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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남성 |
내게는 한때 어느 값비싼 책보다 더 힘들게 손에 넣은 귀중품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 이른 아침부터 파리 국립도서관 앞에서 줄을 섰다가 간신히 책을 빌려 또 창구 앞에 줄을 서서 페이지마다 1장씩에 해당하는 쿠폰을 구입하고, 또다시 귀한 복사기 앞에 줄을 서서, 책이 상한다 하여 한 번에 두 페이지가 아닌 한 페이지씩만을 복사하여 만든 책도 있다. 어렵사리 페이지가 한데 모여 한 권의 책이 됐을 때 부자나 된 듯 얼마나 뿌듯해했던가.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환경이 여간 좋아진 것이 아니다. 도서관 앞에서 줄을 서지 않는다. 먼지 앉은 목록실에서 카드함을 열어 놓고 한없이 도서카드를 뒤지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의 바다로 들어가 세상 어떤 도서관이건 찾아들어가 책명, 저자명, 주제와 관련된 키 워드 하나면 무슨 책이든 찾아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앉은 자리에서 원문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외국의 도서관이 간단한 인터넷 신청절차를 거쳐 빠른 속도로 책을 부쳐주기도 한다. 전에는 어쩌다가 도서관에 도서 구입을 신청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예산 부족으로, 아니면 절판되었기에…운운의 이유로 도서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통지가 오곤 했다. 그걸 알기에 교수들은 도서관을 믿지 않았고 자신이 책을 구입하여 연구실에 혼자 두고 보았다. 연구자도 서로 책에 관한 한 여간 인색하지 않았다. 책은 넘쳐도 지혜는 굶주린 시대 그런데 외국의 교수 연구실에 찾아가 보면 연구실에 책이 거의 없다. 책장에는 최소한의 서적과 교재가 전부다. 모든 책이 도서관에 있으니 지금 보는 최소한의 책 이외에는 필요가 없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 대학 도서관은 그 ‘외국’과 다름이 없다. 책을 신청하면 국내 국외를 가리지 않고 즉시 다 구입해 준다. 사정이 이러하면 이제 이 나라에는 위대한 학자, 연구자가 가득 차 있을 법하다. 그럴지도 모른다. 주변에 만나는 사람 치고 석사나 박사가 아닌 사람이 드물고 저서 한두 권쯤 쓰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같은 분야에도 유사학회가 무수히 번식하고 학회마다 공식 인정받는 학회지를 두툼하게 발행한다. 연구논문은 하나같이 무슨 기관의 연구지원을 받아서 작성했다고 표시돼 있다. 처음 들어보는 대학교 대학원이 날로 많아지고 석좌교수 연구교수 특임교수 계약교수 등 명칭과 종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교수가 교육과 연구에 매진한다. 그런데 정작 대학의 인문학 교실에서는 위기라는 말이 들려온다. 여러 언론에서 인문학의 재건을 말하는 것은 위기의 반증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모두가 아는 일이다. 신문이 주 1회씩 발간하는, 그러나 날로 초라해져가는 책 섹션을 보면 인문이 얼마나 소외됐는지 알 수 있다. 돈과 정치와 처세술에 대한 베스트셀러 그늘 저쪽으로 밀려난 인문학 서적의 초라한 처지는 도서관에서 반납된 내 복사본을 많이 닮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입에 발린, 무한 경쟁이라는 구호는 느리고 반성적이어서 결과물이 화끈하지 못한 인문학을 그늘로 내몬다. 사고의 깊이와 감성적 예지를 기르라고 논술시험을 만들어놓으니 학원이 답안 작성하는 요령을 가르치며 돈을 번다. 경영마인드를 도입한다는 대학의 관리자들은 누가, 무엇을 위하여, 어떤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 대학랭킹 순위에 시선을 박고 논문 편수를 헤아리면서 연구비를 따오라고 닦달한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행사하는 기업가는 대학이 기업에 필요한 교육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대학의 재단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학문’은 통폐합하겠다고 협박한다. 연구재단의 책임자는 충분한 연구비를 제공할 터이니 쓸모 있는 주제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고 기간에 맞추어 결과물을 제출하라고 돈주머니를 열어 보인다. ‘호기심의 갈증을 허락하소서’ 모두가 스스로의 할 일에 충실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와중에서 정작 인문학은 그 원동력인, 인간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이 실종되고 말았다. 인문학이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점은 학점도 연구비도 학위도 자격증도 아닌 인간적 삶에 대한 의문과 갈증이다. 바슐라르는 매일같이 지혜의 신에게 ‘저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면서 천국은 책이 가득한 도서관을 닮았으리라고 상상했다. 이제 우리 인문학이 되찾아야 할 것은 연구비가 아니라 그 갈증이다. 그 갈증이 인문학의 샘을 파는 것이다.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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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남성 |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가까운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사하고 할머니와 어머니와 형이 전부인 집안은 참혹하게 가난했다. 담임선생님이 가장 우수한 네 학생을 중학교 장학생 시험에 응시시키기로 결정한다. “중등학교에 가면 모든 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기왕이면 너희들처럼 가난한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선생님이 말한다. 여자 둘이서 허드렛일을 해서 근근이 두 아이를 키운 그 집에서는 소년이 다음 해부터는 일을 해서 주급을 받아 올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앞으로 6년 동안이나 집에다가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선생님이 소년의 집을 찾아간다. 소년에게는 밖에 나가 놀라고 이른다. “이해하시겠죠. 제가 이제 저 애 칭찬을 좀 할까 하는데 옆에서 들으면 진짠 줄 알 거란 말이에요”라고 선생님이 할머니에게 말했다. “저 애 칭찬을 좀 할까 하는데요” 소년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현관문 아래서 기다린다. 하늘빛이 초록으로 저물 무렵 선생님이 문을 나설 때 할머니가 과외비를 낼 돈이 없다고 하자 “걱정 마세요. 얘가 이미 다 냈답니다” 하고 선생님이 말한다. 선생님은 정규 수업이 끝난 뒤 소년을 매일 두 시간 동안 붙잡아놓고 공부를 시켰다.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던 날 선생님이 말했다. “네겐 이제 내가 필요 없게 되었구나. 학식이 더 많으신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겠지.” 소년은 시험에 합격했다는 기쁨 대신에 어린 가슴이 쥐어뜯기는 느낌이었다. 그 합격에 의해 낯선 세계, 모르는 것이 없는 저 선생님을 떠나 낯선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57년 11월 19일, 그때의 어린 소년은 옛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제가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선생님이 그 당시 가난한 학생이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리고 손수 보여주신 모범이 없었더라면 그런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영예를 지나치게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선생님이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도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드리고 선생님의 노력, 일, 그리고 거기에 바치시는 너그러운 마음이 나이를 먹어도 결코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학생이기를 그치지 않았던 한 어린 학동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릴 기회는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소식’, 그 영예란 훗날 작가로 성장한 알베르 카뮈가 그때 막 받은 노벨 문학상을 가리킨다.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스웨덴 연설’은 그래서 은퇴한 초등학교 교사 루이 제르맹에게 헌정되어 문학사에 남았다. 이와 같은 행운이 위대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알베르 카뮈가 옛 스승에게 이런 편지를 쓰던 무렵, 나는 기적처럼 서울의 경기중학교 학생이 되어 있었다. 궁벽한 산골의 농촌 소년이었지만 서울의 중학교 입시를 위해 초등학교 6학년 때 읍내 학교로 전학을 갔다. 6·25전쟁이 막 휴전으로 마감된 시절이라 끼니도 제대로 채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책상도 의자도 없는 교실 마룻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로 글씨를 썼다. 그곳에서 나는 젊고 패기에 넘치는 김갑동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모시는 행운을 얻었다. 김 선생님도 매일 정규수업이 끝나면 나를 당신의 집으로 불러 과외수업을 시켰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고 더군다나 서울로 진학하려는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과외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경제적 능력도 없었으니 물론 과외비는 없었다. 선생님은 “걱정 마세요. 얘가 이미 다 냈답니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밤이 이슥하면 그 어렵던 시절에 사모님과 선생님의 노모께서 가끔 밤참도 내 오셨다. 그때의 김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음을 나는 잘 안다.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해마다 세상이 연두색으로 변하면 스승의 날이 오고 또 그날이 되면 나는 팔순에도 아직 정정하신 김 선생님과 그때 밤참을 차려내 오시던 사모님을 찾아간다. 그때마다 밉고 무시해야 할 사람보다 고맙고 존경할 분이 더 많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고액과외가 당연해진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는 이런 감동적인 선생님이 남몰래 연두색 봄을 만들고 계시리라 확신한다.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