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을 권리
스팩과 조건을 우선으로 배우자를 골랐는데
그 배우자가 직장도 그만두고 벌이도 없어진다면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제법 공부 좀 하던 자녀가 점점 성적이 떨어져 의대는커녕 서울에 있는 대학도 가기 힘들어진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 아이가 자랑스러울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 위에 돈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가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 비판의 끝에는 그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짙게 깔려 있다.
30만원 가진 사람과 1억 원을 가진 사람이 계획하는 여행은
다를 수밖에 없다. 돈의 액수만큼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매개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 이것이 자본주의의 사회다. 성적이나 취업에 목숨 걸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큰 대가 없이도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자본주의에 맞서고 대응할 수 있는 인문학적 태도는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때이다.
한 시분 칼럼에 냉장고를 없애자는 내
용의 글을 써서 주부들로부터 공격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냉
장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거대한
크기의 냉장고를 들여놓음으로서 재래시장이 붕괴되고 있습니
다. 간단히 말해 냉장고에서 음식과 식재료를 오래 보관할 수 있
게 되면서 매일 집앞 시장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편리
하게만 생각했던 냉장고가 대재벌들이 우리에게 자본을 각인시
키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
처럼 달콤한 사탕의 모습으로 다가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세
상을 변화시킵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마구잡이 경쟁을 유발합니다. 그
래서 아이들이 스팩을 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낙오되면 자살
이라는 극단의 선택까지 하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
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현상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집에 있는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상징
인 냉장고를 없애거나 크기를 줄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
해 내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와 결부해 말
하지 않으면서 나와 내 가족이 불편하고 힘든 것에 대해서는 여
지없이 자본주의와 결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반
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둘의 양립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불
만을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본가보다 노동자 쪽이 많은 불만
을 갖고 있지요. 저는 그게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근 20년을 보면 강남 지역에는 잘사는 사람들도 많고 자본의
축적량도 많습니다. 반면 강북은 생대적으로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강북사람들의 꿈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강남 사람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자본주의
를 비판하고 자본가를 비판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비판의 끝에는
그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유괴범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유괴는
우리 사회사 아이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길 때 발생하는 범
죄입니다. 부모에게는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자식입니
다. 유괴범이 5억을 달라고 하면 5억을 주고, 10억을 달라고 하
면 10억을 주고라도 자식을 지키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요.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전에도 유괴범이 존재했을
까요? 돈을 뺏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처럼 돈 때문에 생겨나는 여러 범죄들을 자본주의 사회에
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법이 해결해줄 수 있을까요? 여
러분이 자본주의의 적극적 옹호자라면 이 문제를 한 번 해결해
보기 바랍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이와 같은 사건들은
끊임없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유산에 눈이 멀어 어머니와 형
제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우리는 그런 모습을 바
라보며 분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 모
두가 누군가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 살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문학에 있어 그 어느
문제보다 더 원칙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에세이 이런 구절이 있습
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정말 시적
인 표현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김수영 시인 이후로산문과 운문
이 동시에 되는 참다운 지성인 중 한 명이지요. 일상적인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
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
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
전에서 위험으로.“ 어떠세요? 어떤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예를들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그 순간 우리는 느낌의
세계인 동시에 위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물론 그러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집 안의 가구처럼 대화 없이 살아
가지요. 다시 사실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연애는 늘 위
험을 내포합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둘의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
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긴장되고 위험하지요. 특히 연애 초기에
는 너무 힘이 들어서 연인과 헤어져 집에 들어오면 만신창이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성복 시인의 말처
럼 느낌의 세계가 반복되면 사실로 변합니다. 옛날에는 내 가
슴을 쿵쿵 뛰게했던 사람이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집 밖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부인이나 남편을 보는 순간 그 긴장감, 쿵
쿵대던 가슴이 싸늘하게 식지요.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이다 보
니 그런 관계를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
서는 일종의 진정 효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인문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모든 예술이라는 것은 그 생
경한 느낌의 세계와 위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비밀이 있습니다. 가구처럼 살아가는 커플들은 헛살고 있
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우리는 습관처럼 집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설례는 맘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경
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연을 보러 가고, 영화를 보러가고, 미
술관 박물관 등에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렘을 느끼기 위
해서입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 그 위험에 빠지
기 위해서지요. 모든 예술, 모든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
런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본주의에 적응한, 너무나도 안전한 세계에 살
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복원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풀어
야 할 숙제입니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생수 100병이 있고 10만 원의 돈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
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10만원을 선택합니다. 무엇이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수
100병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물을 마시는 것뿐이지만,
10만원의 돈으로는 생수도 사고 또 다른 것들도 살 수 있습니
다. 이것이 자본주의입니다.
30만원 가진 사람과 1억 원을 가진 사람이 계획하는 여행
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의 액수만큼
꿈을 꿀 수 있으니, 꿈이 다를 수밖에요. 어릴적 어머님이 집
을 장만하기 위해 적금을 부으셨는데, 낮에는 저희들을 막 혼
내시다가도 밤에는 통장을 들여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
다.젊은 이들은 취업을 위해 목숨을 걸만큼 노력합니다. 왜 그
럴까요?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제 몸뚱아리 뜯어먹고 살 수
는 없는 일이니까요. 돈이 매개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 이런 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딱 하나입니다. 무조건 돈을 가진 사람
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열등한 지위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만원을 선택한 사람은 모든 가능성
과 꿈을 갖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생수를 선택하는 비장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이유 역시 돈을 벌
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테러범에게 인질로 잡혀 갇
히는 상황에 처한다면 10만원을 선택한 사람은 갈증을 달래기
위해 생수를 사먹을 수밖에 없게 되고, 생수를 선택한 사람
은 한 병도 아닌 단 한잔의 물을 10만 원에 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수를 선택한 사람 역시 목적은 돈입니다.이것이 자
본주의입니다.
훈련된 자본주의
아이들이 유괴되는 이유는 아직 자본주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교육이자 학습을 통해 훈련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명절에 어머니들이 아이에게 곱게 한복을 입혀서 어른들에게 절을 시켜 세뱃돈을 받게 합니다. 그러고는 “나중에 다 널 위해서 쓸 거야.” 하며 복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인 세뱃돈을 회수하지요. 그런데 이때 아이가 자본주의를 모르고 있다면 아이스크림 하나 물려주는 것으로도 회수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본주의의 맛을 알고 있다면 회수는 어렵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지 않은 아이들.
다시 말해 돈보다 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유괴를 당하게 됩니다. 자본주의를 알고 있는 아이는 속으로 생각하지요.‘음 내가치가 얼마나 될까? 우리집 소득수준으로 봤을 때 한 10억 정도는 투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는 유괴범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 얼마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므로 아이가 유괴를 당했다고 가정했을 때 자본주의에 입각해서 무사히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아이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괴범이 당신의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이때 딱 한 마디만 하고 끊는 것입니다. “고맙네요 잘 키워주세요.” 유괴의 논리는 유괴한 아이가 가능한 많은 돈으로 환산될 가치가 있을 때에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괴를 하자마자 부모가 이사를 가버린다든가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든가 오히려 고맙다고 잘 키워 달라고 한다면 아이는 순식간에 무가치해지면서 유괴라는 범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유괴범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먹여야지, 입혀야지 등의 귀찮은 닐만 생길 뿐이지요.
물론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것이지 실제로 부모가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유괴의 예를 들어 아이가 우선이냐, 돈이 우선이냐는 우리의 선택을 이분법적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내몰려 벼랑 끝에 서서 각자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럼으로서 돈인지, 내 아이인지 진짜로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본성과 무관하게 훈련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처음으로 아이 손에 돈을 쥐어주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오라고 시키는 일은 매우 소중한 자본주의 교육입니다.
그런데 이때 대개의 아들이 부모가 요구한 것을 사오지 못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상품의 유혹에 정신이 팔리기 때문입니다.눈에 띄는 대로 마구 물건을 사오거나 유혹을 못참고 이미 포장을 뜯어서 먹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교육이 되는 것이지요. 돈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아이는 자본주의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아이스크림 하나보다 자신의 복주머니에 담긴 세뱃돈의 가치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아이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종교적인 체계라고도 말합니다. 나무로 된 부처상을 나무토막 이상으로 보고 쇠로 된 십자가를 쇠 이상의 것으로 보는 것처럼, 알량한 종이 한 장을 종이 한 장으로 보지 못하고 그 이상의 가치로 판단하게 되면서 계종되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을 두고 게오르그 짐멜에서부터 발터 벤야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본주의의 유혹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요.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를 떠올려 보세요. 소비를 하는 동안 기분이 아주 좋지요. 돈을 쓰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내게 스타일이 좋네, 안목이 뛰어나네, 멋스럽네. 등의 말을 끊임없이 퍼부어댑니다. 소비에 대한 욕망의 바탕에는 그런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일종의 ‘주인의식’ 같은 것이지요. 돈을 쓰는 입장이 됨으로서 공주 대접, 여왕 대접, 마님 대접을 받습니다.발터 벤아민의 이야기처럼 백화점이란 곳은 자본주의를 연습시키는 곳입니다. 모든 백화점의 1층에는 명품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층으로 들어가는 여자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여자로 나뉩니다. 우리의 허영을 자극하는 시스템이지요. 백화점은 명품 옷을 입고 명품 백을 들면 자신 또한 명품이라고 착각하는 이런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가장 매력적인 곳입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과 허영 구조에 가장 근접합니다. 매트릭스 같지요.
보통 시인들이 자본주의를 ‘집어등’에 비유합니다. 집어등은 야간에 오징어나 고등어, 정어리 같은 물고기를 잡을 때 불빛을 따라 모여드는 물고기의 성질을 이용해 켜두는 등불을 말합니다. 실제로 속초에 가보면 집어등을 켜 놓은 배 가까이로 오징어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하라는 시인은 자본주의에 포획된 인간을 ‘오징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쇼윈도의 밝고 화려한 세계를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지요. 인터넷을 켜고 포털사이트로 접속하는 순간 온갖 쇼핑몰들이 집어등을 켜고 유혹합니다. 그 세계에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집어등 유혹에 사로잡혀 누나도 잡혀가고 이모도 잡혀가고 삼촌도 잡혀갔으니까요. 하지만 자본주의의 유혹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너무도 매력적으로 보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방 빨려 들어가지요. 저 옷을 사 입어야 더 멋있을 것 같고, 저 차를 타야만 더 폼이 날 것 같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낚여서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신발도 사고, 차도 사고 마구 사댔습ㄴ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사고 보니 사이즈가 안 맞는 것도 있고, 영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환불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될까요? 상품을 구매하기 전과 반대로 나는 상품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 되고 상대방은 돈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 됩니다. 당연히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지요. 돈을 쥔 쪽이 더 자유롭고 더 힘이 세니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자유는 소비의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목숨 걸고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것도, 복권의 인기가 시들지 않는 것도 한방에 강한 힘과 자유를 얻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품과 화폐라는 두 가지 관계를 이해하면 됩니다. 화폐를 가지고 있는 쪽이 우월하지요. 그렇게 봤을 때 우리는 상품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의 취업은 자본을 가지고 있는 쪽, 즉 화폐를 쥐고 있는 쪽의 요구에 맞춰스팩을 쌓은 뒤 그곳에 자신을 파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피해입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입사 시험 과목에 아프리카 소수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포함시켰다면 어떻게 될까요? 너나없이 그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혈안이 되겠지요. 관련 학우너도 줄지어 생겨날 테고요. 이것이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하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내가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우보다 타인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모두가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4.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유효했던 것은 돈만 가지면 자유로운 느낌이 들고,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 지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맘 편하게 친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남자라면 간혹 호기 있게 “오늘 내가 쏠게!”라는 말을 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귀한줄 압니다. 저 역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대학됴 때 친구한테 아낌없이 돈을 모두 써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집이 좀 부유한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나한테 술 사 주고 탯시비까지 탈탈 털어 주고는 자기는 집까지 걸어가곤 했지요. 사실 그렇게 할 수 있는 친구가 늘 부러웠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5000원 짜리나 10000원 짜리를 1000원 짜리로 바꿔서 호주머니 곳곳에 나누어서 꽂아두었던 저와는 사뭇 달랐으니까요. 친구한테 택시비를 건넨 뒤 뒷주머니에 남아있는 2000원을 만지면서 속으로 그랬지요. ‘신주야, 너는 친구 못 사귀겠다.’
1997년 IMF 이후 놀랍게도 이혼의 주된 원인이 돈 문제였습니다. 그만큼 돈이 매개인 세상이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에 들락거리는 이유가 뭘까요? 소고기를 구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명문대 나온 사람인지, 연봉은 높은지 등의 등급으로 배우자를 고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른 배우자가 직장도 그만두고 벌이도 없어지면 그래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돈의 힘에 길들여져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성적이 떨어지면 야단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 성적으로는 많은 돈을 벌 수 없으니까요. 아이의 진리 탐구를 걱정해서 성적 떨어졌다고 아이를 나무라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서울대를 보내고 의사를 시키고 싶어 하는 부모의 극성에는 어떻게든 내 아이가 많은 연봉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내 아이가 아프리카 전쟁터를 뛰어다니면서 의술을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의사가 되라고 강요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자본주의는 그런 고상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장 돈이 없으면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사람이 돈보다 위에 있을 때 사랑도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돈을 벌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합니다. 돈을 못 벌어 힘들고, 성적이 떨어져 죄절할 때일수록 더 사랑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위에 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스물다섯 살에 군대에 즐어가 육군 대위로 생활하다가 박차고 나와 주식에 투자해 많은 부를 쌓고 기업의 대표로 활동학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경매와 임대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처럼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꿈을 같이하는 수많은 직원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그릇 된 꿈인지 묻더군요.
당연히 잘못된 길입니다. 경매에 나오는 집들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방법으로 부를 축척할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체제입니다. 너무나도 돈에만 집중하느라 너무 많은 다른 것들을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업보처럼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렇게 부를 축척해서 어디다 쓸까요? 남의 눈에 피눈물 흘려가며 빼앗은 돈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요? 명품 가방 사고, 명품 차 사고, 명품 빌라 사고, 그렇게 쓰고도 남은 돈은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그것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통장에 잔고를 남기기보다 일을 하도록 해야 옳습니다. 그래야만 네 자식의 타락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반려동물들을 키우다 보면 우리는 상실이라는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강아지도 금붕어도 사람보다 수명이 짧으니까요. 그래서 오래 사는 것들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들을 돌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돈과 황금은 우리보다 오래 삽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애초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뚝 하나 박아놓고, 내 땅이라고 한다는 것은 키우는 강아지가 여긴 자기 집이니까 나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강아지는 빼앗은 집을 지키는 데 연연하느라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하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인문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획일화된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취업에 목숨을 걸고 전공에 관계없이 토익, 토플을 죽도록 공부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여유 따윈 아예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한순간도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돈을 얻기가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보다 타인의 요구에 맞춰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예 취업조차 하지 말라는 이야기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돈은 벌어야 합니다. 다만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은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원시시대에도 일은 했습니다. 공룡을 잡아 가족들이랑 나눠먹었지요. 그러므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일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ㄷ자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누군가 빼앗기고 있다는 뜻이며,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뜻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늘 제게 그러셨지요. 그렇게 만날 철학책 들여다 보고 있다고 돈이 나오느냐, 쌀이 나오느냐 하고 말입니다. 공대에 들어간 아들이 졸업만 하면 돈 좀 벌 줄 알았는데, 떡하니 철학 공부를 한다고 하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 삶의 주인입니다.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많은 연봉을 받아도 노예일 뿐이지요. 배부른 노예. 자본주의는 항상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부른 노예를 선택합니다. IMF이후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대학에서는 카프카를 논하고, 공동체를 논하고, 미래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지 않습니다.
5. 고귀한 인간성의 회복
그렇다면 이 무지막지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물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합니다.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텃 번째 방법은 취업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 어떤 대기업도 노동력 없이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도 수입을 창출해낼 소도 없으니까요. 우리가 딱 5년만 그렇게 해보자 약속하고 지키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그들이 만들어 파는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생산 과정의 고리,유통과ㅣ정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자본주의가 붕괴될 수는 있겠지만 당징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까요.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공식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지켜나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산소비협동조합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취업을 하지 않고도 버틸수 있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그게 움직임입니다. 다시 이성복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레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것에 숙달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이지요. 사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하나요? 나 역시 배가 고프더라도 참고 상대를 위해 내 밥을 내어주어야겠지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쪼르륵쪼르륵 굶으면서라도 내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실직을 하면 내가 나서서 버는 것입니다. 아이의 다리가 부러지면 평생 그 아이를 업고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 욕구에 충실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렇게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것입니다. 순리대로만, 욕구대로만 해서는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역시 그렇게 해서는 붕괴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성적에 목을 매지 않고도, 취업을 하지 않고도, 물건을 구매하지 않고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산소비협동조합이라는 구조는 이미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삶의 양식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자본주의적 생활공동체는 소비 문화가 제공하는 화려함이나 모던함과는 거리가 먼 공동체이니까요. 백화점도, CGV도 스타벅스도 없을 테니까요. 만약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이 경작한 것 혹은 만든 것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경작한 것이나 만든 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두었던 것과 교환해야 하겠지요. 물론 여러분이 당장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나중에 여러분이 수확하게 될 딸기를 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커피를 사 마시고, 휴대전화와 태블릿 PC를 사용하고, 성능 좋은 차를 타고 싶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사기 위해 취업을 하고 노예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적 유대는 조금도 나누지 못한 채 말입니다.
제가 아는 연주하는 분들 중에 '크네히트'라는 콰르텟이 있습니다. 무료로 공연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돈이 없으면 음악도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뮤지컬, 오폐라 등의 공연을 보려면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현악 4중주 같은 연주를 우리가 어디서 공짜로 들을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진짜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자본주의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냥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음악을 들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공짜로 연주를 하다보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습니다. 먹고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고구마라도 먹어야 살지요. 그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혼자서는 바이올린 연주만 하면서 살기 힘들지만 공동체가 되면 음악을 들은 사람들이 고맙다고 고구마도 주고 감자도 주고 딸기도 줍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주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지요. 자신이 연주한 곡을 듣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더 큰 전률을 느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큰 대가 없이도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잘 잡는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주면 되고, 빵을 잘 만드는 사람들은 빵을 만들어 주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연대를 이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화폐 자체를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돈은 하나의 교환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쌀가마니 지고 다니며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는 것보다 화폐가 훨씬 편리하긴 합니다. 화폐의 역할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센가 단순한 수단을 넘어서 버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장면이 먹고 싶으면 집에서 공들여 만든 스킬 자수 한마 들고가서 바꿔 먹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수놓는 일을 계속하면 되고, 우리의 후손들은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 입니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역사와 물질 문명은 다 가지고 가되 공동체에 맞게 바꿔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수력발전이든 무엇이든 있어야겠지만 원자력 발전은 아닐 것이빈다. 그렇게 과격하게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전기를 사용해 돈을 버는 장사는 없어져야 할 테니까요.
그런 인간 중심적인 사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급적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의 기본 덕목은 사랑, 연대, 공감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하나하나 만들어지면 유괴같은 범죄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항상 내일을 꿈꾸게 합니다. 도능ㄹ 더 많이 모으면 더 좋은 삶이 펼쳐질테니까요. 그러다 보니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게, 둘도 없는 친구에게 돈 한 푼 쓰는 데 인색할 수 밖에 업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원리, 사랑의 가치는 다 쓰는 데 있습니다. 반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먹고싶은 것 다 먹고 어떻게 부자가 되냐." 면서 참으라고 말합니다.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처럼 사랑은 생리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연어처럼 거슬러 오르는 일이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요. 어떤 사람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가질때 우리는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초원한다면 그것은 신의 영역에 가까운 일이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사이에 존재해야 합니다. 아담 스미스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을 동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 동물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고귀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리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 사랑, 연대, 공감입니다.
첫댓글 좋은글 고맙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 컴퓨터로 봐야겠네요.
자본주의에 지지않고 살아내려는 사람으로 공감이 갑니다.
더 많이 벌어 남다른 삶을 사는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얘기네요.
지금 이순간.
행복한지..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자유롭게 행복한 삶을 지향합니다.
감사합니다