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십니까? 모르면 손해!'
1955년 7월 2일자 조선일보 2면에 한 제약회사가 가로 32㎝나 되는 크기로 광고한 상품은 약품이 아니다. 대표적 인공 감미료인 '당원'이었다. 당시 설탕 광고는 가뭄에 콩 나듯 했지만, 인공 감미료는 뜨겁게 판촉전을 벌였다. 오늘날엔 비만을 겁내 설탕 대신 먹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섭취할 칼로리가 모자라 걱정이었던 전후(戰後)의 한국인들에게 인공 감미료는 다이어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손톱만 한 알약 모양의 감미료란 오로지 설탕 살 형편이 안 되는 대중들을 위한 '착한 값'의 달콤한 대용품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지만 특히 한정된 수입 원료로 만드는 설탕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국내 생산이 개시된 1953년 한 해의 생산량이 약 2만3900t. 오늘날의 40분의 1 정도였다. 동화백화점 광고를 보면 백설탕 375g 값이 330원. 당시 쇠고기 값의 2배쯤 된다. 요즘 설탕 1㎏ 값(약 1700원)이 한우 등심 1㎏ 값(약 4만원)의 24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을 생각하면, 설탕이 얼마나 비쌌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나마 물량이 모자라 백화점의 설탕 판매는 '한 사람당375g씩'으로 제한됐다(조선일보 1950년 3월 31일자).
설탕값이 금값이다 보니, 인공 감미료 광고들은 '값싸다'는 것부터 내세우며 서민들을 달콤하게 유혹했다. '당원'이 '한 알이면 설탕 18.75g만큼 단맛을 낸다'며 데이터로 호소하자, 경쟁 상품인 'SS(錠)'도 똑같은 표현으로 응수했다(1955년 7월 2일자, 1956년3월 27일자). '1환 한 장이면 다섯 식구의 빵을 달게 할 수 있다'는 당원의 광고문엔 왠지 처연한 느낌마저 묻어 있다(1955년 10월 5일자). 인공 감미료가 미래엔 설탕을 밀어낼 것이라는 식의 광고까지 등장했다. 1955년 나온 이 광고는 '해방 30주년(1975년) 기념 박람회'라는 가상의 미래 풍경 속에 설탕이 진열장 속 유물로 전시된 모습을 그려 놓았다. 그림 속 안내원은 진열장의 설탕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님들이 쓰시든, 녹으면 끈적끈적한 설탕이라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955년 11월 18일자).
1960년대 중반엔 설탕값이 약간 내리지만 1㎏에 117원으로 쌀값의 2.6배나 되어 여전히 비쌌다. 설탕은 연말연시나 명절의 귀한 선물이었다(1966년 5월 11일자). 1970년대까지도 가정에서 손님에게 설탕물을 타서 접대하는 일이 흔했다. 지금은 비만의 주범처럼 손가락질받는 설탕이 한때는 얼마나 귀한 식품이었는지를 '인공 감미료' 광고들이 말해 준다.
기사출처 : 조선일보 *추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