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學 道次主 姜時元 姜士元 姜洙(崔先生文集道源記書 著者) 死亡 根據
1. 갑오군정실기 국역(甲午軍政實記 國譯)
1) 1894년 음력 11월 17일, 네 번째 기사, 선봉진의 첩보
❏ 갑오군정실기 원문 429~430면 국역.
선봉(先鋒) 부대가 첩보(牒報)[1]하는 것은 곧 다름이 아니라, 진잠(鎭岑)[2] 공형(公兄)[3]의 문장(文狀) 안에, 「본(本, 진잠鎭岑) 현감(縣監)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않았습니다.[4] 전라도 김개남(金介男)[5] 포(包) 5,000여명[6]이 금산(錦山)[7] 연산(連山)[8] 등지로부터 금(今, 11월) 초10일 신시(申時)[9]경 본 읍(本邑, 진잠鎭岑)에 들어와 머무르면서 본 읍(本邑)의 여러 곳간 문과, 관아의 여러 문서와 장부와, 자문(尺文)[10] 등을 깨뜨려 부수거나 불을 질렀으며, 창고를 열어 환곡(還穀)을 탈취하여 보냈고, 읍내 집안의 살림살이들을 혹 부수거나 혹 빼앗았습니다. 유향(留鄕)의 공형(公兄)과 읍(邑)의 이속(吏屬)에 주리를 틀고 구타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낱낱이 아뢰기조차 어렵습니다. 11일 오시(午時)경 회덕(懷德)[11]으로 가면서 장차 청주(淸州)[12]로 향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정황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기에 명령하기를, “경리청(經理廳) 부영관(副領官) 홍운섭(洪運燮)은 2개 소대(小隊)의 병정(兵丁)을 거느리고 오늘 신시(申時)경 연기(燕歧)[13]로 출동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 급히 병영(兵營)[14]에 올바르게 통지하고, 멈춤 없이 상황을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2) 1894년 음력 11월 18일, 여덟 번째 기사, 충청감사 박제순의 등보
❏ 갑오군정실기 원문 439~442면 국역.
충청감사(忠淸監司) 박제순(朴齊純)이 등보(謄報)[15]합니다. ...(중략)... 진잠(鎭岑)은 본월(本月, 11월) 초10일 전라도 김개남 포(包) 5,000여명이 금산과 연산 등지에서 읍(邑, 진잠鎭岑)으로 돌입하여 관청 여러 곳을 깨뜨려 부수기에 이르러 문서를 불태우고, 환곡(還穀)을 탈취하였으며, 백성의 살림살이를 혹 부수거나 혹 빼앗았고, 유향(留鄕)의 공형(公兄)과 읍(邑)의 이속(吏屬)은 얻어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11월) 11일 출발하여 회덕(懷德)과 청주(淸州) 등지로 갔다고 하였으나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중략)... 청주는 본월(本月, 11월) 13일 새벽에 호남(湖南) 비류(匪類) 1만여 명[16]이 성(城) 밖 3리쯤까지 범하여 들어왔기에[17] 병영(兵營)의 병정(兵丁)과 일병(日兵)들이 남김없이 토벌(討伐)하고자 쫓아가 사로잡았는데 살상(殺傷)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또 진잠(鎭岑) 수관(守官) 아전(衙前)의 문장(文狀, 문첩文牒)에, 「본월(本月, 11월) 13일 전라도 김개남 포(包)가 청주를 갔다 돌아가는 길에 밤을 틈타 세찬 기세로 쳐들어 왔습니다. 이에 관속(官屬)[18] 및 읍민(邑民)들이 함께 한꺼번에 일어나 상대와 돌로써 싸워 총(銃) 31자루와 말 4필을 빼앗은즉 이에 저 무리들이 연산(連山) 땅으로 도주하였으며, 관노(官奴) 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략)...
3) 1894년 음력 11월 18일, 여덟 번째 기사, 충청병사 이장회의 등보
❏ 갑오군정실기 원문 446~448면 국역.
충청병사(忠淸兵使)[19] 이장회(李長會)가 등보(謄報)합니다. 신영(臣營)[20]의 우영관(右領官) 이용정(李容正)이 회덕(懷德)으로 출진(出陣)한 연유는 이미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계에서 아뢴 것처럼 많은 결과가 있습니다만 순찰사(巡察使)의 행차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 성(城)[21]을 수비하기에는 힘이 약합니다. 본월(本月, 11월) 12일 유시(酉時)경 문의현령(文義縣令) 조용하(趙庸夏)가 올린 첩정을 살펴본즉 호남(湖南) 비류(匪類) 몇 천 명이 당일(當日, 12일) 오시(午時)에 회덕(懷德)에서 방향을 바꿔 본 현(本縣)으로 갔다고 하였으나 헤아릴 수 없으며, 신영(臣營)과 30리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기에 별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상세히 알아보라고 하였더니 과연 적도(賊徒)가 신영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22] ...(중략)... 저 무리들은 밤새 말을 채찍질하여 달린 결과 13일 동틀 무렵에 1만여 명의 비류들이 빽빽하게 기치를 벌려 대포소리가 땅을 울렸는데, 성(城) 아래로 2리 쯤 떨어졌습니다.[23] 신(臣)이 용감하게 성 밖으로 나아가 출동한 군사들을 지휘하였으며, 정병(正兵)들로 하여금 맞아 싸워 격파토록 하였고, 기병(奇兵)들에게 협공토록 함으로써[24] 그 선봉자(先鋒者)를 쏘아 죽이니 곧 그 무리들이 후퇴하여 달아났습니다.[25] 이에 추격하여 백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매우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습니다. 적도들은 거듭 도망하여 청주(淸州) 외산천(外山川)의 민보(民堡)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민보는 산꼭대기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이미 때가 저물어 배고프고 피곤한 병사들로써 빠른 시간에 공격할 수 없다 판단하고 서둘러 성(城)으로 들어가 다시 계책을 마련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습니다.[26]
날이 밝아 삼가 듣기에, 호남(湖南)의 거괴(巨魁) 전봉준(全琫準)은 선봉(先鋒)으로 공주(公州)를 침범하였으며, 김개남은 중진(中陣)으로 청주(淸州)를 범(犯)하였고, 또 하나는 후진(後陣)으로 접응(接應)[27]한다 하는데, 오늘 깃발의 표장(標章)은 모두 중진(中陣)이었습니다. 또 변별하기를 총으로 쏘아 죽인 그 선봉 놈은 몸에 갑주(甲冑)를 착용하였으며, 능라(綾羅) 옷을 입었고, 체모(軆貌)는 지나치게 장건(壯健)하여[28] 김개남을 닮았는데, 그 놈(김개남)이 아니라면 또 하나의 거괴일 것입니다. ...(하략)...
4) 1894년 음력 11월 21일, 세 번째 기사, 충청병사 이장회의 등보
❏ 갑오군정실기 원문 472~473면 국역.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장회(李長會)가 등보(謄報)합니다. 호남(湖南) 비류(匪類)들이 외산천(外山川)의 민보(民堡)로 도망친 연유는 이미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계에서 아뢴 것처럼 많은 결과가 있습니다. 본월(本月, 11월) 14일 새벽녘에 신영(臣營)의 우두머리가 병정 및 일본 병사들과 적의 무리가 주둔하고 있던 민보의 산 아래로 가니 적도(賊徒)들이 어둠을 타서 도망쳤습니다. 이때 하늘이 밝아져 급히 뒤쫓기를 명령한즉 각 곳으로 달아나는 무리 중에 유일하게 사치스러운 교(轎)를 탄 자(者)가 중환(中丸)에 맞아 떨어져 죽었는데 신모(身貌)와 의복이 예사 적(賊)들과 달랐으며[29] 나머지 무리들은 목숨을 다하여 멀리 도망갔습니다. 계속 탐문해본즉 비류들이 지나간 곳마다 겁략(劫掠)과 방화(放火)를 하였으며, 이번에 홀로 교자(轎子)를 탄 자(者)는 그들의 거괴(巨魁)임을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30] 어제 죽은 선봉에 선 놈 또한 예사 무리가 아니고 두 거괴 중 하나는 김개남일 것입니다. ...(하략)...
5) 1894년 음력 11월 21일, 다섯 번째 기사, 선봉진의 첩보
❏ 갑오군정실기 원문 473~474면 국역.
선봉(先鋒) 부대가 첩보(牒報)하는 것은 곧 다름이 아니라, ...(중략)... (11월) 14일 행진하여 부강(芙江)[31]에 이르러 멈추고 하룻밤을 잤습니다. 계명(鷄鳴)[32]에 이르러 문의현(文義縣)에서 등짐장수 두 명이 와 해현(該縣)[33]의 명령을 받았다며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 대략을 말하자면 곧 다름이 아니라, 「청주(淸州)에서 패배를 당한 비류(匪類)들이 보이는데, 신탄(新灘) 군대의 제방 등지로 모이기를 계획하니 형편에 따라 진을 이끌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일본군) 소위(少尉)와 함께 의논하여 계획 세우기를 진영이 헤아려 나아가 무찔러 없애기로 계획하였습니다. 오늘 통장(統壯)[34] 두 진영(陣營)은 노읍(魯邑)[35]에 진을 친 비류들을 토벌할 계획으로 나아갔으며, 본진(本陣)은 이미 진잠(鎭岑) 길을 따라 신탄(新灘)으로 향했습니다.[36] 그런데 청주에서 패(敗)한 무리들이 해읍(該邑)[37]을 침범하여 상황이 시급하다는 의미가 담긴 진잠(鎭岑)의 문서보고가 들어왔기에 하루빨리 진군하여 무찌른 후 논산(論山)[38] 등지로 나아가는 날짜를 약속하겠다고 제사(題辭)[39]를 보낸 일입니다. ...(하략)...
2. 역주(譯註)
▣ 본문은 1894년 음력 11월 10~14일 상황이다. 이때 일정기간이 지난 후 작성된 보고서도 있다.
❏ 1894년 음력 11월 10일은, 갑오년 을해월 임오일, 1894년 양력 12월 6일이다.
❏ 1894년 음력 11월 11일은, 갑오년 병자월 계미일, 1894년 양력 12월 7일이다.
❏ 1894년 음력 11월 12일은, 갑오년 병자월 갑신일, 1894년 양력 12월 8일이다.
❏ 1894년 음력 11월 13일은, 갑오년 병자월 을유일, 1894년 양력 12월 9일이다.
❏ 1894년 음력 11월 14일은, 갑오년 병자월 병술일, 1894년 양력 12월 10일이다.
[1] 첩보(牒報)
서면을 작성하여 상관에게 보고하는 일.
[2] 진잠(鎭岑)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忠淸道 公州牧 鎭岑縣,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大田廣域市 儒城區 鎭岑洞)이다.
[3] 공형(公兄)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관속(官屬)인 호장(戶長),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
[4] 본(本, 진잠鎭岑) 현감(縣監)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본 항 발생 직전, 진잠 현감 이세경(李世卿)이 호서 소모사(湖西召募使)로 차하(差下)되어 공석이었다.
❏ 호서는 충청도(忠淸道, 현 충청남도忠淸南道 충청북도忠淸北道)이며, 소모사는 조선시대에 전쟁이 발발하면 해당지역의 의병(義兵) 향병(鄕兵, 민병民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금이 임시로 임명하는 관리이다.
[5] 김개남(金介男)
원문은 모두 김개남(金介男)으로 표기되었는데, 김개남(金開男)의 오자(誤字)이다.
❏ 1853년(조선 철종 4 계축) 9월 15일(임술월 정사일, 1853년 양력 10월 17일) 전라도 태인 산외이변면 정량동(全羅道 泰仁 山外二邊面 貞良洞, 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988-1번지 全羅北道 井邑市 山外面 貞良里 元貞마을 988-1番地)에서 부친 도강 김씨(道康金氏) 대흠(大欽)과 모친 익산 이씨(益山李氏) 사이에서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도강(道康), 아명(兒名)은 기선(箕先), 족보명(族譜名)은 영주(永疇), 자(字)는 기범(箕範), 호(號)는 돈헌(遯軒)이다.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활동하면서 신분 노출을 꺼려 기범(箕範)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으나,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남쪽에서부터 개벽한다’라는 의미의 개남(開南)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어 이로부터 스스로 개남(開南)으로 개명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전라도 전주부 태인현 산외일변면 동곡리 지금실 지금곡(全羅道 全州府 泰仁縣 山外一邊面 東谷里 知琴室 知琴谷, 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마을 630번지 全羅北道 井邑市 山外面 東谷里 知琴마을 630番地)로 이사하여 성장하였다. 김기범(金基範, 훗날 김개남)이 16세에 이르러 전라도 전주 구이동면 원기(全羅道 全州 龜耳洞面 元基, 본문 당시 원터元基로 불리던 동리는 1953년 1월 10일 착공하여 1963년 12월 30일 완공된 구이저수지에 수몰되었다.)에 사는 한 살 아래 15세의 연안이씨(延安李氏)와 결혼하였으나 이듬해 7월 25일 상처하였다. 후사(後嗣)가 없어 다음 해에 전라도 임실(全羅道 任實)에 사는 3살 아래의 1856년 5월 12일생(병진년 갑오월 무진일, 1856년 양력 6월 14일)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재혼함으로써 한때 임실에서 훈장(訓長) 노릇을 하였다. 둘 사이에 아들 백술(佰述)과 여식 셋을 낳았다.
김기범(훗날 김개남)이 언제 동학에 입도하였는지에 대하여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해월 최시형이 아들 양봉(陽鳳, 자字 덕기德基), 김연국(金演國), 장한주(張漢柱), 장희용(張希用)을 대동하고 호남지역에서 발생한 접주(接主)간 갈등 해소 및 순회포덕(巡廻布德)에 나섰던 1891년 5월(신묘년 갑오월) 전라도 태인 산외면 동곡리(全羅道 泰仁 山外面 東谷里)의 김낙삼(金洛三) 집을 방문하였다가, 6월에 같은 동리의 김기범(훗날 김개남) 집을 방문하였을 때 김개남이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던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이른 시기에 입도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며, 1893년 3월 18일(계사년 병진월 신축일, 1893년 양력 5월 4일) 보은 취회에서 김개남 태인포 대접주(金開南 泰仁包 大接主)로써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894년 11월 13일(갑오년 병자월 을유일, 1894년 양력 12월 9일) 청주읍성(淸州邑城, 청주성淸州城)에서 대패한 후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忠淸道 公州牧 鎭岑縣,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大田廣域市 儒城區 鎭岑洞)과, 충청도 공주목 연산현(忠淸道 公州牧 連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忠淸南道 論山市 連山面)과, 충청도 공주목 은진현(忠淸道 公州牧 恩津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忠淸南道 論山市 恩津面)과, 충청도 공주목 이산현(忠淸道 公州牧 尼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노성면 상월면 일원 忠淸南道 論山市 光石面 魯城面 上月面 一圓) 등을 거쳐 1894년 11월 30일(갑오년 병자월 임인일, 1894년 양력 12월 26일) 전라도 전주부 태인현 신내이변면 청동(全羅道 全州府 泰仁縣 山內二邊面 淸洞, 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 사승마을 全羅北道 井邑市 山內面 長錦里 四升마을)까지 쫓겨내려와 동료 3명과 함께 매부(妹夫) 서영기(徐永基)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때 이웃마을인 전라도 전주부 태인현 신내일변면 종성리(全羅道 全州府 泰仁縣 山內一邊面 宗聖里, 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全羅北道 井邑市 山內面 宗聖里)에 사는 손위 임병찬(林炳瓚, 임낙안林樂安, 1851~1916)이 김종섭(金縱燮)을 보내 그곳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산세(山勢)가 더 험하고 안전하니 송두용(宋斗鏞)의 집으로 옮기라고 하여, 김개남이 임병찬의 말을 믿고 전라도 전주부 태인현 신내일변면 종성리(全羅道 全州府 泰仁縣 山內一邊面 宗聖里, 현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702번지 全羅北道 井邑市 山內面 宗聖里 702番地)의 송두용 집으로 옮겼으나 임병찬이 고변(告變)하였다. 전라감사(全羅監司) 이도재(李道宰, 1848~1909)가 강화 병방(江華兵房) 황헌주(黃憲周, 생년미상~1895)와 전(前) 초대장(哨隊長) 박승규로 하여금 김개남을 체포토록 명령하였으며, 이들이 관군 80명과 포교 3명을 이끌고 송두용의 집으로 달려가 1894년 12월 1일(갑오년 병자월 계묘일, 1894년 양력 12월 27일) 새벽 김개남을 체포하여 다음날인 12월 2일(갑오년 병자월 갑진일, 1894년 양력 12월 28일) 전라 감영(全羅監營)으로 압송하였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한성부(漢城府)로 압송하지 아니한 채 다음날인 12월 3일(갑오년 병자월 을사일, 1894년 양력 12월 29일) 전주장대(全州將臺, 전라도 전주부 부남면 곤지리 초록바위 全羅道 全州府 府南面 坤止里 초록바위, 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산 1-9번지 초록바위 全羅北道 全州市 完山區 東完山洞 山 1-9번지番地 초록바위)에서 즉결 참수(斬首)시킨 후 김개남의 수급(首級)만을 한성부로 이송하여 같은 해 12월 25일(갑오년 정축월 정묘일, 1895년 양력 1월 20일) 서소문(西小門) 밖에 3일 동안 효시(梟示)하였다가 다시 전라감영으로 내려보내 효시토록 하였으니 향년 42세였다.
[6] 5,000여명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 5,000여 명 중 일부는 연산(連山)을 거쳐 진잠(鎭岑)으로 올라갔으며, 일부는 금산(錦山)과 진산(珍山)을 거쳐 진잠으로 올라갔다. 1894년 11월 10일 신시(申時, 15시30분~17시30분)경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忠淸道 公州牧 鎭岑縣,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大田廣域市 儒城區 鎭岑洞)에서 합류하여 머물렀다.
▣ 5,000여명에 관한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은 아래와 같다.
❏ 1894년 11월 초10일 신시(申時)경 전라도 김개남(金介男) 포(包) 5,000여명이 금산(錦山) 연산(連山) 등지로부터 진잠(鎭岑)에 들어와 머물렀습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5, 1894년 음력 11월 17일, 네 번째 기사, 선봉진의 첩보, 429~430면 국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11월 초10일 전라도 김개남 포(包) 5,000여명이 금산과 연산 등지에서 진잠(鎭岑)으로 돌입하여 머물렀습니다. (11월) 11일 출발하여 회덕(懷德)과 청주(淸州) 등지로 갔다고 하였으나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5, 1894년 음력 11월 18일, 여덟 번째 기사, 충청감사 박제순의 등보, 439~442면 국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본 항 당시 호남 동학농민군의 진군로는 아래와 같이 추정된다.
❏ 연산-진잠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 492-227책(대전大田) 492-231책(논산論山) 1914-1919년.〉
연산동헌(連山東軒)-연산리(連山里)-한림정리(翰林亭里)-중개태(中開泰)-산노리(山老里)-송정리(松亭里)-상송(上松)-천호리(天護里)-화악리(花岳里)-산직리(山直里)-농소리(農所里)-구로곡(九老谷)-두계리(豆溪里)-방동리(芳洞里)-주동(酒洞)-삼한리(三閒里)-내동리(內洞里)-진잠동헌(鎭岑東軒).
❏ 금산-진산-진잠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 492-227책(대전大田) 492-228책(금산錦山) 1914-1919년.〉
금산동헌(錦山東軒)-운치(雲峙)-양전리(陽田里)-하백리(下柏里)-하가리(下佳里)-상가리(上佳里)-송현(松峴)-탱석(撑石)-부암리(浮巖里)-가막동(可幕洞)-방축리(防築里)-진산동헌(珍山東軒)-신촌(新村)-상갑암(上甲巖)-하갑암(下甲巖)-방현리(方峴里)-우동(芋洞)-상선학리(上仙鶴里)-하선학리(下仙鶴里)-장안리(壯安里)-항동(項洞)-나정리(羅亭里)-온동(溫洞)-진평(眞坪)-삼정리(三亭里)-봉곡리(鳳谷里)--유천동(柳川洞)-금곡(金谷)-신리(新里)-한천리(寒泉里)-내동리(內洞里)-진잠동헌(鎭岑東軒).
[7] 금산(錦山)
전라도 전주부 금산군(全羅道 全州府 錦山郡, 현 충청남도 금산군 忠淸南道 錦山郡)이다.
[8] 연산(連山)
충청도 공주목 연산현(忠淸道 公州牧 連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忠淸南道 論山市 連山面)이다.
[9] 신시(申時)
조선(朝鮮)의 표준시(標準時)는 동경(東經) 127도 30분(가평-진안)을 기준한 시간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시간은 동경 135도(일본 아와지 섬)를 기준한 시간이다.
▣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한 조선의 표준시는 아래와 같다.
❏ 자시(子時) 23시30분~01시30분, 축시(丑時) 01시30분~03시30분, 인시(寅時) 03시30분~05시30분, 묘시(卯時) 05시30분~07시30분, 진시(辰時) 07시30분~09시30분, 사시(巳時) 09시30분~11시30분, 오시(午時) 11시30분~13시30분, 미시(未時) 13시30분~15시30분, 신시(申時) 15시30분~17시30분, 유시(酉時) 17시30분~19시30분, 술시(戌時) 19시30분~21시30분, 해시(亥時) 21시30분~23시30분이다.
[10] 자문(尺文)
조선시대에 국가기관에서 세금 등을 받고 증명해주던 영수증(領收證).
[11] 회덕(懷德)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忠淸道 公州牧 懷德縣,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大田廣域市 大德區 懷德洞)이다.
❏ 1894년 11월 11일 오시(午時)경 회덕(懷德)으로 가면서 장차 청주(淸州)로 향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정황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5, 1894년 음력 11월 17일, 네 번째 기사, 선봉진의 첩보, 429~430면 국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1894년 11월 11일 오시(午時)경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이 진잠(鎭岑)에서 회덕 방향으로 출발한 후 당일 신탄장(新灘場)을 거쳐 현도(賢都)에 이르렀다.
▣ 본 항 당시 호남 동학농민군의 진군로는 아래와 같이 추정된다.
❏ 진잠(鎭岑)-회덕(懷德)-현도(賢都)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 492-226책(회덕懷德) 492-227책(대전大田) 1914-1919년.〉
진잠동헌(鎭岑東軒)-내동리(內洞里)-요동(瑤洞)-원우리(院隅里)-가수원리(佳水院里)-장성리(長城里)-순평리(淳坪里)-상평(上坪)-유천리(柳川里)-하평(下坪)-용두리(龍頭里)-방축리(方丑里)-반심(盤心)-중촌(中村)-신촌(新村)-무릉(武陵)-봉촌(鳳村)-오정리 하(梧井里下)-오정리 상(梧井里上)-회덕동헌(懷德東軒)-후곡(後谷)-교동(校洞)-주현(楱峴)-입암(立岩)-죽림(竹林)-덕운(德雲)-이동(泥洞)-가작(佳作)-목하(木下)-신탄장(新灘場)-남촌(南村)-양지리(陽地里)-하척리(下尺里)-강정리(江亭里)-일옥포(日玉浦)-내삼리(內三里)-현도(賢都).
[12] 청주(淸州)
충청도 청주목(忠淸道 淸州牧, 현 충청북도 청주시 忠淸北道 淸州市)이다.
[13] 연기(燕歧)
충청도 공주목 연기현(忠淸道 公州牧 燕歧縣, 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연기면 世宗特別自治市 鳥致院邑 燕歧面)이다.
[14] 병영(兵營)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충청병사忠淸兵使)가 집무하는 충청도 청주목 남주내면 옹성리 충청병영 중영(忠淸道 淸州牧 南州內面 瓮城里 忠淸兵營 中營,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6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南門路2街 96-6番地)을 가리킨다.
❏ 충청도의 병영은 오영(五營)으로 나뉜다. 전영(前營)은 홍주목(洪州牧), 후영(後營)은 충주목(忠州牧), 좌영(左營)은 해미현(海美縣), 우영(右營)은 공주목(公州牧), 중영(中營)은 청주목(淸州牧)에 위치하였다.
❏ 고종 31년(1894) 음력 7월 30일 종2품의 무관(武官) 이장회(李長會)가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본 항에 이르렀다.
[15] 등보(謄報)
원본(原本)에서 베껴 보고하는 일.
[16] 호남(湖南) 비류(匪類) 1만여 명
본문 대부분이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과 호서 동학농민군(湖西東學農民軍)을 분별치 않은 채 뭉뚱그려 호남(湖南) 비류(匪類)로 표현하였다.
▣ 당시 청주목(淸州牧) 보은현(報恩縣) 연기현(燕岐縣) 옥천군(沃川郡)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이 문의현(文義縣)으로 집결하여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1만여 명의 호서 동학농민군(湖西東學農民軍) 내에 편제되었다.
❏ 청주목(淸州牧)은 [12]항을 참고하라.
❏ 보은현(報恩縣)은 충청도 청주목 보은현(忠淸道 淸州牧 報恩縣, 현 충청북도 보은군 忠淸北道 報恩郡)이다.
❏ 연기현(燕岐縣)은 [13]항을 참고하라.
❏ 옥천군(沃川郡)은 충청도 청주목 옥천군(忠淸道 淸州牧 沃川郡, 현 충청북도 옥천군 忠淸北道 沃川郡)이다.
❏ 문의현(文義縣)은 충청도 청주목 문의현(忠淸道 淸州牧 文義縣,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文義面)이다.
▣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은 진잠현(鎭岑縣)을 출발할 때 5,000여명이었으나, 청주목(淸州牧) 일원에 도착하니 1만 5~6천명으로 늘어있었다.
❏ 진잠현(鎭岑縣)은 [2]항을 참고하라.
[17] 성(城) 밖 3리쯤까지 범하여 들어왔기에
청주읍성(淸州邑城) 남문(南門) 밖 3리(약 1,200m)는 충청도 청주목 상당군 남주내면 석교리 남석교 대교(忠淸道 淸州牧 上黨郡 南州內面 石橋里 南石橋 大橋,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130번지 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石橋洞 130番地)를 가리킨다.
본 항 당시 무심천(無心川) 위에 남석교(대교)가 놓여 있었으나, 1906년 여름 대홍수가 발생하여 현재의 물길이 만들어지면서 남석교(대교)가 다리 구실을 못하게 되어 점차 흙에 묻혀 갔다. 1932년 일제에 의해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육거리시장(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石橋洞 六距離市場) 도로 지하에 매몰되었다.
❏ 청주읍성의 남(南)쪽 문 밖에 놓인 돌다리(석교石橋)라 하여 남(南)+석교(石橋)=남석교(南石橋)라고 하였으며, 무심천(無心川) 위에 놓인 가장 큰 다리(대교大橋, 너비 4.1m, 길이 81m)라 하여 대교(大橋)라고도 하였다. 본 항 당시 남석교(대교) 하천 옆 오른쪽에 충청병영(忠淸兵營)에서 영장(營張)이 파견되는 청주진영(淸州鎭營)이 있었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가 남석교 대교(南石橋 大橋) 하나뿐이다 보니 호서 동학농민군(湖西東學農民軍)과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이 청주읍성(淸州邑城)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남석교(대교)를 건너야 가능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 17세기 후반)』, 『여지도서(與地圖書, 18세기 후반)』, 『대동지지(大東地志, 1864)』 등에 대교(大橋)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530년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 관속(官屬)
관아(官衙)의 아전(衙前)과 하인(下人).
[19] 충청병사(忠淸兵使)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의 이칭(異稱)이다.
[20] 신영(臣營)
본 항에서의 신영은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집무하는 병영(兵營)을 가리킨다.
[21] 성(城)
본 항에서의 성은 청주읍성(淸州邑城, 청주성淸州城))을 가리킨다.
신라 신문왕 9년(689)에 처음 성(城)을 쌓았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큰 물난리로 인하여 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성종 18년(1487)에 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으며, 청주관아(淸州官衙)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으로 자리 잡았다. 1911년 일제가 시구개정사업(市區改正事業)을 추진하면서 모든 성벽의 돌들을 헐어 하수구 축대 쌓는데 쓰였는가하면 관청의 건물들이 하나 둘 헐리면서 청주읍성이 사라져버렸다.
▣ 본 항 당시 청주읍성(淸州邑城) 내(內)에 동주내면(東州內面) 남주내면(南州內面) 서주내면(西州內面) 북주내면(北州內面)이 있었다. 그 연혁은 아래와 같다.
❏ 충청도 청주목 동주내면(忠淸道 淸州牧 東州內面)이다.
「자읍동거십리면내각리영운용암금천유정신촌구암호490(自邑東距十里面內各里永雲龍岩金川有亭新村龜岩戶490) 읍내로부터 동쪽으로 10리에 이른다. 면 내 각각의 마을은 영운 용암 금천 유정 신촌 구암의 490호이다.」 청주읍성 동문(東門)을 벽인문(闢寅門)으로 불렸으며,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1가 41-12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北門路1街 41-12番地)이다. 1911년 일제(日帝)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헐어버렸으며, 1994년 문화사랑모임에서 이 자리에 남문터 표석을 세웠다.
❏ 충청도 청주목 남주내면(忠淸道 淸州牧 南州內面)이다.
「자읍남거십리면내각리원흥이현화청미평분동호451(自邑南距十里面內各里元興梨峴華淸米坪粉洞戶451) 읍내로부터 남쪽으로 10리에 이른다. 면 내 각각의 마을은 원흥 이현 화청 미평 분동의 451호이다.」 청주읍성 남문(南門)을 청남문(淸南門)으로 불렸으며,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328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南門路1街 328番地)이다. 1911년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헐어버렸으며, 1994년 문화사랑모임에서 이 자리에 남문터 표석을 세웠다.
❏ 충청도 청주목 서주내면(忠淸道 淸州牧 西州內面)이다.
「자읍서거십리면내각리내수과상연당운천호327(自邑西距十里面內各里內水果商蓮塘雲泉戶327) 읍내로부터 서쪽으로 10리에 이른다. 면 내 각각의 마을은 내수 과상 연당 운천의 327호이다.」 청주읍성 서문(西門)을 청추문(淸秋門)으로 불렸으며,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96-1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西門洞 96-1番地) 앞이다. 1911년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헐어버렸으며, 1994년 문화사랑모임에서 이 자리에 서문터 표석을 세웠다.
❏ 충청도 청주목 북주내면(忠淸道 淸州牧 北州內面)이다.
「자읍북거십리면내각리덕평사천발산호547(自邑北距十里面內各里德坪斜川鉢山戶547) 읍내로부터 북쪽으로 10리에 이른다. 면 내 각각의 마을은 덕평 사천 발산의 547호이다.」 청주읍성 북문(北門)을 현무문(玄武門)으로 불렸으며,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1가 106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北門路1街 106番地)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2가 143-3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北門路2街 143-3番地)가 연결된 지번이다. 1911년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헐어버렸으며, 1994년 문화사랑모임에서 이 자리에 남문터 표석을 세웠다.
❏ 1918년 일제가 측량한 「청주지형도(淸州地形圖)」의 청주읍성 자리에 성서정(城西町) 청수정(淸水町) 대흑정(大黑町) 시장정(市場町)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현재 지도에는 국민연금공단동청주지사 KDB산업은행 청주시청임시청사 조선면옥 청주저축은행본점 KT플라자 KB국민은행 청주성안동우체국 용두사지절당간 남궁요양병원 청주YMCA평생교육원 우리은행 한복문화거리 등이 기재되어 있다.
❏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92-6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南門路2街 92-6番地)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119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西門洞 119番地)의 2필지에 중앙공원(中央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청주목(淸州牧) 관아(官衙)가 있었으며, 1908년 6월 5일 충청북도 도청(忠淸北道道廳)이 자리하였었다. 1937년 충청북도 도청이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82번지(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上黨路 82番地)로 이전하자 그 자리에 중앙공원이 조성되었다.
[22] 호남(湖南) 비류(匪類) 몇 천 명이 당일(當日, 12일) 오시(午時)에 회덕(懷德)에서 방향을 바꿔 본 현(本縣)으로 갔다고 하였으나 헤아릴 수 없으며, 신영(臣營)과 30리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기에 별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상세히 알아보라고 하였더니 과연 적도(賊徒)가 신영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충청도 청주목 옥천군(忠淸道 淸州牧 沃川郡, 현 충청북도 옥천군 忠淸北道 沃川郡)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忠淸道 公州牧 懷德縣,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大田廣域市 大德區 懷德洞)을 거쳐 충청도 청주목 문의현(忠淸道 淸州牧 文義縣,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文義面)으로 진군하였던 과정을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주목(淸州牧) 보은현(報恩縣) 연기현(燕岐縣) 옥천군(沃川郡)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이 문의현으로 집결하여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湖西東學農民軍)에 편제되었다. 청주읍성(淸州邑城)으로부터 현 문의면행정복지센터의 거리는 약 30리이다.
▣ [22]항의 본 항 보고서 외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도 있다.
❏ 1894년 음력 11월 12일 밤 12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영장(營將)의 급보에, 「신탄(新灘)과 문의(文義) 방향으로부터 수십만의 동학도(東學徒)가 청주(淸州)를 향해 행진하여 이미 30리 남짓한 곳에 와있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2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음력 11월 12~13일에 이르러 영장(營將)이, 「동도 수만 명이 문의 신탄진 쪽으로부터 청주로 습격해옵니다.」라고 여러 번 보고하였습니다. 파견한 척후의 1894년 음력 11월 12일 밤 보고에 의하면 영장의 보고와 같았습니다. 〈『충북지방 동학도토벌(忠北地方 東學徒討伐)에 관한 보고』 1894년 음력 2월 3일, 인천병참사령관 금교지승(仁川兵站司令官 今橋知勝),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3] 성(城) 아래로 2리 쯤 떨어졌습니다.
청주읍성(淸州邑城) 남문(南門)에서 ‘성 밖 아래로 2리(=0.8km=800m)쯤’은 충청도 청주목 남주내면 석교리 일원(忠淸道 淸州牧 南州內面 石橋里 一圓,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10번지 석교초등학교 일원 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石橋洞 10番地 石橋初等學校 一圓)으로 추정된다.
[24] 기병(奇兵)들에게 협공토록 함으로써
「기습(奇襲)하는 군사들에게 양쪽에서 들이쳐 공격토록 함으로써」라고 풀이된다.
▣ 다음은 일본군 소위 구와하라 에이지로(상원영차랑桑原榮次郞)의 보고서이다.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오전 6시 보고에, 「신탄 방향으로부터 동학도가 이미 청주에서 10리가량 떨어진 곳까지 행진해 와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척후의 보고도 이와 같았습니다. 소관(小官)은 하사(下士) 이하 18명을 이끌고 청주 남문 앞에 이르러 신탄 방향에서 오는 적을 맡았습니다. 삼본 군조(三本軍曹)에게는 1개 분대 반을 인솔시켜, 청주 남문 앞에서 대략 300m 가량 되는 곳에 있는 문의가도(文義街道) 옆면의 제방에서, 문의 방향에서 오는 적을 대비케 하였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3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오전 6시 40분경 척후의 보고에, 「신탄 방향으로부터 1만 5~6천명의 동학도가 청주에서 1,500~1,600m 떨어진 곳까지 행진해왔으며, 문의방향에서 오는 동학도 약 1만여 명이 합세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우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3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소관(小官)은 즉각 청주 서남문 앞에서 600m 떨어진 고지(高地)에 잠복해서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3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오전 7시 20경 다시 삼본 군조(三本軍曹)에게 전령을 보내, 「속히 이곳에 와서 오른쪽 적을 맡으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청주성에서 500m 떨어진 곳까지 전진하여 맹렬하게 사격을 개시하며 청주성을 함락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때 충청병영군 50~60명이 정면에서 방어하고 있었으나 퇴각하기에 바빴습니다. 소관(小官)은 400m 떨어진 후방에서 적들을 내려다보며 사격하였습니다. 적이 4~5분가량 응시하다가 병기와 탄약 소 말들을 버리고 패주하였습니다. 이때 오른쪽으로 우회하려던 적 역시 신탄 방향으로 무너져 달아나고 우리 군이 이를 추격하였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3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 1만 5~6천명이 신탄 방향에서 청주읍성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며,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湖西東學農民軍) 1만여 명은 문의 방향에서 청주읍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들은 사전에 1894년 11월 13일 새벽 청주읍성(淸州邑城)을 합공(合攻)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추정되며, 마지막 관문인 남석교(南石橋, 대교大橋)를 건너기 전(前) 충청도 청주목 동주내면 영운리(忠淸道 淸州牧 東州內面 永雲里)의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127번지 청남초등학교 일원(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永雲洞 127番地 淸南初等學校 一圓)을 중심으로,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153번지 청주동부소방서 일원(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永雲洞 153番地 淸州東部消防署 一圓)과,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산 62 영운공원 일원(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永雲洞 山 62 永雲公園 一圓)에서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의 지명은 청주읍성에서 1,500~1,600m 떨어진 곳이다.
당시 일본군 소위 구와하라 에이지로(상원영차랑) 부대가 매복하였던 낮은 언덕은 충청도 청주목 동주내면 영운리(忠淸道 淸州牧 東州內面 永雲里,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 일신여자고등학교 일원 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塔洞 185-1番地 一信女子高等學校 一圓)으로 추정된다.
남쪽으로부터 남석교 대교(南石橋 大橋)를 건너면 [23]항의 현 석교초등학교(1937년 설립) 자리를 지나 청주읍성(淸州邑城)으로 향하게 되는데, 현 석교초등학교 위 언덕에 현 일신여자고등학교(1968년 설립) 자리가 있었다. 「400m 떨어진 후방에서 적들을 내려다보며 사격하였습니다.」라고 함은, 언덕 위의 현 일신여자고등학교 자리에서 언덕 아래의 현 석교초등학교 자리를 내려다보며 사격한 지형과 일치한다.
[25] 그 선봉자(先鋒者)를 쏘아 죽이니 곧 그 무리들이 후퇴하여 달아났습니다.
당시 총알을 맞고 쓰러진 선봉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일본군 소위 구와하라 에이지로(상원영차랑) 부대의 매복에 걸려 역습을 받은 호남 호서 동학농민군이 20여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병기 탄약 소 말 등을 버리고 전면 후퇴하였다. 이때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 1만 5~6천명은 신탄 방향으로,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은 문의 방향으로 각각 퇴각하였다. 이처럼 우왕좌왕 퇴각하기에 급급하였던 과정에 소수이기는 하나 본진을 찾지 못한 채 호서 동학농민군에 뒤섞여 후퇴하였던 호남 동학농민군들이 뒤늦게 문의에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26] 적도들은 거듭 도망하여 청주(淸州) 외산천(外山川)의 민보(民堡)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민보는 산꼭대기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이미 때가 저물어 배고프고 피곤한 병사들로써 빠른 시간에 공격할 수 없다 판단하고 서둘러 성(城)으로 들어가 다시 계책을 마련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습니다.
본 항은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이 청주읍성(淸州邑城)을 벗어나(밖外) 산(山)과 내(川)가 겹친 문의 방향으로 도망쳐 들어간 상황으로 「이미 때가 저물어 배고프고 피곤한 병사들로써 빠른 시간에 공격할 수 없다 판단하고 서둘러 성(城)으로 들어가 다시 계책을 마련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습니다.」라는 것으로 볼 때 전투가 벌어진 현장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임을 알 수 있으니, 1894년 11월 13일 새벽 [24]항에서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과,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이 합류하였던 장소로 추정되는 현 청남초등학교 일원(淸南初等學校 一圓)과, 공원 아래로 무심천(無心川)이 흐르는 현 영운공원 일원(永雲公園 一圓)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도차주 강시원이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의 추격에 쫓겨 외산천으로 도망하고 있을 때,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 역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몰려 있었다.
▣ 본 항 당시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의 행적은 아래와 같다.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적(敵)은 무기 탄약을 버리고 신탄진 방향으로 달아난 뒤에 다시 산상(山上)에 집합하여 방어전을 폈습니다. 〈『충북지방 동학도토벌(忠北地方 東學徒討伐)에 관한 보고』 1894년 음력 2월 3일, 인천병참사령관 금교지승(仁川兵站司令官 今橋知勝),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청주 서남쪽 고지를 점령하여 적도(賊徒)를 영격(迎擊)하였습니다. 〈『충북지방 동학도토벌(忠北地方 東學徒討伐)에 관한 보고』 1894년 음력 2월 3일, 인천병참사령관 금교지승(仁川兵站司令官 今橋知勝),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오전 8시쯤 적(敵)이 다시 청주에서 10리가량 떨어진 신탄 방향 산 위에 모여서 사격을 하기에 1시간가량 적을 막아 싸웠는데, 잠시 동학도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른쪽 산 위에서 급히 공격하다가 다시 적의 뒤쪽으로 우회하여 적이 도망할 길을 차단하기에 힘쓰니 적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는지 신탄 방향으로 패퇴하였습니다. 또다시 10리가량을 뒤 쫒으며 공격하니 적이 방어하기에 매우 급급하였으며, 끝내 감당해내지 못하고 분주히 도망하였습니다. 이때가 오전 10시 40분이었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3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우리 군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궤주(潰走) 시켰습니다. 적의 사망자는 20여 명,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병기 탄약 및 서류 등을 각각 포획하였습니다. 〈『충북지방 동학도토벌(忠北地方 東學徒討伐)에 관한 보고』 1894년 음력 2월 3일, 인천병참사령관 금교지승(仁川兵站司令官 今橋知勝),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은 [25]항 이후 신탄 방향으로 10리 퇴각하여 충청도 청주목 남주내면 미평동(忠淸道 淸州牧 南州內面 米坪洞, 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미평동 123-1번지 이마트청주점 일원 忠淸北道 淸州市 西原區 米坪洞 123-1番地 emart淸州店 一圓)과, 충청도 청주목 남주내면 산남리(忠淸道 淸州牧 南州內面 山南里, 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산남동 18번지 교정아파트 일원 忠淸北道 淸州市 西原區 山南洞 18番地 矯政APT 一圓)의 산 위로 퇴각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재차 10리를 더 퇴각하여 충청도 청주목 남이면 가좌곡(忠淸道 淸州牧 南二面 佳佐谷, 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가좌리 忠淸北道 淸州市 西原區 南二面 佳佐里)에서 오전 10시 40분까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27] 접응(接應)
호응하여 행동함.
[28] 총으로 쏘아 죽인 그 선봉 놈은 몸에 갑주(甲冑)를 착용하였으며, 능라(綾羅) 옷을 입었고, 체모(軆貌)는 지나치게 장건(壯健)하여
갑주(甲冑)는 갑옷과 투구, 능라(綾羅)는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체모(軆貌)는 차림새나 몸가짐, 장건(壯健)은 기상이 굳세고 늠름함이다.
[29] 달아나는 무리 중에 유일하게 사치스러운 교(轎)를 탄 자(者)가 중환(中丸)에 맞아 떨어져 죽었는데 신모(身貌)와 의복이 예사 적(賊)들과 달랐으며
교(轎)는 두 사람이 메는 작은가마, 중환(中丸)은 탄알, 신모(身貌)는 신체와 얼굴.
[30] 이번에 홀로 교자(轎子)를 탄 자(者)는 그들의 거괴(巨魁)임을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거괴(巨魁)는 곧 두목(頭目) 급이다. 죽음의 문턱을 오락가락하는 급박한 전투상황에 교자를 타고 출전할 정도로 위세를 떨칠 수 있는 인물은 동학교주(東學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의형제(義兄弟)이자 동학(東學) 제2인자였던 고령(高齡)의 도차주(道次主) 강시원(姜時元, 강사원姜士元, 강수姜洙) 외에 호서 호남 동학농민군을 통틀어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행위이다.
[31] 부강(芙江)
충청도 청주목 문의현 부용면 부강 부용강(忠淸道 淸州牧 文義縣 芙蓉面 芙江 芙蓉江, 현 세종자치시 부강면 世宗自治市 芙江面)이다.
❏ 1894년 11월 14일 선봉(先鋒) 부대가 행진하여 부강(芙江)에 이르러 멈추고 하룻밤을 잤습니다. 계명(鷄鳴)에 문의현(文義縣)에서 온 등짐장수 두 명이 명령을 전했습니다. 「청주(淸州)에서 패배를 당한 비류(匪類)들이 보이는데, 신탄(新灘) 군대의 제방 등지로 모이기를 계획하니 형편에 따라 진을 이끌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5, 1894년 음력 11월 21일, 다섯 번째 기사, 선봉진의 첩보, 473~474면 국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32] 계명(鷄鳴)
계명축시(鷄鳴丑時)를 가리키는데, 01시30분~03시30분에 해당한다.
[33] 해현(該縣)
본 항에서의 해현은 충청도 청주목 문의현(忠淸道 淸州牧 文義縣,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忠淸北道 淸州市 上黨區 文義面)을 가리킨다.
[34] 통장(統壯)
통위영(統衛營)과 장위영(壯衛營)을 뭉뚱그린 표현이다.
❏ 통위영(統衛營)은 조선후기 충청도(忠淸道) 경기(京畿) 황해도(黃海道) 3도(道)의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통어사(統禦使)가 주둔한 수영(水營)이다.
❏ 장위영(壯衛營)은 1888년(고종 25) 4월 설치된 3영(營) 중 하나이다. 당시 전영(前營) 좌영(左營)을 합쳐 장위영(壯衛營)으로, 우영(右營) 후영(後榮) 해방영(海防營)을 합쳐 통위영(統衛營)으로, 별영(別營)을 총어영(總禦營)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35] 노읍(魯邑)
노성읍(魯城邑)을 줄인 표현이다. 충청도 공주목 이산현(忠淸道 公州牧 尼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노성면 상월면 일원 忠淸南道 論山市 光石面 魯城面 上月面 一圓)이다.
[36] 본진(本陣)은 이미 진잠(鎭岑) 길을 따라 신탄(新灘)으로 향했습니다.
1894년 11월 14일 일본군이 대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湖南東學農民軍)을 토벌하려고 신탄을 향하여 추격하는 상황이다.
호남 동학농민군은 [26]항 이후 밤늦게 진잠에 도착하여 공방전(攻防戰)을 펼쳤으나 읍민들의 거센 저항을 이기지 못한 채 충청도 공주목 연산현(忠淸道 公州牧 連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忠淸南道 論山市 連山面)으로 패퇴하였다.
▣ 당시 상황에 관한 보고서들은 아래와 같다.
❏ 오늘 통장(統壯) 두 진영(陣營)은 노읍(魯邑)에 진을 친 비류들을 토벌할 계획으로 나아갔으며, 본진(本陣)은 이미 진잠(鎭岑) 길을 따라 신탄(新灘)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청주에서 패(敗)한 무리들이 진잠(鎭岑)을 침범하여 상황이 시급하다는 의미의 문서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5, 1894년 음력 11월 21일, 다섯 번째 기사, 선봉진의 첩보, 473~474면 국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3일 밤에 전라도 김개남 포(包)가 청주를 갔다 돌아가는 길에 진잠(鎭岑)으로 쳐들어 왔다가 연산(連山) 땅으로 도주하였습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5, 1894년 음력 11월 18일, 여덟 번째 기사, 충청감사 박제순의 등보, 439~442면 국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1894년 음력 11월 13일 오전 8시 1개 분대의 척후를 신탄방향으로 내보내 적의 소재를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신탄진(新灘津)을 건너 공주 방향으로 퇴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청주부근 전투상보(淸州附近 戰鬪詳報)』 1894년 음력 11월 14일, 소위 상원영차랑(少尉 桑原榮次郞),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37] 해읍(該邑)
본 항에서의 해읍은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忠淸道 公州牧 鎭岑縣,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大田廣域市 儒城區 鎭岑洞)을 가리킨다.
[38] 논산(論山)
충청도 공주목 연산현(忠淸道 公州牧 連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忠淸南道 論山市 連山面)과, 충청도 공주목 은진현(忠淸道 公州牧 恩津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忠淸南道 論山市 恩津面)과, 충청도 공주목 이산현(忠淸道 公州牧 尼山縣, 현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노성면 상월면 일원 忠淸南道 論山市 光石面 魯城面 上月面 一圓)이다.
[39] 제사(題辭)
관부(官府, 조정朝廷 정부政府)에서 내리는 지휘명령.
3. 출처(出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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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도』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 『광여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원문검색서비스 / 고지도
❏ 『교남공적』 / 디지털 장서각
❏ 『금산피화록』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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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방여전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원문검색서비스 /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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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아카이브 / 1차 사료
❏ 『비변사인방안지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원문검색서비스 /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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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p.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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