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 점호
방적 공장은 실내 온도가 여느 작업장보다 높다. 특히 여름에는 섭씨 40도를 넘나든다. 찜통 같은 더위는 아무리 땀을 흘리지 않는 체질이라도 작업복을 땀에 젖게 한다. 나는 땀도 적고 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인 데도 땀을 흘렸다. 특히 오후반 근무를 하는 때는 더욱 더 그렇다. 오후반은 오후 두 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을 한다. 사우나 실에서 나온 것처럼 땀에 절어 작업장을 빠져나오면 어둠속에서 뛰어와 안기는 바람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나는 이 밤이 익는 퇴근 시간의 바람을 참 좋아했다. 별과 달을 보며, 바람의 향기에 취하기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두 팔 위에 얼굴을 얹고 하늘을 보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다 잠이 들었다. 꿀처럼 단 잠이었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요, 진동 아니세요?” 기숙사는 모두 진, 선, 미, 정 네 동으로 나눠져 있었다. 진, 미, 정동은 주로 생산직에 근무하는 사원들이 있었고, 선동만이 주간 사무직 사원과 복지 시설이 구비된 동이었던 것이다. 나를 깨운 사람은 선동에 있는 사생이었다. 기숙사에는 동마다 사감이 있었고, 사감은 각 동에서 150여명의 사원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는데, 특히 우리 진동 사감 언니는 호랑이라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무서웠다.
단체 생활에는 일정한 규율이 있다. 그 규율만 잘 지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재미있는 것이 단체 생활이다. 나는 별난 아이, 혹은 이상한 아이라는 별호과 함께 사감이나 나이든 사원들 사이에는 인사 잘 하고 예의바른 아이로 불렸다. 사감이 아무리 이쁘게 봐 준다고 해도 규칙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의 일이다.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점호 시간이에요.” 어떨떨하게 잠에 취해 앉아 고개만 들고 있는 내게 그 사생이 더 걱정스런 얼굴로 안절부절 했다. 오후반 때는 밤 11시가 점호 시간이다. 이때까지 모든 기숙사생은 깨끗이 씻고, 취침 준비를 해 놓고는 인원 점검을 받는다. 이때 지적을 당한 호실은 방 전원이 외출금지를 당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을 깨달은 나는 벌떡 일어나 기숙사를 향해 뛸 자세를 취했다.
“실내화랑 앞치마도 가져가야죠.” 고마운 충고다. 급한 나머지 현장에서 신는 신발이랑 작업복이 기계에 말려 들어가는 것과 지나치게 많은 먼지를 막기 위해 입는 앞치마를 벤치에 둔채 일어섰던 것이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중앙 현관에 사감이 서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훈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동쪽 현관으로 갔다. 동쪽 현관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화장실 겸 세면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206호실이었다. 중앙 현관을 올라오면 왼쪽으로 첫 번째 방인 것이다.
일단 세면장에 신발과 앞치마를 갖다놓고, 출입문을 비켜서서 안쪽을 보았다. 각 층에는 중앙에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20개의 방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웬일인지 방에서 점호를 받는데 그 날은 모두 방 밖으로 나와 복도 양쪽으로 전 사생이 다 꿇어앉아서 점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방의 방장은 꿇어앉아서도 나 때문에 걱정에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빨리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가야했다.
단체 벌을 피하려면 그 복도 중앙으로 걸어가야만 했다. 양쪽으로 꿇어앉아 있는 사생들 가운데로 걸어가는 그 15여 미터의 거리가 내게는 얼마나 아득한 거리였는지 모른다. 방장 언니는 여전히 얼굴이 사색이다. 인원수는 결원이 없었지만 아직 작업복 차림이라 사감이 올라오면 분명히 처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언니에게 미안해 푹 고개를 숙이고 꿇어앉자마자 “그럼 명심하고 모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도록! 20분 후 불을 끈다.” 하는 사감 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 때 만큼은 어떤 소리보다 곱게 들렸다. 방장 언니가 “야!, 너 때문에 내가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다.” 하면서 눈을 흘겨도 예쁘기만 했다. “여왕처럼 하던 아까 기분이 어떻디?” 한 사람이 묻자 어느새 분위기가 즐거워져 모두 까르르 웃었다. 특별한 그날의 점호 덕분에 넓은 공동 세면장을 혼자 쓰는 특권까지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