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광장 매점에 들러
소주 한 병에 오징어랑 땅콩도 좀 사고
찐 계란 세 알쯤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 게다.
기차가 양평을 지나면
풀잎 내음이 물바람을 타고
차창 틈새로 들어오고
원주를 지나 제천에 이르면
취기에 거나해진 몸을
등받이에 기댈 수 있을 게다.
물도 좋고 산도 좋고 인심도 좋은
영서의 자궁 같은 곳
단종의 애환이 처절한 영월엔
청령포와 장능이며 암자가 있다.
태백의 준령 구비 돌아
또아리를 틀며 오른 추전역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을 알리는
팻말이 서 있다.
큰아이의 고민 (박 남수)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에게 간식을 챙겨주며 먹으라고 하니, 포크로 사과 한 쪽을 찍어 입에 넣으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심각한 얼굴로 말문을 연다. “엄마, 왜 엄마가 내가 징그럽다고 했는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그건 내가 콧수염이 있어서 그래. 그렇지? 아기는 콧수염이 없고, 나는 콧수염이 있잖아. 그래서 징그럽다고 했지?” 녀석의 말을 듣자마자 깔깔 웃어 넘겼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엄마의 말이 오죽 마음에 걸렸으면 저런 생각을 다 했을까. 큰애가 여섯 살이었을 때 둘째를 낳아, 갓난아기를 보다 녀석을 보니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는 이제 징그러워. 엄청 커서 징그럽고, 말 안 들어서 징그럽고” 하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그게 녀석의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아들 녀석은 갓난아기 때부터 잔털이 무진장 많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등짝과 뒷목과 구레나룻까지 선명해서 가끔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엄마, 나는 왜 털이 많아? 아기는 털도 없고 좋겠다.” 한숨을 푹 내쉬는 녀석을 보니 안쓰럽고 딱하다. “아니야. 콧수염이 있어서 징그러운 게 아니라 네가 이만
큼 컸기 때문에 그런 거야. 이제 너는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란 뜻이야.” “그럼 엄마, 내가 말 잘 들으면 안 징그러워?” “그래, 안 징그러워. 멋있는 아들이지.”
“너는 좋겠다. 콧수염도 없고, 털도 없고. 나도 아기 되고 싶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아기가 되고 싶다는 녀석을 꼭 껴안아 주었다. ‘이제부턴 엄마가 너한테 좀 더 신경 쓸게’ 하고 반성을 하며 말이다.
어머니 (김 명래)
구부러진 다리와 하얗게 세어버린 당신의 머리카락. 그리고 짜글짜글한 당신의 주름살을 바라봅니다. 벌써 퍽 오랜 시간이 흘렀지요? 제가 한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린지도 어느덧 8년이 지났으니, 1993년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언젠가 시내에 다녀오시던 날, 유난히 윤기가 흐르고 빠글빠글한 파마를 한 머리카락 아래로 굵고 선명하게 빛나던 눈썹 두 개, 문신이었죠. 오빠는 저녁을 먹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숟가락을 팽개치고 나가버렸고, 발그레 달아오른 당신의 두 볼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렸죠. 사실 저도 그때 많이 당황했답니다. ‘우리 엄마가 왜 저럴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부모가 물려준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인데.’ 문신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혐오감을 느끼던 저였죠.
늘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를 대신해 여섯 남매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아주셨던 당신. 뜨거운 여름에는 뙤약볕 아래 비닐하우스 안에서 토마토와 오이를 따고, 가을이면 벼를 베고, 추운 겨울에도 나무를 하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지게를 지고 하얀 눈밭을 헤매던 당신. 옷이나 있었던가요? 늘 우리
들이 입다 버린 것을 주워서 입으시고, 당신의 양말은 늘 기워져 있었죠. 어쩌다 한번 찬거리를 사기 위해 시내에 갈 때에도 늘 맨 얼굴로 다니셨으니….
어느덧 당신의 나이는 일흔에 접어들었습니다. 낯설기만 했던 눈썹 문신은 어느새 당신 얼굴의 일부가 되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지 오래입니다. 전 왜 몰랐을까요? 당신 또한 엄마이기 전에 아내이기 전에 예뻐지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늘 꿋꿋한 대나무처럼 열심히 살아오신 당신의 모습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의 텃밭 (김 혜주)
엄마는 봄이면 오이며 참외, 토마토, 수박 등 갖가지 과일과 채소를 심습니다. 그리고는 아침저녁으로 금이야 옥이야 자식을 기르는 정성으로 키우십니다. 여름이면 우르르 몰려갈 5남매와 손자들 때문입니다. 올케는 미리 냉장고에 새로 담근 김치를 채워두고 남동생은 바쁜 일부터 미리 다 해놓습니다.
“엄마! 저희들 오늘 가요.” 전화 한 통화면 휴가 준비는 끝입니다. 엄마는 신이 나서 텃밭을 들락날락거리며 과일을 따다 나르고, 조용하던 시골집은 어느덧 북새통을 이루지요. 햇볕에 달궈진 과일이지만 썩썩 옷에 문질러 한 입 탁 베어 물면 그 맛은 꿀맛입니다. 아이들이 어서 바다로 가자고 재촉을 하면 토종닭 몇 마리를 잡고 삼겹살과 야채를 준비해 피서를 떠납니다. 아이들은 물속으로 뛰어들고 어른들은 술잔을 기울입니다. 눈대중으로 대강 양념을 하시는데도 엄마의 닭볶음탕은 맛이 끝내줍니다. 술 한 잔도 할 줄 모르시는 엄마는 얼굴이 벌게지셔서는 많이 먹으라고 재촉을 하십니다. 저녁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둥그렇게 누워 별을 바라봅니다. 어릴 때 보았던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 사자자리가 또렷이 보입니다.
해마다 휴가철이면 우리 남매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먹고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갑자기 냉장고도 부자가 됩니다. 텃밭의 ‘엄마표’ 야채와 과일들이 한 달은 너끈히 입맛을 돋우어줍니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더 많은 시간 동안 엄마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남매를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쯤 친정집 텃밭엔 엄마의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겁니다. 엄마의 기다림도 한껏 부풀어 있을 겁니다. 엄마!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아버지의 낚시 (이지연)
아버지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십니다.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생선과 씨름을 하시는 아버지의 몸에는 생선비린내가 가득합니다. 그런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입니다. 하루 종일 생선과 지내면서 지겨울만도 한데, 주말이면 낚시도구를 챙겨 근처 낚시터로 가시곤 합니다. 그렇게 고단한 일을 했으면 주말에는 좀 쉬라는 엄마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꾸역꾸역 낚시도구를 챙기십니다.
얼마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낚시터라는 곳에 가봤습니다. 아버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준비를 끝냈습니다. ‘휙’하는 소리와 함께 저만치 찌가 둥둥 뜹니다. 한참이 지나도 물고기는 미끼를 물 생각을 안 하고, 슬슬 따라온 것이 후회가 될 즈음 손바닥만한 붕어가 한 마리 올라왔습니다. “어이쿠, 첫 손님이네.” “에게, 여기 물고기는 다 영양실조 걸렸나 보네.” 내 볼멘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얼굴에는 환하게 웃음이 번집니다.
‘얼마 만에 보는 아버지의 웃음인가’ 순간 가슴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내 잡은
물고기를 도로 놓아주는 아버지에게 놓아줄 걸 왜 잡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심통을 부렸습니다. 아버지는 “생선이 지겹지도 않냐. 이제 민물고기까지 먹고 싶냐”고 하시며 껄껄 웃으십니다. 주무실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주말이면 낚시터를 찾는 우리 아버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실컷 볼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딸 노릇 잘 할게요. 쉬엄쉬엄 하세요.”
고마운 내 동생 (한 경희)
나른한 오후에 기쁜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시골에 사는 동생에게서 올 겨울이면 예쁜 조카를 볼 수 있을 거란 소식이었다. 동생은 첫돌도 되기 전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목발이 없으면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불편하다. 또래의 친구들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축구하는 것을 보면 옆에 서서 마냥 부러워하던 동생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늘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런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생은 구석에서 헤헤거리며 친구들을 열심히 응원하곤 했다. 가끔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부모를 원망할 만도 한데, 내 기억에 동생은 그런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밝게 자랐고 공부도 곧잘했으며 탁월한 유머 감각 탓에 친구들도 많았다.
대학을 졸업한 동생이 고시 준비로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던 몇 년 전, 내 결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누나가 결혼 준비로 한창 바쁠 줄 알면서도 밤이 이슥해져서야 얼굴을 내밀었다. 내심 섭섭했는데 나중에야 공무원시험을 치르고 오느라 늦었다는 걸 알았다. 고시는 나중에 또 도전하고 안정된 직업을 찾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결국 동생은 고시를 뒤로
미룬 채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작년에는 지금의 올케를 만나 행복한 가정도 꾸몄다.
동생의 삶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어려운 장애가 있어도 남들과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면 그 누구보다 값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늘 자신보다 부모님과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내 동생. 앞으로도 동생의 앞날이 늘 밝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뉴욕 아리랑님께 (권오영)
빨래를 걷으려 즐거운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가다, 옆집에서 심어 놓은 상추가 먹음직스럽게 자란 것을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전생에 원수지간은 부부로 만나고 연인은 부모 자식으로 다시 만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꼭 그랬다. 일요일에는 아버지 덥다고 마당에 석유난로를 내놓고 음식을 데울 정도로, 아버지는 할머니의 금쪽 같은 자식이었다. 옥상에 고추와 토마토를 심던 아버지가 물을 주러 갈 때면 할머니는 벌써 들통에 물을 담아서 올려놓으셨다. 올해로 예순 살인 아버지가 힘드실까 봐, 여든 살이신 할머니께서 미리 올려다 놓으신 것이다. 겨울에 감기라도 걸려 기침을 하시면 아버지가 잠을 설칠까 밤을 지새우시고는, 아버지 출근하신 후에야 자리에 누웠던 할머니. 한여름에는 집안에 사람이 많으면 아버지가 덥다고 작은아버지 댁으로 피난을 가시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작은집에 할머니가 즐겨 보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일러주고 그 시간이 되면 전화를 하셨다.
할머니는 여든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다들 호상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며칠을 아주 서럽게 우셨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자리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는 그 사이 눈에 띄게 늙어 버리신 것 같았다.
생전에 그렇게 끔찍이 여기던 자식을 두고 떠난 할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번 주말에는 할머니를 대신해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
경석에게
그동안 저에게 너무 잘 해주고 사랑해 주셔서 고마웠어요.잠시나마 저에게 잃어버렸던 사랑을 가르쳐
주어서 행복했어요.당신은 천사에요. 자기를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이제 저는 제 자리로 가야 할 때가 왔어요 당신에게서 때론 꽃처럼 때론 누나처럼
때론 동생처럼, 친구처럼 또, 때로는 연인처럼..모든 걸 다 받아주고 저를 좋아 해 주셨던 당신의 모습을
이제는 추억 속의 이야기로 잘 간직 할게요.사랑했어요. 많이많이~~~
잠시지만 제 성격이 대범하다보니 저의 모든 걸 다 보여주었어요.저에 대한 예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그 것만 간직 해 주세요.저를 많이 이해 해 주시고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사랑해요~~~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바닷가에 나가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오늘따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저 넓은 태평양 바다만 건너면 님이 계신 곳, 내가 그리워하는 한국인데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님도 바다를 좋아한다고 하셨지요? 괜찮다면 함께 바다를 걷고 싶은 작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부디 몸 건강하세요. 님이 계시기에 제 생활에 작은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언제고 한국에 가게 되면 꼭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보내드리는 립스틱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의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몇 해 전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그 분이 생각납니다. ‘뉴욕 아리랑’이라는 아이디를 쓰고 계신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은 아버지뻘 정도 되는 연세에 한국 땅을 몹시 그리워하신다는 것 정도입니다. 혼자 살다 보니 바다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던 뉴욕 아리랑 님. 기쁨과 슬픔, 아픔 모두를 다 이해해주는 고마운 친구라며, 평생 그 곁에 살다가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만큼의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살고 계시는지 잘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많이 아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에 가면 돈을 주울 수 있다? TV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해안 소초장에서 소대장 생활을 하면서 김장독 묻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하늘에 모래알이 날아다닐 정도로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부소대장은 작업이 끝나도록 저 멀리서 방황하듯 백사장을 헤매고 있었다. 내 호각소리를 듣고 돌아온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소대장님, 혹시 동전을 지폐로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한 5천 원 정도 되는데 아들 장난감 비행기 사주려고요.”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까맣게 변색된 동전들을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부소대장 왈, 모래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센 날이면 피서객들이 흘
려 파묻혀 있던 동전들이 산 모양으로 불룩 솟아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공돈이었다. 다음 날 동틀 무렵에 야간근무를 마치고 혹시 적이 침입했는지 흔적을 확인하면서 철수하는데, 정말 부소대장 말대로 까맣게 변한 100원짜리가 솟아 있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큰 파도에 아주 커다란 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바닷가로 떠내려왔다. 바닷물을 흠뻑 빨아들인 그 나무를 옮기느라 소대원들과 진땀을 뺐다. 나무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희끄무레한 종이 조각이 나뭇잎처럼 달랑달랑 붙어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게 웬일인가? 바닷물에 씻겨 초록빛이 거의 사라진 만 원짜리 지폐였다. 수고한 소대원들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인 것 같아,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사다가 나눠주었다.
남편의 생일선물 (함 지선)
여자는 호기심에 결혼하고, 남자는 어쩔 수 없어 결혼한다고 했던가. 결혼에 대한 환상을 절대 갖지 말라는 선배의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서일까. 아직 결혼 1년 차지만 우려했던 것만큼 힘들지 않고, 기대 이상으로 행복한 것에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얼마 전 내 생일날은 떠올릴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한다. 생일날 아침. 남편과 나는 전날 회식자리가 있어 과식을 한 탓에 아침밥 생각이 없다는 핑계로 미역국을 생략했다. 평소에 질리게 먹는 케이크도 생략(남편은 베이커리 회사에 근무한다)했다. 백화점 갈 시간이 없어 선물을 고르는 것도 며칠 후로 미루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생일날 아침이 이렇다 보니 조금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를 놀라게 한 신랑의 행동! 청주 친정집에 전화해서는 대뜸 “장모님, 감사합니다. 귀하고 예쁜 딸 낳아서 저한테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러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 너머로 엄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나도 나지만 이 전화 한 통화에 행복해 하셨을 친정 부모님을 생각하니, 서운
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남편에게 더없이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결혼 초보자인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하고, 안 해도 후회 안 한다’고. 대신 후회 안 하는 결혼을 위해서는 사랑과 함께 서로를 위한 배려와 믿음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