다. 이 액체연료 로켓의 개념은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고다드가 1926년 처음 개발했다. 그러나 고다드의 연구는 당시 인정받지 못했고, 미 국방부는 실용화를 외면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기술에 가장 큰 흥미를 가진 것은 독일의 나치였다.독일에서 로켓 개발을 주도한 인물은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독일 육군 병기국에서 근무하던 폰 브라운은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32년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의 작은 섬 피네뮨데에 독자적인 로켓 연구소를 세웠다. 폰 브라운은 V2에 앞서 항공폭탄인 V1 등을 개발했다. 드디어 1942년 6월13일 V2의 첫 시험발사가 성공했다. V2는 그해 8월16일 음속을 돌파했고, 1943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은 대형트럭을 이용한 이동발사 방식도 개발해 V2를 실전에 사용할 수 있었다.V2는 1945년 3월까지 총 3200여발이 발사됐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을 향해 1610발, 런던을 목표로 1358발이 집중 발사됐다. 그러나 유도장치가 정밀하지 못해 목표지점의 수㎞ 밖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백㎞ 떨어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사돼, 요격이 불가능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V2는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V2의 맹폭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쟁에서 졌고,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V2 기술 확보 경쟁을 벌였다. 폰 브라운은 소련군에 잡히지 않기 위해 미군에 자수했다. 미군은 그를 비롯한 126명의 연구원과 수백발의 V2를 미국으로 가져갔다. 폰 브라운은 미군을 위한 유도미사일을 개발하다 1958년부터 미 항공우주국(NASA) 책임자로 임명돼 우주로켓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V2에서 시작된 미국의 로켓기술은 1969년 인간을 아폴로 11호에 실어 최초로 달에 보내는 성과로 이어졌다.김준기 기자 jkkim@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9-07 21:43: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9072143355&code=100100&s_code=ap005
1943 - 체코슬로바키아의 언론인, 작가 율리우스 푸치크(Fučík, Julius) 처형
푸치크 [Fučík, Julius, 1903.2.23~1943.9.8]
Julius Fučík (Czech pronunciation: [ˈjuːlɪjus ˈfutʃiːk]) (23 February 1903 – 8 September 1943) was a Czechoslovak journalist, an active member of Communist Party of Czechoslovakia (Komunistická strana Československa, KSČ), and part of the forefront of the anti-Nazi resistance. He was imprisoned, tortured, and executed by the Nazis.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Julius_Fu%C4%8D%C3%ADk_(journalist)
교수대의 비망록
처형되기 직전 남긴 체코 작가 수기
[토요판] 잠깐독서
1942년 4월24일 체포, 1943년 9월8일 처형. 문에서 창까지 일곱 걸음, 창에서 문까지 일곱 걸음 되는 267호 감방. 그가 ‘영화관’이라 이름 붙인 고문 대기실. 그리고 고문과 신문이 반복되는 페체크 궁의 400호실. 이 공간들을 쳇바퀴 돌 듯 살았던 1년여 동안 율리우스 푸치크는 죽어가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얇은 담배 종이 위에 글을 썼다. 살아남은 이들이 좋은 사람은 물론이고 나쁜 사람들까지도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는 죽었지만 그의 글은 살아남았다. <교수대의 비망록>. 지난 60여년 동안 세계 90개국 언어로 번역됐고, 한국에서도 이번이 3번째 출판이다. 그의 이름을 딴 사회주의 국가의 공원·광장은 사라졌지만 그의 글은 지금도 살아남았다.
체코의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푸치크는 공산주의자였다. 인류의 미래가 소련에 있다고 믿었다. 1년 전, 한 달 전, 오늘, 내일, 매일 ‘오직 그날’을 꿈꿨다. 마지막까지 전사이고자 했으며, 최후의 승리를 고문받는 중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이름 없는 영웅도 이름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함께 잡혔던 옐리네크 부부, 동지 리다, 감옥에 같이 있던 페세크로 등에 대해 썼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면서 많이 일하고, 사랑하고, 노래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랑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한겨레 2012.06.15 20:31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38008.html
- Anti-tank Artillery - Defense of Leningrad1941 -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 개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오늘 나치스 독일군의 기나긴 레닌그라드 포위가 시작된다.
레닌그라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이다. 독일군은 이날부터 1944년 1월 18일까지 무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채 공격을 계속했다.
육상은 물론 인접한 라도가(Ladoga)호수의 수상 통로도 완전히 차단해 모든 물자의 수송을 끊었다. 소련 붉은군대는 1943년 1월 12일에야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해 엿새 만에 라도가 호수 쪽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듬해인 44년 1월에야 독일군들을 이 도시로부터 멀리 쫓아낼 수 있었다. 소련 정부는 9백일 동안 레닌그라드 시민과 군인 67만여 명이 굶어죽거나 동사했다고 발표했다.
이보다 훨씬 많은 150만여 명이 숨졌다는 비공식 집계도 나왔다. 소련 정부는 독일군에 맞서 싸워 주권을 지킨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라는 호칭을 내렸다. /YTN
[어제의 오늘]1941년 독일군에 포위당한 레닌그라드
ㆍ900여일간 항전… 함락 모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역사와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유서 깊은 러시아 제2의 도시다. 18세기 러시아의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가 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러시아 북서부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건설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수립 이후 1924년 레닌그라드로 개명했다가 1991년 소련 해체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독일이 300만 병력을 동원해 소련을 침공하면서 대독전선 전방에 위치한 레닌그라드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파죽지세의 독일군은 개전 두달여 만에 레닌그라드 부근에까지 이르렀으나 시민들이 2만5000㎞에 달하는 참호를 파며 항전의지를 불태우자 점령 대신 포위전으로 전환한다. 히틀러도 독일군에 레닌그라드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특별지시를 내린다.마침내 9월8일 독일군은 라도가 호수를 제외한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공습을 시작했다. 인구 300만명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이 차단된 뒤 한달여 만에 시민들은 극심한 기아상태에 빠졌다. 밀가루가 떨어지자 톱밥, 목화씨는 물론 말 사료로 쓰던 귀리까지 먹어야 했다. 소련 해군함대가 보낸 곡물수송선이 라도가 호수에서 격침되자 배를 인양해 썩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9월말에는 석유와 석탄이 떨어져 공장가동이 멈췄고 11월에는 교통수단 통행이 중단됐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아사자들이 속출했고, 사람들은 인육에까지 손을 댔다. 하지만 강원도만한 크기의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으면서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다. 말이 이끄는 수송부대가 호수를 통해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실어 날랐고, 이듬해 4월까지 50만명의 시민들이 결빙상태의 호수를 건너 탈출했다. 1942년 여름에는 라도가 호수 밑바닥으로 석유 파이프라인이 건설되기도 했다. 1944년 1월27일까지 900여일 가까이 상상조차 어려운 굶주림과 추위, 폭격에 맞선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분투는 소련국민에게 용기를 심어줬고, 스탈린은 1945년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의 칭호를 부여했다. 포위기간에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뜨거운 동지애와 전우애로 서로를 격려하고 저항을 이어갔다. 나이 많은 시민들이 “꼭 싸워 이기라”며 젊은이들에게 배급을 양보하고 희생을 자처했다는 일화도 있다. 세계적인 음악거장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투쟁과 애국심을 찬양하는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독일군이 패퇴한 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됐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며 만세를 불렀다. 포위전의 희생자는 소련정부의 공식발표로는 67만명이지만 최대 120만명이라는 설도 있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9-07 17:4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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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뉴욕-샌프란시스코간 미대륙횡단 항공우편 개시
미국의 우편 비행시대 유럽 여러나라에서 상업항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정부보조금까지 지원되고 있을 무렵, 오늘날 항공대국이 된 미국의 상황은 어떠했나? 라이트형제의 성공적인 비행기록이나 세계 최초의 정기편 항공사인 STA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미국은 우편물 수송의 민항공 이용이라는 역사를 이룩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체신부는 이미 1916년경부터 우편물의 항공수송을 구상하고 있었다. 1918년 5월 1일부터는 육군항공대의 협조를 받아 연간 10만달러 규모의 예산으로 뉴욕-워싱턴 사이의 시험운항을 시작, 항공사(航空史)의 꽃으로까지 불리운 '우편 대비행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험운항 노선을 단계적으로 늘려가던 체신부는 2년후인 1920년 9월 뉴욕을 출발하여 시카고 경유, 샌프란시스코 구간을 잇는 대륙횡단항공로를 개척했다. 당초에는 낮에만 비행하여 이 노선 운항에 3일이나 걸리는 형편이었지만 유럽 여러나라들과는 달리 우편수송의 기반을 닦는 일에 우선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성과로 기록할 수 있다. 이무렵 특이한 여객편이 생겼는데, 1919년 7월부터 시행된 금주법(禁酒法)의 결과이다. 대도시간의 수송도 아니고 플로디다와 바하마의 내소, 쿠바의 수도 아바나 사이를 연결하는 노선이 개설된 것은, 미국의 플로리다와 인접한 영국령 바하마제도나 쿠바가 애주가들의 천국으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민한 상술을 발휘, '아에로'라는 회사에서 재빨리 커티스HS-2비행정을 듸웠는데, 선박보다 시간이 5분의 1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아 당일로 돌아올 수 있게 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등 히트를 쳤다. '하이블 익스프레스'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카리브해의 노선은 "한잔 하는데" 눈이 어두워진 애주가들로부터 편도운임을 75달러씩이나 받았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몇몇 경쟁사가 등장, 미국 동부의 여러 도시에서도 여객수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이 시기의 미국상업항공은 영국,독일, 프랑스에 비해서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비행기의 장래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갖고 있던 체신당국에 의해 북미대륙횡단의 우편비행이 30시간으로까지 단축되었다. 무선은 커녕 항공용 등대 하나도 없었던 시절에, 비행장과 이착륙 코스에 횃불을 비쳐 표지로 삼는 등의 원시적이지만 저돌적인 방식의 운항 덕분이었다. 우편비행에 사용된 비행기는 1-2인승의 단발복엽기로, 조종사들은 가죽 비행복에 고글처럼 생긴 안경을 쓴 멋쟁이 차림으로 조종석에 앉았고 비행기도 어깨 윗부분은 열려 있는 개방식 좌석이었다. 이때의 조종사들은, 물론 승객을 싣지 않아서였겠지만, 곡예비행에 가까운 무리한 비행을 해내고 자랑을 늘어놓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게다가 체신당국에서는 비행조건이나 기상에 대한 지식도 없이 무리한 운항을 종용하기도 했다. 조종사들과 알력도 심해, 1919년 7월에는 짙은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을 강요받은 조종사가 이를 거부하다가 해고를 당했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여 다른 조종사들이 파업을 하기도 했다. 이 파업은 또한 조종사 최초의 집단 파업으로 알려져 있다. 국영 우편비행은 약 9년동안 계속되었는데, 총비행거리 2천5백만킬로미터에 수송한 우편물도 3억통에 이르는 눈부신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무리한 운항 탓으로 이 기간중 2백회 정도의 추락사고가 있었고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발췌)
[상업항공의 발자취][printed '월간 항공' 1991. 1. ~ 12. 연재분 요약]
인터넷신문 온타임즈 1991년12월31일 21시10분
http://www.ontimes.kr/detail.php?number=896&thread=14r04
1918 - 영국의 유기화학자 데릭 바턴(Barton, Derek) 출생
바턴 [Barton, Derek Harold Richard, 1918.9.8~1998.3.16]
영국의 유기화학자.
1969년 유기화학의 핵심부분인 기하이성질체 해석(복잡한 분자의 3차원 기하학적인 구조 연구) 분야를 확립시킨 공로로 노르웨이의 오드 하셀과 함께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45년 런던의 과학기술 임피리얼 칼리지 강사가 되었고, 그뒤 특별연구원으로 있었다. 1949~50년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기하이성질체 해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1950년 독창적인 책을 써냈는데, 이것은 즉시 과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유기화학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1950년부터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의 교수로 있었으며, 1955~57년 글래스고대학교 화학교수, 그뒤 임피리얼 칼리지 유기화학교수가 되었다. 1960년에는 알도스테른 호르몬을 쉽게 합성할 수 있게 한 바턴 반응을 발견했다. 1972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904 -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재선
루스벨트 [Roosevelt, Theodore, 1858~1919]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1858년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23세 때 뉴욕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진실과 공정을 존중한 공화당원이었으며 정치적 부패를 강력히 비난하여 당수와 맞서 혁신파를 주도하고 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884년 일시 정계를 물러나 서부지역의 목장에서 집필을 하다가, 1889~1894년 관리제도 개혁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이어 뉴욕시(市)의 경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정계의 숙정에 노력하였다. 1896년 해군차관보가 되어 해군강화에 공헌하였으며, 미국-스페인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관직을 사임하고 의용군을 조직하여 쿠바에 출정하여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대전(大戰) 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1900년 대통령 W.매킨리 밑에서 부통령으로 있다가 매킨리의 암살로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04년 재선되었다.
대통령 재임시 내정면에서는 혁신주의를 내걸고 트러스트 규제, 철도통제, 노동자 보호입법, 자원보존 등에 공헌하였으며, 외교면에서는 먼로주의의 확대 해석에 의하여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해 문제, 파나마운하 건설 등 강력한 외교를 추진하였다. 또 러일전쟁의 조정, 모로코 문제 중재 등에도 적극 힘써, 190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10년 정계로 복귀하여 1912년 제3당인 진보당을 조직하고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의 복지향상을 지향한 ‘새로운 국민주의’에 입각한 정강을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로운 자유’를 주창하여 출마한 민주당의 T.W.윌슨에게 패하였다. /naver
1901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가, 총리 헨드릭 페르부르트(Verwoerd, Hendrik) 출생
페르부르트 [Verwoerd, Hendrik Frensch, 1901.9.8~1966.9.6]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수·편집인·정치가.
1958~6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정책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아파르트헤이트). 페르부르트가 생후 3개월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스텔렌보슈대학교의 우수한 학자였던 그는 1927년 이 대학교의 응용심리학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33년 사회학과 사회복지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페르부르트는 1937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새로운 국민당 일간지 〈트란스발러 Die Transvaler〉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정치적 유력인사가 되었다. 그는 1948년까지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그해 총선에서 국민당의 승리로 국민당 소속 상원의원이 되었다. 1950년 원주민문제담당장관이 되어 인종차별 법안을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8년 선거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요한네스 게르하르두스 스트레이돔 총리가 죽자 국민당 의원 간부회의에서 1958년 9월 스트레이돔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총리직에 부임한 페르부르트는 백인·혼혈인·아시아인·아프리카인(흑인)을 분리하는 복잡한 법체계를 가지고 인종차별정책을 완전하게 실행했다. 1959년 그는 반투 자치촉진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흑인들의 거주지를 8개의 독립 보호구역, 즉 반투홈랜드(현재 블랙 스테이트로 지정됨)로 옮기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인종정책들은 흑인들의 시위를 불러일으켰는데, 1960년 3월 샤르페빌에서 일어난 시위는 유혈사태로까지 번졌다. 1960년 10월 5일 백인 유권자들은 근소한 표차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영국연방에서 탈퇴시키고자 하는 그의 제안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공화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페르부르트의 꿈은 1961년 5월 31일 현실로 이루어졌다. 1960년 4월 9일 한 미친 백인 농부가 페르부르트를 암살하려고 총을 쏘았으나 실패했다. 6년 뒤 그는 의회 회의실 안에서 모잠비크인 이민으로 혼혈인인 차펜다스라는 이름을 가진 임시의회 대리인의 칼에 찔려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7 - 미국의 가수, 기타 연주자 지미 로저스(Rodgers, Jimmie) 출생
로저스 [Rodgers, Jimmie, 1897.9.8~1933.5.26]
본명은 James Charles Rodgers.
팝 음악에서 컨트리 음악과 웨스턴 양식을 낳게 하는 데 공헌한 미국의 가수, 기타 연주자.
전 음악 경력을 통해 '노래하는 차장'(brakemam)이라고 알려졌다.
14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미시시피와 오하이오 철도에서 물 수송 일을 맡았다. 차장을 비롯하여 철도와 관련된 많은 직업을 거쳤다. 철도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에게 음악 기술을 훈련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기타와 밴조를 배운 것도 철도에서이며, 흑인 철도노동자들로부터 블루스 기법을 배웠다. 전통적인 컨트리 음악, 노동요, 블루스, 호보, 카우보이 노래가 섞인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는 한마디로 철도 노동자 생활에서 습득한 것이었다. 1924/25년경 폐가 좋지 않아 철도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연주자가 되었고, 1927년 테네시 주 RCA 빅터 레코드회사와 계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고의 음반판매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남부지방을 돌아다니며 연주하다 마침내 텍사스에 정착하였다.
110개 이상의 음반을 남겼으며, 대표곡은 〈우울한 요들 1번 Blue Yodel No.1〉·〈차장의 블루스 Brakeman's Blues〉·〈미시시피 강 블루스 Mississipi River Blues〉·〈My Time Ain't Long〉 등이 있다. 그의 노래들은 많은 대중가수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컨트리 앤드 웨스턴 양식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브리태니커
1894 - 독일의 생리학자,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Helmholtz, Hermann von) 사망
헬름홀츠 [Helmholtz, Hermann Ludwig Ferdinand von, 1821.8.31~1894.9.8]
독일의 생리학자 ·물리학자.
포츠담 출생. 프리드리히 빌헬름 의학연구소를 졸업한 후 베를린의 자선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하고(1842), 포츠담에서 군의(軍醫)가 되었다(1843∼1848). 그 동안에 부패와 발효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1847년 베를린의 물리학회에서 ‘힘의 보존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것은 마이어와는 독립적으로 보다 정리된 형식의 에너지보존 원리를 보편적 법칙으로서 확립한 것이다.
1848년 군의로서의 의무를 끝내고, 베를린의 미술학교 해부학 강사,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신경 자극의 전파에 관한 연구를 하였으며, 미소시간(微小時間)측정법을 연구하는 한편 전기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1851년 검안경(檢眼鏡)을 발명하고, 1855년 본대학으로 옮겨, 해부학 ·생리학 교수로서 생리광학(生理光學)과 생리음향학을 연구, 독자적인 분야를 개척하였다.
입체망원경을 발명하였고, 유체역학(流體力學)을 연구하여 유명한 소용돌이의 정리를 제출하였다. 그 후 곧 G.R.키르히호프의 초빙을 받아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 청각 및 음향학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기하학의 공리문제에 몰두하였다.
1869년부터 물리학으로 연구주제를 옮겼고, 1871년 베를린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어 전기역학(電氣力學) ·유체역학 ·광학 ·기상학 ·인식론 등에 공헌하였다. 열역학(熱力學) 이론의 열화학 및 전기화학에 대한 적용의 업적이 있다. 또한 빛의 분산이론, 지각(知覺)에 관한 삼원색설(三原色說) 등도 유명하며, 철학자로서는 초기의 신칸트파에 속해 있다. /naver
태프트 [Taft, Robert Alphonso, 1889.9.8~1953.7.31]
14년간(1939~53) 미국 상원에서 활약한 공화당 지도자.
전통적 보수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미스터 공화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1948, 1952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한 것은 공화당 내의 국제주의파가 고립주의파에 승리한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 제27대 대통령(1909~13)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태프트는 1913년에 오하이오 주 변호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 식량국 법률 고문 보좌역(1917~18)과 미국 구호국 법률 고문(1919)를 지냈다. 그후 오하이오 주 하원(1921~26) 및 상원(1931~32)에서 일했다. 194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자, 태프트의 권세와 명성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는 공화당 상원 정책 위원회 의장으로 정력적으로 일했고, 의회에 제출되는 모든 분야의 법안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노동조합활동을 제약하는 태프트-하틀리 법(1947)의 제정이었다. 완고한 고립주의자인 태프트는 미국이 1949년에 창설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와 함께 '미국의 요새화'와 '자유로운 행동의 원칙'을 주장했다. 태프트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브리태니커
1841 - 체코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Dvořák, Antonin) 출생
드보르자크 [Dvorák, Antonín Leopold, 1841.9.8~1904.5.1]
드보르자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최초의 보헤미아 작곡가이다. 19세기 낭만음악 양식 속에 보헤미아 지방의 민속자료를 채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드보르자크는 보헤미아(지금의 체크) 지방 프라하의 블타바 강변에 있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서 2년 과정을 마친 뒤 1873년 11월 몇 편의 작품이 성공할 때까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소프라노·콘트랄토를 위한 <모라바 2중창곡 Moravian Duets>(1876)과 피아노 2중주 <슬라브 무곡 Slavonic Dances>(1878)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보헤미아 음악을 전세계에 알렸다. 풍부한 선율과 소박하고 단순한 음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음악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1884년 영국에서의 첫공연과 1890년 모스크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1892년에는 뉴욕에 새로 설립된 국립음악원의 원장직을 수락했다. 1895년 보헤미아로 돌아온 뒤 여러 편의 현악 4중주와 교향시들, 마지막 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표해 사랑받았으나 오페라에서만은 예외였다. 주요 작품에 <슬라브 무곡>, 교향곡 9번 <신세계 From the New World>(1893), <유모레스크 Humoresque>(작품 101-7번, 1894)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저는 요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작은 소품을 하나 작곡하고 있습니다.
교향악곡을 작곡할 때만큼이나 즐겁게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아마추어 연주자를 위해 이 소품을 작곡했습니다.
베토벤이나 슈만이 때때로 수수하고 겸손한 방식을 가지고서도 자신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듯이 말입니다. "
- 안토닌 드보르자크
1831 - 독일의 시인, 소설가 빌헬름 라베(Raabe, Wilhelm) 출생
라베 [Raabe, Wilhelm, 1831.9.8~1910.11.15]
독일의 시인 ·소설가.
브라운슈바이크 지방의 아름다운 소도시인 에셰르하우젠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학업을 중단하고 마그데부르크에서 서점 점원이 되었다. 이 무렵에 여러 작가의 작품에 접하였고, 새커리 등 영국 작가에게 끌렸다. 1854년 향학의 뜻을 품고 베를린대학교의 청강생이 되어 철학 ·역사 ·문학을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뜻밖에도 마그데罐E?시절의 다독(多讀)이 꽃을 피워 야콥 코르비누스(Jakob Corvinus)란 필명으로 《슈페를링 거리의 연대기 Die Chronik der Sperlingsgasse》(1856)를 자비로 출판, 헤벨의 칭찬을 받아 문필가의 길로 나섰다. 이것은 나이 많은 이와 같은 안목으로 베를린이라고 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대도시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운명의 하나하나를 따뜻한 동정의 눈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출발점으로 하여 작은 것, 가난한 것을 향한 사랑은 라베의 모든 작품을 일관하는 근본기조가 되었다. 그가 슈투트가르트 시대에 발표한 3부작 《배고픈 목사 Der Hunger pastor》(3권, 1864) 《아부 텔판 Abu Telfan》(1867) 《영구차 Der Schüdderump》(1870) 등은 그의 이름을 길이 남겼다. 그는 화려한 프로이센 시대 국가의 번영에 등을 돌린 채 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사람, 또한 프랑스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세상의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여 기인으로 변모해가는 모습 등 현실에 눈을 돌려서 자유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해왔다. 바로 거기에서 저절로 깊은 인간애와 신랄한 야유, 따뜻한 유머가 스며나와서 독특한 시적 사실주의가 그의 작풍을 만들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인생의 현실에 입각하여, 실러에서 비롯되는 반성의 사람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장 파울과 같이 독일 기질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naver
1830 - 프랑스의 시인 프레데릭 미스트랄(Mistral, Frédéric) 출생
미스트랄 [Mistral, Frédéric, 1830.9.8~1914.3.25]
프랑스의 시인. 프로방스지방 마이얀 출생. J. 루마니유·T. 오바넬과 1854년 문학부흥단체 <펠리브리주(Félibrige)>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오랫동안 방언의 노래로 전락한 남프랑스어를 문학적 위치로 올려놓아 남프랑스문학을 부흥시켰고, 아울러 남프랑스의 민족의식을 선양하고자 했다. 그의 생애는 <펠리브리주> 정신의 앙양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1855년 기관지 《프로방스연감》을 발행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했고, 비련의 서사시 《미레이오(1859)》는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전설을 담은 목가적인 시로 A.M.L. 라마르틴의 절찬을 받았으며, C. 구노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져 그를 더욱 유명하게 했다. 남프랑스 민족의식의 선양을 시도한 프로방스의 영웅찬가인 《칼랑다르(1867)》 《네르토(1884)》 《잔 왕비(1890)》 등에는 프랑스의 중앙집권에 저항하여 남프랑스의 독립을 염원하는 시인의 이상이 간직되어 있다. 또 서정시 《론강의 시(1897)》가 있고, 특히 그를 유명케한 작품 《추억의 기록(1906)》은 청년시절의 회상록으로 펠리브리주 창설시의 문학적 풍토뿐 아니라 7월혁명·2월혁명 때의 프로방스 사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 밖의 작품에는 프로방스어의 쇄신·고양을 위해 3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언어·풍속사전인 《펠리브리주보전(寶典, 1878~1886)》 등이 있다. 190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yahoo
1804 - 독일의 시인, 소설가 에두아르트 뫼리케(Mörike, Eduard) 출생
뫼리케 [Mörike,Eduard Friedrich, 1804.9.8~1875.6.4]
독일의 시인, 소설가, 성직자, 문학 교사.
루트비히스부르크 출생. 튀빙겐대학교의 신학부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어 각지를 전전하였다. 1851∼1866년 슈투트가르트의 여학교에서 문학 교사로 근무하면서 만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제1급의 서정시인으로서 《시집 Gedichte》(1838)에는 목가적 민요조의 것과 깊은 정신성을 담은 것 등, 실로 다양한 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작품은 풍부한 음악성과 명확한 조형성, 따뜻한 심정과 엄격한 형식미 추구 등을 보인다. 이 외에 《보든 호수의 목가 또는 어부 마르틴》(1876)과 많은 사설조(辭說調)의 시, 민요풍의 시편 등이 있다.
소설로는 자서전적인 요소가 강한 처녀작 《화가 놀텐》(1832)이 있지만, 이것은 J.W.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徒弟)시대》를 모범으로 삼은 장편으로서, 당시의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양소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산문작품들 중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단편 《프라하에의 나그네길의 모차르트》(1856)이다. 초연(初演) 여행 중 모차르트는 행복의 절정에서 죽음을 예감하는데, 죽음을 생의 일부라고 달관(達觀)하는 긍정적인 인생관에 도달한다는 줄거리이다. 그의 생애는 자신의 인품처럼 파란없이 평온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도 평명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일관되었으며, 입체적 조형력과 예민한 음악성이 넘쳤고, 또 깊은 자연감정과 결합되었다. 즉 그의 작품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민요조에 가까운 것이었다. 동화 《슈투트가르트의 난쟁이》(1853)도 우수한 작품이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라우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한밤중에》 《정원사(庭園師)》 등은 민요풍의 시로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naver
1783 - 덴마크의 시인, 종교가, 역사가 니콜라이 그룬트비(Grundtvig, Nikolai) 출생
그룬트비 [Grundtvig, Nikolai Frederik Severin, 1783.9.8~1872.9.2]
덴마크 신학자·시인·역사가·정치가.
젤란트 출생. 코펜하겐대학 신학부를 수석으로 마치고, 1821년까지 각처에서 공사(公私)의 목사, 1821년 젤란트의 한촌(寒村) 목사, 1822년 코펜하겐의 구주(救主) 교회에 초청되었다. 1825년 유리파(唯理派) 대표자인 H.N. 클라우젠이 《가톨릭교 및 신교》를 발표하자, 그는 《교회의 대담(Kirkens Gjinmaele)》을 저술하여 당시의 합리주의를 공격함으로써 7년 동안 설교를 금지당하였다. 그동안 문학에 전심하고, 영국을 여행하여 당시의 사상계에 자극을 주었다. 1839년 코펜하겐의 바르토프병원 교회목사가 되고, 1848년 코펜하겐 제11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56표 차로 낙선되었으나, 보궐선거에서 무투표로 당선된 뒤 국방의 의무, 신앙·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를 위해 지도적인 발언을 하였다. 토지 문제에 있어 누구나 자기 나라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가졌음을 역설하고, 덴마크 소농제도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는 국민성 및 루터주의의 근저에 돌아감으로써 국민생활을 개선하려 하고, 이 목적을 위해 국민고등학교 창설을 주창하여 그 실현을 보았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땅을 사랑하자>는 구호를 제시하고, 박토인 덴마크를 개척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덴마크 중흥(中興)의 할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초기 스칸디나비아 문학 연구의 개척자였고 교육이론가였으며 찬송가 작가로도 유명하였다. 저서로는 《북유럽신화》 《세계사》 등이 있다. /yahoo
1624 - 크로아티아의 성직자, 과학자 마르코 안토니오 드 도미니스(Marco Antonio de Dominis) 사망
마르코 안토니오 드 도미니스 [Marco Antonio de Dominis, 1560~1624.9.8]
Marco Antonio de Dominis
Marco Antonio Dominis (Croatian: Markantun de Dominis) (1560 – 1624) was a Dalmatian ecclesiastic, apostate, and man of science.
http://en.wikipedia.org/wiki/Marco_Antonio_de_Dominis
1522 - 마젤란 선단, 최초로 세계일주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옴
마젤란은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錢主)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때에 침몰 ·도망한 함대는 각각 1척,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것으로 예상하고 서진(西進)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했으나, 1521년 3월 6일 괌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다. 3월 16일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세부섬의 왕 및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으며, 27일에는 준비가 덜 된 채 막탄섬의 토벌을 시작하였다가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지점이 몰루카제도의 경선(經線)을 넘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완수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휘자를 잃은 선단원(船團員)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으로 11월 몰루카제도의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號)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naver
1474 - 이탈리아의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Ariosto, Ludovico) 출생
아리오스토 [Ariosto, Ludovico, 1474.9.8~1533.7.6]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시인.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며, 페라라의 에스테 후작 집안 가신(家臣)의 맏아들이다. 일찍부터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몸에 익히고, 대학에서는 법률을 배웠다. 당시 페라라는 에스테 후작 집안의 후원으로 문예활동이 활발하였다. 아리오스토는 시작(詩作)과 외교활동에서 기반을 굳히고, 한평생 에스테 후작 집안에서 일하였다. 아리오스토는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o furioso》(1516)만을 쓴 작가로 여겨지고 다른 작품은 대작의 준비라 생각된다.
《광란의 오를란도》의 줄거리는 복잡하지만,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전쟁, 아름다운 안젤리카에게 실연당하고 미친 오를란도, 에스테 후작 집안의 선조 루지에로의 모험으로 가득찬 연애가 주제이다. 리파두사섬에서 그리스도교도측이 승리를 거두고 루지에로와 브라다만테가 맺어지는 것으로 8행시, 46가(歌)의 작품은 끝나는데, 3개의 주제가 조화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사건 전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잡다한 자료를 높은 곳에 앉아 다루어 내는 작자의 능력은 탁월하다. 작자는 당시 유럽 열강의 간섭과 약탈 앞에 놓인 조국 이탈리아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고, 공상의 세계로 도피를 하였다. 이런 점에서 《광란의 오를란도》는 단테의 《신곡》이나 A.만조니의 《약혼자》와 대조를 이룬다. /naver
1157 - 영국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 출생
리처드 1세 [Richard I, 1157.9.8~1199.4.6]
플랜태저넷 왕조의 잉글랜드 왕(재위 1189~1199).
헨리 2세의 셋째 아들이다. 프랑스의 아키텐지방을 영토로 가지고 있었으나, 어머니 및 형제와 짜고 반란을 일으켜 부왕(父王)과 싸웠다. 1183년 형 헨리가 죽고 1189년에 부왕인 헨리마저 죽음으로써 왕위에 오른 리처드는 부왕의 대륙정책을 계승함과 동시에 프랑스왕의 누이동생과의 약혼을 취소하여, 그와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운동이 고조됨으로써 두 사람의 공공연한 적대관계는 연기되었다.
왕은 1190년에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제휴하여 제3회 십자군을 편성, 이를 주도하여 출정하였다. 그 동안 십자군을 위하여 약 8,000의 병력과 100척의 수송선을 준비하였다. 1191년 리처드는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서 적왕(敵王) 살라딘을 격파하여 3년의 휴전을 맺고(1192), 그의 용맹성으로 사자왕(獅子王)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귀국하는 도중 빈에서 오스트리아왕에게 붙잡혀 많은 액수의 몸값을 바치고 1194년에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프랑스왕의 뒷받침으로 이미 왕위를 찬탈한 아우 존을 몰아내고 다시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제후들의 반란도 진압시켰다. 그 뒤에 본국의 통치를 유능한 행정관 H.월터에게 맡기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2세와 싸우다 1199년 4월 리모주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리처드 1세는 재위 10년 중에서 본국에는 반 년밖에 있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프랑스에서 또는 십자군원정으로 허비하여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였다. 또, 자신의 몸값으로 무거운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징수하였고, 정치에도 무능하였으므로 부왕시대에 눌려 있던 제후(諸侯)들의 세력이 재위 중에 다시 대두하는 일도 있었지만, 전투에서의 영웅적인 행위는 중세기의 전형적인 기사로서 좋은 평을 받았다. /nav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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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