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과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도 할 수 있는 답사.이번 10년도 춘계답사 장소는 경상북도였다.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부산인지라 그나마 고향말과 비슷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경상도 지역에 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경주에서 바로 집에 갈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잔뜩 들떴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수학여행이든 뭐든 어떠한 형태로든 지겹도록 방문했던 곳 또한 경북지역이라 과연 재미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그런 생각을 한방에 가시게 해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이다.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은 1894년 갑오의병(甲午義兵)에서 1945년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벌인 항일운동의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옛 협동학교 자리에 건립한 항일독립운동기념관. 사단법인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안동 지방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안동시의 지원을 받아 2007년 8월 10일에 개관하였다.제1전시실은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활동상을, 제2전시실은 중국으로 망명한 안동 출신 애국지사들의 활동상을, 제3전시실은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외에 특별전시실과 연수원 등을 갖추고 있다.
건물내부로 들어가면 보시는 것 같이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의 역사와 유래, 주요 독립운동가,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차례로 자세히 전시가 되어 있다.전시물에 대해 해설해 주시는 분의 얘기로 우리나라에서 단일 도시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 바로 안동이라고 한다.흔히 안동이라 하면 양반이나 보수적인 유림들을 떠올린런지도 모르지만, 일제 시절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이를 민족독립에 대한 의지를 만들어가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최초의 의병을 을미의병이라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의 출발은 1894년 갑오의병이 일어나면서 부터이고, 그 갑오의병이 안동에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로 안동이 꼽히고 있다.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왕실을 농락하고 국권을 무너뜨리는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7월에서 9월 사이에 안동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 북부 지역과 평안도 상원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를 갑오의병이라 부른다. 이중 서상철의 안동의병은 구한말 항일 의병의 효시로 평가된다.서상철이 지휘하는 안동의진은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의 태봉을 공격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태봉이 대구와 충주 그리고 서울을 잇는 병참선의 주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9월 1일 태봉에서 60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을 공략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무기를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서상철은 안동의진의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청풍 방면으로 후퇴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으로 구성된 의병토벌대에 쫓기던 중 9월 20일에 이르러 청풍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데 전시물을 따라가며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는데, 전시관에서 주요하게 소개하는 독립운동가들 중에 조선공산당 관계자들이 다수 있는 것이다.언뜻 생각하면 우리나라처럼 레드컴플렉스가 심한 나라에서 어떻게 조선공산당의 독립운동 가치를 인정해 주게 되었나 싶었다.해설가분의 설명과 함께간 선배님들의 관련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2000년 남북 정상이 만났던 615공동선언이후 남북이 각각 화해무드를 만들어 가면서 그동안 금기시 되어 왔던 공산주의 운동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몇년전 법이 새로 정비되 이제야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됐다고 한다.
자정순국자란, 국권 상실의 위기 상황에서 국가와 임금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실천한 사람을 일컫는다.그들은 항일운동의 정신적인 좌표가 되어 주변의 사람들이나 친지들이 그 뜻을 받들어 구국운동에 동참하였으며 실지로 한 일가의 며느리까지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단다.1905년~1910대에 전국의 자정순국자의 수는 약 70명에 달하는데, 그 중 안동출신이 10명이나 된다고 하니 안동 유림이 얼마나 충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협동학교는 안동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으로 1907년 내앞 현 안동 독립운동기념관 자리에 세워졌다.학교를 설립한 주역은 김인식, 김동삼 선생이고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백하구려와 가산서당이 교사로 쓰였다.1919년에 학생들이 임동면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문을 닫았다.
1911년 4월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이시영의 6형제와 이동녕·이상룡 등이 중국 지린성 류허현 싼위안바오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은 신민회의 '신'과 구국투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뜻의 '흥'을 합친 것이다.신흥강습소는 1912년 퉁화현의 합니하로 이전한 뒤 이듬해 교사를 신축하여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다. 신흥중학교는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얼마 뒤 중학반은 지방 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에 전력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오자 류허현 제3지구의 고산자가로 이전하여 신흥중학교를 발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족의 독립과 새세상을 바라던 많은 안동지역의 지식인들이 1920년대를 거치면서 대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30년대 혹독한 탄압의 시기, 대부분 만주로 떠나기도 했다만, 상당한 기간동안 그 흐름을 이어가며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으로 자리잡았다.또한 이들은 고종 서거에 맞춰 진행된 6`10만세운동을 주도해 일제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특히 권오설 선생의 경우 일제에 의해 옥사한 후 악독하게도 철관에 굳게 닫힌체 땅에 묻혔다고 한다. 얼마나 한사람의 독립운동가에게 악랄하게 굴었는지, 전시장에는 당시의 철관이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게 하고 있다.
또한 상당히 흥미로웠던 인물로, 국어 교과서에서도 자주보았던 시인이자 항일운동가 이육사가 바로 안동 출신이라는 점이였다.이육사는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청포도》, 《교목》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강인하고 굳은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은 많다.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묻힌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많다는 것을 이 곳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에서 느꼈다.후세의 우리가, 너무나도 편안한 삶을 살고있는 우리가 알던 것 보다, 느낀 것 보다,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이들에겐 나라가 중요했고 독립이 소망이였다.그런 그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안동 독립운동기념관.그 동안 수차례의 경북 방문에서 왜 이 곳을 오지 못했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참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에세이를 쓰면서, 사진을 보면서 그 때의 느낌이 떠오르며 또 다른 생각도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비록 시간에 쫓겨 제대로 구석구석 보진 못했지만 이번 여름방학에 계획하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탐방 코스 중 하나가 채워진 것 같아 그 때로 이 아쉬움을 돌리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